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를 위해 러프하게 메모해서 맞춤법도 틀리고 비문도 많아요.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무엇보다 엄청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셸 프랑코는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마비로 쓰러져 남은 생을 침대 위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때 그녀를 돌봐줬던 이는 여자 간호사, 즉 호스피스였는데요. 6개월 동안 할머니 곁을 지켰던 호스피스에게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내용인즉, 매일 할머니를 찾아와 도운 호스피스는 가족도 힘들어하는 목욕과 식사와 생리 현상을 모두 도왔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족보다도 더 할머니와 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처음엔 미셸 프랑코 감독에게 낯설게 다가왔답니다. 할머니가 가족이 아닌 낯선 이방인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는 상황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모순적인 데가 있어요. 할머니와 관련한 일련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미셸 프랑코는 이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은 호스피스란 과연 어떤 작업일까, 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할머니를 간호했던 호스피스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녀를 신뢰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호스피스가 할머니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우선 프랑코의 가족들에게 비키라고 했대요. 그러면서 할머니를 조심스럽게 옯기는 데 엄청나게 능수능란하다는 겁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녀는 무려 20년 넘게 그 일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늘 우울해 보였다고 해요. 미셸 프랑코는 생각했겠죠. 남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닌데 그런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들었던 의문은 우울한 이 일은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는 걸까? 호스피스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이 일은 나의 삶이야. This is my life”
타인의 죽음을 돌보는 것이 삶이 된 이라니. 거기서 미셸 프랑코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사유 없이 어떻게 삶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죠. 우리가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포함했을 때 완벽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논하지 않고는 삶을 말할 수 없죠. 그래서 삶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크로닉>이 역설과 모순의 드라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이미 언급했듯 호스피스는 타인의 아픔과 죽음을 돌보면서 자신의 삶의 존재 가치를 찾습니다. 일례로, 팀 로스가 연기한 극 중 호스피스 데이비드 윌슨은 홀로 집에 있을 때면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을 잔다든가 불도 켜지 않고 노트북을 보며 시간을 죽이는 식이죠. 환자를 돌볼 때야 데이비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데이비드의 얼굴 표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일관해요. 그럴 수밖에 없겠죠. 돌보는 환자는 고통에 쌓여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 어떻게 호스피스의 얼굴에 활력이 돌 수 있겠어요. 영화는 이와 같은 모순적인 상황을 탁월한 이미지로 보여줘요. 데이비드가 체중이 쭉 빠진 여자를 목욕시킬 때 장면을 보세요. 화면의 양 옆은 어둠에 쌓여 있지만, 그 가운데 화장실 문으로 보이는 이들의 목욕 장면 만은 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호스피스의 정체성뿐 아니라 환자의 삶에 깊숙이 들어간 호스피스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요. 이것이 불만인 가족도 있을 거예요. 가족은 볼 것 안 볼 것 모두 겪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생각 때문인데요. 실은 가족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도 있을 거예요. 데이비드가 돌보는 할아버지가 그래요.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귀찮아 하고 데이비드에게 신뢰를 보이죠. 가족이 없을 때면 아이패드로 포르노를 보며 즐거워 하는데 가족의 입장에서는 데이비드가 할아버지를 성희롱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 또한 가족보다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는 호스피스가 겪어야 하는 삶의 역설이자 모순이겠죠.
(스포일러 주의!)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은 충격적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죽음을 어루만져주는 데이비드는 정작 그 자신의 죽음은 돌보지 못합니다. 조깅을 하던 중, 달려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도로에서 차사고를 당하고 마는데요. 데이비드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이러니인 게, 그는 아픔을 겪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락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요. 또한, 조깅을 하기 전에는 그에게 의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는 환자를 위해 다시 한 번 안락사를 관장했는데요. 타인의 죽음을 맡아서 다루던 그가 자신의 죽음은 결코 예비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적입니까.
그처럼 우리는 앞 날을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죽음도 그렇지만, 내가 병에 걸릴 지조차 알 수 없는 게 인간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니 생기는 게 편견이에요.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하니 저럴거야, 라고 우리는 쉽게 타인을 재단하고 규정하고는 하죠. 그런 점에서 첫 장면은 의미심장해요. 차 안에서 바깥을 응시하는 시점으로 영화를 시작하는데요. 우리는 쉽게 그것이 데이비드의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의 딸 나디아가 집 밖으로 나서는 모습에 시선이 움직이기 때문인데요. 정확히 보면 그건 데이비드의 시선이 아니에요. 운전석에 앉은 데이비드라고 하기에 카메라는 좀 더 옆 좌석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 시선은 좀 애매한 데가 있어요. 의도적인 장치이겠죠. 영화의 첫 장면만 봐서는 마치 젊은 여자를 스토킹하거나 해하려는 중년 남자처럼 보이니까요. 물론 선입견이죠. 오랫동안 딸을 만나지 못해 딸을 멀리서 지켜보는 아빠의 시선인 거니까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걸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의도를 곡해해서 받아들이거나 퍼뜨리는 경우가 많아요. 100%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죠. 반이라도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미셸 프랑코가 담당한 <크로닉>의 시나리오는 그처럼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 같은 것이겠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애매한 시점숏은 한편으로 우리의 삶에 대한 운명의 시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애매한 시점은 극 중 대상과의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확보하고 있는데요. 그 거리감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삶의 역설과 모순이 생겨나는 것일 테죠. 호스피스가 환자를 돌보는 태도가 애매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동시에 그와 같은 거리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 속 죽음에 대해, 호스피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거리감은 시점숏 뿐만 아니라 1.85:1의 화면과 미디엄 숏과 롱테이크로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아주 작지도(1.33:1) 그렇다고 와이드(2.35:1)하지도 않은 화면은 감독이 극 중 세계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대신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을 남겨두죠. 미디엄 숏도 그래요. 인물에 가깝게 붙어서거나 반대로 멀찍이 떨어지지 않아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하죠. 이 영화는 94분의 상영시간 동안 단 97개의 컷으로 이뤄질 정도로 롱테이크가 빈번한데 극 중 인물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호도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힙니다.
팀 로스가 연기한 호스피스는 여자 배역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에 미셸 프랑코의 할머니를 병간호했던 이가 ‘여자’ 간호사였다고 말한 거 기억하시죠. 이 영화를 구상하던 중 미셸 프랑코는 전작 <애프터 루시아>(2012)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정을 받았고 그때 심사위원장이 팀 로스였다고 해요. 미셸 프랑코의 영화 세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팀 로스는 차기작에 대해 물었고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남자 배역으로 바뀐 거죠.
팀 로스의 데이비드 윌슨은 무척이나 적역의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데이비드는 극 중에서 전혀 관객이 예상할 수없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환자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데이비드는 스스로 환자의 가족인 듯 행세를 해요. 그 때문에 그가 과연 속으로 어떤 생각을 숨기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요. 그와 같은 비밀스러운 캐릭터는 팀 로스의 연기를 규정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는 쿠엔틴 타린티노의 <헤이트풀 8>(2015)에서 비밀을 간직한 8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연기했죠. <저수지의 개들>(1992)에서는 어떤가요. 강탈을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인물 중 경찰임을 속이고 일원에 합류했던 미스터 오렌지를 연기하기도 했습니다. 그 자신의 삶을 싹 지우고 환자를 위해 그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데이비드 역으로는 팀 로스가 딱이었던 거죠. 그는 이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합니다. 아니 딸을 만나 죽은 아들을 기억할 때 딱 한 번 괴로운 모습을 비춥니다. 오히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한 표정으로 일관한다고 하면 되겠네요.
여기에 이 영화의 제목 ‘크로닉 Chronic’이 가진 의미가 있는데요. ‘만성적인’ 우울함에 빠져있다고 하면 되겠죠. 아들의 죽음으로 그는 평생을 만성적인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늘 죽음과 가까이 하는 데다가, 그렇죠 결국 영화 마지막에 죽게 되니까요. 또한, 우리 모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고질병’과 같아서 죽음의 순간까지도 풀지 못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삶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보세요. 극 중 데이비드의 가족은 아들의 죽음으로 삶이 예전과는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딸은 오빠의 죽음을 접하면서 의과 대학에 갔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죠. 데이비드와 아내는 그 때문에 이혼까지 한 상태입니다. 그런 죽음을 외면해서는 안되겠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껴안아야 하는 것이 죽음일 텐데요. 그래서 2015년 칸국제영화제는 죽음에 대한 우울한 성찰을 보여줬다는 평과 함께 <크로닉>에 각본상을 주었습니다.
<크로닉> GV
(2016.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