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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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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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31)

<더 문>과 <디스트릭트9> 영화광 세대의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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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만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예 던컨 존스 감독의 <더 문 Moon>은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제작비 500만 달러에 불과한 <더 문>은 첨단의 기술력과 그에 비례하는 고비용의 장르로 인식된 SF에 대한 편견을 순전히 아이디어 하나로 극복한다.


저예산이라 놀리지 말아요

영화는 가까운 미래 지구에 불어 닥친 에너지난을 달에 매장된 헬륨3로 해소한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달기지 ‘사랑’에서 홀로 작업 중인 한 남자를 비춘다. 그는 다국적 기업 루나 인더스트리에 근무하는 샘 벨(샘 록웰)이다. 샘은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 출연)의 도움을 받아 달 표면의 헬륨3을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것이 임무다. 3년 계약을 맺어 이제 2주 후면 사랑하는 부인과 갓 태어난 딸이 있는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지만 아뿔싸!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만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른 샘 앞에 자신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샘이 나타나니, 어찌된 일일까.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던컨 존스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다. 극중 샘 벨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와 메시지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명의 샘이 등장하는 작품인 만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혹자는 다국적 기업이 한국과 미국의 합작회사라는 점을 들어 한국의 비인간적 노사관계의 메타포로 읽어내기도 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SF영화를 즐겨보는 관객들에게 <더 문>이 전하는 복합적인 메시지는 익숙한 구석이 많다. 사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그리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문>은 SF영화 자체에 대한 오마주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한 설정과 요소가 수시로 눈에 밟힌다. 던컨 존스 감독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더 문>의 아이디어는 “블루컬러 노동자들이 주인공을 맡았던 7,80년대 SF영화에서 얻었”고 샘 록웰의 1인 다역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쌍둥이를 연기한 <데드 링거>(1988)를 참고했”으며 거티의 존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사일런트 러닝>(1972)에 대한 인용”이라고 한다.

감독의 언급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더 문>이 직간접적으로 영향 받은 SF영화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철학적 질문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를 연상시키고 기지내부를 벗어나지 않는 구성은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이 선배 격이며 1회용으로 소모되는 샘의 운명은 또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조지 루카스의 <THX-1138>(1970)에서 먼저 시도됐던 것이다.


영화에서 원천을 얻다

나는 여기서 현대 SF영화의 중요한 변화를 감지한다. 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SF영화가 삼는 원전은 소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도 아니면 <우주전쟁> <지구가 멈추는 날>과 같은 리메이크 작품이 차지했다. 하지만 원작영화 역시도 대부분 소설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우리가 SF영화에서 걸작이라 부르는 작품의 상당수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더 문>에서 인용된 작품을 예로 들자면, <데드 링거>는 바리 우드의 <트윈스>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솔라리스>는 각각 아서 클라크와 스타니스와프 렘의 동명의 작품을,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원작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이제 신예 SF연출자들은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 많은 영감의 원천을 얻는다. <더 문> 이전에 SF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던 닐 블롬캠프의 장편 데뷔작 <디스트릭트9> 역시도 외계인 영화에 대한 공식을 뒤바꾼 그 기저에 제작자로 참여한 피터 잭슨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공교롭게도 <디스트릭트9>은 던컨 존스가 그랬던 것처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것에 채 10분의 1도 되지 않는 3,000만 달러(그에 비하면 <더 문>의 제작비 500만 달러는 껌 값에 불과하다.)에 불과한 제작비의 한계를 발상의 전환으로 극복했다. 과연!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한다는 설정이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와 함께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여의치 않자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장르의 묵은 공식을 참신한 아이디어로 돌파하려는 젊은 감독의 패기가 영화 제작의 1순위로 작용했지만 피터 잭슨의 사심이 상당 부분 개입한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제작자로 참여한 피터 잭슨의 초창기 작품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그가 <디스트릭트9>을 통해 초짜 감독 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실제로 <디스트릭트9>에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와 <포가튼 실버>(1996)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이 생체실험에 차출되고 기업에게 기술력을 착취당하는 등 인간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무인간의 최후>를 닮았고 인터뷰와 뉴스릴 화면을 적극 이용해 대체역사물처럼 구성한 방식은 <포가튼 실버>에서 이미 피터 잭슨이 선보인 바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피터 잭슨은 어느 인터뷰에서 <디스트릭트9>의 제작을 두고 사심이 얼마간 작용했음을 밝힌 적이 있다. “<디스트릭트9>을 두고 외계인 버전 <클로버필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입니다. 실황중계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동일한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클로버필드>는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따랐죠. <디스트릭트9>은 아예 장르를 새롭게 창조했어요. 그건 내가 <고무인간의 최후>와 <포가튼 실버>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고 했던 바죠. 그걸 이 애송이(닐 블롬캠프)가 데뷔작에서 멋지게 해낸 거예요.”

닐 블롬캠프와 피터 잭슨의 관계처럼 던컨 존스 역시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대가의 후원을 등에 업은 것으로 유명하다. <더 문>을 보고 던컨 존스의 비범함을 알아본 리들리 스콧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다. 하여 던컨 존스는 <더 문> 이후 차기작 <소스 코드>를 리들리 스콧의 제작 하에 연출하며 차차기작 <뮤트>는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많은 부분 아이디어를 얻어 기획된 작품으로 알려진다. 


모방을 넘어 장르의 규칙을 바꾸다

개인적으로 <디스트릭트9>와 함께 <더 문>을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SF영화로 꼽고 싶다. 신예감독의 데뷔작, 저예산의 한계를 아이디어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지만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선배 감독의 영화를 적극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바야흐로 이제 SF에서도 영화광 세대가 주도하는, 그들이 영향 받은 영화에 대한 언급을 서슴지 않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영화광들의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를 위시해 많이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다. 다만 닐 블롬캠프와 던컨 존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SF 장르에서만큼은 SF소설광들이 만든 작품은 등장했어도 영화광들의 영화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SF영화를 위한 SF영화’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을 올해 가장 중요한 SF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영화광의 영화라고 해서 단순히 모방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의 가장 훌륭한 점은 모방을 통해 창조를 이뤘다는 사실이다. 장르는 소위 시대의 산물이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아서 적극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고 내부 규칙을 업데이트하면서 진화해온 까닭이다. 그중에서 SF는 시대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장르다. 우리가 소위 대가라고 칭송해마지 않는 SF소설가들은 가까운 미래를 부정적인 암흑세계로 즐겨(?) 예언해왔다. 그들이 묘사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불행하게도 지금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은 오마주를 넘어 여기에 (영화광 세대의 놀이의 전유물 같은) 장르 비틀기를 통한 현실을 덧씌운다. <더 문>이 냉전시대 미국의 국력을 과시했던 달에 대한 상징을 날로 영향력을 잃어가는 국운의 공허한 이미지로 바꾸었다면 <디스트릭트9>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도입해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현실의 남아공을 노골적으로 은유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을 위협하는 적의 개념으로 인식돼 온 컴퓨터와 외계인이 도리어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모한 것. <더 문>의 거티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할(HAL)에게서 가져온 것이지만 인간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대신 샘을 도와 지구로의 탈출을 돕는다. <디스트릭트9>의 외계인은 어떤가. 쓰레기 더미의 판자촌에서 생활하고 고양이 먹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심지어 강제철거까지 당하는 그들의 모습에는 하층민의 삶이, 우리네 현실이 겹쳐진다. 바꿔 말해, 컴퓨터와 외계인은 더 이상 인간이 넘보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컴퓨터와 외계인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로 인지하게끔 변화시킨 건 영화를 비롯한 영상매체다. 물론 <사이버리아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과 같은 소설에서도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가진 외계인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지와의 조우>(1977) <E.T.>(1982) <새 엄마는 외계인>(1988) <너 어느 별에서 왔니?>(2000) 등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다. 던컨 존스와 닐 블롬캠프처럼 영화로 현실을 접하는 영화광 감독들에게 컴퓨터와 외계인은 이미 친숙한 존재다. 촛불을 든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비인간적인 철거에 항의하는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쏘아대며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불법으로 매도하는 인간 실격의 현실에서 그들은 도리어 컴퓨터와 외계인으로부터 인간(적인 감정)을 본다. SF의 장르역사를 돌아보건데, 소설은 영화가 되었고 영화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현실은 다시 영화를, 장르의 규칙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더 문>과 <디스트릭트9>은 그 명백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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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09.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