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Wien) 곳을 찾을 수 없는 유럽의 배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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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유럽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하면 대개 영국의 런던이나 프랑스의 파리, 독일의 베를린, 이탈리아의 로마 정도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빈은 북유럽의 독일에서 남유럽의 이탈리아로 넘어갈 때 잠시 들리는 경유지로만 생각했더랬다. 거기다 도시 이름이 빈이 뭐야, 너무 ‘빈’해 보이잖아. 다만 배낭 여행자의 로망, 그러니까 타국에서 이성을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배경이 됐던 곳이 빈이었던 만큼 설레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연! 빈의 서역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와보니 그 어느 도시보다 젊은 남녀가 수두룩하다. 오랜 이동 시간에 지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들의 동요하는 눈빛에는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이 되어보겠다는 전의로 눈동자에는 작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나 또한 빈에 볼 게 없다면 젊은 여자들이나 많이 보자는, 아니 사귀어보자는 생각에 의욕이 마구 불타올랐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비포 선라이즈>의 주인공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이동했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목표 달성에 유리할 거라고 판단했다. 이 영화를 보고 빈을 방문한 배낭 여행자라면 모르긴 몰라도 영화처럼 행동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커플이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배경으로는 이른바 빈의 관광 명소들이 줄을 잇는다. 사랑에 목 마른 20대 답게 ‘프라터 놀이공원’의 회전 관람차 안에서 아름다운 ‘다뉴브 강’을 바라보며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성 마르크 공동 묘지’에서는 어느 묘지를 바라보며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릴 젊음에 대해 아쉬워 하며, ‘오페라 하우스’의 야경을 뒤로 한 채 별이 빛나는 하늘을 담요 삼아 ‘시민 공원’의 풀밭에 누워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낸다. 그렇게 영화를 핑계 삼아 빈의 매력을 만끽하다 보면 멋진 데이트나 해보겠다는 얄팍한 계산일랑 저 멀리 나빌레라~ 떠나버리고 이 멋진 도시를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속 어디멘가 깊은 곳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오스트리아의 빈은 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실제로 음악의 거장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등이 빈을 무대로 활동했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오스트리아 현대 화가들은 퇴폐로 상징되는 강렬한 표현기법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으며 이들 예술가들에 의해 ‘영혼의 치료제’로 추앙 받았던 커피 또한 이곳을 중심으로 문화가 형성되어 오래된 카페는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다. 이처럼 빈이 그 어느 것보다 예술로 흥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적으로 빈에는 서역과 남역, 북역과 중앙역,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역까지 모두 5개의 기차역이 존재한다. 동유럽과 서유럽, 남유럽과 북유럽을 모두 연결하는 곳이기 때문에 유럽의 배꼽으로도 불리는 빈은 유럽의 교통 요충지로 기능해왔다. 다시 말해, 유럽의 모든 문화가 빈에 집결했고 그럼으로써 새롭게 형성된 문화가 유럽 곳곳으로 널리 전파됐던 것이다.

물론 교통 요충지라는 이유로 예술이 발달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비유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을 닮은 국가’이다. 한국의 영토를 일러 호랑이를 연상시킨다고 하는데, 그럼 지도에 표시된 오스트리아의 모습이 자연과 닮았다는 얘기인가? 에이, 농담도. 알프스 산맥이 국토의 3분의 2를 뒤덮고 있는 데다가 이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사는 곳을 최소화한 정책이 오스트리아를 자연과 가깝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빈의 현대적인 시설에 눈길을 보내도 과거의 향수가 떠오르고, 도심을 걷고 있어도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진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빈 도심의 상당 구역이 파괴됐을 때 오스트리아 정부가 가장 먼저 재건을 위해 전력을 기울인 곳이 바로 ‘국립 오페라 극장’이라고 한다. 1869년 5월 15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공연을 시작으로 문을 연 이곳은 여전히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극장, 이탈리아 로마의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 극장으로 평가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현악기와 타악기, 무엇보다 인간의 목소리를 우선으로 치는 오페라야말로 자연과 가장 닮은 음악이라고 하는데 클래식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왜 빈에서 주로 활동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만하다.

오랜 유럽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메뉴에 비엔나커피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고는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빈은 비엔나라고도 불린다.) 블랙커피 위에 휘핑크림을 얹은 커피인데 오스트리아에서는 ‘아인슈페너’라고 부른다. 비엔나커피라는 건 오스트리아에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 줄줄이 비엔나소시지도 오스트리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줄줄이 엮여 있는 소시지는 있다. 그들의 주식이다.) 그만큼 빈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징이 은연 중에 우리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그런데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빈을 무시했으니 그 얼마나 빈해 보이는 처사였던 말인가. 지금의 내게 빈은, 영국의 런던보다도, 프랑스의 파리보다도, 독일의 베를린보다도, 이탈리아의 로마보다도 더 인상에 남은 유럽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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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2011.5.30

네스 호에 괴물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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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에든버러에 온 이유는 에든버러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오후 1시가 되면 ‘펑’하고 포신(실제로는 공포탄)을 쏘아 올린다는 그 유명한 ‘에든버러 성’도, 평평한 돌을 깔아 조성된 마차 도로 위로 거리의 예술가나 기념품점이 즐비해 명소로 각광받는 ‘로열 마일’도, 그러니까 내게는 관심 밖이었다. 내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방문한 유일한 이유는 바로 ‘네시’(Nessie), 즉 네스 호(Loch Ness)에 산다는 괴물 때문이었다.

네스 호는 길이가 36km에 이르고, 수심이 240m나 될 정도로 깊고 어두워 예로부터 정체불명의 괴물이 산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실제로 네시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지금도 줄을 잇는다. 또한 수면 위로 긴 목을 내민 희미한 괴생물체 사진이 유수 언론을 통해 수없이 공개된 까닭에 네스 호는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라서 영국을 여행하는 동안 부러 스코틀랜드를 방문, 네시에게 물려죽는 한이 있어도 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에든버러냐고? 네스 호 관련 여행 상품을 운영하는 여행사가 에든버러에 있거든. 이름하여, ‘하이랜드 투어’(Highland Tours)다. 

하이랜드 투어는 스코틀랜드 북쪽 산악지대인 하이랜드를 둘러보는 관광 프로그램이다. 나는 24파운드를 주고 네스 호와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실제 배경이 되었던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을 당일로 둘러보는 코스를 선택했다. 출발지인 에든버러 성 앞에는 스코틀랜드 전통복장 킬트를 차려입은 가이드 겸 운전자의 인솔에 맞춰 10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16인승 밴에 몸을 싣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대형 잠자리채를 손에 든 이도 있었는데 네시를 자기 손으로 잡겠다며 전의를 불태워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하이랜드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의 목적은 한결같았다. 어떻게 하면 전설 속의 괴물과 조우할 수 있을까,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가이드는 이동하는 내내 스코틀랜드와 앙숙인 잉글랜드를 농담 소재 삼아 입담을 과시하며 투어 참석자들의 열띤 반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에든버러에서 3시간 남짓 달려 도달한 하이랜드 일대 풍경의 첫 인상은 음산하고 감때사나웠다. 가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악마의 손처럼 땅 위로 불쑥 솟아 있고 안개가 사슬을 두른 듯 나무 주변에 자욱하게 퍼져있어 괴물이 출몰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열성 네시 사냥꾼(?)의 잠자리채는 좌석 밑으로 숨겨진 지 오래였고 네스 호가 멀지 않았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투어 참석자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침을 꼴까닥,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렇게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네스 호에는 수면 위로 길게 목을 내민 네시, 가 아니라 네시의 흔적을 찾겠다며 카메라 잡은 손을 최대한 뻗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런 시장 통인 분위기에서 네시는 물론이고 네시 할아비도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다. 네시를 보겠다며 거금을 들여 투어를 신청한 참석자들이 실망감을 드러내려던 그 순간, 가이드는 “네시가 나타났다.”며 일행을 한쪽 방향으로 이끌었다. 전설로만 떠돌던 네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투어 참석자 모두 ‘나의 마음 너의 마음 울렁울렁 두근두근 쿵쿵’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가이드를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정말 네시가 있었다. 사람들의 입이 하나같이 커졌다.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수십 마리가!

그곳은 다름 아닌 네시 테마상품으로 가득한 기념품점이었다. 가이드는 말했다. “실제로 있는 게 중요하겠어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게 중요하지. 네스 호의 전설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에 한 참석자가 물었다. “스코틀랜드 식 농담인가요?“ 가이드가 답했다. ”잉글랜드에서 오셨나요? 예, 맞습니다. 잉글랜드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농담이죠.“ 그제야 사람들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에든버러로 돌아가는 모든 투어 참석자들의 손에는 기념품점에서 구입한 갖가지 네시 인형이 들려 있었다. 그날 난 네스 호에서 괴물을 보았다.  일러스트 허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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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10.11.11

니들이 나폴리 피자 맛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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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폴리를 시드니, 리우 데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美港) 중 한 곳이라고 했는가. 이런 ‘구라쟁이’ 같으니. 미항을 구경하겠다고 보무도 당당히 나폴리 기차역을 나서 산타 루치아 항구로 향하는 길은 악몽에 다름 아니었다. 길을 건너겠다고 도로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정지신호 따위 개나 줘버리라며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자동차들, 관광객을 상대로 각종 수작 따위나 걸어보려는 현지인들, 가까스로 도착한 항구 주변의 파리 떼처럼 들러붙는 잡상인들까지. 이 지경에 이르자 나폴리 탈출이 지상 최대의 목표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요기나 하고 떠나자는 생각에 불쑥 들어간 피제리아(Pizzeria 우리말로 피자집)에서 나폴리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뿅~하고 사라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됐다. 두꺼운 도우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잔뜩 뿌리고 토마토와 바질 잎을 얹어 간단하게 구워낸 마르게리타(Margerita) 피자 한 조각을 먹었을 뿐인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나폴리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한국과 달라서 먹고 싶은 양만큼만 조각으로 잘라 무게를 잰 후 가격을 제시한다. 그러다보니 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별 짓을 다해도 경제적 부담이 별로 없으니, 그때부터 나폴리와 같은 천국이 따로 없는 것이다. 

여느 이탈리아 도시와 비교해 나폴리의 피자 맛이 월등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폴리 피자는 이탈리아에서도 최상급 평가를 받는다. 왜일까. 나폴리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오바이트로 피자 해먹는 소리냐고. 그냥 맛이 아니라 ‘먹는’ 맛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유독 자국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인들은 맛은 당연히 좋다는 전제 하에 조리법에 민감할 정도로 반응한다. 나폴리의 피자가 바로 그렇다. 조리법과 모양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니 먹는 맛에서 타 지역을 압도하는 것이다.

일단 나폴리 피자는 빵이 두껍다. 이건 이탈리아 남부의 특징이다. 피자의 가장자리가 부풀어 올라 있으며 반죽부터가 두툼하다. 이는 토핑과 강한 치즈 맛에 가린 빵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한 나폴리 피자 달인들의 세심한 배려다. 무엇보다 나폴리 피자의 백미는 나폴리 만(灣)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폼페이를 최후에 이르게 한 바로 그 화산!)에서 나온다. 베수비오 화산이 용암 대신 피자를 분출한다는 건 아니고 쩝. 피자를 화덕에 굽는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특별히 베수비오 화산에서 공수한 돌을 사용해 구운 피자를 최고로 친다. 베수비오 화산 돌에는 구멍이 많은데 그 안에 열을 품었다가 피자 전체에 그 열을 골고루 전달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해서 익힌 피자의 뒷면에는 구울 때 생긴 구멍 자국들로 시꺼멓다. 간혹 이런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피자를 태워먹었다고 행패… 까지는 아니지만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단다. 먹어도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나폴리 피자의 브랜드처럼 각인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다.

어느 피제리아를 가나 입구에 긴 행렬이 늘어서있고 주문한 피자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복권에 당첨된 것 마냥 희열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나폴리의 피제리아에는 피자와 관련한 일화가 많다. 미국의 전(前) 대통령 클린턴은 피자를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 방문 시 나폴리에서 가장 유명한 ‘Pizzeria di Matteo’의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 ’왜 내가 그 전까지 피자를 안 좋아했는지 모르겠다.’며 그 자리에서 두 판을 먹어치웠다는 클린턴의 일화는 지금도 나폴리 피자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전설로 통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클린턴의 푸념에 대한 ‘Pizzeria di Matteo’ 주인의 답변이다. “피자헛 따위나 먹어대니까 피자를 좋아할 리가 없지.” 실제로 이탈리아에는 피자헛이 없다. 대신 나폴리 피자가 있다. 나는 나폴리에서 탈출하려는 계획을 집어치우고 그 길로 피제리아 순례에 나섰다. 그리고 나폴리(의 피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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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10년 9월 12일

페리 라세즈 무덤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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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가볼만한 곳으로 페리 라세즈 무덤(Cimetiere du Pere Lachaise)을 추천해놓은 가이드북을 보면서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며 코웃음 쳤더랬다. 무덤에 무슨 볼거리가 있다고 추천씩이나, 뇌까리면서 말이다. 근데 웬걸, 파리 도심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소개하기를 파리를 대표하는 무덤이란다. 그렇다면 파리지엔들에게 무덤은 혐오시설이 아니라는 건가. 아니란다. 그들에게 무덤은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란다. 이거 참, 명절 때 산소 아니면 무덤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설명이다. 어쩔 수 있나, 한 번 방문해볼 수밖에.

세상에나! 입구에서부터 사람이 북적인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페리 라세즈 무덤이 파리의 관광 명소인 것인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정말 오기를 잘했어. 음화하하하.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손에 사진 아니면 CD를 가지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도어즈’ CD와 ‘짐 모리슨’ 사진이다. 그들에게 듣자하니 1960년대 후반 전 세계 음악 팬들을 매료시켰던 록그룹 도어즈의 리드싱어 짐 모리슨의 묘지가 이곳에 있단다.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음악도 추억할 겸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들의 얘기였다.

실제로 페리 라세즈를 찾는 방문객의 대다수는 짐 모리슨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한다. 지난 2001년 프랑스 관광청은 여행자를 대상으로 짐 모리슨 묘지를 찾는 방문객의 수를 계산해보았다고 한다. ‘럴수럴수 이럴 수가!’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노트르담 성당, 베르사이유 궁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수치를 기록했단다. 매년 200만 명 이상의 다녀간다고 하니 여느 관광명소가 부럽지 않은 수치다. 페리 라세즈를 설명하면서 도어즈의 짐 모리슨을 언급하지 않는 건 추리소설을 말하면서 셜록 홈즈를 빼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페리 라세즈가 짐 모리슨 때문에 먹고 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짐 모리슨의 묘지 앞에만 유독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지고 온 사진과 CD, 팬레터와 꽃 등을 비석 앞에 경건히 놓으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뒤에 도열한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어즈의 히트곡 <Light My Fire> <Riders on the Storm> 등을 속삭이듯 부르기도 한다. 국적과 나이도 다양해서 미국에서 왔다는 후덕한 아줌마, 칠레에서 온 섹시한 소녀, 일본의 인형 같은 여인까지. 아, 참! 한국에서 온 꾀죄죄한 나도 있지. 그나저나 내게는 참 별난 광경이다. 이를 두고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걸까.

페리 라세즈 뿐만이 아니다. 몽마르트 묘지(Cimetiere de Montmartre)에도 그렇게 사람이 몰릴 수가 없다. 프랑스의 지성으로 불리는 대문호 에밀 졸라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와 이야기하기 위해, 세기의 배우 이브 몽탕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몽마르트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관념이 아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을 뿐 끊임없이 산 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산 자는 듣지 못하지만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우리는 삶처럼 죽음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무덤을 산책로 삼아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또는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본다는 건 파리에서 만큼은 결코 낯선 광경이 아니다. 파리의 무덤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전혀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나 역시 짐 모리슨 팬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함께 <Light My Fire> <Riders on the Storm>를 맘껏 불러 젖혔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무덤에서는 그렇게 돼지 멱따는 소리로 크게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나. 아무튼 파리의 무덤은, 페리 라세즈는 특별한 공간으로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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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FC바르셀로나, 클럽 그 이상의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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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여행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환상적인 건축물을 보고 싶어서? 아니. 바르셀로나 출신의 후안 미로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의 세기의 명작을 감상하고 싶어서? 아니. 그럼 바르셀로나에 뭣 하러 갔냐고? 축구 보러 갔다, 고 하면 코웃음 치시려나. FC바르셀로나는 내가 열렬히 응원하는 두 팀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FC대한민국, 바로 국가대표 팀이다. -_-;)

리오넬 메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티에리 앙리 등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구성된 FC바르셀로나는 기술 축구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하는 팀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얼마 전 타계한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도 FC바르셀로나의 회원이다.) 내가 응원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프랑코 군부 독재 시절 억압받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유일한 저항의 수단은 FC바르셀로나였다. 프랑코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은 마드리드의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는, 그러니까 목숨 걸고 이겨내야 할 프랑코의 군부 독재와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FC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래시코’(El Clasco) 더비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출발한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에게 FC바르셀로나는 그래서 특별하다.

프랑코의 독재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홈구장인 누 캄프(Nou Camp)는 마드리드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빨간 줄과 파란 줄 유니폼은 카탈루냐(바르셀로나가 속한 지역의 지명) 깃발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국기였다. 그런 이유로 FC바르셀로나의 모토는 ‘클럽, 그 이상의 클럽’(mas que un Club)이다. 누 캄프 구장은 바르셀로나의 시내 중앙에 성전처럼 모셔져 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니폼에 광고를 넣지 않는 전 세계 유일의 클럽이었다. (지금은 유니세프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광고 수익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고 있다.)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탈루냐인은 아니었지만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관람하는 동안만큼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들에게 빙의하고픈 심정이었더랬다. 그랬건만, ‘우째’ 이럴 수가! 1월부터 영국의 런던을 시작으로 독일, 이탈리아 등을 거쳐 시계 방향으로 진행된 유럽 여행이 약간 지연되면서 6개월 만에 스페인에 도착하니. (유럽의 축구 일정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끝으로 5월 말에 마무리된다.) 아 글쎄, FC바르셀로나의 경기 일정이 이미 끝난 상태였던 것이었다. 축구의 신도 참 무심하시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경기장의 풀이라도 뽑아갈 생각에 미리 준비해온 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누 캄프 투어를 신청했다.

1956년 9월 24일 개장한 누 캄프는 최대 12만 명까지 입장 가능한 대규모 구장으로, FIFA가 선정한 세계 10대 축구장으로 꼽힌단다. (호텔로 치자면 별 다섯!) 그럼 뭐해,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의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나간 옛 애인의 사진만 바라보며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는 기분이랄까. FC바르셀로나 박물관을 관람하지 않았더라면 ‘나 마드리드로 돌아갈래~’ 레알 마드리드로 응원 팀을 갈아탔을지 모를 일이다.

첫 전시물부터 마드리드를 향한 바르셀로나 시민의 분개가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1974년 2월 17일자 흑백 사진 속 마드리드에서 열렸던 엘 클래시코 더비의 전광판에 ‘REAL MADRID 0:5 BARCELONA’ 스코어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던 것. 바르셀로나에 방문하기 전 들렸던 마드리드의 레알 마드리드 박물관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각종 우승컵을 전면에 배치하고 데이비드 베컴, 지네딘 지단, 라울 곤잘레스 등 스타 선수들의 사진과 유니폼으로 도배한 레알 마드리드 박물관과 달리 FC바르셀로나 박물관에서는 말 그대로의 ’역사‘가 느껴졌다.

여기에 FC바르셀로나 창단 75주년을 기념해 제작했다는 후안 미로의 그림과 유니폼을 걸치고 공차는 자세를 취한 살바도르 달리의 사진까지 더해지면, 과연 ‘클럽, 그 이상의 클럽’이라는 모토가 산 넘고 물 건너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이상한 동양인의 가슴팍에도 팍팍! 하고 와서 박히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선수들의 땀과 열정을 지근거리에서 관람하는 것에 비하리. 누가 나 좀 바르셀로나에 다시 보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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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10.5.3)

오줌싸개 소년, 소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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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떠나 벨기에 브뤼셀로 떠나는 날. 런던의 숙소에서 짐을 챙기는 내게 한 스태프는 노스트라다무스라도 되는 양 ‘행복 끝, 고생 시작’이라며 다음 여행지에서의 고난을 예고했다. 워낙 관광지로 유명한 런던인지라 그에 비해 볼거리가 많지 않은 브뤼셀에서 여행자가 느끼는 상대적인 실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는 것.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런던 워털루 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브뤼셀의 미디 역에 도착하자 나를 반기는 건 3월의 봄 날씨에도 불구하고 휑한 찬바람이었다.

말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는 브뤼셀의 시민들, 역사의 온기가 바싹 말라버린 듯한 차가운  빌딩 숲 등 런던에 비해 활기 없는 이 도시에 오니 말 그대로 막막하다. ‘Van Gogh Club’이라는 이름에 혹해 미리 예약하고 찾아간 유스호스텔의 방에는 떨렁 침대 한대뿐. 깔끔한 감옥 같은 인상까지 더하니, 여행에도 궁합이라는 게 있으면 당장에 파혼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불안과 실망감으로 점철된 브뤼셀에서의 첫 인상을 시원하게 배설하고픈 마음에 이 도시의 명물이라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Manneken-Pis)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오줌싸개 옆에서 안 좋은 기억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갈겨(?)버릴 테다, 하는 기세로 보무도 당당히 목적지인 그랑 플라스(Grand Place) 광장을 찾았으나 어느 외진 곳에 숨어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달라, 차 두 대 간신히 지나갈 듯한 도로 한쪽 귀퉁이에서 과감하게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오줌싸개 소년 동상을 찾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에게, 이렇게 번데기만할 수가” 어허! 야한 상상은 금물. 소년의 고추 크기가 아니라 동상의 크기 자체가 상상한 것보다 너무 작다는 얘기다.

키가 겨우 50cm밖에 안 될 정도로 왜소한 오줌싸개 소년 동상의 모습은 관광지로서의 브뤼셀의 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 같았다. 하지만 1619년 세워진 이 동상이 왜 브뤼셀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지는 이와 관련한 전설을 보면 알만하다. 16세기경 프랑스군이 브뤼셀을 침략해 도시에 불을 지르자 한 소년이 오줌을 싸 불을 껐다는데 그가 바로 오줌싸개 소년 동상의 장본인인 것.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라니. 소년의 오줌발이 강해봤자 수도꼭지에서 졸졸 흐르는 정도 아닌가. 브뤼셀의 빈약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벨기에는 전쟁이 빈번했던 유럽에서도 가장 피해가 적은 나라였다고 한다. 그 같은 배경 덕에 일종의 중립국 지위를 부여 받아 브뤼셀에 EU 본부가 세워졌다. 다시 말해, 브뤼셀의 평화의 상징인 셈이다. 쳇, 평화는 소년만 지키나. 소녀도 오줌 쌀 줄 안다고. 전설의 내용도 맘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2~30명씩 떼로 몰려다니며 오줌싸개 소년 동상을 향해 기관총처럼 카메라 플래시를 쏘아대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내겐 더 큰 볼거리였다. 우르르~ 구름처럼 몰려왔다 기념사진만 촬영한 후 슝~하고 사라지는 그네들의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나도 모르게 그들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또 다시 불어난 눈덩이처럼 대오를 이뤄 기민하게 이동한 후 받들어 총 자세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우리의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오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오줌싸개 ‘소녀’ 동상!(Jeanneke-Pis)

많은 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적나라한 포즈를 취한 채 ‘아무튼, 내 할 일을 하련다.’는 자세로 일을 보고 있는 오줌싸개 소녀 동상을 보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 레스토랑이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유치하려는 목적으로 동상을 세웠다는데 오라는 이는 안 오고 이를 훔쳐가려는 사람만 늘어나 철조망으로 철저 봉쇄해놓았다는 것이 소녀의 전설 아닌 전설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설 따위 눈에 들어올 리 없는 나는 속으로 ‘역시 브뤼셀의 평화는 소녀도 함께 지켰어.’ 하며 감탄사를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브뤼셀에 볼거리가 없다고 했는가. 누가 브뤼셀 시민들이 무표정하다고 했는가. 그제야 브뤼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앞마당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아름다운 그랑 플라스 광장,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대형 쇼핑몰 갤러리 샹 위베르(Galeris Saint Hubert), 그리고 오줌싸개 소년과 소녀 커플(?) 동상까지. 브뤼셀만큼 놀라운 볼거리가 있고 거기다 ‘빅’유머까지 있는 도시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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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사보
(2010.3.8)

로맨틱 가도가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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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서 퓌센(Fussen)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 창밖으로 지나가는 ‘로맨틱 가도'(Romantische Strasse)를 바라보면서 이름 한 번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도로 주변으로 중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구(舊)시가지부터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고성(古城)들, 그리고 풍경 화가의 그림에서나 봤음직한 울창한 숲까지. ’캬~ 낭만 도로라니 이름 한 번 죽이는 걸‘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얼굴 표정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껍질보다 더하기로 악명(?) 높은 독일인들이 프랑스 파리에나 어울릴법한 이름을 지을 수 있다니 그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개그본능이 발동한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옆 좌석에 우연히 동석하게 된, 독일여행이 처음이라는 한국인 대학생에게 알은 척을 했다. “로맨틱한 도로를 이렇게 남자 둘이 앉아서 가게 되다니 우리도 참 낭만이라고는 쥐뿔도 없죠. 하하하” 재치 넘치는 나의 개그에 호탕하게 웃을 줄 알았던 대학생이 글쎄 피식 웃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 녀석이 외국에 나와 있다고 고새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건가?’ 물론 아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로맨틱 가도의 로맨틱은 ‘낭만적’이 아니라 ‘로마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Romantische의 Romantis를 독일어의 낭만으로 오독하고만 나의 이 짧은 지식이란. (;–;)

나보다 10살은 족히 어려보이는 대학생은 어린 아이 대하듯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독일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이면서 독일 관광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로맨틱 가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뷔르츠부르크(Wurzburg)부터 남쪽의 퓌센까지 약 400km에 이르는 도로를 일컫는 말이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쭉 더 내려가 스위스의 알프스를 넘으면 이탈리아의 로마까지 갈 수 있다고 하여 로맨틱 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아이고, 한 수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이참에 로맨틱 가도는 어떻게 조성됐는지도 알려주시죠. (^^;)

원래 이곳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는 세계2차 대전 당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대학생의 얘기였다. 미영 연합군의 공세에 시달리던 독일의 나치가 위기 타파를 위해 로맨틱 가도를 이용했다는 것. 미영 연합군을 로맨틱 가도로 유인해 이들이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있을 동안 나치군(軍)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후 패전국이 된 독일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지우기 위해 로맨틱 가도를 관광지로 조성했다는 것이 그가 알려준 유래의 정체였다. 독일 정부는 이곳을 세계적인 관광지로 키우기 위해 옛 모습을 잃지 않도록 체계적인 관리를 해왔고 그런 과정을 거쳐 로맨틱가도의 관광지로 거듭난 곳이 무려 32군데란다.

그런데 독일 여행이 처음이라면서 어쩜 그리 로맨틱 가도에 대해서 전문가 뺨 칠 정도이신가요. 그는 한 장의 지도를 내게 내밀었다. 여행 안내소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로맨틱 가도의 지도였다. 나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온통 영어로 설명이 되어있어 지도만 보고 관심을 끊었던 것인데 역시 요즘 대학생들의 영어 실력은 뛰어나다니까. 이왕 없는 지식 ‘뽀록’난 김에 나 같은 사람이 갈만한 로맨틱 가도의 관광지가 어디냐고 그에게 물어봤다. 어린 대학생은 잠시간 지도의 설명을 살펴보더니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Schloss Neuschwanstein)에 가볼 것을 강력 추천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라면 한글로 된 나의 가이드북에도 자세히 설명돼있었다. 독일의 가장 미스터리한 왕으로 평가받는 루트비히 2세가 기획한 성으로, 평생토록 집착해왔던 백조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접목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이었다. 녀석 나의 귀족적인 풍모를 언제 또 알아보고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권유하다니, 요즘 대학생들은 참 예의가 발라. 그는 내 속마음을 꿰뚫어봤다는 듯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디즈니랜드의 성 모양이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모델로 한 것이라며 내 정신연령이 디즈니에 가까운 것 같아 추천해줬다나. 나는 퓌센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그만 중간에서 하차하고 말았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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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1.4)

잘츠부르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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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는 빈에 이은 오스트리아의 제2의 도시다. 모차르트의 고향으로 유명했지만 1965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뮤지컬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로 더욱 명성을 얻었더랬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7남매의 아버지이자 대령인 폰 트랩(크리스토퍼 플러머)과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교사 마리아(줄리 앤드류스)의 사랑을 그린 작품. 극중 잘츠부르크의 초록빛 풍광을 배경삼아 주인공들이 부르는 ‘에델바이스’와 ‘도레미 송’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먹었던지 인구 15만의 소도시에 매년 3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 정도다.

잘츠부르크의 극성스러운 <사운드 오브 뮤직> 사랑을 느낀 건 숙소로 정한 어느 유스 호스텔에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에델바이스’의 전주곡이 은은하게 귓가를 간질이고 이곡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도레미 송’이 그 뒤를 잇는 식이다. 이 두 곡이 쉬지 않고 반복되는 것을 보니 모르긴 몰라도 이 유스 호스텔에 하루만 묵으면 영화를 보지 못한 이라도 ‘에델바이스’와 ‘도레미 송’을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거릴 정도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TV가 놓인 곳에서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으니, 그것 참.

무언의 압박으로 다가온 탓일까. 이곳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하지 않으면 잘츠부르크 시민들에게 몇 대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에 하루 일정을 계획에도 없던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에 바치기로 전격 결정했다. 투어의 동선을 확인할 겸 유스 호스텔 프런트에 도움을 요청하니 아니나 달라, ‘Sound of Music Tour’라고 적힌 전단지 10여 종을 내어놓는다. 버스를 타고 영화 속에 등장했던 주요 장소를 둘러보는 것인데 차안에서 ’에델바이스‘ ’도레미 송‘에 맞춰 박수를 치며 따라 부른다는 스태프의 친절한 설명을 듣는 순간, 투어에 대한 생각이 싹 가시고 말았다. (그 놈의 <사운드 오브 뮤직>이 뭔지!)

대신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장소만 이동하기로 결정하니, 그 범위는 미라벨 정원과 논 베르크 수도원으로만 좁혀진다. 사실 영화 속 배경은 잘츠부르크뿐만 아니라 근교도시에까지 퍼져있어 전문투어의 도움 없이 개인적으로 돌아다니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 한 예로, 폰 트랩 가문의 저택은 프론부르그 성과 레온폴스크룬 궁 두 군데서 이뤄졌다. 그중 프론부르그 성은 잘츠부르크에서 1시간 넘는 거리에 위치한 아이겐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쉽게 갈 수 없는 것이다.

모 아쉽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투어를 포기함으로써 ‘에델바이스’와 ‘도레미 송’의 악몽에서는 벗어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내 인생의 영화’ 정도로 생각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옥과 같은 장소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특히 미라벨 정원은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다. 가장 유명한 장면이랄 수 있는, 마리아와 7남매가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은 여러 장소에서 촬영돼 편집된 것이지만 피날레를 장식하는 건 잘 정돈된 정원과 다채로운 색의 꽃들이 만발한 미라벨 정원이다. 그뿐인가. 이곳의 조그마한 유리 궁전에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폰 트랩과 마리아가 환상적인 첫 키스와 함께 결혼 약속을 하지 않던가.

미라벨 정원의 유리 궁전 앞에 다다라 이 장면을 생각하고 있으니 갑자기 영화 속 감동의 순간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초췌한 몰골로 외롭게 여행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올라 울컥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딘가에서 위로라도 받지 않으면 너무 외로운 나머지 미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거짓말처럼 ‘에델바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스 호스텔에 도착하면 아리따운 여자 친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지겹도록 귀에 들어와 박혀 이제는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지는 ‘에델바이스’와 ‘도레미 송’이 나를 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는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 놈의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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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10.15)

투우, 스페인이 죽음과 나누는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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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투우장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드리드의 ‘라스 벤타스 투우장’(Plaza de Toros Ventas)으로 향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심성 착한 나는(악! 주변에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투우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동물학대에 가까운 경기를 TV로 접하면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다만 마드리드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투우 포스터를 보면서 약간의 호기심이 인 것도 사실이다.

1929년에 건설된 라스 벤타스 투우장은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수준 높은 경기력을 선보이는 까닭에 스페인 투우의 메카로 통한다. 그런 명성에 걸맞게 경기장 규모도 엄청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라는데 관객석이 무려 2만 3천석이다. 한국의 청도 소싸움 대회 정도를 연상했는데 웬걸 축구 경기를 가져도 될 정도의 운동장 크기에 그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녁 7시에 시작된 경기는 총 여섯 게임, 즉 여섯 마리의 소를 쓰러뜨린 후 9시가 돼서야 막을 내렸다. 열댓 명의 투우사가 소 한 마리를 상대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끝내 목숨 줄까지 끊는 광경은 과연 스펙터클했다. 하지만 두 게임, 세 게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자 관중석을 꽉 매운 2만 3천 명의 관중이 한꺼번에 뱉어내는 하품 소리에 그만 귀가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 마침 네 번째로 등장한 투우사가 황소의 뿔에 뺨이 스쳐 피를 흘리는 아찔한 장면을 연출, 경기장은 일순 긴장의 ‘도가니탕’에 푹 빠져버렸다.

나 역시도 순간적으로 핏빛 화하는 광경에 관심이 동했다. 근데 그 뿐이다. 황소 한 마리를 운동장 구석에 몰아넣고 무자비하게 린치를 가하는 모습에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해서 목숨을 잃은 황소가 곧바로 조각조각 해체되어 인근의 스테이크 집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에는 평소 좋아하던 스테이크 생각이 저 멀리 나빌레라 사라질 정도였다.

근데 화가 피카소는 투우를 두고 언어 없이도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했단다. 예로부터 스페인 사람들이 다른 민족과 달리 유난히 죽음에 매혹을 느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스페인에서 죽음을 주제로 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은 그렇게 예술로써 죽음과 대화를 나눈다. 투우도 그렇다. 스페인 민족에게 투우는 죽음과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의식이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다가서는 대화다. 그들은 검은 황소로 상징되는 죽음에 맞서는 상황이야 말로 인간의 정신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죽음에의 집착을 그들은 ‘두엔데’(Duende)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예술은 모두 이 두엔데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이들은 투우에 관한 소식을 신문의 스포츠면이 아닌 문화면에서 다룬다. ’마타도르(Matador)‘라 명명된 투우사가 사고를 당하거나 황소의 뿔에 받혀 죽기라도 하는 날엔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 것도 다 그런 문화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마타도르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운명에 처하는 존재다. 투우장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건 일상이다. 연간 4만 마리에 육박하는 황소가 스테이크 행(?)에 처해질 뿐 아니라 그 숫자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투우사 역시도 영웅이 되는 대가로 종종 그에 해당하는 목숨 값을 내어놓기도 한다.

스페인 전역에 산재해 있는 투우장 앞에서 영웅을 기리는 기념비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타도르의 위상을 반영하듯 라스 벤타스 투우장에 도착하자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도 스페인 투우사(史)의 전설로 기록되어 있는 안토니오 비엔베니다와 호세 쿠베로의 철제 동상이었다. 불의의 일격에 뇌사상태에 빠진 후 목숨을 잃고 영웅의 지위를 얻은 것이다.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이런 건가. 그렇다면 3류 글쟁이의 삶을 살고 있는 나도 평생에 남을 역작을 만들다 과로로 쓰러지면 이들과 같은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 아악! 허튼 소리 하지 말라고? 그 시간에 지구촌 줌인 기사나 재미있게 쓰라는 무명 독자들의 항의 소리가 황소 뿔처럼 날카롭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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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7.27)

파리의 카페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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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도착해서 본 가장 신기했던 광경은 바로 카페였다. 방글라데시의 인구밀도를 재현한 듯 답답할 정도로 따닥따닥 늘어서있는 원형의 테이블들. 그런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간격에도 아랑곳없이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파리지앵들. 듣자하니, 프랑스에는 6만여 개의 카페가 있다고 한다. 그중 6분의 1에 해당하는 1만 여개의 카페가 파리에서 성업 중이란다. 파리의 면적이 대략 100평방km니, 1평방km당 100여개의 카페가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카페가 많은 것일까? 파리지앵에게 카페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왜 특별한 걸까? 파리의 카페가 특별하기 때문이란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카페는 그저 음료 한잔 시켜 놓고 수다를 떠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파리의 카페는 특별해진 것일까? 나도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잔 시켜 마셔봐야겠다.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라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제르맹 데 프레(Saint Germain des Pres) 거리는 문학인의 공간으로 유명하다. 수많은 문인들이 이곳에 밀집한 카페들을 수시로 드나들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레 되 마고는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온 선두주자라 할만하다.

레 되 마고는 지금으로부터 124년 전인 1885년에 문을 열었다. 원래 중국산 비단을 판매하는 가게였는데 그래서 레 되 마고는 ‘2개의 중국인형’을 뜻한다. 입구 주변에 진을 치고 앉아 커피를 마시는 무리들을 뚫고 카페에 들어서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벽 위에 조각상 하나가 떡하니 걸려 있다. 실존주의로 유명한 장 폴 사르트르다. 그는 이곳에서 대표작 <구토>를 저술했다고 한다.

“아니 사르트르는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었단 말입니까?”라고 나는 갸르송(Garcon, 프랑스에서 웨이터를 지칭하는 말)에게 묻고 싶었지만 불어 실력이 형편없어 동행한 친구에게 대신 부탁했다. 갸르송 왈, 글 쓰는 틈틈이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었단다. 음, 사랑의 힘을 빌려 글을 썼군.

문인은 아니었지만 피카소도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처음 도라 마르를 보았을 때 옆 테이블에서 한쪽 손을 테이블 위에 펴고 주머니칼로 손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장난을 치고 있더란다. 그러다가 손을 베어 피를 흘렸는데 이 광경에 넋을 잃은 피카소가 대뜸 작업을 걸었고 그래서 이들은 레 되 마고에서 피처럼 강렬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음, 유명인의 사랑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그리고 피카소가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시를 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글을 쓰는 이들이 모두 그런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닐 게다. 계속해서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개 카페에서 글을 쓰게 한 걸까? 나는 “공짜 커피가 아닐까?”라고 동행한 친구에게 진지하게 말했다가 물 컵의 물을 뒤집어 쓸 뻔했다.

레 되 마고는 파리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인 동시에 ‘레 되 마고 문학상’으로 또한 유명하다. 1933년에 제정된 이 상은 첫 해 100프랑의 상금을 내걸고 신진작가를 발굴한 이래 지금까지 70년이 넘도록 문학상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상금 액수가 무려 8,000유로라고 하는데 물론 중요한 건 액수가 아니다. 일개 카페에서 주관한 문학상이 신진작가의 등용문이 되고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할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으며 프랑스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가를 꿈꾸는 이가 레 되 마고를 찾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카푸치노를 한 점의 거품도 없이 모두 핥아 마신 후 레 되 마고를 떠나려는 찰나 갸르송이 내게 물었다. “당신도 글을 쓰신다고요. 그렇다면 이곳에서 무엇을 느꼈습니까?” 유창한 불어로 답해주고 싶었지만 미소 한 번 지어주고 서둘러 레 되 마고를 떠났다. 대신 마음속으로 이렇게 답해줬다. ‘정말 너무합니다. 카푸치노 한잔이 8유로라니요. 너무 비쌉니다. 저는 글쓰기를 포기하렵니다.’ 과연, 파리의 카페는 특별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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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사보
(2009.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