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교사>(Misbehavior)

femailteacher

기자시사회에서의 에피소드다. <여교사>의 문제적 장면, 극 중 효주(김하늘)가 펄펄 끓는 주전자를 들고 무방비 상태의 혜영(유인영)에게 쏟아부으려는 장면이 나오자 객석의 누군가가 “안돼, 하지 마!”라고 비명을 질렀다. ‘김태용 감독의 의도가 적중했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교사>는 불편한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여’ 교사라니. 의도적으로 차별적인 제목을 가져간 것은 극 중 효주의 처지가 그렇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화학 교사인 그는 비정규직이다. 정원이 나면 1순위로 정규직에 올라갈 차례이지만, 이사장의 딸이라며 혜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비정규직 신세에 항의는 언감생심, 그나마 위로받고 싶은 남자 친구는 자기밖에 모른다.

안 그래도 효주는 글을 쓰는 남자 친구를 작가로 만들어 신세 고쳐 보겠다고 꽃 같은 10년 세월을 바쳤다. 돌아온 건 이별 선언뿐. 이래저래 해 뜰 구석 없는 인생에 모든 탈출구가 봉쇄되던 차, 효주의 손에 조커 한 장이 들어온다. 체육관에 들렀다가 혜영이 제자 재하(이원근)와 가진 부적절한 관계를 목격한 것. 좀 더 영악했더라면 이 패를 가지고 혜영을 협박(?)해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효주의 감정적 방어선은 불행히도 순수였다. 떠난 남자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효주는 재하에게 사랑을 바치며 혜영보다 우위에 서려 한다.

김태용 감독은 <여교사>에 대해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포기한 사람이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숨겨진 욕망이라 함은 재하를 향한 효주의 사랑일 텐데 자본주의는 그와 같은 순수를 먹잇감 삼아 욕망의 배를 불리며 ‘흙수저’를 철저히 농락해왔다. ‘금수저’가 인식하는 순수란 자존심이라는 명분 하나로 파멸을 재촉하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효주에게 있어 혜영은 흙수저의 마지막 존엄인 자존심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부싯돌과 같은 역할인 셈이다.

그러니, 효주가 혜영에게 가한 뜨거운 주전자 공격은 말이 좋아 복수이지 순간적인 감정의 해소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여교사>가 내재한 불편함의 존재 이유가 있다. 주전자 장면에 하지 마, 라고 외친 관객의 반응은 뜨거운 물이 인체에 가할 고통의 연상 작용이 우선이다. 하지만 감독이 이의 장면에서 치환하려는 감정의 정체는 그와 같은 행동이 종국에는 효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안타까움의 발로에 더 가깝다. 그걸 알면서도 효주와 같은 흙수저가 행할 수 있는 응징의 종류가 얼마 되지 않으니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끝을 보고야 마는 연출은 한국영화계에서 이제는 드문, 아니 귀한 경험이 되었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묘사가 언제부터인가 영화의 단점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하다. 감정은 화학기호처럼 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어서 늘 예측불허다. 그래서 삶은 흥미로운 한편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즉, 고통은 살아있음에 대한 가장 극적인 증명이다. 이는 예술에 있어 특출한 개성이 되고는 한다. <여교사>는 개성의 영화다. 김태용 감독에게 개성은 연출자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몰개성과 획일화가 판을 치는 한국 영화 산업에서 끝내 지켜야 하는 가치다.

한국영화계는 2017년 새해부터 <여교사>를 통해 효주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얻었고 김하늘의 연기를 재발견했고 김태용 감독의 재능을 (<거인>(2014)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도 고작 10만 명 조금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불편을 직시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여교사>는 더 많은 사람이 봐야 할 영화다.

 

매거진 M
(2017.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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