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 이렇게 말 많은 캐릭터일 줄이야

(장르의 사소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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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그룹 카라의 신곡 ‘루팡’이 화제다. 개인적으론 노래보다 노래를 위해 치장한 패션에 더 눈이 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블랙 일색에, 일명 ‘루팡 모자’로 포인트를 준 그녀들의 패션은 루팡하면 떠오르는 어둡고 섹시한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모양새다. 여기에 몸의 라인을 강조한 댄스까지 더해지면 나 같은 아저씨는 숨이 꼴까닥(?) 넘어갈 지경이다. 다만 장르소설의 팬 입장에서 다소 왜곡된 루팡의 이미지를 바로 잡고픈 마음도 간절해진다. 일찍이 일어 번역본이 중역된 까닭에 원작의 ‘뤼팽’이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루팡’으로 불린 것처럼 쾌활한 건달 형(形)에 가까운 뤼팽이 한국에서는 유독 말없는 쾌걸 조로에 가까운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은 프랑스 추리소설이 영국의 셜록 홈즈를 겨냥한 대항마였다. (뤼팽의 탄생과 관련한 비사는 아래의 Tip! 참조)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뤼팽은 모든 면에서 홈즈와 정반대다. 홈즈의 수사방식이 과학에 기초한 정공법이라면 뤼팽은 대도(大盜)답게 변장과 필체 위조 등 술수에 능하다. 게다가 홈즈는 여가시간도 다가올 사건에 대비하는 외골수인 반면 뤼팽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낭만파다. 그래서 홈즈가 사건의 막간 그 한가로운 정적을 견디다 못해 마약을 피우거나 황량한 음의 바이올린을 켜는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라면 뤼팽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자살까지 기도하는 감상적인 인물에 가깝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두드러진 국가적 특징이 각각 홈즈와 뤼팽의 캐릭터에 투영된 결과다. 

영국은 음산한 기후를 가진 섬나라다. 비와 안개를 끼고 사는 영국인들은 대체로 성격이 차갑고 집착하는 면이 강하다. 섬이라는 특수한 지형 탓에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쟁을 자주 시도했는데 우수한 무기 확보는 자연스럽게 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과학은 증거를 필요로 하는 법. 홈즈가 연상된다. 그에 반해 프랑스는 기후가 온화하고 먹을 것이 풍부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된다. 철학적인 사고의 발달로 문화에 탐닉하게 되고 감상에 젖는 시간도 많아진다. 낭만적이다. 다만 낭만을 유지하기 위해선 나라가 평안해야 한다. 프랑스 민중들은 부패한 정권이 등장할 때면 봉기를 일으켜 사회의 안정을 꾀했다. 부르주아를 농락하는 낭만파 괴도 뤼팽은 그대로 프랑스인의 피와 뼈와 살이고, 무엇보다 정신이었다.

프랑스의 조상은 골족이라 불리는 골루와즈(Gauloises)다. 이들은 매우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했을 뿐 아니라 기질 상 토론을 좋아하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크게 떠들고 수다를 떠는 골루와즈의 성격은 뤼팽에게서도 발견된다. 아무래도 한국 독자들에게 뤼팽은 어둠 속의 이미지로 깊이 인식된 까닭에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사실은 쾌활하고 낙천적인데다가 그렇게 말이 많은 캐릭터일 수가 없다. 셜록 홈즈 소설과 비교해도 확연한 것인데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아르센 뤼팽 소설은 대사 반, 지문 반일 정도로 ‘말이 많다.’ 홈즈가 수사 과정에서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느라 말을 아끼는 것과 달리 (그래서 홈즈 소설은 사건 설명을 위한 지문의 비중이 크다.) 뤼팽은 여자의 시선에 민감하고 ‘작업’에 능한 성격상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르센 뤼팽 전집‘의 번역가로 유명한 성귀수는 아르센 뤼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뤼팽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가브로슈 같은 인물이다. 건달이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건달. 쾌활하면서 농담도 잘하고 낙천적인 데다가 호통도 잘 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소설에 언급된 적은 없지만 내 생각에 뤼팽은 O형일 것 같다. (웃음) 근데 한국인이 알고 있는 뤼팽은 신출귀몰형의 조로 같은 인물로 깊게 인식된 것 같다. 번역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수다쟁이일 수가 없다.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뤼팽 영화를 보면 그런 이미지가 살아 있다. 국내 케이블 채널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본 한국 사람들은 전부 실망하더라. 어떻게 뤼팽이 수다스럽고 까불거릴 수 있느냐고.”

지난 2004년은 아르센 뤼팽의 탄생 백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의 장 폴 살로메 감독(<벨파고>)은 <아르센 뤼팽>을 만들었다. 뤼팽 전집 중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저자 모리스 르블랑은 뤼팽 시리즈 중 <기암성> <바르네트 탐정 사무소>와 함께 이 작품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뤼팽 역은 프랑스의 꽃미남 배우로 유명한 로맹 뒤리가 맡았다. 소설 속 뤼팽이 중간 정도의 신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 까닭에 감독은 아담한 체구를 가진 로맹 뒤리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당시 로맹 뒤리의 인기는 한국에서도 높았던 편이라 모 영화사가 <아르센 뤼팽>의 수입을 추진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는데 한국인이 갖고 있는 뤼팽의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에 국내 흥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뤼팽은 키가 훤칠하고 말 못할 사연을 지닌데다가 섹시한 이미지까지 겸비한 ‘루팡’인 것이다.


Tip!  뤼팽은 어떻게 홈즈에 필적할만한 캐릭터가 되었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프랑스 대중잡지 ‘주 세 투‘(ju sais tout)는 셜록 홈즈에 필적할만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영국의 ‘스트랜드 매거진’(Strand Magazine)을 통해 홈즈가 엄청난 인기를 얻은 것처럼 ‘프랑스의 홈즈’를 창조해 재미를 보고 싶었다. 주 세 투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받아들일 무명의 작가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선택된 작가가 바로 모리스 르블랑. 이에 르블랑은 <괴도 신사 뤼팽>이라는 단편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주 세 투의 제안과 달리 아르센 뤼팽은 홈즈와 같은 탐정이 아니라 도둑이었다.

기존의 추리소설은 철저히 선한 의지를 가진 주인공이 부르주아의 가치를 폄훼하는 악인을 응징하는 해피엔딩 구조 속에 이뤄졌다. 그런데 뤼팽은 범행대상을 부르주아로 겨냥한 도둑이었고 심지어 그를 추적하는 경찰과 탐정(그중에는 홈즈도 있었다!)을 보기 좋게 따돌렸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파괴한 혁명적인 캐릭터 설정에 주 세 투는 게재 여부를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대신 르블랑에게 뤼팽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몇 편을 더 만들어 보라고 제안하였다. 르블랑은 10편이 넘는 작품을 더 만들었고 그 후 어느 정도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한 주 세 투는 1904년부터 뤼팽 시리즈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년이 훌쩍 지난 지금 뤼팽은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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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