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서독제] <연무>(䜌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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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연기와 안개를 아울러 이르는 ‘연무 煙霧‘가 아니다. 연무(䜌舞), 즉 ‘어지러운 춤’을 의미한다. 어지러움의 근원은 극 중 형사의 내레이션이 단서로 작용한다. “누군가는 그리움에 죽고 누군가는 그리움에 살아간다.”

형사는 재개발을 앞두고 폐허가 된 연무동을 찾는다. 이곳의 어느 집에서 청년이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서다. 이를 묘사하는 최시형 감독의 연출은 무겁고 긴장감 넘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은은하게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다.

폐허와 살인 현장이라는 배경은 관계의 끝을 지시하지만, <연무>는 그와 같은 비극에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모락모락 피어 올린다. 생면부지의 여고생과 형사가 데면데면하다 점점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로 발전하는 이야기 전개가 이를 증명한다. 폐허 현장 여기저기 나뒹구는 회색의 벽돌 조각과 희뿌연 먼지가 눌러앉은 살인 현장의 물품들은 메말랐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불씨만 닿으면 확 피어오를 것만 같다.

그리움이란 게 그렇다. 마음속에 쌓아두기만 하면 삶이 메말라진다. 오히려 그리움을 삶의 동력으로 삼을 때 관계는 다시금 전진한다. 춤을 추듯 삶의 불덩이가 활활 타오른다. 그래서 온기가 넘치는 불의 이미지처럼 ‘어지러운 춤’, <연무>인 것이다.

 

41회 서울독립영화제
(2015.11.26~12.4)

<앤트맨>(An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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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맨>은 마블 ‘영화사’가 제작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의 마지막 작품이다. (3기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포문을 열 예정이다) 또한, 마블 코믹스가 원작인 영화에서 첫선을 보이는 슈퍼히어로다. 그래서 재밌느냐고?

비슷한 시기에 (마블 영화사가 아닌) 20세기 폭스사가 또 하나의 마블 코믹스를 영화화한 <판타스틱 4>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재밌다. 캐릭터는 다르지만, 똑같이 마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면서도 <앤트맨>과 <판타스틱 4>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낸 이유는 무엇일까?

우주에 이어 마이크로 세계까지

스콧 랭(폴 러드)은 전직 해커다. 악덕 기업의 정보를 해킹해 골탕을 먹였다가 감옥에 다녀왔다. 무직 신세가 된 그는 친구들의 꾐에 빠져 부호의 금고를 털 모의를 한다. 철재 금고문을 따는 데 성공, 문을 열자 그곳에는 짜잔! 거액 대신 딸랑 슈트와 헬멧만이 놓여 있다. 이것이라도 챙기자며 몸에 착용한 순간, 스콧은 개미(Ant) 크기로 줄어든다. 때마침 헬멧으로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 “자네 ‘앤트맨’이 될 생각 없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 몸을 자유자재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핌 입자를 개발한 과학자다. 그는 오랫동안 핌 입자의 성공 여부를 비밀에 부쳐왔다. 악용될 경우, 세계평화가 손상될 소지가 다분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가 키웠던 제자가 이 사실을 눈치채면서 또 다른 핌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핌은 이를 막기 위해 스콧에 주목하고 스콧은 핌의 제안을 받아들여 앤트맨이 되기로 결심한다.

<앤트맨>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뉴페이스’이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확장이다. <어벤져스>의 히어로들이 지구를 수호하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무법자들이 우주를 누볐다면 <앤트맨>의 스콧은 마이크로 세계를 점령한다. 앤트맨 슈트를 입은 스콧이 하늘을 나는 개미를 비행기로 불개미들을 공병대로 삼아 열쇠 구멍을 넘나들고 좁은 하수관을 돌격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애들이 줄었어요>(1989)가 떠오른다. <앤트맨>의 부제를 붙이자면, ‘슈퍼히어로가 줄었어요.’

실제로 <앤트맨>은 가족 코미디를 지향하는 <애들이 줄었어요>를 슈퍼 히어로 버전으로 바꾼 듯하다. 앤트맨이 개미 크기로 줄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장난감 열차는 고질라만큼이나 거대하고 위협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앤트맨>의 카메라는 중간중간 실제 세상의 크기로 이를 비춘다. 갑작스러운 시선의 변화에 따른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란,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수준이다.

볼거리가 화려한 <어벤져스> 시리즈와 스케일이 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비해 <앤트맨>은 귀엽고 깜찍하다. <앤트맨>이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지향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다.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부인에게 이혼당하고 딸조차 함께 할 수 없는 스콧에게 앤트맨의 활약은 아빠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일종의 생계형에 가까운 슈퍼히어로의 사연을 다룬 <앤트맨>은 결국 잃어버린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이야기다.

그것이 어디 피를 나눈 가족에게만 해당할까. 마블 코믹스 원작에서 앤트맨은 어벤져스의 오리지널 멤버였다. 행크 핌 박사는 스콧 랭에 앞서 1대 앤트맨으로 활약하며 헐크, 토르 등과 함께 어벤져스를 결성했다. 그와 다르게 영화는 어벤져스 멤버가 소속된 국제평화유지기구 쉴드와 대립각을 세운 핌의 사연을 강조한다. 대신 2대 앤트맨 스콧이 어벤져스와 힘을 합칠 것이라는 암시를 드러내며 튀는 구석 없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서사로 녹여낸다.

<판타스틱 4>에는 없고 <앤트맨>에는 있는

원래 <앤트맨>의 연출을 맡았던 이는 <뜨거운 녀석들>(2007)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의 에드가 라이트였다. 원작의 열렬한 팬이었던 에드가 라이트는 마블 영화사에 먼저 이 작품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며 시나리오 작업은 물론 캐스팅까지 진행했다. 그는 스콧의 사연에 집중한 지금의 <앤트맨>과 다르게 핌에 초점을 맞춰 각색 작업에 들어갔다. ‘<앤트맨> 비긴즈’를 구성한 셈인데 이는 마블 영화사가 원한 그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달라, 에드가 라이트는 촬영을 앞두고 ‘창작의 견해 차이’를 이유로 <앤트맨>에서 하차했다. (에드가 라이트는 프로듀서와 시나리오 작가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이 프로젝트에 무려 5년의 세월을 바친 에드가 라이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마블 영화사가 감독의 개인적인 감정을 고려할 만큼 너그러운 회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마블 영화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인크레더블 헐크>(2008)에서 배너 박사를 연기한 에드워드 노튼과 <아이언맨> 1편과 2편의 존 파브로 감독이 창작권을 주장하다가 하차 된 일화는 유명하다.

마블 영화사의 야망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수천 개가 넘는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를 기반으로 절대 끝이 나지 않을 시리즈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모을 계획이다. 그런데 감독이 원하는 아이디어를 받아준다? 그랬다가는 방대한 마블의 세계관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진다. 핌 박사와 같은 ‘늙다리’를 전면에 내세웠다가는 젊은 슈퍼히어로들이 주축이 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균형이 깨질 것은 자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마블 영화사의 선택은 단호했다. ‘감독이 말 안 들어? 그럼 잘라!’

에드가 라이트에 이어 <앤트맨>의 메가폰을 이어받은 감독은 페이튼 리드다. 이 이름을 듣고 떠오르는 영화가 있나? <예스맨>(2008) 정도가 알려진 축에 속하지만, 짐 캐리가 출연한 작품으로 더 많이 기억된다. 그동안 마블 영화사에서 작품을 만들었던 이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 많다. 앨런 테일러가 어떤 영화의 감독인지 아시는 분? 별로 없을 것이다. (정답은 <토르: 다크 월드>(2013)다.) 마블 영화사는 인지도가 높지 않고 제작사의 요구를 잘 받아들일 감독을 선호하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안정되게 이끄는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폭스사는 마블 코믹스가 영화 사업에 뛰어들기 전 <엑스맨>과 함께 <판타스틱 4>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슈퍼히어로 영화화 경쟁에 뛰어들었다. <엑스맨> 시리즈는 여전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판타스틱 4>(2005)는 예전에 한 번 심하게 말아먹은 적이 있다. 이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승승장구를 지켜본 20세기 폭스사는 그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마블 코믹스 최초로 팀 개념을 도입한 <판타스틱 4>의 리부트를 결정했다.

야심 찬 행보에 걸맞게 감독으로 발탁한 이는 <크로니클>(2012)로 실력을 인정받은 조쉬 트랭크. 그는 <크로니클>에서처럼 10대들이 초능력을 갖게 됐을 때 겪는 혼돈을 바탕으로 <판타스틱 4>를 만들겠다며 기세등등했다가 원작 팬의 비난에 직면했다. 가족 드라마의 요소가 큰 원작을 해칠 우려가 있고 백인으로 설정된 휴먼 토치를 영화에서는 흑인으로 변경한 것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조쉬 트랭크와 영화 팬들의 설전이 이어졌고 그 불똥이 20세기 폭스사와 감독 간의 설전으로 번졌다. 영화는 원작의 정수를 살리지도 못하고 감독의 세계관이 제대로 반영되지도 못한 작품으로 전락했다.

<판타스틱 4>는 제작사가 감독을 적절히 견제하지 못할 때 거대한 프로젝트가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그에 반해 <앤트맨>은 기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코믹한 슈퍼히어로, 가족 친화적인 마블 영화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에드가 라이트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결과적으로 마블 영화사의 판단은 옳았다. <판타스틱 4>도 어서 빨리 마블의 품으로 돌아와 코믹스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시사저널
(2015.9.1)

<아메리칸 울트라>(American Ultra)

AMERICIANULTRA

첩보물이 변하고 있다. 올해 개봉해 많은 관객을 모았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와 <스파이>는 첩보물이면서 심각하고 진지한 대신 코믹함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 또 한 편이 가세했다. ‘병맛’을 지향하는 <아메리칸 울트라>다.

적을 잃은 첩보물

마이크(제시 아이젠버그)는 딱히 인생의 목표가 없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낙이다. 그에게 이루고자 하는 것이 생겼다. 여자 친구 피비(크리스틴 스튜어트)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이다. 그녀가 왜 자신과 사귀는지 의문이지만, 피비가 없었으면 마이크는 벌써 폐인이 됐을지 모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멋진 프러포즈를 상상하는 동안 의문의 여자가 접근해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마이크의 눈빛이 변하고 마침 그를 습격한 괴한 2명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자신도 모르는 괴력에 놀란 마이크에게 의문의 여자는 그를 가리키며 자신이 아끼던 CIA 요원이었다는 얘기를 꺼낸다. 마이크의 머릿속에서 그와 관련한 기억이 뜨문뜨문 되살아난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울트라’로 불린 인체 실험 프로젝트를 모티브로 한다. 냉전 시절, CIA는 미국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를 잡아 쉽게 자백하도록 인체에 약물을 투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이것을 좀 더 발전시켜 CIA 요원들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토록 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정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을 발휘하는 요원이 바로 ‘아메리칸 울트라’인 셈이다.

이 모티브를 <아메리칸 울트라>에 앞서 활용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끈 작품이 <본> 시리즈였다. 실제로 <아메리칸 울트라>에서 코믹함을 증발시키면 남는 건 ‘제이슨 본’ 신화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이유 없이 쫓기던 중 상대방의 정체가 자신을 인간병기로 키운 아군임을 깨닫고 맞서는 이야기 말이다. 결국, 내부의 싸움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할리우드는 그들이 ‘악의 축’이라고 일컫는 주적을 악당 삼은 첩보 액션물로 미국의 힘을 과시해왔다. 미소 갈등이 절정이던 1980년대에는 <람보> <코만도> <다이하드>와 같은 ‘하드 바디 Hard Body’ 영화가 득세했다. 구(求)소련이 붕괴하면서는 표적을 아랍의 테러리스트로 옮기자 <트루 라이즈> 같은 흥행몰이를 했다. 그런데 9.11을 전후해 미국의 승리로 이라크전이 종식되고 오사마 빈 라덴마저 제거되면서 할리우드는 그럴싸한 악당을 잃고 말았다.

지금은 중국과 동북아 정세를 두고 앙숙 관계가 아니냐고? 농담하나, 할리우드가 중국 시장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모르나. 해외영화 수입을 1년에 30여 편 정도로 제한하는 중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할리우드고 뭐고 국물도 없다.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중국에 잔뜩 엎드려 앞으로 더 많은 영화를 수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고 임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서 할리우드 첩보물은 내부 갈등에서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요는 할리우드가 주도하는 첩보물이 갈 곳을 잃었다는 얘기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건재하고 곧 007의 24번째 편 <007 스펙터>가 개봉을 앞두고 있지만, 슈퍼히어로물이 주도하는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첩보물은 이제 한물간 장르다. ‘잉여’가 되었다. 더는 효용 가치가 없거나 필요 없는 것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할리우드는 새로운 첩보물을 모색한다. 그의 징후 같은 작품이 <아메리칸 울트라>를 위시한 ‘코믹’ 첩보물이다.

‘병맛’ 첩보물

잉여는 다시 쓸모 있는 것이 되기 위해 기존의 상식과 규범을 벗어나려 발버둥 친다. 그 결과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 우선 <아메리칸 울트라>의 마이크 같은 캐릭터가 그렇다. 기존 첩보물의 기준에서 보면, 마이크는 서류전형에서 걸러지는 부적격자다. 제이슨 본처럼 머리 회전이 빠르기를 해, 이단 헌트처럼 체격이 좋길 해, 제임스 본드처럼 슈트가 어울리길 해, 임무 수행 중 방해라도 되지 않으면 다행인 ‘잉여 인간’이다.

그런 캐릭터가 첩보물의 주인공을 맡으면 자연스럽게 코믹한 분위기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말쑥한 옷차림에 카리스마 넘치는 요원이 산발 머리에 멍한 눈을 한 마이크를 찾아와 자네는 최고의 CIA였어, 라고 말하면 관객의 입에서는 웃음부터 새 나오지 않겠는가. <스파이>가 많은 관객에게 웃음을 줬던 이유도 다르지 않다. 내근직에 어울릴 법한 XXL 체형의 여자 요원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가 현장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전복의 쾌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캐릭터는 우선으로 극 중 같은 편 내부의 선입견을 잠재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CIA가 무슨 이유로 마이크의 기억을 지우고 심지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는지 자세한 이유는 생략한다. 이는 역으로 마이크의 존재가 CIA의 위상을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거리의 싸움꾼 신세였다가 비밀정보기구의 첩보원 테스트를 받으러 온 <킹스맨>의 애거시(태런 애거트)가 출신 성분 때문에 내부의 반발을 샀던 맥락과 궤를 함께한다.

내부의 편견과 알력을 이겨내고 <아메리칸 울트라>의 마이크(와 <킹스맨>의 애거시, <스파이>의 수잔 쿠퍼)가 획득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무엇보다 유능한 첩보원으로서의 인정이다. 기억을 강제로 삭제당한 채 잉여로 살아가던 마이크는 그를 반대하는 CIA의 모든 공격을 이겨내고 다시금 요원이 되는 데 성공한다. 이참에 피비와 짝을 이뤄 오랜만에 현장에서 활약을 펼치는 마이크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첫 장면의 어리숙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진다.

그런 의도였을 테다. 이제 할리우드의 첩보물은 이미 존재하는 패러다임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잉여’에 주목한바, 새로운 첩보영웅을 얻게 됐다. 물론 이들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해서 첩보물이 단숨에 트렌디한 장르로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을 찾는 것이 과제이지만, <인터스텔라>의 그 유명한 대사를 살짝 변형하면, 할리우드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시간문제이기는 해도 ‘병맛 첩보물’의 유효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을 참작하면 쉽지 않은 과제다. 잉여의 문화학이랄 수 있는 ‘병맛’이 유행이 되면서 그것이 또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아메리칸 울트라>는 <킹스맨>이 제시한 새로운 첩보영웅과 <스파이>가 제공한 뜻밖의 코미디를 고루 갖추고 있되 이를 합쳤을 때 발생하는 폭발력에서는 다소 못 미치는 인상이다. 할리우드 첩보물이 이 과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진화를 이루어낼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사저널
(2015.8.25)

한국 대중영화의 작가 전략

veterna

최근 3년간, 한국영화가 가장 흥미로웠던 시기는 여름이었다.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가장 많이 몰리는 시즌이라서가 아니다. 재미와 더불어 비상식과 비도덕과 불공정의 가치가 주류가 된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의미한 메시지를 품고 있어서다.

올여름 극장가의 흥행을 주도한 최동훈 감독의 <암살>과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그렇다. <암살>은 일제강점기 중 1933년을 주요한 배경으로 친일파를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의 활약을 그렸다. <베테랑>은 돈과 권력만 믿고 악행을 거듭하는 재벌 3세에 맞선 베테랑 형사의 고군분투가 중심에 선다.

두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무겁고 심각해 직설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기 힘들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현재 한국의 원흉이라는 점에서 외면해서는 안 되는 소재다. 이에 최동훈과 류승완은 우회의 전략을 취하니, 바로 할리우드식 장르다.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을 표방했던 <도둑들>(2012)에 이어 최동훈이 <암살>에서 소환한 할리우드 영화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다. 팀 체재로 임무를 수행 중 내부 분열이 발생하고 사면초가에 몰린 주인공이 이를 전화위복 삼아 멋지게 해결한다는 전개 구조는 ‘일제강점기 버전의 <미션 임파서블>’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베테랑>은, 더 정확히는 <베테랑>의 서도철(황정민) 형사는 아메리칸 뉴 시네마에서 빛을 발했던 범죄물의 반(反)영웅 캐릭터를 떠오르게 한다. 범인만 잡는다면 법질서 따위 안중에도 없는 <프렌치 커넥션>(1971)의 도일(진 핵크만)이나 악인의 이마에 총구부터 들이미는 <더티 해리>의 해리(클린트 이스트우드)가 2015년 한국 땅에 환생한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관객이 흥미를 동할 만한 이야기 구조와 매력적인 캐릭터, 여기에 눈을 현혹할 만한 액션이 더해진 <암살>과 <베테랑>은 여름 극장가에 더할 나위 없는 오락물이다. 사실 지금 언급한 요소들은 이 두 영화에서 기능상 ‘호객행위’에 가깝다.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의 기능에 우선 충실하되 기저에서 이 사회를 향한 감독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전달되게끔 역할도 무리 없이 수행한다.

최동훈과 류승완은 흥행이 절대적인 대기업 제작사 위주로 돌아가는 한국 영화산업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들이다. 연출의 변에서 그와 같은 의도는 잘 드러난다. <암살>의 최동훈 왈,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지만, 시대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다르게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다.”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관람 후 쉽게 감정이 증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닌, 오래도록 시원한 쾌감과 통쾌함, 잔상이 남게 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랐다.”

실제로 이들 영화는 기록적인 흥행에만 머물지 않고 스크린 속 이야기와 관련한 현실의 담론을 매일 같이 만들어내고 있다. <암살>의 경우, 극 중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 1,900명이 넘는다’(오마이뉴스)와 같은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다큐멘터리 <여성독립운동사>(EBS)가 TV로 방영되는 등 여성 독립운동가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베테랑>도 이에 못지않다. 극 중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악행을 연상시키는 실제 사건에 대한 기사 ‘영화 베테랑에 영감을 주었을 실제 사건 3가지’(허핑턴포스트코리아)가 보도되면서 네티즌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다. 재벌들의 갑질이 도를 넘어 사회 문제가 되는 시점에서 ‘재벌 그룹 대마초 파문’, ‘SK 최철원 씨 맷값 폭행 사건’, ‘한화 김승연 회장 아들 대신 보복 폭행’ 등 과거의 사례가 다시금 언급되며 이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타임라인을 달구고 있다.

암적인 현실을 소재로 끌어와 오락물로 개비하는 방식은 지난 3년 동안 여름 시장의 한국영화에서 두드러진 점이다. 2013년의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 2014년의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와 <해무>, 2015년의 <암살>과 <베테랑>까지, 이들 영화는 사회 비판 기능을 장착한 오락물로 꽤 많은 ‘비평’ 담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지금의 <암살>과 <베테랑>처럼 ‘사회’ 담론을 형성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설왕설래는 있었지만, 스크린을 넘어 우리가 발붙인 현실에 적용할 만한 논의를 사회 전반으로 이끌기에는 무리였다.

이건 작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소재의 현실성과 추상성의 차이다. 각각 SF와 재난물의 장르를 두른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는 기득권 세력이 견고하게 방패를 두른 시스템의 파괴를 권장한다. <설국열차>는 미국 백인 주도의 지배 체계를 동양인과 흑인의 결합에 따른 신인류에게로 넘기고, <더 테러 라이브>는 일용노동자의 사과 요구조차 받아주지 않는 정치세력의 구태를 향한 개혁의 메시지를 ‘테러’라는 공격적인 형태로 일갈한다.

새겨들을만한 주장이지만, 사회적으로 적용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영화적인 은유가 강한 탓이다. 부와 인종에 따라 계급이 정해지는 사회 구조를 기차의 칸으로 적용한 <설국열차>의 설정은 공감할 만하되 부조리를 파괴하는 방식은 워낙 급진적이어서 영화적인 해결책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더 테러 라이브>도 마찬가지로 국회가 파괴되는 결말은 통쾌한 것이되 너무 호전적이라 현실적인 느낌은 부여하지 못했다.

<군도>와 <해무>는 ‘전복’이 테마였다. 1862년(철종 13년)과 1998년을 각각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군도>와 <해무>는 양반의 착취와 탐관오리의 학정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선장, 즉 지배세력의 탐욕을 당대 사회를 비극으로 이끈 원인으로 접근한다. 다시 말해, 과거를 우회해 현실을 비판하는 <군도>는 민중 봉기를, <해무>는 살부(殺父)를 통해 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설파한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한 태도이지만, 그처럼 실천하기에는 구체적이라기보다 개념 설명에 가까워 사회적인 논의로까지 번지지는 못했다.

<암살>과 <베테랑>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취한 소재도 그렇거니와 결말에는 질문을 던져 관객이 사고토록 하고 종국에는 현실 참여를 유도한다. <암살>의 결말은 김구의 명을 받고 암살단을 조직한 독립군과 임시정부대원이 친일파 강인국(이경영)과 조선주둔군사령관을 제거하는 부분에서 끝을 맺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최동훈은 독립군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염석진(이정재)을 심판하는 데 20여 분의 시간을 더 할애한다.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염석진은 경성 거리를 걷던 중 안옥윤을 보고는 서둘러 몸을 피하던 중 후미진 골목에 들어선다. 이때 자신이 사지로 몰았던 독립군을 만나게 되고 가슴에 총을 맞은 염석진은 시내에서 별안간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벌판으로 바뀐 공간에서 숨을 거둔다. 공간을 왜곡한 의도적인 편집이다.

이 장면이 판타지로 작용하는 것은 염석진과 같은 친일파가 영화와는 달리 현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까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빌붙어, 해방 후에는 미 군정에 꼬리를 흔들어 부를 축적하고 나라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친일파와 후손의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 그러니까, 영화 속 염석진이 죽어간 허허벌판이 단순히 판타지로만 존재해서는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틀어진 역사의 제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그런 맥락에서 <베테랑>의 결말도 흥미롭다. 서도철 형사가 재벌 3세 조태오를 체포하는 장소는 명동 한복판이다. 자신의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죄 없는 화물차 노동자를 반(半)죽음 상태로 몰고 간 조태오는 돈과 권력으로 이를 무마하려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동자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주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고위층의 회유와 압력을 이겨낸 서도철은 많은 시민이 보는 앞에서 조태오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돈과 ‘빽’이 없다는 이유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이 순간만큼은 통쾌함 그 자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함에도 이 당연한 사실이 특정 계층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베테랑>의 결말은 단순히 쾌감의 감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조태오와 같은 재벌가의 크고 작은 비리와 범죄가 감춰지고 감싸지는 상황에서 이를 심판하는 공간이 광장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광장은 사방이 뻥 뚫린 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민주적인 사회의 모습일 터다. 류승완은 그와 같은 공간의 미학을 통해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용되는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재미와 교훈을 일거양득 하는 두 영화의 방식은 ‘전략’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불합리한 사회 문제를 소재로 끌어와 이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를 높이는  <암살>과 <베테랑>의 제작과 배급이 한국 영화산업의 고질적인 문제인 수직계열화를 주도한 CJ와 쇼박스라는 점에서 그렇다. 최동훈과 류승완은 제작사가 원하는 흥행 가치를 만족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이들 지배 계층의 가치에 반하는 메시지를 적절히 녹여 넣어 작가(Auteur)의 능력을 다시금 발휘했다.

이는 그들의 능력이면서 최동훈, 류승완과 같은 작가들이 축적한 노하우이기도 하다. 내가 최근 3년 동안 여름 시장의 한국영화가 흥미롭다고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국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는 거대 자본을 끌어와 흥행이라는 보수적인 숫자 놀음과 시스템 파괴라는 진보적인 가치가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군도>와 <해무>는 국내 관객에게 익숙한 사극과 시대극의 틀 속에서 민란과 살부라는 좀 더 직접적이면서 전위적인 행동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암살>과 <베테랑>은 한국 대중영화의 또 다른 장(章)을 펼쳐 보인다.

한국 대중영화의 작가 전략은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공룡 제작사가 감독의 도드라진 개성을 뭉뚱그리고 다양성을 일괄적으로 표준화하는 환경 속에서 <암살>과 <베테랑>과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영화 팬의 입장에서 얼마 되지 않는 즐거움이다. 2016년에는 어떤 한국영화의 오락물이 흥행을 주도하면서 사회적인 담론을 형성할까. 이와 같은 기운을 이어갈 수 있는 영화가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ARENA HOMME
2015년 9월호

<러브 앤 머시>(Love & Mercy)

lovemercy

<러브 앤 머시>는 서프 음악으로 유명한 비치 보이스의 프런트 맨 ‘브라이언 윌슨’을 다룬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여름에 특히 청량하게 톡 쏘는 ‘서핀 유에스에이 Surfin USA’를 떠올릴 테다. 하지만 영화는 그와 같은 분위기를 재현할 생각이 눈곱 만큼도 없다.

<러브 앤 머시>를 연출한 감독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빌 포래드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 <브로크백 마운틴>(2006),<노예 12년>(2014), <와일드>(2015) 등 영화적 분위기는 정적이지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작품들에 프로듀서로 참여해 명성을 얻었다.

원래 빌 포래드는 <러브 앤 머시>에 처음부터 관여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시나리오에 대해 조언을 한 것을 계기로 연출까지 맡게 됐다. 원 시나리오는 브라이언 윌슨의 일대기를 다뤘는데 빌 포래드가 판단하기에 안일한 구성이었다.

브라이언 윌슨이 뮤지션으로서 뛰어났다는 건 웬만한 음악 팬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비치 보이스의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평가받는 ‘펫 사운드 Pet Sound’의 제작 과정에 얽힌 비화, 무엇보다 그 당시 브라이언 윌슨이 정신적으로 겪었던 고통과 이후 그와 얽히는 유진 랜디 박사와 멜린다 레드베터와의 관계를 파고드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접근이었다.

빌 포래드는 멤버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는 젊은 시절의 윌슨(폴 다노)을 한 축에,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중년의 윌슨(존 쿠삭)을 한 축에 각각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인물의 내면에 깊게 들어간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뮤지션을 다룬 음악영화에서는 일찍이 활용한 적 없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다시 말해, 원안을 제시한 장본인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던 셈이다. 메가폰까지 잡게 된 빌 포래드는 오프닝에서부터 <러브 앤 머시>에 대한 연출자적 야망을 선언적으로 제시한다. 비치보이스의 히트곡 실황 장면을 신경 다발이 끊어진 것처럼 파편적인 편집으로 아주 짧게 제시한 후 침대 위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중년의 윌슨을 비추는 것.

한때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윌슨이 왜 저 지경이 된 것일까? 영화는 20년 전인 1960년대로 훌쩍 건너뛰어 미국의 가장 인기 있는 밴드 비치 보이스를 이끄는 젊은 시절의 윌슨을 비춘다. 근데 젊은 윌슨은 중년의 윌슨 못지않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젊은 윌슨은 단순히 인기 많은 뮤지션으로 자신의 위치가 정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젊은 윌슨은 라이벌로 여기던 비틀스의 음악에 자극을 받고는 이를 능가하는 음악을 만들고자 의욕을 불태웠다. 이는 한편으로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가족, 특히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가족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아버지는 윌슨이 실험적인 음악에 몰두하자 자신이 비치 보이스의 프런트 맨 인양 서프 뮤직으로의 회귀를 주장, 아니 강요했다. 새로운 음악 창조에 대한 압박감,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마약을 손에 대기 시작한 윌슨은 내적으로 점점 무너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윌슨은 자신이 의도한 음악에 가까워질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축 가라앉은 <러브 앤 머시>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장면은 윌슨이 스튜디오에서 ‘펫 사운드’ 작업을 할 때다. 고정된 쇼트를 주로 구사하던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만큼은 이례적으로 카메라를 360도 팬 하며 우주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당시 윌슨이 느꼈을 심정이 그러했으리라. 앨범을 만든다는 건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인데 그 결과물이 독보적이었정도로 만족할 만한 작업이었고 평가도 최상급이었다. 이를 고려하면 윌슨에게 ‘펫 사운드’는 온 우주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이를 위해 영화는 16mm 카메라를 사용하고 리허설 없이 촬영에 임한 까닭에 그 어떤 장면보다 생생하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그렇다면 영화 제목은 ‘러브 앤 머시’보다 ‘펫 사운드’가 더 어울리는 게 아닐까. 제목 <러브 앤 머시 Love & Mercy>는 브라이언 윌슨이 1988년에 발표한 앨범 ‘브라이언 윌슨’의 타이틀 곡에서 가져왔다. 당시 이 곡은 유진 랜디(폴 지아메티)와 함께 작업했던 곡으로 앨범에 표기됐었다. 하지만 유진 랜디는 윌슨을 치료하고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강제적으로 관리했을 뿐 아니라 작업물의 권리와 수익마저 쪽쪽 빼먹었던 문제가 있는 인물이었다. (후에 유진 랜디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은 ‘러브 앤 머시’에서 삭제됐다!)

그런 윌슨을 지옥 같은 삶에서 구원한 것은 멜린다 레드베터(엘리자베스 뱅크스)였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사랑이었다. 멜린다의 희생 어린 ‘사랑과 자비’가 없었다면 브라이언 윌슨의 삶은 이 영화가 묘사하는 젊은 시절의 윌슨으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굳이 2인 1역을 통해 윌슨을 묘사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젊은 시절의 윌슨이 아버지로부터, 밴드로부터 독립을 꾀했던 인물이라면 중년의, 지금의 윌슨은 멜린다와 ‘함께’의 가치로 제2의 삶을 누리는 중이다. 독보적인 뮤지션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삶까지, <러브 앤 머시>는 브라이언 윌슨의 음악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의 인생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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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