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 영화 열풍이 거세다. <이터널 선샤인>은 2005년 개봉 당시 17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번 10주년 기념 재개봉을 맞아 개봉 15일째 되는 11월 19일에 10년 전의 성적을 넘어섰다. 심지어 <검은 사제들> <007 스펙터>에 이어 박스오피스 3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재개봉에 더 많은 관객이 모이는 배경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그리고 갈수록 재개봉 영화들이 많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늦었지만, 더 좋아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울수록 더욱더 깊어지는 사랑을 그린 로맨스다. 조엘(짐 캐리)은 출근길에 회사 가기를 포기하고 해변으로 향한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던 그는 우연히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뜨겁게 사랑을 나누기를 잠시, 어느 날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정을 알아보니 조엘과의 사랑이 지겨워진 클레멘타인이 관련한 기억을 삭제해버린 것.
특정 기억을 삭제하는 회사로 찾아간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같은 요청을 한다. 기억이 삭제되는 동안 조엘은 그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좋았던 기억은 차치하고 그녀와 다퉜던 경험, 막말했던 순간, 이별의 아픔까지도 모두 그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기에 클레멘타인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싶어진 것이다.
2005년 개봉 당시 <이터널 선샤인>을 보러 온 관객은 20~30대가 거의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한창 사랑에 빠졌던 연인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이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은 이 영화를 이해한 이들이 많지 않았다. 데이트용 영화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셈이다. 이제는 30~40대가 된 당시의 관객들은 지난 10년 동안 사랑과 이별을 모두 경험하면서 <이터널 선샤인>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열렬한 사랑도 유통 기한이 있다는 것, 이별 순간에는 전 연인과 관련한 기억을 모두 잊고 싶을 만큼 아프다는 것,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면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된다는 것, 그와 같은 경험이 새로운 연인을 만나 더 오래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는 것 등등. 사랑의 시야각이 넓을수록 더 공감하게 되는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이다. 예전의 관객들이 이제야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경험은 그래서 중요한 법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점에서 20대 관객들에게는 만남과 이별 등 사랑 전체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좋은 본보기다. 사실 <이터널 선샤인>은 헤어짐의 테마가 영화의 중심에 놓여도 결말은 더 나은 사랑, 즉 오랫동안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여운처럼 남긴다. 사랑과 이별과 그에 따른 교훈까지, <이터널 선샤인>은 좋은 로맨스 영화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품은 걸작이다.
흔히들 가을은 멜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좋은 로맨스 영화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사랑이란 워낙 보편적인 소재인 까닭에 차별화하는 설정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흔해 빠진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이면서 여기에 기억을 삭제한다는 SF적 설정을 취한 후 조엘이 자신의 기억에 들어가 펼치는 초현실적 풍경으로 관객의 마음은 물론 시선까지 붙들어 맸다.
그에 필적할 만한 영화가 얼마나 될까. 개봉 이후 더 많은 사람에게 회자하면서 걸작의 지위에 오른 <이터널 선샤인>은 다운로드와 VOD 서비스가 일상화된 작금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영화는 극장에서 ‘함께의 가치’를 공유하는 거대한 경험이다. 그래서 좋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변하기는커녕 <이터널 선샤인>처럼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재개봉이지만, 좋아
재개봉으로 재미를 본 작품은 <이터널 선샤인> 외에도 많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 박스오피스 섹션에는 다양성 박스오피스가 있다. 예술영화를 대상으로 한 박스오피스인데 새로 개봉한 작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터널 선샤인> 외에 <아마데우스> 감독판이 10위 안에 들며 재개봉 영화의 강세를 보여줬다.
얼마 전에는 각각 1985년과 1989년에 발표된 <빽 투 더 퓨처> 1편과 2편이 재개봉하며 화제를 모았다. 2편에서 드로리안 자동차를 개조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는 시간이 2015년 10월 21일이라는 데 착안한 이벤트였다. 주말 동안 1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마션>이 독주하는 극장가에서 짭짤한 흥행 수익을 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극장가는 재개봉이 대세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 영화 수입사 사이에서는 <이터널 선샤인>과 같은 재개봉 작품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안 그래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1/19 개봉)이 <이터널 선샤인>에 이어 개봉했고 곧이어 <영웅본색>(11/26) <쉘로우 그레이브>(11월 중) <렛 미 인>(12/3) <그녀에게>(12/31)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12월 중) 등이 줄줄이 대기 중에 있다. 익숙한 작품이지만, 극장에서 재개봉한다면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가 즐비하다.
영화 수입사 입장에서 재개봉 영화는 신작 영화보다 위험 부담이 덜한 상품으로 인식된다. 영화가 한 편 흥행하면 이득을 크게 남길 수 있는 상황에서 수입사 간의 판권 경쟁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극장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더라도 VOD 서비스로 이를 만회할 수 있으므로 신작의 수입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못마땅하거나 경쟁에 끼지 못하는 수입사들은 틈새시장을 찾아냈으니, 그게 바로 재개봉영화다.
재개봉 영화는 이미 한 차례 개봉한 터라 수입가가 신작보다 현저히 낮다. 또한, 영화를 구입하게 되면 7년 정도의 판권 기간이 보장되어 그 기간에 이뤄지는 재개봉은 비용 부담이 덜하다. 그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 다양성 영화 수입의 증가로 매주 10여 편이 훌쩍 넘는 신작이 개봉하고 있다. 블록버스터 한두 편이 전국 스크린의 반 수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여기에 재개봉 영화까지 가세하면 다양성 영화끼리의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은 불가피해진다.
좋은 영화를 찾아보는 안목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양성 영화는 마케팅 비용에만 수십, 수백억을 쏟아붓는 블록버스터와 상대할 수 없다. 대신 관객이 좋은 다양성 영화를 찾아본다면 블록버스터에 편중된 극장가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 천만 영화 한두 편이 주도하는 극장가보다 다양성 영화 수십, 수백 편이 블록버스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장이 더욱 건강함은 자명하다. 그걸 증명하는 게 재개봉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다.
시사저널
(2015.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