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대런 아로노프스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단언컨대, <블랙 스완>(2010)은 현재의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보여줄 수 있는 그 자신의 최상급 영화다. 사회의 쓴맛을 눈앞에 둔 미성숙한 주인공, 그에 따른 강박관념, 집요하게 주인공을 물고 늘어지는 카메라와 색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섬세한 미장센, 무엇보다 감독 본인이 10년 전부터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렇다. <블랙 스완>을 발표하기 전까지 <레퀴엠>(2000)으로 기억되던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 오랜만에 새로운 대표작이 생긴 셈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해 몰락하거나 파멸 지경에 이른 인물을 주로 다뤄왔다. 데뷔작 <파이>(1998)는 수학천재가 숫자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다가 심한 정신적 데미지를 입는 영화였고 <레퀴엠>은 평범한 인물들이 마약, 다이어트 알약 등 각종 중독에 빠져 인생의 혹한기를 보내는 이야기였으며 <더 레슬러>(2008)는 한때는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제 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구의 레슬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블랙 스완>도 마찬가지다. 순수한 백조의 이미지를 지녔지만 사악한 흑조의 이미지가 부족해 강박증에 시달리는 한 발레리나의 이야기다.

아로노프스키의 영화에서 인물의 비극성은 가장 두드러지지만 그것이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의례적인 통과의례, 즉 성장통으로 이해해야 하는 편이 옳다. <블랙 스완>은 바로 그런 감독의 영화적 세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다. 극중 니나(나탈리 포트먼)는 발레 실력을 인정받아 ‘백조의 호수’의 새 주연으로 전격 발탁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형으로 방안을 꾸미기 좋아하고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에게 관능적인 흑조를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가능한 영역이다. 다시 말해, <블랙 스완>은 니나가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진통을 겪는 성장영화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간에게 성장이란 세상이 자신에게 드리운 그늘을 인정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하여 아로노프스키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비극의 끝이자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레퀴엠>의 해리(쟈레드 레토)는 팔을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한 마약 중독 상태였지만 병원 침대 위에서 엄마 뱃속에 있는 자세를 취하며 새 출발을 다짐했고 <레슬러>의 랜디(미키 루크)는 가까스로 얻은 재기전 무대에서 흡사 예수 부활을 연상시키는 레슬링 동작으로 링 위를 날아오르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 보였다.

<블랙 스완>의 니나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온전히 집중하는 최초의 여자 캐릭터다. 발레 자체도 그가 이전에 배경으로 끌어들였던 마약 거래가 이뤄지는 뒷골목이라든지 레슬링 무대와 같은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각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블랙 스완>에서도 아로노프스키는 엄마 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린’ 니나를 바깥세상으로 데려나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백지 같은 그녀에게 마약도 맛보게 하고 섹스도 경험하게 만드는 등 온갖 검은 색을 덧칠해 기어코 세상의 빛과 어둠, 선과 악 사이에서 균형을 잡도록 유도한다.

그러다보니 아로노프스키는 극중 주인공을 가혹하리만치 몰아세운다. <블랙 스완>의 경우, 흑과 백의 미장센으로만 이뤄진 세계를 창조해 그 안에 니나를 가둬두고 한계 상황으로 밀어붙인다. 그것이야말로 감독의 특출한 영화적 특징인데 그중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된 핸드헬드 카메라는 집요하다싶을 정도로 배우에게 달라붙어, 특히 뒷모습을 비추는데 주저함이 없다. 나탈리 포트먼과 같은 A급 배우를 데려다놓고 뒷모습에 주목한다는 건 사실 금기에 가깝다. 그럼에도 모험을 감행한 건 <블랙 스완>이 잠재한 욕망을 전면으로 끄집어내는 이면의 영화였던 까닭이다. 말하자면, <블랙 스완>은 니나가 백조에서 흑조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니나는 등에서 검은 털이 자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이처럼 성장을 영화적 주제의 동력으로 삼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는 필생의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스파이더맨>(2002)부터 <킥 애스>(2010)까지, 최근의 슈퍼히어로물은 슈퍼히어로의 영웅적 면모보다 그에 따른 고뇌에 집중하며 성장영화로도 기능한다. 그런 경향에 발맞춰 아로노프스키가 슈퍼히어로물에 목을 매는 건 이미 유명하다. <레퀴엠>과 <천년을 흐르는 사랑>(2007) 사이에 존재하는 연출 공백기 6년은 <배트맨 비긴즈>(2005)와 <왓치맨>(2009) 연출권 확보를 위해 공사다망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프로젝트는 크리스토퍼 놀란과 잭 스나이더에게로 돌아가며 아로노프스키는 슬럼프를 맞게 된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만든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흥행에서 재앙을 맞게 됐고 절치부심하며 선택한 작품이 바로 <더 레슬러>이었다.

그는 <더 레슬러>에서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대리만족을 드러냈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이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듯이 ‘WWE’로 상징되는 프로레슬링의 링이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무대인만큼 랜디에게 슈퍼히어로의 그림자를 덧씌운 것. <더 레슬러>를 통해 2008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린 대런 아로노프시키는 차기작으로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슈퍼히어로물 <로보캅>의 리메이크를 선택하게 된다. <더 레슬러>에서 호흡을 맞췄던 미키 루크와 함께 또 한 번의 영광을 꿈꿨지만 현재 <로보캅>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된 상태다. 대신 <더 레슬러>로 확보한 입지를 이용해 그동안 때를 기다려야만 했던 <블랙 스완>의 영화화에 착수했다.

<블랙 스완>에서도 아로노프스키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집착을 쉬이 놓지 못한 연출을 보여준다. <더 레슬러>를 통해 몰락한 영웅의 부활을 슈퍼히어로물의 공식으로 묘사했듯이 <블랙 스완> 또한 새로운 영웅, 특히 악에 눈 뜬 여자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그린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강박증에 시달리던 니나가 마침내 흑조 연기에 성공할 때, 아로노프스키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 그녀에게 슈퍼히어로 유니폼을 입히듯 흑조로의 변신을 허락한다. “나는 장르에 능한 감독이 아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장르영화처럼 시도했을 뿐이다.” 그렇게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자신만의 영웅 신화를 완성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beyond
2011년 2월호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브라더스가 납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워 브라더스는 <매트릭스> 시절 조감독을 맡았던 제임스 맥테이그를 감독 자리에 앉히고 지들은 시엄마처럼 잔소리하는 위치에 서서 제작과 함께 영화의 각본을 맡았다.

각본을 맡은 이야기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 콤비가 각각 대본을 쓰고 그림을 그린 영국산(나중에는 미국의 DC코믹스에서 연재한) 그래픽 소설 <브이 포 벤데타>. 장르는 <매트릭스>에 이어 역시 에쑤에푸. 또 역시 가상현실에 대한 스토리로, 또또 역시 스미스 요원으로 출연했던 휴고 위빙이 주연을 맡아, 또또또 역시 혁명에 대해 얘기한다.

2039년, 3차 대전으로 미국이 공중분해된 그 자리를 대신해 세계 최강국이 된 영국에는 독재정권이 들어서 강력한 통제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이때 자신의 얼굴을 가면에 숨긴 채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시대의 반항아 ‘V(휴고 위빙 분)’. 그리고 순한 양으로 살다가 V를 만나 어찌저찌해설랑 듀오로 함께 세상에 반항하게 되는 ‘이비(나탈리 포트만 분)’.

<매트릭스>가 머리에 쥐나는 스토리로 악명을 떨쳤던 것에 반해 <브이 포 벤데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무대로 여기에 미국 코믹스 특유의 세상과 불응하는 영웅 스토리를 합체하여 좀 더 알아먹기 쉬운 이야기로 개비하였다. 그래서 거대한 체제를 전복한다는 설정은 일맥상통하지만서도 당 영화가 은유하는 대상은 존나 직접적이다.

3차 대전을 주도한 미국을 언급하는 건 지금의 전쟁광 미국에 기반을 둔 설정이며, 미치광이 정치가에 의해 한 사회가 공포정치 및 미디어 조작 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영화 속 사실은 현재 미영 주도의 패권주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를 위해 영화는 셔틀러(존 허트 분)라는 인물과 ‘정신집중캠프’를 통해 히틀러의 나치즘과 유대인 학살을 끌어와 에쑤에푸 영화 특유의 암울함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비관적인 미래상을 그려낼 때면 의례히 써먹는 판에 박힌 설정이지만 역사는 돌고 도는 법. 그런 익숙한 설정이 지금의 현실에 대입해 유효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의미 있다고 하겠다.

때문에 당 영화의 V를 앞세운 이야기는, 개인 vs 개인의 대결 또는 개인적인 상황에서의 고뇌 모 이딴 거를 다뤘던 기존의 슈퍼 히어로 장르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허나 골 때린 건, 당 영화가 독재자에 의해 다수가 지배되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V 역시 똑같은 논리로 셔틀러 정권을 무찌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들을 세계의 영웅으로 알고 있는 슈퍼 히어로 만화 아니 미국 영화가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가 아니겠나.

더 큰 문제는 과연 <매트릭스>를 염두에 두고 오는 관객의 기대를 <브이 포 벤데타>가 과연 어느 정도나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기발한 설정과 철학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오는 관객이라면 당 영화의 비교적 단순한 설정과 직접적인 이야기가 실망스러울 테고, ‘슝슝 날아오는 총알 림보 자세로 피하기’에 버금가는 액숑장면을 기대하고 있다면 당 영화의 쉭쉭 바람을 가르는 칼싸움 장면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터. <매트릭스> 시리즈가 워낙에 쎘어야 말이지.

하지만 <매트릭스>에 대한 기대치를 37%만 덜어낸다면, 더군다나 가면에 자신의 얼굴을 맡긴 채 영화 내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중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만으로 열연을 펼치는 휴고 위빙의 연기와 나탈리 포트만의 빡빡 투혼을 감안한다면 당 영화 그렇게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다 모.

그리하여 본 특위는 <브이 포 벤데타>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2006. 3. 13.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