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블 데드>(The Evil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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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슈퍼히어로물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이 거대한 프랜차이즈를 마치고 그가 초심으로 돌아가 만든 <드래그 미 투 헬>(2010)은, 그래서 낯선 작품이었다. 악령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분투기라는 구식의 설정에서부터 수공업적인 분장과 코믹이 가미된 공포연출까지, 이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작품이 바로 지금의 샘 레이미를 있게 한 <이블 데드>(1982)다.

<이블 데드>의 이야기는 썩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깊은 산 속 외진 별장으로 놀러간 다섯 명의 젊은 남녀가 우연히 죽음의 책에 갇혀있던 악마를 부르게 된다. 봉인이 해제된 악마는 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대신 <이블 데드>의 진가는 저예산의 한계를 온전히 저비용 고효율의 연출로 극복하며 제작비($375,000) 대비 785배가 넘는 수익($29,400,000)을 올린 점에서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고립된 별장을 뱀처럼 공격해 들어오는 악마의 시점 숏은 샘 레이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카메라 워크다. <스파이더맨2>(2004)에서 닥터 옥토퍼스가 수술실에서 의사들을 살해할 때 등장하기도 했던 문제의 시점 숏은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도 극도의 공포를 유발하는 효과로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늘어난 촬영기간으로 배우가 다 떠난 뒤 애쉬 역의 브루스 캠벨이 1인 다역을 맡아 나머지 장면을 촬영했다거나, 그 과정에서 발목을 삔 캠벨이 바지 안에 부목을 대고 촬영을 감행한 일화 등은 이들이 뛰어난 아이디어로 열악한 환경을 이겨냈음을 잘 보여준다.

사실 샘 레이미는 특정장르에 천착하는 감독이 아니다. <이블 데드> 시리즈가 워낙 유명세를 탄 탓에 공포영화의 특정 브랜드처럼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그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실은 꽤 다양한 장르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다크맨>(1990)을 통해 안티 히어로를 다뤘고, <퀵 앤 데드>(1995)로 서부극을 연출했으며 <심플 플랜>(1998)과 <사랑을 위하여>(1999)로 각각 스릴러와 멜로의 세계에도 발을 디뎠었다.

다만 공포영화의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예컨대, <이블 데드>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도움 요청에도 겁에 질려 소극적이었던 애쉬는 <이블 데드2>(1987)에 이르러 ‘람보’를 연상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에 공격당한다는 설정은 당시 레이건 정부 하 공산권을 향한 미국 사람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물론 샘 레이미가 정색을 하고 현실 비판에 목매다는 건 아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다. 단지 주인공의 무의식을 잠식한 공포의 실체를 위해서 현실이 필요했을 뿐. 샘 레이미의 공포영화가 주는 묘미의 상당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드래그 미 투 헬>로 다시 <이블 데드>의 세계로 돌아온 샘 레이미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의 공포영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겠다. 가학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질리게 만드는 것은 내 장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구식(Old-Fashioned)의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말하자면, <이블 데드>는 이미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넘은 클래식한 공포영화다. 하지만 무늬만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작금에 <이블 데드>의 면모는 전혀 시간의 때를 타지 않은 첨단의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 <이블 데드>는 원래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이해영 감독이 선택한 영화였다. 보도(‘<록키>에서 <이블 데드>까지’)까지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필름 수급 문제로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로 대체됐다. 카탈로그에 올라갈 글이었는데 취소된 까닭에 여기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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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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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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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드래그 미 투 헬> 자기 복제를 통해 진화하는 샘 레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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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돌아왔다. 아니, 가장 자신있어 하는 영화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많은 이들이 샘 레이미의 신작 <드래그 미 투 헬>을 두고 <이블 데드> 시리즈로의 귀환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블 데드>(1981)와 <이블 데드2>(1987)는 전략을 달리한 작품이었다. <이블 데드>가 저예산의 한계를 (그 유명한 악마의 시점 숏과 특수 분장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로 극복하며 온전히 공포를 전달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었다면 <이블 데드2>는 전편보다 예산이 넉넉한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이었다.

샘 레이미는 <드래그 미 투 헬>의 연출 의도에 대해 “최근의 공포영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겠다. 가학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질리게 만드는 것은 내 장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재미있는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그런 구식(Old-Fashioned) 공포영화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드래그 미 투 헬>은 <이블 데드2>의 속편이라고 할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야기의 얼개부터 공포와 웃음을 유발하는 디테일한 묘사, 심지어는 포스터의 구도까지, 두 영화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면에서 닮았다.

<드래그 미 투 헬>의 주인공 크리스틴(앨리슨 로먼)은 인생의 사면초가에 빠졌다. 대출상담원으로서 승진할 기회를 잡았지만 동양계 동료직원과의 경쟁이 힘겹기만 하고, 촌스럽고 가난한 크리스틴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학교수 남자친구 클레이(저스틴 롱)의 엄마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차, 집을 차압당할 처지에 놓인 불쌍한 노파 가누쉬(로나 레이버)의 대출상환 연기 상담을 맡게 된다. 허나 승진 누락이 두려웠던 크리스틴은 가누쉬의 청을 거절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본의 아니게 망신까지 주게 되니. 이에 분노한 노파가 악마 라미아의 저주를 퍼붓자 크리스틴은 곧 수난의 연속에 빠진다.

<드래그 미 투 헬>은 한마디로 크리스틴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Drag Me To Hell) 악마와 이를 저지하려는 그녀의 투쟁기다. 그건 봉인에서 해제된 악마와 그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사투를 다룬 <이블 데드2>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친구와 깊은 산 속 외진 별장으로 놀러간 애쉬(브루스 캠벨)가 우연히 죽음의 책에 갇혀있던 악마를 부르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것.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는 그렇게 주인공들이 저주를 당하는 과정이나 이후 대응하는 태도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살리기 위한 샘 레이미 감독의 의도적 설정처럼 보인다. 거친 손의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치는 장면이랄지, 크리스틴이 가누쉬와의 격투 끝에 머리카락이 뜯기고 온갖 오물과 심지어는 튀어나온 눈알까지 삼키는 장면, 그리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손에 잡혀 들어가는 장면까지, <드래그 미 투 헬>은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언정 공포를 유발하는 디테일은 <이블 데드2>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샘 레이미는 특정장르에 천착하는 감독이 아니다. <이블 데드> 시리즈가 워낙 유명세를 탄 탓에 영화광들 사이에서 공포영화의 특정 브랜드처럼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블 데드>를 접하지 못한 팬들 사이에서 <스파이더맨>의 성공 이후 그는 또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샘 레이미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그가 실은 꽤 다양한 장르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다크맨>(1990)을 통해 안티 히어로를 다뤘고, <퀵 앤 데드>(1995)로 서부극을 연출했으며 <심플 플랜>(1998)과 <사랑을 위하여>(1999)로 각각 스릴러와 멜로의 세계에도 발을 디뎠었다.

다만 샘 레이미에게 공포영화의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추정된다).

<이블 데드>와 <이블 데드2>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코미디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 외에도 전편에서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애쉬가 굉장히 과감한 저항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그것은 단순히 악마와 맞서는데 적극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을 은유하는 장치로써의 적극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블 데드>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도움 요청에도 겁에 질려 소극적이었던 애쉬는 <이블 데드2>에 이르러 ‘람보’를 연상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팔에 전기톱을 들고 머리띠를 두른 모습은 영락없는 람보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에 공격당한다는 설정은 곧 당시 레이건 정부하의 미국을 상징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애쉬의 저항은 곧 공산권을 향한 미국민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크리스틴이 느끼는 공포 또한 현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크리스틴이 라미아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그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가 있다면 그저 남자친구에 어울리는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부지점장이 되려는 목표 하나로 상사의 지시에 따라 노파의 청을 거절한 것뿐이다. 물론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노파의 대출상환 연기를 승인했더라면 저주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올발랐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녀에게 도덕적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것.

시골 출신으로, 여자의 몸으로, 더군다나 미국 내 동양인의 지위 상승에 따라 과거의 영광을 잃은 백인으로써 크리스틴이 현실에서 넘어야 할 장벽은 너무나 높다. 그건 가누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너무나 견고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도 얻기 힘든 노인의 몸으로 신용불량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대출기한연장을 거절당한 그녀는 죽고 만다!) 다만 자본주의가 생색조로 흘린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짓밟는 수밖에 없다. <드래그 미 투 헬>이 크리스틴과 가누쉬의 대결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샘 레이미가 정색을 하고 현실 비판에 목매다는 건 아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다. 단지 주인공의 무의식을 잠식한 공포의 실체를 위해서 현실이 필요했을 뿐. 샘 레이미의 공포영화가 주는 묘미의 상당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공포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아서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 간의 차이를 살피는 건 곧 시대를 통해 장르의 내적변화를 살피는 것과 같다.

<이블 데드2>에서 애쉬는 결국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악마의 손에 이끌려 중세시대로 뚝 떨어졌다.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애쉬에겐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중세시대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돌아간 곳은 미래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다. 지옥으로 끌려가자마자 영화는 끝.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그렇게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프레시안
(2009.6.18)

거대 로봇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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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트랜스포머’ 인간이 스크린을 주름살 잡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은 갔다. 2년 전 거대 로봇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던 <트랜스포머>가 다시 한 번 스크린을 정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다. 이에 맞서 작은 규모의 영화로 중무장한 인간들의 역습도 만만치 않은 전차로, 6월은 가히 ‘다윗vs골리앗’의 대결이라 할만하다.


절대강자 <트랜스포머2>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6월 25일 나 홀로 개봉할 정도로 일찌감치 2009년 상반기 기대작으로 자리 잡은 터. 전편에서 만화 상에만 존재하던 로봇들이 뿅~ 실사로 구현돼 많은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탕에 빠뜨렸던 만큼 벌써부터 로봇들의 사자후가 전 지구에 울려 퍼지누나. 

<트랜스포머2>는 오토봇과의 로봇전쟁에서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 ‘다구리’ 당한 디셉티콘이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디셉티콘은 나쁜 로봇 놈들을 규합해 좋은 로봇 분들과 전쟁을 펼치니, 1편에서 12놈이었던 트랜스포머가 2편에선 40놈으로 늘어났단다. 싸우는 장소도 미국을 넘어 상하이에, 파리에, 이집트의 피라미드까지 전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바, <트랜스포머2>는 전편보다 더 많아진 로봇들이 더더 거대한 전쟁을 펼치는 더더더 똥꼬 긴박한 상황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렇게 로봇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판을 치는 형국이라 샤이어 라보프와 메간 폭스 등 우리의 비정규 인간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할 일이 많이 줄어들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림이다. 갈수록 설 자리를 잃는 작금의 일자리 위기를 반영하듯 <트랜스포머2>는 1편에 비해 더욱 어두워진 비전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다만 로봇들이 막간을 이용해 연료를 보충하는 동안 마이클 베이 감독께서 쭉하고 빵한 메간 폭스의 몸매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특별히 마련해 인간 배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고. 단, 가족영화라 수위 조절이 이뤄졌다고 하니 서서쏴 관객들이여, 과도한 기대는 금물!


작은 영화의 역습

볼거리 면에선 비할 바 못 돼지만 작품성 면에선 <드래그 미 투 헬> <로나의 침묵>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 <트랜스포머2>를 약 깻잎 1.2장 차이로 능가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메가폰을 잡은 등골 오싹하고 오줌 찔끔하고 모골 송연한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모아진다. 벨기에 영화 <로나의 침묵>은 예술영화계의 지존무상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란 점에서,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은 <친절한 금자씨> 이후 오랜 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홈한 최민식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입장료 투자가 아깝지 않은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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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6월호)

그리고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를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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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전성시대다. <아이언맨>으로 출발한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인크레더블 헐크> <원티드> <핸콕> 등을 거쳐 현재 <다크 나이트>로 정점을 찍고 있는 추세다. <아이언맨>은 국내 개봉과 함께 2주 연속, <원티드>와 <핸콕>은 일주일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슈퍼히어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다크 나이트>의 흥행 기세는 놀랍다. 미국에서 <타이타닉>에 이어 역대 흥행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더니만 한국에서는 4주 연속 관객동원 1위를 차지하며 여차하면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세웠던 5주 연속 1위도 넘볼 태세다.

슈퍼히어로물의 기세는 이게 끝이 아니다. <헬보이2: 골든 아미> <왓치맨> <스피릿> 등과 같은 기대작들이 개봉 대기 중에 있을 뿐 아니라 작금의 유행을 타고 <플라스틱맨> <그린 애로우> <퍼스트 어벤져: 캡틴 아메리카> <저스티스 리그> <토르>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슈퍼히어로물이 제작을 앞두고 있어 그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만큼 슈퍼히어로는 최근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요, 탐내는 소재라 할만하다.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이 얻은 성과는 비단 폭발적인 인기에만 있지 않다. 불과 1년 전의 슈퍼히어로와 비교하더라도 올해 등장한 슈퍼히어로물은 장르가 품고 있는 내적인 논리 면에서나 허구를 다루는 형식적인 면, 그리고 그 속에 침전한 정치적인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점에서 변화한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영웅의 능력을 부여받거나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 과거의 슈퍼히어로와 달리 2008년의 슈퍼히어로는 만들어지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제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하늘이 점지해 주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돈’이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와 같은 가난한 고학생 슈퍼히어로는 올해 들어 대기업의 ‘회장님’들로 환골탈태(?)했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와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이 대표적이다.

토니 스타크는 대형군수업체 CEO. 신무기 홍보차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살상용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후 세계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니. 천재적인 과학적 지성과 자본을 바탕으로 슈퍼히어로 ‘아이언맨’이 된다. 브루스 웨인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복수를 목적으로 초인적 존재로 거듭난다. 아버지가 물려준 천문학적 재산과 마음속에 도사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켜 고담시를 지키는 ‘밤의 기사’가 된 것.

두 영화와는 다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와 <핸콕> 역시 이해 가능한 논리가 슈퍼히어로 탄생 과정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슈퍼히어로로 기능한다. 예컨대, <인크레더블 헐크>의 브루스 배너는 헐크로 변신하는 자신의 분노를 치료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 분노를 억제하는데 성공한다. 이안이 만들었던 <헐크>(2003)가 감마선 실험의 실패로 헐크가 된 것과 비교,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제 슈퍼히어로의 탄생이 이성(혹은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텍스트가 됐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핸콕>의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슈퍼히어로가 백인 일색이었다는 점에 비춰 흑인 슈퍼히어로 <핸콕>의 등장은 이제 슈퍼히어로가 백인의 영역을 넘어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 사례다.

이렇게 슈퍼히어로가 현실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만화를 연상시키는 허구적인 묘사를 벗어나 사실주의에 기반 한 형태로 변모한 것. 그에 따라, 인물의 내적 고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됐고 세트 차원에서 머물던 공간 묘사는 현장 로케이션으로 그 범위를 넓혔으며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의 활용 역시 느와르와 범죄물로까지 나아가며 더욱 더 현실적인 모습을 취하게 됐다. 허구의 세계를 맴돌던 과거 슈퍼히어로물이 캐릭터의 수와 이야기의 규모, 무엇보다 기술적인 면에서만 진화를 꾀한 것과 비교하자면 실로 획기적인 변화다.

그 시작은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 있었다. 허구의 이야기에 사실주의를 접목한 <배트맨 비긴즈>는 전례 없던 형식의 진화를 꾀하며 새로운 슈퍼히어로물의 전범이 됐다. 그때부터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슈퍼히어로물의 영화적 재미를 떠나 변모한 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그건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슈퍼히어로물을 준비 중이던 관계자들도 <배트맨 비긴즈> 이후 이 영화의 성과를 어떤 식으로 반영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슈퍼히어로물은 늘 진화해왔다. <배트맨 비긴즈>도 의심의 여지없는 진화의 한 사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주의(realism)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좀 더 기다려 봐야할 것 같다.” 당시 <스파이더맨 3>를 준비 중이던 샘 레이미 감독의 말이었다.

그에 대한 답변은 2008년에 이르러서 밝혀졌다. 그것은 물론 <배트맨 비긴즈>를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이뤄졌다. 속편 <다크 나이트>는 사실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심화를 꾀해 전편의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심화를 이룬 부분에는 명백히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크 나이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배트맨의 명성이 더 강한 적을 부른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9.11 이후 ‘적’을 소탕하겠다며 전쟁을 일상화한 미국이 더 큰 재앙에 직면한 현실세계의 정치학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겹쳐진 <다크 나이트>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공교롭게도 <다크 나이트>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이언맨>에서도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미국의 정치학을 감지할 수 있다. 극 초반 등장하는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9.11의 주범으로 지목한 빈 라덴을 제거하겠다며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곳이다. (1963년 선을 보인 원작만화에서는 베트남이었다!) 영화는 이곳을 배경 삼아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응징하고 약자를 지킨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구축하며 전쟁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은 미국 주도하의 국제 정세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반영한 알레고리로 작용해왔다. 하여 슈퍼히어로의 진화는 흥미롭게도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이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있어왔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 공식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1978년 작품 <슈퍼맨>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강한 미국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이에 영향 받은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물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를 적으로 상정해 무찌르는 ‘미국 만만세’ 영화로 전락(?)하며 지극히 단순화되어갔다.

이에 변화가 생긴 건 9.11을 전후해 슈퍼 국가 미국의 위상에 의문부호가 달린 2000년대부터다.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등과 같은 비주류 성향의 감독들이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 슈퍼히어로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9년 등장한 팀 버튼의 <배트맨>은 이런 흐름의 시초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건데 너무 앞서간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우리의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주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 아닌 타자였으며 돌연변이였고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특히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이전에 없던 슈퍼히어로에 대한 내적 고민을 구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징후적이었다. 스파이더맨은 미국의 평화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에 앞서 자신조차 추스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였고 변변한 일거리도 얻지 못하는 백수신세였다. 그렇게 미국은 외부의 적에만 신경 쓰는 사이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슈퍼 파워에 대한 강한 의문부호가 따라붙었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맨>과 <다크 나이트>는 그에 따른 고민의 결과가 각각 어떤 형태로 구체화됐는지 잘 보여준다. <아이언맨>은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고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토니 스타크의 결심에 불만을 품은 오베디아 사장과의 마지막 대결!) 슈퍼히어로의 역할을 긍정했다. 그에 반해 <다크 나이트>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적의 정체(극중 조커는 ‘악’일뿐 그 어떤 부연설명도 없다!)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어둠의 기사’라고 명명하곤 현실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다. 이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어진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허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리얼리즘을 끌어와 또 한 번의 진화를 꾀했다. 9.11 이후 미국 사람이 체감하는 불안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

슈퍼히어로물은 어느 날 갑자기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변화에 맞춰, 그에 따른 장르의 역사가 쌓이면서 그렇게 자가 증식해왔다.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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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404호
(2008.9.9)

<스파이더맨 2>(Spider-Man 2)


‘형 만한 아우 엄따’며 이 바닥을 호령했던 불문율은 올해 <슈렉2>에 이어 지금 소개할 <스파이더맨2> 앞에서도 또 한 번 무참하게 명함 일 장 못 내미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음이다. 한마디로 당 영화, 여러 모에서 능히 전편을 능가할 정도로 잼나다는 본 특위의 말씀.

일단 당 영화는 1탄처럼 영웅 스또리 뿌라스 성장 영화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옆집 쭉빵걸에 발정 난 십대’s Way와 스파이더 맨이라는 영웅’s Way에서 절라게 번민하던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 분)는 당 영화에서 루저로서의 남루칙칙한 일상과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한 스파이더 맨 노릇사이에서 대구빡 터지게 고뇌한다.

이처럼 당 영화는 속편이라고 해서 풍선껌 부풀리듯 안일하게 스케일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과 비범, 두 갈래 인생극장의 기로에 선 쥔공의 고민을 집중 공략, 이야기와 캐릭터에 더욱 깊이를 더하는 것은 물론이요, 현실친화적인 영웅이라는 정체를 더욱 확고부동히 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2>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뭣보다 장면장면의 연출에서 보여지는 재미가 훨 쏠쏠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1탄에서 전혀 샘 레이미스럽지 않다는 겐세이 세례가 여린 맘에 상처를 준 탓인지 당 영화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지 영화라는 티를 팍팍낸다. 일명 ‘오징어 박사’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 분)의 경우, 생긴 꼬라지라든지 서식하는 지역, 하는 짓 등은 의심의 여지없이 <다크맨>의 2004년 버전이고, 닥터 옥의 사지절단 장면에서는 공포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답게 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블데드>의 수전증 걸린 시점샷? 당삼 나온다.

물론 왕년에 샘 레이미 영화 못 봤어도 상관없다. 매력 만점의 나쁜놈 캐릭터 닥터 옥이 펼치는 활약과 피터와 MJ(커스틴 던스트 분)의 삼삼한 러부, 심지어는 쫄쫄이 유니폼을 가지고 펼치는 자해수준에 가까운 개그 등 괄약근을 농락하는 스파이더 맨 퍼레이드가 여러분을 지둘리고 있으니까.

주목할 점은 전편의 촬영이 곤두박칠치는 스파이더 맨의 상하 움직임을 강조했다면 당 영화는 시계불알처럼 이 건물 저 건물 옮겨다니는 좌우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스파이더 맨이 브레이크없이 질주하는 지하철을 멈추는 장면이나 닥터 옥이 자동차를 패대기 치는 장면처럼 액숀씬은 대부분 좌우로 길게 늘어뜨려 구성했는데 그럼으로써 굉장히 션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암, 여름철 영화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확실히 <스파이더맨2>는 이야기도 그렇고, 똥꼬 옴쭉달쭉한 액숀까지 대박영화 속편 성공전략은 단순히 스케일에 달려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다고 당 영화가 무결점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악독하게 굴던 닥터 옥이 나쁜놈으로써 응당 지켜줘야 할 ‘쥔공에게 극적으로 져주기’ 압박을 견디다 못해 막판 싸대기 몇 대에 버럭 어린 양이 되어 회개하는 장면, 이거 민망했다. 게다가 이것저것 얘기하느라 스파이더 맨의 활약상이 영화 시작 1시간이나 지나야 펼쳐진다는 점, 성미 급한 관객은 필히 주지하시라.

하지만 당 영화는 말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본 특위는 이렇게 수정한다, 대박영화에는 대박급의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고. 그리고 당 영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그 책임을 완수하고 있으니 본 특위 입장에서 어찌 베스트 주녀의 등급으로 보답 안 해 줄 수 있으리요.

확실히 올해는 <슈렉2>도 그렇고 당 영화까지 속편이 아주 풍년이다, 풍년.


<딴지일보>

<스파이더맨>(Spider-Man)




“당 영화의 정체는 무엇인가?
진정 그것을 알기 원하는가?

누군가 당 영화를 향해 돈만 댑따 쏟아부은
그저 그런 블락빠스타 무비라고 설레발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뉴욕의 마천루를 무대로 한 <스파이더맨>의 휙휙 줄타기와 공중 13회전 그네 타기, 무지막지한 번쩍 착지 필살기로 도배가 돼있는 예고편은 개봉도 하기 전부터 당 영화를 올 여름 시장의 주인공으로 입도선빵하기에 매우 충분한 것이었다 사료된다.

그런 화려번쩍기예스런 맛배기는 논외로 치더라도 만화와 외화시리즈를 통해 이미 울 마음 속 똥꼬 알알한 추억의 얼굴로 자리잡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은 이산가족 상봉의 그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가 연출을 맡는다고 했을 때의 본 검열-MAN 심정은 당 영화의 개봉에 맞춰 입장료 7,000원 갖다 바치기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삐대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물론 먹고 싸기 조카튼 울덜에게 미제산 <스파이더맨> 나부랭이 따우를 왜 영화로 만드는지, 누가 감독하는지 뭔 소용이 있겠냐마는 당 영화에 바라는 바, 직장 상사의 씨바거림으로 축적됐던 스트레스를 한큐에 뚜레뻥해주고 여친과의 빠굴 전 작업 모색의 일환으로 분위기 UP해주는 그런 거 아니었겠냐.

그래서 2시간여에 걸쳐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벗겨본 결과…

예고편에서 보여준 화려번쩍기예스런 장면들은 매우 볼 만하다만 이야기 전개에 있어선 말짱 꽝이라는 것이 본 검열-MAN의 최종입장이다.

잘 알다시피 만화가 원작인 당 영화는 고등학생으로 짐작되는 10대의 피터(토비 맥과이어 분)가 유전자 조작 거미에 기습 쏘임 당해 <스파이더맨>이 되는, 본 검열-MAN의 입장에선 매우 배알이 꼴리는 일종의 영웅스토리이다.

하지만 당 영화는 <스파이더맨>의 선배격되는 <슈퍼맨>, <배트맨> 류의 영웅이야기와는 매우 다른 설정을 가지고 있다. 그덜이 우주에서 떨궈진 외계인, 돈 많은 부모를 둔 덕에 떵떵 거리는 갑부집 자식과 같이 범접하기 힘든 신분인 것과 달리 피터는 울덜이 반드시 겪은 적이 있는 아니면 지금 겪고 있는 평범한 10대 학생인 것이다.

그래서 피터는 당 영화에서 숙명으로 점지받은 전 지구적 대의로 번민에 휩싸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옆집 쭉빵걸 함 꼬셔 볼까 그런 실존적인 고민에 빠져 거미에게 물려받은 능력을 엄한 데 쏟아 붓는다.

물론 벽타고 줄타고 공중그네 도는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철없는 10대인 관계로 묘기 과신에 날 세는 줄 모르던 피터는 삼촌의 죽음을 계기로 드디어 자신이 나아갈 영웅’s Way를 깨닫고, 그때부터 고무장갑스런 스판쫄쫄이를 입고 도시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참고로 작업복을 입은 <스파이더맨>의 후복부 하단 낭심부위를 자세히 보면 자쥐가 불쑥 튀 나와있으니 앉아쏴 관객덜은 관람에 참조하시라. 거 물건 한번 튼실하데…

각설하고, 이렇듯 당 영화의 전반부는 성장기 영화와 진배없다. 그런데 문제는 감독 샘 레이미가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전반부 동안 청소년들이 겪게 되는 부모 부재의 문제 건드려야지, 계급문제도 들쑤셔 줘야지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당 영화의 주제도 드러내야지, 무엇보다 <스파이더맨> 출현의 당위성도 낑궈야지 판 벌리기에 존나게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다.

원작에 충실하겠다는 의도야 모르는 바 아니다만, 그러다 보니 당 영화의 전반부는 <스파이더맨>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음에도 무려 1시간 이상을 잡아먹는다. <스파이더맨>이 줄창 나온다고 미리 예상때리고 관람에 임했단 심히 곤난하다는 야그 되겠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의 본격적인 나쁜놈 퇴치작전이 펼쳐지는 후반부에는 스파이더맨의 영웅적 면모, 그린 고블린(윌렘 데포 분)과의 결투와 같은 중심 스토오리가 연관성을 갖지 못한채 따로국밥을 이루니 당 영화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매우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동춘 서커스 기예가 빛을 발하는 후반부는 컴터 그래픽 난무, 휙휙 공중부양 일색을 기대했던 관객의 똥꼬를 애무하기에 매우 충분타.

특히 63빌딩은 명함 일 장도 못 내미는 높이의 빌딩 사이를 가르고 평점 10.00의 가뿐한 착지로 마무리 짓는 스파이더맨의 액숑은 그 CG(만화적인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컴퓨터 애니메이숑 처리)장면 하나만으로 7000원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음이다. 그 속도감이 눈으로 훤히 보일 정도라 쟤가 저러다 스크린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게 아닌가 걱정까지 든다니까.

주최측은 이를 두고 ‘<매투릭스>, <가락지의 제왕>도 보여주지 못했던 SFX 공간 혁명’이라 스스로 똥꼬 애무하느라 매우 노력하는 눈치다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러면 정글을 무대로 줄타기의 미학을 처음으로 선보이셨던 <타잔> 옹은 지금 이 시점에서 공간 혁명의 창시자로 재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라 사료된다.

이외에 당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의 특징은 소재가 거미인지라 거미의 감각을 최대한 활용한 액숑 장면과 또 하나는 액숑 동작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체에 밀착한 촬영을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거미마냥 적을 앞에 두고 움츠리고 있는 장면이라든지 거미줄에 대롱 까꾸로 매달려 있는 장면 등은 거미와 매우 흡사하여 피터의 거미스런 행동이 결코 오바질이 아닌 자연스런 현상임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액숑 촬영은 주로 동작시점에서 적용되므로 스파이더맨의 빠른 움직임이 몸으로 확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레슬링 장면에서의 쌈박질 신 같은 경우는 그 박진감이 하늘을 찌른다…고 하면 좀 그렇고 우짰든, 시원타.

이와 같은 시각적 연출이 바로 샘 레이미가 당 영화의 감독으로 낙점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리고 샘 레이미가 <이블데드>에서 선보인 기관총마냥 연발되는 긴장감있는 화면과 스피디한 카메라 기법은 블록 빠스타 무비의 제1조건이자 마천루를 누비는 <스파이더맨>의 속도감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임은 말할 필요두 없구.

사실 당 영화의 감독을 맡은 샘 레이미는 이야기 진행에 그닥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이름을 만 천하에 알린 <이블데드> 시리즈를 함 바바라. 그 영화는 결코 이야기가 훌륭해서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이 아니다. 쉴틈 없이 몰아치는 피칠갑 장면, 뱀같이 빠르게 기가는 카메라 꽁수로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그 확 가는 스타일이 샘 레이미가 여지껏 영화판에서 굴러먹을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메이저리그로 올라와 <다크맨>을 제외하곤 <이블데드> 시절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몬 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었던 건, 자신의 특기를 더욱 심도있게 파고들지 못하고 되려 이야기적인 면에 더 치중하다보니 나온 결과이다.

여자가 총잡이라는 거 외엔 별 감흥없는 <퀵 앤 데드>, 퇴물 배우 캐스팅하여 뻔한 야구영화 만든 <케빈 코스트너의 사랑을 위하여>, <파고>랑 흡사한 <심플 플랜>, 글고 소재는 좋아 보이지만 뭔 소린지는 잘 모르겠는 <기프트> 등등등.

결국 이야기 구성은 미흡하고 시각적 연출에 탁월한 샘 레이미의 특징은 당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결과론이지만 계속적인 실패에 빠져있던 샘 레이미가 당 영화를 통해 예전의 명성을 확인하고 싶었다면 이야기의 비중을 좀 더 줄이고 액숑에 더 치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이 점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에 바라는 관객의, 제작자의 마음이기도 하고.

다시 함 결론 때려보자.

당 영화는 샘 레이미의 장점과 단점이 하얀 이빨에 낑궈있는 고춧가루처럼, 본지와 좃선의 도덕성마냥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뮝기적한 영화다.

그래서 현란한 액숑을 기대하는 자에게는 <스파이더맨>의 거미 액숑이 한치의 의심도 없는 베스트가 될 수 있다. 동심의 영웅을 영화로 알현하고 싶은 자 역시 당 영화는 베스트일 거다.

비유띠, 벗뜨, 하지만 그 이상의 거시기한 것, 가령 짜임새있는 이야기같은 거까지 바랬다간 큰 좃 다칠 수 있음이다.

그러니 이 점 유의하시고 당 영화의 가면을 벗기도록 하시라.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