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인의 자객>과 <아웃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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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인기를 모은 두 편의 일본 영화는 미이케 다카시의 <13인의 자객>(十三人の刺客)과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アウトレイジ)이었다. 워낙 거물급 감독의 작품인데다가 한국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이들이기 때문에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관객 반응은 역시나 뜨거웠다. 다만 영화 상영 후 이어지는 관객의 평가는 상이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는 오랜 영화 경력이 빚은 매너리즘을 돌파하는 두 감독의 방법론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사실에 비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구도 에이이치가 1963년에 발표한 동명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13인의 자객>은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쇼군의 동생이자 포악한 영주를 암살하기 위해 모인 13인의 자객의 활약상을 그렸다. 그런데 쇼군에게 폭군 동생의 실상을 알린 후 할복하는 신하를 다룬 첫 장면에는 미이케 다카시의 이름을 상기해 보건데 익숙하지만 다소 생소한 측면이 존재한다. <오디션>(1999) <데드 오어 얼라이브>(2000) <이치 더 킬러>(2001) <극도공포대극장 우두>(2003) 등 화제작을 양산했던 전성기 시절의 그였다면 내장이 쏟아지는 광경을 여과 없이 보여줬겠지만 <13인의 자객>은 그렇지 않다. 인물의 일그러진 표정과 단검이 배를 가르는 소리로써 표현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을 택했다. 대개 미이케 다카시라고 하면 끝간 줄 모르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영화 문법을 파괴하며 건설한 엽기의 미학에 있지만 지금은 파격 대신 웰메이드를 지향하는 모양새다.

실은 지난 몇 년 동안 (보다 정확히는 <이조>(2004) 이후) 미이케 다카시는 예전의 악동스러움을 잃고 평작과 졸작 사이를 오가며 위태로운 행보를 보여 왔다. <13인의 자객>은 그의 걸작은 아닐지언정 다행히 오락영화의 진수를 선보이며 미이케 다카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이끌어낸다. 140분의 상영 시간 중 1/3에 해당하는 50분을 마지막 전투씬에 할애하며 박진감과 비장미 사이에서 오락의 진수를 뽑아내고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은유로써 극중 전쟁을 들여다보는 그의 안목은 주목할 만하다. 타인의 죽음에서 희열을 얻는 영주와 이에 잔인하게 희생되고 고통 받는 평범한 백성의 일상을 교차하며 전쟁에 미친 세태에 이게 대체 모하는 짓이냐며 일갈하는 것. (미이케 다카시는 주인공 신자에몬(야쿠쇼 코지)이 폭군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떨어져나간 목이 똥간으로 굴러가는 것으로 설정, 죽지 않은 악동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처럼 미이케 다카시는 (<13인의 자객>으로 판단컨대) 말초적인 감각 대신 마음을 울리는 감정을, 검의 잔인함보다 펜의 부드러움이 연상되는 연출력으로 이제는 거장의 시기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하나비>(1997) 이후 여러 장르를 전전하며 창작의 고갈에서 허덕였던 기타노 다케시는 <아웃레이지>를 통해 본인의 주특기였던 야쿠자 세계로 귀환했지만 여전히 안쓰러운 예술가의 초상에 머물러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오랜만의 야쿠자 영화인만큼 <아웃레이지> 속 야쿠자들도 세대교체의 급물살을 탄다. 그런데 이곳이 조직 세계이기는 하나 도덕과 윤리, 그리고 법률의 손아귀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보니 정상적인 방식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소나티네>(1993) 당시만 하더라도 극중 야쿠자들은 함께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동료 조직원의 복수에 목숨을 거는 등 소위 ‘야쿠자의 도(道)’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아웃레이지>가 묘사하는 2000년 이후의 야쿠자들에게는 의리 따위 돈 앞에서는 개만도 못한 것으로 전락하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배신이 판을 친다. 또한 상납에 안주하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카지노도 운영하고 조직 내부에 변호사를 거느리는 등 낭만파 야쿠자의 세계는 자기 이익에만 눈이 먼 ‘양아치’들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이렇게 야쿠자의 도가 파산 지경에 이르다보니 <아웃레이지>의 야쿠자 개인들은 하나 같이 무식하고 잔인하게 묘사될 따름이다.

야쿠자 소재와 거리를 둔 채 십년 넘게 방황을 거듭하던 다케시를 다시금 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은 급변하는 야쿠자 상(像)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의 최초 공개 당시 격렬한 찬반 논란이 일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급변하는 야쿠자의 시대상을 담은 결과 vs 악취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잔인함‘으로 나뉜 논쟁이었는데 부산에서 영화를 본 후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이다. 영화의 형식을 대변하는 잔인한 표현 방식에 불만은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뒤로 갈수록 어떻게 하면 더 잔인하게 보일까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에 과잉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웃레이지>에 대한 지지를 끝까지 망설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다.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 묘사는 고요한 순간 찰나적으로 펼쳐지는 촌철살인의 미학이 그 정수이었다. 하얀 백사장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소나티네>) 혹은 평온할 것만은 같은 해변의 푸른 하늘 위로 탕하고 울리는 한 발의 총성(<하나비>) 등이 기타노 다케시의 폭력 세계를 매력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그런데 <아웃레이지>는 제목처럼 ‘난폭하게’(outrage) 밀어붙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과도한 묘사가 형식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되고 말았다. 올 초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 문화청 문화 부장이자 영화평론가인 데라와키 켄은 최근 10년 동안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멍청하다’는 표현을 썼다. <아웃레이지>가 공개된 지금에도 그 평가는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야심차게 준비한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복귀작은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에 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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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10.22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スキヤキウエスタン ジャンゴ)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이케 다카시의 장기는 장르 혼합이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 <오디션> <비지터 Q> 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한 영화에 두 개의 장르가 섞여 있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이탈리아의 ‘스파게티 웨스턴’과 일본의 ‘사무라이 활극’을 섞은 변종 서부극이다. 그리하여 제목도 이탈리아의 대표음식 ‘스파게티’를 일본의 쇠고기 요리 ‘스키야키’로 바꾼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

단노우라 전쟁이 막을 내린 수백 년 후, 전쟁 중 유실된 전설의 보물을 찾기 위해 겐지(사토 고이치)와 헤이케(이세야 유스케)가 수장으로 있는 두 부족이 산골마을로 찾아온다. 사무라이 정신을 앞세운 겐지 부족과 총으로 무장한 헤이케 부족의 충돌로 조용할 날이 없던 어느 날. 석양의 빛을 등지며 무명의 총잡이(이토 히데아키)가 홀연히 등장하니, 그의 현란한 총 솜씨에 매료된 두 부족은 마을을 평정하기 위해 그와 손잡으려 한다. 그러나 총잡이의 관심은 따로 있다. 아픈 상처를 짊어진 채 유랑생활을 하던 그가 이 마을에 거처하면서 아버지를 잃은 한 꼬마의 사연을 듣게 된 것.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 총잡이는 아이를 보호해주기로 마음먹고 겐지와 헤이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다. 결국 아이의 어머니가 헤이케에게 능멸 당하면서 총잡이와 헤이케, 그리고 겐지 간의 목숨을 건 마지막 결투가 벌어진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에서 주인공과 배경을 가져온 후 그 안에 구로자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채워 넣은 듯한 모양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장르와 문화가 결합한 만큼 영화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다. 서부극의 배경인 ‘황야’가 등장하지만 그 위의 무대는 일본 특유의 형식미가 돋보이는 미장센이고, 말을 탄 총잡이의 장총과 사무라이의 날 선 검이 한 화면에 공존하며, 권모술수와 왜곡된 욕망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어느새 거친 들판에 핀 붉은 장미를 보여주며 희망적으로 마무리되는 식이다. 특히 희망을 상징하는 꼬마가 후에 ‘장고’라는 이름으로 성장한다는 자막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짬뽕’ 미학의 결정판이다!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는 매 장면 이질적인 요소가 대립 항을 이루지만 따로 노는 법이 없다. 장르의 규칙을 변용하면서도 스파게티 웨스턴의 반체제적인 영웅과 전복적인 이야기 구조, 그리고 일본 활극의 비장미와 의리 따위에 집착하지 않는 동물적인 캐릭터 등 큰 줄기만큼은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재료를 가지고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미이케 다카시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닮았다. 다만 쿠엔틴 타란티노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현대영화를 만든다면 미이케 다카시는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가지고 새로운 종류의 장르를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타란티노의 출연은 역시 이 영화의 백미다. 젊은 총잡이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쇠한 총잡이까지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그의 존재는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의 영화적 좌표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표다. 타란티노의 출연을 절실히 바랐던 미이케 다카시는 친분을 이용, 노 개런티로 출연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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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53호
(2007.10.2)

<착신아리>(着信アリ)


<데드 오어 얼라이브>, <오디션>, <이치 더 킬러> 등으로 상당히 많으면 많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의 재야 영화팬을 확보하고 있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메시지가 도착했슴돠’라는 뜻의 당 영화 <착신아리>는 그의 첫 번째 국내 정식 개봉작으로, 핸펀을 통해 들어온 메시지에 하나둘 골로 가는 친구들에 이어 예고 죽음에 직면한 쥔공 유미(시바사키 코우 분)가 문제의 저주를 풀기 위해 나섰다가 조빠지게 욕본다는 내용의 공포물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스토리지 않냐? 그렇취, 사다꼬의 <링>. 이처럼 당 영화는 비됴테잎을 핸펀으로만 살짝 바꿔치기 했을 뿐 영화의 구성이라든지 주제 등 여러 모에서 <링>을 노골적으로 베껴먹고 있는 티가 다분하다. 근데 이 땜에 <착신아리>가 선사하는 각종 꼬추 쪼그라드는 공포가 약발을 잃는 것은 아니다. 설정은 빌려왔을지언정 거기서 우려내는 공포는 <링>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당 영화는 구신을 전면에 내세운 정공법 공포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래서 개미쉐이 한 마리 볼 수 없는 으슥한 곳 뿐 아니라 온 국민이 보고 있는 공개 생방송 도중에도 구신이 나타나 사람을 놀래킬 정도다. 게다가 이걸 ‘공중부양 관절꺽기 살육’이라는 <엑소시스트>의 스파이더워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엽기적인 장면으로 확 가게 표현하니 이 아니 무서울쏘냐.

뭣보다 상영 내내 느려터진 듯 서서히 조여 가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상영시간 30분을 남겨둔 시점에서 폐쇄된 병원에 달랑 떨궈논 쥔공 유미만 집중 괴롭히는 공포는 아무리 심장이 고래 쇠심줄로 돼있는 강심장의 소유자일지라도 오줌 찔끔하지 않고는 못 베길만큼 가공할 만한 무서움을 선보이고 있음이다.

하지만 비유띄 벗뚜!

아동학대와 같은 폭력이 잉간들로 하여금 기계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킨다는 우짜고저짜고를 저주받은 핸펀에 투사하여 전염되는 저주로 승화한 이야기는 나름대로 뽀대는 나나 앞서에서 제기한 바대로 이미 <링>뿐만 아니라 그의 아류작을 통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접하고 또 접한 스또리인지라 자칫 김 빠질 소지가 다분하다.

아닌게 아니라, 생선가시 발려먹듯 마지막까지 <링>의 뒤안길을 따라서 반전 비스무리한 걸로 종지부를 찍겠다며 한 번 꼴 거 두 번 꽈 버려서 관객의 기대치만 이빠이 올려놓고 별로 무섭지도, 그렇다고 뽕빠지게 놀랍지도 않은 플레이로 마무리한 점, 관객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좀 적당히 벤치마킹 했으면 좋았을 걸 왜 그랬냐..

그러다보니 아무리 ‘피바다의 보고’로 악명 높은 다카시 감독의 작품이라지만 당 영화에서는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고어 필살기라든지 끝간데 모르는 상상력이 상당부분 실종되어있다. 그의 영화를 지둘려왔던 팬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할 전망이다.

그래서 결론을 얘기하자면, 당 영화 클라이막스만 놓고 보면 공포영화로써 관객을 공포의 도가니탕으로 안내하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 전까지의 과정은 밍숭맹숭한 것이 <링>을 안 봤으면 모를까, 이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즐기기 요원해 보이누나.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뮝기적에 봉한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