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알트만, 할리우드의 이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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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 비즈니스의 치부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고발하는 <플레이어>(1992)에는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세계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오프닝이 등장한다. 극 중 한 제작자는 <악의 손길>에 대해 상업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투로 “첫 장면이 6분 30초나 되는 게 말이 돼”라며 불평을 드러낸다. 정작 로버트 알트만은 작가의 예술성을 인정하지 않는 제작자의 천박한 인식에 ‘엿’을 먹이려는 목적으로 오슨 웰즈가 연출한 <악의 손길>(1958)의 그 유명한 오프닝을 오마주하며 오히려 더 길게 해당 장면을 무려 8분의 롱테이크로 가져간다.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불리는 알트만은 그렇게 습한 그늘 속에서 서식하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양지로 드러내길 마다하지 않으며 특유의 영화적 세계를 구축했다.

풀 쇼트의 미학

로버트 알트먼은 비(非)할리우드적이고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 세계가 확실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확실히 그의 영화는 초기작 <매쉬>(1970)부터 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에 이르기까지 관습적인 영화 문법에 대한 거부로 일관한다. 특히 22명의 주요 인물이 나오는 <숏 컷>(1993)이나 그 이상의 출연진이 등장하는 <내쉬빌>(1975)에서처럼 여러 명의 인물이 한 화면에 몰려나와 동시에 왁자지껄 대사를 치는 식의 연출은 대사의 명료한 전달을 규칙처럼 받들어 온 할리우드 전통주의자들에게는 기본을 무시한 처사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로버트 알트만이 바라보는 인간관계의 풍경이란 그렇게 중구난방이고 두서가 없다. 대신 한 영화에서 수십 명의 인물을 시간을 들여 균형 있게 다루다보면 관객들에게 현대의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악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로버트 알트만의 말처럼 말이다. “동시에 많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다. 그들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속성을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버트 알트만의 드라마투르기는 확실히 현대적이다. 날로 세분화되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진행되는 현대의 모호한 인간관계를 펼쳐 보이기에 알트만의 영화만큼 적합한 구조가 없는 것이다.  

그의 영화가 굉장히 정교한 연출 하에 조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劇)의 성격보다 현실성이 더 뚜렷한 건 그런 현대적인 구조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소수의 주인공이 두각 되는 고전적 연출의 영화와 달리 다수의 인물이 출연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 가운데 개인이 아닌 관계‘들’에 집중하다보니 현대적인 속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알트만 영화의 카메라 운용은 기본적으로 풀 쇼트(Full Shot)다. 대개의 영화들이 감정의 진폭을 과장하기 위해 쉬이 사용하는 클로즈업의 사례를 알트만의 영화에서 찾기는 힘들다. 클로즈업은 개인에 초점에 맞추는 경향이 강한 것에 반해 풀 쇼트는 관계의 풍경에 대한 접근법인 까닭이다.

그런데 알트만의 풀 쇼트는 관객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혼란을 조장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의 결말을 향해 일사분란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의 가치, 생활수준, 남녀의 차이 등등 여러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이 거미줄 형태로 파열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스포드 파크>(2001)의 설정을 보면 대저택의 지상과 지하층은 각각 귀족과 하인들의 공간으로 철저히 구분이 되지만 여기에 살인, 섹스와 같은 원초적인 욕망이 개입을 하면 겉으로 드러난 분류법이 무의미해진다. 그건 초기작에서도 마찬가지로, <내쉬빌>의 마지막 야외 공연 장면의 경우, 무대 위에는 순수하게 노래를 부르는 컨트리 가수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선거원 등 두 패로 나뉘어 힘겨루기를 보이는 가운데 객석에서는 공연을 즐기는 팬과 특정 가수를 겨냥한 암살범, 그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경호 요원들이 뒤섞여 역시 혼재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실수의 산물

이렇게 첫 눈에 캐치해낼 수 있는 정보가 짧은 시간에 무수히 넘쳐나다 보면 핵심을 짚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실수를 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야말로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가 가진 본질로써 안 그래도 알트만 왈, “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실수를 다룬다는 거다.” 그리고 덧붙이길, “사람들은 죽음을 가장 마지막에서야 받아들인다. 죽음이야말로 그들의 인생이 실수투성이였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즉, 삶에 대한 그의 철학은 이렇다. “실수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알트만의 풀 쇼트가 목적하는 바는 결국에 인간사 실수의 풍경이다. 모든 알트만의 영화가 그렇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9편의 단편을 연동한 <숏 컷>이 보다 극명한 사례로 작용한다.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삐걱대는 인생에 신경이 곤두 선 상태다. 남편의 외도가 의심스러워 늘 불안한 부인, 폰섹스로 생활비를 버는 부인이 못 마땅한 남편,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해 집을 나온 딸, 부부 싸움 후 집을 나와 단속을 핑계로 여성 운전자를 유혹하는 경찰, 가해자를 알 수 없는 어린 아들의 차사고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부 등등 실수의 커넥션이 만들어내는 소돔과 고모라의 풍경 속에서 구원을 찾기란 여간 힘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로버트 알트만은 할리우드의 관습적 이야기 구성과는 안녕을 고한 전위적인 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 피나간 부부의 에피소드는 알트만이 삶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실마리를 제공한다. TV앵커로 유명한 하워드 피나간(브루스 데이비슨)과 앤(앤디 맥도웰)은 외동아들 캐시를 둔 부부다. 어느 날, 캐시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집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는 일이 벌어진다. 가해자도 모를뿐더러 캐시의 병상이 심각한 상태로 보이지 않지만 회복할 기미가 없자 피나간 부부는 애가 탈 지경이다. 설상가상으로 하워드와 인연을 끊고 지내던 아버지 폴 피나간(잭 레몬)이 캐시의 병문안을 핑계로 아들을 찾아온다. 하워드는 그런 아버지가 못 마땅하지만 캐시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자 폴에게 위안을 얻으며 부자는 멀어졌던 사이를 좁히게 된다.

이렇게 불행은 피나간 부부의 사정을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찾아왔다가 절망의 끝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야 비로소 짧은 위안을 허락하는 식이다. 사실 현실은 영화와 달라서 구원이 모든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이를 해피엔딩에 이르게 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피나간 부부를 절망에 빠뜨리게 한 그 시간, 캐시를 죽음으로 몬 가해자 도린(릴리 톰린)은 사람을 치였다는 사실에 가책을 느끼고 그 불안감에 그의 삶은 잠시간 엉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신의 자비심이라고 해도 좋을까, 어찌됐든 도린은 그가 캐시를 죽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극도로 사이가 나빴던 술주정꾼 얼(톰 웨이츠)과 극적으로 화해에 이르며 가정의 행복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를 논리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미스터리한 현상 혹은 인생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딩이 없는 엔딩

실수가 빚은 풍경화라 할 만한 알트만의 영화에는 필연적으로 전문가연하는 시선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최고의 경지에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알트만은 이를 캐치해 영화라는 예술로 변환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그의 작품을 접하면 삶에 대한 그만의 철학을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삶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산다. 내가 전문가였다면 나의 영화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나 역시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하여 알트만의 영화에는 우리가 이웃이라고 부를법한 보통 사람들이 캐릭터로 등장해 실수투성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삶에 대한 미숙한 모습을 연발한다.

그것은 고유한 성격의 캐릭터로 많은 팬을 거느린 원작을 스크린에 옮길 때도 적용되는 알트만의 철칙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긴 이별>(1973)에서 삶에 대한 시니컬한 태도와 언변이 매력인 필립 말로우(엘리엇 굴드)의 성격은 원작과 달리 다소 어수룩하지만 친절하고 다정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 때문에 ‘필립 말로우 시리즈’ 팬들의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거의 최악에 가깝다.) 극 중 말로우는 친구의 아내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몰려 위기에 처하는데 실제 범인은 바로 그 ‘친구’인 것으로 밝혀진다. 범행이 탄로 난 친구는 말로우에게 비아냥조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넌 언제나 패배자였어.” 똥 씹은 표정의 말로우는 “네 말이 맞아” 동의하며 그의 미간에 최후의 총격을 가한다.

정의를 수호하겠다고 사회의 쓰레기를 청소하던 사립탐정이 ‘절친’에게 이용당해 위기를 자처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 소설의 필립 말로우라면 웬만해서 빠지지 않는 함정이지만 알트만은 소설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해서 캐릭터의 면모를 완전히 뒤바꾼 것은 물론 엔딩마저도 상이하게 가져간다. 그런데 이 엔딩은 어딘가 묘한 여운을 남기는 구석이 있다. 상영 내내 말보로 담배를 입에서 놓지 않던 말로우는 친구를 처치한 순간, 유일하게 담배가 아니라 손가락 크기의 하모니카를 입에 물고 처량한 멜로디를 뿜어낸다. 여기에는 인생무상의 정서가 짙게 묻어나는데 말로우가 앞으로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알트만은 오스카 와일드의 그 유명한 말(‘Experience is simply the name we give our mistakes’)을 인용, “기회란 실수에게 줄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이다. Chance is another name that we give to our mistakes.”라며 실수가 인간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설파한다. 알트만이 영화의 엔딩을 다루는 데 있어서 방점을 찍듯 힘을 주지 않는 이유는 이와 무관치 않다. “내 영화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고스포드 파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엘시(에밀리 왓슨)는 저택을 떠나며 할리우드 프로듀서의 차에 동승하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할리우드에 진출해 스타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맞다. 인생은 그렇게 실수를 반환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1930년대의 경제공황이 불러온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캔자스시티>(1996)에는 재즈가 흘러넘치고 라디오 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막을 내려도 쇼는 계속 되는 것처럼 말이다.  

존경받는 감독

할리우드의 제작 방식과 이야기투르기를 거부한 로버트 알트만은 바로 그 같은 이유로 할리우드의 우수성을 증명한 작가로 기억된다. 알트만의 반골 기질은 이미 <매쉬>에서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무려 14명의 감독이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며 거절했던 시나리오를 덥석 받아든 것은 물론 반(反)미국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개봉 그 해 미국 박스오피스를 통틀어 <에어포트>와 <러브 스토리>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며 기세를 올렸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매쉬>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실제로는 베트남 전을 주도해 전 세계적인 분란을 일으킨 미국 정부의 부도덕을 꼬집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지금이야 영화를 통한 반전(反戰)의 메시지가 익숙한 시대지만 <매쉬>만 해도 반전의 목소리를 담은 첫 번째 장편영화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그것도 모자라 메이저 제작사에서 주도한 작품임에도 욕설(F-word)이 난무해 20세기 폭스사의 고위급들을 경악케 했고 엘리엇 굴드나 도널드 서덜랜드와 같은 A급 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엑스트라와 비중이 크게 다르지 않아 이 영화의 흥행을 예상한 이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예상외의 흥행과 더불어 <매쉬>의 개봉과 함께 우연처럼 미국 정부가 베트남에 참전 중이던 미군의 절반을 철수하면서 이 영화의 위상은 전설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에 대한 아카데미 측의 평가는 예우를 갖추기보다 격식을 차리는 쪽에 가까웠다. 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해 다섯 개 부문에 후보로 선택했지만 감독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딸랑 각본상 하나를 수여하는 데 그친 것이다. 이후에도 알트만은 <내쉬빌> <플레이어> <숏컷> <고스포드 파크>까지 다섯 번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 이른 경우는 없었다. 당연하다. 보수적이기로 악명 높은 아카데미가 반(反)보수주의의 기치를 내건 알트만의 영화에 상을 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의 영화를 격하게 인정한 쪽은 유럽이었다. 베를린영화제는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쿠키의 행운>(1999) <프레리 홈 컴패니언>에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베니스는 <숏컷>에 황금사자상을, 칸은 <매쉬>와 <플레이어>에 각각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수여하며 타협하지 않는 그의 연출력에 수시로 경의를 표했다.    

“나는 활동가는 아니지만 (영화를 통해) 정치적인 행동을 할 줄은 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모두 정치에 깊이 관여되어 있지 않나.” 알트만의 말처럼 그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할리우드의 지형도를 바꾸어놓았고 전 세계의 수많은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프리미어’와 ‘아메리칸 필름’의 전 편집장이었던 피터 비스킨드(Peter Biskind)가 <헐리웃 문화혁명>을 통해 섹스와 마약으로 얼룩진 카메라 뒤편의 사생활에 대해 폭로한 바, ‘인간’ 로버트 알트만에 대해서는 평가가 분분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그의 지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끝내 외면할 것만 같았던 아카데미 역시 그들의 옹졸함을 만회라도 하듯 평생공로상으로 그를 기리지 않았던가. (알트만은 이 상을 받은 2006년 그 해 영화의 우주에서 영면했다.)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손꼽히던 로버트 알트만은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가장 존경받은 감독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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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2011.11.3)

로버트 알트만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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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만이 우리 곁을 떠나 영화의 우주에서 별로 반짝인 지가 올해로 벌써 5년째입니다. ‘할리우드의 반골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2006년 11월 20일 80세의 나이로 타계해 전 세계의 영화팬들을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임은 갔어도 영화는 남아 이렇게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로버트 알트만 특별전’을 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로버트 알트만이 세계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너르고 깊다 할 것입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나름의 개성을 갖는 주요인물이 대규모로 등장해 그들 각자의 에피소드를 교차시키는 구조를 알트만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고 존 카메론 미첼은 <숏버스>를 만들면서 “촬영 중 세트 위에서 즉흥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을 참고했다”고 밝혔으며 2002년 베를린 영화제와 2006년 아카데미 영화제는 그런 알트만의 공로를 기려 평생공로상을 수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로버트 알트만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할리우드의 주류 시스템과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면서도 미국영화의 중심에서 인디영화의 정신을 주입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초기작 <매쉬>(1970)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군의 지휘 체계를 유린하는 외과 전문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미국이 주도한 전쟁을 조롱하며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또한 <플레이어>(1992)와 <패션쇼>(1995)를 통해 미국 대중문화의 선봉에서 화려함을 뽐내는 패션계와 할리우드의 허상을 통렬하게 비판했으며 <숏컷>(1993)에서는 아홉 쌍의 부부를 등장시켜 미국 중산층의 허약한 내면을 날카롭게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특유의 반골기질을 증명이라도 하듯 알트만은 생전에 다섯 번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고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하는 명예 아닌 명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미국 사회의 치부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로버트 알트만을 통해 ‘아메리칸 뉴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화 사조를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발흥하여 권불십년으로 마감한 아메리칸 뉴 시네마였지만 이후에도 로버트 알트만의 경력의 창끝은 날카롭게 날을 벼르고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해 미국영화의 찬란한 유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처럼 데뷔작 <범죄자들>(1957)에서부터 유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2006)까지 옆길로 새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고 유지해온 감독은 ‘사회파 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시드니 루멧을 제외하고는 그가 유일할 것입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준비한 ‘로버트 알트만 특별전’ 프로그램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의 5주년 기일을 기념해 기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여섯 편을 추린  목록이지만 로버트 알트만과 그의 작품을 기리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다시 로버트 알트만과 그의 영화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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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Altman Special
(2011.11.2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