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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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내용을 소리나는대로 옮긴 거라 글이 거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

기존 피터 그리너웨이 작품을 생각한다면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 Eisenstein in Guanajuato>은 상대적으로 쉬운 인상을 줘요. 그렇다고는 해도 피터 그리너웨이의 개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인데요. 그는 언제나 체제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왔죠. 그 싸움이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1989)에서는 승리했고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1982)에서는 실패로 끝맺음되기도 했죠.

‘체제에 대항하는 인간의 저항기’라는 콘셉트는 피터 그리너웨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보게 되면 극 중 배경이 굉장히 양식화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구획화가 철저히 이뤄져 있는 세계예요.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데요. 그래서 연극적이라는 느낌이 강해요.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의 큰 저택과 정원은 한치의 오차 없이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죠.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녀의 정부>는 식당과 주방과 화장실과 식당 입구, 단 4개의 세트에서 이야기가 진행이 되죠.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1898~1948)이 멕시코의 과나후아토를 찾은 1931년은 그에게는 그렇게 나쁜 시기는 아니었어요. <전함 포템킨> <파업>(이상 1925)과 <10월>(1928) 단 세 편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었죠. 이를 발판으로 그는 할리우드에 초청받아 그곳에서 차기 작품을 제작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찰리 채플린의 조언을 듣고 멕시코에 오게 된 거죠.

멕시코에 들어오는 장면으로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은 문을 열어요. 이 때 에이젠슈타인이 타고 있는 차가 멕시코 국경을 건너는데 화면이 흑백으로 비추죠. 이는 에이젠슈타인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벗을 때마다 흑백에서 컬러로 화면이 변모를 해요. 단순히 시각적 효과에만 그치지 않는 건 에이젠슈타인은 그 전까지 구(舊)소련에서만 작품 활동을 했었는데 당시 구(舊)소련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였죠. 바로 그 때문에 에이젠슈타인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거의 유아기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죠. 에이젠슈타인은 과나후아토에 와서야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눈을 떠요. 다양성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거죠. 바로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의 오프닝입니다.

피터 그리너웨이가 에이젠슈타인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특히 멕시코 시절에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그러니까, 에이젠슈타인은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에서 성공한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성적 소수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전체주의 국가 구(舊)소련에서 혼란을 느끼던 인물로 멕시코에서 이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그리너웨이 버전의 캐릭터였던 셈이죠.

또한, 에이젠슈타인은 몽타주 이론을 비롯하여 후대의 감독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중 한 명이 또한 피터 그리너웨이이기도 하죠. 말씀드렸듯이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에서는 연극적인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들죠. 양식화된 경향이 많이 느껴지는데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영화 감독이 되기 전 연극 무대에서 무대 연출을 맡기도 했죠. 피터 그리너웨이는 음이로든, 양이로든 에이젠슈타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래서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을 보면,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이 영화는 야외 장면이 꽤 많지만, 야외 장면조차도 양식화된 건물과 원색이 인상적인 구조물을 찾아 마치 연극 무대를 꾸민 듯한 화면으로 일관하죠.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 이론을 창조했던 것은 바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화법을 고려한 결과물일 텐데요. 확실히 피터 그리너웨이 감독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은 그와 같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적 기법을 자신의 영화에 창의적으로 반영하는 연출에 있습니다. 당연히 에이젠슈타인을 다루면서 몽타주 기법을 넣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이제 모든 영화에서 몽타주는 편집의 기본이 되었는데 피터 그리너웨이는 몽타주를 시간과 공간을 왜곡하는 영화적 기법이라는 데 착안해 이를 영화 속에 선보입니다.

엘머 백이 연기한 에이젠슈타인이 등장하면 화면을 분할해 실제 에이젠슈타인을 보여주는 식으로 관객이 현실과 영화의 차이를 줄이도록 배려합니다. 그보다 재미 있는 분할화면은 시간을 왜곡할 때입니다. 에이젠슈타인이 술에 잔뜩 취하는 장면에서 화면을 3개로 분할해 술을 마시는 장면을 화면 하나로 보여주는 것이죠. 제가 이 영화에서 감탄했던 몽타주는 제작을 맡은 싱클레어 부인이 에이젠슈타인이 묵고 있던 호텔로 찾아오는 장면이었어요. 영화는 이 때 어지러울 정도로 에이젠슈타인을 화면의 중앙에 놓고 심하게 돌기 시작해요. 에이젠슈타인에게 썩 좋은 내용은 아니에요. 멕시코에서 에이젠슈타인이 찍은 러시 필름을 싱클레어 부인이 에이젠슈타인의 동의 없이 할리우드에게 보낸 거죠.

이 장면은 흡사 지금까지 어렵게 걸어온 길을 ‘유턴’하는 듯한 의미를 전달해요. 사실 이 방식은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이론보다는 푸도프킨의 몽타주 이론에 더 가까워요. 에이젠슈타인은 두 개의 화면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 몽타주를 자주 사용했던 것에 반해 푸도프킨은 눈에 띄지 않는 편집 방식을 통해서 관객의 관객의 감정과 사고를 유도할 수 있다고 봤거든요. 그러니까,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방식이 아닌 푸도프킨의 몽타주 기법을 사용했다는 건 어떤 면에서 에이젠슈타인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에이젠슈타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감독이었지만, 기득권자라기보다는 소수자에 가까웠어요. 이 영화가 보여주듯 그는 성적소수자이기도 하죠. 왜냐면, 구(舊)소련에서 동성애자는 추운 곳으로 유배를 보낼 정도로 인식이 안 좋았으니까요. 또한, 그는 혁명을 테마로 한 영화를 만들었던 데다가 구(舊)소련 출신이다보니 미국의 보수파에게서는 좌파, 즉 빨갱이로 통했습니다. <10월>의 성공 이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와 매리 픽포드의 초청을 받아 1929년에 할리우드에 가게 됐죠. 그러면서 파라마운트와 몇 편의 영화를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죠. 그중 한 편이 H.G. 웰스의 <우주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고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거정을 당했죠. 결정적으로 1930년 11월 18일 미국 정부가 그를 공산주의자로 발표하면서 파라마운트는 이를 이유로 계약을 해지합니다.

멕시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처럼 노골적으로 빨갱이네, 사회주의자네 손가락질(?)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 제작사와의 갈등으로 그는 멕시코에서 거의 추방에 가깝게 쫓겨나고 맙니다. 그에게 다양성의 시선을 넓혀주었던 곳에서 희망이 꺾였다는 건 어떤 면에서 사회적인 사형 혹은 감독으로서의 생명을 다했다는 의미일 텐데요. 그래서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에는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이미지가 영화 전반에 걸쳐 곳곳에 넘쳐남니다. 죽은자들의 박물관에 전시된 시체 모형하며 해골 모양의 초 등등. 게다가 에이전슈타인이 술에 취해 호텔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때면 영화의 카메라는 그 구도를 지하에서 잡아 마치 죽음이 부르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멕시코의 에이젼슈타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에이젠슈타인 영화가 <10월>이라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10월>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1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에이젠슈타인이 <전함 포템킨>에서 보여준 지적 몽타주 기법이 전면적으로 실험된 영화인데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8년 3월 14일 볼쇼이 극장에서 공개되자마자 지나친 ‘형식주의’작품으로 분류되어 에이젠슈타인 본인이 각국의 검열을 고려하여 수출용 버전을 재편집해야만 했을 정도로 고생이 많았던 영화입니다. 게다가 <10월> 발표 이후 러시아에서 <알렉산더 네브스키>(1938)를 발표하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을 정도였죠.

다시 말해, 에이젼슈타인에게 멕시코는 흑백으로만 세상을 보던 시선에 다양성을 더한 말하자면 시스템을 탈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멕시코의 에이젼슈타인>의 중반까지의 구도는 사방이 뻥 뚫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분을 제공하죠. 성적 경험이 없던 에이젠슈타인이 그의 가이드와 동성 경험을 할 때의 호텔 방 구도 역시 화려하고 무엇보다 침대가 가운데 있습니다. 이를 두고 그리너웨이는 “왕관보석(crown jewel)처럼 보이게끔 중앙에 위치했다”고 말했죠. 하지만 언급한 ‘유턴’ 형식의 장면 이후 영화는 호텔 방과 같은 갇힌 구도에서 에이젠슈타인을 바라봅니다.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것만 같았던 에이젠슈타인이 그러지를 못하는 걸 넓은 구도에서 점점 좁아지는 구도를 통해 나타내는 거죠.

또 하나 흥미로운 장면은 에이젠슈타인의 멕시코에서의 신작 제작이 지리하게 연기됨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움직임입니다. 어느 호텔의 카페에서 이뤄지는 것 같은데 이 장면에서의 카메라는 이들의 움직임을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계속해서 이동하며 에이젼슈타인의 신작 발표가 오랫동안 쉽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어요. 카메라를 천천히 측면으로 움직여가면서 스크린을 좌우로 넓게 확장시키는 트래킹 숏은 미조구치 겐지가 <우게츠 이야기>(1953)에서 선보여 더욱 유명해진 것이기도 한데 이는 스크린을 더욱 더 늘리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하거든요. 에이젠슈타인의 슬럼프가 꽤 오래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들은 그리너웨이 자신만의 개성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도 그 바탕을 보면 선배 영화를 자양분 삼은 부분들이 꽤 많이 드러납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리너웨이의 영화는 기존 시스템에 저항을 하며 혁명을 꿈꾸는 이들의 성공과 실패를 담고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너웨이 역시 영화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배 영화와 기법들을 차용하면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피터 그리너웨이라는 개성이 드러나게끔 하고 있죠. <엑시코의 에이젠슈타인>도 그렇습니다. 영화의 아버지랄 수 있는 에이젼슈타인이 주인공을 등장하죠. 거기에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는 물론 미조구치 겐치의 롱테이크까지 취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를 통해 하는 얘기는 과거지향이 아니라 미래 지향입니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멕시코의 에이젼슈타인>은 푸틴의 호모포비아가 탄생시킨 작품이다. 성적 소수자를 두려워하고 이들을 제어하려는 푸틴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영화를 만들게 했다.” 말하자면, 개인의 투쟁인 셈인데 에이젠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멕시코의 에이젠슈타인>에 묘사되듯 에이전슈타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영화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시스템에 맞섰죠. 그와 같은 저항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멕시코의 에이젼슈타인>의 아이디어를 얻은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죠. “에이젠슈타인의 처음 세 영화와 뒤의 세 영화 – <알렉산더 네브스카> <폭군 이반 1,2>-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이 궁금했다.”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멕시코의 에이전슈타인>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에이젠슈타인의 내레이션이 꽤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은 내 영화 <10월>을 두고 ‘세계에 충격을 준 10일’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내가 멕시코에서 지난 10일은 ‘세르게이 에이젼슈타인이 충격을 받은 10일’이다.” 멕시코에서 지내기 전 만들었던 <전함 포템킨> <파업> <10월>은 개인이 아닌 러시아에서의 특정 현상을 마치 풍경처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멕시코에서 경험 이후 러시아에서 만든 후기 세 작품은 풍경보다 개인에 보다 집중한 영화였습니다. 멕시코에서의 경험이 에이젠슈타인에게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든 계기였던 셈이죠. 그래서 멕시코의 풍경을 풀숏으로 잡아 시작했던 영화는 에이젠슈타인의 얼굴에 클로즈업이 들어가는 형태로 끝을 맺습니다.

 

서울프라이드영화제
(20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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