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트리스>(Rest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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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서 ‘청춘’과 ‘죽음’은 매우 익숙한 요소다. 장편 데뷔작 <말라노체>(1986)부터 근작 <파라노이드 파크>(2007)까지, 언급한 소재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 <레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듯한 청춘이 등장하고 이들이 모두 죽음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엘리펀트>(2003) <밀크>(2008)처럼 최근의 사회성 짙었던 작품들과 달리 <레스트리스>는 ‘구스 반 산트의 러브스토리’라 할 만큼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모양새를 취한다. 헨리 호퍼(고(故)데니스 호퍼의 아들)와 미아 와시코우스카와 같은 차세대 할리우드 스타들이 등장해 폴 매카트니, 엘리엇 스미스 등 잔잔한 록 넘버에 맞춰 동화 같은 사랑을 나누고 또 눈물까지 자아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구 평론가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지만 청춘을 죽음과 연결해 그 아슬아슬함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구스 반 산트의 연출력은 여전히 뛰어나다. <레스트리스>가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 작품성은 뒤쳐질지 모르지만 영화 자체에 매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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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1년 11월호

<밀크> 하비 밀크의 시대를 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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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 감독은 1998년 이미 하비 밀크와 관련한 영화를 기획한 적이 있다. <The Mayor of Castro Street>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위해 구스 반 산트는 하비 밀크 역에 숀 펜, 정적인 댄 화이트 역에 톰 크루즈를 캐스팅 물망에 올려놓고 워너브러더스사의 제작 승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워너브러더스는 어쩐 일인지 제작을 망설였고 그렇게 표류하던 하비 밀크 프로젝트는 2008년 새롭게 <밀크>라는 제목으로 완성되어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와는 다른 연출

<밀크>라는 제목은 미국 최초의 커밍아웃한 게이 정치가 하비 밀크(Harvey Milk)에게서 따왔다. 영화는 하비(숀 펜)가 뉴욕에서 만난 애인 스코트 스미스(제임스 프랭코)와 샌프란시스코에 터를 잡은 1970년부터 전직 시의원 댄 화이트(조쉬 브롤린)에게 살해당하는 1978년까지를 다룬다. 하비가 샌프란시스코의 시의원이 되는 과정과 시의원이 된 후 정치적인 활약상에 집중하는 영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는 건 유서를 녹음하는 하비 밀크의 음성이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를 거점 삼은 게이 커뮤니티와 관련한 뉴스클립과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오프닝을 여는 <밀크>가 보여주는 첫 장면은 죽음을 예감한 하비 밀크가 뒤에 남을 동료들에게 남기는 전언이다. 녹음기를 앞에 두고 “지금 녹음하는 이야기는 내가 죽은 후 듣게 될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하비 밀크의 차분하지만 단호한 음성은 이 영화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이야기임을 알리는 선언에 가깝다. (이와 관련한 얘기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이는 또한 감독의 영화적 선언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밀크>가 구스 반 산트의 최근 몇 작품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구성을 띤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독은 이미 전작 <엘리펀트>(2003) <라스트 데이즈>(2005)를 통해 죽음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 적이 있다. 구스 반 산트는 죽음을 전후한 순간이야 말로 그 사람에 대한 진심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죽음을 지렛대 삼아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밀크>와 전작들 간에 큰 차이를 보인다.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파편화된 이미지로 시어(詩語)에 가까운 영화 언어를 구사한다면 <밀크>의 언어는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신화화하지 않는 객관적인 기록에 가깝다. 아마도 이 차이는 해당 인물(혹은 사건)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에서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예컨대,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각각 다루고 있는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과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바가 없는 사안에 속한다. 반면 하비 밀크의 공식적인 시의원 활동은 채 1년이 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유산의 정체는 뚜렷해 관객은 이 영화가 주는 의미를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하여 <엘리펀트>와 <라스트 데이즈>가 다수의 주관적인 시점과 몇 가지 행적을 토대로 한 재구성에 가깝다면 <밀크>는 사료 고증에 철저한 재현, 즉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숀 펜 생애 최고의 연기

<밀크>는 한편으론 극영화가 다큐멘터리적인 구성을 취할 때 ‘배우는 어떤 연기를 펼쳐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이라 할만하다. <밀크>처럼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작품에서 배우는 배역을 자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구스 반 산트가 하비 밀크 역에 숀 펜 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인물에 깊숙이 개입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구스 반 산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숀 펜 외에는 없었다. 그가 맡아야 했고 실제로 해냈다. 실제 하비 밀크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는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숀 펜은 늘 캐릭터에 동화되는 연기를 펼치는 까닭에 자신을 버리는데 익숙하다. <칼리토>의 ‘곱슬머리’ 변호사나 <아이 엠 샘>의 ‘지체장애’ 아버지처럼 외양의 변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그중 하비 밀크의 외모는 원래 숀 펜이 가지고 있는 선 굵은 외모에 ‘포샵’ 처리를 한 것처럼 역설적이게도 가장 격한(?) 변신에 속한다. 다만 두드러진 외모적 변화만이 아니더라도 소수자인 게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대변자로 나선 하비 밀크에게서 숀 펜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조지 W.부시 정부의 비도덕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를 누구보다 안타까워한 숀 펜의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는 그대로 하비 밀크에게로 겹쳐진다.

이처럼 캐릭터의 모습에는 배우의 특징적인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외모일수도, 평소 성격일수도 있지만 숀 펜에게는 활동가적인 기질에서 드러나는 자기 확신에 찬 신념이다. 다만 “나의 정치적 감정이 극중 하비 밀크와 연결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숀 펜의 말처럼 그는 특정 영화의 출연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는 쪽이다. 다시 말해, 하비 밀크를 연기했다는 이유로 게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비 밀크가 되려했을 뿐.   

<칼리토> 이후의 숀 펜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기억된다. 맡은 배역에 대한 존중과 이해심을 전제한 그의 변신은 캐릭터적인 볼거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인물이 가진 배경을 넘어 아예 우주를 끌어안으려는 태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그의 필모그래프에서 소수자 캐릭터가 1990년대부터 집중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 정점에 바로 <밀크>가 있다. 숀 펜은 하비 밀크의 페르소나로 완벽히 변신하여 연기로써 대중을 압도하고 감동을 준다. (그리고 2009년 숀 펜은 <미스틱 리버>에 이어 생애 두 번째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밀크>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글머리에 스치듯 언급했지만 <밀크>는 이미 미국에서 2008년 개봉이 이뤄졌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2년 늦게 찾아온 셈인데 오히려 비상식이 판을 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겨냥한 것 마냥 꽤나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모양새다. 안 그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하비 밀크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촛불 행진을 벌이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거쳤던, 그리고 ‘다시’ 거쳐야할 행보를 떠오르게 한다. 이 장면 위로 흐르는 하비 밀크의 내레이션은 <밀크>가 보편적인 이야기이면서 현재진행형인, 즉 국경과 시간을 초월한 바로 지금 여기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지난 주 펜실베니아에서 전화가 왔다. 앳된 목소리의 청년이 고맙다고 말했다. 게이 정치가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그와 같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 (중략) … 이건 개인의 성취 문제도 아니고 자아나 권력의 문제도 아니다. 이건 ‘우리’의 문제다. 게이 뿐 아니라 흑인과 동양인, 노인과 장애인, 바로 우리의 문제다.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무너진다. 희망만 갖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희망이 없으면 삶은 가치가 없다. 그리하여 당신이 그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밀크>는 전기(傳記)영화의 형태를 띠지만 결국엔 산 자의 이야기다. 하비 밀크의 죽음으로 그의 육체는 산화했지만 그가 뿌린 저항과 연대의 씨앗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으로 뿌리내렸다. 다만 그 기록이랄 수 있는 <밀크>가 한국과 미국에서 점하는 사회적 지표는 각국의 대통령이 꿈꾸는 이념적 지향만큼이나 거리감이 크게만 보인다. 사실 <밀크>의 미국 개봉은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유력한 상황에서 소수자의, 소수자에 의한(구스 반 산트 감독이 게이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소수자를 위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바마 시대에 대한 영화였다. 

그런 <밀크>가 MB시대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국내에서 개봉하는 <밀크>는 ‘MB시대를 이겨내는 방법’ 혹은 ‘MB시대를 근절하는 방법’에 대한 영화라고 할만하다. 젊은 세대에게 상식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희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MB시대를 버티는 이유이고 또한 버텨야 하는 당위다. 비상식과 일방적인 명령에 맞선 연대와 저항은 기득권의 폭력을 불러올지언정 그로 인해 흘린 피와 죽음은 지금 이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가 <밀크>와 같은 영화를 만들 날이 오지 않을까. 다만 오래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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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2010.3.3)

<라스트 데이즈>(Last Days)>


구스 반 산트가 커트 코베인의 이야기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일반적인 전기 영화를 만들 거라 생각한 이는 없었다. 예상대로 그는 <게리>, <엘리펀트>로 이어지는 ‘재구성 삼부작’의 마지막으로 <라스트 데이즈>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커트 코베인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그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알고 있는 바가 없다. 감독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라스트 데이즈>는 블레이크(마이클 피트)라는 인물을 앞세워 커트 코베인의 마지막 날들을 시간 순으로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사료 고증에 따른 재구성이 아니다. 이번에 발매된 <라스트 데이즈> SE의 ‘The Making of Gus Van Sant’s Last Day’s’을 보면 이 영화가 작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자살과 이에 얽힌 몇 가지 행적을 뼈대로 놓아두고 커트 코베인이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 하에 의견을 조율함으로써 파편화된 그의 마지막 날들을 다시금 맞추는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이런 구성은 커트 코베인과 그의 그룹 너바나가 보여줬던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꾸밈이 없었던 태도를 적극 반영한 결과다. <라스트 데이즈>가 평범한 전기 영화에 머물지 않고 걸작의 대접을 받는 건 그런 인물의 성격을 구조로 체화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블레이크가 연주하는 모습을 창문 밖에서 롱테이크로 잡아 서서히 뒤로 빼는 장면은 기억할만한 순간으로 꼽을 만하다. 손에 잡힐 듯 지근거리에 있으면서도 붙잡을 수 없는 연민과 슬픔. 이 장면을 관통하고 있는 그와 같은 정서야말로 커트 코베인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느끼는 감정일 테다. 이 장면을 얻기 위해 구스 반 산트와 촬영감독 해리스 사비데스는 무려 7번의 테이크를 돌렸다. 또 하나의 흥미 있는 서플먼트 ‘On the Set of Gus Van Sant’s Last Day’s:The Long Dolly Shot’에서는 그에 얽힌 일화를 빠짐없이 담아냄으로써 명장면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라스트 데이즈> SE는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방대한 양의 서플먼트를 보유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가 가지고 있는 핵심을 찌르는 알찬 구성이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 외에 삭제된 장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특히 블레이크 역을 맡은 마이클 피트가 <파고다>라는 밴드를 구성하여 부르는 ‘Happy Song’의 뮤직비디오는 너바나를 추억하기에 딱 좋은 클립이다.


(2006. 8. 19.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