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물원을 샀다>(We Bought a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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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크로우 감독이 예전 같지 않다. <엘리자베스 타운>(2005)에 이어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가 다시 한 번 증명한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벤자민 미의 동명 에세이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아내를 잃은 주인공 가족의 이야기다. 얼떨결에 동물원을 매입하면서 그곳의 직원과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지만 상처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극복의 과정이 너무 일사천리로만 진행된다. <제리 맥과이어>(1996) <올모스트 페이모스>(2000)에서 극 중 인물의 구멍 난 가슴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메우는 데 특기를 보인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더욱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것은 록이나 메이저리그 야구와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에 익숙한 그의 취향 탓일까. (그는 ‘롤링스톤’의 음악평론가 출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에서는 다양한 동물의 면모만 겉핥기 할 뿐, 동물원의 문화라 할 만한 요소를 벤자민 가족의 사연에 제대로 접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가족영화라지만 천하의 맷 데이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데려다 놓고 키스 한 번으로 마무리하는 러브스토리라니. (그래서 오히려 엘르 패닝이 등장하는 아이들의 러브스토리가 더 돋보이기는 한다.) 이래저래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는 영화가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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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그린존> 내부 고발자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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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존’(Green Zone). 2003년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함락한 후, 바그다드 궁전을 주이라크 미군 사령부와 이라크 임시정부청사로 개조한 안전지대를 뜻한다. 미국 침략 전 이곳은 사담 후세인의 고급 청사였던 만큼 전장의 한 가운데서도 그린존의 미국인들은 한가롭게 수영장에서의 일광욕과 칵테일파티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워싱턴 포스트의 현(現) 국내뉴스부 편집장이자 바그다드의 지국장이기도 했던 라지브 찬드라세카란이 저술한 <Imperial Life in the Emerald City>(국내에는 동명의 영화 제목으로 출간 예정)를 통해 알려졌다. 이 책이 의도한 바는 명확하다. 미국의 대(對)이라크 정치학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순수한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폴 그린그래스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국가 권력의 횡포와 음모를 현장에 직접 입회한 것 같은 눈으로 주요하게 다뤄왔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찬드라세카린의 책에서 설정만을 가져와 주요 인물을 새롭게 배치해 영화를 완성했다. 흔히 ‘본 시리즈’의 콤비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이 다시 한 번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린존>을 일러 ‘제이슨 본의 바그다드 외전’이라고 얘기한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린존>을 온전히 소개하기에 이 비유에는 뭔가 결여된 측면이 존재한다. <그린존> 공개 후 예상 밖으로 극명히 갈리는 찬반 논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폴 그린그래스의 필모그래프는 두 가지 형태로 뚜렷이 구분된다. <블러디 선데이>(2002) <플라이트93>(2006) 같은 다큐멘터리 느낌의 정치영화와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과 같은 액션히어로물의 새 지평을 연 오락영화가 그것인데 <그린존>은 이 두 가지가 혼합된 작품이라 할만하다.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를 이유로 이라크 침략을 정당화하는 미국이 실상은 현실을 조작하기 위해 제도화된 폭력을 저지르는 한편에서 WMD의 존재를 의심하는 로이 밀러(맷 데이먼) 준위는 내부의 시스템을 향해 교란과 전복을 꾀하려 한다.

<그린존>에 대해 부정적인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듯 폴 그린그래스가 다루는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진실은 이제 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부시만 여전히 아니라고 ‘땡깡’ 부리려나) <블러디 선데이> <플라이트93>처럼 짐작만 했지 사실에 근거한 실체를 접했을 때 가해지는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린존>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만을 고발하기 위해 기획된 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랬다면 원작을 그대로 따르지 로이 밀러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린존>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라기 보다 ‘로이 밀러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을 두고, “이라크 전쟁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방점은 스릴러다. 무엇에 대한 스릴러인가. 이라크 내 WMD가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려는 미국의 보이지 않는 통제 메커니즘에 대한 스릴러다. 이를 밝혀내기 위해 가장 적합한 인물은 바로 내부 고발자다. 냉전 시대가 막을 고한 뒤 할리우드가 적을 찾지 못해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 혼란에 휩싸인 슈퍼히어로물을 양산하고 있을 때 폴 그린그래스는 ‘제이슨 본’을 등장시켜 테러리즘 시대의 히어로(영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였더랬다. (그러고 보면 덕 리먼의 <본 아이덴티티>(2002)는 냉전시대와 테러리즘 사이에서 과도기적 증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슈퍼히어로물이었던 셈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감시와 조작 등으로 전 세계에 군림하려는 미국의 ‘통치’ 목적의 메커니즘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려 할리우드에 내부 고발과 내부 전복의 이야기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거대한 감시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일개 개인을 넘어 국가 하나 정도 무력화시키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을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제이슨 본을 통해 알려줬다. 다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본은 내부 고발자라는 자각이 없었다. (수전증에 걸린 듯 과도하게 흔들어대던 카메라는 본의 정체성 혼란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미학적 성취에 다름 아니다.) <본 얼티메이텀>의 마지막 장면, 물속에 빠져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나는 장면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바그다드로 간 제이슨 본’ <그린존>의 로이 밀러는 군인정신이 뚜렷한 인물로 묘사된다. 상부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연달은 WMD 수색 실패에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상부의 지시와 상관없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 WMD 수색 지시가 왜 이뤄졌는지 역으로 추적에 나선다. 이는 기본적으로 WMD가 애초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극중 밀러의 행동 진행 방향은, 그러니까 전복적이다. 그가 찾아나서는 건 진실이 아니라 ‘미국이 어떻게 진실을 은폐했는가’이다.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은 뻔한 진실일지 모르지만 은폐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작동 원리에 대해 정확한 바를 모른다.

‘뻔하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밀러가 감수해야할 위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WMD가 이라크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밀러의 일거수일투족은 미국 감시 체계의 손바닥 안이다. 이런 감시와 조작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 이는 굉장한 용기를, 무엇보다 목숨을 담보해야 한다. 제이슨 본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이를 밝혀내지만 로이 밀러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으로 나라 잃을 위기에 처한 이라크 국민을 위해 내부 고발을 단행한다는 점에서 미묘한 태도의 차이를 보인다. 갈수록 미국의 감시 체계가 미국을 괴물로 만들고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 진정 미국을,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하는 것은 무얼까. 로이 밀러처럼 미국의 치부를 드러낼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야말로 국가 권력의 횡포가 횡행하는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 <그린존>의 진정한 주제다. 

밀러는 끝내 부시 정부가 원하던 시나리오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영화는 미국 정부가 꼭두각시 인사를 이라크의 새 정부 지도자로 임명하고 자치정부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그 시간, 이라크 내 WMD에 대한 위험 여론 자체가 조작됐다는 사실을 주요 언론에 고발하는 밀러의 행동을 교차한다. 그리고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전장에 뛰어드는 그의 결연한 얼굴을 카메라는 수 초간 응시한다. 존재하지 않는 WMD를 찾기 위해 동원된 이가 오히려 미국의 조작을 발견하자 허둥대는 부시 정부의 모습이 전달하는 바는 극명하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존의 ‘포화 속의 향락’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빗대 더욱 더 많은 내부 고발자가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린존>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뻔한 사실의 전달에만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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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3.24)

<오션스 13>(Ocean’s Thirteen)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맷 데이먼 등 스타파워에만 기댄 채 유럽 곳곳의 유려한 풍광을 보여주기에 급급했던 <오션스 트웰브>는,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오션스 일레븐>의 성공은 화려한 기술로 무장한 우리의 주인공들이 카지노 금고를 터는 과정과 그 속에서 소비되는 스타들의 쿨한 이미지가 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를 상기한다면 <오션스 트웰브>의 실패는 더욱 명백해진다.

<오션스 13>은 <오션스 트웰브>가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화려한 출연진은 유지한 채 1탄의 무대였던 라스베가스로 돌아와 2탄에서 소홀하게 다뤘던 오션스 일당의 범행 과정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 포커 판의 세계를 사실적이면서 흥미롭게 묘사했던 <라운더스>(1998)의 콤비 작가 브라이언 코플만과 데이비드 레비엔을 영입한 건 그런 <오션스 13>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다시 말해, <오션스 13>은 <오션스 일레븐>이 다뤘던 세계로 유턴한다. 심각함이나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깃털처럼 가볍지만 공작새처럼 화려한 세계로. 즉, 하룻밤 사이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쫄딱 망해 깡통을 찰 수도 있는 라스베가스의 즉흥성이야말로 <오션스> 시리즈의 존재 이유이자 관객에게 강력하게 어필했던 요소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1989), <트래픽>(2000)으로 명성을 얻은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런 <오션스 13>를 쉬어가는 작업으로 만들진 않았다. “전편보다 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조지 클루니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는 “<트래픽>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세 번째 시리즈인 만큼 오션스 일당에게 ‘무려’ 3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뿐인가, 열세 번째 멤버로 놀랍게도 알 파치노를 영입하는 등 규모에 걸맞은 영화를 위해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특히 “영화 속에서 13명 캐릭터 모두를 구현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는 스티븐 소더버그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비슷한 장면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 대신 장면의 구성을 짧게 해 13명 캐릭터 각각의 개성을 일일이 살려냈고 장면 전환을 빠르게 가져가 리듬감을 강조함으로써 범행과정의 치밀함과 복잡함을 꾀했다.

감독인 스티븐 소더버그는 “<오션스 13>은 코미디”라고 규정한다. 일례로, ‘오션스’ 시리즈는 ‘복수’로부터 출발한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대니가 자신의 범행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건 카지노 거물 테리에게 전 부인 테스(줄리아 로버츠)를 빼앗긴 반발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오션스 13>은 또 어떤가. 카지노 대부 윌리 뱅크의 카지노를 파산시키려는 건 그에게 사기를 당한 오션스 멤버 루벤의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함이다. 하지만 <오션스 13>은 복수 그 자체나 복수에 대한 정당성을 설득하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진 않는다. 사소한 복수의 이유는 거대한 핑계일 뿐, 이미 성공이 예정된 불가능한 임무를 어떻게 능수능란한 기술로, 얼마나 화려하게 묘사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어나가는 헐거운 서스펜스는 스타들의 넉살 좋은 연기와 톡톡 쏘는 대사로 채워진다. 알 파치노가 일종의 악역에 캐스팅된 사실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오션스 일당에게 멋지게 한 방 먹는다고는 하지만 그는 패배감에 고개 숙이거나 좀체 흥분하지 않는다. 다만 태연할 뿐. 이런 태도야말로 <오션스> 시리즈가 배우의 쿨한 이미지를 활용해 결국엔 관객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오션스 13>은 13인조로 구성된 보이 그룹의 댄스곡에 맞춰 현란하게 편집된 최신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보는 순간 만족감은 극에 달하지만 끝난 이후엔 어쩐지 무엇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영화. 그러나 이는 <오션스 13>의 단점이 아니다. 서로 마음 맞는 스타와 연출진끼리 부담 없이 놀아보자고, 이왕 노는 김에 관객과 함께 즐겨보자는 취지를 그대로 살려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특성상 시리즈의 시효가 길지 않다는 점. 다행히도 <오션스 13>은 초심으로 돌아가 <오션스 트웰브>에서 드러났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공도 <오션스 일레븐> 때의 신선함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스티븐 소더버그는 2006년 에든버러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오션스 13>이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밝혔다.







필름2.0 339호
(2007. 6. 19)

<시리아나>(Syriana)


<굿나잇 앤 굿럭>에서 감독을 맡아 진정한 언론’s Way에 대해 조용히 훈화말씀을 남기셨던 조지 클루니가 요즘 자국 돌아가는 꼬라지에 영 심기가 불편한가보다. 이번엔 <시리아나>라는 영화를 통해 조폭 저리가라 뺨치는 미국의 석유 이권 시스템을 고자질하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고 당 영화에서 또 감독을 맡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이번엔 제작과 배우의 자리로 이동했다. 대신 연출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에서 미국 내 마약의 총체적 난맥상을 한 큐에 멋드러지게 풀어냈던 시나리오 작가 스티븐 개건이 맡았다.

그래서일까, <시리아나> 역시 <트래픽>에서처럼 쥔공이 떼거지로 등장 이들의 스토리가 따로국밥마냥 제각각 놀다가 결국 주제는 하나로 크로스 합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두 개의 스토리와 한두 명의 주인공 가지고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침투하고 있는 미국의 석유 시스템을 온전히 보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CIA 요원 밥(조지 클루니 분), 변호사 베넷(제프리 라이트 분), 중동의 왕위 계승자 나시르(알렉산더 시디그 분)와 스위스 에너지 회사 직원 브라이언(맷 데이먼 분), 그리고 자살 테러리스트 와심 아흐메드(마자 무니르 분)가 각 파트별 마빡을 맡아,

석유 구매로 중동에 지불한 돈을 불법 무기로 되팔아 다시금 회수하는 과정(밥), 석유 이권을 둘러싼 미국 기업의 국제적 음모(베넷), 미국의 음모의 맞서 중동을 개혁하려 하나 되레 미국에 의해 뒤통수 맞는 모습(나시르와 브라이언), 미국 기업의 합병으로 실직자가 된 뒤 해당 기업의 유조선을 향해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순간(아흐메드)을 교차로 보여줌으로써 추접스런 미국의 석유 정치학을 스크린을 통해 생선가시 발리 듯 만천하에 드러낸다.

특기할 만한 건, 그런 전개 속에서 석유와는 코딱지만큼도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쥔공들의 가족이 항시 낑궈들어 이들을 힘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석유 패권주의라는 것이 미국이라는 윗대가리들 그 바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과 짝짝꿍 붙어먹은 중동 산유국 패밀리는 물론이요, 그 밑에서 먹고 싸느라 조빠지게 힘든 이들 나라의 구성원 하나하나에까지 똥꼬 깊쑤키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테다.

북경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뉴욕에 폭풍이 몰아친다 했나? 당 영화는 미국이 석유를 꿀꺽하면 전 세계가 꼴까닥거린다고 석유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 ‘시리아나’가 뜻하는 건 미국이 맘만 먹으면 중동의 국경을 좌지보지할 수 있다는 은어라나 모라나. 이 씹쑝들.

그렇기 땜시롱 감독은 당 영화에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입하기보다는 미국이 석유를 꿀꺽하는 일련의 불법적인 흐름을 그저 담담히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향한 고자질이 되니까. 그리고 반미(反美)를 외치는 목소리가 되니까.

여튼 미국 이 쉐이들 어디다 엿바꿔 처먹었는지 야구도 그렇고, 페어플레이 정신이라는 걸 도대체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마냥 역겨워하고 미워할 수만도 없는 것이 조지 클루니나 스티븐 개건처럼 <시리아나>와 같은 영화를 통해 탈골한 정의를 제자리에 갖다 붙이려는 이들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란 단순히 판타지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잠시마나 시름을 잊게 해주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당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요즘같이 시절이 하수상한 때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그런 전차로 <시리아나>를 얄짤없이 베스트에 봉한다.


(2006. 3. 31. <딴지일보>)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근육질 NO! 첨단장비 NO! 게다가 응징해야 할 적은 다름 아닌 우리편! 이를 오로지 짱구 굴리기와 후다닥 원 샷 원 킬 특공무술로 무찌르며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스파이 영화계의 뉴 세숫대야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

당 영화 <본 슈프리머시>는 바로 새로운 액숑 영웅 제이슨 본의 탄생을 알렸던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이다. 전편처럼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우리의 쥔공 본이 애인과 함께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살고 있던 중 美정부의 비밀조직 트래드스톤의 계략에 빠졌다가 누명을 벗고 야금야금 기억을 되찾아간다는 스또리. 아시다시피 당 영화는 블록버스터다. 근데 전혀 다른 스타일의 블록버스터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대개의 속편들이 1탄의 이야기 골격을 유지하면서 별 고민 없이 잔머리 굴리기에 바빴던 것과 달리 당 영화는 본인의 정체를 모르는 쥔공이라는 설정만 남겨놓고, 영문도 모른 채 쫓기기만 하던 본이 2탄에 이르러 자신을 알기 위해 적극적으로 적진(?)에 뛰어든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 영화가 중점을 두고 있는 건 비싼 돈 처발라가면서 관객의 눈을 현혹하는 비주얼이 아니라 본의 심리 상태를 어떤 식으로 연출하느냐 하는 것. 이를 위해 당 영화는, 1972년의 아일랜드 사태를 존나게 사실적으로 재현한 <블러디 선데이>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꿀꺽한 폴 그린그래스를 감독으로 모시고 있다.

왜와이뭐땀시롱. <블러디 선데이>에서의 현장감을 극대화한 촬영이 본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아니나달라 다큐필 물씬 풍기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답게 당 영화에서도 지진 현장에 떨궈놓은 거 마냥 속을 울렁거리게 하는 들고찍기 촬영술을 그대로 구사하고 있다.

그로 인해 킬러와 본, 본과 트레드스톤간의 물고 물리는 상황의 긴박감이 충실하게 묘사된 것은 물론이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는 본의 정신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쾌거를 올리고 있음이다.

그러다보니 시종일관 궁디 들썩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치며 더군다나 시간을 개무시하는 편집이 들고찍기 효과와 맞물려 굉장한 속도감을 자랑 떠는데 개중 백미는 단연코 당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모스크바 자동차 추격씬!

역시나 추격씬도 철저히 본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측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해서 시점을 조수석으로 잡아 잉간 두어 명 지나가기도 힘든 좁아터진 모스크바 시가지의 건물과 자동차를 이리 ‘쿵’, 저리 ‘쿵’ 아낌없이 헤딩해가며 근래 보기 드문 엑스타시 만땅의 추격씬을 제공하는데 단순히 확 트인 고속도로를 무대 삼아 장애물을 피하는 등의 스케일 늘리기와 서커스 연출에만 급급했던 기존 자동차 추격씬과는 사뭇 차별화 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음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추격씬을 비롯,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정 흔들리는 화면을 고수하고 있는 까닭에 혹 비위가 약한 관객은 어지럼증을 동반한 토사물 분사의 위험성이 있으니 키미테를 필히 부착하시어 관람에 임하는 것도 한 방법.

물론 이 때문에 당 영화의 재미에 흠집이 생기는 건 아니다. 개봉하는 영화만 존나 많았지 가뜩이나 볼 것없는 최근 극장가에서 당 영화는 군계일학의 재미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문이 불여일견. 베스트다!  

덧붙여,
비공식라인을 통해, <본 아이덴티티>를 안 보고 당 영화 <본 슈프리머시>를 감상할 시 뭔 이야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있는데 본 특위가 확인해 본 결과, 절대 그렇지 않다. <본 아이덴티티>를 안 본 관객이라도 <본 슈프리머시>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소지 없음을 밝힌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