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맨>(My iz dzhaza)


사용자 삽입 이미지<재즈맨>과 비슷한 유형의 작품은 많다. 아일랜드 더블린 빈민가 출신 소울밴드의 인생유전을 다룬 알란 파커의 <커미트먼트>(1991)부터 한국 최초 소울밴드 데블스의 음악열정을 담은 최호의 <고고70>(2008)까지, 일련의 음악영화들과 겹치는 것이다.

카렌 샤흐나자로프의 장편 데뷔작이자 그의 이름을 알린 <재즈맨>은 1920년대 당시 소비에트 연방을 무대로 활동했던 재즈밴드를 다룬다. 그런 점에서 뮤지션의 성공담을 묘사한 음악영화로서나, 밴드의 역사를 다루는 연대기로서나 언급된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재즈밴드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점, 무엇보다 1983년 공산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란 사실에 비춰 <재즈맨>의 혁신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재즈맨>이 묘사하는 1920년대는 냉전이 절정에 달하던 1983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상황과 여러 모로 닮았다. 예컨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콘스탄틴이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임에도 적성국인 미국의 음악 재즈를 연주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는 설정은 단적인 예다. (샤흐나자로프는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사라진 제국>(2008)에서 비틀즈와 핑크 플로이드 앨범을 손에 넣기 위해 암시장을 전전하는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다만 영화는 그런 시대의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재즈를 이용하지 않는다. 음악을 통해 시대의 공기를 담기보다는 재즈 그 자체의 공기를 담는데 주력한다. 그래서 콘스탄틴이 결성한 재즈밴드의 음악에는 현실에 저당 잡힌 뮤지션의 애환도,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는 한숨도 없다.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어떤 기회라도 잡기 위해 열정을 다해 연주에 임할 뿐. 한마디로 <재즈맨>은 음악에 헌신하고 모든 것을 바치는 이들에게 보내는 완벽한 헌사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원제보다는 ‘우리가 재즈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듯싶다.)

확실히 주인공들이 재즈음악과 정신적 결합을 해나가는 모습은 이 영화가 가지는 특별한 함의다. 원래 재즈는 미국에서 소외받던 흑인들이 삶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음악인데 카렌 샤흐나자로프는 그 태생적 배경을 1920년대 소비에트 연방에 이입함으로써 본토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재즈정신을 구현한다. 이는 극중에서 냉전의 주역으로 발돋움하던 당시 소비에트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은밀하게 균열을 가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결말부, 단 한 명의 청중을 상대로 공연을 펼치던 밴드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나이든 모습으로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장면은 샤흐나자로프가 목적한 바를 잘 보여준다.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재즈의 영원성, 즉 음악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재즈맨>은 소비에트 영화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평소 접하던 소비에트 영화와 달리 에너지 넘치는 삶과 유머러스한 요소가 넘쳐난다. 비록 <재즈맨>이 다루는 세계는 소비에트 영화 특유의 철학적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지만 거기에는 현실의 초라함을 이겨내기 위한 꿈과 판타지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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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필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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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31~4.26)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Vsadnik po imeni Smert)


사용자 삽입 이미지소비에트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카렌 샤흐나자로프는 한동안 코미디와 뮤지컬 영화의 동격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정권 하의 소비에트 연방이 ‘글라스노스트’(Glasnost)로 지칭되는 개방 정책을 펴면서 샤흐나자로프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처럼 소비에트 삶의 정통성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유명했던 보리스 빅토르비치 사빈코프(Boris Viktorovich Savinkov)가 쓴 <창백한 말>(The Pale Horse)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제정 러시아 시절 지하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혁명당 리더로서 테러를 주도했던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이다. 그중 1905년에 벌어졌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을 다루는데 영화 역시 이를 그대로 다룬다. 극중 테러리스트 집단의 리더로 등장하는 조지(안드레이 파닌)는 원작자의 분신인 셈인데 그는 자신들의 활동이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 예상했다. 

문제는 멤버들 각자가 다양한 동기로 활동에 참여한 까닭에 테러 방식에 이견을 보인다는 것. 가령, 농부인 표도르는 대공뿐 아니라 부르주아도 제거해야한다는 강경주의자인 반면 바냐는 대공이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암살을 거절하는 순진한 학생이다. 이처럼 테러에 대한 상반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원칙에 입각해 활동을 벌이다보니 대공 암살은 몇 번의 실패를 맞게 된다. 그러면서 테러에 대한 조지의 생각은 애초 목적과 달리 암살 그 자체에 집착하면서 그의 삶은 철저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의 목적은 암살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암살에 임하는 멤버들의 내적 모순 상태를 드러내며 ‘테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영화는 중반까지 멤버들의 입장 차를 드러낼 목적으로 장면(scene) 위주로 진행하다가 암살이 본격화되면서 숏(shot) 위주로 전환해 이들의 심적 반응에 집중한다. 즉, 이상과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테러리즘의 애매모호한 속성을 묘사하는 카렌 샤흐나자로프 감독의 능력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최고의 성취다. (다만 동일한 인물이 몇 번의 암살을 시도함에도 단 한 번의 추적이나 의심을 받지 않는 등 상황 묘사의 허술함이 종종 노출되기도 한다)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고민의 실체는 이것이다. 극중 대사를 빌리면, “테러리즘은 개인이 국가에 맞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 희생이 따르는 테러는 행복을 담보할 수 있는가?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영화는 조지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극 말미 죽은 자의 목소리란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선셋대로>의 그것처럼 회한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배경은 볼셰비키 혁명 당시를 전후해 정치시대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현재와도 연관성을 갖는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현재 러시아가 처한 불안한 정국은 조지를 비롯한 멤버들이 원한 행복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 다만 <죽음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관객들에게 이들이 처했던 상황에 동정심을 가지길 바라는 듯 보인다. 행복에는 어떠한 죄악도, 기만도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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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제국>(Ischeznuvshaya imperiya)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라진 제국>의 첫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커튼으로 빛을 완전히 차단한 어둑한 방에서 젊은 남녀들이 아치스(Archies)의 <Suger Suger>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언뜻 평범한 파티처럼 보이지만 1973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슈거 슈거>는 1969년 미국에서 발매돼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른 곡으로, 우드스탁으로 대변되던 당시 젊은이들의 격렬했던 저항정신과는 철저히 동떨어진 바블 껌(bubble gum) 사운드를 대표하는 곡이었다. 그런 서구의 음악을 은밀하게 즐긴다는 것은 소비에트 젊은이들의 현실도피를 넘어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조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라진 제국>은 젊은 남녀가 벌이는 고전적인 삼각연애의 풍경 위로 붕괴해가는 소비에트 연방의 굴곡진 현대사를 겹쳐놓고 향수어린 시선으로 지나간 시대를 회고한다. 특히 탈 정치적인 젊은이들의 연애사를 앞세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방식은 카렌 샤흐나자로프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심 없는 주인공 세르게이(알렉산더 리아핀)가 관련한 강의 시간에 농담 따먹기로 일관한다든가, 여자 친구 루다(리디야 밀료지나)에게 선물할 롤링 스톤즈 앨범을 구하기 위해 암시장에서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는 단적인 예다. 이에 대해 감독은 “이 영화가 다루는 1970년대 초반의 소비에트 역사는 다른 작품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적이 없었다. 그 시기는 20세기에 출현한 가장 강력한 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한 초창기였다. 당시 스무 살(1952년 생)이었던 나의 경험을 스크린에 재창조하는 건 의무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사라진 제국>은 보잘 것 없는 개인의 평범한 삶에 대한 애정을 우선하지만 그 사이로 역사의 상흔을 언뜻 내비치며 미시적인 삶과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상호 연관을 맺고 있음을 은연중 상기시킨다. 견고해보이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제국의 실체가 모래성으로 판명 났듯 세르게이가 사랑하는 루다 역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은 존재다. 계속해서 관계가 어긋날수록 세르게이의 얼굴에 나타나는 상실감은 곧 제국의 운명인 셈이다. 그래서 세르게이가 맞닥뜨리는 스무 살 무렵의 연애의 끝, 이를 이겨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고대도시의 황량함은 마침표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미래임을 <사라진 제국>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3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현재 시점에 과거의 인물들을 다시금 불러 모은다. 이제는 나이를 먹어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관계지만 기억의 끝자락을 놓지 않는 이들에게서 특별한 시기에 대한 향수와 후회가 엿보인다. 더불어, 과거에 꾸었던 불가능한 꿈을 두고 나누는 이들의 대화에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국가를 넘어선 역사의 화해의 순간이 엿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 영화에는 음악을 통해 어렵지 않게 시대에 접근하는 카렌 샤흐나자로프 특유의 방식과 이를 통해 현재 러시아인의 삶의 기원을 추적하는 사려 깊은 통찰력 등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사라진 제국>은 <재즈맨>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샤흐나자로프의 연출 경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증명하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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