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3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손아람 작가 <포레스트 검프> GV를 진행했습니다. 마침 <포레스트 검프>의 재개봉이 이뤄져 여기에 공개합니다. 정리는 이오림 자원활동가가 해주셨고요, 사진은 장혜진 포토그래퍼가 찍어주셨습니다.
허남웅(영화평론가) 먼저 이번 친구들영화제에 참여한 소감을 듣고 싶다.
손아람(작가) 놀랐다. 다른 친구분들의 이름을 보니 나를 왜 선택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영광이라 생각한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를 추천해주었다.
손아람 나에게는 인생 영화다. 처음 전화로 제안을 받았을 때 직원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포레스트 검프>요” 라고 말했다. 이 영화를 세 번 이상 보신 분이 계실 것이다. 혹시 열 번 넘게 본 분도 계신지… 그런데 나는 100번 넘게 봤다(웃음). 나는 뭐랄까, 이 영화가 단순히 ‘좋다’는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성경 들춰보듯이 본다. 주말마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서 ‘좀 씻어내야겠다’, 뭐 그런 느낌이다(웃음).
허남웅 그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손아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내가 중학교 2학년인가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재밌게 봤다. 그런데 나중에 살아가면서 이 영화에서 다루는 가치들을 계속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예술이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건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삶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이 영화는 분명히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내가 쓰는 글에도 그 영향이 녹아 있다. 내가 쓰는 글의 ‘조상님’ 같은 존재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나의 글이 세상에 작게나마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거기에는 <포레스트 검프>의 영향도 녹아 있을 것이다.
허남웅 중학생 때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극장에서 보았나, 아니면 비디오로 보았나.
손아람 하도 많이 보다보니 오히려 첫 기억은 희미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걸 내 인생 영화로 삼은 건 아니다. 나이가 든 뒤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남웅 그 감상의 변화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듣고 싶다.
손아람 어렸을 때 봤을 때는 그냥 바보의 성공기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바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면서 삶의 우연성이란 테마에 관심이 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대사가 “인생은 초콜릿 박스 같은 것이다. 열기 전에는 뭘 먹게 될지 모른다”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깃털로 시작해 깃털로 끝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의 삶에는 너무 많은 우연들이 개입한다.
그리고 영화의 플롯 자체가 우연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만약 어떤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면 개연성이 없다고 바로 욕을 먹을 것이다. 기본도 안 된 이야기라고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삶의 우연성에 대한 어떤 진실이 담겨 있어서 이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무의식과 공명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삶 자체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말이다.
허남웅 이 영화에 대해 찾아보니 원작이 1985년도에 나온 소설이다. 그때 피디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을 때 모든 제작사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공도 바보고 각 에피소드들 사이에 너무 개연성이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피디가 결국 톰 행크스에게 바로 책을 보냈다. 다행히 톰 행크스는 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했고, 피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바로 최고의 작가가 시나리오를 맡아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바로 에릭 로스다. 따지고 보면 이 제작 과정도 전부 우연인 셈이다.
손아람 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공로자는 에릭 로스이다. 그는 인간을 보는 관점이 뚜렷한, 위대한 작가이다. 이 사람이 쓴 시나리오에 저메키스 감독이 특유의 감성을 덧입혔다. 나는 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하면 저메키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캐스트 어웨이>, SF 영화 <콘택트> 등등.
허남웅 소설을 쓸 때 <포레스트 검프>에 영향을 받은 게 있다고 했다. 작가님의 소설 「디 마이너스」 같은 경우도 9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손아람 나는 어떤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개인적 삶을 같은 시점으로 보는 걸 피하려 한다. 이를테면 좌파와 우파가 나온다고 해도 개인의 삶은 그 사람의 정치성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과 분리된 인간의 관점을 지키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그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포레스트 검프의 이름인 포레스트는 KKK단의 간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히피와 흑표범단이 나오지만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떤 정치적 진영의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인간들의 관점에서 그려낸다. 그러다보니 완전히 우호적으로 그리지 않는 점도 있다. 그런 관점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았고, 「디 마이너스」에서도 그런 걸 시도하려 했다.
허남웅 이 영화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개연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다룰 때는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서 썼다고 한다.
손아람 세계관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영화이다. 보통 작가의 작업은 소재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작가의 진짜 작업은 소재 이전에 어떤 세계관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소위 ‘우파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역사를 그렸다는 것이다. 제니 같은 좌파측 인물이 병에 걸려 죽는 에피소드 등이 특히 그랬다.
손아람 그건 너무 즉물적인 발언이다. 우리만 해도 예전 민주화 세대, 소위 ‘386 세대’가 기성 제도에 편입됐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그 민주화 세대에 속하는 각 개인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사실 별개의 문제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잘 보여준다. 만약 이 영화가 역사적 사건만 그리고 그 안의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면 굉장히 볼품없는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적 필연성 안에서 우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각 개인의 삶을 보여준다. 커다란 역사적 흐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개별적 삶을 분리한 것이 이런 걸작이 탄생한 분기점이라고 본다.
허남웅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지.
손아람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포레스트 검프가 단상에서 이런 저런 말을 하려는 데 결국 실패하고 단상 아래에서 제니와 껴안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 장면은 반전 운동의 핵심을 보여준다. 역사 안에서 인간 생의 변곡점이라 부를 만한 지점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리고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장면은 포레스트 검프가 전국을 뛰어다니는 시퀀스이다. 실제로 나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다. 뛰지는 않고 걸어 다녔다(웃음). 힘든 일이 있어서 두 달 동안 전국을 걸어서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너무 답답해서 그냥 집 앞 한 바퀴를 돌고 왔다. 그런데 걷다보니 전국을 돌고 있었다. 그 여행을 하면서 포레스트 검프 생각도 많이 했다.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허남웅 그렇게 전국을 걸을 때 따르는 우군들이 있었나?(웃음)
손아람 아무 준비도 없이 걷다보니 나중에는 몰골이 좀 이상했었다. 씻지도 못하고 수염도 길고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웃음). 그렇게 하루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는데 옆방의 대학생이 밤에 날 찾아왔다. ‘제가 이번에 졸업을 하는데 고민이 많습니다. 선생님께 상담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하더라. 날 도사님으로 본 것 같다. 내가 ‘이방인’으로 보여서 자기 삶에 예외적인 조언을 해줄 것이라 기대한 것 같더라.
허남웅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에는 길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캐스트 어웨이>도 비슷한데, 저메키스의 영화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보여줄 때 카메라가 멈춰있지 않고 항상 움직인다. 저메키스 특유의 미학이다.
손아람 저메키스 영화에는 삶 자체를 가출로 보는 관점이 있는 것 같다. 동의하는 관점이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 말고 저메키스의 영화 중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손아람 로버트 저메키스 작품이라 좋아한 건 아닌데, <콘택트>도 굉장히 좋아한다. 원작도 대단히 뛰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원작은 굉장히 엄밀한 과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접근한다. 사실 좀 어렵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부분을 효과적으로 생략한 뒤 소설의 핵심 테마인 인간과 종교, 과학의 관계에 대해 파고든다.
관객 <포레스트 검프>에서 깊은 인상을 준 조연이 누구인지 듣고 싶다.
손아람 주인공이 백지와 같은 캐릭터이다보니 조연들이 특히 더 도드라진다. 우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있고, 그 반대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 댄 중위가 있다. 또는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포레스트 검프가 있고,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삶에 좌절감을 느끼는 제니가 있다. <포레스트 검프>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긴장을 만들어낸다. 굉장히 세련된 방식이다.
허남웅 덧붙이자면 원작 소설이 85년도에 나왔는데 작가가 속편을 만들었다고 한다. 속편에는 포레스트 검프가 톰 행크스를 만나는 장면도 있다고 한다(웃음). 후속편도 만들어질 뻔 했는데 톰 행크스가 속편 출연을 거부하면서 불발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속편 시나리오 기획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손아람 : 안 만들어졌으면 한다. 속편이 넘어서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다.
허남웅 100번 넘게 보았다고 했는데 다 극장에서 보지는 못 했을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포레스트 검프>를 극장에서 본 느낌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손아람 이 영화는 오늘이 아니면 다시 극장에서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 보니 집중력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집에서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다. 전래동화나 이솝우화를 읽는 기분이다. 그런데 극장에서는 스크린이라는 것, 어둠이 주는 프레임 효과 등을 경험할 수 있다.
허남웅 소설은 사람들과 같이 읽을 수 없는 장르이다. 하지만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스크린을 여러 명이서 보는, 이상한 연대감이 생긴다.
손아람 그런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유머가 그렇다. <소수의견>을 모니터링 할 때 미묘한 유머 코드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개봉 이후 사람들이 가득 찬 극장에서 볼 때는 한 명만 웃어도 그 균열이 빠르게 전파된다. 특히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뭔가 전염되는 감정을 받아들일 적극적인 준비를 한 사람들이다.
<포레스트 검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굉장히 수준 높은 유머로 무장한 작품이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볼 때는 절대 소리 내며 웃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몇 번씩 크게 웃었다. 웃음은 어떤 면에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메시지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소리 내서 웃을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극장의 관객들에게 함께 웃자며 소리 내어 웃는 것이다.
허남웅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저메키스의 영화들은 90년대 영화고, 작가님도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90년대 대중문화에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손아람 가장 예민했고, 또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가장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이건 객관적인 건 아니지만 세계 대중문화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고 생각한다. 영화, 서사, 음악 전부 그렇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90년대에 나온 모든 가능성을 재조합하면서 재탕한다는 느낌이 있다. 영화도 90년대에 모든 걸 다 쏟아낸 뒤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허남웅 앞으로의 계획, 다음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손아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얘기하면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이 자꾸 전에 말했던 계획에 대해 물어본다. 그게 괴로워서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는 못할 것 같다.
허남웅 마지막으로 관객분들께 인사말씀 부탁드린다.
손아람 : 오늘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내가 선택한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지 몰랐다.
<포레스트 검프> 정도의 영화는 영화사를 통틀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야기의 힘과 이것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이 정도 에너지를 가진 영화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영화와 함께할 시간을 내어주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포레스트 검프> GV
서울아트시네마
(2016.1.31)
와 손아람 작가님과 gv를 가지셨네요 ㅠㅠ진짜 알었으면 갔었을텐데 내용을 읽어보니 알찬 gv였네요 저는 특히 이 영화의 제니가 forrest run run 하는 장면은 볼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ㅠ
2000년대중반이후 많은 문화예술이 재탕을 하고 있단의견에도 동의합니다
특히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영화는 2011년쯤 지나고 나서부터는 재탕이 더 심해진것같습니다
이번에 한 건 아니고요 올해 1월에 했습니다. 시기를 놓쳐 쟁여두고 있다가 마침 이번에 재개봉에 맞춰 올렸습니다. ^^; 다시 봐도 여전히 좋은 작품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재개봉을 했겠죠. 예, 저도 제니가 검프에게 포레스트 런 하는 장면보면 좀 울컥하는 데가 있더라고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