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인연>(Minnie and Mosko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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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인연>이라는 국내 제목이 이 영화의 내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주인공 ‘미니와 모스코비츠 Minnie and Moskowitz‘는 진짜 별나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모스코비츠(세이무어 카셀) 쪽은 유아적이다 못해 괴팍하게 비칠 정도다. 발레파킹 요원으로 근무하는 그는 퇴근 후 혼자 영화를 보고 술집에 들어가 여자를 희롱하는 게 일상의 전부인 노총각이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미니(지나 롤랜즈)는 모스코비츠처럼 개차반은 아니지만 남자 복만큼은 지지리도 없는 여자다. 사랑하는 유부남은 아무렇지 않게 손찌검을 휘두르고 어쩌다 소개받은 남자는 아뿔싸(!) 이런 비호감이 없다. 이때 미니 앞에 나타난 모스코비츠, 이들은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숏버스>(2006)를 만들 당시 “영화의 톤이나 스타일 면에서 존 카사베츠의 작품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며 특별히 <별난 인연>에 대해서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라고 언급했다. 실제로 <별난 인연>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형태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관련한 단서는 극 초반 <카사블랑카>(1942)를 관람하고 나온 미니가 동료와 나누는 대화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현실에선 보기(험프리 보가트 애칭)같은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하물려 영화에서처럼 로맨틱한 사랑은 언감생심이지.” 그러니까 <별난 인연>은 하늘에 붕 뜬 조각구름 같은 로맨스가 아니라 질퍽한 현실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 같은 사랑영화다.

미니는 선녀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이 눈에 거술리는 모스코비츠는 선남과 거리가 멀고 멋들어진 레스토랑이 아닌 지저분한 거리의 포장마차가 이들 데이트의 배경이 되며 스포츠카에서의 밀담과 같은 낭만 따위는 저 멀리 나빌레라 엔진 소리 요란한 트럭이 ‘별난’ 이들의 인연을 강조한다. 이렇듯 기존의 장르와 미장센 자체의 격(?)이 다르다보니 진행되는 이야기의 양상도 다르다. 외로움에 사무쳤지만 소통에는 미숙해 사사건건 부딪히기 일쑤인 이들의 삶에는 달콤한 환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간신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하지만, 그럼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도 됐을 결말을 카사베츠는 굳이 더 들어가 이들의 사랑에 찬물을 끼얹는 에피소드를 마련, 일말의 환상마저도 제거하는 것이다.

존 카사베츠 영화가 갖는 편집의 독특함, 즉 앞뒤 재지 않고 불친절하게 장면과 장면을 뚝 끊어 연결하는 방식은 즉물적인 캐릭터들의 성격과 태도에서 기인한다. 홍상수 영화의 즉흥적인 서술 방식이 실은 극 중 인물들이 그 때 그 때 벌이는 술자리에서의 노닥거림의 반영이듯 존 카사베츠 역시도 미니와 모스코비츠의 즉각적인 감정 표현을 편집에 그대로 반영한다. 이는 카사베츠가 사건보다 인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매번 루저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하는 그의 영화는 그래서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인디펜던트 영화가 갖는 특유의 생생함이 카사베츠의 작품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는데 그처럼 <별난 인연>의 미니와 모스코비츠도 결국엔 관객들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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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시네마테크
2012년 5월호

<사랑의 행로>(Love St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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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작가인 로버트 해먼(존 카사베츠)은 어린 배우 지망생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너에게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언제였니?” 이에 대해 지망생은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이 질문을 해먼에게 돌려보면 그 역시도 마땅한 대답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오랜만에 만난 12살 아들을 혼자 호텔방에 남겨두고 인터뷰를 빙자해 만난 여자들과 하룻밤 사랑을 즐기는 그에게 인생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술과 담배와 커피에 절어사는 모습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해먼의 인생에 과연 의미라는 것이 존재할까?

<사랑의 행로>는 인생의 의미 여부를 떠나 적어도 해먼과 같은 이들에게 계속 살아나가기 위한 의지와 삶에 대한 끈기가 있다고 말하는, 그럼으로써 응원하는 영화다. 해서 이 영화에는 우리가 쉽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 짓는 인물들의 총집합이라 할 만하다. 해먼과 함께 극의 중심을 이루는 그의 여동생 사라(지나 롤랜즈)는 괴팍한 성격과 갖은 기행 탓에 남편(세이무어 카셀이 연기했는데 그래서 <사랑의 행로>는 ‘<별난 인연>의 10년 뒤 이야기’라는 부제를 붙이면 그럴싸할 것 같다.)에게 이혼당하고 하나 있는 딸마저도 등을 돌린 인생 막장에 몰린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기행을 들여다보면 마음의 깊은 우물 속에는 애정결핍이 넘쳐흐를 듯 고여 있다. 사실 해먼과 사라가 불러오는 사건과 말썽의 근본적인 원인은 마음 둘 사람을 찾고 싶지만 워낙 관계와 소통의 기술이 떨어지는 까닭에 자신들의 진짜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탓이 크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연출에 있어서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거리를 유지했던 카사베츠는 주류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소외된 인물에 눈높이를 맞춰 그들의 삶과 태도에 아낌없는 애정과 응원을 보내왔다. <사랑의 행로>에서 특히 두드러지듯 사건의 당사자뿐 아니라 주변의 인물에게까지 숏을 제공하는 카사베츠의 연출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그와 같은 관심은 곧 타인을 향한 시선의 흐름을 전제한다. 그것은 곧 사랑이 갖는 의미이기도 한데 아닌 게 아니라,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사라가 딸과 함께 살 자격이 충분하다며 항변하는 대사 “사랑은 서로에 대한 관심(streams)이에요. 그것은 멈추지 않고 계속돼요.”라는 이 영화의 원제가 ‘Love Streams’인 이유를 직설한다. 해먼과 사라의 각각의 에피소드를 평행하게 진행하며 각자의 외로움을 부각한 후 이들의 조우와 함께 이야기가 하나로 합치는 구조는 관심과 연대가 곧 사랑과 애정이 되는 영화의 주제를 반영한 결과일 테다.

그런 영화적 주제의 실천일까. 존 카사베츠는 일찍이 연출 데뷔작 <그림자들>(1959)의 성공으로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찍을 기회를 얻어 <투 레이트 블루스>(1961)와 <기다리는 아이>(1963)를 만들었다. 하지만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는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후에 할리우드를 통해 <글로리아>(1980)와 <사랑의 행로>를 배급하며 스튜디오 시스템과 화해에 성공한 뒷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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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시네마테크
2012년 5월호

<슈퍼 에이트> 괴수는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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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에이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발화되는 열차 전복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이 영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처럼 <슈퍼 에이트>의 괴수를 실은 ‘열차의 도착’은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장르의 본격적인 출현을 예고한다. 지난해만 해도 <황당한 외계인: 폴>의 그렉 모톨라, <리얼 스틸>의 숀 레비 등 스필버그에게 영향받은 ‘스필버그 키드’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중 <슈퍼 에이트>의 J. J. 에이브람스는 <미지와의 조우>(1977)와 <E.T.>에 대한 오마주로 <슈퍼 에이트>를 제작, 연출함으로써 좀 더 직접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신화를 2010년대 버전으로 갈무리하는 것이다.

에이브람스 버전의 <미지와의 조우> 혹은 <E.T.>

특수 분장에 관심이 많은 조이(조엘 코트니)를 필두로 감독지망생 찰스(라일리 그리피스)와 마틴(가브리엘 비소), 캐리(라이언 리), 프레스턴(작 밀스), 그리고 앨리스(엘르 패닝)는 ‘슈퍼 8’ 카메라를 가지고 좀비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할 생각에 부풀어 있다. 각자 역할을 맡아 밤에 몰래 기차역에서 촬영을 하던 중 선로에 뛰어든 의문의 자동차로 인해 운송열차가 전복되는 사건을 목격한다. 그 사이에 정체불명의 괴수가 탈출하고 이후 마을에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전기를 발동시키는 전자부품들이 사라져 수시로 정전이 되는가 하면 마을사람들이 하나둘 없어지기까지 한다. 급기야 군인들이 마을을 들쑤시면서 괴수는 정체를 드러내기에 이르고 아이들은 더 큰 위험에 직면한다.

<슈퍼 에이트>는 에이브람스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에서부터 출발한다. 10대 초반 슈퍼 8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어 영화제에 출품한 경험 말이다. (이는 당시 지역 신문에도 실렸는데 기사를 본 스필버그는 본인의 8mm 영화 편집을 어린 에이브람스에게 맡기기도 했다.) 영화로 사고하고 그러면서 성장한 에이브람스의 무비 키드로서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슈퍼 에이트>는 극 중에서 발생하는 재난현장이 곧 아이들이 찍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구조로 진행이 되는 까닭에 ‘<E.T.>와 <클로버필드>가 만났을 때’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온갖 시각적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을 슈퍼 8 카메라 렌즈에 고정시킨다면 그 속을 채우는 건 스필버그의 초기 외계인 장르의 영화다.

<미지와의 조우> <E.T.>는 외계인 장르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외계인이 이들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전혀 악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해체된 미국 중산층 가족의 결합을 돕거나(<미지와의 조우>), 아빠가 부재한 아이들의 대체 부모 역할을 할(<E.T.>) 정도로 친근하게 묘사됐던 것이다. 다만 <슈퍼 에이트>는 조이와 친구들이 외계의 존재, 즉 괴수를 지구로부터 탈출시킨다는 내용 때문에 <미지와의 조우>보다는 <E.T.>의 정서에 더 가깝다. 영화가 시작되면 떠오르는 엠블린 엔터테인먼트의 이티를 태운 자전거가 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로고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 때문에 영화의 배경 역시 <E.T.>가 개봉했던 1980년대를 전후하고 있는데, <슈퍼 에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 설정을 보인다. <E.T.>의 엘리엇, 마이클, 거티 남매에게 아버지가 부재했던 것과 달리 <슈퍼 에이트>의 조이는 끔찍한 사고로 엄마를 잃었으며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귀엽고 다소 어수룩해 보였던 외계인의 이미지는 에이브람스 버전에서는 끔찍하고 공격적인 괴수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차이는 영화 내적으로보다 외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E.T.>와 <슈퍼 에이트>가 각각 제작된  시기의 사회적 배경, 특히 가족의 위상과 관련해서 말이다. <E.T.>에서 스필버그는 외계인을 대체 아버지의 위치에 세워두고 해체된 엘리엇 가족의 봉합을 이야기했는데 <슈퍼 에이트>는 그 방법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2010년대의 가족 신화

<슈퍼 에이트>가 종국에 내세우는 메시지는 사이가 벌어진 가족의 결합이다. <E.T.>와 비교해 별다른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다다르는 과정은 사뭇 다르다. 두 영화가 극 중 비슷한 시간대의 배경을 공유하지만 실제 개봉 시기는 무려 3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 할 만하다. 그동안 스필버그는 가족의 봉합을 넘어 아버지의 지위 복권을 일관되게 전파해왔다. 그러면서 외계인을 바라보는 스필버그의 시선은 완전히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예컨대, <우주전쟁>(2005)의 세 발 달린 거대한 괴물체만 하더라도 무차별적 살육으로 인간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자식을 돌보는데 무관심했던 레이(톰 크루즈)는 외부의 침입자에 맞서 끝까지 아이들을 보호, 흩어진 가족을 불러 모으며 강인한 아버지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니까 에이브람스는 변모한 스필버그의 외계인 장르 공식을 가지고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릴법한 <E.T.>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슈퍼 에이트>의 관건은 하나. 육체는 어른이지만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아버지의 지위 복권은 어떻게 이뤄질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조의 아빠 잭슨(카일 챈들러) 경관은 부인을 잃은 후 사면초가다. 혼자서는 도무지 조를 키울 능력이 떨어져 보인다. 화장실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가 하면 방학동안에 조를 야구 캠프에 보내 잠시간 짐(?)을 덜어낼 생각까지 한다. 무엇보다 앨리스와 어울려 영화를 찍는 조를 도무지 이해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인의 죽음에 앨리스의 아빠 루이스(론 엘다드)가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잭슨이 아버지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조뿐만 아니라 루이스와도 관계 개선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화해를 중간에서 주선해야 하는 것은 실은 엄마의 몫이다. 하지만 조와 앨리스의 엄마는 모두 부재한 상태다. (앨리스의 아빠 왈, “앨리스 너도 엄마처럼 날 떠나버려”) 대신 이들의 관계 개선에 결정적인 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공교롭게도 괴수다. 다시 말해,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인데 얼핏 봐서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괴수가 엄마라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괴롭혀서다. 괴수는 공군기지 ‘에어리어 51’에 갇혀 이유 없이 생체 실험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며 인간에 대한 증오가 생겼고, 조의 엄마는 그녀의 죽음으로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의 분란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죽어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어떻게 해서든 조와 앨리스 집안에 생긴 오해를 풀어줘야지만 마음 편하게 이승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두 집안 사이의 화해를 이끌어낼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바로 괴수다. 괴수가 마을의 온갖 쇠붙이를 끌어 모아 우주선을 만들어 지구를 떠나려는 행위는 곧 조의 엄마가 그녀로 인해 생긴 현세의 오해를 해결한 후에 하늘나라로 올라가려는 은유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하여 에이브람스는 괴수의 특정행동들을 엄마의 죽음으로 발생한 오해를 해결하는 일종의 힌트처럼 작용시킨다. 무덤 옆 주차장 공간 지하에 은신처를 마련케 함으로써 괴수를 죽은 조의 엄마의 대리인으로 위치시키고, 괴수에 의해 납치된 앨리스를 이곳에 보관해 놓아 조가 오게끔 유도함으로써 어린 연인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며, 그동안 불화하던 조와 앨리스의 아빠가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게 괴수=엄마라는 공식이 서서히 무르익을 때 쯤 감질 맛나게 부분적으로 모습을 비추던 괴수는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크리처 디자이너 네빌 페이지에 따르면, 괴수의 눈은 극 중 조의 엄마의 눈에 가깝게 디자인했다고 전한다.) 그 과정은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 생긴 불화가 풀어지는 흐름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것은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정신적 성장과 맞물려 진행된다. 루이스가 공장에 결근한 탓에 대신 출근한 조의 엄마가 사고를 당한 것을 두고두고 원망하던 잭슨은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단순한 사고(“accident, just accident”)였다고 인정하며 화를 푸는 것이다. “우린 이해해. 살다 보면 나쁜 일도 생겨. 나쁜 일도 있지만 계속 살아갈 수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위기에 빠진 조가 괴수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던지는 말인데 조와 괴수의 관계뿐 아니라 잭슨과 루이스 사이에서도 유효한 메시지다.

화해의 메시지


J. J. 에이브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아버지의 지위 복권에 따른 가족 봉합을 좀 더 넒은 의미로 확장한다. 아버지의 성장 메타포는 받아들이되 가족 화해의 단위를 이웃으로까지 범위를 늘려 화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스필버그의 가족영화가 온전히 미국 내부의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에이브람스의 영화는 내부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읽힌다. <E.T.> 당시만 하더라도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 결속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외부의 문제가 내부에 잔존한 <슈퍼 에이트>의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내부 결속을 넘어선 외부 세계와의 화해다. 화해는 집착을 버리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결국 이와 같은 소동이 벌어진 것은 지구에 불시착한 괴수가 자기 별로 돌아가려는 것을 도와주기는커녕 군사적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됐다.  

그런 이기심은 대개 집착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지구를 떠나려는 괴수를 포획하려는 어느 군인의 집착, 부모 사이에 생긴 갈등을 자식으로까지 전가하려는 잭슨과 루이스의 집착, 그리고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놓지 않으려는 조의 집착. 조와 앨리스 집안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조의 엄마를 두고 벌어진 집착으로 빚어진 결과다. (그래서 <슈퍼 에이트>의 오프닝은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미장센으로 시작한다.) 조가 웬만해서는 품속에서 꺼내지 않는 엄마의 사진이 든 목걸이는 그런 집착을 상징하는 도구다. 아빠의 성장이 집착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했듯이 조의 성장 역시도 엄마와의 옛 기억을 놓을 때 이뤄진다. 우주선의 자성에 이끌려 날아가던 목걸이를 손에서 놓자 괴수는 비로소 지구를 떠날 수 있게 되는데 마치 조가 붙들고 있던 엄마의 기억에 대한 집착을 저 멀리 떠나보내는 모습과 꼭 닮아있다. 새로운 시대는 그렇게 열리는 법이다. 스필버그 키드의 대표주자인 에이브람스가 스필버그의 유산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 새로운 스필버그 장르를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관 속 작은 학교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2.2.1)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We Bought a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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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예전 같지 않다. <엘리자베스 타운>(2005)에 이어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가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의 동명 에세이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아내를 잃은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다. 얼떨결에 동물원을 매입하면서 그곳의 직원과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지만 상처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극복의 과정이 너무 일사천리로만 진행된다. <제리 맥과이어>(1996) <올모스트 페이모스>(2000)에서 극 중 인물의 구멍 난 가슴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메우는 데 특기를 보인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더욱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록이나 메이저리그 야구와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에 익숙한 그의 취향 탓일까. (그는 ‘롤링스톤’의 음악평론가 출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에서는 다양한 동물의 면모만 겉핥기 할 뿐, 동물원의 문화라 할 만한 요소를 벤자민 가족의 사연에 제대로 접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가족영화라지만 천하의 맷 데이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데려다 놓고 키스 한 번으로 마무리하는 러브스토리라니. (그래서 오히려 엘르 패닝이 등장하는 아이들의 러브스토리가 더 돋보이기는 한다.) 이래저래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영화가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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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머니볼>(Money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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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을 기대케 하는 것은 인물의 입체적인 접근을 통한 사회 바라보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는 <카포티>(2005)의 베넷 밀러가 연출자로, <소셜 네트워크>(2010)의 아론 소킨이 작가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머니볼>은 돈이 우승과 직결되는 풍조가 만연한 프로스포츠계,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메이저리그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가치를 보여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단장 빌리 빈(브래드 피트)을 다룬다.

야구의 꽃이랄 수 있는 타율과 타점, 홈런처럼 보이는 수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출루율과 같은 효율성으로 선수를 선발, 우승권에 근접한 팀을 만든 빌리 빈의 업적은 100년이 넘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는 혁명과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빌리 빈이 구단 원로들의 반발을 묵살하고 기어코 성과를 이루고야 마는 플롯 구조는 베넷 밀러와 아론 소킨 콤비가 미국의 뉴 프론티어 정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빌리 빈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 얻은 성과는 3~4년 전에 정점을 찍은 후 지금은 다소 주춤한 상태다. (2011년 오클랜드의 성적은 74승 88패 서부지구 3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빌리 빈의 ‘스몰볼’이 맹위를 떨칠 때도 오클랜드는 플레이오프에서 번번이 탈락, 메이저리그 전체 우승까지는 이루지 못했다.

그런 빌리 빈의 업적이 지금 <머니볼>을 통해 재조명받는 것은 미국의 내부적 상황과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을 강타한 금융 위기는 절대적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폐해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겹쳐놓으려는 듯 <머니볼>은 영화의 첫 화면에 ‘뉴욕 양키스 연봉 총액 1억 2천 5백만 달러 vs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연봉 총액 4천1백만 달러’라고 적시한다. (하지만 양키스는 어슬레틱스를 무찌르고 2001년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머니볼>은 스몰볼의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옹호하지 않는다. 1918년 이후 우승이 없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스몰볼의 가치에 매료되어 큰돈에 빌리 빈을 영입하려 한다. 하지만 돈보다 우정을 택한 빌리 빈은 오클랜드 잔류를 선언한다. 하지만 부자 구단 레드삭스는 2004년 스몰볼이라는 효율성을 장착한 후 8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고 오클랜드는 또 한 번 플레이오프에서 눈물을 삼키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베넷 밀러와 아론 소킨은 큰돈을 가치 있게 굴릴 수 있는 효율성이야말로 지금 미국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빌리 빈을 다루지만 특정 인물의 스펙트럼을 통과해 사회에 대한 발언으로 기능한다. 제목이 <스몰볼>이 아니라 <머니볼>인 이유, 바로 이 때문이다.

<레스트리스>(Res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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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 ‘청춘’과 ‘죽음’은 매우 익숙한 요소다. 장편 데뷔작 <말라노체>(1986)부터 근작 <파라노이드 파크>(2007)까지, 언급한 소재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레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듯한 청춘이 등장하고 이들이 모두 죽음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엘리펀트>(2003) <밀크>(2008)처럼 최근의 사회성 짙었던 작품들과 달리 <레스트리스>는 ‘구스 반 산트의 러브스토리’라 할 만큼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모양새를 취한다. 헨리 호퍼(고(故)데니스 호퍼의 아들)와 미아 와시코우스카와 같은 차세대 할리우드 스타들이 등장해 폴 매카트니, 엘리엇 스미스 등 잔잔한 록 넘버에 맞춰 동화 같은 사랑을 나누고 또 눈물까지 자아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구 평론가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청춘을 죽음과 연결해 그 아슬아슬함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구스 반 산트의 연출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레스트리스>가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 작품성은 뒤쳐질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에 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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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11월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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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 올 여름 가장 뛰어난 블록버스터가 될 거라고 예상했을까. 오리지널 <혹성탈출>(1968)의 결말이 남긴 충격의 여운은 가실 줄 몰랐고 이를 무시한 채 천하의 팀 버튼이 리메이크에 덤벼들었다가 나가떨어진 터였다. 그래서 나온 전략이 프리퀄.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지능을 갖춘 원숭이가 인간과 대립한다는 오리지널의 설정을 느슨하게 가져오되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구성했다. 인간의 폭력적인 문명에 반발한 원숭이들이 실험실을, 동물원을 박차고 나와 그들만의 제국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자연과 문명의 자연스러운 공존을 역설하는 영화의 메시지처럼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고전적인 이야기 구성과 최첨단의 원숭이 CG가 사이좋게 결합한다. 특히 앤디 서키스가 분한 원숭이 시저의 연기는 CG임에도 불구, 미세한 감정 표현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무리 없이 이끌어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진화의 시작이라고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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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9월호

<퍼스트 어벤저> 강인한 젊은이로 만들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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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어벤저>의 진짜 제목은 <캡틴 아메리카: 더 퍼스트 어벤저>(Captain America: The First Avenger)다. 국내 개봉 시 제목의 ‘캡틴 아메리카’가 빠진 이유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7월 4일자 ‘할리우드 리포터’ 보도(http://www.hollywoodreporter.com/news/captain-america-keep-us-title-207939)에 따르면, 미국의 파라마운트사가 한국 수입사에 <캡틴 아메리카: 더 퍼스트 어벤저>와 <퍼스트 어벤저> 둘 중 하나의 제목을 고르라고 했고 그래서 채택된 것이 바로 <퍼스트 어벤저>다. (한국,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만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으로 개봉한다!) 한국의 수입사 측에서 제목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아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전혀 짐작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미국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내용이 한국 국민의 정서상 국내 흥행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캡틴 아메리카를 따르라!

<퍼스트 어벤저>의 캡틴 아메리카는 마블 코믹스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등 전 세계적으로 친숙한 캐릭터를 제치고 캡틴 아메리카가 마블의 간판으로 꼽히는 이유는 슈퍼히어로의 원조 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블 코믹스의 전신 ‘타임리 퍼블리케이션 Timely Publication’이 1941년에 선을 보인 캡틴 아메리카는 이후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물의 공식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평범한 인간의 삶을 살다가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돼 지구 평화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슈퍼히어로물의 원형을 제시한 것이 바로 <퍼스트 어벤저>, 즉 캡틴 아메리카인 것이다. (‘천둥의 신’ 토르는 예외에 속한다.)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는 어서 빨리 군인이 되어 히틀러의 나치군 만행을 저지하고 싶지만 신청도 하기 전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다. 이쑤시개 같은 몸매의 허약체질 어린이를 연상시키는 까닭에 도움이 안 된다는 군 당국의 판단이 작용한 탓. 하지만 애국심이며 정의감이며 근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티브는 에스카인 박사(스탠리 투치)의 특별전형(?)으로 군 입대를 명받는다. 사실 에스카인 박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능력을 키우는 ‘슈퍼 솔져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 중이었는데 스티브는 이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로 변모한다. ‘쭉쭉딴딴’한 가슴근육은 물론, 그 어떤 공격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와 압도적인 힘을 갖게 된 스티브, 아니 캡틴 아메리카는 적진의 심장부에 투입돼 맹활약을 펼친다. 

원형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퍼스트 어벤저>는 시초에 해당하는 만큼 후에 나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등과 달리 슈퍼히어로가 되는 과정이나 활약이 거창한 허구에 기대지 않는다. 뭐랄까, 좀 더 현실에 밀착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치에 적을 둔 레드 스컬(휴고 위빙)의 야욕에 맞선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을 묘사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퍼스트 어벤저>가 큰 인기를 모은 건 이 작품의 코믹스가 처음 발매된 1941년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미국의 세계2차 대전 참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 <퍼스트 어벤저>는 캡틴 아메리카가 히틀러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표지로 화제를 모았고 기세를 모아 1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 코믹스는 출발부터 미국국민의 애국주의에 편승해 인기를 누렸던 셈이다.   

이를 영화화한 <퍼스트 어벤저>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매우 시대착오적으로 비친다. 실제로 빼빼마른 우리의 주인공 스티브가 군에 입대한 친구를 보며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엉클 샘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Uncle Sam’s I WANT YOY’ 문구가 새겨진 그 유명한 미국의 징병 포스터가 비추면 상영관에는 웃음이 터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의 에스카인 박사와 군인이 되지 못해 안달 난 스티브 로저스의 대화는 이전 장면의 징병포스터가 시대를 초월해 현세대의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히틀러를 무찌르고 싶나?” “아니요, 그저 불량배가 싫을 뿐입니다.”

(나는 이 코믹스를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 대사는 영화화되는 과정 중에 첨언된 것으로 보인다. ‘불량국가 rouge state’라는 용어는 미국이 소련과의 냉전을 끝낸 후 새로운 적을 위해 만들어낸 용어로 유명하다. 특히 조지 부시는 9.11 이후 북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을 ‘악의 축’으로 지칭하며 불량국가의 개념을 널리 퍼뜨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배경을 상기할 때, <퍼스트 어벤저>는 극중 시대 배경을 세계2차 대전으로 잡고 있지만 ‘불량(배)’이라는 단어를 교묘히 드러내는 대사를 통해 현대의 특정 국가를 은연중에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적으로 상정하는 건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가 아니다. 극중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제거하려는 레드스컬은 오히려 히틀러까지 밀어내고 세계를 정복하려 하지만 그 공격 대상은 뉴욕, 워싱턴, 시카고와 같은 미국의 주요 국가다. 레드스컬은 단순히 미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량배인 거다. (해골을 형상화한 생김새는 그냥 악(惡) 그 자체다.) 그리고 현실의 미국은 여전히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는 이유로 그 자신들의 평화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소위 불량국가로 명명한 집단들에 맞서 가장 많은 전쟁을 자행하고 있다. <퍼스트 어벤저>가 세계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대적으로 느껴진다면 이런 이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드바디의 귀환

<퍼스트 어벤저>가 ‘노골적인’ 미군 홍보물이 될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던 조 존스톤 감독 이하 제작진들은 제목의 축소 허가는 물론 극중에서 캡틴 아메리카라는 호칭을 웬만해선 사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가 이끄는 최정예요원들이 다국적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미국 중심의 세계관의 질량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해외 흥행을 염두에 둔 설정이지만 그만큼 더 많은 관객들에게 영화의 메시지를 알릴 수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퍼스트 어벤저>처럼 정치적인 입장은 최대한 덜어낸 인상을 주면서 은근한 방식으로 미국적 세계관을 전파하는 것이 최근 1~2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보여주는 중요한 경향 중 하나다. 특히 노골적으로 ‘미국 만만세’를 외쳤던 과거의 전쟁영화들과 달리 허구의 설정이 전제된 Sci-Fi, 코믹스와 같은 장르물로 전쟁을 미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써커펀치>(2011),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2009) <스타트렉: 더 비기닝>(2009) 등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들은 하나같이 Sci-Fi의 장르 형태를 취하면서 전쟁을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예컨대, <트랜스포머>와 <터미네이터>가 로봇에 대한 유년기의 꿈을 현실화하며 폭력에 대한 환상성을 키운다면 <써커펀치>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어린 여전사들의 섹시한 몸매 전시를 통한 낭만성으로, <스타트렉>은 풋내기 소년의 리더로의 성장을 광활한 우주 배경의 스페이스 모험담으로 포장하며 전쟁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식이다.

이때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다름 아닌 육체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이를 두고 ‘하드 바디 Hard Body’라는 용어를 유행처럼 사용했는데 (수잔 제퍼드가 쓴 <하드 바디: 레이건 시대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남성성 Hard Bodies: Hollywood Masculinity in the Reagan Era>가 가장 유명하다) 미국의 막강한 힘은 남성 중심적이고 강하고 터프한 육체로 종종 고무 찬양되고는 했다. 즉, <트랜스포머> <터미네이터>의 금속성 육체, <써커펀치>의 첨단무기와 복장, <스타트렉>의 우주함선 등은 2000년대 버전의 하드바디라 할만하다. 그리고 <퍼스트 어벤저>는 전쟁 병기로써의 하드바디를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맥락화한 경우다.

과거 미국의 198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하드바디 영화들인 <람보>(1982) <코만도>(1985) <리썰웨폰>(1987) <다이하드>(1988) 등의 주인공들은 그 자체로 인간병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퍼스트 어벤저>의 스티브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로 변모하기 전에는 하드바디와는 거리가 멀다. 극중에서 과장되게 빼빼마른 모습으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의 여느 평범한 청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의 젊은이들을 스티브 로저스의 자리에 대입해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사실 어느 시대건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들을 늘 자신들이 보기에 허약하게 생각되는 젊은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에 맞추려고픈 욕망을 가진다. 

영화는 종종 그런 기성세대의 욕망을 대변하곤 한다. 특히 할리우드는 미국 그 자신이 적이라고 상정한 집단과 첨예하게 대치중일 때 하드바디를 통한 팍스아메리카의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앞장서 전파해왔다. 소련과의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가 그랬고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2000년대가 또한 그렇다. 마치 타이밍을 지켜봤다는 듯 람보와 존 맥클레인이 각각 <람보4: 라스트 블러드>(2008)와 <다이하드 4.0>(2007)으로 귀환한 것은 그래서 징후적이며 (그 중 <다이하드 4.0>의 존 맥클레인은 컴퓨터에는 능하지만 힘을 쓰는 데에는 영 젬병이인 젊은이를 데리고 다니며 함께 테러범을 응징하고 강한 사나이로 키워낸다!) 앞서 언급한 Sci-Fi 영화들 역시 한철 극장가를 휩쓰는 블록버스터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기저에 깔린 정치적 함의가 일관된 흐름을 갖는 것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퍼스트 어벤저>가 약한 육체의 젊은이들을 슈퍼솔저 프로젝트에 의해 하드바디로 변모시키는 신체교화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신체교화 뿐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파괴를 일삼으려는 레드스컬을 상대로 활약하는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애국심이라는 정신적 고취로까지 나아간다. 특히 레드스컬을 앞세워 특정시대(세계2차 대전)와 적의 정체(나치)를 무력화하는 전략은 명백하게 현재 시점을 전제한다. 하여 ‘당신이 필요합니다’라며 <퍼스트 어벤저>가 특별히 한 장면을 할애하는 엉클 샘의 손가락질은 지금의 관객들, 그중에서도 현재의 젊은이들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퍼스트 어벤저>에서 그런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슈퍼 솔져를 이끄는 체스터 필립스(토미 리 존스)이다. 그는 유약해 보이는 스티브 로저스에 대해 처음부터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지금의 젊은이였다면 외형도 외형이지만 무엇보다 정신상태가 글러 먹었다고 한숨지었을 게 분명하다. 과거와 달리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희박하고 자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갈수록 비판적인 의견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체스터 필립스와 같은 기성세대라면 젊은이들에 대한 교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이들을 하드바디의 전사로 교화시킬 슈퍼 솔져 프로젝트가 필요한 것이고 스티브 로저스처럼 이에 응한다면 모두가 선망하는 ‘몸짱’의 지위는 물론 국가를 위해 앞장 설 경우 그 대가로 유명세와 함께 꿈에 그리던 미녀를 자기 여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유튜브 세대를 위한 홍보물

이렇게 <퍼스트 어벤저>는 시대착오적인 배경을 하면서도 현대를 불러오는 설정을 교묘하게 매설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설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엉클 샘 포스터의 현대판 버전으로써 유튜브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기 위한 홍보물의 역할로 기능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역사 다시 쓰기로 치환이 가능하다. 대중문화로 대체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할리우드가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이다. 다만 1980~1990년대처럼 현실의 적을 스크린 속으로 그대로 끌어들여 미국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방식은 이 시기를 거쳐 온 영화 팬들에게 이제는 뻔히 속 보이는 전략이 되었다.

그럴 때는 Sci-Fi와 같은 장르를 당의정 삼아 팍스아메리카에 대한 메시지를 은근슬쩍 감추는 방식이 유효하다. <트랜스포머> <스타트렉> 등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의 흥행 성과로 보자면 그 전략은 꽤 효과를 발휘하는 형국에 해당한다. 사실 Sci-Fi는 진보적인 작품이 많이 나오는 장르 군에 속하는데 할리우드 영화에서만큼은 <다크나이트>(2008)나 <왓치맨>(2009) 정도를 제외하면 유독 보수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 속내에는 작금의 대립의 역사를 미국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고 싶은 전략, 이를 위해 전쟁을 미화하여 젊은 관객들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이 읽힌다. 그 정점에 선 작품이 바로 캡틴 아메리카의 <퍼스트 어벤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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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1.8.3)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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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바울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프랭클린 J.샤프너의 <혹성탈출>(1968)은 지구 멸망 후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8월 18일 국내 개봉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지구가 왜 멸망해 원숭이들의 행성이 되었는지를 밝히는 프리퀄에 해당한다.) 테일러 박사는 날로 삭막해지는 지구를 떠나 우주여행을 하던 중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다. 동료와 함께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하던 중 테일러는 원숭이 무리를 만난다. 말도 할 줄 알고 지능도 갖춘 이들은 원시인처럼 사는 인간들을 지배하며 행성의 주인으로 군림한다. 이들은 테일러 일행을 보자마자 잔혹한 방법으로 포획하고 감옥에 가둔 후 목숨을 위협한다.

<혹성탈출>이 영화 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주목을 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선 기술적인 측면에서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원숭이 족의 묘사는 아카데미 의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완벽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가는 인간과 원숭이의 주종관계(?)를 역전시켜 놓은 설정을 통해 인간의 호전성과 어리석음을 비판한 뼈있는 태도에 있다. 사실 <혹성탈출>은 원작에서 배경만을 옮겨왔을 뿐이지 내용은 영 딴판에 속한다. 소설은 테일러 일행이 원숭이 행성에서 유명해지고 희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과 달리 영화는 철저히 비극적인 형태를 취한다. 서로가 우수한 종이라며 테일러와 설전을 펼치는 원숭이 장로의 말을 빌리자면, 타인의 영역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인간들에 반해 자신들은 문명을 파괴하는 전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과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영화가 이야기를 달리하게 된 데에는 현실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혹성탈출>이 개봉한 1968년은 상반된 이념간의 대립에 따른 냉전의 비극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특히 세계의 경찰관 역할을 자처했던 미국은 세계 평화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젊은이들을 참혹한 베트남의 전장으로 밀어 넣으며 의미 없는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 기성세대에 대항한 젊은이들의 저항과 반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곧바로 영화로 전이 되어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표현 수위의 영화들이 기성세대를 조롱하며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이름으로 새로운 조류를 이끌었다.  

<혹성탈출>은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기획된 영화이었다. 영화 초반 테일러의 동료 다지가 불시착한 행성의 땅 위에 작은 성조기를 꽂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일러는 매우 실소한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우주로까지 확장시키는 팍스아메리카니즘의 어리석음이란! 또한 테일러를 대하는 원숭이들 간에 노장파와 소장파가 서로 상이한 반응을 보여 대립하는 이유는 당연히 미국의 기성세대와 젊은이들 간의 반목을 그대로 반영한 설정임은 자명하다. 무엇보다, <혹성탈출>의 중요한 의의는 지구 멸망이라는 극단성에 기대어 어리석은 전쟁의 역사를 반복해온 인간을 비웃은 결말부에 있다.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던 테일러가 “우주의 무한함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란 얼마나 미비한 존재인가” 하고 읊는 대사가 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미물이 전쟁을 일으켜 우주의 한 요소를 파괴하려 든다니 그게 얼마나 웃긴 노릇이냐는 거다. (촬영 역시 인간의 하찮음을 강조하기 위해 배경 속에 점처럼 자리 잡은 등장인물 숏을 수시로 비춘다.) 샤프너는 <혹성탈출>의 스크립트를 준비하면서 총 3가지의 결말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다. 원작자 샤프너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주의 질서를 모욕한 전쟁광 인간을 통렬하게 비판한 지금의 결말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문제적 시대는 문제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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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

<새>(The Bi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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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새>(1963)는 그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도전이었다. 몇 번의 TV 출연을 제외하면 연기 경험이 아주 없었던 무명 여배우와의 작업, 살아있는 새와 애니메이션 새를 혼합해 실제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 특수효과, 식별 가능한 음악 없이 오로지 새의 음산한 울음소리로만 구성한 사운드 트랙, 그리고 그의 연출작 중에서 최고의 제작비에 해당하는 330만 달러까지, 줄곧 작업해 오던 파라마운트를 떠나 유니버설로 회사를 옮겨 처음 작업하는 <새>는 여러 모에서 히치콕에게는 도전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싸이코> 등으로 경력의 정점을 찍은 그에게 <새>의 여러 불리한 조건들은 완성도를 방해할만한 위험 요소가 전혀 아니었다. “처음부터 특수효과의 난제들을 맞닥뜨리는 것에 절대로 겁을 집어먹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심지어 <자마이카 인>(1939) <레베카>(1940)에 이어 <새>까지, 세 번째로 작업하게 되는 다프네 뒤 모리에의 원작소설이었지만 그 사실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을 정도다. “나는 그 소설을 딱 한 번 읽었습니다. 지금도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히치콕이 뒤 모리에의 소설 <새>를 떠올린 것은 수천 마리의 바닷새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난 뒤였다. 당시 그레이스 켈리의 <마니>(1964) 캐스팅에 난항을 겪고 있던 (모나코의 왕세자비였던 켈리는 국민들의 저항에 끝내 출연을 거절하고 말았다.) 히치콕은 주저하지 않고 <새>의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새들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원작 소설의 설정과 새들에게 눈동자를 쪼여 죽은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 새들의 최후의 공격에 대비해 집안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의 특정 장면을 그대로 취하는 한편 히치콕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보데가 만을 직접 찾아 원형의 호수와 초등학교 건물을 목격하고는 이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여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했다.  

멜라니 다니엘스(티피 헤드런, 히치콕은 헤드런의 딸 멜라니 그리피스의 이름을 따와 캐릭터 이름을 지었다.)는 신문 사주의 딸이지만 제 멋대로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샌프란시스코의 새 가게에서 젊은 변호사 미치 브레너(로드 테일러)를 만나 매력을 느낀다. 미치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멜라니는 잉꼬 한 쌍을 선물로 준비해 그가 사는 보데가 만으로 향한다. 미치가 없는 동안 그의 집에 잠입해 잉꼬를 두고 오는데 성공하지만 돌아가는 모터보트 안에서 멜라니는 갈매기의 공격을 받고 이마를 다치는 사고를 당한다.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치는 멜라니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다음날 미치의 어린 여동생의 생일을 기념하는 야외 파티장에서 새들이 아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히치콕의 영화를 일러 ‘스크루볼 코미디’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확실히 히치콕의 영화는 스릴러 혹은 미스터리와 같은 장르적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남녀의 결합을 이어주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까닭에 이야기의 측면에서는 스크루볼 코미디인 경우가 대다수다. 하여 히치콕의 라이벌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 영화와 비교해도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거실의 벽난로처럼 온기 있는 영화로 인식된다. 다만 <새>의 경우는 멜라니와 미치 간의 스크루볼 코미디로 시작해 새가 사람을 공격하는 공포로 발전한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컨대, 새의 소리를 제외하고 음악이 부재되어 있는 연출은 (크레딧에 올라 있는 버나드 허먼의 역할은 ‘music by’가 아닌 ‘sound consult’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전체적으로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체험토록 한다.

평화로운 일상에 새의 소리로 급작스럽게 균열을 가하는 음악적 모티브는 극중 새들의 공격에 설명 가능한 이유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실제로 히치콕이 <새>의 시나리오 작업에서 끝까지 신경을 썼던 부분이 바로 새의 공격 이유에 대한 확실한 설명보다는 불친절한 모호함이었다. 대신 히치콕은 새와 사람의 관계를 역전시킨 설정을 통해 마음의 철창(새장)에 갇힌 인간관계의 묘사를 강화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특히 미치를 가운데 두고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강하게 보여주는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제시카 탠디)와 애니 헤이워스(수잔 플레셔트), 멜라니의 신경전은 극 중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흥미롭게도 미치는 사람을 철창으로 보내는 변호사를 직업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극 중 인물들의 감정 상태는 다름 아닌 ‘결핍’이다. 리디아는 남편을 잃고 아들에게 의지하는 과부 신세이고, 멜라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그녀를 떠난 지 오래다. 애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치와는 한때 연인 사이였지만 리디아의 질투로 지금은 멀찍이서 미치를 바라보는 상태다. 다시 말해, 그런 결핍이 더욱 소유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을 영화는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히치콕은 새가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에 대해 은근히 암시한다. 새장 속에 새를 가두는 행위로 상징되는 인간관계의 결핍에서 비롯된 소유욕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새>는 후에 수많은 영화에서 인용되고 패러디 되었다. 그 중 조지 로메로의 <살아난 시체들의 밤>(1968)이나 나이트 M.샤말란의 <싸인>(2002)은 <새>의 설정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면을 가장 잘 활용한 영화로 평가 받는다. 집안에 갇힌 주인공들이 각각 좀비와 외계인의 공격을 받는다는 설정 외에도 ‘결핍’의 테마, 흑인을 좀비 취급하는 백인의 우월주의(<살아난 시체들의 밤>), 부인의 죽음 이후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은 신부 캐릭터 (<싸인>) 등 창조적으로 <새>를 계승한 것이다. 그렇게 히치콕의 모험적인 프로젝트였던 <새>는 개봉 당시 흥행 성공은 물론 후대 영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고전의 지위에 올랐다.   

* 본문에 언급된 히치콕의 말은 패트릭 맥길리건이 쓰고 윤철희가 옮긴 을유문화사의 <히치콕>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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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