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데이즈>(The Next Three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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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해기스의 <쓰리 데이즈>(2010)는 대학교수 존(러셀 크로우)이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린 아내 라라(엘리자베스 뱅크스)를 교도소에서 구출해 미국을 탈출하는 영화다. 일종의 탈옥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쓰리 데이즈>는 교도소 탈옥 이상의 의미를 숨겨놓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폴 해기스는 전작을 통해 지옥과도 같은 미국의 현실을 폭로하기를 즐겼다. <크래쉬>(2004)에서는 해결 방안이 전무한 LA의 인종간의 충돌을 다뤘고 <엘라의 계곡>(2007)에서는 이라크전을 끌어와 미국적 선(善)의 가치에 붕괴에 따른 절망을 묘사했다. 그리고 <쓰리 데이즈>에 이르러 더 이상 미국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선고한다. 진범이 아닌 라라를 살인범으로 구속해 복역시킨 것만 봐도 미국 경찰력의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시민들은 조국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폴 해기스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국 탈출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속국처럼 거느리는 베네수엘라 같은 곳이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주장하는 폴 해기스에게 이제 더 이상 미국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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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1월호

<3:10 투 유마>(3:10 to Yuma)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부극은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199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이후 간간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장르였다. 최근 이 전통적인 미국식 장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과 같은 정통 서부극은 물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등 변종 서부극까지 붐을 이루고 있는 것. 1957년 개봉한 델머 데이비스 감독의 동명작을 리메이크한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는 이 서부극 러시의 선두에 선 작품이다.

1953년 ‘다임 웨스턴 매거진 Dime Western Magazine’에 발표된 엘모어 레너드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3:10 투 유마>는 정해진 시간 안에 범인을 무사히 호송한다는 점에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1952)을 연상케 한다(엘모어 레너드는 TV용 영화 <하이 눈 파트 투: 윌 케인의 귀환 High Noon, Part Ⅱ: The Return of Will Kane>(1980)의 각색을 맡기도 했다!). <하이 눈>에서 보안관 케인(게리 쿠퍼)은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악당을 실은 죄수 호송 열차가 12시 정오에 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이 같은 시간 게임의 상황을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하이 눈>은 선과 악의 선명한 대립을 통한 극적 재미를 주었다. 반면 <3:10 투 유마>는 제한된 시간이 주는 긴장감은 크지 않은 대신, 선악 구별이 혼재한 요지경 세상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건보다 영화 내내 충돌하는 두 캐릭터 벤 웨이드와 댄 에반스의 묘사에 더욱 신경을 쓴 건 이 때문이다. <3:10 투 유마>는 서부극이면서 동시에 캐릭터영화다. 남자들의 세계를 다룬 서부극 속 인물은 섬세한 내면보다 선 굵은 외면 묘사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외양 못지않게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인다. 예컨대, 22건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2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벤은 표면상 악인이지만 일차원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틈만 나면 수첩에 그림을 그리고, “그 눈을 깊이 바라다보면 세상의 색깔이 바뀔 정도예요” 따위의 시적 대사를 읊조리는 그에게서는 악당에 어울리지 않는 신비로움이 묻어난다. 이는 댄도 마찬가지. 목장주에게 억압당하며 힘들게 가족을 부양하는 한낱 목동에 불과한 그도 알고 보면 남북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으로 의족까지 하게 된 피치 못할 사연을 숨기고 있다. 즉 사건보다 캐릭터가 충돌하며 이야기와 분위기를 형성하는 영화인 것이다.

<3:10 투 유마>에는 통념적인 선악 구도를 뒤집는 전복의 재미가 있다. 벤 웨이드를 절대적인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을 넘어 댄의 아들 윌리엄(로건 레먼)의 눈을 빌려 그에게 호감을 보낸다. 오히려 벤이 동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해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보안관과 목장주가 비열하거나 더한 악한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벤 역시 돈을 노린 보안관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에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으로 등장할 정도.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의 태도에는 전통적인 장르의 가치 기준을 위반하는 재미가 있다.

<3:10 투 유마>는 한 발 나아가 이들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마저 제시한다. 댄이 벤의 호송을 맡은 건 그가 정의에 불타는 도덕군자기 때문이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당장에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벤의 호송에 참여하는 것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나라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돈을 위해 정의를 도모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 초기 서부극이었다면 마땅히 정의의 용사로 그려졌어야 하는 캐릭터지만, 세월이 변한 만큼 서부극이 품고 있는 함의 역시 변했음을 벤의 캐릭터는 증명해 보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해답은 대장의 탈출에 목숨을 건 부하들을 바라보며 댄에게 던지는 벤의 대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가 악당이 아니었다면 부하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을 거야.”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부려먹는 약육강식의 세계, 악당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결국 먹힐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가 진정 노리는 지점이다. 영화의 결말은 이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의 구분 없이 자신이 획득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황을 보여준다.

더욱 의미심장한 대목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이 다음 세대에도 거듭할 만큼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댄의 14살 아들 윌리엄의 존재가 중요하게 부각되고, 특히 마지막 대결이 그의 시점으로 비춰지는 건 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의 신화를 옹호하는 장르였던 서부극은 선악의 경계가 역전된 수정주의 서부극을 거쳐 이제 현재의 비극이 대물림되는 ‘신수정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10 투 유마>는, 그 결정적인 증거다.


Tip!  디트로이트의 디킨스, 엘모어 레너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1925년 10월 11일 뉴올리언스 출신인 엘모어 레너드는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중 한 명이자 할리우드 작가다. 1953년 소설가로 데뷔, 총 44편의 장편과 2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그중 21편의 작품이 영화화됐으며(TV 포함), <The Big Bounce>(1969) ‘Three-Ten to Yuma'(1953)는 두 차례씩 영화화되기도 했다.

<Rum Punch>(1992)를 원작으로 한 <재키 브라운>의 쿠엔틴 타란티노, <Out of Sight>(1996)를 원작으로 한 <조지 클루니의 표적>의 스티븐 소더버그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엘모어 레너드는 현재 82세에도 불구, 지난해 <Up in Honey’s Room>(2007)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 신문 헤드라인을 연일 장식했던 ‘보니 앤 클라이드’ 사건과 당시 메이저리그를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야구단의 경기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독할 정도의 현실성과 생생한 대화로 할리우드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찰스 디킨스’라는 별명을 가진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은 도시에 사는 인물들을 주로 다루는 까닭에 하드보일드 혹은 누아르 이미지로 전환하기 쉽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종종 ‘뻣뻣한 레이몬드 챈들러 소설’이라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Freaky Deaky>(1988)가 배우이자 감독인 찰스 매튜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에 있는 등 그의 명성은 여전히 확고하다. 국내 출간된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으로는 <마지막 모험> <악어의 심판> <보안관과 도박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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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75호
(2008.2.19)

<아메리칸 갱스터>(American Gangster)


사용자 삽입 이미지올해 일흔을 맞이한 리들리 스콧(1937년 생) 감독의 최근 행보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2000년대 들어 <글래디에이터>(2000), <블랙 호크 다운>(2001), <킹덤 오브 헤븐>(2005) 등 기복 없는 완성도를 보인 그의 작품들은 관객은 물론 평단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에이리언>(1979), <블레이드 러너>(1982)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리들리 스콧이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작이다.

리들리 스콧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는 연출력으로 황금기를 구가했던 할리우드 고전기의 하워드 혹스나 빌리 와일더 같은 감독을 연상시킨다. 장르와 장르를 유영하며 주어진 틀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는 장인에 가까워 보이는 감독인 것이다. 필모그래피를 훑어봐도 범죄(<블랙 레인>(1989)), 여성버디(<델마와 루이스>(1991)), 호러(<한니발>(2001)), 로맨틱 코미디(<어느 멋진 날>(2006)) 등 편식하는 장르 없이 폭 넓은 행보를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스튜디오의 주문에 따라 영화를 찍어내야 하는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동안 그가 A급 감독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의 새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는 또 한 편의 장르영화다. 1970년대 뉴욕 일대를 주름잡았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그를 집요하게 쫓는 마약반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갱스터영화다. 갱스터는 범죄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세계의 절망과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 장르로 할리우드 고전기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지극히 관습적인 스타일로 장르의 ‘규범’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갱스터>는 1940년대 말 전성기를 누렸던 고전 할리우드 갱스터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흑인 마약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장르의 정통성마저 부인한다. 영화적 세공 기술이 절정에 달한 리들리 스콧이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했을지 내심 기대감을 품게 하는 대목이다.


흑인을 앞세운 갱스터

<아메리칸 갱스터>는 지난 2000년 프로듀서 브라이언 글레이저가 접한 하나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됐다. 니콜라스 필레기(<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의 원작자)가 권유한 기사는 지역문화지 ‘뉴욕’에 실린 ‘거물의 귀환’(Return of the Superfly)으로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에 대한 내용이었다. 기존의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죄 이야기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에 매료된 글레이저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맡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뉴욕 할렘 암흑가의 두목 범피 존스는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날이 갈수록 대형화되는 마약시장이 못마땅하다. 형제애가 강한 조직의 특성상 중간 도매상들이 없어질수록 조직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목숨을 잃은 범피를 대신해 뉴욕 할렘을 접수하게 된 프랭크 루카스. 두목과 달리 거대한 마약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루카스는 머리를 짜낸다. 마약 재배지인 태국으로 직접 건너가 대량 구입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이용, 밀반입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을 없앤 것. 기존 마약보다 순도는 높고 가격은 더 저렴하니 루카스의 마약 브랜드 ‘블루 매직’은 삽시간에 뉴욕의 마약시장을 장악한다. 허나 사업가처럼 깔끔한 옷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행동을 보이는 그가 불법을 일삼는 조직의 두목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는 뉴저지 형사 리치 로버츠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뇌물을 받고 비리를 저지르는 때에 동료 형사의 뇌물을 상부에 고발한 일로 ‘또라이’ 배신자로 낙인찍힌 로버츠. 타고난 바람기와 바깥으로만 나돌아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설상가상으로 파트너가 마약복용으로 숨지는 일이 발생해 수사에 나서지만 별다른 단서가 없다. 급기야 특별마약반이 편성되고 로버츠는 전방위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연출을 의뢰받은 건 <킹덤 오브 헤븐> 촬영이 한창이던 2004년이었다. <트레이닝 데이>(2001)의 안톤 후쿠아, <호텔 르완다>의 테리 조지 감독이 이미 포기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자 그는 즉각적으로 마음이 동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는 흥망성쇠의 전개가 흥미를 끌었다.” 다만 그는 이것이 프랭크 루카스 개인의 영화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뉴욕 할렘이 배경이지만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밝힐 수 있는 적절한 소재였고 이를 위해서는 ‘흑과 백’ 두 남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여야만 했다. 스티븐 자일리언은 리치 로버츠의 비중을 루카스에 버금가게끔 키웠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비로소 서로의 세계를 걸고 운명적인 대결을 펼치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됐다.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왕국을 이룩한 프랭크 루카스, 가족과 동료를 모두 잃고 범인을 쫓는 일에만 몰두하는 로버츠. 각기 다른 환경에 놓인 두 남자의 이야기를 일러 스콧 감독은 “2007년판 <프렌치 커넥션>(1971)이자 흑인 버전 <대부>”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마약조직과 부패한 경찰이 결탁한 거대한 음모는 <프렌치 커넥션>을, 화려한 가족모임 뒤에서 추악한 사건이 벌어지는 이면의 이야기는 <대부>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그뿐인가. <형사 서피코>(1973)를 비롯 <좋은 친구들>, <히트>(1995)에 이르기까지, <아메리 갱스터>는 아메리칸 갱스터 장르의 걸작 목록들을 일별하는 전시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은 이런 시각에 대해 경계한다.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확연하게 차별되는 요소가 있다. 조직을 이끌어가는 우두머리가 다름 아닌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흑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갱스터영화를 본 적이 있나?” 그의 말처럼, 아이들(역시 백인이다!)이 갱으로 등장하는 알란 파커 감독의 <벅시 말론>(1976)을 본 적은 있어도 흑인 갱스터를 본 기억은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새로움과 파격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암흑가의 무하마드 알리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답지 않게 감정의 파고를 느낄 수 없는 영화다. 자극적이지 않고 점잖다. 흔히 갱스터영화라면 스크린 밖으로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폭력의 에너지를 떠올리지만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이런 파토스가 적다. 대규모 총격전은 루카스의 마약 제조공장을 소탕하는 결말 부분에 가서 한 번 등장할 뿐이고 루카스의 냉혹함을 표현하기 위한 살인 장면이 오프닝과 짧게 삽입되는 것이 고작이다. 갱스터 장르의 꽃이라는 총격전 없이 장르물이 가능할까 싶지만 그 주인공이 프랭크 루카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비주얼 감각으로 치자면 둘째가 서러운 리들리 스콧이 시각적 쾌감을 연출할 수 있는 총격전에 무심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프랭크 루카스는 미국을 주름잡은 거물급 범죄자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뉴욕’ 지에 ‘거물의 귀환’을 송고한 마크 자콥슨 기자에 따르면 “루카스는 새로운 도시 범죄를 꿈꾼 인물”이었다. “화려하고 꾸미기 좋아하는 이전의 흑인 갱들과 달리 회사의 CEO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진취적인 마약 딜러”였다. 그는 뉴욕의 터줏대감이었던 이탈리아 갱들에 한 발 앞서 마약사업의 대형화를 주도했고 맥도날드처럼 브랜드의 힘을 간파하고 마약 대신 ‘블루 매직’이란 이름을 도입했으며 공급처에서 물건을 직접 구입해 공수하는 획기적인 유통과정을 생각해냈다. 특히 범죄자 특유의 눈에 띄게 드러나는 행동을 자제했던 그는 언제나 깔끔한 슈트 차림에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며 사업가처럼 행동하는 등 교묘하게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간 것으로도 유명하다.

리들리 스콧은 ‘나서지 않는’ 루카스의 성격을 영화의 스타일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앞서 언급한 과도한 폭력 묘사는 물론이고,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 장르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징적인 요소를 대부분 배제한다. 마약이 소재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2000)까지는 아니더라도 테크니션이라 평가받는 감독 특유의 현란한 장면 연출은 찾아볼 수 없다. 배신과 죽음으로 확실하게 종결되는 장르 관습에서 한 발 나아가 비극과 해피엔딩 사이에서 애매하게 종결된다. 대신 실화를 바탕으로 시대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영화답게 장르적 속성은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묻힐 뿐 캐릭터에 모든 걸 의존한다. 즉, <아메리칸 갱스터>의 장르성을 결정짓는 것은 중심인물 프랭크 루카스다. 캐릭터 자체가 장르로 귀결되다보니 루카스는 하나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만큼 영화는 그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보다 사회적인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루카스의 비주류적인 감성에 매료된 덴젤 워싱턴은 안톤 후쿠야 감독에 의해 루카스 역에 낙점된 이후 테리 조지 감독을 거쳐 리들리 스콧에 이르기까지 역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 같은 대가가 버티고 있는 장르에서 6년 넘게 출연을 기다린 이유는 주인공이 바로 프랭크 루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갱스터의 ‘러쉬모어 산’ 같은 인물이다. 그 어떤 캐릭터도 ‘아메리칸 갱스터’와 같은 지위를 얻은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루카스는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그를 일종의 영웅처럼 다루는데, 이는 백인의 슈퍼히어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흑인 영웅은 태생적인 배경 탓에 기존의 지배세력인 백인의 기득권을 이겨내고 지위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인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루카스가 거물 백인 갱인 도미닉 카타노(아만드 아산트)와 손잡고 결국 그의 위치를 넘어서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1970년대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의 모습을 루카스와 빗댄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리는 단순한 권투선수가 아니었다. 70년대 전성기를 누린 그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징집을 거부했고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등 미국 정부(백인)에 저항한 대표적인 흑인 영웅이었다.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1971년 벌어진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전설적인 권투시합이 나온다. 리들리 스콧은 여기서 잠깐이나마 프랭크 루카스의 삶을 알리와 병치시킨다. 그는 암흑가의 알리, 할렘의 영웅인 셈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경기는 루카스의 마약왕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처럼 그려진다. 백인 중심의 시스템에 저항한 알리와 백인의 비호를 받는 프레이저(군 입대를 거부한 알리와 달리 프레이저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방에서 편안하게 근무했다)의 시합으로 명명된 이 경기에서 루카스는 최고급 옷을 걸치고 백인 마약왕 카타노보다 앞자리에 앉아 그의 시야를 방해하는 것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웅변하려 한다. 갱스터 비즈니스까지 장악하고 있는 백인의 질서를 전복하려는 그만의 퍼포먼스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아이러니컬하다. 1971년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알리와 프레이저의 세기의 경기는 두 선수가 가진 세 차례의 ‘사생결단’ 대결(미국인들에게 알리와 프레이저의 경기는 백인 보수주의와 흑인 진보주의의 대결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띤 사건이었다) 중 유일하게 알리가 패배한 시합이었다. 마약 커넥션의 뿌리를 찾아 눈에 불을 켠 리치 로버츠가 잠행하던 프랭크 루카스의 존재를 처음으로 간파하게 된 계기, 즉 루카스의 거대한 왕국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이 시합을 통해서다. 바야흐로, 루카스가 ‘세계의 왕’임을 선포하는 순간 그의 괴멸은 예정됐던 것이다.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법칙

물론 그 누구도 프랭크 루카스를 진짜 영웅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 하나로 뉴욕 할렘의 블랙마켓을 장악한 과정은 흥미를 유발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사회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악당이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프랭크 루카스를 무조건 영웅으로만 묘사했다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리더였지만 명백한 범죄자이기도 한 그의 이중적인 면모가 <아메리칸 갱스터>를 연출한 중요한 이유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루카스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과 그 과정에서 겪은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루카스의 실제 삶을 매력적으로 다루는 영화의 태도에 윤리적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악인을 영웅시하고, 공권력을 공공의 적으로 조롱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논쟁을 연상시킨다. 그리 놀랄 만한 것도 아닌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를 비롯해 갱스터물이 원형으로 삼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실화이거나 현실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까닭이다.

프랭크 루카스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덴젤 워싱턴은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예로 들며 “이 작품이 범죄를 조장했다는 주장은 과장됐다. <스카페이스>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그 전부터 사람들은 영화처럼 살고 있었다”며 갱스터영화의 현실 반영이 터무니없다는 일각의 반응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갱스터영화의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퇴치돼야 할 악당이지만 늘 동정적으로 묘사됐다. 심지어 그들의 영웅적 풍모와 기질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그 장르를 즐기는 고유한 방법이었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이것은 프랭크 루카스 개인이 아니라 ‘미국식 갱스터 비즈니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리들리 스콧은 루카스의 마약왕국이 온전히 개인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아이디어는 그에게서 시작됐지만 사업 번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었던 미국의 군부대와 부패한 경찰이었다. 마약이 밀반입되는 데 운송역할을 한 미군과 거래를 눈감아주는 대신 큰돈을 챙긴 경찰에게서 정의의 모습을 찾는 건 요란한 장신구를 걸친 루카스의 옷차림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갱스터영화에서 정치적인 함의를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아메리칸 갱스터>는 일개 미국인에 불과한 루카스를 통해 미국의 본질을 꿰뚫는 문화인류학적인 작업이었다. “단순한 마약상의 시점(vision)이 아닌 아메리칸 비즈니스의 관점(point)에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작가 스티븐 자일리언의 얘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루카스의 마약사업이 베트남전의 시작과 함께 이뤄지고 철수와 동시에 내리막길을 걷는다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전쟁과 같은 이벤트(?)만 벌어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외부적으로 구축한 폭력의 커넥션을 통해 배를 불려온 전지구적인 미국의 사업방식, 그 뒤를 보조하는 시스템과 논리를 떠올려보라. 그 흥망성쇠는 미국이 지금껏 쌓아올린 업적의 이면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미국의 이상 역시 그에 맞게 변질된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뉴욕 양키스의 투수를 꿈꾸던 루카스의 조카 스티브(팁 해리스)의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촌 곁에서 일을 돕던 중 전도유망한 야구선수가 누구나 선망하는 양키스 행을 포기하고 마약상의 길을 걷는 모습은 아메리칸드림의 그늘진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장르 장인의 내공

공교롭게도 <아메리칸 갱스터>의 국내 개봉 일주일 전, 리들리 스콧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 DVD 파이널 컷이 공개된다. “<블레이드 러너> 이후 나의 창조력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라는 자조 섞인 스스로의 평가처럼 리들리 스콧은 지금까지 <블레이드 러너>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있었다. 하지만 장르의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아메리칸 갱스터>의 야심은 SF 장르의 거대한 기념비였던 <블레이드 러너> 못지않다.

“1970년대 클래식 갱스터영화의 유령버전 같다”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아메리칸 갱스터>가 <프렌치 커넥션>, <대부> 등 1970년대 미국영화에 빚을 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근래 발표된 리들리 스콧의 영화 중 최고이며 갱스터 장르로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기왕의 영화적 유산을 흡수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솜씨는 ‘장르 장인’의 내공을 느끼게 한다.

<리틀 시저>(1930), <공공의 적>(1931)부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 <좋은 친구들> <갱스 오브 뉴욕>까지, 갱스터 장르의 역사적인 이정표들을 한데 모으면 곧 미국에 대한 ‘폭력의 역사’가 된다. 여기서 ‘완성’이란 표현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 백인 갱들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갱스터영화로 쓴 기존 폭력의 역사의 공백을 채우려는 작업처럼 보인다. 흑인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이 영화의 개봉과 함께 비로소 미국의 뒷골목 역사책이 탈고된 셈이다. 갱스터영화의 대표라도 되는 듯 선언조로 지어진 영화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더없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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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66호
(2007. 12. 25)

(L.A. Confidential)


<LA 컨피덴셜>은 <차이나타운> 이후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하드보일드 영화 되겠다.

하지만 당 영화 <LA 컨피덴셜>이 등장하기에 앞서 정통 하드보일드 영화의 등장을 암시하는 징후는 가깝게는 1년 멀게는 약 7년 전부터 감지되기 시작하였는데, <밀러스 크로싱 Miller’s Crossing>과 <바운드 Bound>가 바로 그것이다. 하드보일드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관객들에게도 낯이 익은 이 두 작품을 잠시, 짧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먼저 1990년에 발표된 <밀러스 크로싱>은 장르의 변주에 능한 코헨 부라더스의 작품으로 무엇보다 하드보일드의 하나의 기호이자 도상인 남자의 중절모(‘볼사리노’라고도 한다)를 이용,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과히 일품인 작품 되겠다.

그러나 <밀러스 크로싱>은 하드보일드의 특징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두 범죄 조직체 간의 대립이란 점에서 갱스터와 하드보일드의 크로스오버에 더 가까워 정통으로 보기엔 쪼까 어렵다고 본 우원 판단하는 바이다.

그 다음. 워쇼스키 부라더스의 1996년 작 <바운드>.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의 특징을 차용한 작품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변주를 보인 예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속살 화사한 쭉빵걸과 그녀의 음모에 넘어가 위기를 겪는 또 한 명의 쭉빵걸 등 레즈비언 커플을 등장시켜 고전 하드보일드의 역할 전복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아주 아주 신선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그 두 뇬간의 결합이라는 행복한 결말은 하드보일드의 이례적인 마무리로써 이 또한 매우 훌륭한 변주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들 하드보일드라 할 수 없음이다. 1950년대 이전을 빽 그라운드로 깔고 있으면 모를까 시대적 배경이 현대 아니냐. 게다가 퀴어와의 교배를 시도했다는 점도 정통성을 거세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 두 영화가 발표되기 이전에도 <보디 히트 body Heat>와 같은 하드보일드 계통의 영화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기 했지만서도, 정통을 따르기 보다는 장르의 두드러지는 특징 한두 가지 만을 차용, 영화를 구성했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라 인정해주기 곤난함이다.

그런 점에서 하드보일드의 마지막 대표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제임스 엘로이(James Ellroy)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동명의 영화 <LA 컨피덴셜>을 만들어낸 사실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 위의 영화들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차이나타운> 이후 끊어져 있던 정통 장르영화의 계보를 잇는 충분조건을 갖춘 셈이다.

하지만 당 영화 <LA 컨피덴셜>은 하드보일드의 특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면서도(고것들이 뭐시긴지 이제는 구지 설명 안 해 줘도 되겄지), 그 법칙을 완성하는 요소를 위배하는 설정을 목격할 수 있다.

고거이 뭔 소린가 하니, 일단 <LA 컨피덴셜>의 주인공은 사설탐정이 아닌 경찰들이다.

이는 특별한 이야기상의 설정이기보다 1950년대 미국의 사회상(象)에 따른 변화라 할 수 있다. 당시의 범죄양상은 마피아와 같은 대규모의 조직범죄가 만연한 시기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등하게 또는 그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맞설 수 있는 조직적인 수사체계를 갖춘 경찰관들이 제격이었다.

결국 조직범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940년대부터 사립탐정의 활약상은 이전에 비해 뜸하게 되었고,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LA 컨피덴셜>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경찰에게 물려주게 되었다(킴 노박의 출세작이기도 한 1954년 작품 <Pushover>의 남자주인공도 경찰이다). 주인공이 잭 빈센스(케빈 스페이시), 에드 액슬리(가이 피어스), 버드 화이트(러셀 크로우) 총 3명인 점도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트리오로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하드보일드에서 보기 드문 설정으로, 이전 하드보일드가 특정한 주인공 1명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것과는 상이한 변화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점은 또한 영화의 전개상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LA 컨피덴셜>의 초반을 보면 이 세 형사의 각기 다른 성격을 극명히 대비시키기 위해 잭, 에드, 버드 각각의 시퀀스를 교차로 편집하여 나열한 구성을 목격할 수가 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을 기억하는데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인물의 묘사가 뛰어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LA 컨피덴셜>이 이전 하드보일드 영화와 달리 큰 차별성을 보여주는 부분은 팜므 파탈과 그 주변을 맴도는 주인공 남성(들)과의 관계이다.

본 우원의 집중강의로 팜므 파탈에게 걸리는 남성 캐릭터는 웬만하면 쪽박을 찬다는 사실과 마지막에 주인공 남성과 뇬 간의 관계가 여간해선 좋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밑줄 쫙 그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당 영화는 다르다. 그것도 아주 상이하게 다르다. <LA 컨피덴셜>에서 린이라는 요부 역은 킴 베이싱어가 맡았는데, 이뇬 선배 팜므 파탈들처럼 자신을 찾아오는 남성을 병들게 하는 섹쉬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다만 린은 선배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또 하나의 비기를 가지고 있으니, 고것은 순정적인 사랑 되시겄다. 그래서 린은 주인공 남성들을 위기에 빠뜨리긴 하지만 곧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 하드보일드로는 보기 드물게 상대남성과 끝까지 좋은 관계를 맺는 영예를 거머쥐게 된다.

이와 같은 요소들이 정통 하드보일드이면서도 하드보일드의 법칙을 위반하는 변화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LA 컨피덴셜>이 높이 평가 받는 이유이다. 그것은 원작자 제임스 엘로이의 업적이기도 하지만, 방대한 원작(국내 출시본은 2권으로 총 726페이지에 달한다)을 2시간 20여분의 분량으로 압축하여 원작의 우수성을 잘 잡아낸 시나리오 작가 브라이언 헬게렌드(Brian Helgeland)와 감독 커티스 핸슨(Curtis Hanson)의 공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LA 컨피덴셜>이 시나리오만 뛰어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만약 이야기만이 돋보였다면 영화로 좋은 평가를 얻어내기 절대 힘들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영화란 이야기와 그에 따른 형식이 일치해야 걸작으로 공인 받는 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감독 커티스 핸슨은 출중한 연출능력을 보여주었다.

‘은밀한, 비밀스런’이란 뜻을 가진 당 영화 제목의 ‘confidential’은 영화배우와 같은 유명 인사들의 부적절한 남녀관계나 동성애와 같은 일탈된 행위 그리고 마약문제를 기사화한 일종의 연예폭로잡지로, 실제 미국에서 1950년대에 수많은 독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곧, 영화제목은 책제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LA 컨피덴셜>은 컬러풀한 잡지의 겉 표지를 연상시키듯 화려한 영화 배우들의 활동사진을 공개한 후, 빛 바랜 속지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는 목적에서 갈색 톤의 화면으로 안면을 바꾸어 버린다(컬러가 도입된 이후 심심치 않은 논쟁을 불러온 부분으로 몇몇 평론가들은 흑백필름이 아니면 하드보일드의 어두운 분위기를 표현해낼 수 없다고 해서 <LA 컨피덴셜>이나 <차이나타운>을 진정한 하드보일드영화라고 하지 않는다).

잡지의 표지를 펼쳐 그 안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형식을 취한 구성은 다름아닌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시선을 의미한다. 삐까번쩍한 겉 모습과 달리 고약하게 변질된 LA의 실상에 접근해간다는 암시가 되겠다.

그렇다면 대체 LA의 무엇을 파헤치기 위해 위와 같은 형식을 취한 것일까? 영화는 표면상 LA의 최대범죄단체 보스인 미키 코헨의 구속 이후 생긴 암흑가의 공백을 LA 고위층들이 장악하려는 되먹지 못한 음모를 디비고 있지만, 실상 <LA 컨피덴셜>이 보여주려 하는 속사정은 LA로 대표되는 당시 헐리웃 영화산업의 폐해이다. 연예폭로잡지 허쉬(Hush-Hush)를 등장시킨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또한 ‘아방궁’에 소속되어 있는 창녀들이 당시 영화 스타들의 얼굴로 성형하고 매춘업에 종사한다는 설정에서도 그러한 상징을 읽어낼 수가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린은 “헐리웃에 상경하면 이렇게 되요. 덕분에 우린 연기를 할 수 있고요”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가.

헐리웃 동경에 대한 어긋난 꿈을 조롱한 대목이다. 거기에 확인 사살 겸 흑발이었던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는 린의 언급은 헐리웃이 확실히 거품과 같은 환상을 사고 파는 곳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헐리웃을 향한 <LA 컨피덴셜>의 묘사 중에 흥미로운 점은 동성애를 연상시키는 장면과 인물을 심심치 않게 등장시킨다는 사실이다. 지금이야 그리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1950년대에 동성애라면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자유분방하다고 소문난 미국에서도 당시 동성애라 함은 곧 사형선고나 진배없었다. 마녀사냥의 주범인 매카시가 이들 동성애자들을 향해 미국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영화계가 특히 이 문제에 민감했는데, 이미지 하나로 먹고 사는 영화배우가 동성애로 밝혀질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겠는가. 먼 후에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록 허드슨이나 캐리 그랜드,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같은 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얼마나 많은 폭로 잡지와 힘겨운 숨바꼭질을 벌였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이전의 하드보일드 영화들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데 있어 불안한 공기만을 구현하는데 집중했다면, <LA 컨피덴셜>은 위의 경우처럼 헐리웃의 영화산업이 낳은 부작용을 다각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단도직입적으로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점 또한 <LA 컨피덴셜>이 하드보일드이면서 하드보일드와는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헐리웃을 공격했다는 점 때문인지 대단히 잘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 1998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및 9개 부문을 후보에 올리고도 각색상과 여우조연상만을 수상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

그 해의 아카데미 히어로가 11개의 오스카를 싹쓸이한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 Titanic>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헐리웃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 보수적인 아카데미 심사우원 선상님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근데 아카데미가 언제 하드보일드 영화에 따뜻한 손길을 보낸 적이 있었는가? 꼰대 같은 심사우원 양반들…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