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즈는 홈즈일 뿐 오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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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셜록 홈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극명히 엇갈리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기자시사회를 통해 최초 공개했을 때부터 예상된 바였다. <셜록 홈즈>가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탐정 캐릭터를 액션 영웅으로 탈바꿈시킨 영화로 알려지면서 기자들 사이에서 이미 호불호 논쟁이 뜨거웠던 것이다. ‘홈즈는 성룡이 아니다 vs 홈즈는 원래 복싱에 능하다’, ‘왓슨이 언제 그렇게 홈즈와 맞먹었나 vs 홈즈와 왓슨은 주종관계가 아니다’ 라는 식의 구도로 진행된 논란은 결과적으로 영화의 흥행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아바타>와 <전우치>의 압도적인 2강 체제 속에서도 <셜록 홈즈>는 3주 연속 3위를 굳건히 하며 꾸준한 흥행 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홈즈의 변신(?)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을 못 느끼는 쪽이다. (오히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내치>에서 보였던 가이 리치 감독 특유의 개성이 상당 부분 제거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가이 리치는 영화 시작과 함께 주먹질에 능한 홈즈를 클로즈업하며 변화를 선전포고하고 홈즈와 왓슨의 관계를 거의 동성애자 커플에 가깝게 묘사해 논란을 부추긴다. 셜록 홈즈의 첫 번째 소설 <주홍색 연구>(1887)가 등장한 지 100년도 훌쩍 지난 마당에 현대적인 기준에 맞춰 캐릭터에 변화를 꾀한 것이 불가피했다는 투다. 사실 이 같은 태도는 가이 리치가 처음은 아니다. 이는 셜록 홈즈의 세계에서 그리 낯선 광경이 아닌 것이다.

홈즈 소설은 안작(贋作)으로도 불리고, 모작(模作)이라고도 표기되는 소위 패러디가 가장 발달한 시리즈다. 저자인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4편의 장편과 53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면 홈즈를 사랑하는 작가와 전 세계 산적한 팬들이 완성한 ‘그들 각자의 셜록 홈즈 소설’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최초의 셜록 홈즈 안작소설로 평가받는 <페그람의 수수께끼>는 코난 도일이 살아생전이던 1892년에 발표됐다. 그 이후 지금까지 매년 수십 종의 신간 안작소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인데 셜록 홈즈의 안작소설 역사 역시 100년이 넘은 셈이다. 이 같은 배경의 결정적인 계기는 코난 도일이 1893년에 발표한 <최후의 사건>이다. 이 단편은 셜록 홈즈가 ‘범죄의 왕’으로 불리는 모리아티 교수를 스위스 마이링겐의 라야헨바흐 폭포로 유인해 함께 떨어져죽은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그 당시 코난 도일은 홈즈에게로 향하는 팬들의 관심이 자신을 월등히 넘어서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 ‘챌린저 교수 시리즈’로 명명된 모험소설에 더 관심이 많았던 코난 도일은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집필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자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결국 홈즈의 죽음이라는 초강수를 두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홈즈를 되살려내라는 독자의 항의가 빗발쳤고 코난 도일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후에 코난 도일은 다시 홈즈 소설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팬들은 안작소설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이처럼 안작소설의 역사가 깊고 너르다보니 개중에는 유명 작가의 작품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코난 도일 자신부터가 홈즈와 왓슨이 등장하는 두 편의 안작소설을 썼고 마크 트웨인과 오 헨리, 존 딕슨 카 등과 같은 당대의 작가들은 물론 코난 도일의 아들인 에이드리언 코난 도일도 패러디를 통해 홈즈 소설에 대한 욕구를 채웠다. 또한 <Y의 비극>으로 유명한 앨러리 퀸은 서른 두 편의 안작소설을 모아 <셜록 홈즈 앤솔로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의 홈즈 안작소설이 코난 도일이 창조한 이야기와 극중 분위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는 것에 반해 최근의 작품들은 기존 이미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주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포소설에 가까운 작품이 있는가 하면(<셜록 홈즈의 유언장> 봅 가르시아) 홈즈가 93세라는 노령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 미치 컬린) 심지어 홈즈와 왓슨이 게이 커플로 등장하는 팬픽도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 역시 최근의 경향을 따르는 일종의 안작영화로써 기능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홈즈의 안작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까닭에 액션에 능한 그를 두고 유난히 영화에 대한 논란이 크게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국내에 들어온 건 이미 백년도 훨씬 전이지만 홈즈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는 채 10년이 넘지 않는다. 지금은 안작소설까지 소개되는 단계지만 채 10종이 되지 않는 까닭에 홈즈는 여전히 추리하는 탐정의 이미지로 견고한 것이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독자는 셜록 홈즈 소설의 완전한 판본을 접하지 못했다. 주로 아동용으로 소비됐고 그나마도 일본어 판본을 번역한, 다시 말해 원작을 중역한 작품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 홈즈 소설 시장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은 2002년 1월 출판사 황금가지를 통해 소개된 ‘셜록 홈즈 전집’이었다. <주홍색 연구>를 시작으로 <셜록 홈즈의 사건집>까지 9권이 소개되는 동안 홈즈 소설은 일시적인 붐을 넘어 미스터리 소설이 국내 출판 시장에 단단하게 발을 붙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출간 1년도 되지 않아 8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기록할 정도였는데 이는 전혀 예상 밖의 결과였다.

셜록 홈즈 소설을 기획한 당시 황금가지 편집부의 팀장이었던 최준영 씨(현 번역가)는 “기본적인 독자층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베스트셀러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당시에 형성되던 마니아 문화의 증가가 셜록 홈즈 시리즈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한다. 그래서 “특별히 한국인들이 셜록 홈즈에 열광한다기보다는 한국에도 셜록키언(sherlockian 홈즈 소설의 열혈 팬들)이 증가했다고 보는 게 맞는 표현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는 많은 이들이 홈즈 소설을 청소년용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셜록 홈즈 전집이 원본에 최대한 충실했기 때문에 나온 효과로 보인다. 최준영 씨는 셜록 홈즈 전집을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했던 사안에 대해 “무엇보다 원작의 분위기와 내용을 전달하는데 충실하자는 게 제1의 원칙이었다.”며 “완역을 중요시했고 캐릭터나 문체 등의 일관성을 위해 한 사람의 번역자와 작업했으며 가능한 많은 외국의 판본들을 구하여 참조했다.”고 밝혔다. 셜록 홈즈 탄생 한참 뒤에야 이뤄진 제대로 된 번역이었지만 폭발적인 반응은 한편으론 홈즈 소설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기도 하다.

국내는 물론이고 셜록 홈즈에 대한 인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셜록 홈즈처럼 백년이 넘게 사랑 받아온 캐릭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탐정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다. 안 그래도 최준영 씨는 “인류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들 중에서 셜록 홈즈처럼 강력한 이미지를 지닌 주인공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셜록 홈즈가 오랜 세월 사랑 받는 이유 중 하나의 증거로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는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구체적으로 안작소설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홈즈 안작소설은 과거 홈즈 팬들의 사랑이 창조적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면서 또한 미래의 인기를 담보하는 보증서이기도 하다. 이 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가 전혀 허무맹랑한 홈즈 관련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가이 리치는 홈즈의 액션도 사실은 추리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홈즈가 극중 권투경기를 치르면서 주먹을 날리기 전 상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어디를 가격할지 머릿속으로 미리 계산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홈즈의 활약상은 천차만별이겠지만 캐릭터의 본질적인 성격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홈즈는 홈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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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1.11)

2009 장르영화 베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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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문 Moon> 던컨 존스 |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더 문>은 <디스트릭트9>와 함께 올해 나온 SF영화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을만하다. <더 문>은 배우 샘 록웰의 열렬한 팬인 감독이 그를 위해 만든 영화. 극중 주인공을 빼면 변변한 캐릭터가 없는 이 영화에서 샘 록웰은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다. 한편으로 샘 록웰의 1인 3역을 비롯해 달기지 사랑을 벗어나지 않는 배경, 7,80년대 SF영화에서나 볼법한 아날로그적인 기지 내부 모습 등 <더 문>은 곳곳에서 저예산의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의미마저 저예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달에 홀로 남아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심리드라마이기도 하며 돈에 눈먼 대기업과 하청을 받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관계를 은유한 사회비판물로도 기능한다. 하여 드라마틱한 감정의 블록버스터를 선사하는 <더 문>은 작은 규모와 달리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작품인 것이다.


<디스트릭트9 District 9> 닐 블롬캠프 | 미국, 뉴질랜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디스트릭트9>이 8월 14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1위로 데뷔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딱 하나. 피터 잭슨이 제작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원래 피터 잭슨은 닐 블롬캠프라는 신예감독과 게임원작 영화 <헤일로>를 준비하던 중 <디스트릭트9>의 아이디어를 듣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을 결정했다. 인간이 외계인을 슬럼가에 격리시켜 착취하고, 이걸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대체역사물처럼 포장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는 한편으론 피터 잭슨이 초짜 감독시절 꿈꿨던 영화적 야망을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설적인 B급영화로 회자되는 <고무인간의 최후>(1987)를 통해 잔인무도하게 외계인을 살상하는 인간을 다뤘고,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1996)에서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조국 뉴질랜드의 영화사를 넘어 세계영화사를 다시(?) 썼던 그에게 <디스트릭트9>은 21세기 버전의 <고무인간의 최후>요, <포가튼 실버>이었던 셈이다.


<마더> 봉준호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을 살아갈 수가 없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Inglourious Basterds> 쿠엔틴 타란티노 | 미국, 독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타란티노의 첫 번째 전쟁영화이자, 시대물이란 점에서 관심을 모았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 잠입한 유태계 특공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다만 인용이 창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타란티노는 <바스터즈>를 전쟁영화인 동시에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이자 이탈리아의 지알로 무비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전쟁영화 특유의 진지한 자세라든지 숭고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타란티노가 영화를 엄숙하게 다뤘던 적이 있었나. 영화를 놀이로 대하는 그는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와일드번치>(1969)까지, 자신이 열광한 영화의 특정 장면을 ‘모아모아’ <바스터즈>를 구성하는 한편 그 잘생긴 브래드 피트의 외모마저도 ‘주걱턱’으로 만들어 웃음거리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얼마나 재미있냐고? IMDB에 오른 관객 평점을 보면 자신의 영화 중 <펄프픽션>(8.9점/10점)을 빼면 가장 높은 점수(8.6점)를 받았더랬다.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mies> 마이클 만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퍼블릭 에너미는 올해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지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마이클 만이 존 딜린저를 영화화한 이유는 현실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현실이 된 세상에 살았던 첫 번째 인물이기 때문이다.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있자면 193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불안한 시대는 징후를 부른다. 할리우드의 최근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징후를 포착해 혁신적인 대중영화로 체화하고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이클 만은 오락성과 예술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중요한 작가다. 그는 이전부터 장르영화를 다루면서도 영화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필모그래프를 발전시켜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시각적 체험을 넘어 감정의 체험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의 첨단을 이끄는 마이클 만이 이후 작품에서 도달하게 될 영화의 경지가 어디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차우> 신정원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차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올해 등장한 장르영화 중 가장 별나다. 식인 멧돼지의 실체는 영화의 중반이 한참 지나서야 공개되고 CG로 구현된 그 모습 또한 조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차우>에는 괴수의 출현이 야기하는 경이로운 공포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앞세워 무질서한 세계를 조장하면서 B급영화의 면모를 과시한다. 애초부터 차우를 잡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치환하려는 상황에서 <차우>는 웃음을 유발한다. 차우의 존재를 알리려할수록 사회의 갈등은 더 커지고, 차우를 쫓을수록 피해는 늘어나며, 차우를 잡는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차우를 잡으려고 하는 걸까? 극중 인물들은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것을 잘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사회는 왜 이 지경일까? <차우>는 정확히 우리의 자화상을 겨냥하고 있다.


<아바타 Avatar> 제임스 카메론 | 미국, 영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바타>는 영화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아바타>는 우리가 영화를 본다는 것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3D영화 <아바타>는 관객을 스크린 앞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한 이후 영화가 꿈꾸는 최종 목적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의 꿈을 이룬 ‘세상의 왕’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기술력에만 있지 않다. 기술력의 최첨단에 있는 <아바타>지만 메시지는 자연과의 융합이다. 이 영화가 수정주의 서부극을 끌어와 SF로 개비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란 결국 인간을 말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는 늘 인간과 자본의 대립을 다뤄왔다. 오히려 인간 이외의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친구인 경우가 많았다. <아바타> 역시 다르지 않다. 첨단의 기술이 인간과 결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가 바로 <아바타>다. 


<박쥐> 박찬욱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한다.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한다.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녀>를 비롯해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박쥐>에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불신지옥> 이용주 | 한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매년 여름이면 양산되는 수준 이하의 국산 공포영화를 바라보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불신지옥>과 같은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불신의 지옥도를 한국적인 풍경 위에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는 공간의 배경은 물론 공포를 발현하는 방식까지도 ‘현실’이라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공포물보다 추리물의 성격이 더 짙다. 추리물로의 미시적인 접근을 통해 거시적인 공포를 자아낸다고 할까. 그러니까 실종된 주인공 여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은 곧 공포의 정체를 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불신지옥>은 실종된 아이라는 공포분자를 추적함으로써 불신이 어떻게 발생하고 전이했는지를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결국 여동생의 실종은 불안한 시대의 황폐한 정신이 야기한 필연의 산물이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상식을 뛰어넘은 우리 사회의 각종 광신의 총합이 빚어낸 비극의 총체다.


<드래그 미 투 헬 Drag Me to Hell> 샘 레이미 | 미국

사용자 삽입 이미지샘 레이미의 <드래그 미 투 헬>은 2009년 버전의 <이블 데드2>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인 것이다.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더욱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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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장르는 독립영화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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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영화는 제도권 영화계에서만 제작되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독립영화계에서도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복잡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관념적인 이야기나 사회 비판적인 드라마 혹은 형식적인 실험에 치우친 작품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르적인 재미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작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추세다. 올 한해 개봉했던 독립영화를 보더라도, 김태곤 감독의 <독>은 행복한 가족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공포로,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권태기 부부의 이야기를 외계인 남편과 지구인 부인이라는 SF적 설정으로,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결투가 허용된 가상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남자의 대결을 액션물로 풀어가며 두드러진 장르적 경향을 보여줬다.

이 같은 경향은 12월 10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 2009’(이하 ‘서독제’)에서도 눈에 띄게 발견된다. 서독제 웹데일리를 통해 “장르적인 문법이나 재미를 연출하는 방법이 많이 탁월해진 것 같다.”는 김이환 예심위원(이자 소설가)의 말처럼 장르의 화술에 충실한 독립영화가 요 몇 년 새 크게 늘어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한 옴니버스영화이자 개막작인 <원 나잇 스탠드>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미스터리 화법으로 여자의 욕망을 말하고, 심명훈 감독의 단편 <드라이브>는 킬러인양 구는 배우지망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느와르의 분위기를 풍기며, 올해 미쟝센 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이자 단편경쟁 부문에 오른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은 구체적인 시공간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독특한 설정으로 SF와 미스터리와 공포를 오가며 복합적인 장르 양상을 보여준다.

2009년 한해 <워낭소리> <똥파리>와 같은 작품의 흥행이 독립영화의 붐을 이끌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르적 영화의 출현이 더 큰 사건이라고 본다. <워낭소리>와 <똥파리>가 이룬 성과를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두 영화의 흥행 이면에는 뭔가 이벤트적인 요소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워낭소리>는 복잡다단한 도시민들의 삶에서 농촌에 대한 추억이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화했다는 느낌이 들고, <똥파리>의 경우는 각종 국제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 경력이 영화의 완성도 이전에 이슈로 작용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워낭소리>와 <똥파리>가 독립영화의 지속적인 붐을 이끌기에는 애초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장르영화는 아직 독립영화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최우선적으로 관객의 재미를 담보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기에는 장르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할리우드 얘기를 잠시 해보자면, 지금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들 중 장르를 적극 차용하며 데뷔작에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샘 레이미는 <이블 데드>에서 그 유명한 악마의 시점 숏과 ‘인형극’스러운(?) 특수 분장을 통해 코믹호러로 불리는 새로운 경지의 공포영화를 완성했고, 코언 형제는 <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에서 하드보일드 소설과 필름 느와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장르꾼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에서 범죄영화를 끌고 와 특유의 수다와 팝컬쳐에 대한 인용으로 주류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국영화 역시, 그 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류승완 감독은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4개의 단편을 각기 다른 장르로 구성함으로써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들 전설적인 데뷔작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저예산 독립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저예산의 한계를 장르문법에 기반을 둔 이야기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풍잎> <비가 내린다> <생산적 활동>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점균 감독은 <경축! 우리사랑>을 발표한 후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가장 흥미 있는 방법으로 전달하는 할리우드 장르 문법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야 한다. 단지 할리우드 것이라고 틀에 박힌 이야기, 전형적인 구성이라고 깎아내릴 건 아니다. 저예산영화들도 필요하다면 할리우드 장르를 적극 받아들여 관객에게 어필해야 한다.”

장르는, 영화나 문학에서 쓰일 때 비슷한 소재와 배경, 그리고 전개구조를 지닌 유사 이야기 형태를 의미한다. 특히 장르영화는 감독과 관객 간에 화술과 스타일에서 어떤 규칙을 전제하는 까닭에 마치 게임처럼 인식돼온 측면이 강하다. 하여 장르영화는 굳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제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장르 규칙에 대한 강제성이 크지도 않아 이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로 기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저예산에 맞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장르가 저예산으로 가능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름난 배우의 섭외, 컴퓨터그래픽의 사용 없이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용이하고 볼거리를 강화할 수 있기에 장르만큼 적합한 용기는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해, 색다른 소재와 파격적인 설정에 드라마를 끼워 맞추는 대신 이야기에 장르성을 강화하고 그 속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야 독립영화도 좀 더 지속적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가 쉬워질 것이다. 

독립영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움직임은 이런 인식 변화에서 기인한다. 주류 영화계와는 차별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는 예전과 변함이 없지만 이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대중친화적인 사고의 폭이 유례없이 넓어진 게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장르적 경향이 강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지금 독립영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특징은 장르의 화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오로지 장르의, 장르를 위한, 장르에 의한 영화를 볼 날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소개한 <남매의 집>이 <사사건건>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영화에 포함돼 내년 1월 상영을 확정했고 바로 그 다음 달에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일생 생활 속에 침투한 생계형 좀비라는 설정 하에 연출된 6개의 단편을 모은 <이웃집 좀비>가 개봉을 기다린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프로그램이랄 수 있는 올해 <숏!숏!숏!>의 면모다. 전주영화제가 일찍이 주목했던 디지털을 내세운 단편영화 프로젝트인 <숏!숏!숏>은 그간 우리가 작가라고 부를만한 감독들에게 집중된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올해는 변화를 꾀했다. ‘공포와 판타지’라는 영화형식을 공유하며 제작할 계획인 것. 참여하는 감독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르영화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감독이 대부분이다. <독>의 김태곤 감독, 의학스릴러로 주목을 받았던 <리턴>의 이규만 등이 그렇다. 장르를 내세운 이번 전주영화제의 <숏!숏!숏!> 프로젝트는 그런 면에선 상징적이다. 뭐랄까, 디지털, 제3세계 영화로 대변되는 전주영화제가 장르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신호로 보아도 무방할까. 중요한 건 이제 장르가 독립영화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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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15)

좀비문학상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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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7월 ‘한국 문화에도 좀비 바람은 불어오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모 출판사가 좀비소설이자 종말소설인 <세계대전Z>의 한국 편을 기획 중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해 <세계대전Z>의 한국 편은 성사되지 못했다. 저자인 맥스 브룩스와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아 최종 답변을 얻지 못한 까닭에 <세계대전Z>라는 제목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대신 해당 출판사는 또 하나의 좀비소설이자 종말소설인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의 출간에 맞춰 ‘ZA 문학공모전’이라는 이름의 좀비문학상을 개최했다.

ZA는 Zombie Apocalypse의 약자로 ‘좀비 묵시록’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ZA 문학공모전의 홈페이지(http://www.minumsa.com/zombi/)에 올라온 글을 인용하자면, ‘바이러스나 기타 질병으로 인해 인격을 상실한 인류가 급속히 증가하는 세기말적 세계관. 흔히 ’좀비‘라고 불리는 괴바이러스의 감염자들을 등장시킨 다양한 작품들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데, 영화는 <레지던트 이블> <새벽의 저주> <28일 후> <R.E.C> 등이, 게임으로는 <Left4Dead> <바이오 해저드(레지던트 이블)> <좀비 아포칼립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소설로는 <세계대전Z>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이 미국 Amazon.com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원류격인 <나는 전설이다>, 변형된 스타일인 스티븐 킹의 <셀> 등도 국내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다.’라고 되어있다.

2009년 11월 30일부터 2010년 2월 15일까지 두 달 간 진행되는 ZA 문학공모전의 특기할만한 점은 바로 응모 개요이다. 소설의 배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좀비로 뒤덮인 종말 직전의 세계’라고 적시하였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특별히 ‘일기와 페이크 다큐 등 자유로운 상상 글’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는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과 <세계대전Z>를 염두에 둔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ZA는 문학에서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1954) 이후로, 영화에서는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이후로 꾸준히 사랑받는 장르로 정착했지만 최근처럼 급격한 형식의 변화를 꾀한 사례는 없었다. 장르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까닭인데 다만 문학과 영화가 좀비물의 진화를 취한 방식에는 각각의 차이가 존재한다. 문학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거치면서 주요한 이슈로 부상한 생화학무기의 공포를 진화의 동력으로 삼았다면 영화는, 특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9.11 이후 단순히 쾌락만을 겨냥하지 않고 체험의 수준으로 재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먼저 좀비문학의 진화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Z>는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코너를 통해 이미 자세하게 언급했듯 좀비의 발생부터 전 세계적인 창궐, 그리고 좀비로 인해 파괴된 문명사회의 재건까지를 전통적인 서사 방식이 아닌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함으로써 좀비문학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 할만하다. J. L. 본의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은 일기 형식을 채택해 <세계대전Z>가 일군 페이크 다큐 방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저자인 J. L. 본은 현역 해군 장교이자,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인물로 그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좀비에 저항하는 주인공의 생존방식의 생생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이 <세계대전Z>와 함께 ZA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현실성에 있다.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의 일기체와 <세계대전Z>의 인터뷰체는 독자들로 하여금 좀비와의 전쟁이 마치 현실인 듯 착각에 빠뜨리는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실제로 J. L. 본은 이라크 참전 중에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다. ‘군 복무 도중 세상의 종말이 도래했을 때 군인인 자신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작품인 것. 다시 말해, 저자가 직접 전장에서 느꼈던 공포가 이 책에는 그대로 담겨있다. 예컨대, 극중 좀비의 창궐로 통제 불능의 사회가 된 미국 정부는 주요 도시에 핵탄두를 투하해 위기를 벗어나려하지만 오히려 주인공 나는 미국 정부의 무분별한 핵의 남용 가능성과 그것이 미칠 악영향에 더욱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세계대전Z>에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의 국내 출간을 즈음하여 기획된 ZA 문학공모전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실제를 연상시키는 형식을 도입해 좀비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건 좀비문학의 최근 추세다. 이제 곧 한국에서도 세계적 경향을 반영한 첨단의 좀비문학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공모 초기라 많은 작품이 올라오지도 않았거니와 (응모된 작품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이나 <세계대전Z>와 같은 형식을 도입한 작품도 아직 없지만 좀비를 주제로 한 문학공모전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국내에서는 획기적인 시도라 할 만한 것이다.

안 그래도 국내의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ZA 문학공모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장르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제작자를 만날 때마다 그들은 하나같이 ZA 문학공모전을 아냐고 물어볼 정도다. 장르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좋은 이야기 발굴에 혈안이 된 충무로에게 이는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다. 흔히들 한국 영화계에서 좀비영화가 안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 돈이 되지 않는 소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완벽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좀비물이 타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예산으로나마 만들고 싶어 하는 제작자와 감독은 적지 않다. 문제는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줄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

실제로 내가 아는 모 감독은 <클로버필드>처럼 캠코더로 촬영한 좀비물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는 동시에 오락성과 예술성을 절묘하게 결합한  획기적인 대중영화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좀비물은 지금 국내를 휩쓸고 있는 신종플루를 은유할만한 가장 시의적절한 소재이고 좀비 그 자체로 오락적인 볼거리이며 다큐멘터리 방식을 도입하면 예산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작가주의적인 공포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할리우드는 일찍이 이 같은 경향에 주목했다. 9.11 이후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는 쾌락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나 벌어질법한 일이 현실이 된 이후로 할리우드의 영화적 전략은 시대의, 사회의 징후를 포착해 관객으로 하여금 이를 체험하게 만드는데 초점을 맞춘다. 지금 할리우드는 장르물을 다루되 현실성(reality)에 대한 자각을 결코 놓지 않으면서 대중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발전시키고 있다. <클로버필드>가 괴수물에서, <퍼블릭 에너미>가 갱스터물에서, <디스트릭트9>이 Sci-Fi물에서 장르물의 진화를 이끌었다면 좀비물에서는 <R.E.C>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일기 Diary of Dead>가 바로 그렇다.

모 감독이 꿈꾸는 좀비물 역시 이런 종류다. 다만 그의 고민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나리오로 발전시켜줄만한 이야기가 없다는 데 있다. ZA 문학공모전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모 감독은 공모전이 시작된 11월 30일부터 매일 해당 사이트를 접속한다고 한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좀비물을 좋아하는 까닭에 공모전에 올라오는 작품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좀비문학의 작가를 꿈꾸는 이가 이렇게 많았다니 동지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머지않은 시기에 한국산 첨단의 좀비물을 소설로, 영화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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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2.7)

미야베 미유키 원작의 영화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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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충무로가 <백야행>의 흥행여부에 주목하는 이유는?’)에서 살짝 언급했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것에 그리 관대한 편이 아니다. 영화화 허가에 있어서 그녀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1987년 <우리 이웃의 범죄>로 데뷔한 이래 적게는 1편, 많으면 6편, 매해 거르지 않고 왕성한 창작욕을 뽐내는 미야베 미유키는 데뷔 21년째인 2009년까지 50권이 넘는 소설을 발표했다. (국내에는 지금까지 총 24권이 번역, 출간됐다.) 하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크로스 파이어>(2000)와 <모방범>(2002),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브레이브 스토리>(2006)까지 단 세 편에 불과하다.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이 모두 14편(2007년 기준)인 것을 감안할 때 이는 극히 적은 숫자다. 더군다나 1990년 <마술은 속삭인다>가 동명의 TV드라마로 제작된 것과 달리 영화는 그보다 10년 늦은 2000년이 돼서야 <크로스 파이어>가 동명의 작품으로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2년 뒤에 <모방범>이, 또 그로부터 4년 뒤에 <브레이브 스토리>가 개봉했을 정도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스크린에서 보는 일은 상당한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무엇을 써도 터무니없는 걸작을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미야베 미유키지만 유독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은 없다. 특히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의 <모방범>은 미야베 미유키가 이후 자신의 작품의 영화화에 한동안 관심을 끊었을 만큼 최악의 만듦새를 보여줬다.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행여나 호기심에서라도 보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는 영화 <모방범>은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 중 가장 최악의 사례라 할만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공개연속살인사건에 대한 일본 사회구조 전반의 반응을 현미경처럼 훑는 원작을 오독하는 것으로 모자라 코미디영화로 전락시킴으로써 미야베 미유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작품인 것이다. 

지난해 미야베 미유키의 도쿄 사무실(오사와 아리마사(<신주쿠상어>), 교고쿠 나츠히코(<망량의 상자>)와 함께 운영하는 사무실로, 각자의 성을 따서 ‘다이쿄쿠구’(大極宮)라고 부른다.)에서 그녀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인터뷰가 진행된 거실은 탁자를 한 가운데 두고 병풍처럼 두른 책꽂이가 인상적인 곳이었는데 영화 <모방범>에 대해 묻자 미야베 미유키는 답변 대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책꽂이 하단 구석에 ‘짱 박혀’ 있던 문제의 <모방범> 비디오테이프였다. 영화가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았던지 덧붙이는 말도 없이 어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대신 미야베 미유키는 봉준호 감독의 열혈 팬임을 자처하며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실제로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특정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판권료를 받지 않겠다는 농담까지 했을 정도인데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조만간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릴 예정이다.) 아마 이 얘기를 한국의 영화사들이 들었다면 꽤나 부러워했을 대목이다. 국내에서 거듭 치솟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인기에 비해 그녀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획득하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국내 영화사가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획득한 건 <화차>와 <스나크 사냥>, <스텝파더 스텝> 모두 세 편이다. 이들 작품 외에 <마술은 속삭인다> <레벨7> <모방범> <용은 잠들다> <이름없는 독> 등 에도 시대물을 제외한 그녀의 거의 모든 작품에 국내 영화사의 구애가 쇄도하는 것을 헤아려 생각해 볼 때 판권 획득이 쉽지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워낙에 국내 영화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해 판권에 대한 조건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국내에 팔린 일본소설의 영화 제작이 거듭 불발되자 투자자와 제작사, 감독의 이력을 꼼꼼히 검토하고 단계별 계약서까지 요구하는 등 판권 구매 과정이 날로 어려워진 까닭이다.

하여 국내 영화사들은 그녀의 환심을 사 판권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컨대, <스나크 사냥>의 판권을 획득한 수필름(<키친><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은 정공법보다 변칙(?)으로 접근해 성과를 얻은 경우다. 통상 해외 소설의 판권 획득은 국내에 번역, 출간된 후에 이뤄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수필름의 민진수 대표(민규동 감독의 친형)는 <스나크 사냥>의 국내 출간이 이뤄지기 전, 일본에서 구입한 책을 자체 번역해 먼저 읽은 후 미야베 미유키의 영화 판권 담당 에이전시와 직접 접촉을 시도했다. 이에 미야베 미유키는 수필름에 협상우선권을 주었고 협상이 이뤄지는 자리에 연출예정인 민규동 감독까지 대동한 후에야 (그렇다. 민규동 감독의 차기작은 <스나크 사냥>이다!) 판권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민규동 감독은 <스나크 사냥>의 기본 설정은 유지하되 장르의 재미를 살리는데 중점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벌써 6고를 훌쩍 뛰어넘었단다.) 또한 수필름은 이와는 별개로 국내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또 다른 작품에 눈독을 들인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판권 확정 작품이 아닐 경우, 이를 공개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어 아쉽지만 제목을 밝히지 못함을 알려드린다.) 다만 판권 협상 과정에서 미야베 미유키 측으로부터 <스나크 사냥>의 영화화 결과를 본 후 판권을 넘기기로 합의했다고 전해지니, 아무래도 <모방범>을 비롯해 영화화에 큰 재미를 못 본 그녀로써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써 영화의 완성도를 확인한 후 판권을 넘기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미야베 미유키 역시 RPG(Role Playing Game)게임 <이코>를 <이코-안개의 성>으로 소설화하면서 굉장한 부담감을 겪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게임 <이코>의 팬들로부터 <이코-안개의 성>에 대한 혹평을 듣고는 굉장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하물며 한일 양국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감독과 영화사의 심정은 어떨까. 일찍이 판권 계약을 맺고 감독까지 결정한 <화차>와 <스나크 사냥>의 촬영 소식이 여태껏 요원한 상황은 이를 잘 대변한다. 다만 미야베 미유키 팬의 입장에서 한마디 하자면, 부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나와 영화 <모방범>으로 얻은 미미 여사(미야베 미유키의 애칭)의 한을 풀어줬으면, 그럼으로써 더 많은 미야베 미유키 소설 원작의 한국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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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8)

충무로가 <백야행>의 흥행여부에 주목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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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출판가의 가장 큰 화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다. 지난 8월 국내 발매와 함께 일주일 만에 10만부, 12일 만에 100만부를 돌파한 것은 물론 베스트셀러 집계에 있어서도 1권이 7주 연속, 2권이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국내 출판계를 평정했다. 사실 이 같은 결과는 발매 훨씬 이전부터 예상된 바였다. 가히 ‘하루키 신드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가 국내에서 누리고 있는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어둠의 저편> 이후 무려 5년 만의 신작이란 점에서 <1Q84>를 두고 벌어진 국내 메이저 출판사들의 판권 경쟁은 선인세 가격을 무려 한화 10억 원 가까이 올려놓을 만큼 ‘피 튀기는’ 수준이었더랬다.

이처럼 일본문학을 두고 벌어지는 국내 업체의 과열 경쟁은 비단 출판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충무로 역시 이미 몇 년 전부터 일본문학, 그중에서도 장르문학을 향해 열렬히 구애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동명의 일본만화를 영화화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가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마침 일본의 장르문학이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자 자연스럽게 일본 대중문화가 이야기 고갈을 겪고 있는 한국 영화계의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충무로의 일본문학 판권 구매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올드보이>의 판권료가 공식적으로 200만 엔 선이었던 것에 반해 그 이후 일본출판사들이 자국의 작품을 원하는 국내제작사에 500만 엔 안팎의 가격을 요구한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상황이 잘 이해되리라 본다.

한석규, 손예진, 고수 출연의 <백야행>은 그런 흐름 속에서 (<검은집> 이후) 가장 먼저 영화화되어 개봉하는 일본 장르문학 원작의 작품이라 할만하다. 안 그래도 <백야행>의 원작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국내에 불어 닥친 일본 장르문학의 유행을 타고 가장 각광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워낙에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라 한 달이 멀다하고 신작이 쏟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대개의 작품이 일정 정도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지라 국내 출판업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들어 몸값이 가장 폭등한 일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면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판권을 선점하기 위한 국내 영화사들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더군다나 그의 소설은 일본에서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까닭에 영화화의 위험 요소가 적다는 프리미엄까지 안고 있다.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사건을 다루면서 이를 장르적으로 풀어가기 때문에 영화적이라는 것이 충무로 관계자들의 한결 같은 평가다.

하여 판권만 확보하면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게 국내 영화사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탐내는 결정적인 이유다. 그중에서도 <백야행>은 <레몬>과 함께 일본 장르문학 유행 초기에 판권을 확보한 작품이라 판권료가 비교적 저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반해 <용의자 X의 헌신>과 <붉은 손가락>은 치열한 판권 경쟁의 중심에 놓였던 경우다. <용의자 X의 헌신>은 6~7군데로부터, <붉은 손가락>은 발매와 함께 무려 10군데가 넘는 국내 영화사로부터 판권 의뢰를 받은 것. 특히 <용의자 X의 헌신>의 경우, 일본 내 영화 판권과 맞물려 일본 출판사가 한국 영화사들을 대상으로 판권 기획서 마감을 지난 2007년 9월로 못 박은 까닭에 지금은 어느 영화사가 높은 가격에 판권을 확보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다만 변수는 <용의자 X의 헌신>의 일본 영화화가 올 초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일본의 작품이다 보니 일본 출판사에서는 자국의 영화화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영화사들의 판권 구입 문의가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일본 출판사 측에서는 자국 개봉 1년 후에 판권 계약을 맺기를 희망하거나 아예 일본영화의 리메이크 판권을 구입하는 쪽으로 권유하기도 한다. 아마도 <용의자 X의 헌신>이 이 같은 조건 하에서 계약이 맺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불리한 계약조건 속에서도 일본 장르문학에 대한 구애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만큼 영화화할 만한 이야기가 부족한 충무로의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사재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단 사놓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도 사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가장 많은 충무로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경우, 쇄도하는 국내 영화사들의 판권 문의를 감당하다 못해 판권 협상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웃지 못 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판권 계약을 맺은 작품은 변영주 감독이 영화화 진행 중인 <화차>와 <앤티크>를 제작한 수필름이 제작 예정인 <스나크 사냥>, 그리고 <스텝파더 스텝>까지 총 세 편. 이 작품들은 모두 2007년에 판권 협상이 마무리된 작품으로 그 이후 미야베 미야키 작품 중 판권을 맺은 작품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는 그녀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시들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의 영화화에 신중을 기하는 미야베 미유키가 우선적으로 판권 계약이 마무리된 작품의 결과물을 보고 이야기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일본소설의 판권 협상이 유난히 까다롭다고 불만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일본소설의 영화판권 뿐 아니라 일본 대중문화와 관련한 계약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일본 특유의 디테일에 집착하는 국민성이 계약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일본을 탓할 일만이 아니다. 국내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불고 있는 일류 열풍 속에서 국내 업체들의 과다 판권 경쟁이 자연스럽게 일본 측으로부터 까다로운 조건을 불러냈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옳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영화계에 대한 일본 출판사 측의 의문부호가 붙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백야행>에 모아지는 관심은 단순히 흥행 여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백야행>이 보여주는 영화의 완성도에 따라 일본 출판사 측이 한국 영화사에 내세우는 조건은 순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히 추측에 의존한 발언이 아니다. 실제로 감독이 누구인지, 영화적인 완성도는 어떤지 여부에 따라 일본의 원작자나 출판사 측에서는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로 영화화 판권 계약을 맺은 경우가 존재한다. 예컨대,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는 인상적인 데뷔 작품을 발표했던 모 감독에 의해 연출될 예정인데 영화화에 부정적이던 작가가 감독의 작품을 본 후 마음을 바꿔 선뜻 영화 판권을 허락한 경우라 할만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워낙에 많은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까닭에 <백야행>의 영화화에 대해 크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단 하나, <백야행>이라는 제목만은 절대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강한 요청처럼 영화는 ‘하얀 어둠 속을 걷는다’는 뜻을 그대로 살린 제목으로 개봉을 앞둔 상태다. 겨울 영화 시즌을 앞두고 가장 높은 기대를 얻고 있는 <백야행>이 한국에서 성공적인 영화화에 이룰 수 있을까. 많은 한국영화 관계자들이 <백야행>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그야말로 양가적이다. 흥행에 성공하게 될 경우, 일본 장르문학을 원작삼은 영화화가 탄력을 받으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며 자칫 이전보다 더한 과다 경쟁이 붙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백야행>이 과연 어떤 성적을 거둘지 귀추가 주목된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판권 관련한 사실은 FILM2.0 350호 ‘한국영화, 일본 장르문학 대사냥’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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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11.2)

<아메리칸 사이코>를 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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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번역 출간된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가 9월 18일 간행물윤리위원회(이하 ‘간윤’)로부터 판매금지(이하 ‘판금’) 결정을 받았다. 판금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지만(해당 출판사로 이유 설명 없이 판금 결정만 적어놓은 공문이 도착했다고 한다.) 청소년보호법에 의해 출범된 간윤의 배경 상, 청소년들의 정서에 반하는 특정묘사가 원인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힘을 얻는다.

국내 팬들에겐 소설보다 영화로 더 유명한 <아메리칸 사이코>는 1980년대 미국문학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은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평가받는다. 저자인 브렛 이스턴 엘리스 자체가 파격적인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문학계의 브랫 팩’(1980년대 등장한 할리우드 청춘스타를 일컫는 용어로, 미국 문단에서는 젊은 작가군을 지칭한다.)이란 별칭을 얻었을 정도인데, 과연 <아메리칸 사이코>의 필체에는 기존 문학의 얌전한 표현력을 뛰어넘겠다는 젊은 작가 특유의 객기가 넘쳐난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뉴욕에 거주하며 금융 직에 종사하는 젊은 남자, 소위 여피족(yuppie)으로 불리는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이 사이코로 돌변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 베이트먼은 명품 브랜드로 자신을 꾸미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조차 브랜드와 스타일로 평가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런 베이트먼을 앞세워 물질로 모든 가치를 평가받는 1980년대 당시의 세태를 통해 물질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를 비판한다. 이 책이 출간과 함께 화제를 모았던 이유 역시 문명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지난해 불어 닥친 세계 금융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 주역들의 도덕적 해이를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브렛 이스턴 엘리스는 그런 베이트먼 세대가 지닌 분열증적 사고(思考)를 강조하기 위해 철저히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표현의 수위를 높인 것으로 유명하다. 베이트먼이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행하는 살인을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은 물론 살인의 대상이 되는 목록은 노숙자, 여자,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들이 대다수다.

“… 나는 길고 가느다란 톱니날 칼로 아주 세심하게 놈의 오른쪽 눈알에 칼날을 2센티미터쯤 찔러 넣고 손잡이를 위로 홱 꺾는다. 순식간에 놈의 망막이 파열된다. (중략) 부랑자의 눈알이 터져 안구 밖으로 매달린 채 얼굴로 흘러내리고 연신 눈을 깜빡이자 상처 안에 남아 있던 내용물이 핏줄에 불그레한 달걀 노른자위처럼 쏟아져 나온다.”

“꼬마가 조그만 머리를 가만히 위아래도 끄덕이며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별안간 집채만 한 분노의 파도에 내 갑작스러운 애정결핍이 물마루에 치닫자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잽싸게 꼬마의 목을 찌른다. 놀란 꼬마가 쓰레기통 쪽으로 물러나며 아기처럼 꼴록꼴록 소리를 내지만 목에 난 자상에서 뿜어 나오는 피 때문에 비명을 지르거나 울지도 못한다.”


이는 단순히 독자들의 오르가즘이나 자극해 판매부수를 늘리려는 얕은 수의 묘사가 아니다. 베이트먼의 잔인한 행동을 통해 이들의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부작용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문명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에서도 극단적인 논란이 일긴했지만 ‘지난 수년 동안 나온 책들 중에서 심원한 주제, 도스토옙스키의 테마를 다룬 첫 책’(배너티 페어), ‘즐거운 독서를 제공하는 책도 아니며, 포르노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움에 단련되어 가는 사회를 비평하는 진지한 소설이다.’(라이브러리 저널)와 같은 평가처럼 문제가 되는 부분과는 별개로 작품 자체에 족쇄를 채우는 짓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유해도서로 지정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문화적 안목에 먹칠을 하는 것과 진배없다. 더군다나 어떤 사회적인 합의도 없이 간윤의 결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판금 조치한다는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판금 도서는 차치하더라도 19세 미만 구독 불가(이하 ‘19금’) 도서 목록만 보면 음란물이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이번 <아메리칸 사이코>에 내려진 결정은 실로 세계문학계의 토픽감이라 할만하다.

현재 <아메리칸 사이코>는 해당 출판사의 재심의 요청으로 이에 대한 최종 판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판매가 가능한 상황이다. 다만 책 표지 앞뒷면에 19금 딱지를 붙이고 랩으로 꽁꽁 싸인 채 나이 확인을 거쳐 판매가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인터넷서점에서 역시 인증을 거친 후에 책에 대한 정보가 확인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조치만으로도 <아메리칸 사이코>의 특정 묘사가 품고 있는 유해함(?)을 청소년으로부터 차단하기에 충분하다. (성인에게까지 차단해야 할 이유가 뭘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심의에서도 판금 조치가 내려진다면 이것은 명백히 독자들의 볼 권리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판금 조치에 대해 간윤에서는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전해진다. 이에 대한 해당 출판사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판금이란 사실만 알려주는 간윤의 처사는 여러 모에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우선 ‘간행물 심의 및 규제’의 조항을 살펴보면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결정된 간행물에 대해서는 ’해당 간행물을 발행한 자에게 그 결정내용과 이유를 명시하여 서면으로 통보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간윤은 <아메리칸 사이코>의 판금 결정 과정에서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설사 청소년 유해간행물이 아닌 다른 이유로 조치를 취했다 해도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야 차후에 발생하게 될 혼란을 막을 수 있음을 감안할 때, 이를 방관하는 건 책임 있는 기관의 행동으로 부적절하다.

나는 이 부분이야말로 독자들의 볼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만에 하나 <아메리칸 사이코>와 비슷한 성격의 작품이 등장했을 때 이번 사태가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검열의 기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006년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 과도한 폭력 묘사로 인해 19금 판정을 받으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특정 묘사만을 지적해 문제 삼은 조치로 해당 작가는 그 이후 자기 검열 속에 작풍을 바꾸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다. 이건 단순히 해당 소설, 작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잠재적인 볼 권리를 앗아갔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계의 큰 손실에 다름 아니다. 하물며 <아메리칸 사이코>와 같은 우수한 해외 작품을, 특정 묘사가 간윤의 기준에 벗어난다고 해서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면 이 또한 한국 독자들에겐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은 잘 나가는 브랜드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일종의 등급을 매긴다. 그에게 등급 외의 인간은 살아있을 필요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아메리칸 사이코>에 대한 이번 간윤의 판금 조치는 흡사 베이트먼의 인생철학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든 인간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작품들은 대중에게 공개돼 평가받을 권리가 있다. 대중들은 생각만큼 어리석지 않아서 스스로가 자정능력을 가지고 작품을 판단할 정도는 된다. 간윤은 청소년들이 볼만한 도서인지, 봐서는 안 되는 도서인지만 판별하면 된다. 판금은 간윤의 몫이 아니다. 독자의 몫이고, 대중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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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ST
(2009.10.9)

박찬욱과 앨프리드 베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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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은 소문난 ‘Sci-Fi'(이하 ‘SF’) 광이다. 모 포털사이트의 지식인의 서재라는 코너에서 100권의 책을 추천하며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필립 K. 딕의 <죽은 자가 무슨 말을> 등 주옥같은 SF작품을 다수 포함시켰고 어느 인터뷰를 통해서는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면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미 리들리 스콧이 1982년 <블레이드 러너>로 영화화한 적이 있다.)를 찍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박찬욱 감독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SF소설가를 꼽으라면 바로 앨프리드 베스터다. <파괴된 사나이>(1953) <타이거! 타이거!>(1956) 등을 통해 명성을 얻은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은 SF팬뿐만 아니라 고른 독자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SF소설치고 슈퍼히어로와 하드보일드 등 미국 대중문화의 근간이 되는 요소가 두드러져 특히 그렇다. <파괴된 사나이>는 그런 베스터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태양계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는 재벌총수 벤 라이히가 라이벌 기업총수를 제거하려던 중 이를 눈치 챈 형사 링컨 파웰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다룬 내용. DC코믹스에서 작가로 활동했던 앨프리드 베스터는 자신의 이력을 살려 <파괴된 사나이>를 벤 라이히와 링컨 파웰의 초능력 대결로 몰아가지만 오히려 레이먼드 챈들러풍의 하드보일드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면도날 씹듯 거칠고 냉소적인 이들 주인공의 대사는 필립 말로우의 그것처럼 간결하면서도 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챈들러 특유의 건조한 도시 묘사에 색깔을 칠한 듯한 앨프리드 베스터의 현란한 시각적 묘사는 ‘불꽃놀이’ 문체라는 극찬을 이끌어냈다.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은 당시 할리우드에서도 영화화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파괴된 사나이>는 스크린을 통해 재현된 적이 없다. 이유가 아이러니하다. 불꽃놀이 문체에도 불구, 절대 활동사진으로 시각화할 수 없는 극중 설정 탓이다. <파괴된 사나이>에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 에스퍼(Esper)가 등장한다. 얼핏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등장하는 돌연변이 예지자와 동류(同類)로 보인다. 다만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 ‘음악’으로 심리를 조작한다는 설정은 앨프리드 베스터만의 아이디어로, 제 아무리 날고기는 감독이라도 이미지로는 어떻게 표현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파괴된 사나이>를 영화화한 적은 없지만 대신 제목을 차용하기도 했다. 훗날 <복수는 나의 것>으로 개봉된 이 영화의 시나리오 초고의 제목은 다름 아닌 <파괴된 사나이> 극중 딸을 잃은 동진(송강호)이 유괴범의 복수에 인생을 올인하며 내적으로 무너져가는 심리가 <파괴된 사나이>라는 제목과 너무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하나의 사례만 가지고 박찬욱 감독의 앨프리드 베스터에 대한 애정의 정도를 모두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앨프리드 베스터의 두 번째 장편 <타이거! 타이거!>는 그를 향한 박찬욱 감독의 애정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타이거! 타이거!>는 실제로 박찬욱 감독이 직접 영화화를 바란 작품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할리우드나 프랑스에서 연출 제의를 받을 때면 SF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단다. (딴지일보 130호 ‘<올드보이> 박찬욱을 만나다’) 이왕에 자본력이 센 외국에서 연출할 바에는 한국에서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여 프랑스 제작자에게는 구체적으로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을 밝혔으니, 그게 바로 <타이거! 타이거!>다. 다만 그 후로 프랑스에서 답변이 없어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타이거! 타이거!>는 수십 년 전에 영화화 판권이 팔렸더라고요. 근데 비운의 프로젝트로 유명해요. 각본은 제대로 안 나오고 영화는 계속 엎어지고.”

<타이거! 타이거!>의 영화화가 쉽지 않은 이유는 <파괴된 사나이>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누구나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미래 사회의 배경은 할리우드가 탐낼 만한 볼거리였지만 (이는 <점퍼>에서 구현됐다!) 걸림돌은 주인공 걸리버 포일이 겪는 공감각증상. 폭발 사고 여파로 감각을 인지하는 두뇌세포가 혼란을 일으켜 소리를 시각으로, 움직임을 소리로 지각한다는 설정이 소설에서는 가능했을지언정 영화화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여인의 비명이 이상한 패턴의 빛처럼 포일에게 시각적으로 찾아왔다.’ ‘목재의 감촉은 시큼하면서 분필 같은 맛이었고, 손가락에 만져지는 돌은 새콤달콤했다.’는 지문을 그 누가 이미지화할 수 있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올드보이>는 <타이거! 타이거!>와 여러 면에서 흡사한 설정이 많다. 170일 동안 우주 미아가 되어 우주선에 갇혀 있는 포일의 사연은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감금돼 군만두로 연명하는 오대수(최민식)를 연상시킨다. 포일을 발견한 우주선이 그를 구출하지 않은 까닭에 포일의 평생의 복수 대상이 된다는 설정은 또한 오대수가 복수를 삶의 의지로 삼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시각적 묘사에 탁월한 베스터의 문체가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계와 일맥상통하다는 점에서 혹시 박찬욱 감독이 <타이거! 타이거!>에 대한 영화화의 아쉬움을 <올드보이>를 통해 드러냈던 건 아닌지 의심 아닌 의심(?)이 드는 것이다.

최근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과 관련한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제작사 겸 배급사 카날플러스와 함께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의 리메이크를 추진 중이라는 얘기였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박찬욱 감독의 해외 진출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게 사실이다. 하여 심심찮게 SF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박찬욱 감독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는 다소 의외의 선택으로 비쳐진다. SF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팬으로써도 박찬욱 감독이 해외진출작으로 한국에서 쉽지 않은 SF영화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굳이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박찬욱 감독이 만든 SF영화를 볼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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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9.25)

장르시장의 키워드는 ‘스릴러’와 ‘공포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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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적극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고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면서 진화해온 까닭에 ‘트렌드’라는 것이 존재한다. 지난 번 기사 ‘한국문화에도 좀비 바람은 불어오는가?’에서 언급했다시피 신종플루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좀비물(과 뱀파이어물)이 각광받는 것이 전 세계적 추세다. 국내로 한정해보자면, 지난해 <추격자>의 대성공으로 충무로의 장르영화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스릴러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문학 쪽에서는 마니아에 집중돼있는 독자층을 일반 대중에게로 확장해 장르문학의 파이를 넓히고자 장르의 엔터테인먼트화(化)에 사활을 건 분위기가 역력하다.

충무로의 상황부터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일단, <추격자>와 같은 스릴러임을 부각시키고 실화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제목에서부터 ‘(살인)사건’을 집어넣는 것이 유행으로 정착한 모양새다. 이번 주 개봉작인 홍기선 감독의 <이태원 살인사건>을 필두로, 3회 충무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던 강석범 감독의 <정승필 실종사건>, 서영희가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등이 그렇다. 다만 이 작품들이 모두 <추격자>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절망적인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정승필 실종사건>의 경우, 납치, 치정, 살인이 등장하긴 하지만 코미디를 극의 원동력삼아 끌고 가는, ‘코믹수사극’에 해당한다.

‘사건’ 혹은 ‘살인’을 전면에 부각하는 이유는 표면적인 것 말고도 또 있다. 최근 장르영화 중에서 상대적으로 투자 받기 수월한 장르가 스릴러다. <장화, 홍련> 이후 봇물처럼 쏟아지던 공포영화가 참담한 만듦새와 흥행 성적으로 투자대상에서 멀어지는 대신 충무로의 자금이 <추격자>와 같은 스릴러 영화에 몰려드는 형국으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충무로에서 벌어지는 신(新)풍속도 중의 하나가 바로 ‘모든 장르의 스릴러(혹은 미스터리)화’다. 예컨대, <불신지옥>은 공포물로 분리되지만 주인공 언니가 실종된 동생을 찾아가는 구성이 추리물에 더 가까워 현재의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한 경우라 할 만하다. 이제 공포물조차 공포 대신 스릴러나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워 투자를 유리하게 이끌거나 관객의 관심을 모으는 것이 충무로의 현실인 것이다.

‘공포’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비단 충무로만의 상황이 아니다. 장르문학 쪽에서도 공포의 단어 사용을 놓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사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3쇄를 찍으면서 장르문학 시장에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김종일의 <손톱>은 ‘공포스릴러’로 장르를 규정했고, 이종호의 시리즈물인 <귀신전>은 ‘공포테인먼트’로 작품을 포장했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시리즈처럼 공포가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경우는 예외에 속할 정도로 공포 하나만 가지고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역부족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얘기다. 공포소설이라고 했을 때 대중들이 갖는 인식의 대부분이 ‘어둡고 심각한 이야기’로만 집중되는 까닭에 판매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고민인 셈.

그래서 각광받는 것이 바로 공포테인먼트다. 공포와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이 신조어는 국내 장르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업계종사자들의 의지가 어디까지 다다랐는지 가늠해볼만한 상징적인 단어에 다름 아니다. 마치 <국가대표>와 <해운대>가 철저히 관객의 눈높이에 작품을 맞춰 한국 대중영화의 한 획을 그은 것처럼 공포소설 역시 작가의 자의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독자가 가장 기대할법한 오락성의 강화를 통해 대중문화로의 비상을 꿈꾼다. 그런 바램이 바로 공포테인먼트라는 단어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손톱>의 이례적인 판매고가 사건 위주의 빠른 전개, 다양한 장르 혼합을 통한 오락적 공포소설의 구현에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공포테인먼트는 장르문학 시장에서 더욱 힘을 얻을 전망이다.   

사실 장르물에 대한 충무로의 ‘스릴러화’나 출판계의 ‘공포테인먼트’가 키워드로 부상한 배경은 결과적으로 같다. 대중문화 시장에서 공포물이 얼마나 고전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극명한 사례다. 한편으론 대중의 무의식에 스며든 두려움과 불안감을 적극 반영한 공포물의 고전은 이 사회가 현실의 공포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지표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고 공포물을 대중문화의 하나로 정착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만큼이나, 그 이상의 시련을 거듭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들이 그저 무의미하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런 접근들은 또 다른 문화가 자라날 토양이 되기도 한다. 장르의 혼합이나 공포테인먼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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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9.9)

한국 장르문화를 개척중인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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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가 출간됐다. 굵은 선 몇 개로 슥슥 고양이 캐리커처를 발랄하게 그려 넣은 표지는 ‘공포’라는 어감이 주는 으스스함을 그대로 무장해제 시킨다. 어둠침침하고 경직됐던 전편의 표지와 비교해도 확 달라진 면모다. 그러니까 이건 어떤 의지의 발현이다. 무엇이냐고? 이를 설명하려면 잠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1편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1편이 발표된 건 2006년 10월. 이 책은 그때 그 시절(?) 출간 자체가 화제요, 놀라움이었다. 2000년대 초반, 셜록 홈즈로 촉발된 장르소설의 인기가 영미추리소설을 반환점삼아 일본미스터리소설로 정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조차 전무한 국내 장르소설이, 그것도 추리물도 아니요, 미스터리물도 아닌 당시만 하더라도 ‘장르문학계의 듣보잡’이라 할 만한 공포를 주제로 한 단편집이 그야말로 ‘뿅’하고 출현한 것이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은 출판사 황금가지의 장르문학 브랜드 ‘밀리언셀러 클럽’과 이종호(<귀신전><모녀귀>)가 이끄는 공포문학 창작 집단 ‘매드클럽’(http://themadclub.net)이 의기투합하여 일궈낸 결과물이다. 10명 작가의 10편의 단편이 수록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업계의 파다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무려 6쇄를 찍을 만큼 독자들은 환호작약했다. 그 중에는 많은 영화관계자도 포함됐는데 이종호의 말을 빌자면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이 발표된 후 영화화 제안만 열 군데가 넘게 들어왔”고 대표적인 사례로 김종일의 <일방통행>은 <혈투>라는 제목으로 영화화가 진행 중인 상태다.

하지만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에 대해 ‘한국 장르문학을 개척했다’고 평가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가 4편에 이르기까지 소수에 불과했던 국내 장르작가를 20명 넘게 배출했으며 이를 토대로 장르 단편집의 붐을 이끈 공로 때문이다. 예컨대, 이 시리즈에 글을 썼던 작가 8명이 참여한 <한국스릴러문학 단편선>이 타 출판사에서 출간됐고 그 뒤를 이어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 차례로 발표되는 등 이제 장르 단편집은 장르문학의 인기 상품이 되었다.

다만 한국의 장르문학이 갖는 한계랄까, 우리가 소위 순문학이라고 부르는 작품에 비해 장르문학은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천대당하는 경향이 있어 독자층이 일반대중보다 마니아에 기울어진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의 ‘똥꼬발랄’한 표지는 좀 더 일반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작가들과 출판사의 강한 의지에 다름 아니다. 표지뿐 아니라 작품 선정에 있어서도 독자를 배려한 남다른 구성이 눈에 띈다. 주된 장르 요소를 공포에만 한정하지 않은 것. <첫 출근> <더블> 등과 같은 SF까지 그 범위를 넓게 잡았고, <배심원>의 경우, 지금 한창 사회 문제시되고 있는 인터넷 댓글 문화의 폐해를 다룸으로써 현실반영을 이뤘으며, <행복한 우리 집에 어서 오세요>는 신종플루의 유행에 따라 더욱 각광받고 있는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장르의 세계적 추세 역시 놓치지 않았다.  

반응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1편과 비교해 극과 극의 반응을 보인다. 정통 공포물 일변도인 1편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4편이 너무 심심하다며 불만을 드러내고, 4편의 다양한 장르를 높이 평가하는 독자들 사이에서는 1편이 너무 잔인하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까닭에 지친다는 의견이 상당수다. 관계자의 발언에 따르면, 이 비율은 후자가 월등히 높다. 다시 말해, 의도대로 4편의 독자들 중 다수가 일반대중에 더 가깝다는 의미다. 물론 이 얘기가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의 대중적인 판매량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제 발매된 지 한 달 조금 넘은 시점이라 판매량 운운하는 것이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폭발적인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화다.

앞서 밝힌 바, 이 시리즈의 적지 않은 수의 작품이 영화 판권 계약을 맺었다. (아직 4편은 영화 판권 계약을 맺은 작품이 없다.) 문제는 영화화 진행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다는 데 있다. 아무래도 단편이다 보니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장편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엎어지기 일쑤라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화화 지체 이유가 단편이기 때문에 장편 시나리오로 가는데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는 얘기는 핑계라고 해도 무방하다. 충무로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 즉 능력 있는 시나리오 작가의 부재가 더 큰 이유로 작용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들은 이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한 작품 정도만 나와 준다면 그리고 흥행에 성공한다면 그 이후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투다. 그만한 수준의 작품이 여럿 뒤를 받치고 있는 까닭에 지속적인 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복안인 것이다. 실제로 책의 판매량 변화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증명된다. 시리즈의 신작이 나올수록 전편의 판매량도 함께 상승하니 1편이 6쇄를 기록한 것도 4편에 이르기까지 쌓인 저변과 브랜드네임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그래서 앞으로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시리즈가 국내 장르문학, 더 나아가 장르문화의 시장을 지금보다 더 넓히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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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0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