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FF 2009] <파주> 부산을 매료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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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영화제를 두고 ‘시네마 천국’이라 일컫는 이유는 단순히 영화가 많고 스타가 즐비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로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봉영화에서 보이는 평단과 관객의 괴리 현상이 이곳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 다만 영화제에서는 장소를 막론하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의견 차이를 좁히려는 토론으로까지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에 대해 존중하는 배려가 목격된다. 결국 영화제의 궁극적인 목적이 ‘소통’이라는 것을 부산영화제만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드물다.

소통은 또한 영화가 추구하고 갈구하는 이상(理想)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결과적으로 소통을 주제 삼으며, 또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유통에 대해 고민한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만족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없다. 설령 있다면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소개하는 세 편의 작품은 영화중에서도 영화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작품인 동시에 앞으로도 인구에 회자될 ‘진짜’ 영화라는 얘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 인형>은 배두나가 출연한다고 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극중 배두나가 맡은 역할은 공기 인형 노조미다. 섹스 인형이라고 해도 무방한데(이 작품에서 배두나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전라의 연기를 펼친다.) 어느 날 생명을 얻으면서 영화는 노조미의 시선을 좇아 이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공기 인형>에는 딱히 극적인 전개랄 것이 없지만 대신 그녀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랑의 소중함이 일상의 나른함을 넘어서면서 시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이를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는 인간과 인간간의 교류, 즉 소통이다. 공기인형 노조미가 자신의 몸을 산화해 세상에 소통의 바람을 불어넣는 마지막 장면은 동화의 성격이 짙지만 그만큼의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결국 현대사회가 잊은(혹은 잃은)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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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봉(조니 토)의 <복수>는 남자들의 의리에 관한 이야기다. 왜 아니겠는가. 홍콩느와르는 의(義)와 협(俠)에 치중한 남자들의 얘기를 통해 홍콩의 지정학적 상황을 은유했다. 홍콩의 중국반환 이후 이를 가장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감독은 두기봉이 유일하다. 두기봉이 9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그의 영화는 결국 남자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매번 대륙(중국)에 대한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복수>의 경우, ‘따거’(큰형님)를 배신한 조직원들이 프랑스에서 온 이방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을 통해 홍콩느와르에서의 전통적인 의리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안 그래도 두기봉은 <복수>를 홍콩느와르의 큰형님 격인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작품을 구성했다. 딸의 복수를 위해 홍콩을 찾은 전직 살인청부업자 코스텔로(조니 할리데이)의 이름을 멜빌의 <사무라이>(1967)에서 알랭 들롱이 연기한 주인공 제프 코스텔로에서 가져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한편으론 과거에 대한 향수라고 해도 무방하다. <복수>를 비롯해 두기봉 영화의 저변에 흐르는 노스탤지어의 감성은 강호의 도가 급격하게 땅에 떨어진 작금의 상황을 아쉬워하고 개탄하는 감독의 세계관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런 점에서 <복수>는 두기봉 필모그래프의 또 하나의 수작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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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영화들이 비교적 구체적인 소통의 형상을 구현한다면 박찬옥 감독의 <파주>는 소통의 모호함을 부각하는 작품이다. <파주>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섹슈얼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죄의식 속에 살아가는 형부 중식(이선균)과 그에게 끝없이 의심을 품는 처제 은모(서우)의 관계 속에 도사린 모호한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가령, 중식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씻어내기 위해 언니 잃고 방황하는 처제를 헌신적으로 보살피지만 은모는 그런 형부의 태도가 언니의 살해를 숨기기 위함이라고 의심한다. 그렇게 각자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지만 그럴수록 본심은 서로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화해 이들의 방황은 더 길어지고 깊어진다.

박찬옥 감독은 중식과 은모의 마음속에 내재한 감정의 이중성이 서로에게 어떻게 왜곡되고 상처가 되는지를 묵묵히 지켜본다. 이렇게 감정의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중식과 은모의 심리적인 상황은 극중 배경으로 등장하는 파주와 정확히 조응한다. 서울의 주변도시이자 재개발이 한창이라 헐벗은 파주의 지역성이 이들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묘하게 공명하는 데가 있는 것이다. 사실 주인공의 특정 심리를 특정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발화하는 박찬옥 감독의 능력은 데뷔작 <질투는 나의 힘>(2003)에서 이미 증명된 바다. 다만 뛰어난 서사성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망설여졌던 것은 영화적이라 할 만한 그 ‘무엇’이 결여된 탓이었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7년 만에 선보인 <파주>는 이야기에 걸맞은 영화적 화법에 대한 박찬옥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작의 성과를 훌쩍 뛰어넘는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안개가 짙게 깔린 파주의 지방 국도를 푸른 빛 감도는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영화가 주요하게 부각하는 모호함이라는 테마를 이와 같은 톤으로 구성한 상당 부분의 공로는 김우형 촬영감독에게서 기인한 것이지만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박찬옥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국 <파주>는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복합적인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불안정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인간의 조건에 관한 매우 성찰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파주>는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에 속하는 동시에 올해 가장 중요한 한국영화로 언급될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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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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