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your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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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your father’ <스타워즈 에피소드 5-제국의 역습>(1980)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다. 영화의 결말,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는 한 솔로(해리슨 포드)와 레아 공주(캐리 피셔)를 구하기 위해 다스베이더와 일대일로 맞선다. 검은 투구로 정체를 가린 다스베이더와 대등하게 겨루는가 싶던 루크는 광선 검에 팔 한쪽을 잃고는 북받치는 감정에 절규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어” 이에 다스베이더 왈, “내가 너의 아버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다스베이더의 대응에 극 중 루크 만큼이나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 세계 영화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대사가 된 배경은 <식스 센스>(1999)의 귀신 반전에 버금가는 충격적 결말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느 정도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좀 더 파고들어 그 기저에 깔린 의미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텐데 ‘아버지’라는 존재로 혼란을 겪는 이들의 사연을 다룬 작품이 꾸준히 등장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조연상, 각색상 등 5개 부문에 후보를 올렸던 <폭스캐처>가 그렇다.

<폭스캐처>는 미국 거대화학 기업 듀폰의 그 유명한 사건 ‘존 듀폰 케이스’를 소재로 한다. 1996년 1월 듀폰의 4대손이자 미국 레슬링협회 후원자였던 존 듀폰이 자신의 레슬링팀 ‘폭스캐처’에 소속된 데이브 슐츠를 총으로 쏴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존 듀폰은 사건 현장에서 경찰과 48시간 대치한 끝에 체포되었지만, 살해 동기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전혀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존 듀폰은 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친 걸까. <폭스캐처>가 의문을 갖고 추적하는 바다.

존 듀폰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엄마로부터의 인정이었다. 존의 부모는 그가 두 살 때 이혼했다. 그래서 존은 냉정한 엄마 밑에서 자랐다. 형이 있었지만, 워낙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허물없이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존은 단순히 보호받는 막내아들이자 막냇동생의 정체성을 벗어나고자 했다.

존 듀폰은 인정욕구가 남달랐다. 특히 모든 사안을 엄마에게 허락받아야만 했던 그는 부재했던 아버지의 지위를 차지해 어머니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러자면 자신을 아버지처럼 ‘받들어 줄’ 아들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존중 대신 받들어 줄, 이라고 표현한 건 결혼한 적 없는 그에게는 피를 나눈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를 충족해줄 대체 아들이 절실했는데 조건이 맞는 인물이 마크 슐츠였다.  

마크 슐츠는 미국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1984년 LA 올림픽 금메달 출신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2연패도 유력했던 그의 체육관 밖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비인기 종목 선수였기에 늘 돈에 쪼들렸고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채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존 듀폰에게 아버지가 없어 자신과 같은 레슬링 선수였던 친형 데이브 슐츠를 보호자처럼 따랐던 마크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인위적으로 이뤄진 존 듀폰과 마크의 부자(父子) 관계가 오래갈 리 만무했다. 아낌없는 재정적 지원으로 마크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레슬링을 좋아했지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가르친 적 없는 존은 리더의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멘토로 인정받기에도 정신적으로 불안했던 존은 급기야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마크에게 손찌검하기에 이르고 이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끝을 맞이한다.  

마크에게 인심을 잃은 존은 마크의 형 데이브를 폭스캐처로 끌어들여 상황을 바꾸려 애쓴다. 하지만 데이브가 되려 멘토로, 코치로 마크를 이끌자 아버지의 지위를 뺏겼다고 생각한 존 듀폰은 폭발하고 만다. 존이 마크가 아닌 데이브를 살해한 존 듀폰 케이스의 자초지종이다. 아버지가 되고자 했지만, 이루지 못한 남자. 생물학적 아버지는 물론 정신적 아버지마저 잃은 남자. <폭스캐처>는 결국 아버지 없는 고아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폭스캐처>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아버지 없는 미국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생각에서다. 미국 역사의 ‘진짜’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건 비약이 아니다. <폭스캐처>에서 거대한 사유지 위에 세워진 존 듀폰의 새하얀 저택은 백악관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존 듀폰의 서재 벽에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지 워싱턴은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말하자면, 미국 건국의 아버지다. <폭스캐처>는 존 듀폰 케이스를 가져와 미국 역사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 피와 폭력의 역사 위에 건설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 이주민들이 신대륙으로 꾸준히 옮겨 왔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약속의 땅에 발을 디딘 건 1620년이었다. 그렇게 신대륙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서부개척을 통한 비약적인 영토 팽창 과정에서 인디언을 박해하고 살해했지만, 이를 개척 정신으로 포장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이미지는 민주주의, 자유수호와 같은 가치가 한쪽에 있다면 반대편에는 전쟁, 학살과 같은 폭력이 자리한다.

미국은 평화 수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가운데 뒤로는 전쟁을 통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미국 역사의 기원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폭력의 역사에 대해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자유와 평화를 그들 역사의 근간으로 내세운다. 영화는 그와 같은 ‘아메리카니즘’을 전 세계에 전파할 좋은 선전도구다. 그래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 ‘슈퍼맨’과 같은 신화다.

슈퍼맨은 태생부터가 미국, 그 자체다. 폭발을 앞둔 크립톤 행성에서 지구로 온 이방인이라는 설정은 유럽을 떠나 미(美)대륙에 입성한 이주민을 연상시킨다. 클라크가 지구를 지키는 영웅으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는 세계 경찰국가로 거듭난 현재의 미국이 추구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슈퍼맨은 미국이 옹호하는 입장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1978년에 개봉한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은 자신들을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보아주길 바라마지 않는 미국의 욕망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런데 이 신화는 의도적으로 폭력과 학살의 역사를 감춤으로써 미국 뿌리의 일부를 부정한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작품이 <맨 오브 스틸>(2013)이다. <슈퍼맨>과 다르게 <맨 오브 스틸>은 두 명의 아버지 사이에서 겪는 주인공의 혼란이 극을 끌고 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왜 아니겠는가. 미국의 실제 역사는 미대륙으로의 이주로부터, 그리고 미국 건국으로부터 두 개의 아버지라는 뿌리를 갖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클라크는 지구의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저도 모르게 뿜어져 나오는 탈(脫)지구인적 능력에 ‘나는 누구인가?’ 심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곧이어 찾아온 크립톤 행성에서의 친부는 이미 녹화된 영상을 통해 클라크를 대면하고서는 이렇게 인사말을 대신한다. “I’m your father” 내가 너의 아버지다. 이 얘기를 듣고 클라크가 느꼈을 심정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5-제국의 역습>에서 루크 스카이워커가 다스베이더에게서 받은 충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명의 아버지로부터 얻은 두 개의 정체성.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사랑받고 오랫동안 주목받는 프랜차이즈인 <스타워즈> 시리즈와 <슈퍼맨>과 같은 슈퍼히어로물의 전제와 같은 설정이다. 이들 주인공은 두 명의 아버지 사이에서 ‘혼돈’을 느끼고 시리즈 혹은 속편을 거듭할수록 이를 바탕으로 영화의 테마가 변주되고는 한다. 슈퍼맨과 함께 슈퍼히어로를 대표하는 배트맨, 그중 <다크 나이트> 프랜차이즈가 선보이는 브루스 웨인의 기원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해당했던 어릴 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브루스 웨인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악의 세계를 알아야 하기에 ‘어둠의 사도들’의 핵심 멤버인 헨리 듀커드를 만나 정신적, 육체적 수련을 받는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강경책을 고수하는 이들의 방법이 자신과는 맞지 않음을 깨닫고 탈출한다. 그리고 배트맨으로 거듭난 브루스 웨인은 고담으로 자신을 찾아온 듀커드, 즉 자신을 악의 세계로 인도한 또 한 명의 아버지를 응징한다.

여기에는 어딘가 분열적인 데가 있다. 폭력에 폭력으로 응징하는 방식이 싫다며 듀커드를 떠난 웨인이 평화를 지키겠다며 어둠의 사도들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정의 수호를 앞세워 폭력을 동원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슈퍼히어로물을 위시한 할리우드 ‘신화’의 정체다. 이들 영화가 스펙터클한 액션과 멋스러운 가면 뒤에 숨기는 건 폭력의 역사다.

이를 감춘다는 건 곧 아버지의 역사를 부정한다는 얘기다. 대신 그들이 진짜 아버지의 역사로 내세우는 평화가 실은 위선적인 데가 있음을 인식한다면 <스타워즈> 시리즈나 슈퍼히어로물은 근본(?)없는 고아들의 영웅담인 셈이다. 이 근본 없음을 감추기 위해 미국은 현대의 신화인 영화로 자신들의 일천한 역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다시 <폭스캐처>로 돌아와, 존 듀폰에게 형을 잃은 마크 슐츠는 이종격투기 선수로 전향한다. 데뷔전 상대는 냉전 시대 당시 미국의 주적이었던 러시아 출신의 선수다. 경기를 위해 마크가 링 위에 오르자 관중들은 ‘USA!’를 연호한다. 영웅이 되어주길 갈망하는 미국인들의 응원의 함성일까, 형마저 잃고 고아가 된 마크를 향한 동정의 목소리일까.

할리우드 영화가 의도적으로 감췄던 아버지에 대한 미국의 트라우마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폭스캐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에 후보를 올리고도 단 하나의 오스카 트로피도 챙기지 못했다. 지난해 북미 개봉 당시 미국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폭스캐처>와 다르게 올해 12월 개봉을 앞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니, 나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할리우드의 슈퍼 고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정체를 모른 채 영웅놀이에 골몰하고 있다.
 

ARENA HOMME
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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