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와 랜디 존슨, 그리고 상생


1. 나에게 MLB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양팀선수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벌이는 패싸움이다. 이처럼 자기 팀 소속 선수가 궁지에 몰렸을 때 말리지 않고 벤치에 짱 박혀 있으면 벌금을 물게되는데 이와 같은 룰을 제정한 데에는 두가지 의도가 있다.

입장료 수익 창출을 위한 MLB 사무국의 은근한 의도적 조장이 그 첫번째 이유다. 마치 피를 보면 흥분하는 맹수들처럼 그런 싸움으로 인해 선수들은 더욱 격렬해지고 이에 자극받은 관객들까지 덩달아 열광하게 되며 결국 이러한 일련의 반응으로 인해 입장수익은 늘어나게 되니, 역시 자본주의의 나라 미국답게 상업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하지만 미국의 프로스포츠가 위대한 건 이와 같은 고도의 상업화를 앞세운 전략 때문만은 아니다. 두번째 이유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것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선수를 보호하겠다는 사무국의 의지 표명과 발현, 그리고 실천.

MLB의 콘텐츠는 게임이다. 그리고 게임이라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선수. 선수가 없으면 MLB의 존재 가치가 없다. 때문에 구단이나 사무국이 이와 같은 제도로써 선수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까이서 목격한다.

그래서 MLB에는 한국의 프로야구와는 달리 선수가 펜스에 부딪쳐 부상을 당하는 일도 없고, 지도자가 자기 팀 투수에게 상대 팀 타자를 맞히라는 희대의 주문도 없으며 구단이 선수에게 부상 재발시 연봉을 반납하라는 사상 초유의 경우도 없다. 그러니 구장으로 깡통이나 쓰레기통이 날아들어 올 이유도 없다.

다시 말해, MLB 구단이나 사무국은 선수들을 도구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 구단과 사무국은 선수들이 최상의 상태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주고 선수들은 최고의 플레이로 이에 보답(?)한다. 돌아오는 것은 결국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와 눈물.  

이처럼 구단/사무국과 선수간의 존중의 관계가 바탕이 될때 MLB는 경쟁을 뛰어넘는 ‘감동’의 순간을 연출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그 감동 속에 자리잡고 있는 또 하나의 감동, ‘상생’을 목격한다.  


2. 미국 메이저리그(이하 MLB)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랜디 존슨이 어제(5/19)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MLB 128년 역사상 17번째이고, 1999년 뉴욕 양키스의 데이비드 콘 이후 5년만이며, 사이 영이 1904년 당시 37세의 나이로 세운 최고령 퍼펙트 기록을 무려 4년이나 늘린 대기록이다.

랜디 존슨이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동료 선수들이 너나 할 것없이 마운드로 몰려와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돈다. 더군다나 랜디 존슨이 대기록을 작성한 곳은 자신의 홈구장도 아닌 애틀랜타의 터너 필드 구장.

그럼에도 애틀랜타 팬들은 이를 치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되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세운 기록인양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립박수로 랜디 존슨의 기록을 축하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7회가 지나고 퍼펙트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터너 필드는 마치 다이아몬드백스의 홈구장인양 랜디 존슨의 투구 하나하나에 모든 관중이 환호성을 울려댔다. 스포츠만이 연출할 수 있는 감동의 순간이다.

이 말은 곧 애틀랜타의 팬들이 두 팀의 경기를 단순히 경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뜻인데 확실히 MLB를 비롯하여 미국의 프로스포츠를 시청하고 있다보면 랜디 존슨의 경우처럼 단순히 경쟁을 넘어 그 기저에 깔려있는 무언가 더 큰 정신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나는 이를, 존중보다는 지금 이 나라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는 ‘상생’이라는 단어로 부르고 싶다. 구단과 선수와의 존중, 선수와 팬과의 존중, 이 삼자간의 존중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연출되는 ‘상생’이라는 감동. 100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건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테다.  

그래서 정말이지 랜디 존슨의 퍼펙트 경기와 이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애틀랜타의 팬들을 보면서 상생의 감동을 직접 팬들에게 선사하는 미국의 프로스포츠가 부럽게만 느껴진다.

3. 스포츠가 팬들에게 제공하는 감동, 정치라고 못 할리 없다. 이 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스포츠나 정치나 돌아가는 시스템의 원리, ‘감동’이라는 종착지는 매 한가지니까.   

무비클래식, 그립다.


자료 뒤지다가 발견한, <FILM2.0> 34호에 실린 <무비클래식>에 대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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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영화 전문 사이트 ‘무비클래식’은 개봉영화 편향적인 영화문화의 대안으로서 고전영화를 권하는 웹진 성격의 정보사이트다. 하지만 이름난 스타와 영화사진으로 영화팬들의 값싼 향수를 자극하는 갤러리 사이트는 아니다.

무비클래식은 <진주만>의 개봉에 맞춰 <도라! 도라! 도라!>를, 스티븐 스필버그의 두 작품 <쥬라기 공원3>와 <A.I.>의 개봉에 즈음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효시인 <죠스>를 소개하는 등 시의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며 ‘현재의 영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다. 또 시대를 막론하고 스릴러 장르의 모범으로 인영되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만을 집중 소개하는 ‘히치콕관’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사이트를 오픈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전영화’의 두터운 부피를 양적으로 충분히 소화하고 있지 못한 점과 한국영화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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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에 입사하면서 무비클래식 운영을 중단했지만 사이트의 접속은 가능하게 해놓았다. 아직도 내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고전영화의 소개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3년 전부터 돈을 받으면서 글을 쓰고 있는 생존수단 마인드를 가지고 과연 아무 대가없이 무비클래식을 운영했던 당시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버럭 겁이 난다. 의문이 든다.

그래서 그 때가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이너뷰는 스포츠다.


이너뷰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다. 이너뷰어는 이너뷰이를 상대로 어떤 사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너뷰이는 이너뷰어를 상대로 그에 걸맞는 답변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너뷰가 단순히 질문과 대답으로만 이루어지면 재미가 없다. 늘어진다. 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승부욕이 필요하다.

그래서 딴지의 이너뷰는 재미가 있다. 딴지는 한 번 눈에 들어온 약점(?)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승부사적 기질이 있다. 이너뷰 준비 과정도 이에 맞춰져 있다. 자료를 많이 찾는다기보다는 이너뷰의 핵심을 찾아 때린데 또 때린다는 기분으로 그 점만을 집중 파헤친다. 그래서 본 게임에 들어가면 긴장감이 넘친다.

그만큼 이너뷰에 있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은 성패를 좌우할정도로 중요하다. 마치 스포츠에서 우승컵을 놓고 다루는 게임처럼 이너뷰도 게임으로 존재할 때 그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래서 이너뷰는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라 할 만하다.  

하지만 올스타전과 같은 친선게임은 지루하다. 잔기술만 넘칠 뿐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관계로 해서 긴장감이 없다. 긴장감이 없는 게임은 그 자체로 이미 재미있는 게임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 비추어, 친분이 있는 인사와의 이너뷰는 최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열린우리당 기관지 서프라이즈 이너뷰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가 바로 이점으로 보이는데 그네들이 이너뷰하는 대상은 오로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거나 친열린우리당 인사들이다. 이미 시작부터 긴장감과는 거리가 먼 이너뷰는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는 유발하겠지만 그걸 재미로 집약시키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서 서프라이즈의 이너뷰는 생기가 없다. 평범하다. 서프라이즈의 이너뷰는 독자를 히껍하게 할 정도로 많은 자료를 참조해 질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거창하기만 할 뿐 알맹이있는 답변을 유도할 질문은 실종돼있고 게다가 꼬투리를 잡아채는 능력은 더더욱 없다. 성실하다는 느낌은 줄지언정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긴장감은 없다. 결국 서프라이즈와 열린우리당 인사가 하는 이너뷰는 아무리 좋게 봐줘야 친선게임이다. 자기 딸딸이.

그런데 언제부턴가 딴지에서도 이런 친선게임과 같은 이너뷰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일망타진 이너뷰에서의 유시민 이너뷰가 그러했고 또 지금 녹취하고 있는 김근태 이너뷰가 그렇다. 둘다 열린우리당. 너무나 친해져서 거리두기에 실패한 까닭이다.
   
스포츠에서 긴장감을 만드는 것은 9할이 승부욕이다. 그건 이너뷰도 마찬가지다.

코엘류 경질 파동에 붙여…


몰디브 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엘류 경질설이 꽤 설득력있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스포츠 신문들은 아시안컵 이전에 코엘류를 경질할 것이라고 아주 확정된 듯 얘기하고 있네요.

이는 한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만약 축협이 정말로 코엘류를 경질한다면 이건 코엘류가 못해서가 아니라 축협 지들 면피용으로 코엘류를 팽하는 꼴 밖에는 안됩니다.

코엘류, 사실 욕 먹을만 합니다. 도대체가 특징이라고는 없어요. 수비진 포백 했다가 선수들 능력 안된다고 곧바로 쓰리백 바꾸고. 하여튼 코엘류의 축구는 특징없는 축구라 할 만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히딩크도 한국축구 모른다고, 특징없다고 욕 먹었어요. 월드컵 몇 달 전까지 말이죠. 그런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월드컵 본선 때에 맞춰 특징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단기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는 우리들하고는 달리 장기간을 바라보고 훈련을 한 까닭이죠.

조직력이라는 거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근데 그 조직력이라는 것이 또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가 있어요. 장기간 훈련이 선행이 되면 서서히 나타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손발이 척척 맞추어 질 때가 있어요. 히딩크 감독 때 4:1로 이겼던 스코트랜드 전 기억하시죠. 전 경기들에서 보여준 모습하고는 천양지차였습니다. 단체 운동이란 건 이런 거예요. 훈련 방법에 따라서 다 때가 있는 법이예요.  

이걸 축협 사람들이 모를 리 없어요. 밥 먹고 축구만 했던 사람들이니까요. 근데 왜 코엘류를 자르려는 걸까요? 이번 축협, 코엘류한테 전폭적인 지지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오만전 패배 때 아시죠, 축협 직원 1명인가 현지에 파견된 거. 존나게 안일했던 거죠. 게다가 코엘류호의 코칭 스태프 한 번 보세요. 코엘류랑 피지컬 코치 빼면 전부 한국인입니다. 히딩크 떄와는 천지 차이죠. 이 말은 다시 말해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91년인가 올림픽 팀을 구성할 때 독일에서 크라머라는 애를 데려왔습니다. 근데 얘 혼자 딸랑이었어요. 도저히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 겁니다. 그 때 김삼락 감독이 크라머 왕따 시켰어요. 말이 안 통하는데 아무리 능력있는 외국감독이라도 어찌 힘 써볼 도리가 없었겠죠. 올림픽도 치뤄보지 못하고 크라머 짐 싸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선진축구를 체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어이없게 날려버리니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축구 16강 탈락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죠.

그만큼 단체운동에서 커뮤니케이션 이거 젤루다 중요합니다. 이거 안되면 어떻겠어요. 끝장입니다. 운동선수들 존나게 민감한 애들이예요. 약간의 부상에도 컨디션이 오르락 내리락 변덕이 심해요. 그러니 이런 선수 분위기에서 제 아무리 상대가 베트남, 오만이라고 한들 이길 턱이 없어요. 그런데도 방치했어요. 이거 전부 축협이 자초한 겁니다.

그러니까 몰디브 전 무승부는 감독의 전술부재나 선수들의 정신력 부족도 맞긴하지만 더 근본적인 건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축협의 죄가 더 크다는 말입니다.

지들도 잘 알고 있겠죠. 근데 욕 먹기는 싫었을 겁니다. 그럼 방법은 몬가요, 희생양 하나 만들면 됩니다. 코엘류가 아주 좋은 먹잇감이죠. 얘한테 다 뒤집어 씌면 되는 겁니다. 언론도 코엘류 못 잡아 먹어서 난리예요. 선수들이 잘 못 따라줬다고 하니까 감독이 선수들한테 책임을 떠넘겼다고 자의적인 해석을 해 버려요. 미칠 노릇이죠. 근데 전 코엘류가 정말로 그렇게 얘기 했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아요. 이전 베트남 때에도 이와 같은 문제로 직사하게 욕 먹었어요. 근데 이번에 또 선수들 책임으로 전가했다? 말이 안되죠. 국가대표 내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분명히 있습니다. 외국 감독을 들들 볶는 한국의 행태를 모를리 없는 히딩크가 이런 무책임한 이를 감독직으로 추천할 리가 없어요.

다시 말해 이번 코엘류 경질에 대한 건은 축협이 지들 잘못 면피용으로 코엘류를 이용한 거라 이 말입니다. 이해 되시죠?

축협 얘네들이 이런 놈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