<엘라의 계곡>(In the Valley of 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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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 감독의 <엘라의 계곡>은 2~3년 전부터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이라크전(戰) 관련 영화들 가운데 완성도 면에서나 메시지 면에서 가장 독보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다만 2007년 미국 개봉 당시 관객의 철저한 외면 속에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국내 개봉 또한 2년 뒤인 올해 십여 개 정도의 상영관에서 단출하게 이뤄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엘라의 계곡>이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퇴역군인 행크(토미 리 존스)는 이라크에서 막 돌아온 둘째 아들의 탈영 소식을 듣는다. 그 길로 아들의 부대를 찾는 행크는 곧이어 아들의 죽음 소식까지 접하게 된다.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된 것. 사건 당일 아들이 마약을 찾아다녔다는 주변의 증언이 잇따르자 행크는 그럴 리 없다며 스스로 사건을 수사하기에 이른다. 우연히 아들의 휴대폰을 손에 넣은 행크는 누군가에게 동영상 복원을 부탁한다. 거기에는 아들을 포함해 미군이 이라크에서 행했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엘라의 계곡>은 반전(反戰)영화로 분류할 수 있지만 더 정확히는 미국적 선(善)의 가치의 붕괴에 따른 망연자실함과 절망을 다룬다. 미국이 자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이라크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겠다고, 종국엔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며 벌인 전쟁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는가. 이 영화는 행크가 아들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구조로 진행되지만 한편으론 미군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를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과 맞붙은 다윗의 처지에 비유한다. 성서에는 작은 체구로 거한을 이겨낸 영웅으로 기록됐지만 실제로 다윗이 골리앗과 마주했을 때 느낀 공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의문을 갖고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이라크에 파병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맞닥뜨린 공포로 인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다.

괴물이다. 적의 심장에 총구를 겨눠야 그 순간만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전쟁터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 제 정신을 견지할 사람은 없다. 이 같은 이야기는 마이클 치미노가 <디어 헌터>(1978)에서 일찍이 다룬 적이 있다. 베트남에 참전한 젊은이들이 고문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은 주제 면에서 <엘라의 계곡>과 정확히 조응한다. 대신 <디어 헌터>가 전쟁의 참혹함을 사슴 사냥과 러시안 룰렛이라는 상징적인 게임으로 은유했다면 <엘라의 계곡>은 UCC와 유튜브 시대에 걸맞게 핸드폰 동영상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으로 제시한다.

<엘라의 계곡>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들이 괴물이 되게끔 만든 것이 누구인지, 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것이 누구인지 영화는 이를 더욱 중요시 다룬다. 영화의 감독이자 각본까지 담당한 폴 해기스(<아버지의 깃발> <007 카지노 로얄> 등에서 각본을 쓰기도 했다.)가 <엘라의 계곡>의 주인공으로 ‘아버지’ 행크를 내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행크는 첫째 아들이 걸프전에서 목숨을 잃었음에도 부인의 반대를 뿌리치면서까지 둘째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인물로 소개된다. 행크 자신이 베트남에 참전했던 군인출신인데 그는 여전히 ‘미국은 선’이라는 가치를 믿는 것으로 보인다. 아들의 죽음에도 신념에 변함이 없던 그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전쟁의 진실을 깨닫는다. 전쟁은 선을 수호하기 위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냥 ‘악’일뿐이라는 것을

행크의 마음 속 변화는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엘라의 계곡>의 답변은 단호하다. 아버지 세대는 모두 죽었다(dead)고 말한다. (둘째 아들이 죽기 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디(daddy)가 아니라 대드(dad)라고 적혀있다!) 베트남전에서의 참혹한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는 이들이 여전히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실로 보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크는 마을의 성조기를 거꾸로 건다. 위기 상황에 빠진 미국이 스스로 치유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행동이다. (거꾸로 매달린 국기는 ‘긴급구조’를 의미한다.)

대신 영화는 자식 세대에게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해서라도 전쟁의 유산을 남겨주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영화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하여’라는 자막이 뜬다!) <엘라의 계곡>은 직접적으로 이라크전을 겨냥하지만 죽은 아들의 짧은 동영상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이야기는 대부분 미국이 배경이다. 그러니까 <엘라의 계곡>은 미국 그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권고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폴 해기스의 바람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자신들의 전쟁을 옹호하고 전쟁의 참혹함에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엘라의 계곡> 같은 영화가 극장가에서 된서리를 맞은 건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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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12.21)

<노스 컨츄리>(North Country)



그 곱디고운 세숫대야를 <몬스터>에서 괴물(?)로 찌그러뜨리며 기염을 토했던 샤를리즈 테론. 그 여세를 몰아 당 영화 <노스 컨츄리>에서는 마빡, 뺨따구 할 것 없이 온통 검댕으로 떡칠하며 원 모 타임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이번에 변신한 종목은 광부. 허나 누가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그 때문에 그녀는 당 영화에서 덜떨어진 서서쏴들에게 단체로 죄인취급 받게 생겼다. 왜와이뭐땀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의 주먹을 피해 미네소타로 피신온 제시 에임즈(샤를리즈 테론 분). 쩐을 두둑이 준다는 이유로 광산에 취직하나 마초로 득시글거리는 그곳에서 그녀는 노리개감이자 서서쏴의 일자리를 강탈하는 나쁜뇬이고 회사의 기강을 해치는 똘아이. 계속되는 성희롱이 개인을 넘어 회사차원에서 이뤄지자 제시는 끝내 이들을 고소한다.


당 영화는 지난 1984년 발생한 미국 최초의 사내 성폭력 소송 승소 사건인 ‘에벨레스 광산(Eveleth Mines)’ 건을 밑밥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노스 컨츄리>는 제시가 법원에서 진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설랑 이런 꼬라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나 질문을 던지는 거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영화는 제시가 회사의 서서쏴들에게 당했던 모욕적인 일들을 진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니,


‘조개’로 불리는 것은 예사요 허구한 날 그녀의 몸뚱이는 성희롱에 속수무책이고 이에 대한 불만을 회사 측에 씨바거리면 ‘앉아쏴 주제에’ 소리나 듣고 개무시 당하기 일쑤며 이에 함께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아버지와 동성동료마저 그녀에게 등짝을 돌린다.


그러니까 당 영화의 목적은 이거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쉬쉬하고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 차별에 대한 문제를 실제 사례를 들어 이슈화하는 것. 이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단지 조직내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동료 심지어 가족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는 편견에서 더욱 상처 입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노스 컨츄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제시가 온갖 고난과 역경과 방해와 모든 조까튼 것들을 뚫고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 자신 또한 여성인 니키 카로 감독은 여기에 덧붙이길, 이것이 차별철폐의 완결형이 아닌 첫걸음,  즉 사회의 편견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여성이 연대하는 것은 물론 남자를 가르치고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영화의 마지막을 빌어 강조한다.


아쉬운 건 그런 제시의 행동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끔 영화가 과도하게 미화하는 경향이 짙다는 사실. 그녀의 행동이 박수 받아 마땅한 행동이란 건 다 아는데 굳이 제시는 절라 위대했다 만만세삘로 오바까지 할 필요 모 있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가 주는 교훈이 퇴색하는 건 아니다. 특히 성희롱 문제로 한창 시끄러운 요즘 <노스 컨츄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어이~ 딴나라당 최여니 우원. 어디 짱박혀 시간 끌 생각 하덜말고 얼렁 컴백해설랑 당 영화 보면서 조짭고 조빠지게 반성하시라!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2006. 4. 24.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