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오바마 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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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른 감이 있지만 당신의 2012년 블록버스터 기대작은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지즈 The Dark Knight Rises>(이하 ‘<라이즈>’)를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다. 개인적으로도 <라이즈>를 하루라도 빨리 보고픈 심정이다. 워낙 <다크 나이트>(2008)가 남긴 인상이 강렬했기에 놀란이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떠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라이즈> 티저 포스터를 비롯해 현장 스틸이 속속 공개되는 것을 보니 개봉이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근데 나는 좀 다른 이유에서 이 영화가 기다려진다. 2012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숨겨 놓았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다크 나이트> 때로 돌아가 보자.

왜 뉴욕이 아닌 시카고인가?

거대한 빌딩 숲을 휘젓는 조커(히스 레저)의 은행 강탈 행각으로 오프닝을 여는 <다크 나이트>의 시작은 어딘가 좀 낯설다.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고담시(Gotham City)는 뉴욕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카고가 주 무대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배경 교체라기보다는 이 시리즈가 품고 있는 세계관의 근간을 흔드는 것에 가깝다. 고담은 뉴욕의 옛 이름이면서 코믹북 작가 프랭크 밀러(<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밤 시간대의 뉴욕시를 칭할 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담의 악을 숙주삼아 탄생한 배트맨은, 그래서 ‘어둠의 기사'(Dark Knight)로도 불린다. 다시 말해 배트맨의 탄생설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담시는 시리즈의 대명사 격에 해당한다. 그런 고담의 배경이 시카고로 바뀌었다? 필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존재한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크리스천 베일)과 조커의 대결로 압축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방검사 하비 덴트(아론 엑하트)의 영화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왈, “하비 덴트의 에피소드를 비극으로 만들어 또 하나의 중심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 검은색 슈트와 하얗게 회칠한 얼굴, 질서 수호자와 파괴자 등 배트맨과 조커가 노골적으로 정반대에 선 인물인 것과 달리 하비 덴트는 ‘흑과 백’의 구도 속에 섞여 들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섣불리 예상할 수 없는 회색빛 이야기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는 영화 중반까지 고담시의 미래를 책임질 차기 시장으로 주목되다가 연인 레이첼(매기 질렌할)을 잃은 후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대상을 향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한다. 극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인물이지만 나는 오히려 하비 덴트가 고담시의 차기 시장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임을 영화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설정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브루스 웨인은 하빈 덴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시장 선거 후보로 후원하도록 하지”라고 말한다. 이에 덴트는 “선거는 3년 뒤인데요”라고 난색을 표하자 웨인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후원하면 당선이나 다름없다고” 사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의 존재가 어떻게 고담시를 더욱 위험에 빠뜨리는지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그런 의도에 비춰, 언급한 웨인과 덴트의 시장 선거 얘기는 영화의 주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다크 나이트>가 개봉했던 2008년 미국의 정세를 상기한다면 이들의 대화와 관련한 흥미 있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크 나이트>의 미국 개봉(2008년 8월 6일)이 있기 두 달 전인 6월 4일 버락 오바마는 전당 대회에서 과반수의 대의원을 확보하며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그 기세를 이어 2008년 11월 4일 대선에서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터뷰를 통해 “<다크 나이트>처럼 거대 규모의 영화를 다룰 때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활용한다. 오락적 성격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세상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영화에 더 큰 힘을 제공한다.”라며 의도를 밝혔다. 하비 웨인을 연기한 아론 엑하트 역시 “<다크 나이트>는 오늘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대본 안에 있다고 믿고 연기했다.” 결국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인 묘사로 슈퍼히어로물의 새 장을 연 <다크 나이트>는 현실, 그것도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을 염두에 두고 하비 덴트에게 차기 시장의 이미지를 덧씌워 알레고리화했다고 심증적으로 강하게 확신하는 쪽이다.

<다크 나이트>가 조지 부시 이후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버락 오바마를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바마는 이미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그 유명한 연설 (“진보의 미국도, 보수의 미국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로 유력한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급부상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덴트는 무너진 고담시의 법치질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지역 마피아와 손잡은 공권력의 부패가 도시를 나락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원칙과 소신을 강조, 악의 퇴치에 앞장서며 고담시를 구원할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브루스 웨인이 하비 덴트를 후원함으로써 고담시의 평화를 회복하려 했듯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적 가치의 끝없는 추락을 목격한 국민들은 버락 오바마라는 새로운 영웅이 간절히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놀란 감독은 극 중 고담시의 차기 시장 선거를 전략적으로 언급하며 미국 대선이 실시됐던 해에 개봉한 <다크 나이트>가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임을 은연중에 환기시킨다.

잘 알려졌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곳일 뿐 아니라 정치생명의 꽃을 피운 자궁과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정치활동을 등에 업고 워싱턴의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다크 나이트> 개봉 당시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도시를 꼽자면 단연 시카고이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가장 유력한 주자였던 버락 오바마가 연고로 삼고 있던 도시였기 때문이다. 놀란이 <다크 나이트>에서 뉴욕 대신 시카고를 배경으로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원작의 실제 배경을 바꿔가면서까지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바마가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한 것에 대해서 어떤 혼란을 감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 정치의 ‘투 페이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버락 오바마에 대한 충고?’라고 적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오바마를 모델로 했다면 덴트 역의 배우를 백인인 아론 엑하트가 아니라 흑인으로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냐는. 그럴지도. ((흥미롭게도 팀 버튼이 감독한 <배트맨>의 하비 덴트는 흑인이다!) 사실 내가 <다크 나이트>를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시킬 수 있었던 건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난 후 이 영화를 ‘다시’ 봤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론적 관점일 뿐이다. 다만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의 미국적 상황을 고려하건대 조지 부시의 이념과 반대되는 인물을 차기 대통령으로 예측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을 거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도 관여한) 크리스토퍼 놀란에게 그런 인물은 당연히 오바마였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배경을 왜 시카고로 했을까?) 너무 대놓고 드러낼 경우, 장르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도 있었던 까닭에 우회적인 캐스팅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하비 덴트 역에 아론 엑하트를 캐스팅한 것에 대해 놀란 감독이 “미국의 이상주의를 실현할 영웅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 건 그런 맥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놀란 감독이 하비 덴트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미국의 이상주의는 무엇일까.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은 전쟁광 미국이 아닌 세계평화를 진두지휘하는 리더국가로서의 지위 회복? 여기서 잠시 덴트와 오바마의 연결성은 제쳐두고 질문을 다시 해보자. 크리스토퍼 놀란은 당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유력했던) 오바마에게 무엇을 충고하고 싶었던 걸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도 무방하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구도만으로도 충분했을 영화에 구지 하비 덴트를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극단적인 가치 추구는 광기와 다를 바 없다. 즉, “진실만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조커의 말을 빌린 놀란 감독은 흡사 ‘흑과 백’의 구도로 흐르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 사이에 ‘투 페이스’ 하비를 끼워 넣고 윤리적 딜레마를 일으켜 현실 정치의 회색빛 진실을 알려준다. 정치라는 것은 동전 던지기처럼 한 면을 살리고 한 면을 죽이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 

2008년 대선 당시의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 인물들이었다. 백인과 흑인, 전쟁과 평화,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미국의 가치를 몰락시킨 구시대적 인물과 위기에 빠진 미국을 구해내야 할 구원자까지. 2008년 미국 대선은 조지 부시 정권을 심판하는 자리이면서 새 시대의 미국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다크 나이트>에는 흥미로운 대사가 등장한다. 조커가 배트맨을 향해 “넌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묘사하는 조커와 배트맨은 노골적으로 다르지만 극단적인 선과 악은 서로 닮은꼴이듯 그래서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캐릭터는 어느 면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의 출발점인 셈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하비 덴트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하물며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세계정세의 판도가 달라질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전 세계에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평화가 찾아왔는가?  

<다크 나이트>가 흥미로운 텍스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크 나이트>는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다. 진실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며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라고 한다. 맹목적인 믿음은 광기와 같아서 한 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자신까지 괴물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고담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이었다가 희망이 꺾이자 곧바로 조커의 영역에 투신하는 하비, 아니 투 페이스의 행보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바꿔 말해, 현실은 이상과 달라서 악을 완전히 뿌리 뽑을 필요가 없다. 그랬다가는 더한 반발을 불러 세상은 더욱 혼돈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그 스스로가 악역을 맡아 악을 적절히 용인하는 중도(中道)의 묘를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한다. 더 정확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버락 오바마에게 말이다.

놀란의 바램처럼 오바마는 세계정세를 조율하는 데 있어 꽤 솜씨 좋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대 이스라엘 정책이 좋은 사례가 될 듯하다. 오바마 취임 초반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며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자 세계의 이목은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폭주하는 가운데 오바마가 동전 앞면을 선택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 뒷면을 선택해 전쟁을 묵인하며 자국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지 말이다. 오바마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약속합니다. 위협에 대한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합니다”라고 말해 중동국가의 반발을 불렀다. 하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이후 오바마의 대 이스라엘 정책은 취임 초반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新)중동정책이라고 하여, 지난 5월 오바마는 “이스라엘과 새로운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선은 1967년 중동전쟁 이전의 경계를 근거로 해야 한다”면서 “양국이 서로 영토를 주고받는 데 합의함으로써 안정적이고 명확한 국경선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며 이스라엘을 경악케 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요구에 처음으로 동조한 의견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요, 현실이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 들어가지 않은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경우다. <배트맨 비긴즈>(2005) 이후 이 영화가 현실감을 극도로 강조하는 이유는 허구의 느낌이 강한 슈퍼히어로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를 높이려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오바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놀란 감독의 충고처럼 오바마는 어느 한쪽 편에 기대 극단적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중도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지난 3년 동안 미국을 이끌었다. 그동안 미국의 경제를 되살리지 못했다고 하여 지지율이 바닥을 치기도 했지만 오히려 외교정책에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며 안보 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시금 미국인들의 신임을 얻어가는 중이다. 앞으로 이라크 철군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마무리만 확실히 할 수 있다면 1년 앞으로 다가온 재선에서도 좋을 결과를 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라이즈> 역시 미국 대선(2012년 11월 6일)이 가까이 온 2012년 7월 개봉이 예정된 상태다. 이번에도 놀란 감독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로 <라이즈>를 꾸밀 것인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것이 내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하루 빨리 확인하고 싶은 이유다.

관련기사: <다크 나이트 라이즈> 민중이여 봉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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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1.9.19)

그리고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를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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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전성시대다. <아이언맨>으로 출발한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인크레더블 헐크> <원티드> <핸콕> 등을 거쳐 현재 <다크 나이트>로 정점을 찍고 있는 추세다. <아이언맨>은 국내 개봉과 함께 2주 연속, <원티드>와 <핸콕>은 일주일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슈퍼히어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다크 나이트>의 흥행 기세는 놀랍다. 미국에서 <타이타닉>에 이어 역대 흥행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더니만 한국에서는 4주 연속 관객동원 1위를 차지하며 여차하면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세웠던 5주 연속 1위도 넘볼 태세다.

슈퍼히어로물의 기세는 이게 끝이 아니다. <헬보이2: 골든 아미> <왓치맨> <스피릿> 등과 같은 기대작들이 개봉 대기 중에 있을 뿐 아니라 작금의 유행을 타고 <플라스틱맨> <그린 애로우> <퍼스트 어벤져: 캡틴 아메리카> <저스티스 리그> <토르>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슈퍼히어로물이 제작을 앞두고 있어 그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만큼 슈퍼히어로는 최근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요, 탐내는 소재라 할만하다.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이 얻은 성과는 비단 폭발적인 인기에만 있지 않다. 불과 1년 전의 슈퍼히어로와 비교하더라도 올해 등장한 슈퍼히어로물은 장르가 품고 있는 내적인 논리 면에서나 허구를 다루는 형식적인 면, 그리고 그 속에 침전한 정치적인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점에서 변화한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영웅의 능력을 부여받거나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 과거의 슈퍼히어로와 달리 2008년의 슈퍼히어로는 만들어지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제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하늘이 점지해 주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돈’이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와 같은 가난한 고학생 슈퍼히어로는 올해 들어 대기업의 ‘회장님’들로 환골탈태(?)했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와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이 대표적이다.

토니 스타크는 대형군수업체 CEO. 신무기 홍보차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살상용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후 세계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니. 천재적인 과학적 지성과 자본을 바탕으로 슈퍼히어로 ‘아이언맨’이 된다. 브루스 웨인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복수를 목적으로 초인적 존재로 거듭난다. 아버지가 물려준 천문학적 재산과 마음속에 도사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켜 고담시를 지키는 ‘밤의 기사’가 된 것.

두 영화와는 다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와 <핸콕> 역시 이해 가능한 논리가 슈퍼히어로 탄생 과정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슈퍼히어로로 기능한다. 예컨대, <인크레더블 헐크>의 브루스 배너는 헐크로 변신하는 자신의 분노를 치료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 분노를 억제하는데 성공한다. 이안이 만들었던 <헐크>(2003)가 감마선 실험의 실패로 헐크가 된 것과 비교,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제 슈퍼히어로의 탄생이 이성(혹은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텍스트가 됐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핸콕>의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슈퍼히어로가 백인 일색이었다는 점에 비춰 흑인 슈퍼히어로 <핸콕>의 등장은 이제 슈퍼히어로가 백인의 영역을 넘어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 사례다.

이렇게 슈퍼히어로가 현실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만화를 연상시키는 허구적인 묘사를 벗어나 사실주의에 기반 한 형태로 변모한 것. 그에 따라, 인물의 내적 고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됐고 세트 차원에서 머물던 공간 묘사는 현장 로케이션으로 그 범위를 넓혔으며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의 활용 역시 느와르와 범죄물로까지 나아가며 더욱 더 현실적인 모습을 취하게 됐다. 허구의 세계를 맴돌던 과거 슈퍼히어로물이 캐릭터의 수와 이야기의 규모, 무엇보다 기술적인 면에서만 진화를 꾀한 것과 비교하자면 실로 획기적인 변화다.

그 시작은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 있었다. 허구의 이야기에 사실주의를 접목한 <배트맨 비긴즈>는 전례 없던 형식의 진화를 꾀하며 새로운 슈퍼히어로물의 전범이 됐다. 그때부터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슈퍼히어로물의 영화적 재미를 떠나 변모한 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그건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슈퍼히어로물을 준비 중이던 관계자들도 <배트맨 비긴즈> 이후 이 영화의 성과를 어떤 식으로 반영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슈퍼히어로물은 늘 진화해왔다. <배트맨 비긴즈>도 의심의 여지없는 진화의 한 사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주의(realism)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좀 더 기다려 봐야할 것 같다.” 당시 <스파이더맨 3>를 준비 중이던 샘 레이미 감독의 말이었다.

그에 대한 답변은 2008년에 이르러서 밝혀졌다. 그것은 물론 <배트맨 비긴즈>를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이뤄졌다. 속편 <다크 나이트>는 사실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심화를 꾀해 전편의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심화를 이룬 부분에는 명백히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크 나이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배트맨의 명성이 더 강한 적을 부른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9.11 이후 ‘적’을 소탕하겠다며 전쟁을 일상화한 미국이 더 큰 재앙에 직면한 현실세계의 정치학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겹쳐진 <다크 나이트>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공교롭게도 <다크 나이트>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이언맨>에서도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미국의 정치학을 감지할 수 있다. 극 초반 등장하는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9.11의 주범으로 지목한 빈 라덴을 제거하겠다며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곳이다. (1963년 선을 보인 원작만화에서는 베트남이었다!) 영화는 이곳을 배경 삼아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응징하고 약자를 지킨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구축하며 전쟁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은 미국 주도하의 국제 정세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반영한 알레고리로 작용해왔다. 하여 슈퍼히어로의 진화는 흥미롭게도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이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있어왔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 공식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1978년 작품 <슈퍼맨>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강한 미국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이에 영향 받은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물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를 적으로 상정해 무찌르는 ‘미국 만만세’ 영화로 전락(?)하며 지극히 단순화되어갔다.

이에 변화가 생긴 건 9.11을 전후해 슈퍼 국가 미국의 위상에 의문부호가 달린 2000년대부터다.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등과 같은 비주류 성향의 감독들이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 슈퍼히어로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9년 등장한 팀 버튼의 <배트맨>은 이런 흐름의 시초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건데 너무 앞서간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우리의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주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 아닌 타자였으며 돌연변이였고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특히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이전에 없던 슈퍼히어로에 대한 내적 고민을 구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징후적이었다. 스파이더맨은 미국의 평화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에 앞서 자신조차 추스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였고 변변한 일거리도 얻지 못하는 백수신세였다. 그렇게 미국은 외부의 적에만 신경 쓰는 사이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슈퍼 파워에 대한 강한 의문부호가 따라붙었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맨>과 <다크 나이트>는 그에 따른 고민의 결과가 각각 어떤 형태로 구체화됐는지 잘 보여준다. <아이언맨>은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고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토니 스타크의 결심에 불만을 품은 오베디아 사장과의 마지막 대결!) 슈퍼히어로의 역할을 긍정했다. 그에 반해 <다크 나이트>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적의 정체(극중 조커는 ‘악’일뿐 그 어떤 부연설명도 없다!)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어둠의 기사’라고 명명하곤 현실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다. 이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어진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허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리얼리즘을 끌어와 또 한 번의 진화를 꾀했다. 9.11 이후 미국 사람이 체감하는 불안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

슈퍼히어로물은 어느 날 갑자기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변화에 맞춰, 그에 따른 장르의 역사가 쌓이면서 그렇게 자가 증식해왔다.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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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404호
(2008.9.9)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사용자 삽입 이미지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이하 <비긴즈>)는 꽤나 당혹스러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했다. 슈퍼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라면 으레 비현실적이고 만화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사실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해 슈퍼히어로물의 새 지평을 열었다. 또한 <비긴즈>는 영화나 만화에서 다뤄진 적 없었던 주인공 영웅의 기원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배트맨 영화이기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배트맨의 팬이지만 원작 만화는 접한 적이 없다”는 감독의 시큰둥한 태도에서 기인한 듯 보인다. 원전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상상력을 제한하는(?) 원작을 교본으로 삼지 않았기에 기본적인 캐릭터 설정만 가지고도 그동안 슈퍼히어로물이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었다.

속편으로 돌아온 놀란은 이번엔 아예 제목에서 배트맨이라는 이름을 지워버렸다. 바로 <다크 나이트>. 배트맨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초의 경우로, 그는 이참에 자신만의 배트맨 시리즈를 완성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자신만만한 태도는 <다크 나이트> 미국 개봉을 앞두고 영국 영화 월간지 ‘토털 필름’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좋아하는 <대부2>나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과 경쟁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연출에 임했다”

전편을 넘어서는 속편을 만들겠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힌 놀란 감독의 거대한 야심은 <다크 나이트>가 공개된 현재 괜한 공염불처럼 들리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는 <비긴즈>가 이룬 성과를 발판 삼아 이전에 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슈퍼히어로물을 보여주었다.


세트에서 현장으로, 개인에서 사회로

“골 아픈 놈이 있어. 무장 강도, 연쇄살인. 자네처럼 쇼를 좋아해. 늘 현장에 카드를 남기지” <비긴즈> 결말에 등장하는 짐 고든 경위(게리 올드만)의 대사는 속편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배트맨(크리스천 베일)과 조커가 대결할 것을 예고했다.

예상대로, <다크 나이트>는 조커와 그 일행이 대낮에 고담 시의 중앙은행을 습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후 거액의 돈을 손에 넣은 조커는 팔코니 조직의 수장 마로니(에릭 로버츠)를 찾아간다. 마로니는 갑작스런 조커의 방문이 심히 불쾌하다. 얼굴을 하얗게 회칠하고 입술 주위를 빨간 루주로 떡칠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다. 조커가 강탈한 거액이 바로 조직의 검은 돈이었던 것. 그러나 돈을 되찾고 싶으면 함께 배트맨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뿌리치기 힘들다. 한편, 브루스 웨인은 낮에는 그룹의 회장 역할을 하고, 밤에는 범죄를 퇴치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 와중에 희망을 얻는 건, 지방검사 하비 덴트(아론 엑하트)의 강력한 부패 척결 의지에서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고도 하비를 통해 악을 소탕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러나 사상 최강의 적 조커 앞에서 이들의 의지는 힘을 잃고 만다. 계속되는 조커의 범죄에 도시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급기야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악행을 멈추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결국 하비에게 뒤를 맡기고 가면을 벗으려는 브루스. 그러나 고담 시의 안전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가면을 벗어던질 수 없다.

“전편 말미에 배트맨이 더 강한 적과 맞선다는 암시를 뒀다. 배트맨의 명성이 더욱 사악한 악당의 출현을 부른 거다. 배트맨이 오히려 고담 시에 악영향을 끼친 형국이랄까” 놀란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비긴즈>의 결말은 속편의 핵심 설정을 꽤 직접적으로 지적한 셈이다. 고담 시에 만연한 범죄와 부정부패에 대한 배트맨의 즉각적인 대응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범죄 집단의 부상을 야기하니, 놀란은 이를 ‘고담 시에 거대한 위기가 닥친다’는 설정으로 수렴, 배트맨의 존재가 고담 시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브루스의 내면에 집중한 전작과 달리 <다크 나이트>는 한 인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뤄야 했기에 고담 시의 물리적 범위를 더욱 크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15/70㎜ IMAX 카메라의 도입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메이저영화 사상 처음으로 35㎜ 카메라와 IMAX가 혼용된 경우다. 총 여섯 장면에서 사용된 IMAX 촬영은 놀란이 원했던 도시의 규모를 키우는 데 그만이었다. <다크 나이트>는 시카고에서의 실제 로케이션 촬영 장면이 영화의 60%를 차지할 정도인데 IMAX로 잡은 도시의 전경은 시각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 충분히 압도적이다.

세트였으면 불가능했을 이런 식의 배경 묘사는 전작에서 고담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비긴즈>는 브루스가 겪는 심리적 갈등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담 시를 세트로 지어 제한적인 범위에서 활용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다크 나이트>는 시카고 로케이션을 통해 실제 도시처럼 묘사, 극중 고담 시에 닥친 재앙이 사실성을 띠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래서일까, 극중 고담 시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캐릭터처럼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는 <다크 나이트>가 일반적인 장르의 관점에서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범죄물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구체성을 띤다. 안 그래도, 오프닝의 은행 강도 장면은 배트맨 시리즈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마이클 만의 <히트>나 캐서린 비글로우의 <폭풍 속으로>와 같은 범죄액션물로 착각하기 쉽다. 캐릭터 가면을 쓴 무리가 은행에 침입, 총격전 속에 거액을 훔치는 과정을 현장 로케이션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장면에는 슈퍼히어로물 특유의 허구적인 느낌이 철저히 배제돼있다. 이에 대해 놀란은 “<히트>와 같은 마이클 만의 영화가 범죄와 도시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냈던 것처럼 내 영화 역시 그런 종류의 작품으로 다뤄지길 희망한다”고 피력했다.

정리하자면, 놀란이 의도한 <다크 나이트>의 물리적 확장은 배경의 규모를 늘린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긴즈>에서 브루스의 개인 드라마에 머물렀던 이 시리즈가 범죄 서사시로 확장되며 결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배트맨과 조커,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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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가 전작과 크게 차별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비긴즈>는 브루스/배트맨 그 자신의 캐릭터적 동력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변 캐릭터를 당대 가장 뛰어난 배우들로 채웠던 건 주인공이 조연들에 의해 강조되는 효과를 원한 놀란 감독의 노림수였다. <다크 나이트>는 전작보다 더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지만 이를 활용하는 방식엔 변화가 있다. 개인 드라마를 벗어난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과 주변 캐릭터가 계속해서 충돌하는 관계 속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까닭에 조커와 같은 악당이 배트맨의 아우라를 넘어설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캐릭터 묘사와 관련, 브루스 웨인의 첫 등장은 <다크 나이트>의 테마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비긴즈>의 브루스는 적에게 두려움을 주는 영웅으로 거듭나는 존재였기에 건장한 체격을 과시했다면 <다크 나이트>에서는 눈에 띄게 야윈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를 통해 브루스가 자신의 이중생활에 여전히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과 정의를 수호할수록 그에 배가해 늘어나는 악당들로 인해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래서 <다크 나이트>에는 ‘이중성’과 ‘상반성’의 테마가 영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를 형상화한 관계가 바로 배트맨과 조커다.

배트맨과 조커의 성격은 나란히 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다. 검은색 슈트와 하얗게 회칠한 얼굴, 질서 수호와 파괴, 심각함과 익살스러움, 너무 많이 가진 것과 아예 없는 것, 그리고 가면 뒤에 정체를 숨긴 것과 흉측한 얼굴을 더욱 과장한 것까지. 노골적으로 정반대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동질성이 느껴지는 이들은 말 그대로 짝패다. 극중 이들이 소개되는 장면의 배치 역시 그렇다. 환한 대낮에 은행을 강탈하는 조커와 어두운 밤에 팔코니 조직원을 때려눕히는 배트맨의 활약상을 첫 장면과 두 번째 장면에 차례로 배치한 흑백구도의 편집은 흡사 <대부>를 연상시킨다.

<대부>의 첫 장면은 유명하다. 마당에서 벌어지는 딸의 성대한 결혼식과 어두운 사무실에서 은밀한 뒷거래가 이뤄지는 순간을 교차시킨 편집은 이탈리아 마피아의 냉혹한 이중성을 잘 드러낸 장면이다. <다크 나이트> 역시 배트맨과 조커가 벌이는 일의 교차편집을 통해 고담 시가 잉태한 범죄의 이중성을 밝히려 한다. 재미있는 건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또 한 명의 범죄자로 비추어진다는 점이다. 그가 계속해서 범죄를 불러오는 까닭에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염려하기 때문이다.(이는 배트맨이 어둠의 기사(Dark Knight)가 될 수밖에 없는 단초를 제공한다!). 브루스의 고민은 이런 차원에서 설명 가능하다. 그는 고담 시의 평화가 목적이지만 법을 수호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혼란을 느낀다. 폭력 없이는 고담 시의 평화가 불가능한 걸 알지만 그럼으로써 부모가 경멸했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고민스럽다.

이처럼 자신의 윤리와 행동 준칙을 가지고 있는 배트맨에게 조커는 새로운 종류의 적수다. 혼돈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죽음도 두려워 않는 조커는 그런 배트맨의 규칙을 깨고 싶어 안달이다. 배트맨의 입장에선 매우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인 것이다. 이처럼 행위에 대한 동기가 불명확한 조커를 설명하기 위해 놀란 감독은 그에 대한 기원도, 심지어 성격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인간의 성질을 부여한다고 조커가 무시무시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한 파괴 행위의 원인과 결과일 뿐인 조커를 설명적으로 다룬다면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 반감될 것이라 판단한 놀란 감독은 “<죠스>에서 상어가 그랬던 것처럼 조커가 영화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길 바랐다.”

때문에 조커는 배트맨과의 대결에서 결코 질 수 없는 캐릭터다. 극중 말미에 이르러 배트맨이 조커를 생포하는 데 성공하지만 영화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배트맨과 짐 고든, 하비 덴트의 작전으로 조커가 감옥에 갇힌 사연이 극 중반에 나오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탈출에 성공했던 전력에 비춰 그의 생존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놀란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등장만을 보여줄 뿐이다. 다만 극단적인 행동을 부추기는 인물인 조커는 언제고 배트맨이 필연적으로 마주칠 적이다.” 바꿔 말해, 배트맨과의 관계에서만 재미를 얻는 조커는 배트맨이 존재하는 한 계속 따라다닐 운명의 캐릭터다. 이는 또한 고담 시의 미래에 당분간 평화가 요원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존재 자체가 악을 불러 고담 시를 위협하는 주적(?)으로 낙인찍힌 배트맨이 고담 시민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어둠의 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슈퍼히어로물로 증명한 혼돈이론

<다크 나이트>는 프랜차이즈 특성상 배트맨의 영화이자, 이 작품을 통해 기념비적인 연기를 펼친 (故)히스 레저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투톱의 영화로 보이는 <다크 나이트>의 구도에 더욱 입체감을 불어넣는 건 하비 덴트/투 페이스의 존재다. 하비는 배트맨과 조커의 대결로 흐르는 ‘흑과 백’의 구도 속에 섞여 들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며 섣불리 예상할 수 없는 회색빛 이야기를 만든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렇다. 하비는 영화 중반까지 고담 시의 미래를 책임질 또 한 명의 영웅으로 기능한다. 놀란이 아론 엑하트를 하비 역에 기용한 데에는 “로버트 레드포드처럼 미국 영웅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배우”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극중 브루스는 젊고 패기 넘치는 지방검사 하비에게서 가면으로 얼굴을 감출 필요가 없는 진짜 영웅의 모습을 보고 안도한다. 배트맨슈트를 벗고 평범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브루스는 하비에게서 원하는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놀란의 의도는 배트맨과는 다른 곳을 향한다. “하비의 에피소드를 비극으로 만들어 또 하나의 중심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는 놀란은 하비의 표면 아래 숨겨져 있는 그의 면모, 즉 불의의 사고로 얼굴 반을 잃고 희망마저 꺾이는 투 페이스를 등장시킨다. 이때부터 투 페이스를 이끄는 동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대상에 대한 복수다. 그것은 투 페이스에게는 여전히 정의의 영역이지만 신봉하던 법의 영역을 벗어나 나쁜 방법으로 구체화하니, 또한 조커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지점부터 <다크 나이트>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미국의 모습과 겹쳐진다. 고담의 영웅에서 악의 화신이 된 하비는 세계 영웅을 자처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 지위를 남용해가며 복수의 일념에 불탄 지금의 미국과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심지어 조커와 투 페이스가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극도의 혼란에 빠진 도시를 포착하는 이 영화의 카메라에는 9.11 테러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을 정도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 묘사까지 더해진 <다크 나이트>는 현실, 그것도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그건 영화에 참여한 배우에게도 마찬가지다. “<다크 나이트>는 오늘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대본 안에 있다고 믿고 연기했다” 아론 엑하트의 말이다. 놀란 감독은 엑하트의 의견과 다른 듯하지만 그런 의도가 있었음은 숨기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처럼 거대 규모의 영화를 다룰 때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활용한다. 오락적인 성격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세상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영화에 더 큰 힘을 제공한다.”

아닌 게 아니라, <다크 나이트>를 기획하면서부터 놀란은 인물과 사회의 관계를 탐구하려 했다. 배트맨의 존재가 고담 시를 어떻게 바꾸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의도를 상기한다면 <다크 나이트>는 놀란이 바라본 세계의 혼돈에 대한 영화적 탐구처럼 느껴진다. 이는 작은 변화가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는 ‘혼돈 이론’(Chaos Theory)을 연상시킨다. 놀란 감독이 이런 과학적 이론을 하나하나 대입해가며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크 나이트>는 사실주의적 묘사를 함으로써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현실과 보다 거대하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뜻밖에도 확장된 의미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영화의 사실적 접근을 이유로 배트맨과 미국의 영웅주의를 동일시, 현재 국제 정세에 대한 미국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란의 시도가 배트맨 시리즈의 정수랄 수 있는 어둠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키려는 데 있었음을 인식한다면 <다크 나이트>는 ‘도식’이라는 단순한 성과를 뛰어넘었고, 그런 점에서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다크 나이트>는 마땅히 걸작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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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398호
(200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