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미인> 어떤 살인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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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리브스 감독의 <렛미인>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2008년에 연출한 동명영화의 팬들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꽤 괜찮다. 원작영화의 너른 우산 하에서 완전하게 발을 뺀 것은 아니지만 배경이 1983년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로 옮겨지면서 맷 리브스 버전에는 왕따 소년과 흡혈귀 소녀 간의 좀 더 흥미로운 관계의 이면이 생성됐다. ‘미국의 슬래셔 살인마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맷 리브스의 <렛미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영화와 구별되는 ‘독창성’(originality)을 획득한다. 


신화인가, 장르인가?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마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가운데 열두 살 소년 오웬(코디 스밋-맥피, 원작의 오스칼)은 오늘도 눈 덮인 마당에서 쓸쓸히 하루를 보낸다. 학교에서는 왕따 당하고 아빠와 이혼 수속 중인 엄마는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몰래 이웃집을 훔쳐보는 동안 동년배로 보이는 소녀가 옆집에 이사 온다. 그녀의 이름은 애비(클로이 모레츠, 원작의 이엘리). 오웬은 그녀가 맘에 들지만 애비는 경계하듯 그에게 거리를 둔다. 사실 애비는 뱀파이어인 까닭에 정체를 숨기려든 것이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오웬을 멀리하기가 힘겹기만 하다. 더군다나 애비의 ‘아버지’(?)로 보이는 토마스(리차드 젠킨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외톨이가 된 그녀의 적극적인 구애로 둘은 몰래 사랑을 키워간다.

간략하게 내용을 살펴본 바, 맷 리브스의 <렛미인>은 원작영화와 큰 틀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국내 홍보사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원작소설 <Lat Den Ratte Komma In>에 더욱 충실한 오리지널이라고 누차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리메이크라고 불러도 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의 마지막, 수영장에서 벌어지는 학살의 순간에 대해 원작영화와의 유사성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대신 맷 리브스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원작소설에서 발려낸 이야기를 존중하는 한편 이야기를 운용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배경의 디테일에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새겨두려 한다. 그것은 장르영화에 절대적인 강점을 갖는 맷 리브스 감독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텐데 뱀파이어 애비의 흡혈 묘사는 괴수물의 장르어법에서, 별개의 인물처럼 보이는 오웬과 토마스를 하나의 일생으로 순환케 하는 구조(오웬의 노년기는 토마스, 토마스의 유년기는 오웬)는 시종일관 궁금증을 유발하는 미스터리의 서사로 풀어가는 식이다.

이는 첫 장면에서부터 선전포고하듯 제시된다. 연쇄살인마로 추정되는 인물이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와 경찰로부터 추궁을 당하는 장면인데 부러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이틀 전으로 돌아가 사건을 추적하는 서술법은 맷 리브스가 목적하려는 바를 어느 정도 가늠케 한다. ‘연쇄살인마는 누구인가?’ 혹은 ‘왜 연쇄살인마가 되었나?’ 그리고 이를 위해 소환되는 것이 바로 오웬과 애비의 사연이다. 더 정확히는 오웬이 애비와 만나서 결국엔 맺어지는 사연이다. 그러니까 <렛미인>은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지만 맷 리브스가 더욱 무게중심을 두는 캐릭터는 소년 오웬이다. <렛미인>이 뱀파이어라는 허구의 신화를 끌어들였지만 맷 리브스는 ‘인간’ 오웬의 행보에 초점을 맞춰 좀 더 현실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한 의도로 해석된다.


1983년 3월 23일 미국에서는 무슨 일이?

1983년 3월 23일이라는 특정시간을 박아놓은 배경의 양태에서부터 맷 리브스의 의도는 노골화된다. 그냥 1983년 3월 23일이 아니다. 도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당시는 구(舊)소련과의 냉전 대립이 마지막 절정을 다해 치닫던 시기였다. 그날 레이건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21세기를 살아갈 우리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운을 떼며 연설을 시작했다. 미국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에서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핵무기로 미국 본토가 공격받을 경우에 대비해 이를 막기 위한 미사일 방어(MD) 체제의 연구 활동을 개시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훗날 ‘스타워즈 연설’로 기록된 이 연설은 영화 처음부터 지나가는 배경처럼 주변 TV를 통해 끊임없이 노출된다. 즉, 맷 리브스의 <렛미인>은 1983년 3월 23일 당시의 미국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의 전제하에 읽어야 독립적이고 완전한 텍스트가 된다.

레이건이 문제의 연설에서 언급한 ‘우리의 자녀’, 표면적으로 오웬과 애비도 이에 속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하드 바디’(hard body)로 통칭되는 보수적인 남성성이 우선한 ‘레이거노미즘’(Reaganomism) 시대에서 계집애 같다며 놀림 당하는 오웬과 뱀파이어인 애비는 예외에 속한다. 냉전시대 미국의 소수자들이 처한 현실은 이상향처럼 선전되는 ‘아메리칸 드림‘군에서 버림받은 여집합 신세였기 때문이다. 남자, 백인, 이성애자, 청교도인 등 주류로 인정받은 이들만이 미국이 수호하고 지켜야하는 선(善)일 뿐 그 외의 존재들은 타자로 인식되며 더 나아가 주류 미국을 위협하는 악(惡)으로 간주되었다. (레이건은 연설에서 소련에 대해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아닌 게 아니라, 오웬과 애비가 사는 로스 알라모스는 우리가 아는 미국과는 먼 장소로 그려진다. 북유럽 특유의 수정구슬 같은 차가움과 맨 살을 베는 서늘함이 공간을 장악하며 신화의 느낌을 주는 토마스 알프레드슨 버전과 달리 맷 리브스 버전에서는 은밀한 땅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로스 알라모스의 역사가 그렇다. 레이건이 연설에서 밝힌 미사일 방어 체제는 소련의 핵무기가 미국의 본토를 겨냥할 경우, 레이저를 이용해 공중에서 분해한다는 계획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는 세계2차 대전 당시 세계 최초로 원자 폭탄이 발명됐던 연구소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하여 미국 내에서도 철저히 고립된 이 땅에 발붙인 이들의 삶이란 어두운 지하실에서 지내는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뼈에 사무친 외로움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구원하는 오웬과 애비의 관계의 이면에서 맷 리브스가 감지한 것은 바로 미국의 소수자가 처한 비극적 운명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결손 가정 하에서 생활, 학교 내 왕따와 구타, 숨어사는 삶 등과 같은 수동적인 비극의 형태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대신 적극적으로 그에 맞춘 생존법을 터득한다. 타인의 피를 빨아먹으며 세기를 초월해 불멸의 삶을 이어온 애비는 학교에서 매일 같이 얻어터지는 오웬에게 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 조언한다. 이때 애비의 표정은 사악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결연하다. 뱀파이어 신화는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살인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에게 살인은 자기 방어를 넘어서 삶을 이어가기 위한 전제조건과 다르지 않다. 더군다나 여기는 하드 바디의 미국이다. 미국의 현대사는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과 같은 남성성의 과시를 통해 소수자를 박해해온 백인의, 남성의, 이성애자의, 청교도인의 흑(黑)역사다. 애비의 뱀파이어 신화를 우회해 오웬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발언으로 둔갑시킨 맷 리브스의 <렛미인>은 미국에서 소수자가 ‘살인’을 통해 살아가는 법에 대한 영화다. 그래서 감독은 극중 오웬에게서 미국 ‘슬래셔’ 살인마의 기원을 본다.  


오웬은 어떻게 살인마가 되었나?
  
문제의 레이건 연설이 나왔던 당시의 미국은 보수적인 남성성에 대한 소수자의 공포와 불안이 ‘슬래셔’(Slasher)라는 난도질 공포영화의 유행을 통해 드러났던 시기로도 유명하다. 슬래셔는 난도질 살인이 중심에 서는 영화를 일컫는 말로, <할로윈>(1978) <13일의 금요일>(1980) <나이트메어>(1984) 등이 대표작품으로 꼽힌다. 특히 이들 영화 속 살인마들은 마이클 마이어스나 제이슨이나 프레드 크루거나 모두 기괴한 괴물의 형상이거나 얼굴을 가린, 말하자면 주류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일러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비정상’의 형태였다. 그래서일까, 학우들에게 계집애 취급받으며 노골적으로 괴롭힘 당하는 오웬은 억눌린 분노를 자기 식으로 토해낼 목적인지 <할로윈>의 마이크 마이어스 가면을 뒤집어쓰고 칼을 든 채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살인마라도 되는 양 칼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몸짓을 해 보이는 것이다.

오웬의 과격한 몸짓은 강한 남성성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열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망원경으로 매일 밤 옆집을 훔쳐 볼 때 그의 렌즈는 여자를 애무하는 남자나 헬스로 몸을 키우는 사내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육체에 자신을 투영하는 한편으로 그를 통해 괴롭히는 이들을 제압하고 싶다는 내적 욕망의 발로다. 그렇게 오웬의 심리를 파악한다면 이후 <렛미인>의 이야기 진행은 자기 안에서 서서히 악의 싹을 키운 그가 살인마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애비의 등장에 친구를 얻으며 구원의 빛을 보게 되고, 그녀의 조언에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얻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폭력을 휘둘러 보이는 데까지 이른다. 이 과정은 그 둘이 커플이 되어가는 흐름과도 맥을 함께 한다. 애비와 미래를 함께 하기로 한 오웬이 뱀파이어인 그녀의 피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살인을 저지를 것이고 결국엔 연쇄살인마가 되어 토마스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와, 화상을 입은 채 병원에 실려 온 연쇄살인마(그는 혹시 <13일의 금요일>의 프레디?)는 이후 토마스로 밝혀지지만 그것은 또한 오웬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런 의도 하에서 맷 리브스가 처음에 제기한 질문, 연쇄살인마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들이 왜 연쇄살인마가 되었는지 그 이면의 의미를 복기한다면 어렵지 않게 슬래셔 살인마의 기원으로 포개진다. 원작 소설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는 맷 리브스가 <렛미인>을 리메이크한다는 소식에 대해 “맷 리브스처럼 오래된 장르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을 줄 아는 이라면 뻔한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안 그래도 맷 리브스는 전작인 <클로버필드>(2008)를 통해 괴수물 장르를 빌려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특출한 능력을 선보인 바 있다. 뱀파이어의 현대판 신화라고 해도 좋을 <렛미인>을 가져와 장르적 요소를 더욱 강화한 것 역시 현실에 대한 은유인 것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 맷 리브스는 이렇게 말한다. “갈수록 개인적인 영화 만들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작금의 환경에서 오락과 현대인의 공포를 모두 탐구할 수 있는 형식은 장르뿐이다.” 이에 덧붙이길, “뱀파이어 이야기를 통해 소외받은 청춘과 쓸쓸함으로 얼어붙어가는 이들의 심정에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고 맷 리브스는 <렛미인> 리메이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한다.

요 몇 년 새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슬래셔 영화들의 리메이크가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은 갈수록 보수화하는 현대 미국 사회의 흐름과 맥을 함께 한다. 맷 리브스는 강력한 미국, 아니 ‘그들만의 미국’을 선전포고한 1983년 3월 23일을 콕 집어 살인을 생존 수단 삼은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황량한 당대의 공기 속에 서늘하게 주입한다.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그러니까 ‘(네 속으로) 나를 들여보내줘’라는 의미의 제목은 토마스 알프레드슨 버전에서 남녀 주인공의 눈처럼 하얀 순수를 반영했다. 하지만 맷 리브스 버전에서는 불순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살인의 세계로 몰아붙이는 악마의 유혹으로 변질됐다. <렛미인>은 할리우드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사에서도 드문 창조적 리메이크의 한 예를 보여준다.

* 1983년 3월 23일 레이건의 연설과 관련해 본문 중에 인용된 내용은 ‘우주에서 레이저를 요격하겠다’(지디넷코리아 이재구 코너)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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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1.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