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오베라는 남자>

themanobe

(GV를 위해 작성한 글이라 문장이 거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오베(롤프 라스가드)는 참으로 괴팍한 노인네입니다. 주변 이웃과는 전혀 소통하려 들지 않아요. 처음부터 화만 내기 일쑤죠. 마치 우리네 어르신 같은 모습이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한스 홀름 감독의 <오베라는 남자>는 오베가 왜 이렇게 삐뚤어(?)졌는지를 밝혀가는 이야기인데요. 오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플래쉬백)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에 사로 잡힌 인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초반에 오베가 과거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는 사실을 재밌는 묘사로 보여줍니다.

앞집에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가 이사를 오는데 오베 눈에는 마뜩잖습니다. 운전 실력부터가 영 시원찮습니다. 원래 오베가 사는 동네에는 운전이 금지되어 있는데 차를 몰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오베네 집의 우체통을 박살내기까지 합니다. 성질 급한 오베의 입장에서는 폭발할만도 하죠. 근데 화를 내는 것에 멈추지 않고 대신 운전을 합니다.

특히 후진 실력이 정말 좋아요. 오베가 과거 지향적인 인물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죠. 우체통이 부서진 것만 봐도 그의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만 오베가 사람을 불신하는 건 태생부터 나쁜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에요. 사연이 있는 거죠. 그게 슬퍼요. 어릴 때 엄마를 잃었고 청소년 때 아빠를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베를 더욱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건 부인 소냐의 죽음입니다. 소냐가 6개월 전에 사망한 이후 오베는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한 데다가 몰래 죽을 생각까지 하고 있죠.

하지만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이웃의 방해로 늘 실패합니다. 첫 번째 자살 시도 때는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인의 이사 문제로 한 번 어그러졌죠. 그런 후 다시 자살 시도를 하는데 마침 벨소리가 울립니다. 이번에는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의 두 딸입니다. 운전을 도와줬다며 고마움의 표시로 샤프란을 넣은 밥과 닭요리 도시락을 전해줍니다. 오베는 이를 마지 못해 받아들이죠.

여기에도 재미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패트릭의 부인 파르바네는 이란 출신입니다. 스웨덴으로 온 이민자이죠. 그런 이민자가 요리한 음식을 받아들였다는 건 파르바네는 물론 그녀의 문화까지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음식 한 번 먹었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가 과거에 사로잡힌 오베를 그 과거에서 빼내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겠죠.

<오베라는 남자>에는 오베를 과거에서 현재로, 집 안에서 바깥으로, 고집불통에서 함께 하는 이웃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의미심장한 미장센들이 등장해요. 우선 음식이 그랬죠. 음식을 전달해준 파르바네 가족은 이번에는 사다리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사다리 또한 그냥은 이동하기 힘든 곳을 연결해주는 도구이죠. 그 와중에 아니타가 오베를 찾아와 레디에이터를 고쳐달라고 합니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냐며 오베는 거절하지만, 빌려준 호스를 받기 위해 마지못해 아니타를 찾아가 라디에이터를 고쳐줍니다. 호스 또한 긴 선의 형태로 수도꼭지에 연결하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의미로 볼 수 있겠죠.

영화는 그처럼 소통을 의미하는 다양한 연결의 미장센으로 내부에 사로잡힌 오베에게 노크를 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오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간절한 부름이기도 하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는 않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와 픽사의 애니메이션 <업>이 있었죠. <그랜 토리노>의 할아버지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업>의 할아버지 칼은 모두 오베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코왈스키도 부인을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보내려는 인물이죠. 하지만 젊은 갱들은 동네의 안전을 위협하고 아시아인들로 채워지는 이웃들은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며 가족들은 애지중지 아끼는 그랜 토리노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입니다. 칼도 다르지 않습니다. 개발업자들에게 집을 압류 당할지도 모르고, 아시아계 소년 러셀은 봉사활동을 이유로 귀찮게 굽니다.

오베와 코왈스키와 칼은 한마디로 ‘변화’가 싫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키려는 것, 오베와 칼에게는 부인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 코왈스키에게는 1972년형 그랜 토리노가 그것인데, 모두 오래되고 낡은 과거입니다.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죠. 그렇다면 방법은 과거를 버리면 되겠죠. 사실 오베도, 칼도, 코왈스키도 만약 배우자가 있었다면 고집불통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부인들은 남편들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는 않겠죠.

소냐는 오베에 앞서 몇 번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건 임신 후 오베와 떠난 스페인 여행에서 버스 사고를 당해 유산을 한 것은 물론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서 평생을 보내게 됐다는 것입니다. 힘들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공부를 해 교사 자격증을 땄지만, 채용해주는 곳이 없습니다.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는 그 대목에 관한 중요한 대사가 있습니다. 소냐 왈, “우리는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오베의 부인 소냐뿐이겠어요. <업>의 칼의 부인도 죽으면서 사진첩에 이런 문장을 남겨뒀었죠. “당신만의 여행을 떠나세요.”

부부가 의미를 갖는 건 이렇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 때문인데요. 부부에게 서로는 각자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부분이 있죠. 오베와 소냐의 부부만 해도 소냐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 출신이고 오베는 운전과 수학 빼고는 무언가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선생과 학생의 역할이 되겠죠. 반대로 소냐가 휠체어에 의지할 때 오베는 그런 부인을 위해 집안의 모든 부엌 시설의 높이를 낮춰주고요, 소냐가 겨우 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따로 계단을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게 부부 사이인데 한쪽이 없다면 그 절망감이 얼마나 크겠어요. <오베라는 남자>에는 오베가 혼자 밥을 먹거나 잠을 잘 때 그 옆자리가 비워있는 장면을 종종 노출합니다.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오베는 자살하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그 빈자리를 채워주면 됩니다.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건 오베의 이웃사람들입니다. 특히 파르바네의 역할이 크죠. 파르바네는 오베의 자살 시도를 눈치채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요”

부인과는 사별했고 스페인 여행에서의 사고 때문에 아이도 없는 오베를 위해 영화는 (그리고 소설은) 그를 위해 가족을 만들어줍니다. 패트릭과 파르바네 부부가 어떻게 보면 자식 같은 입장이 되겠죠. 그들의 아이들은 오베에게 손주가 될 겁니다. 게다가 파르바네는 현재 임신 중이기도 해요. 오베가 소냐의 임신 당시 새로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만들어두었던 요람은 파르바네의 셋 째 아이 차지가 되겠죠.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감정은 꽤 훈훈합니다.

영화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부분에서 오베가 사는 마을에 걸려 있는 스웨덴 국기를 비추며 스웨덴의 훈훈한 미래까지 그려봅니다. 현재 유럽은 이민자들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죠. 유럽 뿐이겠어요. 한국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오베라는 남자>는 그런 현재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가족처럼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칠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베의 앞집으로 이란 출신의 파르바네가 이사를 오는 건 그런 의미이겠죠. 파르바네 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출신 성분의 조화인데요. 다양성을 소수자라고 치환해도 될 거예요. 파르바네의 남편 패트릭은 스웨덴 출신이지만,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는 설정은 이를 의미하겠죠. 또한, 파르바네의 옆집에는 뚱뚱한 백수 청년이 살고 있고요. 소냐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는 아랍 출신의 게이도 있습니다. 사람에만 한정하지 않아요. 오베의 집 앞에는 늘 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오고는 하는데 나중에는 오베의 가족이 됩니다.

이런 다양성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도 있겠죠. 오베의 이웃인 아니타의 남편 루네는 한때 오베와 절친했던 사이이지만, 언젠가부터 소원해진 상태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거동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정부에서는 그런 루네를 요양원에 데리고 가려 하죠. 아니타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인데 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오베와 이웃 사람들입니다. 정부에서 파견된 요양원의 스웨덴 백인 직원이 루네를 데려가려고 하자 다양성으로 무장한 오베와 가족들이 이를 막는 것이거든요. (사진 참조) 감독이 앞으로 스웨덴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으로써 오베는 과거를 탈출해, 집안에서 벗어나 미래를 위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새출발은 오베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베의 의무는 스웨덴의 어른으로서 후대에게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전도하고 가르쳐주는 것이겠죠. <오베라는 남자>에서 자동차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베는 ‘메이드 인 스웨덴’ 사브만 평생을 몰고 다녔죠. 그것은 그의 가치였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그였죠. 그의 차에는 항상 소냐만이 탔습니다. 소냐의 빈자리는 이제 파르바네 부부와 그의 자식들이 차지하게 되었죠. 스웨덴이라는 국가에 다양성이 생겨난 겁니다.

오베가 파르바네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이제 스웨덴을 이끌어가는 건 스웨덴 출신 뿐만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사브에 좌석에 않을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운전을 할 수 있게도 해야겠죠. 오베가 파르바네에게 자동차 운전법을 가르쳐주는 이유는 물론 스웨덴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건 다양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겠죠. 사실 오베도 그래요. 오베는 아버지에게 운전하는 법, 거짓말 하지 않는 법, 앞으로 나아가는 법에 대해서 배웠지 다양성은 익히지 못했습니다. 만약 엄마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오베는 엄마에게서 다양성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지금처럼 고집불통의 외골수 할아버지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아무렴 어때요. 이제 오베도 다양성을 알게 됐는데요. <오베라는 남자>의 마지막, 파르바네의 두 딸이 마을의 문을 닫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GV
(201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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