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가도가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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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퓌센(Fussen)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 창밖으로 지나가는 ‘로맨틱 가도'(Romantische Strasse)를 바라보면서 이름 한 번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도로 주변으로 중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舊)시가지부터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고성(古城)들, 그리고 풍경 화가의 그림에서나 봤음직한 울창한 숲까지. ’캬~ 낭만 도로라니 이름 한 번 죽이는 걸‘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얼굴 표정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껍질보다 더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인들이 프랑스 파리에나 어울릴법한 이름을 지을 수 있다니 그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개그본능이 발동한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옆 좌석에 우연히 동석하게 된, 독일여행이 처음이라는 한국인 대학생에게 알은 척을 했다. “로맨틱한 도로를 이렇게 남자 둘이 앉아서 가게 되다니 우리도 참 낭만이라고는 쥐뿔도 없죠. 하하하” 재치 넘치는 나의 개그에 호탕하게 웃을 줄 알았던 대학생이 글쎄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녀석이 외국에 나와 있다고 고새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건가?’ 물론 아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로맨틱 가도의 로맨틱은 ‘낭만적’이 아니라 ‘로마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Romantische의 Romantis를 독일어의 낭만으로 오독하고만 나의 이 짧은 지식이란. (;–;)

나보다 10살은 족히 어려보이는 대학생은 어린 아이 대하듯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독일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면서 독일 관광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로맨틱 가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뷔르츠부르크(Wurzburg)부터 남쪽의 퓌센까지 약 400km에 이르는 도로를 일컫는 말이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쭉 더 내려가 스위스의 알프스를 넘으면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갈 수 있다고 하여 로맨틱 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아이고, 한 수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이참에 로맨틱 가도는 어떻게 조성됐는지도 알려주시죠. (^^;)

원래 이곳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2차 대전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대학생의 얘기였다. 미영 연합군의 공세에 시달리던 독일의 나치가 위기 타파를 위해 로맨틱 가도를 이용했다는 것. 미영 연합군을 로맨틱 가도로 유인해 이들이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있을 동안 나치군(軍)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후 패전국이 된 독일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지우기 위해 로맨틱 가도를 관광지로 조성했다는 것이 그가 알려준 유래의 정체였다. 독일 정부는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키우기 위해 옛 모습을 잃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를 해왔고 그런 과정을 거쳐 로맨틱가도의 관광지로 거듭난 곳이 무려 32군데란다.

그런데 독일 여행이 처음이라면서 어쩜 그리 로맨틱 가도에 대해서 전문가 뺨 칠 정도이신가요. 그는 한 장의 지도를 내게 내밀었다. 여행 안내소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로맨틱 가도의 지도였다. 나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온통 영어로 설명이 되어있어 지도만 보고 관심을 끊었던 것인데 역시 요즘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뛰어나다니까. 이왕 없는 지식 ‘뽀록’난 김에 나 같은 사람이 갈만한 로맨틱 가도의 관광지가 어디냐고 그에게 물어봤다. 어린 대학생은 잠시간 지도의 설명을 살펴보더니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에 가볼 것을 강력 추천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라면 한글로 된 나의 가이드북에도 자세히 설명돼있었다. 독일의 가장 미스터리한 왕으로 평가받는 루트비히 2세가 기획한 성으로, 평생토록 집착해왔던 백조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접목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이었다. 녀석 나의 귀족적인 풍모를 언제 또 알아보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권유하다니, 요즘 대학생들은 참 예의가 발라. 그는 내 속마음을 꿰뚫어봤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디즈니랜드의 성 모양이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며 내 정신연령이 디즈니에 가까운 것 같아 추천해줬다나. 나는 퓌센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만 중간에서 하차하고 말았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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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1.4)

<크라바트>(Krab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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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크라우츠 감독은 늘 여정을 다룬다. 소재가 유괴이던(<Trade>) 학창시절의 경쟁이던(<Sommersturm>) 그 이면에는 집 떠난 자의 귀환의 감성이 담겨 있다. 특히 청소년을 주인공 삼는다는 점에서 성장영화로 기능하는 것이다. <크라밧>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 크라밧이 마법사를 만나 능력을 키워 평화를 가져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키워준 스승을 내쳐야 하는 제자 크라밧의 심리적 갈등이 주를 이루는데 영화는 흡사 <반지의 제왕>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스타워즈> 이야기를 방불케 한다. 다만 크라밧의 성장과정에 집중한 영화는 흑마술의 볼거리와 결합함으로써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CG의 사용이 실재감보다 환상을 부풀리는데 집중돼있을 뿐 아니라 극중 내레이션을 빌어 “세상의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이끄는 구조가 동화의 요소를 강조한다.

주인공 크라밧의 정신적 스승으로 등장하는 톤다 역의 다니엘 브륄(<굿바이 레닌><에쥬케이터>)은 “감독의 연출 능력을 신뢰했기에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한 첫 번째 영화”라고 <크라밧>을 지지했다. 볼거리 면에선 다소 심심한 감이 없지 않지만 브륄의 말처럼 탄탄한 연출력과 밀도 높은 이야기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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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카탈로그

<특전 U보트>(Das Boot)



르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는 분명 전쟁일 것이다. 국가의 대의 명분에 따라 적으로 규정된 상대방을 살상해야 하는 전쟁의 속성상 그 비극적인 드라마 속에 단순히 자국의 이익을 꾀하기 위한 파괴의 개념은 보는 관점에 따라 주제와 묘사가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3자의 입장에서 연출한다 다짐하더라도 서술 당사자의 성장과정, 학습지식, 처한 위치 등 온갖 무의식적인 개인적 배경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새 주관이 스며들기 마련. 그래서 영화잡지 <프리미어>의 최보은 편집장은 ‘반성이 없는 전쟁영화는 모두 부정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라며 전쟁은 어떠한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개념임을 자신의 지면을 통해 피력했다.

그런데 영화를 노골적인 상업화와 제국주의의 선전도구로 악용하고 있는 할리우드는 전쟁의 비극을 역이용, 가장 흥미 있는 오락영화와 자국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매체로 둔갑시켜 꾸준히 재미를 보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이러한 경향에 대해 프랑소와 트뤼포(Francois Truffaut)는 ‘영화는 실질적으로 전쟁을 흥미 있게 보이기 위해 만드는 의도가 다분하기 때문에 반전(反戰)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다시 말해, 헐리웃에 있어 전쟁영화는 돈을 버는 가장 좋은 수단이자 미국화(Americanism)를 전파하는 가장 악랄한 매체가 된다. 이에 반해 비교적 자본의 논리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약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을 제외한 여타 국가의 경우, (미국에 비해) 조심스럽게 전쟁영화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볼프강 페터센(Wolfgang Petersen) 감독의 독일영화 <특전 U보트>(81)와 이를 벤치 마킹하여 오락영화를 만든 할리우드의 <U-571>(00)은 위의 견해를 가장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다.


수함은 고립된 상황이 주는 폐쇄성으로 인해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만약 삶과 죽음의 진한 경계선이 있다면 그 중 한 곳은 심해일 것이며, 그 안을 휘젓고 다니는 잠수함은 죽음 위에서 곡예를 펼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잠수함 내부에 상존하고 있는 폐쇄 공포와 오로지 청각과 순간적인 판단력에 의지해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는 수중전(戰)은 확실히 지상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바로 이와 같은 제한된 조건이 만들어낸 상황과 극단적인 인간심리로 인해 잠수함 영화가 꾸준히 제작, 발표되고 있는 것.

그래서 볼프강 페터센에게 잠수함 영화는 적과의 싸움보다는 인간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전쟁을 가장 객관적으로(100%는 아니지만)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뢰테 부크하임(Lother G. Buchheim)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특전 U보트>에는 예의 그 할리우드 전쟁영화처럼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전투장면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드라마, 애국심을 고취하는 억지설정은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잠수함의 실상을 전혀 접해보지 못한 일반관객에게 사실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만큼 숨기는 것 없이 미화하지 않고 구석구석 잠수함내부를 묘사하고 있다.

좁은 통로 한 켠에 마련된 장교들의 식사장면은 그 사실감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다. 물의 움직임에 따라 접시가 떨어질 만큼 심하게 흔들리는 테이블과 그 옆을 힘들게 지나가는 승무원의 모습은 환상을 가지고 접했던 잠수함 영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초췌해지는 승무원의 모습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깔끔한 장교 한명을 설정,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한 점이나 일기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등 작은 묘사들이 돋보인다. 이는 원작의 작가가 실제로 잠수함에 승선하여 직접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극중 해군 정보부 특파원으로 등장하는 워너 대위(허버트 그뢴메이어)는 영화의 원작자로 볼 수 있다. 

결국 <특전 U 보트>는 할리우드의 오락영화처럼 특정사건이 중심에 놓이지 않는다. 묘사라는 측면에서 잠수함에 승선한 승무원들의 생활상을 출정-공격-침몰-수리-복귀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보여준다. 독일 감독이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나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삽입한다거나 아니면 당시 자국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의 참혹상이란 이런 것이라며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거리를 두고 지켜볼 뿐이다.


와는 반대로 조너선 모스토우(Jonathan Mostow) 감독의 <U-571>은 비할리우드적인 영화를 가지고 어떻게 뚝딱거리면 할리우드풍의 영화로 기능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일단 조너선 모스토우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볼프강 페테슨의 걸작을 넘어설 수 없음을 잘 알고 <특전 U 보트>의 특징을 차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이 점은 잠수함 내부의 묘사에서 주로 목격이 되는데, <U-571>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인 괴츠 바이드너(Gotz Weinder)는 바로 <특전 U 보트>에서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던 스텝.

그 결과, <U-571>의 초반부 독일군이 등장하는 장면은 잠수함 내부의 모습과 초록빛 심해 그리고 독일어 대화로 인해 마치 <특전 U 보트>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U-571>은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잠수함 영화이다 보니 <특전 U 보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오락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많은 돈을 들여 폭파장면을 만드는 등 스펙터클한 화면구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관객은 스타를 보러 극장에 온다는 속설에 충실하게 매튜 매커너헤이, 하비 카이텔, 빌 팩스턴과 같은 A급 배우는 물론 존 본 조비와 같은 유명 가수를 불러들여 스크린을 화려하게 수 놓는다. 물론 극적인 상황이 만들어내는 헐리웃표 감동을 빼 놓을 수 없는 법.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 수세에 몰리던 주인공 잠수함이 사태를 역전시키기 위해 마지막 어뢰를 발사하는 과정에서 숭고하게 비춰지는 승무원의 죽음을 삽입한 씬은 그 단적인 예다.

음악의 사용 역시 <특전 U 보트>와 <U-571>은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비극임을 강조한 반전(反戰) 영화답게 <특전 U 보트>는 비장한 음악을 반복한다. 반면 <U-571>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각 장면의 분위기에 따라 관객의 감정을 필요이상으로 들뜨게 혹은 가라앉게 만들 요량으로 미국의 영웅주의를 연상케 하는 행진곡에서부터 전우애를 기리는 장송곡까지 음악이 상황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할리우드 영화의 어이없음은 <U-571>에서도 돋보이는데 자국군인이 승선했을 때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던 독일산 잠수함 U-571이 독일어를 읽을 줄도 모르던 미국 군이 승선하자 강력한 잠수함으로 탈바꿈한다는 이야기 전개는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뻔뻔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2002. 2. 6. <무비클래식>)

<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굿바이 레닌>은 병든 마더를 위해 선의의 거짓부렁을 일삼는 한 청년의 이야기다. 이름은 알렉스(다니엘 브륄 분). 의식불명에 빠졌던 마더가 극적으로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닥터의 충고에 아들 알렉스는 모종의 행각을 벌인다. 마더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외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을 차단하고 왜곡하면서 마더 보호작전에 나선 것.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쥔공 알렉스가 마더에게 헌신을 하는 과정에서 가족끼리 서로 갈등을 겪지만두 끝내 마더의 건강을 사수, 가족 간의 화해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면서 찡한 가족애를 느낀다는 감동의 파노라마를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어느 정도 맞다. <굿바이 레닌>은 그동안 많이 보았던 가족에 대한 영화 중 하나다. 근데 당 영화는 외견상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가족영화가 아니다. 그건 당 영화 뒤로 흐르는 시간적 배경이 별거 아닐 것 같은 가족 이야기에 똥꼬 깊쑤키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는 동과 서를 반으로 뿜빠이하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90년. 그니까 통일독일을 전후로 한 시점. 다시 말해 그 시절은 알렉스로 하여금 마더에게 거짓부렁을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럼 알렉스의 마더가 의식불명에 빠지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 보자.

알렉스의 마더 크리스티안느(카트린 사스 분). 서독 자본주의의 여자에게로 간 남편으로 인해 골수 사회주의자가 된 그녀. 크리스티안느는 절대 자본주의의 꼬라지 어느 것 하나 용납할 수 없는 여자다. 그런데 아들이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시위에 참가한 것을 목격한 크리스티안느,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쓰러질 수밖에. 그러나 력사적인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진 어느 순간 의식을 회복한 그녀. 그러나 자본의 유입으로 혼란에 휩싸인 동독의 현실을 크리스티안느가 목격이라도 하는 날엔 그녀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알렉스의 본격적인 거짓부렁은 시작된다.

다시 말해 당 영화는 알렉스와 크리스티안느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인 가족의 사랑과 화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한편 ‘레닌’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와 ‘코카콜라’와 ‘버거킹’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가 통일로 인해 서로 짬뽕이 되면서 혼란을 겪는 그 시절의 동독을 바라본다. 


데 감독은 왜 당 영화를 통해서 가족과 당시의 시대상을 함께 엮어서 보여주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통독 이전과 이후를 몸소 겪은 볼프강 베커 감독이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믿고 의지했던 것이 사실은 알고 보니 굉장히 허약한 것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꺼다.

1990년. 서독과 동독은 서로 하나가 되었고 그 하나된 국가가 월드컵에 나가 우승까지 거머쥐니 이들의 앞길은 탄탄대로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장밋빛 반딱이는 희망찬 미래도 잠시. 서로 다른 두 개의 체제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수록 동독민이 그리고 서독민이 뒤늦게 깨달은 사실은 모두가 똑같이 잘 먹고 잘 싸고 잘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사회주의’도,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자본주의’도 결국 그들을 이상국가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통일된 국가 역시 그렇고.

그들이 그걸 깨달았을 때 느낀 충격은 아들의 이야기를 믿어왔던 크리스티안느가 동독의 현실을 간파하고 느꼈을 그것과 같은 것이었을 테다. 그녀 역시 사회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겠지만 통일 이후 자본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자신의 나라(?) 동독을 보면서 내가 믿고 의지했던 것이 결국은 모래성같은 것이었구나 라는 사실에 잇빠이 충격을 먹었을 게다.

하긴 왜 아니겠냐. 그동안 그들은 국가가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제시해주는 비젼을 보면서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그 상황을 철통같이 믿고 따랐건만 알고 보니 그런 비젼이 조작되고 차단되어서 유지되고 있었던 거시니 말이다. 당 영화가 썰 하고 있는 두 부분, 즉 알렉스 가족의 이야기와 통일을 전후한 독일의 당시 시대상이 기름과 물처럼 따로 놀지 않고 자전거 바퀴처럼 잘 맞아 떨어져 돌아가고 있는 건 바로 이러한 점을 함께 공유하며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극중 알렉스의 애인인 라라(슐판 카마토바 분)의 말을 빌자면 “원래 진실이란 모호해서 각색하기도 쉽다”는 점일 텐데 그래서 알렉스가 마더를 속이기 위해 고립된 방에 가둬(?) 정보를 차단하고, 알려주더라도 미디어를 통해 조작하는 건 단순히 재미를 위해 낑궈진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당 영화의 감독인 볼프강 베커는 이런 알렉스 가족과 혼란스런 당시의 동독을 바라보는데 있어 굉장히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그뿐 아니라 무거울 것 같은 소재를 매우 우끼고 자빠라지게 그리기까지 한다. 

이는 감독이 당시의 동독을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이후 적응하지 못한 동독의 보통사람들에 앵글을 맞춰 추억하는 듯한 느낌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당 영화에는 동독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물품이 많이 등장한다.

본 우원이야 거기에 안 살아봐서 알 턱이 없지만서리 보도자료에 나와있는 대로 표현하자면. 동독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향수를 느끼고 있을 피클과 술, 초코렛 그리고 트라반 승용차를 극중으로 끌어들여 알렉스가 마더 크리스티안느를 위해 서독물건을 동독 것으로 감쪽같이 속이는 모습은 재미도 재미지만 향수 어린 시선을 통해 딱딱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감싸는 역할까정 한다. 

게다가 알렉스가 절친한 시네아스트(?) 친구와 함께 통일이 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체 제작한 뉴스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더를 안심시키는 부분은 당 영화를 코미디로써도 기능하게 한다. 재미있는 건 이와 같은 아들내미의 조작행동이 마더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주의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 당 영화가 코미디이면서 결론에 이르러 가슴 뭉클한 감동까정 전달하는 건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하고 있다.


처럼 당 영화는 통일에 따른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급격히 혼란에 휩싸이는 동독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철거당해 반쪽만 떨렁 남은 레닌의 동상을 통해 사회주의가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성공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앞썰에서도 자세하게 언급했지만 감독은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결국 이상국가는 없었다고 말한다. 통일된 독일이 이상국가라고도 전혀 썰 풀지 않는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통독 역시 존나 혼란하게 보여지거덩.

이상국가, 즉 유토피아, 곧 어디에도 없는 나라. 그래서 당 영화는 결론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는 없다고 말한다. 아니 아직 그것은 찾아오지 않았다고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아둥바둥거리면서 살고 있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겠다고, 나름대로 이상적인 생활을 해 보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해서 감독은 대신 알렉스의 가족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쫌 곰팡내 나는 표현같다만 한마디로 하자면 ‘가족 간의 사랑’. 마더를 보호하기 위해 별 짓을 다하는 알렉스의 가족처럼 당 영화는 이러한 가족의 사랑이 결국 이상적인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말한다. 바꿔 말해 가족의 사랑이란 것은 범위를 더 크게 하자면 화합이라고 할 수 있을 꺼다. 화합. 그래서 서독과 동독은 큰 혼란을 무릎 써서라도 통일을 이룬 걸꺼다. 그런 점에서 당 영화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때마침 우린 송두율 문제로, 이라크 파병 문제로 서로 다른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이들 각자에게 송두율을 추방하거나 처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면 이념에 관계없이 송두율을 끌어안는 것이, 또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라크에 군인을 파병하여 양국 간의 우호를 증진하는 것이, 그 반대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의미에서 파병에 응하지 않아 미국의 부당함을 알리는 것이 지들 나름대로의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기 위한 선의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화합하지 않는 선의란 그것은 단지 허울뿐인 선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 허울 뿐인 선의에 상처를 받는 건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래서 이와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화합. 이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당 영화 <굿바이 레닌>이 특정한 개인의 과거사와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별개의 사실을 결합시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건 역시 이것이 아닐까 본 우원은 생각한다. <굿바이 레닌>을 강추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2003. 10. 26.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