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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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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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농담도 이런 농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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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가 이번엔 소설을 썼다. 사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세계2차 대전 당시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미국의 악명 높은 나치 암살단 ‘개떼들’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과거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는 쇼사나(멜라니 로랑)의 히틀러 이하 나치 주요 인사들의 암살 작전을 다룬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타란티노가 다루는 최초의 전쟁물이자 역사물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다만 그 누구도 이 천하의 악동이 <바스터즈>를 진지하게 다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로버트 알드리치의 <특공 대작전 The Dirty Dozen>(1967)에서 영감을 얻어 구성하게 된 <바스터즈>(원제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 Inglourious Basterds’는 1978년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는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는 작품으로, 나 원 농담도 이런 농담이 다 있나, 히틀러 암살 작전이 성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좋게 말하면 대체역사전쟁물, 나쁘게 말하면 역사왜곡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바스터즈>에 대해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단순히 왜곡의 대상이 나치이고, 히틀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를 일종의 놀이로 대하는 타란티노의 성격상 그냥 한 번 웃자고 만든 작품임을 우리 모두 인지하고 있는 까닭이다. 늘 타란티노가 선보이는 상상력은 과장됐고 허풍이 셌으며, 우리는 종종 이를 근거로 그에게 ‘이야기꾼’이라는 또 하나의 수식어를 붙이곤 했다.


타란티노 영화에 깊게 새겨진 소설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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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지금 타란티노의 이야기꾼적인 기질에 대해 말할 생각이다.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1992)에서부터 전작 <데쓰 프루프>(2007)까지, 그의 영화광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활발하게 논의가 됐지만 이야기꾼적인 측면에서는 얘기된 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를 소설가적인 특징으로 바꿔 말해도 좋을 성 싶다. 실제로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소설의 요소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펄프 픽션>(1994)은 제목 그 자체로 ‘싸구려 가판 소설’을 의미하며 <재키 브라운>(1997)은 엘모어 레너드의 범죄소설 『마지막 모험 Rum Punch』(1992)를 원작 삼았고 <킬빌>(2003)에서는 챕터별로 이야기를 진행함으로써 소설적인 구성을 보여줬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영화적인 인용만큼이나 소설, 그중에서도 범죄소설에서 가져온 인용 역시 무수히 많다.

<바스터즈>는 특별히 소설적인 요소가 유난히 눈에 띠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시작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번엔 소설을 썼다’는 문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우선적으로 주요인물이 대규모로 등장할 뿐 아니라 각각의 캐릭터가 모두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대인 사냥꾼’으로 불리는 나치 장교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 미군 특수부대 개떼들의 리더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 야구 방망이로 나치의 머리를 사정없이 강타하는 ‘곰 유대인’ 도니 도노위츠(일라이 로스), 독일에 잠입해 배우 생활을 하는 영국 스파이 브리지트 폰 하머스마르크(다이앤 크루거) 등등. 이는 타란티노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공통점이기도 한데 이런 구성은 사실 소설에 더 적합한 것으로 나중에야 영화가 도입해 재미를 본 형식이라 할만하다. (이런 서브 장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 컷>(1993)이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동명소설을 원작 삼았음을 상기하라!)

다섯 개의 장(Chapter)으로 이뤄진 <바스터즈>의 구조는 집단 주인공의 효율적인 에피소드 안배를 위한 가장 적절한 구성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클라이맥스에 다가설수록 사건이 단순화된다기보다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타란티노 특유의 이야기 특성상 <바스터즈>의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장을 지지대 삼아 산만해지지 않는 가운데 극의 일관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처럼 나아가던 쇼사나와 개떼들의 에피소드가 마지막 장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범죄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같은 구성은 『이와 손톱』(1955), 『연기로 그린 초상』(1950) 등으로 유명한 빌 S. 밸린저의 전매특허라 할 만한 교차 서술 방식으로 유명하다. 타란티노는 일찍이 시나리오 작가 시절이던 토니 스콧 연출의 <트루 로맨스>(1993)부터 교차 서술 방식을 심심찮게 차용해왔다. 감독이 되고나서도 <펄프 픽션>과 <데쓰 프루프>에서 이를 그대로 사용했고 <재키 브라운>에서는 특정 사건에 대한 시간별 구성으로 변주한 전례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타란티노가 밸린저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그의 영화에서 숱하게 감지되는 범죄소설의 인용을 감안했을 때, 빌 S. 밸린저가 할리우드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해봤을 때, (그는 한동안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타린티노 영화에 드리운 벨린저의 그림자를 무시하긴 힘들다.


타란티노가 창조한 지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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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타란티노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소설적인 특징이었다면 지금부터 언급할 내용은 <바스터즈>에만 유효한 것이다. 난 이 영화에서 기능하고 있는 다국적인 언어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스터즈>에는 총 4개국의 언어가 사용된다. (이는 1978년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나치군의 언어인 독일어, 개떼들이 사용하는 영어, 극중 주요한 배경이 되는 프랑스 파리의 불어, 그리고 알도 레인이 조직원과 함께 이탈리아 영화업자로 분해 펼치는 이탈리어까지. 타란티노는 이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기호와 관습을 의도적으로 충돌시켜 사건에 기름을 붓는 역할로까지 확장한다. 예컨대, 독일인이 ‘셋’이라고 말할 때 펼치는 손가락의 모양새 때문에 총격전이 벌어지는 3장의 에피소드는 언어를 가지고 놀 줄 아는 타란티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타란티노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 언어유희에 그치지 않고 이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한다. 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영화적 유산을 그대로 <바스터즈>에 이식, 각국의 영화사를 재구성하기에 이른다. 그의 영화적 야심은 할리우드의 <특공 대작전>을 출발점 삼아 프랑스 파리의 극장을 주요한 배경으로 지정한 후 (극장 간판에는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의 <까마귀>(1943)가 걸려있기도 하다.) 나치 선전영화 <민족의 자랑>이 상영되는 가운데 마치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 <데몬스>(1985)의 한 장면처럼 죽음을 피해 극장을 빠져나오려는 관객의 아수라장으로 결말을 맺는 식이다.

이미 보도를 통해 <특공 대작전>은 물론 요제프 괴벨스가 선도한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영화를 <바스터즈>에 끌어들인 방식에 대한 언급이 수도 없었으니, 나는 여기서 극중 발견되는 이탈리아영화에 대해서 첨언할 생각이다. <바스터즈>는 ‘옛날 옛적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라는 1장의 제목과 함께 흘러나오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배경음악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탈리아 스파게티웨스턴에 대한 인용으로 시작해 (위에서 언급한) 지알로에 대한 인용으로 문을 닫는다. 특히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지알로’다. <바스터즈>에는 타란티노의 전작에서 드문드문 발견됐던 지알로의 특징이 총망라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알로는 이탈리아어로 ‘노랑’을 의미한다. 안 그래도 타란티노 영화에서 노란색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 제목이 노란색으로 표기된 경우가 잦았고(<펄프 픽션> <재키 브라운>) 포스터의 바탕색으로도 즐겨 사용됐으며(<데쓰 프루프> <킬빌>) <바스터즈>의 경우, 영화가 끝난 후 흘러나오는 크레딧이 바로 그렇다. 그러니까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노란색은 항상 중요한 뭔가 의미를 갖는다. 다시 지알로로 돌아와서, 192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한 출판사가 노란색을 표지로 한 저가의 장르소설을 발표하고 이것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싸구려 가판소설을 일컫는 말이 됐다. 즉, 지알로는 미국으로 치자면 펄프 픽션인 셈이고 <펄프 픽션>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 처음으로 노란색 제목이 등장한 작품이기도 하다.

타란티노는 늘 영화로 싸구려 장르소설을 만들어왔다. 지알로 역시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살인을 다룬 이탈리아 영화를 통칭하는 장르명이 되어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지알로를 대표하는 감독은 마리오 바바와 다리오 아르젠토, 그리고 <데몬스>를 연출한 람베르토 바바다. <바스터즈>에는 <데몬스>를 인용한 장면 외에도 지알로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요소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리오 바바가 창조한, 핏빛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을 잔인무도한 살해 장면, 희생자의 고통을 즐기려는 듯한 악취미적 연출, 다리오 아르젠토 식의 인상적인 신체 상해 장면으로 끝을 맺는 엔딩신(아르젠토는 살해 장면을 즐겼지만 타란티노는 이를 변주해 알도 레인이 한스 란다의 이마에 나치 문양을 새기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등, <바스터즈>를 일러 ‘타란티노가 창조한 지알로 영화’라고 불러도 틀릴 성 싶지 않다.


장난꾼 타란티노의 농담

사실 그의 영화는 모두 지알로이고, 펄프 픽션이었다. 다만 그의 영화광적인 면모에 비해 범죄소설 애호가의 측면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된 감이 없지 않다. 이는 한편으론 타란티노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인 긴 대화 장면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도 맞닿아있다. 그가 연출한 액션 장면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대화 장면에 있어서만큼은 호오가 엇갈린다. 필요 이상으로 상영시간을 잡아먹을 뿐 아니라 그래서 지루하다는 게 불만의 요지다.

그의 영화에서 대화는 소설로 치자면 일종의 지문이다. <바스터즈>에도 매 장마다 긴 대화가 등장한다. 특히 1장은 한스 란다가 유대인을 숨겨둔 농장주와 우유 한 잔을 가운데 두고 매와 쥐 얘기를 하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며 4장에서는 독일군으로 변신한 영국군과 이를 눈치 챈 독일군 사이에 엉뚱하게도 이름 맞추기 게임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덫은 보이지 않지만 이에서 벗어나려는 자와 몰아넣으려는 자 사이의 추격전이 말로써 존재하고, 총은 보이지 않지만 상대방의 급소를 겨냥한 총격전이 역시 말로써 이뤄진다.

어떻게 보면 타란티노는 행위보다 기호로써의 언어와 말의 어감을 더 중요시하는 듯 보이고 사건보다 그 직전까지 대화로 형성되는 분위기를 더욱 선호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만큼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말은 중요하다. 그 말의 기원은 당연히 소설, 그 가운데서 싸구려 범죄소설이다. 거기에는 말로써, 그리고 인용이라는 타란티노만의 ‘언어’로써 영화를 놀이화하려는 장난꾼의 기질의 엿보인다. <바스터즈>(를 위시한 그의 모든 영화)는 스크린에 써내려간 소설이고 결국엔 거대한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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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5)

그 감독의 그 기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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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극장가는 흔히 비수기로 꼽힌다. 1년에 한두 번 연례행사로 극장을 찾는 관객 대신 좋은 작품이면 연중무휴의 자세로 극장 순례에 나서는 관객들의 시즌이란 얘기다. 하여 여름 시즌의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이벤트성 영화가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신선한 아이디어와 연기파 배우들로 중무장한 작품들이 넘쳐난다. 여기에는 뚜렷이 감지되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감독의 존재감. 지금 소개하려는 <디스트릭트9>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 <솔로이스트>는 감독의 이름 없이 성립될 수 없는 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디스트릭트9>(10/15 개봉)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화다.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이 생체실험에 차출되고 기업에게 기술력을 착취당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무인간의 최후>를 닮았고 닐 블롬캠프 감독이 자신의 고향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삼아 뉴스릴처럼 구성한 화면에는 <포가튼 실버>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닐 블롬캠프가 2005년에 만들었던 단편 <Alive in Joburg>를 장편으로 확장하며 시나리오와 연출을 도맡았지만 피터 잭슨의 이름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10/22)는 <디스트릭트9>의 돌풍을 잠재우며 감독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 경우다. 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전작을 통해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엔니코 모리오네의 스코어가 대거 채택이 됐는데 <바스터즈> 이전 제목으로 고려됐던 것이 <옛날 옛적 서부에서 Once Upon a Time in the West>(1968)를 패러디한 <Once Upon a Time in Nazi-Occupied France>이었을 정도다. (결국 극중 챕터 제목으로 채택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디스트릭트9> <바스터즈>와 달리 <솔로이스트>(10월 중)는 감독의 이름보다 배우의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 제이미 폭스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그들. 사실 이들은 <솔로이스트> 출연에 회의적이었다.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노숙자와 그의 실력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는 신문기자의 우정을 다룬 이 영화의 배역이 자신들이 전작에서 연기한 캐릭터와 겹친다는 이유에서였다. 제이미 폭스는 <레이>(2004)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조디악>(2007)에서 각각 시각장애인 가수와 신문기자를 연기했던 것. 하지만 조 라이트가 감독으로 결정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제이미 폭스가 출연하겠다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제이미 폭스의 출연을 조건으로 걸었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승낙의사를 밝혔다.

조 라이트가 누군가. 그 힘들다는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2005)의 영화화를 데뷔작에서 성공적으로 이루고 두 번째 작품 <어톤먼트>(2007)로 그 해 아카데미에서 코엔 형제, 폴 토마스 앤더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감독이 아닌가. 조 라이트의 여성적 감수성이 배우들의 날카로운 연기력과 만난 <솔로이스트>는 미국 개봉과 함께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감동스토리를 쉽게 질리지 않도록 만든 조 라이트의 예민한 연출’(LA타임스), ‘2009년에 본 최고의 앙상블 연기’(롤링 스톤) 등 감독과 배우는 서로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가을바람에 물들어가는 색색의 단풍만큼이나 10월에 만나게 될 영화 역시 이렇게 다채로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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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claire
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