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 <나의 딸, 나의 누나>

(언제나처럼 말로 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문장들이 거칠어요. 감안 부탁드리고 또 하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한 토마 비더갱은 고전적인 이야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의 각본 데뷔작 <예언자>는 할리우드 장르물로 인식이 되는 감옥영화를 프랑스 감옥물의 전통과 혼합해 자크 오디아르 감독에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선사했죠. 그런 인연이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를 다룬 <러스트 앤 본>과 <디판>까지 이어졌죠.  <디판>에서는 프랑스 사회에 유입된 인도인 난민이 어떻게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가는지 현실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와 다르게 <미라클 벨리에> 같은 경우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부부의 딸이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성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토마 비더갱은 장르를 가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고전적인 장르와 보편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런 비더갱을 일러 ‘그림자 사나이 the man in the shadow’라고 헤드라인에 적시했는데요. 영화의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영화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가라는 의미이겠죠.

그림자 사니아 토마 비더갱은 이제 <나의 딸, 나의 누나>로 전면에 나섭니다. 그의 첫 감독 연출작이죠. 토마 비더갱 감독은 동료 시나리오 작가인 로랑 아비톨에게서 우연히 프랑스의 컨트리 웨스턴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이야기의 시작이었다고 말합니다. 축제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을 떠올린 토마 비더갱 감독과 어느 한 사건을 겪으면서 성숙해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이는 딸의 실종을 계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로 탄생했습니다.

가족 드라마이지만, 이 영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장르는 서부극, 더 정확히는 존 포드의 <수색자>입니다. 실제로 토마 비더갱 감독은 <나의 딸, 나의 누나>를 만드는 데 있어 <수색자>를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수색자>는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유명하죠. 남북전쟁을 마치고 몇 년 후 집으로 돌아온 이든(존 웨인)은 가족과의 행복을 느낄 짬도 없이 인디언 원주민 코만치족에게 조카 데비를 납치당하고 말죠. 이후 이든은 또 다른 조카 마틴과 함께 그녀를 찾아나섭니다.

<수색자>의 이든과 마틴의 관계는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프랑수아 다미안)과 아들 키드(피네건 올드필드)를 연상시키죠. 알랭과 키드가 각각 ‘나의 딸’과 ‘나의 누나’인 켈리를 찾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는데요. 이는 토마 비더갱 감독이 인물을 통해 각 세대의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한 의도를 드러낸 것인데요. 알랭은 딸 켈리가 지하드스트에게 잡혀감으로써 그녀가 성적으로, 인종적으로 더렵혀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이 역력해 보여요. 그의 과격함은 역으로 알랭이 공포와 증오에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반면 키드는 누이 켈리를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지만, 아버지와는 좀 다른 대처를 보여주죠. 인종이나 문화에 상관 없이 순수하게 누나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아버지가 키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드는 거죠. 아버지 세대가 <나의 딸, 나의 누나>에서 보여주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적대적이라면, 아들 세대인 키드는 적당하게 거리를 둔 채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죠. 누나를 데려간 이의 본거지를 찾아 침입했다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온 이슬람 여성과 가정을 이루는 영화의 결말이 이를 보여주고 있죠.

<수색자>가 서부극 가운데서도 미국의 개척정신을 찬양하는 장르가 아닌 인디언에 대한 미국 백인의 불안을 드러낸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각광받은 이유를 <나의 딸, 나의 누나>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알랭처럼 <수색자>의 이든은 과격한 인종주의자입니다. 심지어 그는 조카 데비가 코만치족에게 잡혀가 인디언처럼 변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단죄하려고 합니다. 백인과 인디언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런 태도는 영화에서 일종의 상징적인 단죄를 받습니다.

<수색자>의 유명한 장면이죠. 데비를 구한 이든과 마틴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틴은 가족의 품이라는 집으로 들어가지만, 이든은 문턱을 넘지 못하고 다시 서부의 어딘가로 떠나죠. 서부 사나이는 그렇게 쓸쓸히 퇴장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처럼 <나의 딸, 나의 누나>의 아버지 알랭도 단죄를 당합니다. 딸을 찾지 못한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과격하게 운전을 하던 중 차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죠. 이 장면에서 차가 전복되는 장면은 흡사 서부극의 말이 격렬한 전투 속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사실 알랭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딸이 사라졌죠, 딸을 찾는 과정에서 아내와 이혼했죠, 가족이라고는 아들만 남았는데 키드는 딸을 찾기 위해 집착하는 아버지에 저항을 합니다. 정보를 입수한 아버지가 함께 가자고 하자 “NO!” 싫다고 거부감을 드러내죠.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이상을 꿈꾸며 타인과 타문화에 적대적이었던 아버지는, 더 정확히는 그 세대의 태도는 키드 세대에게는 구시대의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드는 의문이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왜 프랑스 사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의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서부극을 끌어오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힌트는 이 영화 중간중간 언급이 되는데요. 알랭과 키드가 켈리를 찾는 여정 속에 TV 화면을 통해 9.11 사건을 노출하고 있죠. <나의 딸, 나의 누나>가 배경으로 삼는 건 서양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대립이죠. 그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9.11이고요. 9.11 이후 미국은 이에 대한 복수로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공격에 나서는데요. 미국처럼 프랑스 역시도 이슬람 문화권과 난민 문제를 비롯해 갈등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죠. 서양권과 이슬람권의 대립에 대해서 프랑스는 미국과 다름 없는 상황이었던 건데요. 이에 토마 비더갱 감독은 미국의 장르인 서부극으로 프랑스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한국 개봉명과 달리 원제가 <카우보이 Les Cowboy>인 이유가 있죠.

세대별 역사에 대응하는 방식과 감정을 서부극의 장르로 우회하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한편으로 타인과 타문화에 대한 관계 맺기의 변화를 가족 드라마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데요. 알랭 가족이 켈리의 실종으로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죠. 알랭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심지어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딸을 찾는다면, 키드는 그 와중에도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알랭을 잡는 카메라는 대개 그를 단독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면, 키드는 UN 구호단체에서 사귀는 여자 친구, 그곳에서 만나는 미국인(존 C. 라일리) 등 누군가 함께 하는 과정 속에 누나를 찾아나서는 장면이 빈번하죠.

알랭의 아내이자 키드의 엄마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녀의 태도는 키드와 거의 흡사한데요. 알랭이 딸을 찾아나서느라 집을 돌보자 않자 이혼을 하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들죠. 남자 친구는 알랭처럼 프랑스인이지만, 존재감이 거의 없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알랭처럼 그 자신의 가치와 태도를 강요하지 않는 것업니다. 그러니 알랭과 다르게 타인종과의 결합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거죠. 엄마 또한, 아들 키드가 이슬람 문화권의 여인, 심지어 딸을 납치한 이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증오와 분노 없이 가족처럼 맞이해 줍니다. 이들의 태도에 이 세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가 있는 것이겠죠. 바로 새로운 신화가 필요한 셈입니다.

새로운 신화는 과거처럼 자신들의 공동체만 보수적으로 지키는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겠죠. 새로운 국가 건립, 즉 신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정이 필요합니다.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나의 딸, 나의 누나>는 아버지 알랭과 아들 키드로 이어지는 시간의 여정과 프랑스에서 시작해 파키스탄까지 가는 공간의 여정으로 신화를 구축하는데요. 이에 대한 토마 비더갱 감독의 말을 들어볼까요.

“우리가 <나의 딸, 나의 누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어느 누구도 지하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하드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이 영화에서처럼 프랑스인이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미국인처럼 구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베일이 상징처럼 된 이들도 함께 존재한다. 이게 지금 세계의 풍경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프랑스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더 나아가 새로운 나라로의 여정을 통해 베일을 쓴 여인을 만나고 가족을 구성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계다.”

 

<나의 딸, 나의 누나> GV
CGV 명동 씨네라이브러리
(201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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