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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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박쥐>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같이 포털사이트의 대문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기사가 있었다. 박찬욱 감독이 <할리우드 리포트>와 나눈 인터뷰였는데, “좋은 시나리오만 있다면 할리우드로 날아갈 준비가 돼있다”고 답했던 것. 이 기사를 접하곤 <올드보이> 개봉 당시 <딴지일보>와 박찬욱 감독이 나눴던 인터뷰 중 한 대목이 생각났다. 그는 자신을 SF소설 광이라고 소개하며 해외에서 찍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꼽았다.

“<블레이드 러너>를 원작에 가깝게 만드는 기획이었어요. 원작소설은 액션영화 느낌이 덜한 대신에 데커드가 스스로 레플리칸트가 아닐까 의문을 많이 담고 있죠. 그 외에도 재미있는 소재가 굉장히 많아요. TV에서 사이비종교 지도자 같은 프로그램도 나오고 재미있는 모티브가 참 많죠.”

1993년 출판됐다 절판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최근 복간됐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필립 K. 딕의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리들리 스콧은 원작소설의 방대한 이야기를 데커드(해리슨 포드)와 레플리칸트(극중 ‘로이 베티’(룻거 하우어))의 추격전으로 축소하며 원작 팬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사기도 했다. 지금이야 <블레이드 러너>는 걸작으로 추앙받지만 1982년 6월 미국 개봉 당시만 해도 ‘올 여름 최대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짊어지며 할리우드에 재앙을 안겨줬던 작품이었다.

<블레이드 러너>가 이후 팬들 사이에서 재조명 받으며 걸작의 반열에 오른 데에는 ‘데커드는 레플리칸트인가?’라는 의문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데커드가 레플리칸트, 즉 안드로이드인지 아닌지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인간뿐 아니라 안드로이드의 생명도 모두 소중하다고 역설한다.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묻는 원작소설의 테마는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들리 스콧은 ‘비인간화되는 인간, 인간화되는 레플리칸트’의 테마를 결말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내며 원작의 정수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K. 딕은 영화가 소설과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지만 핵심정서를 충실히 재현했다며 <블레이드 러너>에 상당한 만족감을 표했다. (K. 딕은 <블레이드 러너>가 각광을 받으면서 거장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1982년 이미 사망한 뒤였다!)

개인적으로는 데커드와 베티의 대결을 통해 장황한 설교조로 주제를 늘어놓는 영화와 달리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데커드의 심리적 여정을 따라가는 소설이 더 맘에 들었다.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보여주는 미래는 자아가 황폐한 심리적 공황의 시대다. 소설은 영화처럼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데커드의 마음 속 풍경을 주로 묘사하는 것이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의 정체를 숨기고 인간처럼 행세하는 현상금 사냥꾼과 짝을 이뤄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는 에피소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살상행위에 무감각한 자신과 달리 죄의식에 사로잡혀 잠바로 시체를 덮어주는 현상금 사냥꾼을 보면서 데커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혼란을 겪으며 인간성을 깨달아 간다. 이처럼 K.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대조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즉, 인간성의 본질을 기계의 유무가 아닌 마음 그 자체에서 찾는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 타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눈썰미,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그리움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갖는다.

데커드 부부가 안드로이드 두꺼비를 애완동물로 받아들이는 결말은 의미 불명의 제목이 지향하는 바를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통찰력 있게 풀어낸다. 이에 대해 로저 젤라즈니(<신들의 사회><별을 쫓는 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필립 K. 딕의 책은 사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자체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강렬한 은유를 담은 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하다.” 한마디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필립 K. 딕의 정수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과연 박찬욱 감독이 해외에 진출하게 된다면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영화화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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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5.19)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사용자 삽입 이미지올해 일흔을 맞이한 리들리 스콧(1937년 생) 감독의 최근 행보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2000년대 들어 <글래디에이터>(2000), <블랙 호크 다운>(2001), <킹덤 오브 헤븐>(2005) 등 기복 없는 완성도를 보인 그의 작품들은 관객은 물론 평단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리들리 스콧이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리들리 스콧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는 연출력으로 황금기를 구가했던 할리우드 고전기의 하워드 혹스나 빌리 와일더 같은 감독을 연상시킨다. 장르와 장르를 유영하며 주어진 틀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는 장인에 가까워 보이는 감독인 것이다. 필모그래피를 훑어봐도 범죄(<블랙 레인>(1989)), 여성버디(<델마와 루이스>(1991)), 호러(<한니발>(2001)), 로맨틱 코미디(<어느 멋진 날>(2006)) 등 편식하는 장르 없이 폭 넓은 행보를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스튜디오의 주문에 따라 영화를 찍어내야 하는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동안 그가 A급 감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의 새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는 또 한 편의 장르영화다. 1970년대 뉴욕 일대를 주름잡았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그를 집요하게 쫓는 마약반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갱스터영화다. 갱스터는 범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계의 절망과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 장르로 할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지극히 관습적인 스타일로 장르의 ‘규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는 1940년대 말 전성기를 누렸던 고전 할리우드 갱스터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흑인 마약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장르의 정통성마저 부인한다. 영화적 세공 기술이 절정에 달한 리들리 스콧이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했을지 내심 기대감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흑인을 앞세운 갱스터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난 2000년 프로듀서 브라이언 글레이저가 접한 하나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됐다. 니콜라스 필레기(<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의 원작자)가 권유한 기사는 지역문화지 ‘뉴욕’에 실린 ‘거물의 귀환’(Return of the Superfly)으로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죄 이야기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에 매료된 글레이저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맡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뉴욕 할렘 암흑가의 두목 범피 존스는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날이 갈수록 대형화되는 마약시장이 못마땅하다. 형제애가 강한 조직의 특성상 중간 도매상들이 없어질수록 조직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은 범피를 대신해 뉴욕 할렘을 접수하게 된 프랭크 루카스. 두목과 달리 거대한 마약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루카스는 머리를 짜낸다. 마약 재배지인 태국으로 직접 건너가 대량 구입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이용, 밀반입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을 없앤 것. 기존 마약보다 순도는 높고 가격은 더 저렴하니 루카스의 마약 브랜드 ‘블루 매직’은 삽시간에 뉴욕의 마약시장을 장악한다. 허나 사업가처럼 깔끔한 옷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행동을 보이는 그가 불법을 일삼는 조직의 두목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는 뉴저지 형사 리치 로버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뇌물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때에 동료 형사의 뇌물을 상부에 고발한 일로 ‘또라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로버츠. 타고난 바람기와 바깥으로만 나돌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설상가상으로 파트너가 마약복용으로 숨지는 일이 발생해 수사에 나서지만 별다른 단서가 없다. 급기야 특별마약반이 편성되고 로버츠는 전방위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연출을 의뢰받은 건 <킹덤 오브 헤븐> 촬영이 한창이던 2004년이었다. <트레이닝 데이>(2001)의 안톤 후쿠아, <호텔 르완다>의 테리 조지 감독이 이미 포기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자 그는 즉각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는 흥망성쇠의 전개가 흥미를 끌었다.” 다만 그는 이것이 프랭크 루카스 개인의 영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뉴욕 할렘이 배경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적절한 소재였고 이를 위해서는 ‘흑과 백’ 두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여야만 했다. 스티븐 자일리언은 리치 로버츠의 비중을 루카스에 버금가게끔 키웠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비로소 서로의 세계를 걸고 운명적인 대결을 펼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이룩한 프랭크 루카스, 가족과 동료를 모두 잃고 범인을 쫓는 일에만 몰두하는 로버츠. 각기 다른 환경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를 일러 스콧 감독은 “2007년판 <프렌치 커넥션>(1971)이자 흑인 버전 <대부>”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마약조직과 부패한 경찰이 결탁한 거대한 음모는 <프렌치 커넥션>을, 화려한 가족모임 뒤에서 추악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면의 이야기는 <대부>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그뿐인가. <형사 서피코>(1973)를 비롯 <좋은 친구들>, <히트>(1995)에 이르기까지, <아메리 갱스터>는 아메리칸 갱스터 장르의 걸작 목록들을 일별하는 전시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이런 시각에 대해 경계한다.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확연하게 차별되는 요소가 있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우두머리가 다름 아닌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갱스터영화를 본 적이 있나?” 그의 말처럼, 아이들(역시 백인이다!)이 갱으로 등장하는 알란 파커 감독의 <벅시 말론>(1976)을 본 적은 있어도 흑인 갱스터를 본 기억은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새로움과 파격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암흑가의 무하마드 알리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답지 않게 감정의 파고를 느낄 수 없는 영화다. 자극적이지 않고 점잖다. 흔히 갱스터영화라면 스크린 밖으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폭력의 에너지를 떠올리지만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이런 파토스가 적다. 대규모 총격전은 루카스의 마약 제조공장을 소탕하는 결말 부분에 가서 한 번 등장할 뿐이고 루카스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한 살인 장면이 오프닝과 짧게 삽입되는 것이 고작이다. 갱스터 장르의 꽃이라는 총격전 없이 장르물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 주인공이 프랭크 루카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비주얼 감각으로 치자면 둘째가 서러운 리들리 스콧이 시각적 쾌감을 연출할 수 있는 총격전에 무심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미국을 주름잡은 거물급 범죄자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뉴욕’ 지에 ‘거물의 귀환’을 송고한 마크 자콥슨 기자에 따르면 “루카스는 새로운 도시 범죄를 꿈꾼 인물”이었다. “화려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이전의 흑인 갱들과 달리 회사의 CEO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진취적인 마약 딜러”였다. 그는 뉴욕의 터줏대감이었던 이탈리아 갱들에 한 발 앞서 마약사업의 대형화를 주도했고 맥도날드처럼 브랜드의 힘을 간파하고 마약 대신 ‘블루 매직’이란 이름을 도입했으며 공급처에서 물건을 직접 구입해 공수하는 획기적인 유통과정을 생각해냈다. 특히 범죄자 특유의 눈에 띄게 드러나는 행동을 자제했던 그는 언제나 깔끔한 슈트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며 사업가처럼 행동하는 등 교묘하게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들리 스콧은 ‘나서지 않는’ 루카스의 성격을 영화의 스타일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앞서 언급한 과도한 폭력 묘사는 물론이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 장르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를 대부분 배제한다. 마약이 소재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2000)까지는 아니더라도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는 감독 특유의 현란한 장면 연출은 찾아볼 수 없다. 배신과 죽음으로 확실하게 종결되는 장르 관습에서 한 발 나아가 비극과 해피엔딩 사이에서 애매하게 종결된다. 대신 실화를 바탕으로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영화답게 장르적 속성은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묻힐 뿐 캐릭터에 모든 걸 의존한다. 즉, <아메리칸 갱스터>의 장르성을 결정짓는 것은 중심인물 프랭크 루카스다. 캐릭터 자체가 장르로 귀결되다보니 루카스는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만큼 영화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보다 사회적인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루카스의 비주류적인 감성에 매료된 덴젤 워싱턴은 안톤 후쿠야 감독에 의해 루카스 역에 낙점된 이후 테리 조지 감독을 거쳐 리들리 스콧에 이르기까지 역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 같은 대가가 버티고 있는 장르에서 6년 넘게 출연을 기다린 이유는 주인공이 바로 프랭크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갱스터의 ‘러쉬모어 산’ 같은 인물이다. 그 어떤 캐릭터도 ‘아메리칸 갱스터’와 같은 지위를 얻은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루카스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를 일종의 영웅처럼 다루는데, 이는 백인의 슈퍼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흑인 영웅은 태생적인 배경 탓에 기존의 지배세력인 백인의 기득권을 이겨내고 지위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인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루카스가 거물 백인 갱인 도미닉 카타노(아만드 아산트)와 손잡고 결국 그의 위치를 넘어서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1970년대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을 루카스와 빗댄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리는 단순한 권투선수가 아니었다. 70년대 전성기를 누린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징집을 거부했고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등 미국 정부(백인)에 저항한 대표적인 흑인 영웅이었다.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1971년 벌어진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전설적인 권투시합이 나온다. 리들리 스콧은 여기서 잠깐이나마 프랭크 루카스의 삶을 알리와 병치시킨다. 그는 암흑가의 알리, 할렘의 영웅인 셈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는 루카스의 마약왕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처럼 그려진다. 백인 중심의 시스템에 저항한 알리와 백인의 비호를 받는 프레이저(군 입대를 거부한 알리와 달리 프레이저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방에서 편안하게 근무했다)의 시합으로 명명된 이 경기에서 루카스는 최고급 옷을 걸치고 백인 마약왕 카타노보다 앞자리에 앉아 그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웅변하려 한다. 갱스터 비즈니스까지 장악하고 있는 백인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그만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아이러니컬하다. 1971년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알리와 프레이저의 세기의 경기는 두 선수가 가진 세 차례의 ‘사생결단’ 대결(미국인들에게 알리와 프레이저의 경기는 백인 보수주의와 흑인 진보주의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중 유일하게 알리가 패배한 시합이었다. 마약 커넥션의 뿌리를 찾아 눈에 불을 켠 리치 로버츠가 잠행하던 프랭크 루카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간파하게 된 계기, 즉 루카스의 거대한 왕국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합을 통해서다. 바야흐로, 루카스가 ‘세계의 왕’임을 선포하는 순간 그의 괴멸은 예정됐던 것이다.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법칙

물론 그 누구도 프랭크 루카스를 진짜 영웅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 하나로 뉴욕 할렘의 블랙마켓을 장악한 과정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사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프랭크 루카스를 무조건 영웅으로만 묘사했다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리더였지만 명백한 범죄자이기도 한 그의 이중적인 면모가 <아메리칸 갱스터>를 연출한 중요한 이유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루카스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과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루카스의 실제 삶을 매력적으로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윤리적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조롱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닌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를 비롯해 갱스터물이 원형으로 삼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실화이거나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랭크 루카스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덴젤 워싱턴은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예로 들며 “이 작품이 범죄를 조장했다는 주장은 과장됐다. <스카페이스>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그 전부터 사람들은 영화처럼 살고 있었다”며 갱스터영화의 현실 반영이 터무니없다는 일각의 반응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갱스터영화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퇴치돼야 할 악당이지만 늘 동정적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그들의 영웅적 풍모와 기질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그 장르를 즐기는 고유한 방법이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 개인이 아니라 ‘미국식 갱스터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리들리 스콧은 루카스의 마약왕국이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아이디어는 그에게서 시작됐지만 사업 번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었던 미국의 군부대와 부패한 경찰이었다. 마약이 밀반입되는 데 운송역할을 한 미군과 거래를 눈감아주는 대신 큰돈을 챙긴 경찰에게서 정의의 모습을 찾는 건 요란한 장신구를 걸친 루카스의 옷차림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갱스터영화에서 정치적인 함의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아메리칸 갱스터>는 일개 미국인에 불과한 루카스를 통해 미국의 본질을 꿰뚫는 문화인류학적인 작업이었다. “단순한 마약상의 시점(vision)이 아닌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관점(point)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루카스의 마약사업이 베트남전의 시작과 함께 이뤄지고 철수와 동시에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전쟁과 같은 이벤트(?)만 벌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외부적으로 구축한 폭력의 커넥션을 통해 배를 불려온 전지구적인 미국의 사업방식, 그 뒤를 보조하는 시스템과 논리를 떠올려보라. 그 흥망성쇠는 미국이 지금껏 쌓아올린 업적의 이면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미국의 이상 역시 그에 맞게 변질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를 꿈꾸던 루카스의 조카 스티브(팁 해리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촌 곁에서 일을 돕던 중 전도유망한 야구선수가 누구나 선망하는 양키스 행을 포기하고 마약상의 길을 걷는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의 그늘진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르 장인의 내공

공교롭게도 <아메리칸 갱스터>의 국내 개봉 일주일 전, 리들리 스콧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 DVD 파이널 컷이 공개된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 나의 창조력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라는 자조 섞인 스스로의 평가처럼 리들리 스콧은 지금까지 <블레이드 러너>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있었다. 하지만 장르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아메리칸 갱스터>의 야심은 SF 장르의 거대한 기념비였던 <블레이드 러너> 못지않다.

“1970년대 클래식 갱스터영화의 유령버전 같다”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아메리칸 갱스터>가 <프렌치 커넥션>, <대부> 등 1970년대 미국영화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근래 발표된 리들리 스콧의 영화 중 최고이며 갱스터 장르로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기왕의 영화적 유산을 흡수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솜씨는 ‘장르 장인’의 내공을 느끼게 한다.

<리틀 시저>(1930), <공공의 적>(1931)부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까지, 갱스터 장르의 역사적인 이정표들을 한데 모으면 곧 미국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된다. 여기서 ‘완성’이란 표현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 백인 갱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로 쓴 기존 폭력의 역사의 공백을 채우려는 작업처럼 보인다. 흑인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이 영화의 개봉과 함께 비로소 미국의 뒷골목 역사책이 탈고된 셈이다. 갱스터영화의 대표라도 되는 듯 선언조로 지어진 영화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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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6호
(2007.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