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의 최민식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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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의 전쟁>은 비리 세관원에서 거물 로비스트로 전향하는 최익현(최민식)을 통해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버지 세대의 욕망을 풍자한다.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이 돼야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 욕망 과잉의 시대. 최민식의 과잉 연기는 <쉬리>(1999)의 박무영, <파이란>(2001)의 이강재,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 <악마를 보았다>(2010)의 연쇄살인마 등으로 정평이 나있다. 보스가 종친임을 앞세워 궤변과 허세로 조직의 대부 행세를 하며 가문의 재산을 불리는 최익현의 욕망은 발산으로 연기의 끓는점을 보여주는 배우 최민식의 특징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다. 다만 이전의 대표작 캐릭터들이 다소 인공적이면서 워낙 강렬했던 까닭에 연기를 위한 연기라는 인상이 강했다면 욕망 과잉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체현한 <범죄와의 전쟁>에서는 배우가 아닌 인물 자체로 관객에게 어필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모로 욕망의 강약조절을 구사하는 연기는 좀 더 현실의 지면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한동안 침체를 면하지 못했던 최민식의 재기작으로 손색이 없는 연기에 대해 극 중 대사를 빌려 평가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최민식 연기, 살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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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셜록>의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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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를 다룬 작품들이 홈즈와 왓슨의 동성애를 부추겨온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됐다. BBC드라마 <셜록> 또한 마찬가지인데 좀 다르다면 홈즈와 왓슨의 동성애에 더해 시즌2의 3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는 홈즈와 모리아티의 관계 역시 그런 맥락에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요한 대사. 연구원 미치가 홈즈에게 왓슨이 옆에 없으면 슬퍼 보인다고 건넨 말은 일차적으로 흠즈와 왓슨의 관계를 겨냥한 것이지만 비틀어 생각하면 홈즈와 모리아티의 관계에 어떤 혐의를 제공한다.

홈즈는 범죄가 발생하지 않으면 존재 증명을 할 수 없는 인물이다. (탐정의 운명이란 게 그렇게 얄궃다!) 그래서 홈즈에게 모리아티는 범죄자이면서 동시에 구미를 당길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반대로 모리아티에게도 ‘범죄의 왕’이라는 자신의 악명을 더욱 분연히 떨치기 위해서라도 홈즈에게 구애(?)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즉, 이 둘은 함께 있으면 티격태격이지만 떨어지면 금방 보고 싶은 애인과 같은 관계랄까. 런던탑, 런던국립은형, 교도소 세 군데의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해 관심을 끈 모리아티가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후 홈즈를 만나 남기는 말은 ‘I O U’, 바로 사랑해다. (모리아티가 한 입 베어문 사과에 남긴 문장인데 애플의 로고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동성애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게임의 시작. 연애는 일종의 게임이다. 상대방의 발언,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서로를 알아가는 놀이인 것이다. 모리아티의 도발로 시작된 홈즈와의 관계는 그렇게 연인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이 게임의 최종 단계는 어떤 형태일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한 몸이 되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숨을 거두는 것이 사랑의 열락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셜록>에서 홈즈와 모리아티는 성 바솔로뮤 병원 옥상에 함께 올라 비슷한 시간대에 서로 운명을 달리한다. (원작소설에서는 홈즈가 모리아티를 껴안고 라이헨바흐 폭포 아래로 뛰어내린다.)

<셜록>은 홈즈와 왓슨, 홈즈와 모리아티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의 삼각관계를 동성애 메타포로 풀어넣으며 현대적인 각색의 정점을 세운다. (모리아티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셜록이 옥상 난간에서 뛰어내리기 전 왓슨에게 전화를 걸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슬퍼하는 장면은 이 얼마나 노골적인가!) ‘셜록 홈즈’의 모든 현대물들이 홈즈와 왓슨의 관계에 경쟁적으로 동성애를 덧씌운 것을 감안하면 <셜록>의 ‘라이헨바흐 폭포’는 획기적이다. 그만큼 코난 도일의 원작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각색인 것이다. 아직도 <셜록>이 탐정물로만 보이시는가? 위의 사진만 해도 사랑을 나누는 연인 사이 같지 않나. 

<철의 여인>의 인물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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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 총리 마가렛 대처(임기 1979~1990)는 ‘철의 여인’으로 불린다. 침체에 빠진 영국 경제 부활을 이끌기 위한 획기적인 정책과 독단적인 정부 운영 능력을 보고 당시 소련 정부가 붙여준 별명이다. 필리다 로이드 감독의 <철의 여인>은 강인한 리더십의 그녀를 보여줄 것 같지만 오히려 뇌졸중 후유증을 겪고 있는 노년의 대처(메릴 스트립)가 과거 총리로 선정된 전후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극 초반 크게 잡힌 노년의 대처 얼굴 뒤로 총리 시절의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는 구도의 장면은 이 영화가 취한 이야기 구조를 상징적으로 포착한다.  

또한 이 장면은 대처가 총리 시절의 기억에서 여전히 헤어나고 있지 못한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만큼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남성 정치가들 ‘앞’에서 더욱 강력한 정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경력 덕에 이 영화가 총리 시절의 대처를 묘사할 때면 앞서 언급한 장면을 변형해 전면에 그녀를 세우고 남성 정치가들로 그 뒤의 여백을 메운다. 또한 고비용 저효율의 노동시장 구조를 산업 국유화 등을 통해 경제부흥을 이끈 그녀의 공로를 표현하기 위해 역시 대처를 앞에 두고 그 뒤에서 환호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대비시키기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대처리즘’으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대규모 항의를 촉발시켰다. 또한 자신의 정책과 신념을 너무 강요한 나머지 남성 정치가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11년간 이어오던 총리 직에서 결국 물러났다. 현재 대처는 치매로 투병 중인데 영화에서 드러내길 그녀의 기억을 가장 괴롭히는 건 남편 고()데니스 대처 경(짐 브로트벤트)이다. 남편은 대처가 정치 일선에 나서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이면서 그녀가 극복해야 할 남자이기도 했다. 하여 <철의 여인>의 특징적 인물구도는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부각하면서 동시에 뒤에선 무리들에 의해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녀의 불안한 위치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철의 여인>은 남편의 환영을 보는 대처의 모습으로 시작해 끝내 이를 떨쳐내는 과정까지를 그리며 정치인에서 자연인으로 거듭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영화의 정서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대처는 분명 세계 역사에 기록될 정치인이지만 빈부 및 지역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고 제조업의 붕괴를 가져오는 등 비판해야 할 지점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철의 여인>의 반대편에는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1993)가 서있다!) 필리다 로이드 감독이 이를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처를 옹호한다는 혐의를 벗기 위한 알리바이 정도로 다룬다는 인상이 짙다. 마가렛 대처가 보수를 대표하는 인물인 것처럼 <철의 여인> 역시 보수적인 영화에 가까운 것이다. 

<아티스트>의 버라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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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는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시절을 주름잡던 최고 스타가 유성영화의 출현에 따라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은 현대에는 거의 잊힌 무성영화 기법으로 이 영화를 연출했지만 시대와 동떨어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디지털의 도래로 필름이 점점 사라져가는 작금의 영화 현실을 은유한 까닭이다. 하지만 이 은유는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운드 대신 자막으로, 마임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표정과 행위연기로, 그리고 상영시간 내내 계속되는 음악으로 현대의 관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로 다가간다.  

그럼에도 <아티스트>가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지는 별 조지(장 뒤자르댕)와 뜨는 별 페피(베레니스 베조)의 러브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이다. 현대 관객의 관심사가 변덕 들끓어 예상할 수 없다지만 영화사 초기부터 남녀의 사랑은 언제나 좋은 소재였고 관객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최고의 마케팅 포인트였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적 가치가 변모해도 변하지 않는 관심사는 늘 존재해왔다. <아티스트>가 다루는 사랑이 그러하거니와 남녀 간의 스캔들, 특히나 유명인 들의 사랑 놀음은 언제나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WHO’S THAT GIRL?’ 신작 홍보를 위해 레드 카펫 위에 선 조지에게 배우지망생 시절의 페피가 달려들어 키스를 하자 이를 본 기자들에 의해 다음 날 기사화 된 ‘버라이어티’의 헤드라인이다. 이 장면에서 놀라운 것 하나. 지금은 영화산업을 전문으로 다루는 버라이어티가 당시에는 연예(와 연애) 기사를 1면에 다루는 타블로이드였다는 사실! 그러니까 무성영화가 주류이던 시절에도 언론은 연예인의 가십을 쫓아다녔고 대중은 이에 열광했다.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필름영화에서 디지털영화로 바뀌었지만 언론과 대중의 속성은 여전한 것이다.

<아티스트>는 지금 이 시대에는 다소 생소한 무성영화 형식을 적극 차용했지만 흑백필름이 주는 향수로 전환하며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를 특별한 것으로 포장한다. 다시 말해,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보편성의 힘을 믿고 새로운 시대에 맞춰 돌파하려고 한다. 조지가 페피의 도움을 받아 말보다 동작을 많이 활용해야 하는 뮤지컬로 발성영화 시절에 재기를 노리는 것처럼 말이다. ‘WHO’S THAT GIRL?’ 언론이 스캔들에 목매하는 것처럼 영화의 관객들 또한 러브 스토리에는 변함없이 목말라 한다. 

<토리노의 말>의 영원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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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2011)은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는 인간의 일생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유식하게 말하면, 영원회귀. 니체의 사상인데 실제로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일화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무와 무 사이의 인간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삶이라는 유()의 시간이다. 살기 위해 버텨야 하는 시간들의 연속. 그러니까 인간의 생은 운명에 맞선 투쟁의 연속이라 할만하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차이를 생성하는 끊임없는 반복임을 상기한다면 이 삶이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반복의 연속이다. 극 중 마부와 딸은 잠에서 깨어나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술 한 잔씩을 한 후 우물에서 떠온 물로 감자를 익혀 한 알씩 먹고 마구의 말에 먹이를 먹이는 생활이 생의 전부인 것으로 보일 정도다. 그런 생활이 반복되는 동안 집밖에서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대고 있는데 마부의 딸이 창문 밖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지켜보는 모습은 거대한 운명을 맞닥뜨린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의 구도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바닷가의 월출>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림 속 한 남자가 등을 보이며 파도와 맞서는 그림 속 구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토리노의 말>의 딸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늙은 마부 역시도 딸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파멸과 죽음을 향한 니체의 영원회귀는 곧 인간 운명의 시간인 셈인데 (스포일러 주의!) 성경에서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여섯 번째 날 마부 부녀는 거친 바람에 삶이 풍화되며 끝내 점으로 회귀, 죽음을 통해 다시금 태어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워 호스>와 서부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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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호스>의 마지막 장면은 흡사 존 포드 영화의 결말을 보는 것 같다. 서부극의 미장센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다. 세트임이 명백해 보이는 농장 위에서 지는 석양의 빛을 등지며 그림자의 모습으로 재회하는 알버트(제레미 어바인) 가족의 모습.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족주의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결말이지만 여기에 의외의 존재가 끼어든다. 바로 ‘조이’라는 이름의 말이다.

서부극은 대개 미국의 이상주의를 옹호했다. 백인 개척자들의 활약상을 통해 삶의 터전을 일구고 공격적인 외부 세력에 맞서 가족을 보호하는 모습은 곧 미국적 가치의 실현이었다. <수색자>(1956) 이후 존 포드가 수정주의 서부극으로 백인에 의해 (그리고 그 자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쓰인 미국의 가치에 대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서부극이 미국의 장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첨단의 영화를 만들면서 고전에 대한 오마주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스필버그는 <워 호스>를 통해 현대판 수정주의 서부극을 선보인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나갔던 말 조이도 알버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극적으로 가족과 결합한다. 말하자면 <Saving War Horse>인 셈인데 스필버그는 서부극의 필수요소였지만 주변 풍경으로 밀려났던 말을 중심부로 이식한다. 가족의 범주에 말을 포함시킴으로써 스필버그 특유의 가족주의에 확장을 시도한다. 그리고 서부극의 미장센을 빌려 미국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옹호하는 것이다. 

<셜록>의 벽지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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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는 베이커가 221b의 홈즈(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거실 벽지는 기하학 문양의 일정한 패턴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사건을 추리하는 데 있어 공식을 대입해 일정한 패턴을 찾는 홈즈의 수사 기법에 착안한 미장센이라 할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홈즈는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왓슨, 이렇게 하나하나씩 가능성을 제거해가는 방식을 소거법이라고 하네”), 과학 현상을 증명하듯(“이상해, 현미경으로 살펴도 설탕 입자가 보이지 않아”) 사건의 중심부에 진입한다.

그런 홈즈의 성향을 드러낼 목적으로 극 중 자주 출현하는 자막들 또한 패턴을 이루어 주변 가구나 기구들의 고유한 문양을 해치지 않게 제시된다. 홈즈와 왓슨이 아이폰이나 블랙베리나 맥북과 같은 첨단의 전자기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개인적으로 더 눈이 갔던 것은 홈즈의 일정한 패턴 무늬 거실 벽지 구석 쪽에 걸려 있는 해골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영국 출신의 화가 데미언 허스트가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신의 사랑을 위해’라는 작품을 연상시키는데 그만큼 홈즈가 미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골이 의미하는 것은 당연히 죽음이다. 홈즈의 사건은 대부분 살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시즌2의 1부 ‘벨그레이비어 스캔들’은 살인보다 아이린 애들러의 생사와 관련한 비밀을 풀어간다는 점에서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러니까, 홈즈는 살인 사건 주변에 흩어진 증거라는 파편을 모아 패턴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탐정이다. 그런 홈즈의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패턴 무늬 벽지와 해골 그림. <셜록>의 연출진은 이와 같은 재미있는 미장센을 통해 셜록 홈즈의 성격과 수사 성향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