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신의) 집을 찾아서

christina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그림이 있다. 현재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에서 전시 중이다. 이 그림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 앤드류 와이어스가 1948년에 그렸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텅 빈 들판 위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오두막과 같은 쓸쓸한 풍경에 주목한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크리스티나의 세계>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선수와 관중이 모두 퇴장한 축구장의 그라운드처럼 황량한 들판이 화폭의 3분의 2 이상을 뒤덮고 있다. 그 위에서 앙상한 팔목을 드러낸 한 여성이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뒷모습에서 힘겨워하는 표정이 느껴진다. 그림의 상단에는 화가가 구겨 넣은 듯 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의 포커스가 중앙에 있는 여성에 맞춰진 까닭에 상대적으로 비율이 작은 농장까지의 거리는 꽤 멀어 보인다.

이 여성의 이름은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크리스티나는 앤드류 와이어스의 실제 이웃이었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 크리스티나의 몸 상태는 남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이유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어서 영화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오블리비언>(2013)이다.  <오블리비언>은 외계인 침공에 맞서 핵을 사용했다가 인류가 멸망한 미래가 배경이다.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외계인들이 지구에 숨어 저항하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복제한 인간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정기적으로 정찰하는 잭이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이 있다. 외계인의 감시를 피해 울창한 숲 속에 마련한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에는 책과 음반과 같은 예술품이 숨겨져 있고 중앙에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걸려 있다. <오블리비언>은 이 그림을 통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래 사회를 작동하는 차가운 디지털 문화에 반해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따뜻한 아날로그 삶으로의 ‘회귀’다.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품은 이야기 역시 ‘집으로의 돌아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 이 주제에 대한 의문 부호의 감정을 남긴다. 크리스티나 홀로 들판 위의 저 먼 집으로 과연 잘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편한 몸의 자세와 더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그림 속 미장센은 크리스티나의 손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대신해 몸을 지탱하려 손에 얼마나 힘을 쥐었는지 새하얀 팔목과는 다르게 시퍼렇게 멍이 들어 유난히 눈에 띈다. 회색빛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과 크리스티나의 몸에 가시면류관처럼 드리운 그림자가 더해지면 멜랑콜리가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로 작용한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이 그림의 구도와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두 편의 최근 영화 <암살>과 <셀프/리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은 각각 충무로와 할리우드라는 생산지 만큼이나 장르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거리가 멀다. 예컨대, 시대극의 형태를 띤 블록버스터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저예산으로 만든 Sci-Fi물이다.

내용 차이도 상당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를 다루는 <암살>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과 일본에 투항해 매국노 노릇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의 비극적 역사를 오락물의 외피로 담아낸다. <셀프/리스>는 미래의 뉴욕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지금의 뉴욕을 설립한 거물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주인공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정신을 다른 이의 육체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영생을 얻으려 한다.

공통점을 찾기가 참 쉽지 않은 영화들인데 ‘정신의 부재’를 키워드 삼아 접근하면 어떨까. <암살>과 <셀프/리스>는 모두 정신적 혼란, 즉 정체성 문제를 기반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암살>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상식과 도덕의 맑은 물을 원천에서부터 오염시킨 친일파의 활개 배경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한국 역사라는 특수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게 특징이다. 불멸의 삶을 위해 타인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 모습을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유전자 복제 문제까지 갈 필요 없이 더 나은 외양,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하는 작금의 풍토에서 <셀프/리스>는 유의미한 질문을 제기한다.

질문은 그 자체로 답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암살>과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구도와 이미지로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힌트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 내가 <암살>에서 흥미를 느낀 지점은 극 중 친일파 염석진(이정재)이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일행의 저격을 받고 경성 거리에서 쓰러지는 장면에서였다.

총을 맞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성의 후미진 골목으로 도망치던 염석진은 다급한 마음에 정체불명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허허벌판이다. 이리저리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적삼이 황폐하여 몹시 쓸쓸한 기운을 강화한다. 이를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며 쓰러진 염석진의 죽음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정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가 처단되었다면 정의가 실현된 것인데 <암살>은 왜 이 장면에서 기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현실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허구이기 때문일 터다. 친일을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던 염석진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된다. 이건 팩트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까닭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해방 뒤에는 미 군정에 붙어 보신을 일삼아 온 염석진’들’이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으로 지금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북적이는 경성 거리를 배경으로 하던 염석진의 도주 장면이 별안간 허허벌판으로 옮겨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크리스티나처럼 비틀린 자세로 쓰러진 염석진은 단순히 친일파의 의미를 넘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로 앓게 된 한국인의 정신 장애를 나타내는 듯하다. 염석진의 죽음과 함께 주변에 펼쳐진 황폐한 대지는 역사 청산으로 우리가 가꿔야 할 밝은 미래일 터. 하지만 <암살>이 염원하는 역사 청산의 미래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농장처럼 화면의 소실점에 놓인 것 같은 기시감을 선사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처럼 몰상식과 비도덕으로 정신의 그로기 상태에 놓인 선량한 한국인들이 도달하기에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참조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의미를 전달할 가장 최적의 구도를 선택한 결과일 텐데 바로 그 점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왜 명화인지 드러난다. 앤드류 와이어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처음 공개했을 때 잔디 하나까지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는 혹평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적이지만, 그 속에 있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은 사실적인 붓 터치와 다르게 어딘지 모를 비현실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유독 Sci-Fi나 시대극에서 자주 차용되고는 한다. Sci-Fi와 시대극은 동시대를 벗어난 시간대가 주요한 시간대로 작용하지만, 실은 미래나 과거를 우회해 현재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장르다. 바로 여기에 ‘회귀’의 주제를 품은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맞아 떨어지는 데가 있다.

회귀는 인간의 본능이다. 집 밖을 나가면 결국에는 돌아와야 하듯이 내 삶의 가치가 혼란할 때 제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상식과 도덕과 질서는 이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보편이다. 보편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상관관계가 별로 없어 보이는 <암살>과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그럼으로써 연결된다. 안간힘을 다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크리스티나의 마음은 친일청산이라는 상식의 집을 향해 힘겨운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는 우리네 마음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차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셀프/리스>를 연출한 타셈 싱 감독은 <더 셀>(2000)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8) 등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미적으로 뛰어난 화면을 구성하는 게 특징이다. <셀프/리스>는 Sci-Fi이되 저예산을 지향하다 보니 볼거리의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같은 명화의 구도와 색감을 의도적으로 가져와 화면의 ‘때깔’을 높이는 한편, 메시지를 강화한다.

젊고 건강한 육체로 다시 태어난 <셀프/리스>의 주인공 다미안(라이언 레이놀즈)은 이식 중 생긴 부작용에 시달린다. 육체의 원래 소유자이었던 이의 기억이 불쑥불쑥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악몽에서 벗어나려 기억의 파편을 단서 삼아 다미안은 자신의 육체의 주인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니. 타셈 싱은 바로 이 장면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가져온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다미안이 문제의 집까지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을지, 어렵게 도착하더라도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아니나 달라, 다미안이 새로 얻은 육체는 정당한 과정이 수반되지 않았다. 이식을 집도한 의사의 설명과 다르게 육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생명 연장의 혜택을 입은 다미안의 입장에서는 심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찾아온 딜레마. 육체를 돌려주고 나는 죽음으로써 사라져야 하는가, 불법에 눈감고 뻔뻔하게 영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

다미안의 선택은 전자다. <셀프/리스>는 이와 같은 선택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불멸의 삶을 위해 남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것은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게 된 시대, 다미안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젊음의 시기를 연장할 수 있는 의료 발달의 시대에 <셀프/리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로써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요람에서 태어난 우리는 결국 무덤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생과 사의 시간이고 인간의 운명이며 본능이다. 회귀, 즉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거늘 언제부턴가 상징적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인간의 행보가 더뎌지고 있다. 나만 잘살겠다는 지나친 욕심으로, 욕심으로 얻은 부와 명예를 천년만년 지속하고 싶다는 허욕으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온갖 탐욕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까지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지고만 있다. 발표된 지 70년 가까이 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영화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집을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은 지금 어떠한가.

 

ARENA HOMME
2015년 10월호

초현실주의 세계의 마블 슈퍼히어로들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와 비교해 굳이 현실적이려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크 나이트>(2008)의 크리스토퍼 놀런은 기껏 허황한 코믹스에 불과했던 이 장르에 사실주의를 접목,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DC 코믹스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 슈퍼맨과 배트맨이 영화상에서 지구를 위주로 활동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들은 지구와 우주와 신계(神界)를 넘나들며 거대한 세계를 아우른다.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주의’로서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이하 ‘<어벤져스 2>’)이다.

<어벤져스>(2012)에 이어 <어벤져스 2>의 연출을 맡은 조스 웨든 감독은 속편을 두고 “<대부 2>(1974)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전편과는 다른 성격의 영화가 될 것을 자신했다. 그와 같은 자신감과 다르게 <어벤져스 2> 역시 여느 블록버스터 속편의 영화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뉴욕에서만 진행됐던 전편과 다르게 이번에는 서울을 비롯해 23개국 로케이션으로 촬영이 이뤄졌다. 또한, 등장하는 악당의 수도 <어벤져스>의 외계 종족 치타우리를 능가한다. 악당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이건 과장된 수식이 아니다. <어벤져스 2>의 슈퍼빌런은 울트론(제임스 스패이더)이다. 울트론은 실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작품이다. <어벤져스>에서 치타우리의 지구대침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아이언맨 군단을 조성하려 든다. 토니 스타크는 이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 시스템 ‘자비스’를 돌린다. 그러던 중 악성 코드가 침입하고 오류가 발생하면서 울트론이 탄생한다.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토니 스타크와 목적하는 바가 같다. 방법이 문제다. 토니 스타크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평화를 원한다. 그에 반해 울트론은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세계평화가 따라올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의 안위를 두고 방법상 서로에게 모순을 취하다 보니 토니 스타크와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공유함에도 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울트론은 스스로 결점을 보완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물론 무한 복제 능력을 갖춰 자신과 모습이 같은 울트론 군단을 조직한다. 제거하면 할수록 그 수를 늘려가는 울트론 군단의 진가는 어벤져스 멤버와 맞붙는 소코비아 전투에서 드러난다.

소코비아는 가상도시로 극 중에서는 동유럽에 위치한다. 어벤져스의 오랜 숙적 중 하나인 하이드라의 본부이자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와 퀵실버(애런 테일러-존슨)의 고향이다. 울트론은 소코비아를 전진기지 삼아 인류 멸망을 위한 계획을 준비한다. 이를 알아챈 어벤져스 멤버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울트론은 자신을 무한 복제해 이에 맞선다. 복제 울트론들이 땅에서 솟아나고 특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어벤져스 2>의 메인 포스터에도 장식되어 있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Golconda>(1953)를 참조한 듯한 인상이다.

벨기에 출신의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나 일상적인 사물을 왜곡해 상식과 논리를 파괴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도심 위로 검은 중절모와 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겨울비>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축에 속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 속 신사들처럼 입고 다니기를 즐겼다. 그뿐 아니라 <겨울비> 외에 <교장 Le maitre d’ecole>(1955) <데칼코마니 Decalcomanie>(1966) 등에도 자주 등장시켰다.

말하자면 이 그림들 속 신사는 르네 마그리트의 분신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을 모델로 많은 그림에서 신사의 이미지를 ‘복제’한 것처럼 <어벤져스 2>의 울트론도 같은 방식으로 울트론 군단을 만들었다. <겨울비>라는 낭만적인 뉘앙스의 제목과 다르게 이 그림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검은 옷을 입어서인가, 아니면 두 차례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됐던 유럽 출신의 화가라는 이력 때문인가, 전쟁 중 도심에 투하되는 폭격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세계평화를 위해 탄생한 울트론도 차가운 금속 재질의 외양 탓인지 영 감정이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어벤져스 2>와 <겨울비>의 특정 이미지가 나타내는 주제는 산업화, 첨단화에 따른 현대 사회의 폐해일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전 세계가 네트워크화되면서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빼앗아간 개성, 그로 인해 무너지고 와해한 일상의 삶들이 <어벤져스 2>는 슈퍼히어로물이라는 허구로, <겨울비>는 초현실주의로 은유 된다.

이의 핵심은 ‘낯섦’이다. 우리가 늘 속해 있고 경험하는 세계도 달리 보여주면 세상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진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은 상식이나 합리를 넘어서는 세계, 즉 잠재의식이나 꿈 등을 탐구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서울이 <어벤져스 2>에 등장했음에도 낯설어 보이는 건 마포대교, 상암동, 강남 등지에서 어벤져스 멤버와 울트론이 벌이는 대결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설정인 까닭이다.

영화는 그렇게 상상에서나 이뤄질 것 같은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구현해 마법처럼 관객을 홀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이 개봉과 함께 압도적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건 그와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과 이미지에 있다. <어벤져스 2>에서의 초현실적인 정체성은 소코비아의 도시 전체가 공중으로 부양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울트론은 공중에 뜬 도시를 떨어뜨려 혜성의 지구 충돌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 멸종을 시도하려 든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중에도 이와 흡사한 설정의 그림이 있다. <피레네 산맥의 성채 Le chateau des Pyrenees>(1961)다. <어벤져스 2>에서 소코비아에 위치한 하이드라의 본부를 연상시키는 성이 바위 정상에 솟아 있고 이 바위는 UFO처럼 해변 위에 둥둥 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가 프랑스의 관용어 중 ‘실현되지 못할 백일몽’을 의미하는 ‘허공 위의 성곽’에서 가져와 비튼 것이라고 한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소코비아 국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도시를 공중에서 폭파하면서 인류 멸망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울트론의 야심은 ‘공중누각’으로 귀결된다. 당연한 결과다. 이건 정의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 장르의 불변하는 법칙과 같은 거다. 아무리 사상 최강의 적이 등장한들 우리의 슈퍼히어로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발붙인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같은 불의와 비상식으로 가득하다 보니 영화에서나마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상상 속의 슈퍼히어로를 창조하고 슈퍼히어로물에 열광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겉으로는 견고해 보일지 몰라도 <피레네 산맥의 성채>처럼 언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한 게 사실이다. 세계평화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조차 초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은 더욱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런 욕망을 대변한 듯 <어벤져스 2>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을 연상시키는 장면과 설정이 등장한 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마블 스튜디오는 웬만해서는 감독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7월 개봉이 예정된 <앤트맨>의 원래 감독이었던 에드가 라이트(<뜨거운 녀석들>(2008)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등)가 마블 스튜디오와의 창작의 이견(creative differences)을 이유로 도중 하차한 일화는 유명하다.

확실히 DC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와 비교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감독의 색깔이 떨어지는 편이다. DC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인 ‘배트맨’만 해도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런 등 할리우드에서 개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독들이 연출을 맡아 작품성을 한껏 높여 놨다. 개별 프로젝트로 기능하는 DC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감독의 비전을 우선한다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은 제작사의 입김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워낙 시리즈가 방대해서 감독의 개성에 방점을 맞추었다가는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개중 조스 웨든 감독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개와 무수한 캐릭터의 경제적인 운용을 우선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에서 그나마 개성 있는 연출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스 웨든은 <어벤져스 2>를 통해 초현실적인 마블 슈퍼히어로물의 정체성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하는 이미지로 확실히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와 다르게 속편을 거듭해도 TV 드라마처럼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운용하는 방식까지 획기적인 시도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벤져스 2>만 해도 <어벤져스>와는 등장하는 악당의 성격도, 어벤져스 멤버들 간의 갈등 양상도 변화한 듯 보이지만, 전편보다 더 강력해진 악당, 더 허황해진 전투라는 스케일의 강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대신 조스 웨든은 전편보다 늘어난 악당의 수를 <겨울비>로, 더욱 거대해진 규모의 전투 장면은 <피레네 산맥의 성채>의 이미지로 적용해 흥미로운 미학을 선보인다.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쿠키 영상은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초현실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시다시피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쿠키 영상은 대개 속편의 더 강한 적을 예고한다. <어벤져스 2>의 경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고의 악당으로 평가받는 타노스(조쉬 브롤린)를 등장시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둔 상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해 모든 슈퍼히어로물은 물리친 악당보다 더 강력한 악을 부르는 형태로 속편을 운용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끝이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의 싸움이 끝없이 돌고 돈다.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M.C. 에셔의 <상대성>처럼 아무리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다크 나이트> 삼부작으로 슈퍼히어로물을 현실에 발붙여 놓았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초현실이다. 그래서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가 이벤트성으로 개봉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물은 <어벤져스 2>에 이은 <앤트맨>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를 마무리한 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년 6월 개봉 예정)부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파트 2>(2019년 5월)까지, 무려 9편의 3기 영화들 라인업을 발표한 상태다.

조스 웨든은 이에 착안해 <어벤져스 2>에서 초현실주의의 정체성을 확실히 박아 놓았다. 이는 또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참여한 감독들을 기능인으로서 고용된 형태로 부려 먹는(?) 마블 스튜디오를 향한 조스 웨든의 무언의 저항으로 비춘다. 감독의 연출적 개성이 돌출되길 꺼리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은 슬슬 관객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전까지 무수한 캐릭터와 방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각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겨울비> 속 검은 양복의 신사들처럼 반복되는 연출 패턴은 새로움을 바라는 관객의 변화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어벤져스 2>에서 조스 웨든이 보여준 연출은 그런 징후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마블 스튜디오는 감독의 개성을 누르는 방식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유지하려는 전략을 취할 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창작자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기대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앞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스튜디오의 대중성과 감독의 개성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상대성>처럼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통해 좀 더 낯설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로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느꼈으면 한다.

ARENA HOMME
2015년 6월호

<스토커>에서 클림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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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한때 미술 평론가를 꿈꿨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 (단편영화 <청출어람>(2012)과 <파란만장>(2010)을 공동 연출한 그의 동생 박찬경은 영화감독이자 설치미술가다.) 그의 영화에서 목격되는 무수한 상징과 기호들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종종 명화의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가져오길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스토커>에서 인용 혹은 변주되는 명화는 다름 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The Kiss>(1907)와 <유디트 Judith I>(1901)다. <스토커>는 이야기의 특성 상 사건보다는 사건을 통해 조성되는 인물들 간의 감정 선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키스>와 <유디트>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살펴보는 것은 곧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의도한 바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스> 삼촌이지만 괜찮아
   
<스토커>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이은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소녀’ 이야기다. 이름은 인디아(미아 와시코우스카)로, 1994년생인 그녀는 지금 막 18살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축하 대신 비보가 날아든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숨진 것. 그런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존재조차 모르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나타나자 마음을 뺏긴다. 말하자면,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이 못마땅한 인디아에게 찰리는 답답한 이 집에서 탈출구를 제공할 구세주다. 다만 엄마가 찰리에게 유혹을 보낸다고 생각한 인디아는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다.

<스토커>는 인디아가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생일 때마다 미지의 인물로부터 받았던 구두를 벗고 찰리가 선물한 하이힐을 신는 과정?) 더 정확히는 엄마 이블린에게서 독립하는 사연을 다룬다. (장례 음식을 준비하던 여인들이 “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라고 수군대자 인디아가 반항하듯 계란을 박살내니,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과정?) 찰리는 이를 와인에 빗대 이야기하는데 (“이 와인은 1994년산이죠. 이 정도로 무르익지 않으면 풋내 나서 못 마셔요.”) 결국 <스토커>는 인디아가 풋내를 벗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가 풋내를 벗는다는 건 곧 성(性)을 알아간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안 그래도, 찰리는 인디아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상(喪)중임에도 이블린이 유혹의 눈길을 보내자 찰리는 이에 응하는 척하지만 실은 인디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방과 후에 맞춰 학교에 오는가 하면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권하기도 한다. 호기심과 반항심이 뒤섞인 (이블린 왈, “넌 섞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잖니”) 인디아는 일단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만 피아노를 치던 그녀 옆으로 찰리가 다가와 몸을 감싸자 이내 마음이 사르르 녹고야 만다.

이 장면은 흡사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킨다. <키스>는 키스하는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그 모습이 <스토커>의 피아노를 매개로 하나가 된 인디아와 찰리의 포즈와 닮아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활약했던 클림트는 주로 성과 나체를 주제 삼은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기존 화단의 점잖고 권위적이던 화풍과는 완전히 결별했다는 의미에서 분리파로 분류됐다. 그런 맥락에서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의 화가’로 불렸는데 <키스>는 그런 특징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퇴폐적이거나 세련되거나, <스토커>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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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무엇보다 황금빛 이미지가 부각되는 까닭에 퇴폐적이면서도 세련된 기운을 발산한다. <키스>만 해도 남녀가 감각하는 사랑의 절정이 그림을 뒤덮고 있는 황금빛으로 만개한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은 클림트의 특징은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이 보여주는 연출과 맞닿아있다. 이블린과 인디아 모녀(母女)의 꺼져있는 사랑의 기운에 불을 지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치근대는 자'(stalker)가 아니라 ‘불을 지피는 자'(stocker)다.) 찰리는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나 결정적인 순간, 황금빛에 가까운 재킷과 티셔츠, 바지를 착용한다.  

문제의 피아노 장면에서 인디아와 찰리가 보여주는 협연은 섹스의 은유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근친이라는 점에서 퇴폐적이지만 이 장면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기운은 세련됨에 가깝다. 피아노 뒤의 스탠드가 이들의 행위에 황금빛을 은은하게 퍼뜨릴 뿐 아니라 동일한 콘셉트의 마룻바닥이나 벽지, 커튼 또한 금빛의 오라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절정의 순간을 감각하는 건 순전히 인디아뿐이다. 옆을 돌아보니 찰리는 ‘불을 지피는 자’답게 홀연히 사라진 상태다. 이건 인디아의 자위일까, 섹스일까? 그리고 찰리는 과연 누구인가?

<키스>는 황홀히 취해 있는 남녀를 묘사하지만 그 수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제목과 다르게 남자는 굳게 다문 여자의 입술이 아닌 볼에 키스하고 있고 그녀의 표정은 황홀함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여자의 피부도 남자와 다르게 하얗다 못해 시체를 연상케 할 만큼 창백한 수준이다. 게다가 자칫 발을 잘못 놀리면 절벽으로 떨어질 것처럼 여자는 아슬아슬한 포즈로 남자의 무게를 버티는 듯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키스>에 대해 죽음에 대한 매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키스>는 어떤 게 진짜이고 실제이며 사실인지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린다. 퇴폐와 세련이 공존하는 것처럼 경계가 주는 혼란은 무섭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클림트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키스>에 낭만성을 부여했다. <스토커>도 마찬가지다. 소녀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인디아는 성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경험하는 순간이 두렵기만 하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했던 기존의 자신을 죽여야만 넘을 수 있는 영역이다. 결국 인디아가 성(의 절정)을 경험한다는 건 곧 죽음에의 매혹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유디트> 모가지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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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디아가 실제인지, 환영인지 모를 피아노에서의 행위 후 실질적으로 갖는 첫 경험은 동시에 죽음을 포함한다. 찰리가 엄마 이블린과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한 인디아는 질투심에 사로 잡혀 충동적으로 같은 반 남학생 윕(알덴 에렌리히)을 불러낸다. 철길을 건너 (소녀에서 성인으로 선을 넘는 상징적 행위?) 숲속으로 들어간 인디아는 윕을 유혹해 키스를 하지만 그 이상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윕은 인디아를 거칠게 몰아붙이지만 귀신처럼 나타난 찰리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때 찰리가 윕을 살해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허리의 벨트를 풀어 목에 건 후 뒤에서 당겨 꺾어 죽이는 것이다. 찰리가 살해한 이들은 모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목을 잃었다. 왜 목일까? 그 힌트는 윕과의 첫 경험으로 성인식(이를 자축하듯 인디아는 ‘더러워진 하얀 옷’을 벗고 샤워 중 자위를 하며 절정의 순간을 맛본다.)을 마친 인디아가 평소에 입지 않던 야한 잠옷을 입고 이블린을 찾아가는 엄마의 방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인디아는 이블린의 머리를 빗어주는데 거울로 통해 반사된 이들의 모습이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슷해 보인다.

‘유디트’는 위기에 빠진 페르시아를 구한 여인으로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아시리아군(軍)에게 포위되자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 호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벤 것. 그림은 이와 같은 배경을 호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럼 찰리는 <스토커>의 유디트 같은 존재인가? 사실 <유디트>는 클림트 그림의 속성상 유디트의 성적 매력과 죽음에의 매혹이 더욱 강조된다. 즉, 주제를 공유하는 <스토커>가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하는 연장선상에서 목을 자르는 행위를 등장시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러니까 잘린 목은 부차적인 요소다. <유디트>에서도 호로페르네스의 목이 하단에 잘려서 묘사되는 까닭에 살해 행위는 여기서 살짝 물러난 주제다. 오히려 금빛 미장센에 파묻힌 유디트의 몽롱한 눈빛과 살짝 벌린 입술, 훤히 드러난 가슴은 그녀를 팜므파탈로 규정한다. 특히 클림트는 유디트의 얼굴이 젖혀 보이게, 잘린 목은 앞으로 기울어 보이게 잡음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구도를 확실히 한다. 즉, <스토커>가 <유디트>의 이미지를 취하는 건 인디아가 지배를 받는 아이에서 지배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인디아가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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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와 찰리 간의 일대일 대면이 처음 이뤄지는 장소는 계단에서다. 2층에 서있던 찰리가 그를 올려다보는 인디아에게 “네가 왜 불리해 보이는 줄 알아? 내 아래에 있기 때문이야”라는 요지의 말을 건넨다. 그러자 인디아는 그에 질세라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같은 위치에서 찰리를 바라본다. 인디아가 이블린의 방을 찾아 벌이는 일련의 행위도 이와 흡사하다. 이블린을 앉혀두고 바로 뒤에 서서 머리를 빗겨주는 인디아의 행위에서는 목을 따서라도 엄마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게 읽히는 것이다.  

그럼 인디아는 왜 그렇게 이블린에 대해 부정적인 걸까. 영화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찰리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 의문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다. 이는 찰리가 왜 인디아에게 집착하는 걸까, 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중요한 질문이다. 영화 후반에 전모가 드러나지만 인디아의 아버지이자 이블린의 남편인 리처드(더모트 멀로니)가 살해된 건 찰리에 의해서다. 찰리는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첫째인 리처드가 막내에게만 관심을 갖자 분에 못 이겨 셋째를 살해하고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에 갇힌 터다.

그리고 퇴원하던 날, 찰리는 리처드를 죽이고 인디아의 생일에 맞춰 이블린 모녀를 찾아온다. 찰리에게 이 날은 다시 태어난 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찰리와 인디아는 같은 인물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는 둘의 동일성을 노골적일 정도로 드러낸다. 누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걸 몹시 싫어하는 인디아처럼 찰리 역시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여직원이 포옹하려 들자 흠칫 놀라 처음엔 몸을 피한다. 또한 찰리의 가방을 뒤지던 인디아가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한다든가, 아빠가 숨긴 찰리의 편지를 읽을 때 둘의 목소리가 합해진다는 점도 그렇다.

이를 상기한다면, <키스>가 연상되는 피아노 장면에서 둘이 엉키는 장면은 찰리와 인디아의 동일성에 대한 상징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는다. 그러면 인디아와 이블린 간의 반목도 충분히 이해될 법하다. 찰리가 형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처럼 인디아 역시 이블린이 엄마로서의 사랑을 온전하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결국 찰리와 인디아가 겪는 성장통의 정체는 손윗사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해야 이들은 어른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살부(殺父) 의식이다. (리처드와 찰리는 무려 9살 차이다.)  

박찬욱 감독이 <유디트>의 이미지를 끌고 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찰리가 리처드를 살해하는 장면은 선명하되 인디아가 이블린을 죽이지는 않기에 다소 혼란을 느낄 법도 하다. 대신 인디아는 찰리를 얻음으로써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이블린을 제치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그에 더해, 인디아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찰리마저 제거하기에 이르니, 엄마로부터의 독립에 이어 그녀는 완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디아는 “어른이 된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던 걸까.

영화가 시작되면 인디아는 “남들이 잘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며 내레이션을 한다. 이는 <스토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반복이 되는데 찰리를 살해하고 엄마를 떠나 뉴욕을 향하던 인디아가 어른이 된 후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발현이다. 여기에는 <유디트>의 그녀처럼 목적을 달성한 후 감각하는 승리감의 황홀한 도취가 짙게 배어있다. <키스>에서처럼 수동적이었던 인디아가 이제는 위치를 바꿔 초식동물에서 포식자로 우뚝 서기에 이른다. 소녀는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movieweek
NO. 569

<은교>와 <풀밭 위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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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가 첫 선을 보이자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극 중 성기와 음모 노출이 있었다며 언론들이 ‘충격’, ‘파격’과 같은 요란한 단어들을 총 동원해 보도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앞뒤 문맥은 싹 거세한 채 자극적인 요소만을 한 줄의 헤드라인 삼아 기사화하는 것이 작금의 언론의 행태다. 육체의 기능이 쇠락한 70대 노()시인 이적요(박해일)가 17세 여고생 은교(김고은)를 만나 젊음을 대리 욕망한다는 이야기로 보건데, 영화의 문맥상 성기와 음모 노출은 그리 충격적이고 파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굳이 <은교>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노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건 오래된 역사다. 미술 쪽으로 눈을 돌리면,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1865)가 대표적이다. 완전히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이 파리의 살롱 드 레퓌제에서 공개되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관람객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특히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로 알려지면서 비난의 반응은 분노와 역겨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매춘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질병이나 타락, 심지어 죽음에까지 빗대어지는 존재였던 까닭이다.

빅토린 무랑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올랭피아>에 앞서 마네의 또 다른 그림 <풀밭 위의 점심>(1863)에서도 모델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여기서도 나체로 등장하는데 정장을 입은 두 명의 신사와 점심을 먹는 장면은 대조되는 옷(?)차림과 중앙의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의 구도로 인해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고로 관람객들의 반응이 떠들썩했던 건 당연지사. 이에 대한 당시의 기사를 보면, ‘어떤 이들은 수치심에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중에는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전한다. 이는 <풀밭 위의 점심>이 얼마나 논쟁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실제로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이 공개되면 논란이 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컨대, 전경의 풀밭과 후경의 시냇가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한 방식처럼 전통적인 회화의 관습을 무시한 것도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는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명망 있어 보이는 신사들이 매춘부와 저렇게 놀아나다니!’라는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마네는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이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법인데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점잖은 남자가 그 대상이 매춘부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나체를 거부한다는 건 위선이자 허위라는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은교>를 영화화한 배경에 대해 “원작의 지나친 솔직함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씨네21 852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중에서) 잘 알려졌듯, <은교>는 박범신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박범신은 노인의 사랑, 그것도 상대가 여고생인 것에 대해 “욕망은 중립적인 가치이며 시간차에 따라 구획되는 것도 아니다. 노욕은 따로 없다. 욕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트위터(@parkbumshin)를 통해 밝혔다. 그의 말처럼 욕망은 살아있는 생물 같아서 숨이 멎는 날까지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사회가 임의로 정해놓은 관습이 있어서 금기라 불리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경우, 그 대가는 비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창작자들은 금기를 욕망의 자연스러운 형태로 인정하며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경직된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인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정지우의 <은교>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정지우는 데뷔작 <해피엔드>(1999)부터 금지된 사랑에 초점을 맞춰왔다. 유부녀와 정부(情夫)의 관계에 이어, 31세 여강사와 17세 남고생(<사랑니>(2005)), 일본인 친구를 둔 식민지 시대의 모던보이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모던 걸(<모던보이>(2008))의 사랑까지, <은교>도 일관된 작가의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이들 영화의 핵심은 ‘세상 밖으로’다.

<은교>의 시인 이적요는 대중소설이 가볍다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자 서지우(김무열)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대리 만족해오던 터다. 하물려 성적기능이 퇴화한 그에게 욕망이란 그렇게 숨겨야하는 대중소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숨어 지내오던 이적요에게 별안간 나타난 소녀 은교는 철저히 잊고 있었던 욕망이 눈을 뜨는 기회로 작용한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자연의 본능이다. 금기를 관습화하는 이성의 감옥, 그러니까 무수한 책들로 둘러싸인 서재를 박차고 극 중 정원으로 묘사되는 자연으로 나와 은교를 사랑하는 이적요의 모습에는 비로소 해방감이 감지되는 것이다. (아직 앎과 경험이 미천한 서지우는 지식으로 습득한 관습과 금기에 매몰된 나머지 17세 여고생을 탐하는 이적요를 비난하며 결국엔 연적이 되고 만다.)

밖으로 나온 금기의 사랑이 비록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정지우는 보듬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들의 행위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다. 그림 속 매춘부와 신사가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부끄러움 대신 당당함이 읽힌다. 마네의 화풍에도 거리낌이 없어서, 숲속이지만 중앙에 스며든 빛으로 인해 서광이 비추듯 그늘의 어두운 부분이 환하게 탈색되어 음습한 기운을 완전히 제거한다. 또한 여자의 새하얀 살결과 남자들의 검은 정장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어 맴으로써 떳떳한 욕망임을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빅토린 무랑 외에 그 옆의 남자들이 (왼쪽부터 차례로) 마네의 처남과 동생인 점도 그림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풀밭 위의 점심>은 마네가 처음 살롱에 접수했다가 거절당한 후 떨어진 작품을 따로 모은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올랭피아>를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세상의 금기에 도전했고 동료 화가 자크 에밀 블랑슈의 표현에 따르면, “갖가지 소문과 농담이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고, 거리에서는 이 잘생긴 청년을 노골적으로 비웃었으며 사람들은 이 말쑥하고 단정한 청년을 ‘그 쓰레기를 그린 놈’이라고 불러댔다.”고 한다. 이를 견디다 못한 마네는 결국 프랑스를 떠났지만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처럼 <은교>의 이적요는 17세 소녀를 사랑한 죄(?)로 끝내 많은 걸 잃지만 그의 사연을 다룬 영화는 전국에서 200만 가까운 관객이 보며 흥행에 성공했다. 창작자들의 사회적 도발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체감하지 못하는 속도로 서서히 조용하게 너그러워진다. 세상은 그렇게 진보하고 변해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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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인용구는 <세계명화 비밀>(모니카 봄 두첸 지음 | 생각의 나무)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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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호

<마더>와 <세상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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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는 자식의 허물을 눈감아야 하는 한국 어머니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다. 엄마 혜자(김혜자)는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도준(원빈)이 동네 여고생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누명을 벗기겠다며 스스로 사건 추적에 나선다. 하지만 아들이 진범임을 가리키는 사실 앞에서 이를 평생 비밀에 붙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국사회에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제 새끼의 죄악마저도 눈감아 줄 수 있는 이기적 모성의 학습을 뜻한다.

모성의 본질을 다루는 까닭에 <마더>에는 엄마를 섹스와 별개의 존재로 바라보는 한국인 특유의 시선이 짙게 깔려 있다. 그래서 극단적인 모성의 정체와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는 저변의 의식을 결합하는 이 영화의 핵심 정서는 ‘은밀함’이다. <마더>에서 여자의 특정 신체를 연상시키는 미장센이 은근히 제시되는 이유다. 그중 어두운 약재상 안에서 좁고 기다란 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혜자의 시선은 명백히 여성의 성기를 시각화하는데 극 중 수미쌍관을 이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첫 장면에선 바깥을 보며 작두질하던 혜자가 손을 베어 피를 흘림으로써 생리가 가능한 ‘여자’로 비추는 것에 반해 마지막엔 안전하게 작두질에 성공함으로써 ‘엄마’가 됐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장면의 구도는 여러 모에서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1866)을 연상시킨다. <세상의 근원>은 여성의 성기를 정면에서 응시해 확대한 그림으로 악명이 높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풍만한 가슴과 복부도 노골적이지만 무성한 음모 속에 모습을 드러낸 성기는 지금의 시선으로도 충격적일 만큼 혁신적이다. 특히 이 작품이 여성의 나체를 묘사한 그림들과 전적으로 차별되는 이유는 어떠한 수식 없이 사실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근원>을 작업할 당시 쿠르베는 한창 유행이던 나체 사진에 푹 빠져있기도 했거니와 원래부터 사실적인 묘사로 명성을 쌓아오던 터였다. 다만 이 그림이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제목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넘어서는 어떤 영원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쿠르베는 <세상의 근원> 외에도 <잠>(1866) <파도의 여인>(1868) 등 나체를 대상으로 한 그림을 그리는 한편으로 <돌 깨는 사람들>(1849) <루에의 동굴>(1864)과 같은 풍경화를 작업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대상을 다루는 <세상의 근원>과 <루에의 동굴>이 실은 같은 그림이라고 한다면 믿어지시는가. 우거진 나무로 둘러싸인 검은 동굴 한 가운데로 물이 흘러나오는 <루에의 동굴>의 구도가 그대로 <세상의 근원>에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쿠르베가 자연을 묘사하듯 여성의 성기를 그렸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1819년 프랑스 오르낭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는 어릴 적부터 풍경을 관찰하는데 익숙한 삶을 지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드넓은 대지, 씨를 품은 대지 위로 무성하게 피어오른 새싹과 나무들, 그리고 이곳에 터를 삼아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의 작품에서 유독 물이 흐르는 광경이 많은 이유는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고 몸의 순환을 돕는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쿠르베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어머니의 대지를 보았을 테고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눈으로 여성의 나체를 그렸을 것이다.

<마더>의 약재상 장면이 의도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뭇한 음모와 같은 약재들 사이에서 위치한 세로 문, 즉 상징적인 성기 이미지 바깥에는 모성의 산물인 아들 도준이 자리하고 있다. 대지 위에 싹을 피워 열매를 맺기까지 각별한 관리가 필요하듯 엄마의 의무 역시 자식을 돌보아 성장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자궁으로 회귀하고 싶은 쿠르베의 순수한 시선이 느껴지는 <세상의 근원>과 달리 <마더>의 봉준호 감독은 약재상의 성기 이미지를 통해 갈수록 각박해지는 한국사회를 비극적으로 바라본다. 아들의 잘못을 덮어 가정의 행복을 이뤄보겠다고 약자를 밟고 일어서는 이 땅 모든 엄마들의 운명, 즉 세상의 근원이라 할 만한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며 그 자리에 비극의 근원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는 우리가 밝히기를 꺼릴 뿐이지 경험으로 체득한 삶의 방식이다.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인정할 뿐인데 이는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 그림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감상하고 있지만 원래는 1866년 당시 파리 주재 터키 대사이자 대부호였던 칼릴 베이가 쿠르베에게 주문한 제작품이었다. 애초 개인적인 용도로 제작된 그림이지 공개를 목적으로 한 작품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의 근원>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완성된 지 무려 122년 뒤인 1985년이었다.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쿠르베 회고전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1995년 6월 26일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등재됐다.

그동안 <세상의 근원>이 개인의 소장품으로 꼭꼭 숨겨져 있었던 이유는 은밀하게 감상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쿠르베가 외설용으로 그린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림을 대놓고 본다는 것은 사회적인 금기에 속했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보기 민망한 그림을 공개적으로 감상한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이 그림은 완성되었을 때부터 어떻게 가려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1955년 파리의 한 경매장에서 <세상의 근원>을 구입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숑에게 그림 속 성기를 가리겠다며 덮개 그림을 의뢰한 일화는,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마더>의 혜자가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도준의 범죄를 오랫동안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던 <세상의 근원>의 뒷이야기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금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금기의 바탕에는 언제나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미의 공포가 <마더>의 기저에 흐른다면 <세상의 근원>에는 공개됐을 경우 사회적으로 불러일으킬 파장에 대한 두려움이 그림 외적으로 아우라를 형성한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에서 목격되는 공포의 정체는 모두 성적인 영역에 걸쳐 있다. 말하자면,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작용한 결과다.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여자로 바라보는 <마더>의 시선, 매일 같이 보는 신체 일부지만 공개를 꺼리는 <세상의 근원>의 시선, 두 작품은 모두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은밀한 경계 위에서 대중의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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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인셉션>의 초현실적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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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영화 관람을 방해할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인셉션>을 보고 나오면서 ‘크리스토퍼 놀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피터 트래비스, 로저 이버트 등 해외 유명 평자들의 평가처럼 절대적인 걸작이라거나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라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극중 생각의 조작이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대사를 남발하고 무리하게 장면을 늘이는 등의 무리수가 종종 눈에 띈다.) 다만 기존의 재료를 가지고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해 새로운 ‘무엇’으로 뒤바꿔놓는 그의 연출력에는 특별한 것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셉션>은 타인의 꿈속에 잠입해 생각을 심거나 혹은 훔쳐오는 이들의 활약을 담았다. 데뷔작 <미행>(1998) 이후 놀란 최초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인 <인셉션>의 이야기는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새롭지 않다. 꿈의 세계에 접속해 생각을 읽는다거나 조작한다는 내용은 이미 타셈 싱의 <더 셀>(2000), 스티븐 스필버그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2004) 등이나 소설 쪽에서는 로저 젤라즈니와 윌리엄 깁슨이 각각 <드림 마스터>와 <뉴로맨서>에서 다뤘던 것이다. 팀원 각자의 장기를 살린 치밀한 계획을 통해 임무를 완수한다는 설정은 <오션스 일레븐>(2001) 시리즈와 닮았다. 심지어 <인셉션>은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제3자를 끌어들인 후 상황을 ‘조작해’ 뒤집어씌우는 <미행>의 이야기를 꿈의 구조로 번안한 것에 가깝다. (두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코브인 것과 그들의 극중 역할이 도둑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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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형식 속에 쌓아올려 새롭게 만들기를 즐겼다. 시간과 공간을 교란한 편집으로 비선형적 서술을 선보였던 <미행>,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의 처지를 관객에게 이입시키기 위해 7개의 에피소드를 10분씩 시간 역순으로 진행한 <메멘토>(2000), 허구의 코믹스에 사실주의를 접목한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 나이트>(2008)까지, 놀란의 연출은 설계자의 그것과 무척이나 닮았다. <인셉션>도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구조로 승부를 보는 영화다. 꿈속을 탐구하는 영화답게, 그것도 꿈속의 꿈, 더 나아가 꿈속의 꿈속의 꿈으로 확장하며 아예 다중의 꿈을 통해 영화적인 미로를 설계해버린다.

극중 미로의 구조는 주인공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꿈을 통해 드러나는 강박관념, 불안감, 무의식 등 심리적인 상태로 구획 지어진다. 자칫 관객들에게 어렵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인셉션>은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한 영화다. ‘꿈의 미로’라고 했을 때 우리는 흔히 장자, 프로이트, 니체 등을 이정표삼아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꿈의 시각화를 감안했을 때 <인셉션>은 개념정리와 해설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극중에서 충분히 설명되기도 한다.) 놀란이 참조했음이 명확해 보이는 두 명의 화가 M.C. 에셔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익숙한 구도가 <인셉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힌트다. 이는 이 영화의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입구와 출구가 동일한 미로

놀란 감독이 <인셉션>으로 설계한 미로는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출구가 동일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형태다. 코브가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신분인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그로인해 집을 떠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만날 수 없는 코브는 기업 총수 사이토(와타나베 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합병을 위해 라이벌 기업의 후계자 피셔(킬리언 머피)의 생각을 개조해달라는 것. ‘생각 추출자’ 코브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수배 혐의를 풀어줄 것을 조건으로 건다. 다시 말해, <인셉션>은 집 떠난 코브가 누명이라는 ‘이상한 고리’를 풀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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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누명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오인 받은 주인공의 꼬인 사연을 풀기 위해 알리바이, 증거, 과학적인 수사 등과 같은 이성적인 개념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셉션>은 이성의 영역을 무너뜨려 꿈이라는 가상 세계 속으로 침투한다. 물론 현실의 시간이 꿈속에서는 12분의 1의 단위로 흘러간다는 등의 꿈과 관련한 나름의 과학적인 현상을 접목하기도 한다. 다만 어쨌든 인간의 심리는 과학이나 이성으로 그리 쉽게 증명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 탓에 수학적인 연출로 정평이나 난 크리스토퍼 놀란이 꿈의 ‘설계’를 통해 코브의 심리를 드러낸다는 설정은 확실히 이율배반적으로 비친다. 

이런 이율배반의 미학이 가능한 세계는 예술이 유일하다. 특히 에셔는 공간의 구획을 무화함으로써 현실과 가상의 벽을 무너뜨린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은 수학적인 계산에 따라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균등하게 구획이 분할되고, 경계가 존재하지 않아 여러 세계가 공존하며, 그럼으로써 그림 속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한다. 이는 놀란이 <인셉션>에서 보여주는 꿈의 개념과 조응한다. 극중 꿈과 현실의 경계는 희미하고, 현실에서 꿈으로, 꿈에서 꿈으로, 다시 꿈의 꿈에서 꿈으로 무한히 증식하며, 그럼으로써 늘어나는 세계를 신(scene)별로 교차(혹은 분할)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실제로 <인셉션>에는 에셔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들이 종종 튀어나온다. 일례로, 에셔가 즐겨 그렸던 거울에 비춘 상은 설계자로 영입된 아리아드네(엘렌 페이지)가 처음으로 꿈의 세계를 경험할 때 활용된다. 거대한 거울로 현실과 가상의 테두리를 지워 세계를 확장하는 장면에서 제시되는 것. 코브의 오랜 친구 아서(조셉 고든 레빗)가 (역시 꿈속에서!) 그들의 임무를 방해하는 추격자를 따돌리기 위해 계단의 구조를 조작, 끊어지지 않는 선처럼 만드는 것이 또한 그렇다. 이처럼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이상한 고리는 화가 에셔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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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은 앞서 언급했듯이 뫼비우스의 띠를 이야기의 구조로 삼는다. 그러다보니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직선을 이루지 않고 원을 그려 서술의 궤도가 돌고 돈다. 현실이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고, 출발점이 귀환점이 되고, 다시 귀환점이 출발점이 되는 등의 상반되는 두 가지 가능성의 공존 혹은 순환. 하여 <인셉션>의 결말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무한대의 길이 열리는데 이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되는 모호함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래서 <인셉션>을 지배하는 영화적 정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초현실주의’가 될 텐데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역시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인용된다.

초현실적인 꿈의 세계

꿈의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다. 이성과 상식을 넘어선 세계다. 초현실적인 세계의 묘사에 관한한 할리우드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들이 가상의 천지창조를 밥 먹듯이 이뤄내는 배경에는 CG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하여 티가 난다. 허황한 맛이 없지 않다. 놀란은 좀 다르다. 그는 CG보다 여전히 특수효과를 신봉하는 고전주의적 연출가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묘사한 꿈속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한 눈에 보면 현실인데 현실에서 통용되는 물리력이 갑자기 무너지는 순간, 그제야 꿈이라는 실체가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셉션>의 꿈의 세계는 개별적이지 않고 현실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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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360°도 회전하는 호텔 복도에서의 액션 시퀀스는 단적인 예다. 아서의 꿈속에서 벌어지는 상황인데 복도가 회전을 하는 이유는 잠을 자는 현실의 피셔의 육체에 충격이 가해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 촬영은 세트로 지은 복도를 전기모터를 이용해 회전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꿈과 현실의 연관성을 이용해 놀란이 창조한 꿈의 풍경은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파리 시내가 반으로 접혀 하늘을 가리고 도시에서나 볼법한 첨단의 건물들이 파도치는 해변에 즐비하며 ‘킥’(kick)이라 하여 현실에서 잠든 신체에 추락을 가하거나 특정음악을 들려주면 꿈속은 무중력 상태로 돌변해 잠을 깨게 된다. 

이질적인 요소의 하나 됨, 즉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 기이함을 부여하는 기법을 들어 미술계에서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부른다. 르네 마그리트는 데페이즈망의 대가다. 에셔 그림의 주제가 <인셉션>의 구조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은 극중 꿈속 장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활용된다. 영화의 첫 장면, 파도치는 해변 위에 쓰러져있는 코브의 이미지는 <집학적 발명>이, 이동하는 차속에서 복면을 쓰고 잠이 든 인물들은 <연인들>이, LA 시가지 도로 한가운데 별안간 출몰하는 기차 장면은 <피레네 산맥의 성체>가, 그리고 코브의 ‘림보’(원초적인 무의식의 세계) 속 허물어진 빌딩 사이에서 홀로 제 모습인 집은 <빛의 제국>이 연상되는 것이다.

이 장면들의 공통된 특징은 ‘낯섦’이다. 낯선 광경은 이목을 끌기 마련이다. 놀란은 굳이 알록달록한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고도 일상을 낯설게 함으로써 꿈의 효과와 더불어 그 정체에 대해 보는 이를 궁금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그 자신의 예술적 장기다. 이를 위해 마그리트가 동원한 방법을 들어 위에 언급한 <인셉션>의 장면들이 의도한 바를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해변 위에 쓰러진 코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복면을 쓴 이들은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 도로 위에 나타난 기차는 코브 이하 팀원들 앞으로 닥칠 파괴의 전조인가? 폐해 속 집은 불안정한 코브의 심리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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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와 에셔 모두 초현실주의를 지향하지만 마그리트는 철학적이고, 에셔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그중 크리스토퍼 놀란이 마그리트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뽑아낸 장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불길하거나 암울한 기운을 뽐낸다. 그것은 현실의 물리력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꿈이라는 공간을 상기시키기 때문일 터. 극중 꿈을 침투 당하는 당사자 코브(아리아네드는 코브가 가진 불안한 심리의 정체를 풀기 위해 코브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에 수시로 잠입한다.)와 피셔의 현실이 어려움에 처할수록 이들의 꿈의 내용은 더욱더 초현실적으로 변모한다.

현실이 더 초라해지고 끔찍해질수록 그에 맞춰 꿈도 합을 맞추니, 꿈속에 현실이 ‘실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게다. 그렇다면 현실은 현실의 세계뿐 아니라 꿈에도 속하는, 일종의 ‘증강현실’이 된다. 이렇게 꿈과 현실이,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애매해지면서 무한으로 확장해가는 것이 지금 우리의 진짜 세계다. <인셉션>은 꿈의 침투라는 오래된 설정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은유한다. 그러니까 놀란 감독은 <인셉션>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는 꿈인가? 현실인가? 실제인가? 가상인가? <인셉션>은 여기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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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201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