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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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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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박찬욱과 앨프리드 베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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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은 소문난 ‘Sci-Fi'(이하 ‘SF’) 광이다.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에서 100권의 책을 추천하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필립 K. 딕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 주옥같은 SF작품을 다수 포함시켰고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면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미 리들리 스콧이 1982년 <블레이드 러너>로 영화화한 적이 있다.)를 찍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박찬욱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SF소설가를 꼽으라면 바로 앨프리드 베스터다. <파괴된 사나이>(1953) <타이거! 타이거!>(1956) 등을 통해 명성을 얻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은 SF팬뿐만 아니라 고른 독자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SF소설치고 슈퍼히어로와 하드보일드 등 미국 대중문화의 근간이 되는 요소가 두드러져 특히 그렇다. <파괴된 사나이>는 그런 베스터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태양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재벌총수 벤 라이히가 라이벌 기업총수를 제거하려던 중 이를 눈치 챈 형사 링컨 파웰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다룬 내용. DC코믹스에서 작가로 활동했던 앨프리드 베스터는 자신의 이력을 살려 <파괴된 사나이>를 벤 라이히와 링컨 파웰의 초능력 대결로 몰아가지만 오히려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면도날 씹듯 거칠고 냉소적인 이들 주인공의 대사는 필립 말로우의 그것처럼 간결하면서도 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챈들러 특유의 건조한 도시 묘사에 색깔을 칠한 듯한 앨프리드 베스터의 현란한 시각적 묘사는 ‘불꽃놀이’ 문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은 당시 할리우드에서도 영화화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파괴된 사나이>는 스크린을 통해 재현된 적이 없다. 이유가 아이러니하다. 불꽃놀이 문체에도 불구, 절대 활동사진으로 시각화할 수 없는 극중 설정 탓이다. <파괴된 사나이>에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 에스퍼(Esper)가 등장한다. 얼핏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돌연변이 예지자와 동류(同類)로 보인다. 다만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음악’으로 심리를 조작한다는 설정은 앨프리드 베스터만의 아이디어로, 제 아무리 날고기는 감독이라도 이미지로는 어떻게 표현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파괴된 사나이>를 영화화한 적은 없지만 대신 제목을 차용하기도 했다. 훗날 <복수는 나의 것>으로 개봉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의 제목은 다름 아닌 <파괴된 사나이> 극중 딸을 잃은 동진(송강호)이 유괴범의 복수에 인생을 올인하며 내적으로 무너져가는 심리가 <파괴된 사나이>라는 제목과 너무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하나의 사례만 가지고 박찬욱 감독의 앨프리드 베스터에 대한 애정의 정도를 모두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앨프리드 베스터의 두 번째 장편 <타이거! 타이거!>는 그를 향한 박찬욱 감독의 애정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타이거! 타이거!>는 실제로 박찬욱 감독이 직접 영화화를 바란 작품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나 프랑스에서 연출 제의를 받을 때면 SF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단다. (딴지일보 130호 ‘<올드보이> 박찬욱을 만나다’) 이왕에 자본력이 센 외국에서 연출할 바에는 한국에서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여 프랑스 제작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을 밝혔으니, 그게 바로 <타이거! 타이거!>다. 다만 그 후로 프랑스에서 답변이 없어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타이거! 타이거!>는 수십 년 전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더라고요. 근데 비운의 프로젝트로 유명해요. 각본은 제대로 안 나오고 영화는 계속 엎어지고.”

<타이거! 타이거!>의 영화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파괴된 사나이>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미래 사회의 배경은 할리우드가 탐낼 만한 볼거리였지만 (이는 <점퍼>에서 구현됐다!) 걸림돌은 주인공 걸리버 포일이 겪는 공감각증상. 폭발 사고 여파로 감각을 인지하는 두뇌세포가 혼란을 일으켜 소리를 시각으로, 움직임을 소리로 지각한다는 설정이 소설에서는 가능했을지언정 영화화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비명이 이상한 패턴의 빛처럼 포일에게 시각적으로 찾아왔다.’ ‘목재의 감촉은 시큼하면서 분필 같은 맛이었고, 손가락에 만져지는 돌은 새콤달콤했다.’는 지문을 그 누가 이미지화할 수 있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올드보이>는 <타이거! 타이거!>와 여러 면에서 흡사한 설정이 많다. 170일 동안 우주 미아가 되어 우주선에 갇혀 있는 포일의 사연은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감금돼 군만두로 연명하는 오대수(최민식)를 연상시킨다. 포일을 발견한 우주선이 그를 구출하지 않은 까닭에 포일의 평생의 복수 대상이 된다는 설정은 또한 오대수가 복수를 삶의 의지로 삼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시각적 묘사에 탁월한 베스터의 문체가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계와 일맥상통하다는 점에서 혹시 박찬욱 감독이 <타이거! 타이거!>에 대한 영화화의 아쉬움을 <올드보이>를 통해 드러냈던 건 아닌지 의심 아닌 의심(?)이 드는 것이다.

최근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과 관련한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제작사 겸 배급사 카날플러스와 함께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리메이크를 추진 중이라는 얘기였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박찬욱 감독의 해외 진출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게 사실이다. 하여 심심찮게 SF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박찬욱 감독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비쳐진다. SF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써도 박찬욱 감독이 해외진출작으로 한국에서 쉽지 않은 SF영화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굳이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박찬욱 감독이 만든 SF영화를 볼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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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9.25)

<박쥐>의 불균질함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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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상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고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으로 관심이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할 얘기가 남아있는 작품이다. 그처럼 <박쥐>에 대해서는 호오가 갈리는 많은 글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질적 요소의 양립을 통해 영화적 미학이 기능하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욕망을 갈구한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발현의 태도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상현(송강호)과 적극적인 태주(김옥빈),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한복을 판매하는 ‘행복한복집’, 매주 수요일 벌이는 마작 판 위로 흐르는 이난영과 남인수의 뽕짝, 신나게 모여 앉아 게임을 즐기는 한국인들 주변에서 가사를 돕는 필리핀인 이블린(메르세데스 카브럴), 닫힌 문에서 시작해 시원하게 트인 바다에서 끝맺음되는 이야기 구조 등등. ‘박쥐’가 포유류와 새의 중간에 위치한 경계의 존재이듯 영화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상현과 태주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아닌 게 아니라, 상현과 태주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바니타스의 대표적인 회화 <바닷가의 월출>과 무척이나 닮았다!)

불균질의 성향은 박찬욱 영화가 보여주는 특유의 무국적성의 주요한 원인으로 인식돼왔다. 더욱이,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피로 결합한 뱀파이어 모티브가 <박쥐>의 원형임을 감안할 때 무국적성이 더욱 눈에 띔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박쥐>의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경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 그리고 이질적 요소의 충돌이 영화의 미학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할 때 서구로 대표되는 <테레즈 라캥>, 뱀파이어물과 대립하는 한국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단서는 행복한복집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2층으로 이뤄진 집의 구조와 남편을 위해 ‘하녀’처럼 시중을 드는 부인들(현대 한국에서 하녀의 대표적인 존재를 찾는다면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시집온 여자들이 아닐까?), 그리고 외간남자에 의해 눈을 뜨는 여자의 욕망이라는 단편들을 종합해보면 어렵지 않게 하나의 작품이 연상된다.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주제 의식이 집약된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하녀>는 비틀린 욕망이 가져온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다룬 작품이다.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당시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다룬 지점은 태주의 욕망이 불러온 기존 질서의 파괴에 따른 상현의 공포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단적인 예로,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공격하는 대상은 승대(송영창)와 영두(오달수), 남자 의사와 남자 운전수, 그리고 상현까지 공교롭게도 모두가 남자다. 다시 말해, 행복한복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불륜과 살인의 이중주는 <하녀>의 변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특히 <하녀>가 이질적 요소의 대립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박쥐>에서 보이는 무국적성의 핏줄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어느 인터뷰(‘<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하겠다’ <씨네21> 704호)에서 자신의 영화가 갖는 무국적성과 관련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박쥐>가 사실성이나 지역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사실성과 지역성이 오히려 어떤 다른 한국영화보다 더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순수한 한국적 모습 그런 건 아닐 수 있지만 한국적인 잡스러움이랄까,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박쥐>가 보여주는 이질적 형태의 총합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때 ‘한국적’의 의미를 획득하는 건 <박쥐>라는 단일작품 자체가 아니라 <하녀>라는 직계혈통의 역사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하녀>는 1960년에 이미 외부의 것과 내부의 것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으로 당대의 사실성과 지역성을 효과적으로 압축했다. 도시로 유입된 지방 노동력, 실직한 엘리트 가장과 집안 일 돕는 여자, 한복을 입은 여주인과 서양식 복장을 갖춘 하녀 등등. 김기영 감독은 지방에서 상경한 새로운 노동계층의 대두에 따른 도시 중산층의 불안과 잠재적 공포를 이층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조화했다. <박쥐>에서 태주가 자신의 흡혈을 저지하는 뱀파이어 상현을 향해 “식구들끼리 잘 사는 집에 들어와 가지고. 너는 병균이야. 퉤!”하는 대사가 영화의 구도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듯 <하녀>가 보여주는 이질적 요소들의 대립 역시도 외부에서 온 하녀라는 병균의 침입에 따른 가정(혹은 가부장)의 혼란, 더 나아가 파국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삶이란 허무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녀>를 비롯해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를 장식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을 살펴보면 사실성의 측면에서나 지역성의 측면에서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의 혼란을 하나의 세계로 삼은 작품이 적잖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태주와 라여사(김해숙)의 관계처럼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와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행복한복집의 하얗게 페인트칠한 공간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주요한 특징이랄 수 있는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가 만났을 때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 역사의 봉합을 위한 영화적 움직임, 즉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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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28)

빅 매치! <박쥐> vs <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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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아레나> 독자 여러분,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상반기 충무로를 달굴 문제적 두 무비, <박쥐>(4/30 개봉)와 <마더>(5/28)의 미리 보는 명승부전을 중계방송 해드리겠습니다. 본격적인 대결에 앞서 간략하게 선수소개 있겠습니다.

선수소개  먼저 홍코너 박찬욱의 <박쥐>로 말할 것 같으면, 어머나 세상에! 한국영화계에선 유례가 없는 흡혈귀 무비에요. 항간엔 제목을 거꾸로 읽으면 ‘쥐박’이 된다고 하여 상위 1%를 위해 서민‘s Life를 절단 내고 있는 現정부를 향한 복수무비일 것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더랬는데, 오해입니다. 당 영화는 천주교 신부께옵서 수혈을 잘못 받아 배트맨 아니 뱀파이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맞서는 청코너 봉준호의 <마더>는 ‘괴물’이 주인공이었던 전작과 달리 인간, 그것도 모자(母子)가 주인공 듀오로 등장해 화제를 모으고 있군요. 살인사건에 휘말린 아들의 누명을 풀기위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나는 마더의 고군분투기를 다뤘다고 합니다. 마더 테레사도 울고 갈, 지는 모르겠지만 주최 측에 따르면 심금을 울리고, 오금이 저리고, 심지어 손발까지 오그라드는 영화가 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아~ 말씀드린 순간, 1 Round 공이 울렸습니다.

1 Round  <박쥐>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복수 삼부작을 완성한 박찬욱 감독의 또 하나의 삼부작이라 할 만합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와 제작자로 참여한 <미쓰 홍당무>, 그리고 <박쥐>까지. 로봇과 채소, 조류를 제목으로 붙인 걸 보아 ‘비인간 삼부작’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데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미쓰 홍당무>의 연달은 흥행실패로 비인간적인 관객에게 배신감을 느낀 박 감독이 ‘이래도 정말 안 볼래!’ 밀어붙이는 심정으로 작정하고 만든 작품인 거 같아요. 다시 한 번 비인간 주인공 흡혈귀를 앞세워 모든 걸 쏟아 부은 작품인 거죠. 정말이냐고요? 아님 말고. 그에 반해 <마더>는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로 영화 제목 국산화를 선도해온 봉준호 감독이 영문제목으로 유턴한 경우에요. 국내 영화제목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한 이번 사태에 대해 혹자는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싶은 봉 감독이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분석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더>를 비롯하여 <박쥐>까지 두 편 모두 칸 영화제 경쟁부문 가능성이 높아 동반진출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2 Round  흡혈귀 vs 모자, 흡사 무(모)한 도전 시즌1의 인간 vs 소의 줄다리기를 연상시키는 이번 대결에서 <박쥐>와 <마더>가 내세우는 핵심 소재는 각각 불륜과 모성애입니다. <박쥐>가 높은 수위의 응응응 장면 때문에 여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은 일화는 유명하죠. 흡혈귀로 분한 송강호가 절친의 여자 김옥빈과 사랑을 나누는 <박쥐>의 부제를 단다면, 송강호에겐 ‘불륜은 나의 것’, 김옥빈에겐 ‘흡혈귀지만 괜찮아’일 정도로 <색, 계>의 그것을 넘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요. <마더>에는 <박쥐>처럼 관객의 대뇌피질에 피가 되고 살이 될 응응응 장면은 없어요. 혹시 이런 거 기대하고 <마더> 보러 간다면?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아, 좋지 않은 짓이에요. 대신 영화는 모자 관계에 초점을 맞춰 사골국물처럼 순수한 모성애의 결정체를 탐구합니다. 원빈처럼 티 없이 맑은 우리 아가가 누명을 썼는데 어느 마더인들 미치지 않겠어요. <남극일기>의 도달 불능점처럼 모성애의 마지막 남은 골수까지 쪽 파먹을 거라고 기염을 토합니다.

3 Round  근데 <마더>는 모성이 등장하는 첫 번째 봉준호 영화에요. <괴물>만 하더라도 엄마 없는 하늘 아래 펼쳐지는 아빠 이야기였더랬어요. 봉준호 영화에 약방에 감초처럼 변희봉이 안 나오면 배, 배, 배신이었는데 김혜자가 등장하는 건 그래서예요. 그 결과, <마더>는 <괴물>과 스타일이 많이 다를 뿐이고, 그래서 <마더>가 더욱 기대될 뿐이고. 반면 <박쥐>는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 전작의 빛나는 공식을 이어 받아 안으로 자기 색깔 확립하고 밖으로 관객 공영에 이바지하려는 기세가 등등합니다. 특히 박찬욱 영화에서 늘 리피트 되는 ‘도덕적 딜레마’, 즉 당 영화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흡혈귀로 형상화되니, 기존 뱀파이어 무비와 안녕을 고하고 New 뱀파이어 무비를 창조하려는 박 감독을 이길 자 그 누가 있겠습니까. <마더>? 그 결과가 궁금하시다고요? 결과는 <박쥐>와 <마더>가 개봉한 이후에 공개됩니다. 이상 <아레나>에서 알려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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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09년 5월호

꽃 피는 봄이 오면 한국영화 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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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봄이 오면 한국영화 온다고 말했지 노래하는 국산무비 관계자들의 예언처럼, <워낭소리>의 깜짝 대박에 제대로 필 받은 한국영화계는 4월 2일 개봉하는 <그림자 살인>을 필두로 <우리 집에 왜 왔니> <똥파리> <7급 공무원> <김씨표류기> <박쥐> <인사동 스캔들>까지, 춘 사월에만 대거 일곱 편의 영화를 선보이며 관객의 호주머니 공략에 나선다.


<박쥐>는 흡혈귀 영화


그중 많은 이들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문제적 무비는 다름 아닌 박찬욱 감독의 <박쥐>(4/30 개봉) 항간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복수 삼부작을 완성한 그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이어 신작 <박쥐>까지, 로봇과 조류를 제목으로 붙인 걸 보아 ‘비인간 삼부작’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잇따랐더랬다.

당 영화는 잘 알려졌듯 ’흡혈귀 무비‘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천주교 신부님께옵서 어찌저찌해설랑 수혈을 잘못 받아 흡혈귀가 된다는 스토리. 그렇다고 미제산 뱀파이어 무비처럼 ’우두둑우두둑 발라당 쩍‘ 소리 내며 호들갑스럽게 흡혈귀로 변신한다든가, 부수고, 까고, 조시는 등의 과도한 액션을 전시하는 것도 아님이다. <박쥐>의 포인트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흡혈귀 신부의 대구빡 터지는 도덕적 딜레마에 있으니, 박찬욱 감독은 이를 두고 러브스토리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당 영화는 제작초기부터 주인공 송강호와 김옥빈의 수위 높은 응응씬으로 높은 관심을 모았더랬다. 특히 야리야리한 댄스로 뭇남성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김옥빈의 훌러덩 장면은 당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치사량에 가깝게 올리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무튼, 기존 흡혈귀 무비의 장르적 규칙에 빠빠이를 고하면서 스리슬쩍 한발 걸치고 있는 모양새는 본 기자가 <박쥐>를 4월의 필견무비로 추천하는 이유다.  


이 영화도 주목!

<그림자 살인> <똥파리>(4/16) <김씨표류기>(4/30)도 최소 입장료 대비 본전치기가 가능한 작품들이다. <그림자 살인>은 ‘훈남 of 훈남’ 황정민과 ’국민남동생‘ 고지가 멀지 않은 류덕환이 콤비를 이뤄 맹활약 펼치는 조선시대 추리극이라는 점에서, <똥파리>는 대사의 반이 전문용어(일명 ’욕‘)일 정도로 독립영화 특유의 날 느낌이 충만하다는 점에서, <김씨표류기>는 밤섬을 배경으로 히키코모리’s way를 걷는 주인공 두 남녀의 기발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준(準)필견무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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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TV
 2009년 4월호

2009년 한국 ‘명품’ 감독들의 신작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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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영화계는 그야말로 ‘명품’ 감독들의 격전지다.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등 한국을 넘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들의 기대작 소식이 한꺼번에 들려오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올드보이> 등 한국영화사(史)에 길이 남을 작품이 대거 쏟아졌던 2003년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조심스런 평가까지 나올 정도.  

그중 가장 큰 관심을 모으는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봉준호 감독의 <마더>다. 각각 4월, 5월 개봉예정인 두 영화는 칸영화제로부터도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박쥐>는 잘 알려진 대로 ‘뱀파이어’ 영화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신부가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했다가 수혈을 잘못 받아 뱀파이어가 된다는 이야기. 기존 뱀파이어 영화와 달리 액션보다 사랑에 방점을 찍었다는 박찬욱 감독의 전언이 이채롭다. 안 그래도 <박쥐>는 제작단계부터 높은 수위의 베드신으로 여배우 캐스팅에 난항을 겪기도 했는데 부부로 출연하는 송강호와 김옥빈 조합이 만들어낼 ‘러브스토리’는 <색, 계>의 그것을 넘어설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 점에서 <박쥐>는 송강호가 연기하는 첫 번째 사랑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때문에 그가 연기하는 신부가 과도하게 흡혈귀로 변하거나 뱀파이어 액션을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박찬욱 감독이 전작을 통해 늘 제기해왔던 ‘도덕적 딜레마’, 즉 <박쥐>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흡혈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니,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위반하면서 슬며시 한발을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더욱 독특한 작품을 기대케 한다.

반면 봉준호 감독이 <마더>에서 다루는 사랑은 모성애다. 단,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모성애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마더>는 살인사건에 휘말린 아들의 누명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사실 이 영화에서 대해서는 간략한 줄거리와 김혜자와 원빈이 모자(母子)로 출연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다. 그중 <마더>의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의식적으로라도 전작들과는 좀 다르게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마더>는 기존에 봉준호 감독이 보여줬던 작품들처럼 평범한 주인공을 앞세워 장르의 전형성을 파괴하는 주특기는 그대로 가져간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던 변희봉이 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부성(父性)이 중요한 기능을 작용했던 <괴물>과 달리 <마더>는 엄마와 아들간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전작과는 많은 지점에서 달라졌다. <마더>에서 보게 될 생소한 요소는 그로 인해 생긴 결과다.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가족의 이야기로 축소됐고 ‘화성’(<살인의 추억>), ‘한강’(<괴물>)과 같은 공간의 구체성이 사라졌으며 그 결과, 감정이 사건을 압도하는 영화가 됐다. 그래서 규모는 작아졌지만 봉준호 감독은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지금껏 만든 영화중에 가장 셀 것 같다”고 표현한다. 

‘센 이야기’라면 이창동 감독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에서 ‘불편한 진실’을 대놓고 이야기하며 모든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의 신작은 <시>다. 그런데 의외로 사건이 아닌 일상을 다룬다. 그것도 60대 중반의 여성이 등장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시>는 60대 중반의 여성이 시를 쓴다는 이야기다. 파출부 생활을 하면서 외손녀와 단 둘이 살고 있고 딸은 이혼을 한 후 함께 지내지 않은지 오래다. 이렇게 무료한 생활을 영위하던 중 무료 문학 강좌를 듣게 되는데 시를 한 편 써야 하는 과제를 받게 된다. 이처럼 표면상 드러난 이야기만 가지고는 이창동 감독 특유의 고통스런 묘사를 예상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시를 영화로 바꿔보는 가정은 어떨까. <시>의 주인공 여성이 평생 관심을 두지 않던 시를 써야 되는 상황은 흔히 창작의 고통에 비견될 만하다. 영화 역시 그렇다. <시>는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연출작이지만 그에게 영화를 만든다는 건 여전히 고통을 수반한다. 다시 말해, <시>는 영화의 본질에 대해 묻는 질문 같은 작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은 없지만 <시> 자체가 하나의 고통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이창동표’ 영화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생활의 발견>을 연상케 한다. 주인공 영화감독이 제천과 제주도 두 번의 여행을 통해 이상한 사건을 겪는다는 얘기다. <생활의 발견>과 결정적으로 다르다면 사랑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 그리고 홍상수 영화를 통틀어 가장 웃긴 작품이라는 점이다. 하긴 사랑을 빙자한 수컷의 찌질함을 방관자의 시점에서 묘사한 그의 영화가 언제 안 웃긴 적이 있었냐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 단계를 뛰어넘는다. 물론 큰 이야기 틀을 정해놓고 현장에서 즉석으로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만드는 그의 방식을 감안하건데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두 번의 여행길에서 모두 부부를 만난다는 점에 비춰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가식’의 정체를 발가벗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면 제목이 주는 뉘앙스가 절묘하다. (싱글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은) 주인공은 부부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부 또한 각자의 진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벌이는 속고 속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웃음을 줄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덧붙여,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지금 언급한 감독들이 2009년 한국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섭섭해 할 이름이 꽤 많다.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 박진표 감독의 <내사랑 내곁에>,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김용화 감독의 <국가대표>, 윤종찬 감독의 <나는 행복합니다>, 임순례 감독의 <날아라 펭귄>까지. 2009년 한국영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거 출현으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구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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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ire
2009년 3월호

2009년 상반기 영화계 기대작 정리 – <박쥐>에서 <왓치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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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영화계 상반기는 ‘거장과 귀환’과 ‘전설적 원작의 재림’으로 요약된다. <올드보이>의 박찬욱부터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까지, 그래픽 노블의 걸작을 영화화한 <왓치맨>에서부터 6년 만에 새로운 감독과 배우로 시리즈를 재가동한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이하 <터미네이터4>)까지. 반가운 이름과 익숙한 제목으로 무장한 2009년 상반기 기대작 목록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이름값에 기대고 있다는 것. 이는 최근 몇 년 사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신예감독의 부재와 창작 시나리오 침체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발견의 희열을 느낄 수 없지만 대신 반가운 대상이 주는 기대감에 들뜬 설렘이 이 목록에는 있다.  

먼저 ‘거장의 귀환’ 가장 눈에 띠는 이름은 박찬욱 감독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이후 3년. 박찬욱 감독은 공포영화의 겉모습을 가진 종교영화 <박쥐>(5월 개봉)로 찾아온다. 송강호와 김옥빈, 신하균과 김해숙 등이 출연한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이전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이 신작에 대해 살짝 내비쳤던 내용을 유추해본다면, 존경받던 종교인사가 친구에게 수혈을 잘못 받아 흡혈귀가 되고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내용이 될 전망이다.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등 전작에서 보여줬던 박찬욱 감독의 성향으로 보건데, 종교와 악마가 만나 하느님을 섬기는 흡혈귀의 이야기로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박찬욱 감독 특유의 금기를 위반하는 설정에서 나오는 쾌감과 이야기를 압도하는 매혹적 이미지는 그의 신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체>는 혁명가 체 게바라를 다룬 작품이다. 여느 전기물과 달리 체의 일생이 아니라 혁명과정에만 집중하지만 상영시간은 무려 4시간 30분에 달한다. 다행히 국내 수입사 측에서는 이를 두 편으로 나눠 1부 ‘아르헨티나’(1월 개봉) 2부 ‘게릴라’(2월 개봉)로 개봉한다고. ‘아르헨티나’는 아르헨티나의 의사 출신인 체가 쿠바로 넘어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에 성공하는 이야기, ‘게릴라’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볼리비아로 넘어가 혁명정신을 전파하는 이야기다. 체 게바라를 연기한 베니치오 델 토로는 배우 생활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외모도 외모지만 소소한 버릇 하나까지 재현하며 혼신을 다한 연기는 체의 재림으로 느껴진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베니치오 델 토로는 2008년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무혈입성 하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체인질링>(1월 개봉)을 통해 다시 한 번 위대한 작가임을 증명해 보인다. 안젤리나 졸리가 주인공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체인질링>은 모성애를 통한 여성의 강인함을 말한다. 당국의 도움으로 실종당한 아이를 찾지만 실제 자신의 아이가 아니면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 삶을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것.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에서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인간이 이에 맞서는 행위를 고귀하게 묘사했던 이스트우드의 태도는 여기서도 이어진다. 그의 최고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여느 평범한 감독의 걸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 있는 연출과 거장다운 시선이 <체인질링>에는 있다.

이번엔 ‘전설적 원작의 재림’ 차례. <아이언맨> <인크레더블 헐크> <다크 나이트> 등 2008년은 그야말로 슈퍼히어로물의 전성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슈퍼히어로의 팬들이 영화화를 학수고대했던 작품이 있다. 바로 <왓치맨>(3월 개봉)이다. 앨런 무어(<브이 포 벤데타> <프롬 헬>)의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왓치맨>은 연출을 맡은 잭 스나이더(<300> <새벽의 저주>)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그래픽 노블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이다. 슈퍼히어로의 활약을 흥미 위주로 다루던 기존 장르에 현실과 정치가 개입하면서 심리학적 리얼리즘으로 변모하였는데 그 시초가 되는 작품이 바로 <왓치맨>인 것이다. <12 몽키즈>의 테리 길리엄부터 <본 얼티메이텀>의 폴 그린그래스가 이 프로젝트에 군침을 흘렸지만 최종적으로 잭 스나이더에게 낙점됐다.

<터미네이터4>(5월 개봉)는 최근 모션 포스터, 즉 움직이는 포스터를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며 팬들의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도시 한 가운데 폭탄이 투하되면서 도시의 모습이 해골로 변하는 포스터였는데 안 그래도 <터미네이터4>는 인간 저항군 리더 존 코너가 기계군단과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고유명사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빠지긴 했지만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천 베일이 존 코너 역으로, <미녀 삼총사>의 맥지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기존 세 편의 <터미네이터>가 현대를 배경으로 했다면 <터미네이터4>는 미래3부작의 서막을 여는 것이다.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2>(6월 개봉 예정)는 2009년 상반기 가장 많은 관객이 기대를 모으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만화 상에서만 존재하던 로봇들이 실사로 스크린에 구현된 <트랜스포머>는 수많은 로봇 만화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속편 제작은 당연지사. <트랜스포머2>는 오토봇과의 로봇전쟁에서 패한 디셉티콘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디셉티콘은 새로운 로봇들을 규합하니 오토봇 또한 비밀병기를 출현시키기에 이른다. 하여 <트랜스포머2>는 전편보다 더 많아진 로봇들이 더 거대한 전쟁을 펼치는 상황으로 진행이 될 예정. 샤이어 라보프, 메간 폭스 등 인간 배우들이 로봇들 사이에서 어떤 매력을 펼칠지 기대를 모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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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ire
2009년 1월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I’m a Cyborg, But That’s OK)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싸이보그)>는,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과 그녀를 도와주려는 일순(정지훈)의 신세계 정신병원을 무대로 한 로맨스 영화다. 전작을 통해 무거운 소재의 핏빛 어린 연출력으로 악명을 높였던 감독이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정신병원을 무대로 하고 있으면서 이 장르의 룰을 의도적으로 배반해 이를 로맨스 영화의 틀로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기 때문에, <싸이보그>에서 영군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의사들의 치료가 아니라 일순의 사랑이다. 특히 그것이 상대방의 차이를 없애는 쪽이 아니라 인정하는 순간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감독은 정신병원이지만 흰색타일이 깔린 건조한 공간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문양이 돋보이는 컬러풀한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고 여기에서 환자들이 자신의 개성을 맘껏 표출하도록 한다(건전지로 밥을 대신하고 형광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영군과 남들의 성격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오는 것이 특기인 일순). 의사 역시 환자를 억압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니, <싸이보그>는 마치 한편의 동화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대해 무엇 때문에 그래야 하는지, 또한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박찬욱 감독은 그 빈 공간을 상징과 기호 또는 공식의 배반과 같은 의미체계로 이미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영군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지만 카메라는 이를 영군의 시점이 아닌 일순의 시점에서 보여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 전체가 일순의 상상이 아닐까 추론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싸이보그>는 불친절한 영화로 다가온다. 사람을 통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사람을 보니 자연스러움보다 인공성이 더욱 앞서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주인공 아이들의 엉뚱한 행동과 말투가 그들에게서 온 것이기보다는 이들보다 영리한 감독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지문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생뚱맞고 썰렁한 것 역시 사실. 그래서 <싸이보그>는 이미지를 초점에 맞추느냐, 이야기를 초점에 맞추느냐에 따라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릴 영화다.


(2006. 12. 15. <스크린>)

<여섯 개의 시선>(If You Were Me)


당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사격을 받은 6명의 감독이 ‘인권’이란 화두를 가지고 6개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옴니버스 영화다.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와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 박진표 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가 바로 그것.

우리가 인권이라고 하면 흔히 지난한 삶을 못이겨 분신하는 노동자처럼 뭔가 거창한 꺼리를 생각하기 일쑤인데 당 영화 <여섯 개의 시선>은 ‘인권’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당 영화는 취업을 앞둔 여고생이 외모 땜에 어케 차별 당하고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때리는지 보여준다든가(<그녀의 무게>), 한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주위의 편견으로 어떻게 좌절하는지(<대륙횡단>) 등 우리가 주변에서 쉬이 접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인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20분에 달하는 짧은 시간 안에 전달해야 하니 감독들은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 매우 실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해서 박진표 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의 경우, 혀를 자르는 잔인한 설소대 수술과정을 다큐멘터리를 끌어들여 존나게 리얼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의 박찬욱 감독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당한 처사를 받는 네팔인 찬드라의 시선을 1인칭으로 설정하여 그녀가 겪는 불안한 심리를 관객도 함께 느끼게끔 처리하였다.

그러다보니 6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로 묶이는 것이 아닌, 코미디(<그녀의 무게>), SF(<그 남자의 사정>), 반전 스릴러(<얼굴값>) 등 다양한 장르로 나누어지는 까닭에 당 영화를 통해 재미도 재미거니와 박찬욱 감독의 말마따나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 한두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당 영화가 단순히 재미를 위해 존재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감독들 나름대로 ‘인권’을 가지고 재미있게 만들려고 한 흔적이 역력하긴 하나 소재가 소재인 만큼 블록버스터와 같은 종류의 영화가 제공하는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섯 개의 시선>은 그러한 재미를 떠나, 우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겪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소홀해지거나 걍 지나치기 쉬운 문제를 영화를 통해 제기했다는 점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본 특위의 판단이다.

하나의 작품이 극장가를 싹쓸이하고 있는 시점에서 단순히 ‘재미’ 하나를 떠나 여러 모에서 영양가 있는 작품을 관람하는 것 역시 관객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즉 관객의 인권이 아닌가.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의 반열에 올려놓는 바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건데, 당 영화를 데이트 사기 진작용 전초로 삼거나 기분전환용으로 삼으려는 자는 절대 관람불가하기 바란다. 괜히 본 특위한테 승질 부리지 말고.


(2003. 11. 8. <딴지일보>)

<올드보이>(OldBoy)


전작이 쫄딱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강렬한 스타일 덕에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을 배로 더했던 박찬욱 감독, 그가 신작을 내 놓았다. <올드보이>.

거기에 국내 최고 연기파 배우 중 1人인 최민식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 젊은 아덜도 소화하기 힘들다는 마카로니 파마를 멋지게 소화하여 눈길을 끈 점, 또한 그 선하디 선한 눈망울 덕에 악역은 평생 맡지 못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유지태가 악당(으로 보이는) 역에 캐스팅 된 점 등 당 영화가 뿜어대는 화제는 실로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이라 아니 할 수가 엄따.

그리고 개인적으로 <은실이> 시절부터 눈 여겨 보아왔던 ‘영채’ 강혜정이 출연한다는 것까정… 므흣

그러니 이 문제적 영화를 본 우원이 어찌 기냥 모른 척 지나갈 수 있으랴, 해서 늦었지만 검열평 올린다.

1.

당 영화 <올드보이>는 츠치야 가롱(Tsuchiya Garon)이 이야기를 쓰고 미네기시 노부야키(Minegishi Nobuaki)가 그림을 그린 일본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라 이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만 이 만화가 국내에 소개된 지 벌써 7~8년이 지났고 또 원작이 있다니까 그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자너, 그래서 원작만화에 대해 잠시간 썰 풀자면..

결혼을 앞둔 며칠 전 원인도 모른 채 실종된 주인공 고토, 깨어나보니 침대와 테레비만 딸랑 있는 어느 방안에 감금되어 있다. 그 방에서 자신이 왜 갇혀있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군만두로만 연명한지 10년, 풀려난 뒤부터 고토는 자신을 이케 만든 장본인을 찾아 나선다.

근데 독자제위덜께서는 본 우원이 원작의 이야기를 얼마간 까발렸다고 해서 지금 혹시 ‘씨바, 당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허, 오해 마시라. 관람에 방해될 정도까지는 밝히지 않을테니. 그랬다 그 후환을 어케 감당하려고…

웬만해선 당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는 불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완전 백지상태에서 당 영화를 관람하고 싶다면 지금 즉시 빠꾸 버튼 누질러 다른 기사 찾아보시덩가 하시고.

애니웨이, 그래서 군만두 맛을 단서 삼아 자신을 10년 동안 감금한 이를 만난 고토. 결국 고토는 그가 자신의 학창시절과 관계 있는 넘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머리는 좋았으나 하는 꼬라지나 생김새가 형편없어 반에서 왕따를 당했던 그의 뼈저린 고독을 고토가 알아차렸기 때문에 감금당했다는 기상천외한 이유가 밝혀지면서 원작만화는 그렇게 끝맺음된다. 절라 허무하게…

이것이 원작만화 <올드보이>의 대강의 스토리다. 모, 이거 알았다고 크게 걱정은 마시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이유도 모른 채 사설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풀려난 뒤 이를 밝혀낸다는 원작의 설정은 따르고 있되 그 외의 부분들은 상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혀 다르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사실 원작 <올드보이>의 경우, 감금당하는 쥔공의 설정이나 그가 그 이유를 추리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재미는 끝내줬으나 그것에 비해 결말이 허탈할 정도로 시시하고 게다가 인물들의 깊은 묘사 없이 오로지 이유를 밝히는 데에만 집중하는 까닭에 전체적으로 앙상하고 건조한 느낌이 든다.

박찬욱 감독이 많은 언론에서 당 영화를 ‘과잉’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얘기하는 까닭은 아마 이런 부분들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영화를 ‘과잉’으로 보이게 하였을까? 그런 점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인물에 대한 묘사다.

당 영화에서 감금당하는 역을 맡은이는 ‘오늘이나 대충 수습하고 살자’는 엄청난 뜻이 담긴 이름의 오대수(최민식 분), 그리고 그를 15년(영화에서 감금기간이 5년 늘었다)이나 갇혀있도록 만든 이는 ‘젠틀맨’ 이우진(유지태 분)이다.

원작에선 이들이 단순히 쫓는 인물과 의도적으로 쫓기는 인물의 구도 속에 인물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박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당 영화에서 오대수와 이우진은 처한 상황이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인물로 설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도 만화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대수가 굉장히 폭발적이고 즉흥적이며 칙칙한 인상을 준다면 이우진은 그와는 정반대로 무척 차분하며 치밀하고 깔끔하게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살고 있는 장소조차 ‘몇 평 안 되는 감옥 또는 단칸방 vs 100평이 넘는 사치스러운 펜트하우스’로 처리됨으로써 둘이 대립하고 있는 구도를 더욱 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감정이입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인물의 성격이 잘 살아나도록 하였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정반대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끝에 가보면 오대수, 이우진 모두 복수가 살아가는 원동력(?), 즉 성격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또한 시간차이는 있지만, 같은 처지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 역시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니까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실은 같은 인물인 셈이다.

사설감옥에서 15년 만에 풀려난 오대수가 옥상에서 자살하려는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고 있는 구도가 나중에 이우진에게 같은 모습으로 적용되는 등 당 영화에서 이야기적으로든, 형식적으로든 반복의 형태가 눈에 띄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 영화는 차고 넘친다는 인상을 준다.  

3.  

그런데 이런 느낌이 드는 건 단지 반복의 구도가 되풀이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 영화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스똬일에 있어서도 역시 차고 넘친다는 과잉의 느낌이 드는데 특히 영화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지는 폭발적인 음악소리를 접하고 있노라면 감독이 ‘나 이 영화 존나게 넘쳐나게 만들 거야, 씨바!’ 라고 작정하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보여졌던 메마르고 차분한 맛이 돋보였으며 그로 인해 안정감을 주었던 스타일과 비교하면 그 느낌이 더욱 확연해진다.  

일단 사운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 영화에는 정말 음악이 많이 나온다. 영화 시작한 다음 중반정도에 가서야 음악이 흘러나오던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하면 상영 내내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될 정도다.  

게다가 마빡 하나가 스크린을 반이나 차지하는 클로즈업이 사용됨으로써 굉장히 극단적인 기운이 감지되며, 컷 수에 있어서도 당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에 비해서 많은 편인데 특히 오대수가 15년 동안이나 갇혀있던 사설감옥에서의 생활을 5분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의 컷 편집은 분할화면까정 끌어들이면서 보다 빠르고 현란하게 구성하고 있다.

이외에도 누아르 화면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촬영기법이라든지 거친 입자가 돋보이는 화면 등 <올드보이>에는 많은 영화적 기교가 사용되고 있고, 세트구성에 있어서도 오대수가 갇히는 방, 미도(강혜정 분)의 방, 대수와 미도가 잠시 묶는 여관의 벽지를 격자무늬의 컬러풀한 것으로 설정하여 색깔 있는 화면을 만든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오대수가 자신이 감금되었던 장소에서 17:1로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다른 장면들과는 달리 원 컷트 원 씬으로 단순간단명료하게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폭이 여타의 과잉이 느껴지는 장면들에 비해 더 크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아 낼 수가 있다. 감독이 생각한 의도가 단순히 돈을 많이 들이고 기교로 무장한다고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충실하고 그런 기교들이 스토리를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할 때 가장 적합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얘기.

그니까 종합해 보자면 당 영화에서의 ‘과잉’은 그냥 겉멋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복수’라는 폭발적인 감정을 묘사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표현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당 영화는 현실적이기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보여 만화스럽다는 느낌도 드는데 이처럼 여러 모에서 보았을 때 감독이 당 영화 <올드보이>를 ‘과잉’으로 떡칠(?)한 건 아주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4.

그러나 이 모든 걸 떠나서 관객이 당 영화를 통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는 건 모니모니해도 그 반전의 충격이 얼마나 쎈가하는 그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당 영화가 노리는 반전의 효과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는 그 사실 하나가 <유주얼 서스펙트>의 전부였던 것과는 달리 <올드보이>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의 반전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또 놀랍지도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당 영화가 주장하고 있는 몇 가지 중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반전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신 당 영화에서의 반전은 <식스센스>처럼 마지막까지 쌓아온 논리를 한 번에 박살내는 그런 이성적인 충격이 아닌 금기를 대할 때의 정서적인 충격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밝혀졌을 때 영화가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닌 이로부터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 역시 <올드보이>가 여타의 반전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최근 반전영화가 많아지면서 안 해도 될 반전을 억지로 낑궈서 영화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건 물론이고 같지 않은 반전을 마케팅 뽀인트 삼아 관객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작금의 反반전적인 영화들이 횡행하는 작태에 비추어 볼 때 당 영화가 반전에 목숨 걸지 아니하고 이야기를 전개한 것은 훌륭한 점이었다.      

하지만비유띄벗뚜…

이 반전의 결과가 ‘모모모’와 같은 현상에 기대고 있는 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특히나 당 영화가 많은 단서와 암시를 영화중반에 흘러 놓으며 꽤 치밀하게 진행되었던 이야기인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식의 처리는 쫌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관계가 형성되어 가는 이전의 이야기에 비해 재미를 떨어뜨린 부분이었다. 앞서의 상황들을 꽁으로 먹고 들어간다는 느낌이랄까…

우찌됐던 그리하야 당 영화는 이야기면 이야기, 스똬일이면 스똬일, 이 두 요소가 ‘복수’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통일성을 이루며 독특한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만 딱 하나, 반전 부분의 허탈함으로 인해 강한 에너지가 발산되는 그 뒤의 이야기가 크게 어필하지 못한 점, 그래서 재미의 반감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의 짜임새가 다소 헐겁게 된 점은 심히 안타까웠음이다.  

5.

이렇게 해서 당 영화 <올드보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론 가보자.

당 영화, 스타일이 화사해지고 잔혹한 묘사가 줄어들긴 했지만 영화 전편에 흐르는 잔인한 기운이랄지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예기치 몬한 설정은 <올드보이>가 <복수는 나의 것>처럼 매우 논쟁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직도 박찬욱 감독에게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보여준 재미를 기대하고 당 영화를 관람했다간 심히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앞에서 말한 당 영화의 반전 이후 부분은 알려진 것과 달리 그렇게 뒷골을 땡기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것도 아니었고 뽕나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음이다. 오히려 그런 부분들보다 <올드보이>는 상이한 두 캐릭터의 면면이라든지 그 스똬일이 더욱 흥미 있는 영화였다.  

그런 전차로, 한결같은 만쉐이~ 대형을 보이고 있는 재래식 언론에 현혹되어 당 영화를 향한 과도한 기대감을 품거나 또한 반전이라는 부분에만 뽀인트를 맞추어 이것 외에 당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미난 부분을 놓치는 愚를 범하지 말기 바란다.

아무튼 여러 의미에서의 문제작, <올드보이>에 대한 검열보고 여기서 마친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