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의 ‘리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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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버스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한국에 수입되는 음악영화에는 나름의 공식이란 게 생겼다. 국내에서만 무려 350만 관객을 동원한 <비긴 어게인>(2013)이 증명한바, 남녀의 달콤한 사랑이 감미로운 음악으로 예쁘게 포장된다. 실제 뮤지션이 배우로 참여해 극 중에서 부른 노래 중 몇몇은 음악 차트의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인기를 얻는다. 그것이 지금의 음악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위플래쉬>(2014)는 그런 선입견을 잠재우는 전대미문의 음악영화다. 남녀 간의 사랑도 없고 솜털처럼 귀를 간질이는 음악도 없다. 음악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스승과 제자가 있을 뿐이다. 플레처(J.K. 시몬즈) 교수는 음악 천재를 만들겠다며 제자를 폭군처럼 밀어붙인다. 이에 질세라 손에 피를 흘려가며 드럼을 두드리는 앤드류(마일즈 텔러)는 음악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은 일념 하나로 지옥 훈련을 악착같이 버텨낸다. 여기서 음악은 멜로디와 가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 역할로 변주된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데미언 채즐 감독은 관객에게 이 영화를 갱스터 영화나 필름 누아르와 같은 범죄물처럼 보아줄 것을 주문한다. 영화 초반, 아버지와 만난 앤드류는 악명 높은 플레처 교수와의 첫 만남의 소감을 전한다. 부자(父子)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극장. 영화의 카메라는 <리피피>(1955)가 상영 중인 극장 간판을 눈에 띄게 노출한다. <리피피>는 프랑스 범죄물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이제 막 징역을 마치고 출소한 늙은 범죄자가 마지막 한탕을 꿈꾸다 좌절하는 내용을 담았다.

<위플래쉬>는 ‘리피피’ 리듬을 타는 듯한 제목의 필름 누아르 영화를 골라 흑백 필름이 주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 이미지를 옷으로써 활용한다. 첫 만남에서 흰 티셔츠를 입은 앤드류와 검은색 슈트를 입은 플레처는 극단적인 색의 대비만으로 대립을 예고한다. 아니나 달라, 플레처는 앤드류의 드럼 연주가 잘못됐다며 면전에다 철제 의자를 던져대고 총을 쏘듯 잔인한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앤드류는 청중이 보는 앞에서 플레처에게 대드니, 하얗게 순수했던 그의 의상은 어느새인가 플레처가 입은 검은 색의 슈트로 바뀌어 있다.

천재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플레처와 앤드류의 경우처럼 악마와의 거래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플레처가 자신의 지도 방식을 두고 앤드류에게 해명 조로 했던 말,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가치 없는 말이 바로 ‘잘했어 good job’야”  이에 아무 말 하지 않음으로써 동조하는 앤드류나 플레처에게 인간의 약한 본성은 극복 대상이었던 셈이다. <리피피> 역시 전과가 있는 인물이 다시금 범죄의 세계에 손을 대는 원인으로 인간의 약한 본성을 꼽는다. 물론 플레처와 앤드류가 범죄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리피피>를 예로 들며 음악을 폭력처럼, 연주 무대를 전쟁터처럼 묘사하는 <위플래쉬>는 음악영화를 가장한 범죄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의 <엄마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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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돌란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나는 엄마를 죽였다.’ 물론 진짜로 죽인 것은 아니다. 후베르트(돌란 자신이 연기했다!)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 크다. 거의 증오의 수준이다.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성을 사귄다는 사실도 엄마에게는 비밀이다. 대신 독립을 꿈꾸지만, 이마저도 반대에 부딪혀 심정적으로는 엄마를 죽이고 싶은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반어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후베르트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누군가 엄마를 해친다면 그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실은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니 16살 사춘기 소년의 입장에서 엄마가 곱게 보일 리 없다.

사실 후베르트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자(母子) 관계가 있다. 남자친구이기도 한 안토닌의 모자다. 후베르트는 종종 안토닌의 집에 놀러 가 침대에서 밀어를 나누고는 한다. 안토닌의 엄마는 그 광경에 놀라기는커녕 아들의 관계와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자신 또한 남자친구를 데려와 자연스럽게 아들과 후베르트에게 소개할 정도다.

그런 안토닌의 집에는 구스타브 클림트의 <엄마와 아이> 그림이 걸려있다. 사랑하는 아이를 품고 잠이 든 엄마의 모습은 평온함 그 자체다. 엄마의 황금빛 머리가 배경을 압도하는 가운데 이상적인 모자 관계를 넘어선 남녀 관계에 가까운 퇴폐미도 은근히 느껴진다. 사실 후베르트와 엄마가 자동차 안에서 음악을 듣네 마네 말꼬투리를 잡으며 말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남녀가 나누는 사랑싸움을 연상케 한다.

이 관계가 특별해 보이나?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종종 모자 관계를 넘어선 연인 관계를 지향하고는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관계의 보편성일 것이다. 클림트의 <엄마와 아이>의 그림이 묘사하는 것 또한 모자 혹은 연인이라는 특정 사이를 넘어선 가장 순수한 형태의 관계일 것이다. 극단적인 사랑과 극단적인 증오는, 그래서 같은 감정이다.

자신을 기숙사로 보낸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었던 후베르트는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떡할 거야?” 엄마는 이에 대해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은 채 매몰차게 돌아서지만, 혼잣말처럼 “그럼 나는 내일 죽을 거야”라고 말한다. ‘나는 엄마를 죽였다.’ 단순히 후베르트가 품은 감정일까? 엄마라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내 안의’ 엄마를 죽였다. ‘엄마와 아이’는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5.1.16)

<마미>의 1:1 화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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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1930~ )는 서른 살 나이에 만든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발표하며 프랑스 영화계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기성세대의 영화와 기존의 제작 시스템에 반발, 전혀 새로운 영상을 구현해 냈는데 그 핵심은 ‘점프 컷 jump cut’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당시 관객들에게 비약적으로 컷을 ‘건너뛰는 jump’ 편집은 충격에 가까웠다.

지난해 84세였던 장 뤽 고다르는 신작 <언어와의 작별>(2014)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상을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상을 공동 수상한 감독이 있었다. 1989년생의 자비에 돌란이었다. 자비에 돌란은 <마미>(2014)를 통해 전례 없던 1:1 화면비를 선보였다. 인스타그램 이미지에 익숙한 스물다섯 살의 감독이라면 능히 도입할 법한 화면이었다. 하지만 관객에게 1:1 화면비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이 젊은 감독의 치기 어린 시도가 아닌 이유는 극 중 캐릭터가 처한 현실에 가장 적합한 영화적 연출이기 때문이다.

<마미>의 세 주인공은 모두 자기 안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다. 스티브(앙투안 올리비에 필롱)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의력 결핍과 과잉행동으로 보호소를 들락날락하는 중이다. 엄마 디안(앤 도벌)은 그런 아들을 감당하기 힘들어 매일 같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힘들게 살고 있다. 이웃에 사는 카일라(쉬만 클레망)도 마찬가지. 소중한 아들을 잃은 뒤 그녀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이가 없어 그만 말을 더듬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이미지의 특징은 셀프 이미지가 대다수인 까닭에 주변 사람에 대한 관심 없이 그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사실 <마미>가 선보이는 1:1 화면비는 인스타그램 이전 초상화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형태였다. 안 그래도 자비에 돌란은 <마미>에 1:1 화면비를 도입한 이유에 대해 초상화의 느낌을 도입해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감정 변화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다는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이를 위해 <마미> 이전 프랑스의 록 밴드 ‘인도차이나 Indochine’의 뮤직비디오 <컬리지 보이 College Boy>의 연출을 맡으면서 1:1 화면비를 시험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 앙투안 올리비에 필롱이 여기서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컬리지 보이>는 온전히 1:1 화면비로 진행되지만, <마미>에서는 1.85:1로 화면이 확장되는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이해받지 못해 힘들어 하던 스티브와 디안과 카일라가 유사 가족의 결합을 이루면서 한 번, 그리고 디안이 머릿속으로 스티브가 남들처럼 평범했다면 ‘펼쳐졌을’ 밝은 미래를 상상할 때 또 한 번 화면을 확장해 보인다. 아무래도 후자의 상황이 상상이니만큼 화면비의 변화로 느껴지는 실질적인 해방감의 카타르시스는 전자의 경우가 훨씬 큰 편이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스티브와 디안 사이의 불안했던 관계가 카일라의 합류로 ‘3’이라는 안정된 형태를 띠면서 이를 만끽이라도 하듯 이들은 햇빛 찬란한 날에 길에 나선다. 디안과 카일라는 자전거를, 스티브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데 이에 맞춰 ‘놀라운 창’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듯 오아시스의 ‘원더월 Wonderwall’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이에 맞춰 스티브는 창을 열듯 두 팔을 넓게 벌리고 1:1의 화면비는 이 순간 1.85:1로 확장되는 것이다. 마치 영화를 가지고 노는 듯한 화면비 연출은 돌란이 예사로운 감독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한다.

칸영화제에서 자비에 돌란은 심사위원 상을 공동 수상한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질문에 “별로 느껴지는 게 없었다”고 답해 화제가 됐다. 고다르가 젊었을 때 그랬듯 돌란은 선배들의 영화와는 다른 접근으로 영화의 신세기를 개척 중이다. <마미>의 1:1 화면비가 고다르의 점프 컷처럼 대중적으로 활용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기존의 영화 상식을 뛰어넘은 연출인 것만은 확실하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5.1.2)

<혼스>의 다니엘 래드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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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캐스팅으로 작품의 목적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혼스>가 그런 경우다. <혼스>는 머리에 뿔이 난 주인공 이그가 여자 친구의 살해 누명을 쓴 후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악마성을 다룬다.  

이그를 연기한 인물은 다름 아닌 다니엘 래드클리프.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마법의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익스펙토 패트로눔’ 주문을 외쳐대던 바로 그다.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이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후 자신에게 덧씌워진 해리 포터 이미지를 떨쳐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벌여왔다.

공교롭게도 올해 하반기 한국에서는 다니엘 래드클리프 주연의 영화 세 편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 <킬 유어 달링>과 <왓 이프>와 <혼스>다. 이들 영화는 모두 장르도 다르고, 무엇보다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연기한 인물들의 외양이나 성격이 전혀 딴판이다.

<킬 유어 달링>은 1940년대를 배경으로 미스터리한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여기서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천재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의 앨런 긴즈버그를 연기하며 컬럼비아 대학교 신입생 시절 만난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연기를 펼친다. 다니엘 래드클리프 최초의 로맨틱 코미디라 할만한 <왓 이프>에서는 애인 있는 여자 친구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남자로 등장, 옷을 홀라당 벗고 전라를 드러낸 과감한 연기에 도전했다.

압권은 <혼스>다. 여기서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악마’다. 사람 마음속에 감춰진 나쁜 마음을 고백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으며 수십 마리의 뱀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이제나저제나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살해한 진범을 찾아 복수할 생각에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살아생전 여자 친구와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19금’ 베드신도 마다치 않았다.

그런 과감한 연기 덕일까, <혼스>에서 이그를 연기한 그에게서 해리 포터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어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는 불에 타 재로 남은 이그의 모습으로 등장, 관객이 기대할 법한 일만의 온순한 해리 포터의 이미지마저 연기처럼 날려버린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큰 인기를 얻은 아역 배우 출신들이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기 위해 고전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그에 반해,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꽤 이른 시일 안에 성인 연기자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차기작 목록을 살펴보면, 프랑켄슈타인의 비서로 출연하는 <프랑켄슈타인 Victor Frankenstein>, 성인 코미디 연출의 대가 쥬드 애파토우가 메가폰을 잡은 <트레인렉 Trainwreck>, 천재 도둑들의 사기 행각을 다룬 <나우 유 씨 미 2 Now You See Me: The Second Act> 등이 포진되어 있다. 모두 해리 포터의 이미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인물과 영화다. 후에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평가할 때 <혼스>는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터닝 포인트와 같은 작품으로 재조명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맥스무비
(2014.12.18)

<나를 찾아줘>의 ‘She’

<나를 찾아줘>는 제작 단계부터 데이빗 핀처와 원작소설가 길리언 플린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화제가 됐다. 예고편에 대한 반응부터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8월 공개되자마자 대표적인 포털사이트의 영화 섹션 예고편 조회 수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나를 찾아줘>의 티저 예고편에는 배경음악으로 ‘She’가 흐른다.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음악이다. 이미 <노팅힐>(1999)에서 엘비스 코스텔로가 부른 노래가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를 찾아줘>에서는 리처드 버틀러가 부른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엘비스 코스텔로 버전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거칠고 우울하며 여운을 남기는 음색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충격적인 건 리처드 버틀러의 노래가 끝나갈 때쯤 흘러나오는 극 중 닉 던(밴 에플렉)의 음성이다. “난 아내를 죽이지 않았어요. 살인범이 아닙니다.” 티저 예고편의 시작에 맞춰 ‘She’의 간주곡이 흐르면서, “제 아내 에이미 엘리엇 던이 사흘 전에 사라졌어요.” 닉 던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호소하던 분위기와는 전혀 상반되게 예고편이 끝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찾아줘>는 행복해 보이던 닉과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 커플의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부부 관계를 폭로하는 영화인데 바로 여기에 ‘She’를 티저 예고편의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의도가 엿보인다.

<노팅힐>은 여행서적 전문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 윌리엄(휴 그랜트)이 유명 인기 여배우 안나(줄리안 로버츠)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나를 찾아줘>의 닉과 에이미 부부도 윌리엄과 안나의 결혼 과정 못지않은 배경을 갖고 있다. 에이미는 배우는 아니지만, 공동작가인 엄마와 아빠가 딸을 모델로 미국인들이 유년 시절 즐겨 읽었던 어린이 동화 시리즈 ‘어메이징 에이미’를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그에 비해 예사로운 기자 생활을 보냈던 닉의 상황을 고려하면 <노팅힐>의 유명인 아내와 평범한 남편의 결합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다만 <노팅힐>이 결혼 직전의 연애 상황에 집중한다면 <나를 찾아줘>는 결혼 이후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을 서로 연결하면 천국을 걷는 것만 같았던 연애 시절과 지옥과 같은 결혼 생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일종의 동전의 앞뒷면 같은 구조가 형성된다. <나를 찾아줘>의 티저 예고편에서 흘러나오는 ‘She’의 멜로디는 자연스럽게 <노팅힐>의 기억을 불러온다. <노팅힐>에서 ‘로맨틱’하게 결합했던 윌리엄과 안나 커플은 이후 어떤 결혼 생활을 펼치게 될까?

<나를 찾아줘>의 티저 예고편 제작진이 ‘She’를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건 그런 의도였을 테다. 같은 노래를 택하되 부르는 가수를 바꾸고 분위기를 리메이크함으로써 <노팅힐>에서 보여줬던 달콤했던 연애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결혼 생활에 대한 일반의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다. <노팅힐>에서의 달콤했던 연애가 결혼과 함께 서늘한 ‘스릴러’로 변모하는 부부 생활의 실체. 동일한 음악을 사용하되 노래를 부르는 가수만 바꿨을 뿐인데 로맨틱 코미디와 스릴러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렸다. <나를 찾아줘>는 영화만큼이나 예고편 또한 예술이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4.10.30)

<타짜-신의 손>의 점프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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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의 <타짜>(2006)도 그랬지만 강형철 감독의 속편 <타짜-신의 손>도 기본적으로 사기가 판을 치는 도박의 세계를 다룬다. 화투에 미친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기술도 현란해서 밑장빼기, 낱장 치기, 패 바꾸기 등 이 세계의 문외한인 사람들이 보면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다.

<타짜-신의 손>은 그와 같은 사기 도박판 묘사를 영화 초반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다만 화투에 대한 별 지식이 없는 관객도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끔 전문가(?)들만이 알 수 있는 게임의 판세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타짜들이 그 둔탁한 화툿목을 손에 쥐고 얼마나 화려한 사기 기술을 펼치는지 다양한 촬영 기술을 활용, 감을 잡을 수 있도록 묘사하는 전략을 취한다.

영화 또한 관객의 눈속임을 전제한 촬영을 선보이는 매체라는 점에서 타짜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타짜-신의 손>은 CG 기술로 화투패의 동양화 그림을 극 중 현실 밖으로 꺼내기도 하고 대길(최승현)이 마주하게 되는 우사장(이하늬)의 팬티 위에 새겨진 만화 이미지를 살아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우사장과 미나(신세경)의 모습을 필름이 넘어가듯 교차하는 컷을 통해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길의 심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은 점프 컷이다. 대길은 한낱 중국집 배달부였다가 강남의 하우스에 발을 디딘 후 타짜의 재능과 잘난 외모 덕에 단시간에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꼬장(이경영)의 눈에 들어 판에 참여했다가 타짜로 신분 상승하는 과정이 청재킷에서 고급 슈트 복장으로 한순간에 점프한다. 없는 돈에 어렵게 구한 반 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방을 비추는 카메라는 팬을 하는 순간 어느새 타워팰리스의 펜트하우스로 변해 있는 식이다.    

하지만 대길이 누리는 화려한 타짜의 영광은 상영시간 채 30분도 되지 않아 막을 내린다. 그 이후 대길은 거액의 빚을 지고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타짜의 운명이란 게 그렇다. 화려한 손기술로 단판에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몰라도 쉽게 벌어들인 돈은 빠르게 잃는 법이다. 불나방처럼 화투판으로 몰려드는 인간의 탐욕은 쉬운 성공을 부르지만 그만큼 몰락의 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타짜의 운명을 표현하기 위해 <타짜-신의 손>은 그 많은 촬영 기술 중 비약이 핵심인 점프 컷에 주목한 것이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4.9.15)

<프란시스 하>의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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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 감독의 <프란시스 하>는 친구와 세상을 공유했던 주인공이 그로부터 독립해 자신이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하는 홀로서기에 대한 영화다. ‘독립’이 중요한 주제로 기능하는 영화이기에 <프란시스 하>는 제목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을 따른다. 그에 따라 영화는 ‘프란시스 할라데이 Frances Halladay’라는 풀 네임을 가진 우리의 주인공이 어느 정도 세상에 자신의 지분을 갖는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에 대한 표현 방법이 인상적인데 ‘프란시스 하’까지 독립을 획득한 그녀의 이름을 제목에 당당히 명시하며 그녀의 독립이 끝이 아니라 진행 중임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결말의 구성이 마음에 콕 점 하나를 찍는 이유 중 하나는 주류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묘사되는 까닭이다. 프란시스를 연기한 그레타 거윅은 (감독의 여자 친구이자 공동각본가이면서) 주로 비주류 영화에 출연해 온 배우다. 유명세를 타지 않은 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에 많은 관객은 자신과 크게 처지가 다르지 않은 프란시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가 용이한 것이다.

이처럼 <프란시스 하>는 주류영화의 규격화된 틀을 탈피, 영화 자체가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주력했다. 흑백 필름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일상적인 뉴욕의 풍경을 좀 더 매력적으로 담아내려고 일부러 흑백 촬영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은 가진 것 없는 프란시스가 자신의 재능과 타고난 성격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흑백 필름을 빌려 천연색의 볼거리가 판을 치는 거대한 영화 산업 안에서 지극히 독립적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럼으로써 블록버스터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는 독립영화에 희망을 주는 한편으로 또한 입시다, 취업이다, 독립에 애를 먹고 있는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선사한다.  그런 믿음을 주는 영화이기에 <프란시스 하>는 흑백 영상이지만 초라하거나 차가운 대신 따뜻함이 물씬하다. 또한, 별다른 사건은 없지만, 독립을 위해 쉬지 않고 뛰어다니거나 몸을 움직이는 극 중 프란시스처럼 에너지로 충만한 것이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4.8.8)

<반격의 서막>의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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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중간에는 인간 측의 알렉산더와 유인원 측의 모리스가 한 권의 책으로 교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유인원의 리더 시저로부터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댐 시설 수리를 허가받은 인간 무리 중 한 명인 알렉산더는 우두머리 격인 말콤의 아들이다. 뮤어 숲 한쪽에 텐트를 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알렉산더가 책을 읽고 있으면 모리스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에 알렉산더가 모리스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니 다름 아닌 <블랙홀>이다.

<블랙홀>은 찰스 번즈가 지은 그래픽 노블로,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의 커뮤니티가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들의 분열에는 성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벌레병’이라 불리는 일종의 바이러스가 작용한다. 그와 같은 감염 증세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비롯되어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인간이 거의 멸종 단계에 이른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맷 리브스 감독이 <블랙홀>을 등장시킨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는 1968년 버전의 <혹성탈출> 이전으로 돌아간 <혹성탈출>의 새로운 삼부작이 인류 멸망을 전제하고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삼부작은 인류가 어떻게 멸망하고 유인원의 지배를 받게 됐는지에 대한 내용인 셈인데, 그 이유를 갈등과 반목의 역사에서 찾는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시저를 비롯하여 말콤, 알렉산더, 드레퓌스 등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빌려 이들의 배경을 이야기에 반영한다. 특히 이들은 세계사의 페이지 중 가장 굵직한 갈등의 사건에 연루되었던 장본인들이다. 시저는 절친 브루터스로부터 암살당할 뻔했고 말콤은 흑인 인권 보장을 두고 방법론 때문에 마틴 루터 킹과 갈등했으며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간첩 혐의를 받고는 프랑스를 양분시켰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다.

인류의 역사가 그랬다. 신뢰를 바탕으로 평화를 유지하기보다는 갈등을 조장하고 전쟁을 벌이는 식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해왔다. 인류의 멸망을 이와 같은 전쟁의 역사에서 찾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인간, 유인원 할 것 없이 갈등과 반목의 ‘블랙홀’에 빠져 서로에게뿐 아니라 같은 편(?)에게도 총칼을 겨누는 양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알렉산더가 모리스에게 전해준 <블랙홀>은 일견 화해의 의미 같지만, 종국에는 모두의 파멸을 예고하는 비극의 암시물인 것이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4.7.21)

<님포매니악>의 피보나치 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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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이른 나이에 오르가즘을 경험한 후 성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첫 경험 역시 예사롭지 않아서 제롬의 부드러운 손에 꽂힌 조는 그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바친(?)다. 하지만 손의 부드러움과는 상관 없이 섹스에 미숙한 제롬은 전희 단계는 무시하고 바로 삽입에 들어가 정상위 3번, 후배위 5번으로 짧게 조와의 관계를 마무리한다. 이때 화면에는 그들의 관계 위로 ‘3+5’라는 자막이 거대하게 찍힌다.

0,1,2,3,5,8,13,21,34… 로 이어지는 피보나치 수열은 앞의 두 수의 합이 바로 뒤의 수가 되는 수의 배열을 말한다. 겉으로 보이는 자연계는 불규칙하고 무질서하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매우 정밀한 수학적 원리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조가 자신의 첫 경험을 설명하자 이를 듣던 셀리그먼은 피보나치의 수열을 설명하며 그들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처럼 셀리그먼은 피보나치의 수열을 비롯해 플라잉 낚시법, 에드가 알렌 포의 <어셔가의 몰락>, 바흐의 ‘정선율’ 등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조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상징 안에 가두려고 한다. 섹스로써 세상이 임의로 정해놓은 정상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조와 다르게 셀리그먼은 사회가 권위를 부여한 지식의 틀 안에서 모든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드는 것. 그래서 조가 셀리그먼에게 가장 자주하는 말은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랬죠?”이다.

셀리그먼은 지식으로써 조의 위에 군림하려 들지만 사실상 이 영화에서 그는 조롱의 대상이다. 아는 것은 많을지 몰라도 책과 예술품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방 안에서 나온 적 없는 이론으로만 무장한 헛똑똑이일 뿐이다.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성 관계 한 번 가져본 적 없는 셀리그먼이 실전으로 무장한 조의 섹스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셀리그먼이 피보나치 수열을 들먹이자 화면 위에 커다랗게 뜨는 3+5는 <님포매니악>을 연출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장난기 어른 미장센이다. 이건 일종의 함정이다. 별 의미가 없는 3+5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몰두하며 이 영화를 이해하려 들면 결국 셀리그먼과 같은 오류에 빠지고 만다. 라스 폰 트리에는 조처럼 모든 종류의 제약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유인을 옹호하면서 이를 억지 이론에 가두고 억압하려는 세력에게 ‘엿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맥스무비
‘미장센 추리 극장’
(2014.7.4)

<탐 엣 더 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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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 엣 더 팜>은 자비에 돌란이 자신이 직접 구상한 이야기가 아닌 원작을 가지고 연출한 첫 번째 작품이다. 세계적인 극작가 미셀 마크 부샤르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탐 엣 더 팜>은 어긋난 관계를 다룬 치정극이다. 탐(자비에 돌란)이 애인 기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욤 어머니 아가테(리즈 로이)의 집을 방문할 때 문 옆에 붙어있는 주소 ’69’는 이 영화가 꽤 수위 높은 작품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섹스 묘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탐은 이방인의 입장이지만 아가테(리즈 로이)와 기욤의 형 프랜시스(피에르-이브 카디날)와 함께 할 때면 묘한 긴장감에 기를 펴지 못한다. 호모포비아인 듯한 프랜시스는 탐이 기욤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한다. 그렇지만 이 둘은 가학적인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프랜시스에게서 탐을 보호하려는 기욤의 어머니가 개입하면 이 셋의 관계는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이다.

<탐 엣 더 팜> 이전까지 돌란은 20대 답지 않은 안정적인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잦은 영화적 인용과 강렬한 색의 활용으로 과잉이라는 비판에도 시달렸다. <탐 엣 더 팜>이 놀라운 건 그런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는 데 있다. 전작에서 너무 많은 정보의 제공으로 관객을 현혹했다면 이번 영화의 경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설명을 자제함으로써 관객의 해석을 적극 유도한다.  

탐과 프랜시스와 아가테가 처한 관계는 기욤의 과거와 깊은 연관을 맺지만 돌란은 과거의 사연을 철저히 차단한 채 이들의 현재에만 집중한다. 원작이 한정된 무대를 배경으로 한 희곡이기 때문이지만 돌란은 이에서 더 나아가 이들의 관계에서 세계의 폭력 지형도를 본다.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프랜시스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탐은 드디어 아가테의 농장을 떠나 도시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나오는 노래는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Going to a Town>이다.

‘I’m so tired of America’라는 가사가 유독 강조되는 <Going to a Town>은 돌란이 프랜시스와 탐의 관계에서 미국에 종속된 캐나다의 현 상황을 ‘수위 높게’ 읽어내려 했음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 돌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폭력에 대해 인내해야 한다는 믿음을 신앙처럼 갖고 있다. 미국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러시아 또한 그렇지 않은가?”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모자(母子) 또는 연인 사이에  안주(?)했던 돌란은 <탐 엣 더 팜>에서 관계의 폭을 세계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선곡 역시 자비에 돌란 자신이 직접 맡았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