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奇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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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하 ‘<기적>’)의 영어 제목은 ‘Miracle’이 아니라 ‘I Wish’다. 이 차이는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기적>이 일본 대지진과는 하등 상관없이 제작된 작품이라고 밝혔다. (실제로는 쿠슈 철도청의 제안을 받은 영화다.) 하지만 1년 내내 화산재가 끊이지 않는 쿠슈의 작은 마을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사는 형제가 화산 폭발로 함께 살기를 희망한다는 내용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일본대지진과 연결 짓게 만드는 것이다. 다만 고레에다의 영화는 균열된 가족의 현상을 직시하면서도 작은 틈이지만 미래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기적’에 대해 갈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적>도 마찬가지다. 꼬집고 싶을 만큼 귀여운 아이들이 기적이 일어나건 말건 그 가능성을 무조건 신뢰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그렇게 살다 보면 제목처럼 기적은 언젠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일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단 하나의 ‘희망 wish’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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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2012년 1월호






[PIFF 2009] <파주> 부산을 매료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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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를 두고 ‘시네마 천국’이라 일컫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가 많고 스타가 즐비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봉영화에서 보이는 평단과 관객의 괴리 현상이 이곳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다만 영화제에서는 장소를 막론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의견 차이를 좁히려는 토론으로까지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에 대해 존중하는 배려가 목격된다. 결국 영화제의 궁극적인 목적이 ‘소통’이라는 것을 부산영화제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드물다.

소통은 또한 영화가 추구하고 갈구하는 이상(理想)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결과적으로 소통을 주제 삼으며, 또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유통에 대해 고민한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설령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소개하는 세 편의 작품은 영화중에서도 영화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인 동시에 앞으로도 인구에 회자될 ‘진짜’ 영화라는 얘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 인형>은 배두나가 출연한다고 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극중 배두나가 맡은 역할은 공기 인형 노조미다. 섹스 인형이라고 해도 무방한데(이 작품에서 배두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전라의 연기를 펼친다.) 어느 날 생명을 얻으면서 영화는 노조미의 시선을 좇아 이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공기 인형>에는 딱히 극적인 전개랄 것이 없지만 대신 그녀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랑의 소중함이 일상의 나른함을 넘어서면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인간과 인간간의 교류, 즉 소통이다. 공기인형 노조미가 자신의 몸을 산화해 세상에 소통의 바람을 불어넣는 마지막 장면은 동화의 성격이 짙지만 그만큼의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결국 현대사회가 잊은(혹은 잃은)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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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조니 토)의 <복수>는 남자들의 의리에 관한 이야기다. 왜 아니겠는가. 홍콩느와르는 의(義)와 협(俠)에 치중한 남자들의 얘기를 통해 홍콩의 지정학적 상황을 은유했다. 홍콩의 중국반환 이후 이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감독은 두기봉이 유일하다. 두기봉이 9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그의 영화는 결국 남자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매번 대륙(중국)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복수>의 경우, ‘따거’(큰형님)를 배신한 조직원들이 프랑스에서 온 이방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통해 홍콩느와르에서의 전통적인 의리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안 그래도 두기봉은 <복수>를 홍콩느와르의 큰형님 격인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작품을 구성했다. 딸의 복수를 위해 홍콩을 찾은 전직 살인청부업자 코스텔로(조니 할리데이)의 이름을 멜빌의 <사무라이>(1967)에서 알랭 들롱이 연기한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에서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으론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해도 무방하다. <복수>를 비롯해 두기봉 영화의 저변에 흐르는 노스탤지어의 감성은 강호의 도가 급격하게 땅에 떨어진 작금의 상황을 아쉬워하고 개탄하는 감독의 세계관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런 점에서 <복수>는 두기봉 필모그래프의 또 하나의 수작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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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영화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소통의 형상을 구현한다면 박찬옥 감독의 <파주>는 소통의 모호함을 부각하는 작품이다. <파주>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섹슈얼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형부 중식(이선균)과 그에게 끝없이 의심을 품는 처제 은모(서우)의 관계 속에 도사린 모호한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가령, 중식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 언니 잃고 방황하는 처제를 헌신적으로 보살피지만 은모는 그런 형부의 태도가 언니의 살해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의심한다. 그렇게 각자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그럴수록 본심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화해 이들의 방황은 더 길어지고 깊어진다.

박찬옥 감독은 중식과 은모의 마음속에 내재한 감정의 이중성이 서로에게 어떻게 왜곡되고 상처가 되는지를 묵묵히 지켜본다. 이렇게 감정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중식과 은모의 심리적인 상황은 극중 배경으로 등장하는 파주와 정확히 조응한다. 서울의 주변도시이자 재개발이 한창이라 헐벗은 파주의 지역성이 이들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묘하게 공명하는 데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인공의 특정 심리를 특정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발화하는 박찬옥 감독의 능력은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3)에서 이미 증명된 바다. 다만 뛰어난 서사성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망설여졌던 것은 영화적이라 할 만한 그 ‘무엇’이 결여된 탓이었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파주>는 이야기에 걸맞은 영화적 화법에 대한 박찬옥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작의 성과를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안개가 짙게 깔린 파주의 지방 국도를 푸른 빛 감도는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영화가 주요하게 부각하는 모호함이라는 테마를 이와 같은 톤으로 구성한 상당 부분의 공로는 김우형 촬영감독에게서 기인한 것이지만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박찬옥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파주>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불안정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매우 성찰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파주>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에 속하는 동시에 올해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로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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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걸어도 걸어도>(步いても 步いて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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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1995) <원더풀 라이프>(1998) <아무도 모른다>(2004)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배우자와의 사별, 사후 세계, 버려진 아이 등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왔다. 그것은 결국 현대 사회가 잃은 또는 잊은 가치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재라는 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항상 ‘남겨진 자’에 방점이 찍혀있다. <걸어도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다. 극중 주인공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유는 10년 전 바다에서 사람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장남의 기일 때문이다.

그러나 차남 료타(아베 히로시)는 부모님 댁에 가는 것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형만 편애했던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와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못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어머니(기키 기린)에게 걱정을 끼쳐드릴까 염려스러울 뿐 아니라 늦은 결혼으로 아내(나츠가와 유이)의 아들까지 얻었는데 가족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료타는 부모님은 물론 누나(유) 내외와 한때를 보내면서 가족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하나>(2007) 이후 차기작으로 20대 후반의 여자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를 구상 중에 있었다. (후에 이 작품은 내용이 바뀌어 배두나가 출연한 <공기인형>으로 개봉했다!) 그러나 3대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의 하루를 묘사한 <걸어도 걸어도>로 갑작스럽게 바뀐 이유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3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년 동안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가족의 단절, 소통부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걸어도 걸어도>는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을 출발점삼아 완성한 작품이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주는 모습이랄지 그 주변에서 아이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광경에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가족의 일상을 다루는 <걸어도 걸어도>는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영화의 계보에 두고 설명이 가능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개인의 경험이 바탕을 이룬다는 점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 (감독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영화 촬영 중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 영화와 비교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떤 소재를 다루든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 감독은 가족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섣불리 희망을 드러내거나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료타의 가족을 차분히 지켜보는 감독의 시선에는 가족의 의미를 한 발 늦게야 깨닫는 현대 가족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어머니가 그렇게 궁금해 하던 스모 선수의 이름을 헤어진 뒤에야 생각하는 료타의 경우처럼 가족은 함께 할 때나 헤어질 때나 계속해서 평행을 긋기에 애틋한 존재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뒤늦게야 가족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극중 주인공들이 결코 성취를 이루는 법이 없다. 정신적 성장은 이룰지언정 목적을 이루는 성질의 마침표를 찍지는 않는다. 끝맺음되지 않았기에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안 그래도 <걸어도 걸어도>의 영화 제목은 19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이시다 아유미의 히트곡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의 가사에서 가져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속 인물들은 비록 흔들릴지언정 계속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한 발 늦게서야 가족의 의미는 찾아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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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28)

<하나>(花よりもなほ)


<환상의 빛> <원더풀 라이프> <아무도 모른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죽음, 사후세계, 버려진 아이 등 많은 이들이 꺼려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왔다. 그런 그가 귀여운 코미디를 만들었다면 믿어지는가. 그것도 사무라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극을 말이다. <하나>는 복수를 주제로 한 사무라이영화다. 그런데 극중 사무라이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비장하기보다는 덜떨어져 보이고 대범하기보다는 하나같이 소심하기 그지없다.

때는 오랫동안 전국을 휩쓸던 칼바람이 잦아든 에도시대. 소자(오카다 준이치)만이 아버지의 죽음을 갚는다며 복수의 칼날을 갈기에 여념이 없다. 원수가 살고 있다는 허름한 마을에 정착하지만 정작 관심을 갖는 건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이요, 심지어는 이웃집 과부 오사에(미야자와 리에)에게 마음을 뺏긴다. 어느 날, 원수 카나자와(아사노 타다노부)를 찾아내지만 어쩐 일인지 복수가 망설여진다. 마을 사람들은 소자에게 그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며 마을행사인 연극이나 하자고 꼬드긴다.

<하나>는 사무라이영화지만 이 장르가 흔하게 다루는 화려한 칼싸움 대결이 없다. 그뿐인가, 팔다리가 싹둑 베어져 죽어나가는 사람도 없다. 그러다보니 복수를 다루지만 희한하게도 복수의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무라이의 명예에 초점을 맞춰 죽음을 미화하지 않고 장르의 기존 규칙을 비틀어 개인의 삶과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그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바둑을 두며 즐거워하고 사랑에 망설이며 질투하는 등의 그런 자질구레한 일상을 말이다. 소자가 카나자와를 앞에 두고 칼 대신 삶을 꺼내들어 죽음을 베고 일상의 소소함을 찬미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복수는 나의 것‘ 따윈 애당초 불가능한 행위라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증오가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에 <하나>는 더없이 특별해 보인다. “다시 필 것을 알기에 지는 벚꽃이 아름답다”는 극중 대사처럼, 복수에 복수로 응하지 않는 민초들의 대수롭지 않은 삶이야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이다.

살벌하고 무거운 사무라이영화도 이처럼 관점만 바꾸면 살갑고 발랄한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거창한 명분이 우선되는 혼란의 시대지만 눈높이를 낮춰 평범한 삶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세상에는 곧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다. <하나>는 전작들에 비해 한없이 가벼워진 작품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더욱 현자(賢者)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FILM2.0 331호
(2007.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