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브로닷컴

사이트를 개설하였습니다. 남브로닷컴(www.nambro.com)입니다. 아직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보시는 데 큰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기존의 허남웅닷컴(www.hernamwoong.com)도 운영을 합니다만, 업데이트는 이제 중단하고 기존 자료 보관용으로만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허남웅닷컴을 찾아주셨던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비록 이곳에서는 새로운 글과 그림을 볼 수 없겠지만, 남브로닷컴에서 더 나은 환경으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는 남브로닷컴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한국영화계 결산

kimtaeri

(원래 결산용 기사는 아니었어요. ‘2016년 한국영화의 새로움’에 대한 콘셉트로 쓴 거였는데 결산으로도 어울릴 것 같아 소개합니다.)

좀비물
좀비 영화는 한국에서 마이너 중 마이너에 속하는 장르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설정, 온갖 상처와 병균을 이식한 듯한 외양 등이 현실 친화적인 이야기에 익숙한 한국 관객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다가왔던 탓이다.

한국에서 좀비를 소재로 한 블록버스터 영화 <부산행>이 제작된다고 하자 기대감보다 우려가 앞섰다. 100억원 대의 제작비로 마이너한 장르를 만든다? 미친 거 아냐!

근데 미친 게 아니었다. 칸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상영 이후의 <부산행>을 향한 외신의 호평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역대 미드나잇 스크리닝 상영작 중 최고다!” 이제 <부산행>을 향한 우려는 기대로, 흥행을 넘어 과연 얼마의 관객을 기록할 수 있을지에 모였다.

<부산행>은 결과적으로 1,2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KTX라는 한국의 익숙한 배경에, 흐느적 걷는 기존 좀비와 다르게 우샤인 볼트에 버금가는 스피드의 좀비로 볼거리를 강화하고, 헬조선의 현실을 메시지로 장착하니 전국은 그야말로 <부산행> 열풍이었다.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지금 충무로의 제작사들은 그동안 창고에 버려둬 놓았던 좀비 영화 시나리오를 찾느라 혈안이 된 상태라고 한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좀비 영화가 <부산행>을 터닝포인트 삼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신분 상승했다.

곽도원
곽도원에게는 2016년이 배우 경력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명품 조연, 씬 스틸러 등으로 대중에게 기억되던 그가 <곡성>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연기한 까닭이다.

<곡성>이 개봉하기 전까지 곽도원이 상업영화를 이끌 주연으로 확신한 이는 이 영화를 연출한 나홍진 감독밖에 없었다. <곡성>을 제작한 곳은 할리우드의 6대 메이저 제작사 중 한 곳인 20세기 폭스였다. 나홍진 감독에게 영화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지만, 딱 하나 곽도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했다. 그동안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없어 영화를 책임질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것이 이유였다.

곽도원 본인도 자신이 <곡성>의 주인공으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오판이었다. <곡성>은 마을을 뒤덮은 정체불명의 전염병 와중에 이상 징후를 보이는 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사연을 다뤘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부모의 사연은 단순히 영화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세월호 사태를 비롯하여 각종 안전 사건 사고가 빈번한 한국에서 부모들이 갖는 심정이란 <곡성>의 곽도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곽도원의 푸근한 인상은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별안간 자신의 가정에 닥친 사건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하지 못하는 행동은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이런 역할에 잘생긴 얼굴과 긴 기럭지를 가진 스타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게 말이 되나. 많은 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곽도원은 <곡성>으로 멋지게 주연 신고식을 통과했다.

김태리
김태리가 누구야?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아가씨>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그녀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중은 초록 검색창을 경쟁적으로 공략했다. 그래도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아가씨>로 장편 영화에 데뷔하기 전까지 김태리의 영화 경력은 몇 편의 단편 출연이 전부였다. 햇병아리가 같은 연기자가 박찬욱 같은 대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것도 모자라 주인공까지?

그녀가 <아가씨>에서 연기한 인물은 숙희다.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재산을 훔치기 위해 백작(하정우)과 사기를 벌이는 내용이다. 실상은 히데코와 사랑에 빠져 남성적인 시스템을 탈출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김태리는 김민희와 함께 한국영화사에 전례 없던 베드신을 벌인다.

성기 노출만 안 할 뿐이지 벌거벗은 몸으로 등장해 상대 배우 김민희와 동성애 연기를 벌이는 등 여기에는 표현 수위의 타협이란 게 없다. 제작 단계부터 숙희 역의 캐스팅 조건은 악명이 높았다. ‘최고 수위의 정사 연기. 타협은 불가!’ 결과는? 무려 1,500:1의 경쟁률을 뚫고 김태리가 캐스팅됐다.

가냘픈 몸매에 아기 같은 뽀얀 피부의 김태리는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거칠 것이 없다. 최고 감독과 최고 배우와 최고 스태프 사이에서 살짝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찬 모습이 전부다. 하긴 아마추어 같이 굴었다가는 최고 수위의 정사 장면을 무리 없이 소화하기는 힘들었을 테다.

그전까지 한국영화계에는 데뷔작부터 강렬한 베드신을 펼친 여배우는 배우 생활을 길게 가져가기 어렵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해피 엔드>(1999)의 전도연과 <은교>(2012)의 김고은이 이를 보기 좋게 깨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군림하고 있다. 김태리의 차기작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다. 한국영화계는 또 하나의 보물 같은 여자 배우를 얻었다.

 

노블레스맨
2016년 10월호

[2016 서독제] <거미줄>

spiderweb

웃고 떠드는 학생들, 교실 풍경은 일상적이다. 이때 심각한 표정의 담임 선생님이 교단에 서자 일순 분위기는 심각해진다. “여기서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괴롭힌 적이 있는 사람 모두 복도로 나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쁘다. 그 위로 흘러나오는 어느 학생의 내레이션. ‘00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며 때렸다’, ‘ㅁㅁ가 강제로 내 입안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등등 괴롭힘을 당한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복도에는 학생들로 가득 찬다.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려 하자 어느 학생이 묻는다. “근데 선생님은 정말 모르셨어요?”

정시온 감독의 <거미줄>은 한 학생을 괴롭히는 일명 ‘왕따’의 카르텔이 특정 몇 명의 모의가 아니라 선생님을 포함해 교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괴롭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방관한 학생도 가해자로 몰리는 상황은 왕따가 광범위하게 벌어지면서도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경위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절벽까지 몰린 피해 학생이 도움을 호소할 유일한 대상은 선생님일 터. 하지만 ‘소소한 애들 다툼’으로 일관하는 선생님의 반응은 괴롭힘의 카르텔이 ‘거미줄’처럼 촘촘해질 수밖에 배경의 정점으로 작용한다. 엔딩 크레딧의 말미에 나오는 내레이션이 의미심장하다. “XX가 내가 자기를 무시했다며 핸드폰을 뺏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지막 소통 줄마저 끊긴 피해 학생의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서울독립영화제 2016
메인 카탈로그
(2016.12.1~12.9)

<어바웃 레이>(About Ray)

aboutray

‘어바웃 레이 About Ray’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레이에 대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강조한다. 그만큼 특별한 사연을 가졌다는 얘기다. 아닌 게 아니라, 레이(엘르 패닝)가 태어날 때 불린 이름은 라모나였다. 레이는 지금 라모나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한다.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성으로 성확정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사는 엄마 매기(나오미 왓츠)와 외할머니 도도(수잔 서랜던) 커플의 입장은 좀 다르다. 엄마는 레이를 지지하지만, 막상 레이의 성확정 수술 서류에 동의하는 보호자 사인을 하자니 마음에 걸린다. 행여 레이가 지금의 선택을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와 마음이 심란하다.

동성 커플과 동거하며 딸 매기와 레이를 보살피는 도도는 손녀가 성확정수술을 하는 대신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원한다. 여성으로 태어나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나 남성의 몸으로 성전환하여 이성을 열렬히 좋아하는 것이나 여성을 마음에 품는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란 논리다.

가족 각자가 모두 자기 뜻에서 타인을 이해하다 보니 레이와 매기와 도도는 계속해서 부딪힌다. 그런데도 이들 가족의 결정이 최악으로 가기보다 현명한 쪽으로 흘러갈 거라 예상하게 되는 건 서로를 향한 사랑 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이가 학교 동급생에게 얻어터지고 집에 돌아오자 메기와 도도 커플은 그에게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비친다. 그러면서 레이의 부은 눈두덩이를 가라앉히려고 각자가 생고기를, 아이스크림을, 통조림 콩을 가져오려고 부산을 떤다.

사랑하는 마음은 같아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각자가 처한 환경과 지나온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한 시선이 달라서다. <어바웃 레이> 이전 이 영화의 제목은 ‘3 Generation’, ‘삼대’이었다. 극 중 도도 커플과 메기와 레이가 한 집에 모여 사는 구조가 그렇거니와 이들 각자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관련해 편견과 싸워 온 역사가 있다.

히피 세대로 보이는 도도는 한동안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다가 지금은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동성 커플과 함께 지내는 중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쟁이 따랐을까. 그래서 이들은 손녀 레이가 또 다른 편견과의 싸움에서 마음 고생을 할까 봐 굳이(?) 성확정 수술을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두 명의 엄마 밑에서 자란 메기는 아빠 없이 홀로 레이를 키운 싱글맘이다. 도도처럼 영화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메기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딸 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다. 이처럼 견해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가 힘들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 가족애가 굳건한 까닭에 이들 가족은 누구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둥글게 가족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족애는 <어바웃 레이>의 핵심 정서다. <어바웃 레이>가 퀴어영화로 시작하지만, 가족영화로 마무리되는 이유다. 흔히 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사회라는 보수적인 시스템에 개인 홀로 맞선 투쟁기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어바웃 레이>는 주변으로부터 성 정체성을 인정받는 차원을 넘어 성을 바꾸려는 이의 사연에 주목한다. 게다가 사연의 주인공이 16살이라는 점에서 그를 보호하고 감싸줄 가족의 역할은 클 수밖에 없다.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차이를 극복, 화해에 다다르는 결말은 레이의 이야기를 특별한 사정에서 보편적인 경우로 승화한다.

<어바웃 레이>를 연출한 게비 델랄 감독은 갈수록 변모하는 가족의 형태를 조사하던 중 영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아빠와 엄마와 아이로 이뤄진 전통적인 가족 관계는 이미 유효 기간을 다한 지 오래다. 사회가 다변화하고 개인주의가 일상화하면서 가족을 이루는 단위의 성격도 예전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졌다. 아빠가 혹은 엄마가 둘인 가족, 아빠 혹은 엄마 혼자 자식을 키우는 집안, 피가 섞이지 않아도 함께 살며 가족을 이루는 예 등, 특별한 관계이지만, 어느 가족이나 특별한 사연을 가진 까닭에 결국 보편으로 수렴되는 게 현대 가족의 개념이다. <어바웃 레이> 또한, 레이의 특별한 사연으로 시작해 가족애라는 보편으로 마무리한다. 그에 맞춰 특별하게만 보였던 레이도 영화의 끝에 이르면 가족을 이루는 평범한 구성원으로 우리 곁에 가깝게 다가와 있다.

 

NEXT plus
(2016.11.22)

[예스 24] <가려진 시간> 조건 없는 믿음의 시간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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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힘겨울수록 사람들은 판타지에 기댄다. 심리적 공허에 상상으로나마 위안과 같은 감정을 채워 넣고 싶어서일 게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물리적 시간 외에 또 하나의 마음속 시간이 존재한다. 엄태화 감독 같은 이는 이를 일러 <가려진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수린(신은수)은 외롭다. 엄마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고 새 아빠와 단둘이 섬으로 이사 왔다. 유체 이탈에 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등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는 수린에게 성민이 다가온다. 부모 잃고 보육원에서 자라 외로운 성민의 처지가 남 같지 않다. 수린은 성민과 둘만 알 수 있는 암호와 비밀 아지트를 공유하며 추억을 쌓아간다.

섬에서는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이다. 발파가 이뤄지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섬이 흔들린다. 이에 호기심을 느낀 수린과 성민과 친구들은 발파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수린을 제외하면 모두가 사라진 상태다. 아이들이 실종되자 섬은 발칵 뒤집힌다. 그 와중 수린 앞에 서른은 돼 보이는 남자가 찾아와 자신이 성민(강동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는 지금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거리에서, 지하철역사에서, 물속에서 장소 불문하고 매일 같이 죄 없는 목숨이 사라지고 있다. 더 마음이 아픈 건 그 죽음 중 상당수가 꽃 같은 청춘이라는 데 있다. 그 때문인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검은 사제들> <곡성> 등 청춘이 사지로 내몰리고 부모들이 내 자식을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야기의 영화들이 부쩍 늘었다. 세월호 참사가 남긴 정신적 외상 탓이리라. 이런 종류의 작품을 일러 ‘세월호 영화’라고 한다.

<가려진 시간> 또한, ‘세월호 영화’다.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판타지 장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성민은 그동안 ‘가려진 시간’에 갇혀 있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수린과 함께 산에 있는 동안 공사장 발파가 이뤄졌고 그 여파인지 시간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또 하나의 시간대가 생겨났다는 것. 실종된 아이들은 그대로인 채 온 세상의 사람들과 사물들이 움직임을 멈췄다는 게 성민의 이야기다.

말도 안 돼, 수린은 성민이라 주장하는 이 남자를 이상하게 여기지만, 둘만 아는 암호를 근거로 내밀자 그제야 성민임을 인정한다. 여기서 암호의 실질적인 의미는 ‘공감’에 가깝다. <가려진 시간>에서 세상이 멈춘 시간은 4시 16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4월 16일을 연상시킨다. 304명이 침몰하는 뱃속에서 수장당했고 그중 상당수가 학생이었다. 이후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세월호는 어떻게 침몰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대체 무엇을 했는지, 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다.

살아 있었다면 지나간 시간만큼 더 성장했을 희생자들. 그들은 대체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까. 여전히 그날의 참사가 믿어지지 않는 이들은 마음속 시계를 4월 16일에 맞춰두고 ‘만약에’를 상정해 지금을 상상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지옥 같은 현실을 탈출하려고 애를 쓴다. 물리적 시간은 흘러도 심리적 시간은 흐른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가려진 시간’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상태일까. 할리우드의 판타지였다면 선한 존재가 마법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겠지만, 여기는 한국, 선과 상식과 도덕이 무너진 아수라의 세계다.

참사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바라는 그 날과 혼자 나이 먹어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각각 시(時)와 분(分) 삼아 시간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건 외로운 싸움이다. 그럴 때일수록 손 내밀어 주는 이의 존재가 절실하다. 수린과 성민에게는 서로서로 믿어주는 유일한 동반자다. 이들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면 할수록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다. 수린의 아빠는 수린을 방에 가둬두고 공권력은 성민을 아이들 실종의 주범으로 몰아간다. 조건을 따져 믿음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득권자에게 수린과 성민이 보여주는 조건 없는 믿음이야말로 풀기 어려운 암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혼탁해진 이유는 믿음이 암호 수준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존재는 사회의 건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시계다. 아이와 청춘이 부재한 채 흘러가는 한국의 시간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시간’(<가려진 시간>의 영문 제목은 ‘Vanishing Time’이다!)의 시침과 분침이 하나로 만나게 될 시간의 꼭짓점은 다름 아닌 절망이다. 절망의 시간을 희망으로 되돌려 놓는 데 필요한 건 믿음,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조건 없이 손 내밀 수 있는 공감의 감정이다.

경찰과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면서도 성민이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수린이 곁에 있어서다. “너만, 나를 믿어주면 돼” 이 문장 속 ‘너’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판타지에 의지하는 시간도 결국에는 현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예스 24
(2016.11.24)

2016년 한국영화 기대작

fingersmith

<부산행> 열차에 <동주>와 함께 몸을 싣고 <터널> 속 <가려진 시간>을 지나던 중 <아가씨>를 만나 <7년의 밤>을 보내다 <곡성>에 도착, <행복이 가득한 집>을 이룬다. 이 무슨 해 귀 망측한 소리냐고? 2016년 기대되는 한국영화의 일부 목록을 연결해 만들어본 문장이다.

배경과 장르와 소재가 천차만별이지만, 한 문장으로 연결되듯 2016년 한국영화 기대작을 일별하면 트렌드가 감지된다. 여전한 스릴러물의 강세와 시대극의 유행. 특히 원작소설이 있는 스릴러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눈에 띄는 것이 2016년 한국영화의 특징이다. 언급한 작품에 더해 <살인자의 기억법>과 <밀정>까지, 2016년의 한국영화 기대작 10편을 모았다.

동주 | 감독 이준익 | 출연 강하늘, 박정민, 김인우 | 장르 드라마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사도>(2015)로 전국 600만 관객을 돌파했던 이준익 감독이 저예산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서시>나 <별 헤는 밤> 등 윤동주의 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으나 윤동주 개인에 대해서는 깊이 들여다본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스물일곱 살에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를 우상화하지 않고 그의 시 속에 담긴 삶의 궤적을 찾아 윤동주를, 그를 둘러싼 당시 일제강점기하의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밀도 있게 바라보겠다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포부다.

부산행 | 감독 연상호 | 출연 공유, 마동석, 정유미 | 장르 재난
연상호 감독은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등 잔혹 애니메이션으로 악명(?)이 높다. <부산행>은 그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이… 아니고 연상호 감독의 첫 번째 실사 연출작이다. 신경질적인 선이 돋보이는 만화는 차치하고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이 실사영화를 가능케 했다. 이상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뒤덮은 상황에서 서울역을 출발한 부산행 KTX에 탑승한 승객들이 살아남으려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하반기에는 <부산행>과 연작을 이루는 <서울역>이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할 예정이다.

살인자의 기억법 | 감독 원신연 | 출연 설경구, 김남길, 설현 | 장르 스릴러
소설가 김영하의 동명 원작을 <용의자>(2013) <세븐 데이즈>(2007) <구타 유발자들>(2006)의 원신연 감독이 연출했다.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과 싸우는 한편으로 하나뿐인 딸을 지키기 위해 일생일대의 살인을 계획한다는 줄기 내용은 소설과 영화 모두 변함이 없다. 김영하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성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적대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체분석했다. 그래서 영화화되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이 부분에 대해 공을 많이 들였다는 후문이다.

아가씨 | 감독 박찬욱 | 출연 김민희, 김태리, 하정우 | 장르 스릴러
박찬욱과 사라 워터스가 만났다. 이른바 동서양의 만남. 사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로 연출했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어느 젊은 상속녀의 재산을 노린 고아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느끼는 <핑거 스미스>가 <아가씨>에서는 일제 강점기로 배경을 옮겨 한국적으로 변용된다. 그동안 박찬욱 감독은 상업영화에서는 금기시되던 소재를 영리하게 대중화하여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아가씨> 또한 그렇다. 동성애가 전면에 나설 예정인 가운데 귀족 아가씨와 하녀 간의 계급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도 관심이 집중된다.

곡성 | 감독 나홍진 | 출연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 장르 미스터리
<곡성>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미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증명하듯 할리우드의 메이저사(社) 이십세기 폭스가 제작에 참여해 더욱 관심을 끈다. 시골 마을의 기이한 소문과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라는 정보 정도만 알려졌지만, 편집본을 봤다는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2016년의 최고작을 예고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믿거나 말거나, <황해>(2010) <추격자>(2007)에서 보여준 나홍진 감독의 선이 굵은 연출력을 고려하면 헛소문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에 더해 최근 들어 휴머니즘에 특화한 연기를 선보였던 황정민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도 관전 포인트다

행복이 가득한 집 | 감독 이경미 | 출연 손예진, 김주혁 | 장르 스릴러
이경미 감독은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안면홍조증에 걸린 주인공에 대해 평단에서는 ‘전대미문의 캐릭터’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8년, 이경미 감독은 전작의 코믹했던 드라마와 다르게 정치인 부부가 선거기간 동안 끔찍한 사건에 연루되는 정치 스릴러를 차기작으로 정했다.  <아내가 결혼했다>(2008)에서 호흡을 맞췄던 손예진과 김주혁이 부부로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 배우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의 어두운 면모에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7년의 밤 | 감독 추창민 | 출연 류승룡, 장동건 | 장르 스릴러
정유정의 <7년의 밤>은 영화화 판권 경쟁이 치열했다. 한국 소설이 부진한 가운데 독보적인 판매량을 보인 까닭에 영화화는 시간문제이었다. 여러 감독과 배우가 언급됐는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류승룡, 장동건이 출연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소녀를 살해하고 죄책감에 미쳐가는 남자와 딸을 죽인 범인의 아들에게 복수를 꾸미는 남자의 사연에 독자들은 한 번 펼친 책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소설처럼 영화도 뫼비우스의 띠로 전개되는 두 남자의 추격전을 긴박감 넘치게 재현한다면, 천만 관객은 떼놓은 당상이다.

터널 | 감독 김성훈 | 출연 하정우, 배두나, 오달수 | 장르 드라마
‘터널’이 배경이었던 한국영화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망했다는 얘기다. 공포영화 <터널 3D>가, 터널 안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액션물 <튜브>(2003)가 그랬다. 이 소재에 도전한 이가 있다. 김성훈 감독이다.  그는 <끝까지 간다>(2013)로 한국 스릴러의 새 지평을 열었다. <터널>은 터널에 갇히게 된 한 남자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휴머니즘 드라마다. 무너진 좁은 공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뺑소니 사건 하나로 2시간의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었던 장본인이 김성훈 감독이었음을 잊지 말자.

밀정 | 감독 김지운 | 출연 송강호, 공유 | 장르 액션
김지운 감독과 배우 송강호는 믿을 만한 콤비다.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까지, 만나면 늘 흥행에 성공했다. 8년 만에 이들이 뭉쳤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밀정>에서다. 독립운동단체 의열단과 그를 둘러싼 투사들의 배신과 음모가 중심인 영화다. 송강호는 조선인 일본 경부 이정출로 출연, 매국노인지, 일본 경찰에 잠입한 독립군 스파이인지 아리송한 태도로 관객과 일종의 게임을 벌일 예정이다. 할리우드의 워너브러더스가 시나리오를 보고 100억 원의 제작비 전액을 투자해 화제가 됐다.

가려진 시간 | 감독 엄태화 | 출연 강동원, 신은수, 이효제 | 장르 판타지
2016년 한국영화 개봉작 중 새로운 얼굴이 될 만한 감독은 단연 엄태화다. 단편 <숲>(2012)으로 미쟝센단편영화제 대상을 차지한 후 잉여 폐인들의 ‘현피’를 색다른 시선으로 접근한 독립 장편 영화 <잉투기>(2013)로 주목받았다. 그 여세를 몰아 흥행보증수표 강동원을 캐스팅해 상업영화 <가려진 시간>의 메가폰을 잡았다. 이야기도 신선하다. 소녀는 친구들과 산에 올라갔다가 혼자 구조된다. 며칠 후 행방불명된 친구 중 성인이 되어 나타난 소년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 이를 판타지로 풀어낼 <가려진 시간>은 새로운 영화의 발견이라는 즐거움을 선사할 예정이다.

 

시사저널
(2015.12.26)

2016년 할리우드 기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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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블록버스터에서부터 독립영화까지, 매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만든다. 이중 2016년 국내 개봉할 작품 중 놓치면 후회할 기대작 10편을 엄선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 출연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톰 하디 | 개봉 1월 14일
<버드맨>으로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거머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신작. 여기에 단 한 번도 아카데미 연기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합류했다. 곰의 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은 사냥꾼이 자신을 버리고 간 동료들에게 복수하는 내용. 디카프리오가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을지가 관심의 포인트다.

<헤이트풀 8>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 출연 사무엘 L. 잭슨, 커트 러셀, 채닝 테이텀 | 개봉 1월 중
<헤이트풀 8>을 요약하면, ’서부를 무대로 펼쳐지는 <저수지의 개들>’이다. 비밀을 지닌 8명의 방문자가 눈보라 속에 갇혀 서로를 향한 불신과 증오로 하얀 눈 위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50살을 넘어서도 악동 기질을 버리지 않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여덟 번째 작품. 타란티노는 언제나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다.

<캐롤>  감독 토드 헤인즈 | 출연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 개봉 2월 중
토드 헤인즈는 <벨벳 골드마인> <아임 낫 데어> 등으로 유명하다. <캐롤>은 그의 신작이다. 두 여성의 사랑을 1952년 뉴욕 배경에 담았다. 동성의 사랑이 이제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캐롤>은 내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자다. 토드 헤인즈는 뻔한 소재도 특별하게 만드는 재능의 소유자라는 걸 잊지 말자.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감독 잭 스나이더 | 출연 헨리 카빌, 벤 애플렉, 에이미 아담스 | 개봉 3월 중
마블의 ‘어벤져스’를 향한 DC의 반격이 시작됐다. 이야기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배트맨과 슈퍼맨이 공동의 적에 맞설 것은 확실하다. 여기에 원더우먼까지 가세한다. 바로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이다. 웃음이 넘치는 어벤져스와 다르게 깊은 우물 속으로 침전하는 듯한 저스티스 리그의 어두운 분위기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감독 루소 형제 | 출연 크리스 에반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 개봉 4월 중
<어벤져스2>는 실망이었다. 그래도 기대감이 있는 건 마블 유니버스 3기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포문을 연다. 어벤져스 멤버 중 가장 인기 좋은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투톱이다. 초인법 시행을 두고 이 둘이 충돌한다. 마블에 갓 합류한 스파이더맨이 모습을 드러낼지에 관심이 쏠린다.

<엑스맨: 아포칼립스>  감독 브라이언 싱어 | 출연 제니퍼 로렌스, 마이클 패스벤더 | 개봉 5월 중
브라이언 싱어는 ‘엑스맨’ 시리즈의 보증수표다. 싱어는 ‘어벤져스’와 ‘저스티스 리그’ 이전 슈퍼히어로가 집단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가장 균형 있는 캐릭터 배분을 보여준 감독이다. 그가 이번 ‘엑스맨’ 프리퀄 삼부작의 마지막 <엑스맨: 아포칼립스>를 끝으로 떠난다. 놓치면 손해라는 얘기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 | 출연 마고 로비, 윌 스미스, 자레드 레토 | 개봉 8월 중
슈퍼히어로물은 선한 편이 늘 주인공이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이런 통념을 완전히 뒤집는다. 배트맨을 괴롭히는 악당들이 고담 시에 총집결한다. 조커는 물론이요, 할리퀸, 데드샷, 캡틴 부메랑 등 매력적이면서 기괴한 분장의 악당이 한가득하다. ‘저스티스 리그’의 확장판으로 벤 애플렉이 연기하는 배트맨도 등장한다.

<스타워즈 앤솔로지: 로그원>  감독 가렛 에드워즈 | 출연 펠리시티 존스, 매즈 미켈슨, 견자단 | 개봉 12월 중
‘스타워즈’ 팬들은 축복받았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시작으로 매년 관련 작품이 개봉한다. <스타워즈 앤솔로지: 로그원>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첫 번째 스핀오프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와 <스타워즈 에피소드4: 새로운 희망> 사이가 배경이다. 제국군 기지 ‘데스스타’의 설계도를 훔치는 저항군의 이야기라고 알려진다.

<아노말리사>  감독 찰리 카우프먼, 듀크 존슨 | 목소리 출연 제니퍼 제이슨 리, 데이빗 듈리스 | 개봉 미정
재개봉 열풍을 몰고 온 <이터널 선샤인>의 각본가는 찰리 카우프먼이다. 그가 이번에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연극이 원작인 작품으로 무료한 일상에서 변화를 겪는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다. ‘<바톤핑크> 배경에 <사랑의 블랙홀>을 섞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1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헤일, 시저!>  감독 코언 형제 | 출연 조쉬 브롤린, 스칼렛 요한슨, 조지 클루니 | 개봉 미정
코언 형제는 손만 댔다 하면 걸작을 만드는 괴물이다. <헤일, 시저!>는 스타의 가십이 언론에 알려지기 전 미리 손을 써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하는 해결사가 주인공이다. 코언 형제의 영화답게 상황이 잘 풀릴 리 없다. 부조리의 연속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코언 형제는 영화적인 이미지로 설득한다.

 

ARENA HOMME
2016년 1월호

[2015 서독제]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Historia de Historia)

historia

스페인어로 ‘Historia’는 ‘역사’와 ‘이야기’를 동시에 의미한다. 안 그래도 이야기, 즉 개인의 사연은 쌓여서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또한 수많은 이야기를 양산한다. 그렇다면 역사의 단절은 곧 사연의 누락을 의미할 테다.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는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철저하게 잊힌 멕시코 이민사를 가지고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1905년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해 멕시코 살리나크루스에 입항,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했던 이민 1세대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진 지 오래다. 황폐해진 공간이 되었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 쌓여 이를 재현해줄 ‘누군가’의 발견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 누군가는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 제작진일 터. 영화는 현재의 공간에 과거의 시간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잊힌 역사를 복원한다. 그 방식이 흥미롭다. 프랑스 여자의 질문과 한국 남자의 내레이션이 대화를 통해 이뤄지고 현재의 이미지와 과거의 자료가 분할화면으로 제시되다가 종국에 겹치는 식이다.

역사는 그렇게 다양한 시선을 포함한다. 단수의 시선, 하나의 목소리로는 역사가 품은 다양한 사연의 결을 살려낼 수 없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 없는 대화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41회 서울독립영화제
(2015.11.26~12.4)

[2015 서독제] <창밖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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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제목처럼 ‘창밖의 풍경’으로 시작해 ‘창밖의 풍경’으로 끝을 맺는다. 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는 구도는 흡사 프레임(Frame)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사의 시선과 닮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진사다. 사진사는 학원 강사의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고, 동네에 새로 문을 연 옷가게 개업 파티에 놀러 갔다가 스마트폰으로 기념사진도 찍는다. 그뿐인가, 폐교를 찾아 모델을 앞에 두고 작품 사진을, 치과를 찾아 광고 사진을 촬영하는 등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사진은 세상을 담아내는 작업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기도 하다. 사진의 창은 프레임이다. 다시 말해, 사각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진은 무엇을 보고 찍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사진을 찍는 건 순간을 포착하는 행위다. 이에 대한 극 중 대사가 의미심장하면서도 알쏭달쏭하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 있잖아요?”, “투명인간?”, “그렇죠, 근데 그 반대지?” 사진은 역설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세상을 온전히 담으면서도 규격화하고 있는 그대로 촬영해도 사진가의 시선이란 주관이 개입한다. 사진이 세상을 포착하는 것 같지만, 실은 프레임 안으로 세상이 들어오는 것. 그게 사진이다. <창밖의 풍경>의 결말, 영화의 카메라는 사진사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뒤의 창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 창에서 세상은 시시각각 변한다.

 

41회 서울독립영화제
(2015.11.26~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