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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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엔 국내 신종 플루 감염자가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독감바이러스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스티븐 킹의 <스탠드>를 소개하려 했다. 근데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를 지켜보면서 <브이 포 벤데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이 포 벤데타>는 <왓치맨> <젠틀맨리그> 등의 원작자로 유명한 앨런 무어의 만화(Comics)다. (앨런 무어는 DC코믹스와 같은 대형 출판사들이 마케팅을 목적으로 지어낸 용어라며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강력한 통제사회로 변모한 영국을 배경으로 시대의 혁명아 ‘V’가 홀연히 나타나 순한 양처럼 국가질서에 순응하는 시민들의 정신을 각성해 체제를 전복한다는 이야기. 국내에서는 워쇼스키 제작의 영화를 통해 <브이 포 벤데타>를 접한 사람이 많지만 V(휴고 위빙)의 슈퍼히어로적인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만화의 정수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는 한마디로 혁명교본이다. 앨런 무어는 권력의 광기가 민중을 압제하는 시대에 혁명이 어떻게 이뤄지고 성공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데이비드 로이드의 느와르풍 그림을 빌어 300페이지 분량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브이 포 벤데타>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 즉 탐욕스러운 정치가가 공포정치 및 언론 통제 등을 통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설정이 지금의 한국과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권좌를 잡은 다수당이라는 이유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정권에 반하는 움직임이 생기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징하는 MB적 진압까지, <브이 포 벤데타>는 배경을 지금의 한국으로 옮겨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흡사한 면모를 지녔다.

앨런 무어는 극중 V의 대사를 통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면서 (지금의 대통령을 선출한 건 정말 국민의 실수라고밖에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신은 그저 ‘안 돼’라고만 말하면 된다.”고 선동한다. 사회가 이 지경인 상황에서 대다수가 침묵해서는 우리의 자유와 인권을 지킬 수 없으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대 의사를 밝히자는 것.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시민들을 향해 소통을 거부한 지도자는, 그런 지도자에 머리 조아리는 측근들은 무질서를 좌시할 수 없다며 불법적인 시위는 단호하게 처벌하겠다는 경우를 우리는 TV를 통해, 신문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거리에서 매일, 매시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모인 촛불의 무법은, 용산 철거민 사태에 따른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민중의 목소리의 무법은, 기득권 세력을 제외하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미디어법에 분노하는 거리 시위의 무법은 말 그대로의 무법(無法),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법과 동등한 의미와 지휘를 갖는 ‘진정한 리더의 부재’라는 뜻에서의 무법인 것이다.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에 따르면, 무법과 함께 새 나라, 새 질서의 시대가 도래하나니, 그들만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잔해 위해 깨끗한 캔버스를 만들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잔다.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혁명이란 계급을 갈아엎는 폭력과 같아서 지적이고 교양적인 방식으로는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브이 포 벤데타>가 많은 장(章)을 할애해 공들여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비는 방송국에 근무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인권말살의, 자유억압의 부조리한 상황을 맞이해도 그저 ‘나 하나쯤이야’ 혹은 ‘우린 안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침묵하는 다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앨런 무어는 그런 보통 사람들의 각성이야말로 이 사회를 바꾸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의 인간 개조에 가까운 과정을 겪으며 혁명전사로 거듭난 이비를 통해 자유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기에 고통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유 수호를 위해, 민중해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브이 포 벤데타> 속 독재자의 이름은 아담이다. (그럼 우리의 아담은 하느님께 수도를 봉헌한 이가 되는 건가?) 광기의 어둠에 휩싸인 아담은 결국 이비, 바로 이브가 창조한 새 질서의 아침에 항복하고야 만다. 태초에 아담이 (먼저) 있고 이브가 있었지만 이제 이브가 있고 아담이 있다. 국민이 있어야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지 정치가의 이득이 민생을 우선할 수 없다. 극중 V는 이렇게 말했다. “무법과 함께 질서의 시대가 온다. 진실한 질서는 자발적인 질서를 말한다.” 승리의 ‘V’는 ‘안 돼’라고 외치는 순간 비로소 이뤄진다. 

덧붙여, 이 기사는 ‘절대’ 혁명을 선동하는 글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오해’다. 강조하지만 이 기사는 <브이 포 벤데타>를 소개하는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단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 분들이라면 원래 이 만화가 그런 것이니 <브이 포 벤데타>의 한국어판을 출간한 출판사를 원망하실 일이다. 친절하게 알려드리자면, 전 재산 29만원 밖에 없는 전직 대통령의 자제분이 운영하는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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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7.30)

혁명을 한다면 ‘V’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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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교보문고를 들렀다가 앨런 무어의 코믹북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는 표지가 맘에 들어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주말 내내 읽다보니 3년 전 동명의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상이 완전히 잘못됐던 것임을 깨달았더랬다. 알다시피 <브이 포 벤데타>는 강력한 통제사회로 변모한 영국이 배경이다. 이때 시대의 혁명아 ‘V’가 홀연히 나타나 순한 양으로 살아가는 이비와 듀오를 이뤄 체제를 전복한다는 이야기. 나는 이 영화에 호의적인 기사를 쓰면서도 “독재자에 의해 다수가 지배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V 역시 똑같은 논리로 정권을 무찌른다. 이것이 바로 자신들을 세계의 영웅으로 알고 있는 슈퍼 히어로 영화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아니겠나.”라고 비판적인 시선을 덧붙였다. 생각이 짧았다.

코믹북으로 본 <브이 포 벤데타>는 혁명 교본이었다. 앨런 무어는 권력의 광기가 민중을 압제하는 시대에 혁명이 어떻게 이뤄지고 성공에 다다르는가를 데이비드 로이드의 느와르풍 그림을 빌어 300페이지 분량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브이 포 벤데타>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이 지금의 한국과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권좌를 잡은 무능력한 지배자들은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며 ‘어디선가 누군가에 정권에 반하는 움직임이 생기면 틀림없이 응징’하는 MB적 진압까지.

앨런 무어는 “누구든지 한 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면서(지금의 대통령을 뽑은 건 정말 국민의 실수다!) 다만 “당신은 그저 안 돼,라고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행동하라는 말씀.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시민들에 대해 독재자는, 그런 독재자에 충성하는 측근들은 무질서를 좌시할 수 없다고 불법적인 폭력 행위는 단호하게 처벌하겠다고 말하는 경우를 우리는 브라운관을 통해, 신문을 통해 매일, 매시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이는 촛불시위의 무법은, 용산 철거민 경찰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민중의 목소리의 무법은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리더가 없다’는 뜻에서의 항의인 것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 따르면, 무법과 함께 질서의 시대가 오나니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잔해 위에 깨끗한 캔버스를 만들어 창조자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잔다.

그래서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대한 나의 비판적 발언은 취소다. 광기와 모순의 혼돈을 잠재우고 진정한 질서를 세우려는 민중의 목소리는 무법이지만 무법이 아니다. 파괴자 아담이 지배하는 컴컴한 밤이여 이제는 안녕. 우리가 “안 돼”라고 외칠게. 창조자 이브가 세우는 새 질서의 아침이여 어서 오렴. (<브이 포 벤데타>의 여주인공 이름이 이브, 바로 이비다. 이비는 브이이고 브이는 곧 우리다. 그럼 아담은 하느님께 서울을 봉헌한 이가 되는 건가. 그럴 거다. 코믹북 속 독재자 이름 역시 아담이다!) 참, <브이 포 벤데타>의 코믹북은 시공사에서 출판됐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나.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브라더스가 납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워 브라더스는 <매트릭스> 시절 조감독을 맡았던 제임스 맥테이그를 감독 자리에 앉히고 지들은 시엄마처럼 잔소리하는 위치에 서서 제작과 함께 영화의 각본을 맡았다.

각본을 맡은 이야기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 콤비가 각각 대본을 쓰고 그림을 그린 영국산(나중에는 미국의 DC코믹스에서 연재한) 그래픽 소설 <브이 포 벤데타>. 장르는 <매트릭스>에 이어 역시 에쑤에푸. 또 역시 가상현실에 대한 스토리로, 또또 역시 스미스 요원으로 출연했던 휴고 위빙이 주연을 맡아, 또또또 역시 혁명에 대해 얘기한다.

2039년, 3차 대전으로 미국이 공중분해된 그 자리를 대신해 세계 최강국이 된 영국에는 독재정권이 들어서 강력한 통제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때 자신의 얼굴을 가면에 숨긴 채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시대의 반항아 ‘V(휴고 위빙 분)’. 그리고 순한 양으로 살다가 V를 만나 어찌저찌해설랑 듀오로 함께 세상에 반항하게 되는 ‘이비(나탈리 포트만 분)’.

<매트릭스>가 머리에 쥐나는 스토리로 악명을 떨쳤던 것에 반해 <브이 포 벤데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무대로 여기에 미국 코믹스 특유의 세상과 불응하는 영웅 스토리를 합체하여 좀 더 알아먹기 쉬운 이야기로 개비하였다. 그래서 거대한 체제를 전복한다는 설정은 일맥상통하지만서도 당 영화가 은유하는 대상은 존나 직접적이다.

3차 대전을 주도한 미국을 언급하는 건 지금의 전쟁광 미국에 기반을 둔 설정이며, 미치광이 정치가에 의해 한 사회가 공포정치 및 미디어 조작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영화 속 사실은 현재 미영 주도의 패권주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 위해 영화는 셔틀러(존 허트 분)라는 인물과 ‘정신집중캠프’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즘과 유대인 학살을 끌어와 에쑤에푸 영화 특유의 암울함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비관적인 미래상을 그려낼 때면 의례히 써먹는 판에 박힌 설정이지만 역사는 돌고 도는 법. 그런 익숙한 설정이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 유효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당 영화의 V를 앞세운 이야기는, 개인 vs 개인의 대결 또는 개인적인 상황에서의 고뇌 모 이딴 거를 다뤘던 기존의 슈퍼 히어로 장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허나 골 때린 건, 당 영화가 독재자에 의해 다수가 지배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V 역시 똑같은 논리로 셔틀러 정권을 무찌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들을 세계의 영웅으로 알고 있는 슈퍼 히어로 만화 아니 미국 영화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아니겠나.

더 큰 문제는 과연 <매트릭스>를 염두에 두고 오는 관객의 기대를 <브이 포 벤데타>가 과연 어느 정도나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기발한 설정과 철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는 관객이라면 당 영화의 비교적 단순한 설정과 직접적인 이야기가 실망스러울 테고, ‘슝슝 날아오는 총알 림보 자세로 피하기’에 버금가는 액숑장면을 기대하고 있다면 당 영화의 쉭쉭 바람을 가르는 칼싸움 장면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터. <매트릭스> 시리즈가 워낙에 쎘어야 말이지.

하지만 <매트릭스>에 대한 기대치를 37%만 덜어낸다면, 더군다나 가면에 자신의 얼굴을 맡긴 채 영화 내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만으로 열연을 펼치는 휴고 위빙의 연기와 나탈리 포트만의 빡빡 투혼을 감안한다면 당 영화 그렇게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모.

그리하여 본 특위는 <브이 포 벤데타>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2006. 3. 13.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