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산이 울다>

mountaincry

(GV를 위해 작성해서 글이 투박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참, 스포일러도 있으니 아직 안 보신 분은 피해주세요.)

래리 양 감독의 <산이 울다>는 루쉰 문학상을 수상한 거쉬핑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죠. 래리 양이 처음 거쉬핑의 <산이 울다>를 읽은 건 베이징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인 2008년이라고 해요. 당시 그는 감독으로서 어떻게 하면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죠. 농담처럼 벙어리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만들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마침 친구가 거쉬핑의 소설을 소개해줬답니다.

<산이 울다>는 중국의 산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이곳에 말을 하지 못하는 홍시아(랑예팅)가 이주해 옵니다. 남편이 있는데 개차반이에요.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요. 그런데 그 폭력 남편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을 청년 한총(왕쯔이)이 오소리를 잡겠다고 설치한 폭약을 밟고 만 것이죠.

그런 연유로 한총은 홍시아를 돌봐주게 됩니다. 처음엔 경계했던 홍시아도 한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아요. 홍시아의 죽은 남편 때문에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한총은 홍시아를 보호하려고 하고 그 때문에 이 둘에게는 점점 비극이 다가옵니다.

래리 양 감독은 홍시아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투영했다죠.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자신이 홍시아와 닮았던 거죠. 한편으로 래리 양 감독은 청소년 시절을 미국 뉴욕에서 보내다가 베이징 영화 학교에 입학하겠다며 2002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자신이 마치 홍시아처럼 외지인으로 느껴졌다는 거예요. 래리 양 감독이 거쉬핑의 <산이 울다>에 마음이 꽂힐 수밖에 없는 이유였죠.

거쉬핑의 동명 소설은 단편입니다. 래리 양 감독은 많은 걸 덜어내야 하는 장편보다는 많은 걸 더할 수 있는 단편이 영화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산이 울다>도 그래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야기의 얼개는 그대로 따르는 대신 홍시아와 한총이 사랑하는 관계를 좀 더 로맨틱하게 그리기 위해 현대적(modern)인 요소를 추가했습니다. 예컨대, 거쉬핑의 원작은 분위기가 굉장히 어두운데요. 래리 양 감독은 그런 부분들을 많이 덜어내고 대신 밝은 분위기로 가져갔습니다.

극 중 홍시아가 폭력 남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총을 만나고 모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산을 거닐 때 영화는 종종 ‘햇빛 찬란한 순간’들을 연출해요. 이런 묘사는 원작에는 없다네요. 확실히 영화 <산이 울다>를 보고 있으면 햇빛이 홍시아를 비출 때의 영상이 홍시아의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물론 관객들의 마음까지 뻥 뚫어주는 느낌이에요.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이는 멕시코에서 주로 활동하다 할리우드와 중국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는 패트릭 머지아(Patrick Murguia)가 맡았습니다.

래리 양 감독은 중국보다 미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산이 울다> 자체가 홍시아와 같은 이방인, 그리고 한총과 같은 소수자가 주인공인 작품이다보니 중국에서 활동하는 이보다 이방인이자 소수자의 위치를 점하는 패트릭 머지아와 같은 촬영감독의 존재가 더욱 이 영화에 맞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홍시아처럼 말을 하지 못해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한총처럼 어수룩하고 단순한 이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분위기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는 래리 양 감독의 의도였던 거죠.

실제로 래리 양 감독은 <산이 울다>를 만들기 전 패트릭 머지아와 말레이지아 출신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프리 콩과 프랑스 출신의 음악감독 니콜라스 에레라와 함께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샨시 지역을 함께 여행했다고 해요.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농촌 영화 nongcun pian’가 만들어졌습니다. 19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농촌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였죠. 농촌을 배경으로 계급적 배경과 정치성으로 드러난 인물의 동기와 행위를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부르주아지 사실주의’에서 집단적, 대중적, 투쟁성 위주의 ‘혁명적 사실주의’로 변모시키는 내용이 지배적이었죠.

이와 같은 농촌 영화의 배경을 가지고 래리 양 감독은 일종의 전복을 꾀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농촌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거죠. 오히려 집단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논조를 개인에게로 옮겨가 사랑, 즉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안 그래도 <산이 울다>는 홍시아와 한총의 사랑 이야기이죠.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박해받습니다. 이들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들의 사랑이 자칫 마을에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주민들의 우려 때문입니다.

홍시아의 남편은 도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산속 깊은 곳에 들어온 전력을 가지고 있죠. 그러다가 한총이 오소리를 잡겠다고 설치한 폭탄을 밟고 목숨을 잃고 맙니다. 공안은 홍시아의 남편을 잡기 위해 산골 마을을 뒤지고 있는데요. 산골마을의 주민들은 홍시아의 남편이 살인자라는 사실에 상관없이 그를 죽인 한총을 숨겨주고 시신을 묻은 것이 탄로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을 이미지가 추락하면 안된다는 것이 마을의 입장인데요. 그렇다면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대상은 소수자입니다. 홍시아는 여자인데다가 말도 못해 게다가 외지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홍시아를 이 마을에서 쫓아내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총이 홍시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홍시아를 몰아내려고 하자 한총은 자수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홍시아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 개인의 욕망을 위해 집단의 욕망을 부정하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4년이죠. 1984년은 중국영화계에서 꽤 의미 있는 한 해였습니다. 중국 5세대 감독의 대부 우텐밍 감독의 <인생>이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체제 순응적 환경에서의 개인의 갈등을 다룬, 이 시기에 나온 일련의 영화 중 첫 번째 작품이에요. 농촌 영화 장르에 대한 그동안의 서정적 시각을 뒤집어 엎는 역할을 했다는데요.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시골과의 인연을 끊고 애인을 찾아 마을을 떠나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자 주_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참조) 어떤가요, 래리 양 감독이 다룬 <산이 울다>와 비슷하지 않나요?

래리 양 감독은 중국 영화의 토양은 가져오면서 그 위에 비슷하지만 시각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산이 울다>를 구성했습니다. 극 중 시간 배경은 1984년이지만,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전혀 옛날 느낌이 들지 않게끔 연출했다는 의미이겠죠. 래리 양 감독은 <산이 울다>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현대의 젊은 관객들과도 연관이 있었으면 바랐어요. 요즘 젊은 세대는 삶이 참으로 버겁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도 잃고 삶도 잃은 것처럼 보여요. <산이 울다>를 보고 홍시아처럼 투쟁하고 사랑과 책임감에 대해 이해하고 무엇보다 편견에 맞서 용기를 얻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래리 양 감독은 홍시아에게서 요즘의 젊은 세대의 특성을 본 것인데요. 홍시아를 연기한 배우는 랑예팅입니다.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웠고 연극 무대에서 연출을 하기도 했다네요. <산이 울다>에 출연하기 전에는 두기봉 감독의 <화려한 샐러리맨>과 <블라인드 디텍티브>에서 연기했는데요. 그러면서도 클래식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네요. 래리 양은 또한 배우이기도 한데 랑예팅과는 <블라인드 디텍티브>에서 함께 했죠. 래리 양 감독은 그녀에게서 리듬감을 보았고 내면에 있는 우아함을 느꼈대요. <산이 울다>의 홍시아 역에 적역이었다고 판단한 근거입니다. 그녀는 연기의 기술은 없지만, 대신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 그것이 홍시아와 닮았다는 것이죠.

전 <산이 울다>에서의 홍시아가 곧 산 그 자체라고 보았어요. 산은 말 없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존재이죠. 오히려 인간들에게 상처 입어도 이에 딴 마음을 품기 보다는 그 아픔을 그대로 간직합니다. 그래서 산은 비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홍시아가 그렇죠. 폭력 남편에게 납치된 후 그녀는 말을 잃었고 아픔을 마음 속으로 삭입니다. 홍시아에게 있어 산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고향에 와서야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여는 건 아닙니다. 그녀가 산이기 때문에 산을 잘 아는 이에게만 허락을 하겠죠.

한총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일례로 한총은 오소리가 다니는 길을 잘 알죠. 홍시아는 직감적으로 한총에게 마음을 빼았겼을 거예요. 실제로 오래 지켜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폭력 남편이 죽은 후 홍시아와 한총이 잠시간 행복을 느낄 때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뻥 뚫린 산의 공간에서 마치 산과 하나가 된 듯한 구도를 가져갑니다. 홍시아와 한총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자연은 늘 사람들에 의해 파괴가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산이 별 말 안하니 우습게 본 것이죠. 홍시아와 한총의 사랑도 그래요. 말 없는 홍시아와 어수룩하고 단순한 한총의 사랑에 마을은 가혹하게 굽니다. 늘 소수자의 사랑은 시스템에 의해 방해를 받죠. 이럴 때 산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부모이겠죠. 한총은 어머니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지내요. 아버지는 감옥에 갖다 온 전력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술을 마시다 폭력을 휘둘러서일 거예요.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게 됐고 다행히도 감옥에서 나온 후 아버지는 한총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과거 전력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 한총에게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 역할을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처음엔 아버지도 한총이 홍시아를 사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좀 더 나은 짝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총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게 아비의 마음이죠. 한총이 홍시아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는 마을 사람들의 방해에도 한총이 자수하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한총을 따라 홍시아도 떠나려고 합니다. 홍시아는 한총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두 자녀를 키워달라고 해요. 아버지는 그 아이들을 그대로 품에 안습니다. 한총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홍시아의 두 자녀에게는 충분하게 제공하겠죠.

아픈 사연입니다. 하지만 산은 아픈 이들의 삶을 그대로 품어주죠. 물론 너무 아플 때 산은 울기도 합니다. 산의 울림은 메아리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메아리이기 때문에 그 여운이 더욱 길게 남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욱 깊이 박히겠죠. <산이 울다>는 바로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1984년이 배경이지만, 올드한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관객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산이 운다는데 그 사연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죠.

 

<산이 울다> GV
(2016.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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