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 아일랜드> 분열이여, 내 손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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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 <셔터 아일랜드>는 역시나!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순수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장르의 쾌감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원작의 주제와 아우라를 전혀 훼손하지 않는 일급 스릴러로 기능하는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에 대한 각종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지만 반전이 도사린 결말에 대해서만큼은 약점으로 지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듯하다. 나는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스콜세즈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의 감옥

<셔터 아일랜드>는 현대 하드보일드 소설의 최전선을 점하고 있는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을 원작 삼았다. 데니스 루헤인은 <미스틱 리버>(클린트 이스트우드 연출), <가라, 아이야, 가라>(벤 애플렉 연출), <기븐 데이>(샘 레이미 영화화 중) 등 할리우드가 현재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을 하나로 꿰는 주제는 정신적 분열 증세를 보이는 미국인의 초상이라 할 만한데 이는 마틴 스콜세지에게도 익숙한 테마다.

보스턴 항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외딴 섬 ‘셔터 아일랜드’는 정신 질환을 앓는 범죄자들의 특수 감옥 병동으로 악명이 높다. 며칠 전 여죄수가 쥐도 새도 모르게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방 보안관 테디 다니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척 아울(마크 러팔로)이 급파된다. 폭풍우가 몰아칠 것만 같은 섬의 분위기도 심상찮지만 테디의 상태는 더욱 불안하다. 심각한 두통 증세를 겪으면서 정체 모를 악몽에 시달리는 것. 더군다나 병동 관계자들의 비협조 속에 수사는 난항에 빠지고 설상가상 파트너 척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마틴 스콜세지와 데니스 루헤인은 그들이 각각 태어나고 자란 뉴욕과 보스턴을 하나의 캐릭터처럼 상정하고 극중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해온 터다. 마틴 스콜세지의 극영화는 뉴욕이 주 무대였고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은 보스턴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뉴욕도 아니고 보스턴도 아닌 작은 섬 셔터 아일랜드는 이 둘에게 모두 새로운 장소인 셈이다. 다만 새롭되 낯설지는 않다. 그들은 늘 폭력이 판을 치는 세계를 다뤘다. 특정 지역을 벗어난 좀 더 보편적인 폭력의 세계, 즉 상징적인 무대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데니스 루헤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스턴 북부의 외곽 지역인 리비어(Revere)는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 같았다. 그곳에 발을 들인다는 건 전혀 다른 나라를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리비어는 거의 섬 같았다. 외부인에게 그렇게 적대적일 수가 없었다.” 사는 지역은 달랐지만 그것은 마틴 스콜세지에게도 해당 되는 이야기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를 둔 그가 토박이들에게 겪은 텃새의 추억은 대표적으로 <갱스 오브 뉴욕>(2002)의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처지에 가감 없이 묻어난다. 다시 말해, 극중 셔터 아일랜드는 루헤인과 스콜세지가 보스턴과 뉴욕에서 목격하고 경험했던 미국의 폭력의 역사만 따로 떼어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과 진배없다.

이를 전제한다면, <셔터 아일랜드>는 단순 추격물에 머무는 장르영화로 기능하지 않는다. (애초 <퍼펙트 스톰>(2000)의 볼프강 피터슨이 액션물을 염두에 두었다가 이 프로젝트에서 나가 떨어졌다지 아마.) 테디가 병동을 탈출한 환자를 쫓는 과정은 그의 정신적 외상이 그려나가는 미로의 궤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병동 입구에서 흉측한 몰골의 정신병자를 만나 두려움을 느끼고 단서가 떨어진 막다른 길목에서 먼저 떠난 아내와 딸의 혼령을 만나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등 테디가 겪는 마음 속 분열 증세는 초현실적인 세계로 화한다. 그래서 고립된 섬 혹은 밀폐된 병실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데 있어 논리적 사고는 무의미하다. 다만 극단적 감정의 조각들로 덕지덕지 기워 건설한 테디의 심리적 공간인 셔터 아일랜드의 ‘진실 혹은 거짓’에 대해서는 그 자신만이 밝히고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자기 방어라는 섬

이렇듯 <셔터 아일랜드>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스릴러의 범주와는 거리가 멀다. 테디의 흐트러진 정신 상태는 결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단단하게 자기 논리를 갖춘 세계다. 테디는 결코 감옥이나 병동에 갇히는 일은 없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줄곧 갇혀있는 구도로 그를 바라본다. 테디를 심각한 편집증적 환자로 몰아넣는 카메라의 구도는 현실에서 철저히 고립된 그가 마음이라는 섬에 유배되어 정신적 수감 생활을 겪고 있는 처지를 상징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섬의 구조나 섬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불가사의한 사건들은 정신적 분열을 숨기기 위한 테디의 견고한 방어논리에 가깝다.

<셔터 아일랜드>는 원작 <살인자들의 섬>에 충실하다. 각색을 맡은 래타 카로그리디스(Laeta Kalogridis)는 테디의 내적 논리를 훼손치 않으려 사소한 대사 하나까지도 원작을 그대로 따랐다. “원작은 견고하게 쌓은 성과 같아서 어느 한 두 개의 벽돌만 옮겨도 무너져버린다.”는 그의 말처럼 사소한 설정 변경이 자칫 다른 성격의 이야기로 변질시키지 않을까 우려했던 탓이다. 실제로 데니스 루헤인은 36장(章)으로 구성된 <살인자들의 섬>의 대강의 줄거리를 단 하룻밤 사이에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다. 루헤인 왈,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생각하지 못했다면 결코 이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셔터 아일랜드>의 무대는 시작과 끝이 기괴하게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의 세계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블랙홀이고 벗어나기 힘든 탈출 불가능의 섬이다.

안 그래도 영화의 첫 장면은 이 비틀린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던진다. 테디와 척이 갑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의 배경의 질감은 매트 페인팅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현장과 스튜디오의 촬영이 뒤섞인 것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가 기 싸움을 벌이듯, 현실과 꿈이 서로의 자리를 탐하듯, 하지만 스콜세지와 루헤인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춰 강조한 “허구의 세계로 수렴되는 이야기”임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이와 같은 영화적 기법은 194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 그중 필름누아르에서 주로 사용된 촬영이기도 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오프닝 자막을 통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1954년으로 확정했다. 당시는 매카시즘에서 비롯된 도덕적 공황상태, 핵에 대한 공포, 새로운 의학기술에 따른 정신 개조의 피해망상이 만연했던 시기로, 할리우드는 이를 스크린 속에 구현하기 위해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필름느와르를 적극 차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틴 스콜세지가 <셔터 아일랜드>에서 오마주한 작품의 목록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반영한다. 스콜세지가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밝혔듯, 발 류튼 제작의 <죽음의 섬>(1945)에서 분위기와 정서를 가져왔고, <현기증>의 계단 장면을 그대로 따와 테디의 분열증적 증세를 나타냈으며, 로만 폴란스키의 <혐오>(1965)에서처럼 밀폐 공간을 활용해 주인공의 내면을 기괴하게 상징했다. 그 외에도 음악활용(<사이코>(1960)), 이야기 구성(<충격의 복도>(1963)), 심리적 표현의 구체화(<샤이닝>(1980)) 등 그 자신이 영화적으로 분열증에 걸린 것 마냥 <셔터 아일랜드> 곳곳에 할리우드 클래식의 흔적을 어지럽게 펼쳐 놓는다.


아메리칸 사이코

사실 마틴 스콜세지는 데니스 루헤인에 훨씬 앞서 미국의 분열증을 탐구해왔다. 배우에 따라 2기로 나눠야할 듯한데 <택시 드라이버>(1976)부터 <카지노>(1995)까지, 스콜세지가 선택한 첫 번째 ‘아메리칸 사이코’는 로버트 드 니로였다. (<비열한 거리>(1973)에도 드 니로가 출연하지만 오히려 하비 카이텔이 분한 찰리가 범죄와 종교 사이에서 더한 혼란을 겪는 인물이었다.) <택시 드라이버>(1976)의 트래비스는 베트남전에서 입은 심리적 충격으로 사회악을 처단하겠다며 뉴욕에서 소동을 부렸고, <분노의 주먹>(1980)의 라 모타는 권투선수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지만 주변의 기대와 압박에 제멋대로의 행동으로 일관하다 몰락을 자초했다.

<갱스 오브 뉴욕>(2002)부터 <셔터 아일랜드>까지, 스콜세지의 두 번째 선택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야망 사이(<에비에이터>(2004))에서, 갱과 경찰 사이(<디파티드>)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분열증 환자였고 또 다른 트래비스였으며 라 모타였다. 스콜세지가 그랬듯이 데니스 루헤인 또한 좀체 드러나지 않는 미국인 이면의 정신세계를 범죄물로 특화해온 작가다. 범죄물이라는 게 그렇다. 사회의 썩은 공기가 개인을 짓눌러 파괴하고 그것이 일그러진 형태로 발화하는 것이 범죄다. 스콜세지가 주로 역사적인 사실에서 분열의 원인을 찾았다면 데니스 루헤인은 유년 시절 어른에게서 입은 정신적 외상에 주목한다.

<미스틱 리버>의 데이브는 어린 시절 납치당한 기억을 끝내 떨치지 못해 운명이 바뀐 인물이었고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시리즈는 (지금까지 모두 다섯 편이 발표됐는데) 모두 아이의 유괴와 관련이 있든가 아이에게 가해진 어른의 마수가 범죄의 뇌관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주인공 켄지는 전직 소방관인 아버지에게 학대 받은 경험을 트라우마처럼 안고 사는 인물인데 공교롭게도 <살인자들의 섬>의 테디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상처처럼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스콜세지는 <셔터 아일랜드>를 통해 이 부분을 한마디 대사로만 언급하는 대신 테디가 2차 대전 참전 당시 독일 다카우 수용소에서 목격한 참혹한 광경의 폭력성을 부각해 개인사와 연결한다.

원작과 영화를 구별하는 미묘한 태도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데니스 루헤인이 테드의 분열을 비교적 개인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에 비해 마틴 스콜세지는 국가적인 차원으로 좀 더 확실히 한다. 원작의 테디가 세상을 떠난 아내와 딸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고통 받는다면 영화 속 테디가 겪는 내면 갈등의 성격은 보다 넓다. 매카시즘과 핵에 대한 공포를 떨치기 위해 타자를 희생양 삼는 미국인의 불안감은 고스란히 테디에게 적용된다. <셔터 아일랜드> 공개 후 찬반 논란을 빚고 있는 영화의 결말은 개인의 분열증마저 통제하려드는 국가의 빗나간 태도를 겨냥한 스콜세지의 노림수다. 그것은 장르적 장치를 남용해 관객을 깜짝 놀래려는 얕은 속임수가 아니다. 하물며 마틴 스콜세지의 그간의 작품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를 상기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셔터 아일랜드>를 걸작이라 부르기 망설여지지만 (마틴 스콜세지가 매 작품 걸작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영화의 장인이 만든 수준 높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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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3.18)

<전쟁 전 한 잔>(A Drink Before Th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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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의 부자를 위해 99%의 서민이 착취 받는 국가? 나라님을 보좌한답시고 경찰이 국민을 폭력으로 짓밟는 나라? 아이의 건강을 사수하기 위해 촛불을 든 부모는 구속되면서 탈세한 대기업의 사주는 검찰의 비호 속에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 결국 이런 꽃 같은 경우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체득되는 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데니스 루헤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현재 할리우드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다. <미스틱 리버>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가라, 아이야, 가라>를 벤 애플렉이, <살인자들의 섬>을 마틴 스콜세지가, <기븐 데이>를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했거나 연출 중이거나 연출할 예정일 정도로 할리우드가 그에게 쏟는 관심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이를 두고 데니스 루헤인의 국내 전속번역가(?)로 잘 알려진 조영학은 “그 흔한 추격 장면 하나 없는 탐정 소설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루헤인은 특히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극한까지 드러내는데 많은 정성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캐릭터가 곧 이야기임을 천명하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데니스 루헤인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다섯 편이 발표됐다. 국내에는 4편과 5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에 이어 1편인 <전쟁 전 한 잔>이 뒤늦게 번역됐다. 특히 <전쟁 전 한 잔>은 하드보일드소설의 전무후무한 남녀 사립탐정 커플인 켄지와 제나로의 보스턴을 무대로 한 활약상이 처음 소개되는 만큼 시리즈가 지향하는 주제와 핵심 정서가 모두 담겨있다는 점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시리즈가 소개하는 첫 번째 의뢰가 상원의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그것이 흑인 청소부가 가져간 사진과 관계있다는 점, 그녀를 찾자마자 지역 갱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는다는 점, 암살자의 정체가 새파랗게 어린 아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기성세대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전 한 잔>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시리즈가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된 미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 즉 고위층 사이에 뿌리내린 비리와 이를 위장하기 위해 인종 차별과 청소년 범죄,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이 방조되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니스 루헤인이 보여주고 있는 보스턴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다. 솜털 뽀송뽀송한 아이들마저 타락한 어른들의 사리사욕에 휘말려 일상을 범죄에 내맡긴 채 파리처럼 죽어나가기 일쑤인 보스턴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다. 안 그래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온전한 적이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범죄에 휘말려 싸늘하게 죽어나가거나(<가라, 아이야, 가라>), 유년시절에 겪은 사건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미스틱 리버>) 일쑤다. (두 편의 소설이 데니스 루헤인의 걸작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켄지와 제나로가 맞닥뜨리는 사건의 결말은 늘 이런 식이다.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이런 광경을 마주하고 제정신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아무리 냉소와 비아냥거림, 그리고 권총 한 정으로 세상과 ‘맞짱’뜨는 미국의 사립탐정이라고 해도 위안거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켄지와 제나로에게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뿐이다. 사랑이야 말로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안식처다. 그러니까 범죄의 도가 더할수록 이들의 사랑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의 사랑은 보스턴의 범죄가 낳은 불행한 씨앗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범죄는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하고 서로에게 위안 받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지고 이는 급기야 있지도 않은 자신들의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까지 이어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니, 그래서 권(卷)을 더할수록 미묘하게 변해가는 켄지와 제나로 사이의 감정이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닉 혼비는 저서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권인 <비를 바라는 기도>를 두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이 왜 매력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미스틱 리버>야말로 데니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미스틱 리버>가 걸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혼비의 말에는 100% 동의하지 못하겠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은 다름 아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니까.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범죄와 사랑이라는 모순된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하여 켄지와 제나로의 정체성으로 화한다는 것을. 그래서 켄지와 제나로의 삶이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배경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과 다르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작 <비를 바라는 기도>를 읽고 시리즈를 평가하는 편협함이라니. 나는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사랑하지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에 비하면 63빌딩 높이만큼이나 저 아래 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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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