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트>(H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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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현재형의 작가다. 지금 전 세계 영화계에 마이클 만 만큼 범죄 묘사를 통해 현대 도시의 속성을 기막히게 드러내는 감독은 없다. 일찍이 <도둑들>(1981)에서 범죄와 도시의 상관관계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던 마이클 만은 <히트>(1995)에 이르러 그만의 작가적 방식을 확고히 하기에 이른다.

닐(로버트 드 니로)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프로페셔널 범죄자다. 일이 수틀리면 미련 없이 몸을 피하기 위해 집에는 가구 한 점 들여놓지 않고 심지어 동료들과 달리 가족은 물론 여자 친구도 사귀지 않는다. 닐을 쫓는 LA 경찰국 강력계 반장 빈센트(알 파치노)  역시 자신의 일에 있어서는 빈틈이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는 살얼음판이다. 이미 두 번의 이혼 경력을 가진 그는 현 부인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 못한다. 빈센트의 삶의 목적은 오로지 닐! 그를 검거하려는 의지만이 빈센트를 살아있게 만든다. 그런 빈센트를 바라보는 닐의 눈빛에는 혐오감 대신 동료 의식이 짙게 서려 있다.

이 영화 속 LA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그곳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태양열이 작렬하는 대신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밤거리가,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가 대신 범죄 모의가 빈번히 이뤄지는 뒷골목이 화면을 장식한다. 그러다 보니 LA의 사랑과 낭만은커녕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물론이고, 날로 조직화되어가는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이를 쫓는 경찰 역시도 더 잔인해질 수밖에 없다. 언제나 쫓는 형사와 이어져있기 때문에 쫓기는 범죄자는 고독한 법이 없다. 그렇게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진 도시에서 닐과 빈센트, 그러니까 범죄자와 형사의 꼴도 구분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마이클 만은 처음으로 한 화면에서 호흡을 맞추는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꿈의 캐스팅이 성사된 후 (<대부2>(1974)에 함께 출연했지만 시대 파트를 달리한 까닭에 현장에서 맞닥뜨린 적은 없다.) 자연스럽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1963)을 떠올렸다. 제목처럼 전반부와 후반부가 완전히 성격을 달리해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것처럼 <히트> 역시도 닐과 빈센트의 만남을 정확히 중간에 두고 둘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추격전이 벌어지는 후반부로 짝패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히트>를 통해 범죄자와 경찰, 낮과 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특히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히트>로 생생한 거리 총격전의 신기원을 이룩한데 이어 <콜래트럴>(2004)과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HD카메라를 도입해 전쟁 뉴스릴과 같은 총격 장면을 선보인 후 <퍼블릭 에너미>(2009)에서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마이클 만의 영화에 대해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 뱅상 말로자는 “마이클 만은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유명한 스타들과 거대 예산으로, 스필버그 영화에 육박하는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어낸다. 작가성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하면서, 두 대립적인 것의 행복한 결합을 이뤄내고 있다.”라고 평했다. 우선적으로 관객을 고려하면서 사회의 문제, 미장센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는 마이클 만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히트>는 가장 우선적으로 관람해야 할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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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
(2011.7.28~8.28)

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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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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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공공의 적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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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황소개구리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 극장가의 절반을 넘어서는 스크린을 먹어치운 지도 어언 한 달 여. 새로운 패자의 출현에 목마른 관객 제위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극장가 여기저기를 찌르고 있는 바, 8월 극장가의 맹주를 자처하며 여기 <퍼블릭 에너미>와 함께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가 왔다.


공공의 적? 아니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한국말로 번역하면 ‘공공의 적(들)’ 근데 왜 <퍼블릭 에너미>(8/13 개봉)냐고? 아메리카무비니까. 당 영화는 아메리칸갱스터히스토리계의 파이오니아로 통하는 은행 강도 존 딜린저의 초특급버라이어티선혈낭자범죄로드쇼를 다뤘다.

1930년대 당시 아메리카 동부 폴리스들이 존 딜린저를 대하는 마음가짐 속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더랬다.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범죄는 없다! 그러나 존 딜린저는 더 큰 범죄의 세상을 발견할 것이라고 손수 나무를 깎아 만든 총으로 ’No‘의 무장을 해제하며 이렇게 답했더랬다. ’More Ahead’ 나에게 범죄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리하여 해군에 입대하자마자 탈영해 슈퍼마켓을 털고, 젊은 나이에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손이 근질근질한 나머지 박차고 나와 은행 수십 군데를 또 털고, 쫓아오는 폴리스에게 냅다 총알을 갈기다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존 딜린저는 일개 나쁜 놈들이 꿈꿔보지 못한 범죄의 미답의 경지를 밟으며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됐다.

그래서 당 영화의 마이클 만 감독은 존 딜린저의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딴 무비를 만든 것이냐? 당근 아니고. 존 딜린저라는 퍼블릭 에너미를 통해 시대상을 탐구하고 어제의 히스토리를 거울삼아 오늘의 교훈으로도 만들자, 모 이런 의도 아니겠나. 세상이 좀 하수상해야 말이지.

물론 이런 종류의 심오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당 영화는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의 쭉하고 딴한 보디는 물론이요, 이들의 꽃스런 세숫대야를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마디로 <퍼블릭 에너미>는 예술성과 오락성을 일타에 이피함으로써 임도 보고 뽕도 딴 작품이란 얘기다.        


이제는 할리우드 배우 이병헌

물 건너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 간 ‘병헌Lee’ 또한 <지.아이.조>(8/6) <나는 비와 함께 간다>(8/20)로 두 마리 토끼몰이에 나선다. <지.아이.조>에서는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리스트 군단의 넘버3 스톰 쉐도우로,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는 홍콩 뒷골목의 큰 형님 수동포 역을 맡아 나쁜 놈 2인2색을 펼친다. 우리의 병헌Lee가 할리우드의 그렇고 그런 동양 캐릭터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산화할 것인지, 신천지를 개척하고 금의환향할 것인지 귀두가 주목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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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OOK
2009년 8월호

<마이애미 바이스>(Miami Vice)


도시는 저마다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이애미는 야자수가 늘어선 금빛 모래사장과 청정한 푸른빛 해변으로 대표되는 도시다. 여기에 비키니 행렬과 구릿빛 피부의 상반신 근육질을 점점이 박아 넣으면 ‘쾌락의 도시’가 완성된다. 마이클 만 감독은 80년대 TV판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티나 터너의 ‘What’s Love Got to Do With It’을 빌어 쾌락의 낙원 마이애미를 낭만적으로 채색했다.


<마이애미 바이스>가 25년 만에 영화로 돌아왔다. 감독도 그대로고 배경도 물론, 동일하다. 소니(콜린 패럴)와 리코(제이미 폭스)는 여전히 도시에 기생하는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하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태양 빛 작렬하는 해변은 온데간데없고 네온사인이 발광하는 어두운 클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지상에서 지하로 전락한 마이애미의 쾌락은 격렬한 뉴메탈 사운드에 맞춰 즉흥적으로 몸을 들썩이며 의미 없이 부유할 뿐이다. 이제 마이애미는 순간의 쾌락을 쫓는 타락한 도시로 변모하였다. 린킨 파크의 ‘Numb-Encore’의 가사를 빌자면 “도대체 기다릴 필요가 뭐 있어?(What the hell is you waiting for?)”인 것이다.


마이애미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다를 바 없다. 치밀하게 조직된 경찰의 수사망은 갑작스런 배신에 구멍이 뚫려 실패로 돌아가고 거대한 마약소굴의 이용가치가 없어진 조직원은 그 자리에서 처형될 뿐이다. 소니도 그렇다. 마약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보스의 여자 이사벨라(공리)와 즉석에서 사랑에 빠지지만 즉흥적으로 이뤄진 사랑은 파국을 예고할 뿐이다. 순간의 선택으로 시작해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도시. 마이클 만은 <마이애미 바이스>를 통해 도시와 범죄의 상관관계를 그려내고 싶었던 게다. 


그래서 마이애미의 속성은 뉴메탈의 그것과 닮아있다. 마이클 만 감독은 아드레날린 순간 발생량 최대치를 기록하는, 린킨 파크를 위시한 뉴메탈 음악을 중심에 놓고 영화의 OST를 구성하였다. 그들의 음악은 듣는 순간만큼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세가 등등하지만 음악이 끝남과 동시에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남는 게 없다. 린킨 파크가 원래 그렇다. 시작과 동시에 쉼 없이 밀어붙이는 폭발적인 사운드로 청중을 휘어잡지만 그걸로 끝이다. 도대체가 끈덕지게 음미할 구석이 없다. 짧고 가는 현대적인 성질로 큰 인기를 모았지만 그런 즉흥성 때문에 굵고 긴 생명력을 모으는 데는 역부족인 모습이다.       


그렇기에 <마이애미 바이스>의 OST를 듣고 나면 린킨 파크의 음악은 찰나의 순간으로 머문다. 더욱 귀에 남는 건 소니와 이사벨라의 위험한 사랑을 테마로 한 모과이, 골드프랍, 에밀리오 에스테반 등 열정적인 라틴 선율.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라기보다는 지금의 마이애미가 품고 있는 쾌락의 본질을 그대로 짚어낸 마이클 만의 노림수이자 혜안이기 때문이다.


(2006. 8. 13.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