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삼색의 작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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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지만 이 세계에는 엄연히 그런 분류법이 존재한다. 그래서 예술영화는 상대적으로 관객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술영화에도 화제작이 존재한다. 10월의 개봉작을 살펴보면 그렇다. 지금 소개하는 3편의 작품은 여느 상업영화보다도 더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비우티풀>(10/13 개봉)은 <21그램>(2003) <바벨>(2006) 등으로 이름을 알린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새로운 영화다. 이냐리투는 에피소드식 전개를 통해 다국적 언어와 문화로 이뤄진 영화 만들기를 즐겼는데 이번엔 그런 트레이드마크를 버렸다. 매번 세계 각지를 돌며 그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권의 배우와 연이어 영화를 만들다보니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는 거다. 하여 <비우티풀>의 카메라는 철저히 바르셀로나를 떠나지 않고 암으로 인해 고통 받는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의 사연에만 집중한다. 근데 이 사내가 시한부인생이다 보니 뭔가 의미 있는 일이 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문제는 불법이민자들을 상대로 가판장사나 ‘짝퉁’ 공장을 연결해주는 무허가 인력브로커인데다가 아내마저 제정신이 아니라 가족부양도 힘겨운 탓에 제 삶 하나 간수하기도 쉽지 않다는 거다. 이건 좀 처절한 얘기다. 근데 그 처절한 연기를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다. 증명사진처럼 그의 얼굴만 떡하니 박아 넣은 포스터를 보라. 한국 수입사 측의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이지 않는가. 

<네 번>(10/20)을 연출한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는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지난 해 유수의 영화평론가들이 꼽은 베스트 목록에서 이 영화는 가장 많이 언급됐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뭐, 혹할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네 번>의 부제는 ‘늙은 목동, 아기 염소, 전나무와 숯’이다. 그리고 이들이 출연진(?) 전부다. 그러니까 대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게 어떻게 영화일까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는 거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탄생과 죽음이 연계된 자연 순환의 이치다. 늙은 목동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와 동시에 염소가 태어난다. 이 아기 염소는 길을 잃고 전나무 아래서 잠들다 동사한다. 이 전나무는 죽은 염소를 자양분 삼아 무성하게 자라고 사람들은 이를 잘라 숯을 만들어 따뜻하게 겨울을 난다. 거두절미하고, 인간은 자연에 속한다. 자연 파괴가 일상화된 지금 <네 번>은 보는 이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레스트리스>(10/27)는 굳이 비유하자면, 구스 반 산트의 <러브스토리>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애나벨(미아 와시코우스카)과 첫 눈에 반해 그녀와 사랑에 빠진 에녹(헨리 호퍼)이 등장하고, 그 위를 수놓는 존 매카트니, 엘리엇 스미스 등 잔잔한 록 넘버가 이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한 편의 동화로 승화시킨다. <라스트 데이즈>(2005) <밀크>(2008)와 같은 전작을 떠올리면 다소 말랑말랑한 모양새이지만 구스 반 산트의 감각적인 이미지 연출은 여전하다. 빛바랜 필터를 통과한 듯한 <레스트리스>의 장면은 하나같이 지나간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듯 아련하게 다가온다. 다만 그 추억이 마음을 울리는 건 사랑과 죽음 그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인데, 안 그래도 이 영화는 지난해 사망한 데니스 호퍼를 기리며(in memory of)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의 아들 헨리 호퍼가 에녹을 연기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레스트리스>는 삶과 죽음, 극과 현실을 초월하는 러브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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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re
2011년 11월호

<비우티풀>(Bi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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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2006) 이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세계 각지에서 다수의 언어를 가지고 여러 명의 캐릭터와 영화를 찍는 것에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차기작에 대해 “딱 한 도시에서, 직선적인 이야기 진행으로, 그리고 내 모국어로 찍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이 바로 <비우티풀>이다. 그의 말처럼 영화 상영 내내 바르셀로나에서 진행되는 <비우티풀>은 스페인어를 쓰는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남자가 암을 선고받은 후 죽음에 이르는 동안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룬다.


욱스발은 바르셀로나로 흘러 들어온 불법이민자들을 상대로 가판장사나 ‘짝퉁’ 공장을 연결해주는 인력브로커다.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다보니 경찰관들에게 뒷돈을 주고 보호를 받으려하지만 매번 사고가 터지면서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가족도 그에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아내는 조울증에 걸려 떨어져 산 지 오래고 욱스발 홀로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힘이 딸린다. 그래도 어떻게 힘을 내어 살아가지만 하늘도 무심하여라, 오줌 대신 피가 나와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암에 걸렸다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고한다.

말하자면 <비우티풀>은 이냐리투 감독이 만든 <이키루>(1952)다. (심지어 영화사의 이름도 ‘이키루 영화사 Ikiru Films’다.) 구로자와 아키라가 연출한 <이키루>에서 간암에 걸린 칸지(시무라 다카시)는 시한부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욱스발 또한 자신의 아이를 위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민자들을 위해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모두 기울이는 데 집중하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피할 수 없는 상실이 발생했을 때의 삶과 삶에 깃든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비우티풀>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이냐리투의 의도는 구로자와가 <이키루>에서 보여준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욱스발과 칸지를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처한 상황 자체가 다르다. 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했던 칸지와 달리 욱스발은 원체 가진 게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영화의 배경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산타 콜로마라는 동네다. 1960년대 프랑코 정부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역의 고유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교외지역인 산타 콜로마에 타 지역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스페인의 경제 회복력에 힘입어 많은 이들이 고향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자였다. 다만 카스티야 출신의 욱스발은 여전히 산타 콜로마에 남아 하층민 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것이다.

스페인 출신이지만 일종의 이민자 취급을 받는 욱스발이 산타 콜로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민자들에게 불법으로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거기서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며 불쌍한 처지의 이웃들을 돕는 것이다. 이건 생존의 사투지 삶의 가치라 말할 수 없다. 고향을 떠나 생존을 위해 떠도는 이민자들은 현대판 노예에 다름 아니다. ‘뷰티풀'(Beautiful)한 삶을 갈구하지만, 욱스발의 딸이 아빠의 발음만 듣고 잘못 쓰게 된 철자 ‘비우티풀'(Biutiful)처럼 현대 사회에서 이들의 운명은 제도권의 안정된 삶과는 대를 이어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초월에 대한 꿈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는 구로자와 아카리의 말이 맞았을 지도 모른다.”고 피력한 이냐리투의 의견은 <비우티풀>에서 비극의 형태로 결말을 맺는다. 욱스발의 죽음은 결코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스페인의, 그리고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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