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끝>(End of Ani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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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희는 중편 <남매의 방>(2009)을 통해 주목받았던 감독으로 유명하다. ‘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힌 남매가 외부의 알 수 없는 공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실험용 쥐새끼 관찰하듯 집요하게 파고들어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 또한 <남매의 방>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배경은 사방이 확 뚫린 어느 시골 마을이지만 갑자기 모든 기기들이 동작을 멈추면서 우연하게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이들이 끝내 이곳을 탈출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짐승의 끝>은 설정만 보면 장르물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사건을 따라가지 않고 인물의 심리를 서술의 엔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장르의 형태가 모호하다. 

이처럼 인간 심리가 주가 되는 영화의 감독은 종종 신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짐승의 끝>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만하다. 실제로 극중에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인물(<살인의 추억>에서 유력한 연쇄 살인 용의자로 출연했던 박해일이 연기했다!)이 등장한다. 그는 극중 주인공 소녀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하면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등 권능을 맘껏 과시한다. 이는 마치 게임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성희 감독은 조이스틱을 다루는 것처럼 인물을 조종하고 단계를 넘어가듯 이야기를 작동시킨다. 게임과 다르다면, <짐승의 끝>은 유희를 목적으로 삼은 영화가 아니다. 단지 게임의 작동 방식을 극에 끌어들였을 뿐이다. 여기에는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들어있다. 그가 보건데, 이 세상은 사공이 많은 배가 아니다. 소수의 절대자에 의해 조작되고 은폐되고 은밀하게 운영되는 게임과 같은 곳이다. 다시 말해, <짐승의 끝>은 게이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 ‘게임 세대’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을 외롭게 걷고 있는 소녀의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출발했다. 그래서 사회적 메시지나 담론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다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현실인지, 현실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것을 담으려 했다. 그런 ‘잘 모름’에서 방생하는 불안이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이었다.” (조성희 감독)

* 2010년 12월 발행 예정인 korean cinema today ‘한국의 신투차세대’ 기사 중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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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cinema today
9호

<이끼>(M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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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정(이하 ‘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늘은 어떤 영화를 소개해주실 예정인가요?
허남웅(이하 ‘허’) 모 포털사이트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은 동명 웹툰을 영화화한 강우석 감독의 <이끼>(7월 14일 개봉)입니다.

어떤 작품인지 먼저 설명해주시죠?
한마디로 ‘논두렁스릴러’ 혹은 ‘밭두렁미스터리’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어느 한적한 농촌마을이 배경입니다. 외부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이곳에 서울 청년이 홀로 오게 됩니다. 박해일이 연기한 류해국이라는 청년인데요,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온 건데 이장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청년을 적대시해요.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는 거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청년은 반발심에 농촌마을에 머물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비밀을 알아간다는 내용입니다. 

허남웅 칼럼리스트는 영화와 원작 웹툰을 모두 보셨나요?
예, 저는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웹툰을 보았습니다.

그럼 원작 웹툰과 비교해 영화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다른가요?
원작과 영화는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이야기뿐만 아니라 웹툰에 나오는 배경, 시골 분위기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이장이 사는 집의 세트, 대사까지도 웹툰을 그대로 따르고 있거든요. 감독의 입장에서는, 원작이 훌륭한 만큼 이야기를 변형하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원작 웹툰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더 흥행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영화 상영시간만 해도 무려 2시간 40분에 이르거든요.

굉장히 길군요?
상업영화치고는 엄청 길죠. 다만 긴 상영시간이 영화를 관람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강우석 감독은 동명의 웹툰과 달리 영화 <이끼>에 많은 유머러스한 부분을 심어놓았습니다. 강우석 감독 영화의 특징이라면 사건은 심각할지언정 이에 관여된 캐릭터들을 희화화해 영화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하거든요. 그럼으로써 원작 웹툰에서는 권력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은폐되는지, 정치적인 은유가 굉장히 강한 것에 반해 영화 <이끼>는 좀 더 이야기가 이해하기 쉽고 대중적으로 됐습니다. 게다가 영화가 마지막에 반전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다루고 있어 끝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것도 영화 <이끼>의 특징입니다. 

유명한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작업인 것 같아요?
잘하면 본전, 못 만들면, 전문용어를 써서 죄송한데, 정말 ‘독박’ 뒤집어쓰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강우석 감독도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 같은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이끼>가 가장 부담이 컸다고 하거든요. 특히 <이끼>는 영화화가 결정된 순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3,600만 네티즌들이 본 작품이다 보니 감독부터 배우 결정까지 이견이 많이 나왔죠.

구체적으로 어떤 이견들이었나요?
아무래도 <이끼>가 농촌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루다보니까 강우석 감독보다는 봉준호 감독이 낫다, 혹은 <이끼>가 죄의식과 구원을 다루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박찬욱 감독이 더 적합하지 않느냐는 이견도 있고요. 캐스팅 관련해서는 이장 역의 정재영은 원작 웹툰의 땅딸막하고 카리스마 있는 표정과 비교해 미스 캐스팅이 아니냐는 거였죠. 근데 <이끼>는 정재영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재영의 연기가 굉장히 뛰어나거든요. 특히나 70대 노인으로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도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거든요.

주인공 류해국 역을 맡은 배우 박해일에 대한 논란은 없었나보죠?
박해일 역에 대해서는 적역 캐스팅이라는 반응이 절대적이에요. 실제로 원작의 윤태호 작가는 박해일을 생각하면서 류해국 캐릭터를 잡았다고 해요. 박해일이 출연했던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았다고 하거든요.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많이 응용했다고 합니다.

영화 개봉 전에는 많은 이견들이 있었는데 영화 개봉 후에는 어떤가요?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편이지만 호불호가 나뉘는 분위기입니다.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은 긴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꽤 즐겼다는 반응이고요. 원작 웹툰을 접한 관객들은 다소 실망하는 분위기입니다. 영화와 웹툰은 엄연히 다른 매체인 만큼 영화적인 무엇을 기대했는데 그저 웹툰을 영화로 재현한 것에 다름없다고 말이죠.

허남웅씨는 어떠신가요?
전 영화와 웹툰 모두 흥미 있게 본 드문 사롄데요. 한편으론 인기 원작을 영화화한다는 게 안전한 선택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검증된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로 만들면 원작의 팬도, 원작을 모르는 팬도 모두에게 관심 받기 쉽잖아요. 다만 그 점이 영화를 안전 지향적으로 만드는 게 아닌가, 새로운 시도보다 익숙한 것의 반복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끼>의 안전 지향적인 연출에 불만이 있으시군요?
개인적으로 영화는 재현이 아니라 표현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점에서 <이끼>는 재현의 예술이었습니다. 이야기의 몰입도가 있었지만 영화는 웹툰을 재현하는데 그쳤지 표현하지는 못했거든요. 원작 웹툰을 영화를 위한 참고자료로 삼은 것이 아니라 주재료로, 심지어 소품 하나까지도 원작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거든요. <이끼>의 상영시간이 길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원작 웹툰은 80회가 넘거든요,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럼 <이끼>는 원작을 접하지 않은 팬들이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겠군요?
그렇기도 하지만 원작을 본 팬들도 이 영화를 기대하는 마음이 상당합니다. 이미 본 관객의 반응에 상관없이 내가 재미있게 봤던 웹툰이 어떻게 영화화가 됐을까 보고 싶은 마음도 같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보니까 제가 굉장히 회색분자 같은 느낌이 드네요.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하기도 부담스럽지만 이렇게 영화를 소개하는 일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소식 감사합니다.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FM4U(6:00~7:00)

1937년 경성, 나는야 낭만 ‘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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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감독, 박해일, 김혜수 주연의 <모던보이>가 1937년 경성의 모습을 공개했다. 비밀스러운 댄스홀 문화구락부의 풍경을 담은 막바지 촬영현장과 2008년 최고 기대작 중 하나인 <모던보이>의 제작 스토리를 공개한다.


두세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복도는 좁다. 음침한 조명까지 깔려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헐떡이며 달려오는 남자 뒤로 다급하게 쫓아오는 또 한 명의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박해일이다. 박해일을 보자마자 ‘풋!’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식민지 시대 경성의 문제적 신세대 청년 ‘이해명’을 맡았다더니, 2:8 가르마에 아줌마 파마로 강조한 헤어스타일이 과연 가관이다.

주변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의 연기나 이를 바라보는 정지우 감독, 핸드헬드 촬영에 여념이 없는 김태경 촬영감독의 움직임엔 변화가 없다. “조난실 지금 어디 있어!” 다급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남자의 등 뒤에 대고 소리치는 이해명. 둘의 간격이 좁혀지는 순간 서로 뒤엉키며 복도 바닥 위를 뒹군다. 박해일에게 초점을 맞추던 카메라는 그의 목 뒤로 시선을 옮겨 제3자의 손에 들린 권총 한 자루를 잡는다. “당신 누구야?” 불의의 일격에 당황한 해명의 한마디. “난…낭만의 화신이다!”

빼앗긴 나라보다 종적을 감춘 애인 조난실(김혜수)을 찾는 게 더 급한 이해명. 한마디로 희대의 ‘또라이’로 설정된 그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대사다.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정지우 감독은 “목소리 톤을 좀 더 강하게” “몸은 약간 카메라를 향하고” 등등 좀 더 디테일한 연기를 주문했지만 내심 만족해하는 눈치다. “실제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어요.” <모던보이>는 식민지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의 엄숙한 투쟁기록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당시를 체화했던 개성 넘치는 남녀, 이해명과 조난실의 러브스토리다.


1937년 경성, 희대의 캐릭터

11월 23일 파주종합촬영소에서 공개된 영화 <모던보이>의 촬영현장. 한창 리허설을 진행하던 정지우 감독은 박해일, 김태경 촬영감독과 몇 마디 나누더니 카메라를 멈춘다. 그리곤 좁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빠져나와 200여 개의 백열등이 만들어내는 화려함이 인상적인 문화구락부 세트로 자리를 옮긴다. 화면의 톤을 맞추기 위해 조명을 다시 설치하는 동안, 비밀 댄스홀로 설정된 문화구락부 장면의 동선을 체크하기 위해서다. 경성을 재현하기 위해 무려 77억 원을 투입한 대작을 스케줄에 맞춰 뽑아내기 위해선 일분일초가 아깝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이해명의 캐릭터를 놓지 않기 위해 건들건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박해일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다. 정지우 감독은 “영화 속 이해명과 배우 박해일은 기질적으로 비슷하다. 박해일이 연기의 폭을 얼마만큼 넓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며 “정말 가관인 캐릭터가 만들어졌다”고 흐뭇해한다.

정지우 감독이 이해명을 만난 건 2000년, ‘5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에서다. 이미 그 전부터 영화 소재의 보고라 할 만한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매혹을 느꼈던 정 감독은 1937년 경성의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다룬 소설 광고를 접하고 즉시 판권을 구입했다. 원작을 읽으면서는 ‘시대’보다 ‘캐릭터’에 더욱 끌렸다. 친일과 반일, 찬탁과 반탁의 이분법이 정신세계를 장악한 것으로 믿었던 시대에 향락과 퇴폐에 빠져 첨단유행에 웃고 울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니. 어깨를 짓누르는 시대의 무게에 아랑곳없이 개인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이해명 같은 인물은 요즘 젊은 세대들과 비교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화구락부 장면은 이런 영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사라진 조난실의 행방을 묻기 위해 문화구락부에 들른 해명이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든 마담(이칸희)과 나누는 대화는 이런 식이다. “병원이라도 가. 예쁜 얼굴에 흉이라도 나면 어떻게 해.” “젠장 그 자식들, 공갈을 쳐, 날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렇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셔.” 193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했지만 요즘 말투와 다르지 않아 동시대 정서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지우 감독은 촬영 시작 전, “1937년의 경성을 그대로 재현해야 하나?” 고민했다. 안 그래도 경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상황(유사한 시대배경으로 <라듸오 데이즈>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코리아> 등이 제작 중에 있다)에서 “시대 재현만으로 영화를 완성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시대극의 전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목한 것이 캐릭터. 현재의 인물을 묘사한다는 마음으로 원작의 인물을 가져와 캐릭터를 강화했다. 이해명은 더욱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됐고 댄스단의 리더, 레코드점의 대리가수, 양장점의 디자이너 등 정체가 불분명한 의문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에게는 춤과 노래를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줘 끼와 재능을 십분 발휘토록 했다. 그 엄혹한 시절에 저렇게 정신 나간(?) 인물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식민지 시대 경성을 ‘훼까닥’ 바꿀 희대의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다.


고증과 상상력으로 축조된 경성

촬영은 밤 12시를 넘겼다. 총 촬영 74회 중 72회까지 진행됐지만 밤샘 촬영도 종종 있다. “계획과 예산에 철저히 맞추는 모범적인 제작을 지향한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처럼 조명문제로 중단됐던 복도 장면이 밤늦게 촬영을 시작했다. 이게 다 ‘때깔’ 때문이다. 흔히 식민지 시대가 배경이라고 하면 흑백 비주얼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정지우 감독이 본 문서자료에 따르면 “경성은 대단히 컬러풀한 세상이었다”고 한다. 캐릭터에 방점을 찍은 영화라고 하지만 <모던보이>를 논하는 데 있어 시대를 제외하는 건 불가하다. 변화무쌍한 시대의 풍경을 살리기 위해 가장 공들인 것은 화면의 톤. 과도한 조명을 지양하는 대신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복도 장면 역시 벽에 부착된 전구가 낮게 내려와 인물이 과도하게 부각되는 까닭에 전구를 더 높이 다느라 촬영이 지연된 것이다.

그에 반해 문화구락부는 사방이 백열등 천지일 정도로 복도와는 대조적이다. 홀 천장에 점점이 박힌 전구는 물론이고 조난실이 자신의 댄스단과 공연을 펼치는 무대 앞에도 계단 열에 맞춰 알알이 전구가 박혀 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색색의 스탠드 또한 사방으로 은은한 빛을 발한다. 전구 하나 달랑 박힌 복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인 풍경이다. 조명은 화려하게 장식돼 있을지언정 그 빛이 흘러넘치지는 않는다. 드라마 설정상 이곳은 지하에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1930년대 근대 건축에는 지하 공간이 없었다. 다시 말해, 문화구락부는 당시에 존재할 수 없었던 허구의 공간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병은 삿포로, 아사이 등 당대에는 없었던 브랜드들이고 여급으로 등장하는 여배우의 체형도 당시로서 보기 힘든 ‘44사이즈’ 마른 체형이다. 1930년대를 기준 삼아 보자면 참으로 ‘거짓말 같은’ 광경들인 셈이다.

문화구락부가 고증과 상상력이 충돌하는 공간이듯 <모던보이>가 다루는 1937년 경성의 중요한 키워드는 ‘이중성’이다. 한복과 하이힐이, 양복과 상투가, 향락과 살육이 기승을 부리는 모순의 시대. 건축양식 또한 동서양이 혼재돼 있던 만큼 <모던보이>가 재현하는 시대는 현실 고증에만 치우치지 않고(조선총독부나 경성역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해명의 집은 1910년경에 지어진 대구 동산의료원의 2층 방갈로 ‘챔니스’ 가옥을 빌려 그대로 재현했다)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미했다. 상상력이 최대로 발휘된 공간이 바로 문화구락부다. 90퍼센트 이상 허구로 지어진 까닭에 그 시대를 가늠할 만한 소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보는 우리들이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의 공간이라 해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만큼 친근해 보인다. 이 같은 상상적 비주얼들은 “관객에게 영화적 재미를 제공하면서 시대를 자유롭게 반영하겠다”는 정지우 감독의 의지 표현이다. 아울러 이념과 가치가 뒤틀린 현재의 풍경을 1937년 경성이라는 전도된 시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영화의 또 다른 목적을 숨기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정지우 영화

박해일에게도 이해명 같은 캐릭터는 처음이다. 최근에 발굴된 당대의 영화 <미몽>(1936)을 보고 “올백 머리를 할까 하다가 당시 활동했던 시인 백석의 헤어스타일이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됐다”는 박해일. 한국영화에서 좀체 볼 수 없었던 인물인지라 캐릭터를 만들어갈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던 그에게 인물 창조에 큰 제약을 두지 않는 정지우 감독의 연출방식은 구원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정 감독은 시대극으로서는 드물게 인물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핸드헬드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2.35:1사이즈 화면을 사용한 것도 핸드헬드의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살리기 위해서다. “시대도 중요하지만 <모던보이>는 인물이 더 중요한 영화”라고 정의한 정지우 감독에게 2.35:1의 화면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좌우 프레임이 길어 인물들 간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대의 캐릭터와 독특한 시대 묘사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모던보이>의 또 다른 기대요소는 감독 정지우다.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로 창의력을 인정받은 정지우가 연출하는 거대한 시대극.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대중영화에 어울리도록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는 정 감독은 “대중이 이해하기 쉬울 정도로 단순화했다”고 말한다. “<사랑니>처럼 만들었다가는 영화를 다시는 못 만들 것 같다”는 농담에선 이 영화에 모든 걸 걸었다는 단호한 의지도 읽힌다.

7편의 전작(4편의 단편 포함)에 비춰 <모던보이>에는 유난히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 많다. 현대극에서 시대극으로 무대를 옮겼고, 여성에서 남성으로 시선이 바뀌었으며, 감정보다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늘이 전부인 현실주의자 이해명이 내일이 중요한 이상주의자 조난실을 찾아나서는 미스터리로, 추격전이 많이 등장해 시대극치고는 이야기와 편집이 굉장히 빠르다”는 그의 말에서 정지우의 가장 대중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할 것 같다.

촬영은 다음 날 오전 9시에 재개돼 오후 1시가 돼서야 끝났다. 몇 시간 늦어졌지만 큰 차질 없이 계획했던 장면을 모두 찍은 것이다. 남은 촬영은 단 2회, 12월 초 크랭크업을 앞두고 정지우 감독과 스탭들은 더욱 분주하다. 촬영 후에는 CG를 비롯 후반작업에 쏟을 공력이 또한 만만치 않다. 제대로 고생하는 이들 옆에서 “낭만!”을 외치는 박해일의 이해명. 하지만 그의 철없음이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정지우의 <모던보이>가 겨냥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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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4호
(2007. 12. 4)

<극락도 살인사건>


신인 김한민 감독의 데뷔작 <극락도 살인사건>(이하 극락도)은 얼핏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킨다. 고립된 섬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이 영화가 ‘미스터리 추리극’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목포에서 배편으로 4시간여 떨어진 섬 극락도(極樂島). 평화롭기 그지없던 이 섬에 어느 날 아침 두 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밤새 화투판을 벌이던 이들끼리 시비가 붙었던 것.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용의자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섬의 주민들이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과 여선생 장귀남(박솔미)이 앞장 서 살인범을 추적하는 사이 학교 소사 춘배(성지루)는 결정적인 단서로 보이는 한 장의 메모를 발견한다. 이 섬에는 과연 어떤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극락도>의 구조는 독특한 데가 있다. 추리의 형식 속에 공포를 이야기하는, 장르의 액자식 구성을 보여준다. 밀실정치 시대인 1986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시절의 무거운 공기를 적극 끌어들이거나 풍자하지는 않는다. 장르적 기능에 충실하며 오락영화로 기능하겠다는 얘기다. 비중만 놓고 본다면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예상과 달리 공포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무대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은 오히려 <전설의 고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는 살인자를 색출하기 위해 치밀한 추리와 아슬아슬한 복선을 사용하는 대신 마을 주민이 살해당하는 순간을 잔인하게 묘사하며 용의자를 하나씩 줄여나가는 방식을 택한다.


이처럼 <극락도>는 살인자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살인을 부추기는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데 더 관심이 많다. 살인자를 찾겠다며 소동을 벌이는 과정에 열녀귀신과 같은 괴담을 슬쩍 끼어 넣어 섬 주민들의 광기를 부채질하며 공포를 극대화하는 건 영화가 지향하려는 바를 잘 드러낸다. 17명의 섬 주민이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상황이야말로 인간의 욕망이 그려내는 극악무도한 풍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락도 살인사건’ 주모자의 정체를 밝히는데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범인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인간의 욕망이니까. 하지만 <극락도>는 끝내 그 정체를 극적인 방식으로 까발리며 장황한 설명을 덧붙여 가면서까지 동어반복 수준의 ‘정답’을 제시한다. 미스터리 추리극을 표방하는 만큼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럼으로 인해 영화의 긴장감이 한순간에 무너진 건 아쉬운 대목이다. 장르공식에 너무 완벽하려다보니 주제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공포에 초점을 맞춘다면 <극락도>는 꽤 흥미로운 작품으로 다가올 여지도 크다.







필름2.0 330호
(2007. 4. 17)

<인어공주>(My Mother The Mermaid)


잔잔 멜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만든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당 영화 <인어공주>는 판타지다. 어떤 판타지일까.

때밀이 엄마(고두심 분)의 억척스러움도, 그런 엄마의 기에 눌려 힘 한 번 못 쓰는 순딩이 아빠(김봉근 분)도 불만인 나연(전도연 분).

어느 날 우리의 쥔공, 쉬고싶다며 가출한 아빠 찾아 삼만리 나섰다가 허걱! 별안간 시간이 과거로 뿅~ 처녀 적 엄마 연순(전도연 분)과 총각 적 아빠 진국(박해일 분)을 해후하게 되니, 오옷! 과연 어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까나.  

기대와 달리 별 사건 벌어지지 않는다. <백 투 더 퓨처>의 마티처럼 남의 연애사(史)에 낑궈들어 난장판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오스틴 파워>의 닥터 이블마냥 시공을 초월해가며 뻘짓거리에 여념이 없는 것도 아님이다. 당 영화는 그냥 멀찍이 떨어진 나연의 시점으로 풋풋 쌉싸름한 연순과 진국의 연애를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 잔잔시럽게 보여줄 뿐이다.

근데 이게 왜 판타지냐고. 당 영화에 따르면 척박한 현실에 찌든 울 엄니, 아부지에게도 스무살 청춘이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판타지라는 거다. 하긴 꼭 타임머쉰 등장하고 우주선 슝슝~ 날아댕겨야 판타진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을 그리는 것 역시 판타지지.

그렇다고 당 영화가 현실을 부정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 영화는 생기 넘치는 꽃띠 시절도, 현실에 치여 각박해진 세상살이도 모두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허구헌 날 남편 구박하고, 계란 하나 땜에 손님과 머리 끄댕이 잡고 싸우는 등 인정머리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던 엄니가 옛 기억에 웃음 지으며 삶을 긍정하는 건 이런 맥락일테다. 그래서 인생이란 과거와 현재, 두 바쿠로 가는 자전거라고 당 영화의 포스터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런 속 깊은 의미도 이야기가 잼나야 관객에게 삘이 오는 법. 그럼 재밌느냐. 허파가 터질 정도는 아니지만 당 영화 잼나다. 그리고 이 재미는 연순과 진국의 소꿉놀이스런 연애과정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막 글을 깨우친 연순이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를 보고 떠듬떠듬 “조.영.호, 왕좌~지” 이러는데도 막 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처럼 초등교 얼라 아니면 전혀 안 우낄 것 같은 유치원적 개그가 먹히는 이유는 관객에게 감정이입이 잘 되고 있다는 뜻인데 그만큼 캐릭터 구축이 탄탄하고, 또 그만큼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잘 하고 있다는 얘기. 그 중에서도 본 특위의 작지만 날카로운 눈에 걸려든 배우가 있으니 연순의 동생으로 나오는 까까머리 얼라 영호(강동우 분). 얘 앞에서는 전도연의 1인 2역도, 두심 아주매의 웃통 훌렁훌렁 까는 연기도 무릎 끓어야 한다. 연기 초짜라는데 먼 놈의 얼라가 이렇게 능청시러운지, 쉐이 참 똘똘해.

하지만 당 영화의 약점은 나연이 시간여행을 한다는 컨셉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등 판타지적 요소가 다분한 사건 위주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상당부분 호소하는 생활밀착형 이야기에 가까워 설탕 덜 넣은 듯한 미숫가루처럼 그 밍숭맹숭함에 지루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도 그랬던 건데 당 영화 역시 몬가 결정적 ‘한 방’이 아쉽다.

그러나 <인어공주>는 고만고만한 한국영화들 틈바구니 속에서, 대박영화들 사이에서 소리없이 강하게 마빡을 디밀고 있는 영화라 아니할 수 없음이다. 아쉽지 않게 입장료 7,000원을 만족시켜주고 있다는 말씀.

그런 까닭에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