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정신의) 집을 찾아서

christina

<크리스티나의 세계>라는 그림이 있다. 현재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에서 전시 중이다. 이 그림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 앤드류 와이어스가 1948년에 그렸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텅 빈 들판 위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오두막과 같은 쓸쓸한 풍경에 주목한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크리스티나의 세계>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선수와 관중이 모두 퇴장한 축구장의 그라운드처럼 황량한 들판이 화폭의 3분의 2 이상을 뒤덮고 있다. 그 위에서 앙상한 팔목을 드러낸 한 여성이 기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뒷모습에서 힘겨워하는 표정이 느껴진다. 그림의 상단에는 화가가 구겨 넣은 듯 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의 포커스가 중앙에 있는 여성에 맞춰진 까닭에 상대적으로 비율이 작은 농장까지의 거리는 꽤 멀어 보인다.

이 여성의 이름은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불편했던 크리스티나는 앤드류 와이어스의 실제 이웃이었다. 앤드류 와이어스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정규 학교 교육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에게 크리스티나의 몸 상태는 남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그린 이유다.

워낙 유명한 그림이어서 영화에도 많이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톰 크루즈가 출연했던 <오블리비언>(2013)이다.  <오블리비언>은 외계인 침공에 맞서 핵을 사용했다가 인류가 멸망한 미래가 배경이다.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외계인들이 지구에 숨어 저항하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복제한 인간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정기적으로 정찰하는 잭이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이 있다. 외계인의 감시를 피해 울창한 숲 속에 마련한 오두막이다. 이 오두막에는 책과 음반과 같은 예술품이 숨겨져 있고 중앙에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걸려 있다. <오블리비언>은 이 그림을 통해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래 사회를 작동하는 차가운 디지털 문화에 반해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그림도 감상할 수 있는 따뜻한 아날로그 삶으로의 ‘회귀’다.

안 그래도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품은 이야기 역시 ‘집으로의 돌아감’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품고 있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 이 주제에 대한 의문 부호의 감정을 남긴다. 크리스티나 홀로 들판 위의 저 먼 집으로 과연 잘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편한 몸의 자세와 더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그림 속 미장센은 크리스티나의 손이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대신해 몸을 지탱하려 손에 얼마나 힘을 쥐었는지 새하얀 팔목과는 다르게 시퍼렇게 멍이 들어 유난히 눈에 띈다. 회색빛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과 크리스티나의 몸에 가시면류관처럼 드리운 그림자가 더해지면 멜랑콜리가 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로 작용한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이유가 있다. 이 그림의 구도와 분위기를 생각나게 하는 두 편의 최근 영화 <암살>과 <셀프/리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은 각각 충무로와 할리우드라는 생산지 만큼이나 장르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거리가 멀다. 예컨대, 시대극의 형태를 띤 블록버스터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저예산으로 만든 Sci-Fi물이다.

내용 차이도 상당하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를 다루는 <암살>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군과 일본에 투항해 매국노 노릇을 서슴지 않았던 이들의 비극적 역사를 오락물의 외피로 담아낸다. <셀프/리스>는 미래의 뉴욕이 배경이다. 주인공은 지금의 뉴욕을 설립한 거물이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주인공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병에 걸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정신을 다른 이의 육체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영생을 얻으려 한다.

공통점을 찾기가 참 쉽지 않은 영화들인데 ‘정신의 부재’를 키워드 삼아 접근하면 어떨까. <암살>과 <셀프/리스>는 모두 정신적 혼란, 즉 정체성 문제를 기반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암살>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상식과 도덕의 맑은 물을 원천에서부터 오염시킨 친일파의 활개 배경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많은 이의 공감을 얻었다.

한국 역사라는 특수성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게 특징이다. 불멸의 삶을 위해 타인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 모습을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유전자 복제 문제까지 갈 필요 없이 더 나은 외양, 더 어려 보이는 외모를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하는 작금의 풍토에서 <셀프/리스>는 유의미한 질문을 제기한다.

질문은 그 자체로 답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암살>과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구도와 이미지로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힌트를 제공한다. 이와 관련, 내가 <암살>에서 흥미를 느낀 지점은 극 중 친일파 염석진(이정재)이 독립군 안옥윤(전지현) 일행의 저격을 받고 경성 거리에서 쓰러지는 장면에서였다.

총을 맞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성의 후미진 골목으로 도망치던 염석진은 다급한 마음에 정체불명의 문을 밀고 들어간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허허벌판이다. 이리저리 바람에 휘날리는 하얀 적삼이 황폐하여 몹시 쓸쓸한 기운을 강화한다. 이를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며 쓰러진 염석진의 죽음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감정의 정체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가 처단되었다면 정의가 실현된 것인데 <암살>은 왜 이 장면에서 기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현실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허구이기 때문일 터다. 친일을 이유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던 염석진은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된다. 이건 팩트다. 반민특위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 까닭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해방 뒤에는 미 군정에 붙어 보신을 일삼아 온 염석진’들’이 바퀴벌레와 같은 생명력으로 지금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채 사회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

북적이는 경성 거리를 배경으로 하던 염석진의 도주 장면이 별안간 허허벌판으로 옮겨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크리스티나처럼 비틀린 자세로 쓰러진 염석진은 단순히 친일파의 의미를 넘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로 앓게 된 한국인의 정신 장애를 나타내는 듯하다. 염석진의 죽음과 함께 주변에 펼쳐진 황폐한 대지는 역사 청산으로 우리가 가꿔야 할 밝은 미래일 터. 하지만 <암살>이 염원하는 역사 청산의 미래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농장처럼 화면의 소실점에 놓인 것 같은 기시감을 선사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다리처럼 몰상식과 비도덕으로 정신의 그로기 상태에 놓인 선량한 한국인들이 도달하기에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암살>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참조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의미를 전달할 가장 최적의 구도를 선택한 결과일 텐데 바로 그 점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왜 명화인지 드러난다. 앤드류 와이어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처음 공개했을 때 잔디 하나까지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실적인 묘사로 인해 전혀 예술적이지 않다는 혹평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을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적이지만, 그 속에 있는 불안감과 안타까움은 사실적인 붓 터치와 다르게 어딘지 모를 비현실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유독 Sci-Fi나 시대극에서 자주 차용되고는 한다. Sci-Fi와 시대극은 동시대를 벗어난 시간대가 주요한 시간대로 작용하지만, 실은 미래나 과거를 우회해 현재에 대해 언급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장르다. 바로 여기에 ‘회귀’의 주제를 품은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맞아 떨어지는 데가 있다.

회귀는 인간의 본능이다. 집 밖을 나가면 결국에는 돌아와야 하듯이 내 삶의 가치가 혼란할 때 제 자리를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상식과 도덕과 질서는 이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보편이다. 보편은 어디에서나 통한다. 상관관계가 별로 없어 보이는 <암살>과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그럼으로써 연결된다. 안간힘을 다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크리스티나의 마음은 친일청산이라는 상식의 집을 향해 힘겨운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는 우리네 마음과 통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암살>과 다르게 <셀프/리스>는 <크리스티나의 세계>의 차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셀프/리스>를 연출한 타셈 싱 감독은 <더 셀>(2000)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2008) 등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미적으로 뛰어난 화면을 구성하는 게 특징이다. <셀프/리스>는 Sci-Fi이되 저예산을 지향하다 보니 볼거리의 빈약함을 감추기 위해 <크리스티나의 세계>와 같은 명화의 구도와 색감을 의도적으로 가져와 화면의 ‘때깔’을 높이는 한편, 메시지를 강화한다.

젊고 건강한 육체로 다시 태어난 <셀프/리스>의 주인공 다미안(라이언 레이놀즈)은 이식 중 생긴 부작용에 시달린다. 육체의 원래 소유자이었던 이의 기억이 불쑥불쑥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악몽에서 벗어나려 기억의 파편을 단서 삼아 다미안은 자신의 육체의 주인이 살았던 집으로 찾아가니. 타셈 싱은 바로 이 장면에서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가져온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장면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다미안이 문제의 집까지 안전하게 다다를 수 있을지, 어렵게 도착하더라도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아니나 달라, 다미안이 새로 얻은 육체는 정당한 과정이 수반되지 않았다. 이식을 집도한 의사의 설명과 다르게 육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생명 연장의 혜택을 입은 다미안의 입장에서는 심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써 찾아온 딜레마. 육체를 돌려주고 나는 죽음으로써 사라져야 하는가, 불법에 눈감고 뻔뻔하게 영생의 길을 걸을 것인가.

다미안의 선택은 전자다. <셀프/리스>는 이와 같은 선택을 통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불멸의 삶을 위해 남의 육체를 빌려 정신을 이식했을 때 그것은 온전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게 된 시대, 다미안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젊음의 시기를 연장할 수 있는 의료 발달의 시대에 <셀프/리스>가 <크리스티나의 세계>로써 전달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요람에서 태어난 우리는 결국 무덤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생과 사의 시간이고 인간의 운명이며 본능이다. 회귀, 즉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거늘 언제부턴가 상징적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인간의 행보가 더뎌지고 있다. 나만 잘살겠다는 지나친 욕심으로, 욕심으로 얻은 부와 명예를 천년만년 지속하고 싶다는 허욕으로,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온갖 탐욕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집까지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지고만 있다. 발표된 지 70년 가까이 된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영화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집을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은 지금 어떠한가.

 

ARENA HOMME
2015년 10월호

초현실주의 세계의 마블 슈퍼히어로들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와 비교해 굳이 현실적이려고 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크 나이트>(2008)의 크리스토퍼 놀런은 기껏 허황한 코믹스에 불과했던 이 장르에 사실주의를 접목,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DC 코믹스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 슈퍼맨과 배트맨이 영화상에서 지구를 위주로 활동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들은 지구와 우주와 신계(神界)를 넘나들며 거대한 세계를 아우른다. 현실을 넘어서는 ‘초현실주의’로서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이하 ‘<어벤져스 2>’)이다.

<어벤져스>(2012)에 이어 <어벤져스 2>의 연출을 맡은 조스 웨든 감독은 속편을 두고 “<대부 2>(1974)에서 영감을 얻었다”며 전편과는 다른 성격의 영화가 될 것을 자신했다. 그와 같은 자신감과 다르게 <어벤져스 2> 역시 여느 블록버스터 속편의 영화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뉴욕에서만 진행됐던 전편과 다르게 이번에는 서울을 비롯해 23개국 로케이션으로 촬영이 이뤄졌다. 또한, 등장하는 악당의 수도 <어벤져스>의 외계 종족 치타우리를 능가한다. 악당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다.

이건 과장된 수식이 아니다. <어벤져스 2>의 슈퍼빌런은 울트론(제임스 스패이더)이다. 울트론은 실은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작품이다. <어벤져스>에서 치타우리의 지구대침공에 충격을 받은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아이언맨 군단을 조성하려 든다. 토니 스타크는 이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 시스템 ‘자비스’를 돌린다. 그러던 중 악성 코드가 침입하고 오류가 발생하면서 울트론이 탄생한다.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토니 스타크와 목적하는 바가 같다. 방법이 문제다. 토니 스타크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평화를 원한다. 그에 반해 울트론은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을 제거하면 자연스럽게 세계평화가 따라올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의 안위를 두고 방법상 서로에게 모순을 취하다 보니 토니 스타크와 울트론은 세계평화를 공유함에도 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울트론은 스스로 결점을 보완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물론 무한 복제 능력을 갖춰 자신과 모습이 같은 울트론 군단을 조직한다. 제거하면 할수록 그 수를 늘려가는 울트론 군단의 진가는 어벤져스 멤버와 맞붙는 소코비아 전투에서 드러난다.

소코비아는 가상도시로 극 중에서는 동유럽에 위치한다. 어벤져스의 오랜 숙적 중 하나인 하이드라의 본부이자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와 퀵실버(애런 테일러-존슨)의 고향이다. 울트론은 소코비아를 전진기지 삼아 인류 멸망을 위한 계획을 준비한다. 이를 알아챈 어벤져스 멤버와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울트론은 자신을 무한 복제해 이에 맞선다. 복제 울트론들이 땅에서 솟아나고 특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어벤져스 2>의 메인 포스터에도 장식되어 있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 Golconda>(1953)를 참조한 듯한 인상이다.

벨기에 출신의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나 일상적인 사물을 왜곡해 상식과 논리를 파괴하는 작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도심 위로 검은 중절모와 코트를 입은 신사’들’이 비처럼 떨어지는 <겨울비>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축에 속한다. 르네 마그리트는 그림 속 신사들처럼 입고 다니기를 즐겼다. 그뿐 아니라 <겨울비> 외에 <교장 Le maitre d’ecole>(1955) <데칼코마니 Decalcomanie>(1966) 등에도 자주 등장시켰다.

말하자면 이 그림들 속 신사는 르네 마그리트의 분신이다.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을 모델로 많은 그림에서 신사의 이미지를 ‘복제’한 것처럼 <어벤져스 2>의 울트론도 같은 방식으로 울트론 군단을 만들었다. <겨울비>라는 낭만적인 뉘앙스의 제목과 다르게 이 그림은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다. 검은 옷을 입어서인가, 아니면 두 차례 세계대전의 격전지가 됐던 유럽 출신의 화가라는 이력 때문인가, 전쟁 중 도심에 투하되는 폭격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세계평화를 위해 탄생한 울트론도 차가운 금속 재질의 외양 탓인지 영 감정이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어벤져스 2>와 <겨울비>의 특정 이미지가 나타내는 주제는 산업화, 첨단화에 따른 현대 사회의 폐해일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전 세계가 네트워크화되면서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빼앗아간 개성, 그로 인해 무너지고 와해한 일상의 삶들이 <어벤져스 2>는 슈퍼히어로물이라는 허구로, <겨울비>는 초현실주의로 은유 된다.

이의 핵심은 ‘낯섦’이다. 우리가 늘 속해 있고 경험하는 세계도 달리 보여주면 세상을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진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은 상식이나 합리를 넘어서는 세계, 즉 잠재의식이나 꿈 등을 탐구할 때 사용되는 용어다.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서울이 <어벤져스 2>에 등장했음에도 낯설어 보이는 건 마포대교, 상암동, 강남 등지에서 어벤져스 멤버와 울트론이 벌이는 대결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설정인 까닭이다.

영화는 그렇게 상상에서나 이뤄질 것 같은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구현해 마법처럼 관객을 홀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이 개봉과 함께 압도적으로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건 그와 같은 초현실주의적인 설정과 이미지에 있다. <어벤져스 2>에서의 초현실적인 정체성은 소코비아의 도시 전체가 공중으로 부양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울트론은 공중에 뜬 도시를 떨어뜨려 혜성의 지구 충돌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 멸종을 시도하려 든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중에도 이와 흡사한 설정의 그림이 있다. <피레네 산맥의 성채 Le chateau des Pyrenees>(1961)다. <어벤져스 2>에서 소코비아에 위치한 하이드라의 본부를 연상시키는 성이 바위 정상에 솟아 있고 이 바위는 UFO처럼 해변 위에 둥둥 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가 프랑스의 관용어 중 ‘실현되지 못할 백일몽’을 의미하는 ‘허공 위의 성곽’에서 가져와 비튼 것이라고 한다.

어벤져스 멤버들이 소코비아 국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도시를 공중에서 폭파하면서 인류 멸망을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는 울트론의 야심은 ‘공중누각’으로 귀결된다. 당연한 결과다. 이건 정의의 문제와 상관없이 이 장르의 불변하는 법칙과 같은 거다. 아무리 사상 최강의 적이 등장한들 우리의 슈퍼히어로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발붙인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같은 불의와 비상식으로 가득하다 보니 영화에서나마 정의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상상 속의 슈퍼히어로를 창조하고 슈퍼히어로물에 열광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겉으로는 견고해 보일지 몰라도 <피레네 산맥의 성채>처럼 언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정한 게 사실이다. 세계평화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조차 초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은 더욱더 슈퍼히어로물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런 욕망을 대변한 듯 <어벤져스 2>에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을 연상시키는 장면과 설정이 등장한 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마블 스튜디오는 웬만해서는 감독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7월 개봉이 예정된 <앤트맨>의 원래 감독이었던 에드가 라이트(<뜨거운 녀석들>(2008)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등)가 마블 스튜디오와의 창작의 이견(creative differences)을 이유로 도중 하차한 일화는 유명하다.

확실히 DC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와 비교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은 감독의 색깔이 떨어지는 편이다. DC코믹스의 대표적인 슈퍼히어로인 ‘배트맨’만 해도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런 등 할리우드에서 개성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감독들이 연출을 맡아 작품성을 한껏 높여 놨다. 개별 프로젝트로 기능하는 DC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감독의 비전을 우선한다면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은 제작사의 입김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워낙 시리즈가 방대해서 감독의 개성에 방점을 맞추었다가는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개중 조스 웨든 감독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이야기의 효과적인 전개와 무수한 캐릭터의 경제적인 운용을 우선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에서 그나마 개성 있는 연출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개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스 웨든은 <어벤져스 2>를 통해 초현실적인 마블 슈퍼히어로물의 정체성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연상하는 이미지로 확실히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여느 블록버스터 영화와 다르게 속편을 거듭해도 TV 드라마처럼 새로운 이야기로 관객을 유혹한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운용하는 방식까지 획기적인 시도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벤져스 2>만 해도 <어벤져스>와는 등장하는 악당의 성격도, 어벤져스 멤버들 간의 갈등 양상도 변화한 듯 보이지만, 전편보다 더 강력해진 악당, 더 허황해진 전투라는 스케일의 강박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대신 조스 웨든은 전편보다 늘어난 악당의 수를 <겨울비>로, 더욱 거대해진 규모의 전투 장면은 <피레네 산맥의 성채>의 이미지로 적용해 흥미로운 미학을 선보인다.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쿠키 영상은 다음 작품을 예고하는 실용적인 기능 외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초현실주의와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시다시피 마블 스튜디오 영화의 쿠키 영상은 대개 속편의 더 강한 적을 예고한다. <어벤져스 2>의 경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최고의 악당으로 평가받는 타노스(조쉬 브롤린)를 등장시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둔 상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비롯해 모든 슈퍼히어로물은 물리친 악당보다 더 강력한 악을 부르는 형태로 속편을 운용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끝이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의 싸움이 끝없이 돌고 돈다. 르네 마그리트와 함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M.C. 에셔의 <상대성>처럼 아무리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이 <다크 나이트> 삼부작으로 슈퍼히어로물을 현실에 발붙여 놓았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초현실이다. 그래서 무한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가 이벤트성으로 개봉하는 것과 다르게 마블 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물은 <어벤져스 2>에 이은 <앤트맨>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2기를 마무리한 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년 6월 개봉 예정)부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파트 2>(2019년 5월)까지, 무려 9편의 3기 영화들 라인업을 발표한 상태다.

조스 웨든은 이에 착안해 <어벤져스 2>에서 초현실주의의 정체성을 확실히 박아 놓았다. 이는 또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참여한 감독들을 기능인으로서 고용된 형태로 부려 먹는(?) 마블 스튜디오를 향한 조스 웨든의 무언의 저항으로 비춘다. 감독의 연출적 개성이 돌출되길 꺼리는 마블 스튜디오의 전략은 슬슬 관객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전까지 무수한 캐릭터와 방대한 이야기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각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겨울비> 속 검은 양복의 신사들처럼 반복되는 연출 패턴은 새로움을 바라는 관객의 변화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어벤져스 2>에서 조스 웨든이 보여준 연출은 그런 징후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마블 스튜디오는 감독의 개성을 누르는 방식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유지하려는 전략을 취할 터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창작자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하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기대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앞으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스튜디오의 대중성과 감독의 개성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상대성>처럼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통해 좀 더 낯설어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로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재미를 느꼈으면 한다.

ARENA HOMME
2015년 6월호

<엑스 마키나> 그리고 A.I.는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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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엑스 마키나>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는 라틴어로 ‘기계 장치의 신 god from a machine’을 의미한다. 여기서 ‘데우스’, 즉 ‘신’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삭제한 제목은 역설적으로 기계 장치가 신이 되는 이야기를 기대케 한다.

기계인가? 인간인가?

칼렙(돔놀 글리슨)은 인터넷 검색 엔진 기업 ‘블루문’에 근무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다. 근무 중 회장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의 별장에 초대받은 행운을 거머쥐고 기뻐한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별장에서 칼렙은 매혹적인 여성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만난다. 그녀는 천재 개발자이기도 한 네이든이 창조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로봇, 바로 A.I.다. 칼렙이 네이든의 비밀연구소에 초대받은 진짜 이유는 에이비가 지닌 성능을 테스트하는 데 있다. 그녀, 아니 A.I.가 보여주는 감정이 진짜인지, 프로그래밍에 맞춰 흉내 내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A.I.가 인격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인간과 가까워지거나 오히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는 테마의 영화는 낯설지 않다. 멀게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부터 가깝게는 <그녀>(2013)까지, <엑스 마키나>의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게다가 이야기 대부분이 네이든의 비밀연구소에서 이뤄지는 까닭에 영화의 규모조차 소박해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하기도 무리다. 대신 눈길을 끄는 건 독특한 외형을 지닌 에이바다.

에이바는 그물 형태의 보디 슈트를 장착하고 칼렙을 맞이한다. 칼렙의 반응은 우선으로 경이로움이지만, 매우 놀라기보다 언젠가 한 번 만나본 것처럼 호의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부분적으로 인간과 똑같은 에이바의 외모 덕이다. 몸 전체를 그물 형태의 보디 슈트가 감싸고 있지만, 얼굴과 손발만큼은 인공 피부로 마감되어 있어 사람이 기계 장치를 만났을 때 느끼는 위화감이 상당 부분 경감된 까닭이다. 로봇과 인간의 단계에 있는 A.I.의 정체성을 부여한 제작진의 의도일 터다. 그에 따라, 칼렙은 지식을 단순히 다운로드한 로봇으로서의 에이바와 그것을 학습해 감정을 느끼는 단계로까지 진화한 A.I.로서의 에이바 사이에서 혼란한 감정을 드러낸다.

제작진은 너무 기계적으로 보이기보다 생물체의 유기성과 컴퓨터의 계산적인 느낌이 고루 섞이길 의도했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자신이 연기한 에이바의 디자인에 대해 이런 감상을 전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에이바는 단순한 기계라고 하기에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실제로 이 영화의 연출자이자 각본까지 담당한 알렉스 가랜드는 에이바가 감정을 완전하게 각성하는 과정을 예술, 그중에서도 미술의 진화 과정에 대입해 풀어가며 동일 테마의 영화와는 색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고전주의에서 인상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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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 대부분은 대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고전적인 회화의 특징인데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일종의 기호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그 안에서 화가의 시각이나 감정을 읽는다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네이든의 비밀연구소를 광활한 자연경관이 돋보이는 곳에 설정한 감독의 의도도 여기에 있다. 이 지역에 도착한 칼렙이 비밀연구소를 발견할 때 영화의 카메라는 그 어떤 감정도 배제한 풍경화의 구도로 해당 장면을 바라본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의미 체계로만 존재한다. 이는 칼렙이 에이바에게 질문을 던져 얼마나 인간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지 알아보는 ‘튜링 테스트’ 제안을 받고 일차적으로 갖게 되는 감정과 일치한다. A.I.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경험한 적 없는 칼렙에게 에이바의 존재를 듣고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감정 체계란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의 의미를 강화하듯 튜링 테스트 관련,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유지계약서를 작성할 때 칼렙이 묵는 방 한쪽 벽에는 풍경화 그림이 한 점 무심하게 걸려 있다.

그림 속 내용보다 그림 자체의 미장센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본격적인 튜링 테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의도가 명확해진다. 에이바는 혼자 있을 때면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는 한다. 칼렙에게 보여준 첫 번째 이미지는 기하학적 문양으로 채워져 있어 무엇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이에 칼렙은 실체 있는 대상을 그려보는 것이 어떠냐며 충고를 한다. 이를 받아들인 에이바가 두 번째로 보여주는 그림은 유리방 옆에 소박하게 마련된 정원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건 대상으로서의 정원이 아니라 에이바가 이를 바라본 시선, 즉 그린 방식이다. 해상도가 높은 정밀화를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에이바가 그린 정원은 화소의 수가 적어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에이바의 A.I. 능력이 떨어져서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에이바가 그린 정원은 인상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주목했다. 고전주의 회화처럼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빛이 투영된 상태의 대상을 그리려 했다. 빛의 상태에 따라서 대상은 그 형태와 색채를 달리한다. 터너, 세잔, 모네 등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은 그림의 대상이 색에 의해 뭉개져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에이바의 정원 그림이 그렇다. 에이바가 해상도가 낮게 정원을 묘사한 건 유리에 반사된 빛에 의해 단편화된 형태로 정원을 바라봤기 때문일 터다. 그처럼 산만하고 혼란한 단편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했다는 건 에이바 나름의 ‘지각’을 통해 질서를 부여했다는 의미다. 지각(知覺)은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정원인가? 유리에 반사된 정원이라는 형태인가? 마침 풍경화처럼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비밀 연구소 외부의 아름다운 자연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다. 고전적 회화에서 인상주의라는 현대 예술로의 진화. 그에 맞춰 에이바는 연구소가 정전이 된 상태를 이용, 칼렙에게 네이든을 믿지 말라며 의심을 심고 혼란스럽게 한다.

아바타? 아니 에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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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치 튜링 테스트의 주체와 객체가 뒤바뀐 듯한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이다. 오히려 에이바가 칼렙을 테스트하는 듯 되어버린 상황은 ‘그녀’가 더는 수동적인 존재로 머물지 않을 것을 암시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한편으로 미(美)를 추구한다는 얘기다. 정원 그림으로 칼렙의 관심을 잡아두는 데 성공한 에이바는 준비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유혹의 기술까지 선보인다. 첫 대면부터 에이바에게 호감이 갔던 칼렙은 옷을 입은 그녀를 마주한 순간 A.I.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를 마주한 듯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오히려 칼렙이 유리방에 갇힌 듯한 구도로 이 상황을 응시한다.

바꿔 말해, 에이바의 입장에서는 적게나마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할 터. 무엇보다 옷을 입는 행위를 통한 욕망의 발산은 주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존재로서의 에이바를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에이바가 입은 옷의 디자인은 하얀 종이 위에 색색의 물감을 뿌린 듯한 잭슨 폴록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의도적인 의상의 미장센일 테다. 실제로 네이든의 비밀연구소 거실에는 잭슨 폴록의 대표작 중 하나인 <NO.5>가 벽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네이든은 에이바를 왜 여자로 만들었느냐는 칼렙의 질문에 이 그림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들려준다.

“이건 마음을 비우고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두른 거야. 의도적인 것과 임의적인 것의 중간 단계랄까? 폴락이 작업 방식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머리를 비우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는 이 그림을 그릴 수 없어?’ 이렇게 말했다면? 그럼 캔버스에 점 하나도 못 찍어 작위적으로 행동하는 게 부자연스러운 거라고. 대부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거야.”

그래서 잭슨 폴록의 작품은 추상적이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어떤 대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잭슨 폴록은 대상으로부터 그림을 해방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고전적인 회화에 의문을 갖고 대상이 아닌 빛에 주목했다. 그에 이어 피카소는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했고 마티스는 대상의 고유한 색을 고수하는 대신 자유자재로 색채를 활용했다. 그러면서 점점 그림 속 대상이 갖는 의미 정보는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그리고 잭슨 폴록 같은 이는 자신의 작품 자체를 일상의 사물과 별 차이가 없게 만들어 그림에 대한 일반의 상식을 바꾸었다.  

인상주의 화가부터 잭슨 폴록까지, <엑스 마키나>가 가져오고 인용한 그림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오직 작가 ‘그 자신’을 의미 정보로 제공할 뿐이다. 에이바라는 이름의 근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에이바의 이름을 듣고 아바타(avartar)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아바타는 사용자의 지시에 따라 가상공간에서 움직이는 그래픽 아이콘, 즉 수동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은 기계라는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의 의미로 뒤의 철자를 떼어내고 에이바(Ava) 단독의 이름을 부여했다.

액자 밖으로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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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 폴록의 그림처럼 에이바가 어떻게 기계의 수준을 넘어 인간처럼 지각하게 됐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신 “대부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거야” 네이든의 발언을 인정한다면 에이바와 같은 신인류의 출현은 당연한 차례일지 모르겠다. 그처럼 <엑스 마키나>는 에이바를 통한 기계에서, A.I.로, 신인류로의 진화 과정을 풍경화, 인상주의를 연상시키는 에이바의 그림, 잭슨 폴록의 <NO.5> 등 고전주의 회화에서 현대 예술까지의 발달 과정과 등치 시켜 설득력을 높인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이바가 지하에 있는 유리방에서 탈출해 지상으로 나와 헬리콥터를 타고 인간세계에 안착하는 이야기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이의 원전은 ‘흑백으로만 이뤄진 방 속에서 자란 메리’라는 사고실험일 것이다. 흑백 외의 색을 경험한 적 없는 메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이성으로만 습득한다. 예컨대, 빨간색에 대한 지식은 있지만,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다. 칼렙은 에이바에게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흑백의 방에 있는 메리는 컴퓨터, 밖으로 나온 메리는 인간을 상징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칼렙을 혼동시킬 정도로 지각 능력을 갖춘 에이바의 최종적인 단계는 유리방을 탈출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치면 액자 밖으로 나오는 것일 텐데 <엑스 마키나>는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을 활용해 탈출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그림 속 인물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림을 비롯해 저작 모음인 ‘블루문’, 언어로 이뤄지는 테스트 등 곳곳에 흩어진 비트겐슈타인의 흔적을 한데 모아 이 영화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의 누나로 알려진다. 그녀의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가 구스타브 클림트에게 의뢰해 완성한 작품이다. 그림 속 장본인은 이 작품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처럼 마르가레트는 독립심이 강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선진 여성으로 평가받았다.

말하자면 마르가레트의 현현(顯現)인 에이바는 자신의 창조주인 네이든을 처리하고 사랑을 빙자(?)해 칼렙을 유리방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네이든의 침실에 놓인 <마르가레트 스톤보로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속 마르가레트처럼 하얀 옷을 꾸며 입고는 지상으로의 역사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담담하다. 에이바가 자연의 색깔을 느끼고 바람이나 햇살의 감촉을 즐기는 광경을 포착해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인상이 역력하다.

알렉스 가랜드 감독이 ‘데우스’를 지우고 <엑스 마키나>를 제목으로 채택한 배경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의 존재가 아닌 인류 역사의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 중 한 단계로 인정하려는 듯한 의도가 읽힌다. 자연이 품은 모든 예술의 한 형태로서의 에이바. “우리가 좋아하는 예술의 목록을 만들면 훌륭한 토론의 대상이 될 거예요.” 에이바와 칼렙의 대화 중 한 대목이다. 이는 <엑스마키나>가 A.I.의 진화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딴지일보
(2015.2.24)

<로보캅> 정물로 전락한 미국인의 슬픈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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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2014)은 공식적으로 폴 버호벤 감독이 연출한 <로보캅>(1987)의 리메이크이다. 다만 기본적인 설정은 취하되 원작에서 좀 더 나아간 해석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능한 경찰이었던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가 범인 검거 중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부상을 입고 로보캅이 되는 과정은 두 영화 모두 별반 차이가 없다. 날로 범죄가 증가하는 디트로이트의 범죄율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경찰력이 필요한데 로봇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기업의 이해와 맞아 떨어져 로보캅이 탄생하는 것이다.

근데 폴 버호벤 버전과 다르게 호세 파딜라 감독은 그 과정에서 로보캅을 잘근잘근 해체하는 수준으로 머피의 몸이 어떻게 로봇 수트와 연결되었는지를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인가, 기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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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부상 이후 의식을 회복한 머피는 자신이 로봇 수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데넷 노튼(게리 올드만) 박사에게 원래의 몸으로 돌려놓아 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에 노튼 박사는 로보캅 수트의 팔, 다리, 몸통 부분을 차례로 분리하니, 남아있는 머피의 실제 육체라는 것은 머리로부터 이어진 기관지와 심장을 감싼 두 개의 폐, 그리고 오른손이 전부다. 이에 머피는 비명을 지르며 좌절하고 마는데 이 광경은 인간의 신체를 정육점의 고깃덩이에 비유해 일련의 작품 활동을 펼쳤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의 습작>(1953)나 삼단 제단화인 <십자가책형>(1965)에서 보듯 프랜시스 베이컨은 기괴하게 표정이 일그러진 인물이 비명을 지르는 광경이나 가축의 몸처럼 도축 당한 듯 훼손된 인간의 육체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림이지만 그것이 주는 인상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사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을 일러 ‘공포의 화가’라고 명명했을 정도다. 머피의 육체와 로보캅 수트를 분리하는 장면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 역시 공포다. 호세 파딜라 감독은 그 자신을 프랜시스 베이컨에 빙의해 이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베이컨의 그림을 연상하는 작품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극 중 로봇 테크놀로지 기술을 보유한 다국적 기업 옴니코프 사의 CEO 레이몬드 셀라스(마이클 키튼)의 사무실에는 똑같은 크기의 거대한 그림 세 점이 나란히 걸려있다. 이 작품 들 속에는 감옥과 같은 공간 안에 매달려 있는 훼손된 인간의 육체가 그려져 있다. 이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인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고 그린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 Triptych Inspired by Oresteia of Aeschylus>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트립틱 triptych’이라 불리는 삼단 제단화 양식을 즐겨 활용해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1969)다. (루치안 프로이트는 베이컨의 동료 화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손자이기도 하다.)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그의 말년인 1981년에 만들어진 까닭인지 가장 안 알려진 축에 속한다. 꼭 말년에 만들어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듯 그의 작품은 소재의 잔혹함은 물론 빨강과 같은 원색을 사용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전체적으로는 베이지 톤이 우세해서 예전만한 압도적인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베이컨의 그림이 인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배경을 이해한다면 호세 파딜라 감독이 왜 베이컨의 그림을 등장시켰는지 그 의도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로보캅 수트에 들어간 머피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로봇이라는 육체의 감옥에 갇힌 머피의 처지는 도축당해 갈고리에 매달린 고깃덩이와 무엇이 다를까, 에 대한 정체성 혼돈에 대한 문제 제기다. 다만 그리 새로울 게 없는 것은 1987년 버전에서 폴 버호벤 역시 똑같은 접근법을 보여줬던 까닭이다. 범인을 검거하기로 프로그래밍 된 머피(피터 웰러)가 가족을 만나면서 회복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 자체로 폴 버호벤의 주제의식이었다. 중요한 건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와 같은 삼단 제단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림이 배치된 그 방의 구도다.  

혹은 상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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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스의 사무실은 CEO의 위상을 말해주듯 굉장히 넓다. 한편으로 뭐 그리 넓을까 싶지만 이 사무실은 그림이 눈에 잘 띄는 구조로 설계되었을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셀라스의 책상 뒤편에 걸려있는데 카메라는 그와 같은 구도로 여러 차례 화면을 잡는다. 말하자면 그림을 잘 보이도록 배치한 사무실과 카메라의 구도는 어떤 면에서 그림을 판매하는 경매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다. 셀라스의 사무실은 경매장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방의 구도가 짜여졌다. 더 자세히는 뉴욕에 자리한 크리스티 경매장을 실제 모델로 했다.

2013년 11월 14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는 사상 최고 경매가의 미술 작품이 나왔다. 바로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이었다. 그 전까지는 소더비 경매에서 에드바르트 뭉크의 대표작 <절규>(1895)가 기록한 1억190만 달러가 가장 높았는데 베이컨의 작품은 이보다 2000만 달러를 더 상회하며 1억 4240만 달러(한화 약 1528억 원)로 판매됐다. 이 소식은 그 날로 세계 곳곳에 타전되어 화제의 뉴스가 되었다. 그만큼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가 걸작이라는 사실을 인증한 것. 다만 천문학적인 액수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가격 흥정은 대중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로보캅이 된 머피의 정체성 혼란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구입할 수 있는 그림은 예술인가? 상품인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만약 옴니코프 사를 운영하는 셀라스 같은 이라면 자신의 사무실에 걸어놓은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는 단언컨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었을 것이다. 폴 버호벤 버전에서 옴니코프 사의 CEO의 이름은 딕 존스였다. 호세 파딜라 감독이 알렉스 머피와 그의 경찰 동료 루이스(원작과 다르게 리메이크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 캐릭터로 바뀌었다!)와 같은 주요 인물의 이름은 놔둔 채 옴니코프 사 CEO의 이름을 바꾼 건 로보캅을 인간도, 기계도 아닌 상품으로 바라보는 셀러스의 시선을 반영한 것일 테다.

셀라스라는 이름은 당연히 상품 판매인, 즉 ‘셀러 seller’를 생각나게 한다. 셀라스가 옴니코프 사가 보유한 로봇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로보캅 상용화에 열을 올리는 건 이를 통해 주식의 가치를 끌어올린 후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남편을 잃기 싫은 부인의 마음을 헤아려 순수한 마음으로 머피를 되살리는 노튼 박사와는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그리고 셀라스의 입장은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켜 실은 군수산업의 이득을 꾀하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머피는, 아니 로보캅은 경매 시장의 그림처럼 최고가를 칠 때 팔아넘길 수 있는 상품 그 자체다.  

결국, 정물이다

그러니 셀라스에게 머피가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이란 단순히 상품의 하자일 뿐이다. 셀라스는 하루빨리 대중 앞에 로보캅이라는 상품을 선보여 언론에 노출시킨 후 주가를 높일 계획을 갖고 있다. 이에 노튼으로 하여금 머피가 단 한 톨의 감정도 느끼지 않게끔 손을 볼 것을 강제한다. 그와 맞물려 셀라스의 사무실에 걸려 있던 그림 속 소재 역시 붉은 살코기와 같은 신체에서 정물로 바뀐다. 가운데 그림에는 로보캅 수트의 재질인 듯한 합금 조각이 구겨진 채, 바깥쪽 두 점의 작품에는 아그리파를 떠올리게 하는 두상이 시커멓게 칠해진 채 제시되는 것이다.

이는 로보캅을 둘러싼 논쟁의 시선이 하나로 모아졌음을 시사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자신이 위치한 공간에 짓눌린 듯 인간의 초상을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지만 공포라는 감정으로 이를 감각하게 만든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감각이 들어서니 베이컨의 그림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인의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또 논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베이컨의 그림에서 곧잘 활용되는 갈고리에 걸린 신체 이미지는 어떤 면에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예수의 형상과 겹쳐지고는 한다. 베이컨은 이런 의도를 반영하고자 <아이스킬로스의 로레스티에 영감을 받은 삼단 제단화>나 <루치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와 같은 삼단 제단화 양식을 애용하고는 했다. 로보캅도 마찬가지다. 삼단 제단화 속에 들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매일 같이 혈액을 공급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로보캅은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제단을 연상시키는 기계틀에 자신의 몸을 고정해 둔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머피의 처지가 측은하면서도 동시에 숭고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셀라스 사무실의 바뀐 그림의 정물에는 이성이나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냥 차갑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의미를 가진 ‘바니타스 Vanitas’의 전형적인 정물화에 다름 아니다. 전투로봇을 상용화하겠다며 셀라스에게 감정을 거세당한 머피는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볼 수없는 한낱 정물일 뿐이다. 무수한 전쟁을 일으켜 국가의 위상과 이득을 높이려는 미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군인의 덕목이란 이와 같을 것이다. 정부의 명령에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고 적으로 규정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살상무기로써, 상품으로써의 군인이라는 정물.  

그리하여, 정물의 시대

호세 파딜라의 견해는 폴 버호벤의 버전을 확장한 경우다. 폴 버호벤은 1987년 버전에서 다국적 기업이 범죄와 결탁하면 발생하게 될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예견함으로써 슈퍼 파워만을 앞세운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행정을 비판했다. 그리고 호세 파딜라는 폴 버호벤의 예견이 이미 현실이 됐음을 인정하고 리메이크를 전개한다. 원작 영화에서 옴니코프 사를 경호하던 공격형 킬링머신 ‘ED-209’가 보병 타입의 로봇 ‘EM-208’과 함께 이라크에서 대규모 군사 활동 중인 극 중 뉴스릴을 영화의 오프닝에서 노출하는 것이다. 2014년 버전이 단순한 리메이크라기보다 폴 버호벤 버전의 후일담이라는 성격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시급한 건 국내 범죄를 막겠다며 도입한 첨단의 경찰력을 9.11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해외로 범위를 넓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이다. 거기서 희생되는 건 알렉스 머피의 경우에서 보듯 인간과 인간이라는 가치다. 다행히도 영화는 정부와 언론의 비호를 받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맞선 알렉스 머피로 대변되는 인간적 가치에 손을 들어준다. (흥미롭게도 극 중 인간 본위의 법을 발휘해 승리를 따내는 의원의 이름은 ‘드레퓌스’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이 영화를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편에 서서 로보캅의 상용화를 방송을 통해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보수 언론인 팻 노박(사무엘 L. 잭슨)의 마지막 대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중단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미국은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로 남을 거야.” 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은 정물의 시대에 인간으로 인정받기 힘든 미국인을 모델로 한 현대인의 슬픈 초상이다.

맥스무비
(2014.2.17)

<스토커>에서 클림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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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한때 미술 평론가를 꿈꿨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 (단편영화 <청출어람>(2012)과 <파란만장>(2010)을 공동 연출한 그의 동생 박찬경은 영화감독이자 설치미술가다.) 그의 영화에서 목격되는 무수한 상징과 기호들은 그런 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종종 명화의 이미지를 직간접적으로 가져오길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스토커>에서 인용 혹은 변주되는 명화는 다름 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The Kiss>(1907)와 <유디트 Judith I>(1901)다. <스토커>는 이야기의 특성 상 사건보다는 사건을 통해 조성되는 인물들 간의 감정 선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작품이다. 그래서 <키스>와 <유디트>를 연상시키는 장면을 살펴보는 것은 곧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 감독이 의도한 바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스> 삼촌이지만 괜찮아
   
<스토커>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에 이은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소녀’ 이야기다. 이름은 인디아(미아 와시코우스카)로, 1994년생인 그녀는 지금 막 18살 생일을 맞았다. 하지만 축하 대신 비보가 날아든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숨진 것. 그런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존재조차 모르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나타나자 마음을 뺏긴다. 말하자면,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이 못마땅한 인디아에게 찰리는 답답한 이 집에서 탈출구를 제공할 구세주다. 다만 엄마가 찰리에게 유혹을 보낸다고 생각한 인디아는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다.

<스토커>는 인디아가 소녀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다. (생일 때마다 미지의 인물로부터 받았던 구두를 벗고 찰리가 선물한 하이힐을 신는 과정?) 더 정확히는 엄마 이블린에게서 독립하는 사연을 다룬다. (장례 음식을 준비하던 여인들이 “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라고 수군대자 인디아가 반항하듯 계란을 박살내니, 껍질을 뚫고 나오는 과정?) 찰리는 이를 와인에 빗대 이야기하는데 (“이 와인은 1994년산이죠. 이 정도로 무르익지 않으면 풋내 나서 못 마셔요.”) 결국 <스토커>는 인디아가 풋내를 벗는 이야기인 셈이다.

소녀가 풋내를 벗는다는 건 곧 성(性)을 알아간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안 그래도, 찰리는 인디아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편의 상(喪)중임에도 이블린이 유혹의 눈길을 보내자 찰리는 이에 응하는 척하지만 실은 인디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방과 후에 맞춰 학교에 오는가 하면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권하기도 한다. 호기심과 반항심이 뒤섞인 (이블린 왈, “넌 섞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잖니”) 인디아는 일단 냉담한 반응을 보이지만 피아노를 치던 그녀 옆으로 찰리가 다가와 몸을 감싸자 이내 마음이 사르르 녹고야 만다.

이 장면은 흡사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연상시킨다. <키스>는 키스하는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그 모습이 <스토커>의 피아노를 매개로 하나가 된 인디아와 찰리의 포즈와 닮아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을 무대로 활약했던 클림트는 주로 성과 나체를 주제 삼은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기존 화단의 점잖고 권위적이던 화풍과는 완전히 결별했다는 의미에서 분리파로 분류됐다. 그런 맥락에서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의 화가’로 불렸는데 <키스>는 그런 특징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퇴폐적이거나 세련되거나, <스토커>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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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은 무엇보다 황금빛 이미지가 부각되는 까닭에 퇴폐적이면서도 세련된 기운을 발산한다. <키스>만 해도 남녀가 감각하는 사랑의 절정이 그림을 뒤덮고 있는 황금빛으로 만개한 양상을 보인다. 이와 같은 클림트의 특징은 <스토커>를 통해 박찬욱이 보여주는 연출과 맞닿아있다. 이블린과 인디아 모녀(母女)의 꺼져있는 사랑의 기운에 불을 지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치근대는 자'(stalker)가 아니라 ‘불을 지피는 자'(stocker)다.) 찰리는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나 결정적인 순간, 황금빛에 가까운 재킷과 티셔츠, 바지를 착용한다.  

문제의 피아노 장면에서 인디아와 찰리가 보여주는 협연은 섹스의 은유라 해도 틀리지 않다. 근친이라는 점에서 퇴폐적이지만 이 장면을 지배하는 전반적인 기운은 세련됨에 가깝다. 피아노 뒤의 스탠드가 이들의 행위에 황금빛을 은은하게 퍼뜨릴 뿐 아니라 동일한 콘셉트의 마룻바닥이나 벽지, 커튼 또한 금빛의 오라를 선사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절정의 순간을 감각하는 건 순전히 인디아뿐이다. 옆을 돌아보니 찰리는 ‘불을 지피는 자’답게 홀연히 사라진 상태다. 이건 인디아의 자위일까, 섹스일까? 그리고 찰리는 과연 누구인가?

<키스>는 황홀히 취해 있는 남녀를 묘사하지만 그 수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제목과 다르게 남자는 굳게 다문 여자의 입술이 아닌 볼에 키스하고 있고 그녀의 표정은 황홀함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여자의 피부도 남자와 다르게 하얗다 못해 시체를 연상케 할 만큼 창백한 수준이다. 게다가 자칫 발을 잘못 놀리면 절벽으로 떨어질 것처럼 여자는 아슬아슬한 포즈로 남자의 무게를 버티는 듯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키스>에 대해 죽음에 대한 매혹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키스>는 어떤 게 진짜이고 실제이며 사실인지 보는 이를 혼란에 빠뜨린다. 퇴폐와 세련이 공존하는 것처럼 경계가 주는 혼란은 무섭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클림트는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키스>에 낭만성을 부여했다. <스토커>도 마찬가지다. 소녀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인디아는 성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경험하는 순간이 두렵기만 하다. 그것은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했던 기존의 자신을 죽여야만 넘을 수 있는 영역이다. 결국 인디아가 성(의 절정)을 경험한다는 건 곧 죽음에의 매혹을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유디트> 모가지는 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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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디아가 실제인지, 환영인지 모를 피아노에서의 행위 후 실질적으로 갖는 첫 경험은 동시에 죽음을 포함한다. 찰리가 엄마 이블린과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한 인디아는 질투심에 사로 잡혀 충동적으로 같은 반 남학생 윕(알덴 에렌리히)을 불러낸다. 철길을 건너 (소녀에서 성인으로 선을 넘는 상징적 행위?) 숲속으로 들어간 인디아는 윕을 유혹해 키스를 하지만 그 이상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윕은 인디아를 거칠게 몰아붙이지만 귀신처럼 나타난 찰리가 그녀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이때 찰리가 윕을 살해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허리의 벨트를 풀어 목에 건 후 뒤에서 당겨 꺾어 죽이는 것이다. 찰리가 살해한 이들은 모두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목을 잃었다. 왜 목일까? 그 힌트는 윕과의 첫 경험으로 성인식(이를 자축하듯 인디아는 ‘더러워진 하얀 옷’을 벗고 샤워 중 자위를 하며 절정의 순간을 맛본다.)을 마친 인디아가 평소에 입지 않던 야한 잠옷을 입고 이블린을 찾아가는 엄마의 방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인디아는 이블린의 머리를 빗어주는데 거울로 통해 반사된 이들의 모습이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슷해 보인다.

‘유디트’는 위기에 빠진 페르시아를 구한 여인으로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아시리아군(軍)에게 포위되자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 호로페르네스를 유혹해 목을 벤 것. 그림은 이와 같은 배경을 호로페르네스의 잘린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의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럼 찰리는 <스토커>의 유디트 같은 존재인가? 사실 <유디트>는 클림트 그림의 속성상 유디트의 성적 매력과 죽음에의 매혹이 더욱 강조된다. 즉, 주제를 공유하는 <스토커>가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하는 연장선상에서 목을 자르는 행위를 등장시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러니까 잘린 목은 부차적인 요소다. <유디트>에서도 호로페르네스의 목이 하단에 잘려서 묘사되는 까닭에 살해 행위는 여기서 살짝 물러난 주제다. 오히려 금빛 미장센에 파묻힌 유디트의 몽롱한 눈빛과 살짝 벌린 입술, 훤히 드러난 가슴은 그녀를 팜므파탈로 규정한다. 특히 클림트는 유디트의 얼굴이 젖혀 보이게, 잘린 목은 앞으로 기울어 보이게 잡음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구도를 확실히 한다. 즉, <스토커>가 <유디트>의 이미지를 취하는 건 인디아가 지배를 받는 아이에서 지배를 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인디아가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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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와 찰리 간의 일대일 대면이 처음 이뤄지는 장소는 계단에서다. 2층에 서있던 찰리가 그를 올려다보는 인디아에게 “네가 왜 불리해 보이는 줄 알아? 내 아래에 있기 때문이야”라는 요지의 말을 건넨다. 그러자 인디아는 그에 질세라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같은 위치에서 찰리를 바라본다. 인디아가 이블린의 방을 찾아 벌이는 일련의 행위도 이와 흡사하다. 이블린을 앉혀두고 바로 뒤에 서서 머리를 빗겨주는 인디아의 행위에서는 목을 따서라도 엄마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게 읽히는 것이다.  

그럼 인디아는 왜 그렇게 이블린에 대해 부정적인 걸까. 영화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찰리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 의문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다. 이는 찰리가 왜 인디아에게 집착하는 걸까, 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또한 중요한 질문이다. 영화 후반에 전모가 드러나지만 인디아의 아버지이자 이블린의 남편인 리처드(더모트 멀로니)가 살해된 건 찰리에 의해서다. 찰리는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첫째인 리처드가 막내에게만 관심을 갖자 분에 못 이겨 셋째를 살해하고 어려서부터 정신병원에 갇힌 터다.

그리고 퇴원하던 날, 찰리는 리처드를 죽이고 인디아의 생일에 맞춰 이블린 모녀를 찾아온다. 찰리에게 이 날은 다시 태어난 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찰리와 인디아는 같은 인물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영화는 둘의 동일성을 노골적일 정도로 드러낸다. 누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걸 몹시 싫어하는 인디아처럼 찰리 역시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여직원이 포옹하려 들자 흠칫 놀라 처음엔 몸을 피한다. 또한 찰리의 가방을 뒤지던 인디아가 선글라스를 꺼내 착용한다든가, 아빠가 숨긴 찰리의 편지를 읽을 때 둘의 목소리가 합해진다는 점도 그렇다.

이를 상기한다면, <키스>가 연상되는 피아노 장면에서 둘이 엉키는 장면은 찰리와 인디아의 동일성에 대한 상징이라 해도 과장되지 않는다. 그러면 인디아와 이블린 간의 반목도 충분히 이해될 법하다. 찰리가 형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처럼 인디아 역시 이블린이 엄마로서의 사랑을 온전하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결국 찰리와 인디아가 겪는 성장통의 정체는 손윗사람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해야 이들은 어른으로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살부(殺父) 의식이다. (리처드와 찰리는 무려 9살 차이다.)  

박찬욱 감독이 <유디트>의 이미지를 끌고 온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찰리가 리처드를 살해하는 장면은 선명하되 인디아가 이블린을 죽이지는 않기에 다소 혼란을 느낄 법도 하다. 대신 인디아는 찰리를 얻음으로써 그에게 관심을 보이던 이블린을 제치고 승자의 기분을 만끽한다. 그에 더해, 인디아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찰리마저 제거하기에 이르니, 엄마로부터의 독립에 이어 그녀는 완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디아는 “어른이 된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라고 얘기를 했던 걸까.

영화가 시작되면 인디아는 “남들이 잘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며 내레이션을 한다. 이는 <스토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반복이 되는데 찰리를 살해하고 엄마를 떠나 뉴욕을 향하던 인디아가 어른이 된 후 느끼는 솔직한 감정의 발현이다. 여기에는 <유디트>의 그녀처럼 목적을 달성한 후 감각하는 승리감의 황홀한 도취가 짙게 배어있다. <키스>에서처럼 수동적이었던 인디아가 이제는 위치를 바꿔 초식동물에서 포식자로 우뚝 서기에 이른다. 소녀는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movieweek
NO. 569

<라이프 오브 파이>와 <메뒤즈 호의 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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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영화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17세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의 생존기를 다룬다. 그런데 그 생존기가 만만치 않다. 단순히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227일 동안 버티어낸 일 때문만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함께 생활했던 인물이, 아니 동물이 바로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파이가 망망대해의 한 배에서 리처드 파커와 함께 하게 된 상황이 지금의 한국사회와 흡사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예컨대, 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진보 vs 보수 혹은 청년 vs 노인의 구도로 갈라지면서 분열된 상황이 딱 그 짝이라고 말한다. 서로의 입장에서 보건데 의견을 달리한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과 앞으로 살아갈 일이 사나운 벵갈 호랑이와 생활했던 파이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냐는 거다. 그런데 파이가 그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겠단다.

그럼 파이는 그와 같은 벼랑 끝의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더 정확히는 어떻게 리처드 파커와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걸까. <라이프 오브 파이>가 집중하는 부분이며 그것이 바로 이 영화를 보며 사람들이 위안 받은 요지다. 사실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간(들)이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내용은 불안한 사회를 반영할 때나 힘든 생활을 은유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설정이다. 영화만 해도 <라이프 오브 파이> 외에 알프레드 히치콕의 <구명보트>(1944), 로버트 제메키스의 <캐스트 어웨이>(2000) 등이 있었고 미술에서는 일찍이 테오도르 제리코가 그린 <메뒤즈 호의 뗏목>(1819)이 있었다.
 
<메뒤즈 호의 뗏목>은 부서져 가는 뗏목 위의 20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의 구조선을 발견하고 흥분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희망이 넘실댈 법한데 그림이 주는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다. 잿빛의 구름과 파도, 갈색의 뗏목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데다가 피라미드 구도로 그려진 인물군의 아래쪽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될 정도다. 그림 왼쪽의 하단을 보면 죽은 아들을 무릎에 놓은 아버지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고, 뗏목 가장 자리에 아무렇게나 매달려있는 시체들이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 보이는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가 20대 중반 나이에 그린 이 그림이 1819년 ‘난파의 광경’이란 제목으로 공개되자 이를 본 관람객들의 반응은 경악 일색이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좋은 그림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 기준이 되던 당시에 시체를 묘사한 그림이라니, 거부감을 느낀 이들이 대다수였다. 더욱이 491*716(cm) 크기의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난파된 뗏목 위에서 그들 자신이 표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실제적인 위압감이 대단했다. 영화라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야말로 <메뒤즈 호의 뗏목>이 3D영화를 대신했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3D영화를 앞세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메뒤즈 호의 뗏목>처럼 고전적인 입체감을 지향한다. <아바타>(2009)를 위시한 3D영화들이 대개 관객의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영상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것에 반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전경과 중경과 후경, 즉 세 개의 이미지를 중첩시킴으로써 화면의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탄 구조선이 전경에,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중경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이 후경에 놓이며 세 개의 레이어가 한 화면을 이루는 순간, 관객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때 3D가 주는 효과는 놀람보다는 사실감에 더 가깝다. 하여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이야기의 3D’라고도 평한다. 실제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제는 중년이 된 파이가 이 영화의 원작소설가인 얀 마르텔에게 직접 경험담을 들려주는 구조를 취한다. 벵갈 호랑이의 이름이 리처드 파커인 이유도 실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 1888년 조난당한 4명의 남자가 있었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동료 세 명이 모의 끝에 나머지 한 명을 살해해 식량으로 삼았는데 그 희생자가 다름 아닌 리처드 파커였던 것. 그와 같은 사연이 영화에서는 서류상의 실수로 리처드 파커라는 사육사의 이름을 달게 된 것으로 바뀌었다.

<메뒤즈 호의 뗏목> 또한 압도적인 크기도 그렇지만 그림 속 내용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에 가까운 느낌을 전달했을 테다. 사연은 이렇다. 1816년 7월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기위해 프랑스 정부가 출격을 명령한 해군 군함 메뒤즈 호가 2주 뒤 난파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쟁 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귀족 출신의 쇼마레가 지휘관으로 나선 것이 문제였다. 쇼마레가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와 구명보트를 타고 먼저 대피하는 바람에 나머지 149명의 선원은 뗏목을 만들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3일이 지나서야 구조가 되었는데 살아남은 이는 15명에 불과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단서는 그림 왼쪽 하단에 놓인 피 묻은 도끼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물과 식량을 두고 급기야 살인이 벌어졌고 마침내는 인육을 먹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육을 말리기 위해 돛대에 매달기까지 했다는데 <메뒤즈 호의 뗏목>에는 노골적인 묘사가 제거되어 있다. 게다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렸다는 이들의 몸뚱이는 비쩍 말랐기는커녕 건장하게만 보인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리처드 파커의 경우처럼 테오도르 제리코 역시 비극적인 사연을 가져오되 작가적 상상력을 덧씌우니, 여기에는 어떤 신화적인 비장미가 생겨난다. 이야기의 3D효과랄까, 인육을 얼마나 먹었기에 생존자들이 저리 튼튼하단 말인가.  

언급한 두 작품의 내용에 대해 사실에 기초한다는 전제를 지우면 황당한 이야기라 해도 틀리지 않다. 생존자들이 인육을 먹었다거나 벵갈 호랑이와 구조선에서 함께 지냈다는 내용은 차마 믿기가 힘든 것이다. 안 그래도,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파이가 침몰한 선박 회사 직원에게 그간의 생존 과정을 설명하자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믿을 만한 이야기, 진실을 말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에 파이가 다리를 다친 얼룩말은 선원이고, 오랑우탄은 파이의 엄마고,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은 하이에나는 주방장이고, 하이에나를 죽인 호랑이는 파이라고 고쳐 말하자 그제야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을 나타낸다.  

동물을 사람으로 바꾸자 선박 회사 직원들이 파이의 표류기를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 실제로 우리네 삶 자체가 일종의 표류하는 배위에서 생존을 위해 벌이는 투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메뒤즈 호의 뗏목>에서 테오도르 제리코가 인육과 관련한 직접적인 묘사를 제거한 의도나 <라이프 오브 파이>의 벵갈 호랑이 이름이 사람을 연상시키는 리처드 파커인 이유는 모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망망대해라는 삶 속에서 약육강식 논리가 횡행하는 인간사(人間事)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메뒤즈 호의 뗏목>과 <라이프 오브 파이>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작품을 통해 목적하는 바다.

<메뒤즈 호의 뗏목>의 화풍은 차가우면서 비극적이다. 이 그림의 목적이 바로 고발에 있기 때문이다. 지휘 경험이 전무한 이를 책임자 자리에 앉힌 프랑스 정부는 메뒤즈 호의 침몰과 그 이후의 경악할 만한 구조 과정이 알려질 경우, 비난을 살 것을 우려했다. 사건을 축소 보도하는 한편으로 사건 당사자 쇼마레에게 지위 박탈과 금고 3년형을 선고하는 선에서 졸속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에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메뒤즈 호의 뗏목>을 완성했다. 이 그림의 의도는 누가 보더라도 프랑스 정부의 도덕적 해이와 그에 따른 참사를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라이프 오브 파이>는 표류의 고통 및 구조의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삶의 은유로 치환한다. 언젠가 벵갈 호랑이와 같은 야수로 돌변할 수 있는 상대방과 어떻게 하면 상처받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가 전제하는 것은 그 누구도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파이는 227일 동안 망망대해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함께 했던 파커와 정이 쌓일 대로 쌓인다. 허나 어느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돌아볼 것 없이 정글 속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파커를 보며 파이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 길 없다.  

이것이 비단 파이와 파커 사이에만 해당하는 경우일까. 우리는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의견 차이가 생길 때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종종 마음을 상하고는 한다. 그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참 무례하게 굴며 각자의 영역을 침범해 왔던 것 같다. 박빙으로 펼쳐진 이번 대통령 선거가 증명한 경우가 아니던가. 우리의 이해수준이란 게 딱 그 정도다. 그래서 이해가 안될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삶의 지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공존’은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함을 이해하는 것, 이야말로 함께 살아가는 것일 테다.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화합은 애당초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영역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이가 파커와 함께 했던 구명보트 안에서 살아남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파이는 허기에 지친 파커에게 생선을 줄 때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먹이를 주는 대상이 누구인지 서로의 영역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데 주력했다. 인정과 존중은 즉, 관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거리(距離)를 뜻한다. <메뒤즈 호의 뗏목>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거리감이 상실됨으로써 벌어지는 비극에 대한 경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거리감을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공존의 역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며 위안을 얻은 건 공존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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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NA
2013년 3월호
 

<007 스카이폴>과 <전함 테메레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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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상품이다. 영국 런던 태생의 소설가 이언 플레밍이 <카지노 로얄>(1953)을 발표하면서 007 시리즈는 첩보 문학의 원형이 되었다. 이후 13권의 시리즈가 더 발표되면서 제임스 본드는 영국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 007 시리즈가 <007 살인번호>(1962)로 처음 영화화된 이래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모두 영국 출신으로 채워졌다. 1대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스코틀랜드 에든버러)부터 로저 무어(잉글랜드 런던), 티모시 달튼(웨일즈 콜윈베이), 피어스 브로스넌(아일랜드 나반)까지 모두 영국인 일색인 것이다.

<카지노 로얄>(2006)부터 6대 제임스 본드로 합류한 대니얼 크레이그 역시 잉글랜드 체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크레이그는 이전 제임스 본드 역할을 했던 배우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선배 본드들은 위기가 닥쳐도 미녀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등 시종일관 웃음을 거두지 않는 한없이 낙천적인 스타일의 신사였다. 그에 반해 크레이그는 무언가 어두운 비밀을 품고 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신사라기보다는 거친 잡초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대니얼 크레이그를 캐스팅함으로써 노회한 007 시리즈에 변화를 추구하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23번째 본드 영화 <스카이폴>은 현대의 본드가 과거의 본드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극명한 사례다. 본드는 그가 속한 MI6의 소속 요원들의 정보를 탈취한 적에 맞서던 중 총에 맞고 행방불명되기에 이른다. 그동안 런던에 위치한 MI6의 본부가 공격당하고 요원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면서 영국정부는 조직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침 본드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하지만 어깨에 입은 총상과 그 충격 때문인지 예전만큼의 실력을 보이지 못한다. MI6 요원으로서 앞으로 임무를 잘 수행할지 자신조차 의문이 생긴 본드는 내셔널갤러리에 들러 ‘윌리엄 터너’의 어떤 그림을 한없이 응시한다.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영국 근대미술의 아버지이자 국민화가로 불릴 만큼 영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작가다. (제임스 본드도 그에 못지않게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첩보원이다!) 그는 살아생전 2만 점에 가까운 스케치와 200여 권의 스케치북을 남겼을 정도로 다작의 화가였다. 이미 14세부터 왕립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해 20대에 성공한 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리즈로 사랑받는 007의 운명과 닮지 않았나? 그리고 <스카이폴>은 영화 007 시리즈의 5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다!)

터너가 평생을 전념했던 소재는 풍경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런던은 물론 영국 전역을 넘어 프랑스, 이탈리아 등 그의 그림에는 전 유럽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로 터너는 여름동안에 여행을 하면서 얻은 소재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겨울동안에 자신의 집에서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또한 전 세계를 무대로 첩보 활동을 펼치는 본드의 여정과 흡사하다!) 그래서 터너의 작품은 일부 판화 작업도 존재하지만 풍경화가 절대적이다. <맘스베리 수도원의 폐허 Ruins of Malmesbury Abbey>(1792년 경), <멀리 도시가 보이는 풍경 Psysage avec fond de Ville>(19세기 경), <노예선 The Slave Ship>(1840) 등 터너를 대표하는 작품은 모두 풍경화인 것이다.

이들 풍경(화)들이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다름 아닌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변되는 향수다. 그것은 터너가 활동하던 당시 하찮게 여겨졌던 풍경화에 역사가 주는 교훈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이를 위해 터너는 그림 속 사건의 특징을 자연에 빗대 표현하길 즐겼다. 예컨대,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1812)는 로마군을 격파한 한니발 장군이 무시무시한 눈보라 앞에서 초라해지는 모습을 묘사했다. 터너는 이를 통해 그림 작업 당시 수많은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폴레옹 장군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

안 그래도 나폴레옹은 <눈보라>가 발표되고 얼마 후 워털루에서의 패배로 몰락의 길을 재촉했다. 그것이 어디 워털루에서뿐이었을까. 나폴레옹은 1805년 10월 21일 영국의 넬슨함대와 맞서다가 트라팔가르곶에서 8,000명의 부하를 잃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넬슨함대의 선봉에 섰던 전함이 바로 테메레르 호였다. 그리고 <스카이폴>에서 예전 같지 않은 몸을 이끌고 갤러리를 찾은 제임스 본드가 보던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다름 아닌 <전함 테메레르 호 Fighting Temeraire>(1838)다. 과거 전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의 첩보원이 영국 국민화가의 대표적인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어쩐지 비애감이 감지된다.  

제임스 본드는 강력했던 전함의 모습을 보며 부활의 힘을 얻으려던 것이었을까. 하지만 <전함 테메레르 호>가 묘사하는 그림 속 테메레르 호는 실은 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중이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이미 오래 전 일. 수명을 다한 테메레르 호는 해체를 위해 템스 강에 있는 조선소로 예인되는 중이다. 그런 테메레르 호에 경의를 표하고 명을 다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아쉬움의 작별을 고하듯 윌리엄 터너는 저물고 있는 태양을 대비시켜 상실과 향수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니까 본드는 <전함 테메레르 호>를 보며 퇴출 일보직전에 몰린 자신의 상황을 대입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이처럼 <스카이폴>에서 목격되는 제임스 본드의 비애의 정서는 전작들에서 목격할 수 없었던 007 시리즈의 새로운 면모다. 이때 그림을 보고 있던 본드에게 다가온 첨단 무기 개발요원 Q(벤 위쇼)가 던지는 말. “이 그림 멜랑콜리하죠. 한때 잘 나갔던 배가 불명예스럽게 끌려가고 있잖아요. 시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인가보죠?” 그러자 본드는 “빌어먹을, 그냥 큰 배일뿐이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디 상상이라도 했었나, 톰 포드의 수트처럼 쿨하게 적을 처지하며 미녀들에 둘러싸여 사랑을 나눴던 본드가 세월의 힘에 못 이겨 끙끙대는 모습을.

<전함 테메레르 호>를 보는 본드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바로 동정심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전제한다. 윌리엄 터너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그림 속에서 감지되는 인간적인 정서 때문이다. 물론 <전함 테메레르 호>와 달리 본드는 세월을 이겨내고 다시 예전의 지위를 확보하지만 <스카이폴>에서는 완전무결한 면모를 버리고 좀 더 인간적인 첩보원으로 거듭난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이는 이 영화를 연출한 샘 멘데스 감독. 그 역시 잉글랜드 레딩 출신이다. 영국인들이 가장 영국적인 것을 가져와 노쇠한 007 시리즈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연출은 과연, 영국적인 방식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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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호

<미드나잇 인 파리>와 <별이 빛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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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알렌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2011)는 할리우드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이제 막 장편소설을 탈고한 길 펜더(오웬 윌슨)가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하는 이야기다. 파리의 화려함만 찾는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덤스)에 실망한 길은 나 홀로 낭만을 느끼겠다며 무작정 길을 걷는다. 그러던 차, 클래식 푸조가 길의 앞에 나타나고 이에 탑승하자마자 타입슬립하게 되는 것이다.

길이 ‘황금시대 Golden Age’라고 일컫는 1920년대의 파리는 예술이 낭만으로 신화화된 시기다. 하여 현재를 살고 있는 길이 1920년대의 파리에서 만나게 되는 예술가들은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사진작가 만 레이 등 그 면면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할리우드의 장삿속에 싫증나 순수 문학을 하고 싶었던 길에게 ‘진짜’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여행은 현실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기회처럼 보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포스터는 파리의 센 강변 위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1889)의 배경을 합성, 영화의 의도를 재치 있게 은유한다. 현재와 과거의 공존, 현실과 예술의 교차, 그리고 이를 유유자적 관통하는 길의 모습이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그에 앞서 1920년대가 주요한 시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면서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심지어 <미드나잇 인 파리>에 등장하지도 않는 반 고흐의 그림을 유독 포스터에만 활용한 것은 왜일까? 

지금이야 워낙 큰 유명세를 누리고 있지만 고흐는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을  정도로 대중의 관심 자체를 받지 못했던 불행한 화가였다. 고흐의 상황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도 존재한다. 아를에서 예술가들만의 낙원을 건설하겠다며  꿈에 부풀어 있던 고흐가 스스로 왼쪽 귀를 자른 사건이었다. 당시 고흐는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성격 차이로 자주 부딪힌 것은 물론 미학과 관련한 문제도 복잡하게 얽히면서 관계가 좋지 못했다. 결국 떠나겠다는 고갱에게 면도칼로 위협하던 고흐는 급기야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항간에 고흐의 정신 불안을 견디다 못한 고갱이 펜싱 칼로 귀를 잘랐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고흐가 처했던 외로움과 절망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흐의 창작열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은 고갱과 결별 뒤 우울증 치료차 생 레미의 요양원에 머물 당시 강박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이에 대해 테오의 미망인이었던 요한나 반 고흐 본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곳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등을 그릴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이 보는 이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성, 즉 요동치는 밤하늘의 역동성과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의 황홀함과 달리 고흐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무섭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실제로 <별이 빛나는 밤>에는 고흐의 ‘광기’를 짐작할 수 있는 시도들이 발견된다. 평온해 보이는 마을풍경과 달리 밤하늘엔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서로를 휘감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수직으로 높이 뻗어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신경질적으로 하늘의 영역을 ‘침범’한 듯한 인상을 준다. 지중해의 빛과 열기를 축복했던 <해바라기> <씨 뿌리는 사람> 등 반 고흐의 또 다른 걸작과 비교해도 <별이 빛나는 밤>은 두드러지게 불길한 기운을 풍긴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포스터는 <별이 빛나는 밤>이 보여주는 하늘과 땅의 극명한 대조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다 쓴다. 특별히 하늘 배경만 인용함으로써 낭만이 웬 말이냐며 길을 향해 쏘아붙일 기세를 노골적으로 취한다. 안 그래도 1920년대로 간 길이 만나는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산다. 헤밍웨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충분히 사랑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당시 피카소의 애인이었던 아드리아나(마리옹 코띠아르)에게 추파를 던지고, 폴 고갱은 “자신들의 시대는 공허하다”며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 세태를 개탄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1920년대의 예술가들은 정작 그들의 시대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오히려 고갱이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시기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약했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다. 고갱은 결코 자신의 시대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고흐와 결별 후 관계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은 결코 끊은 적이 없다. 1890년 7월 27일 고흐가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쏴 자살한 후에는 <팔걸이의자에 놓인 해바라기>(1901)를 그림으로써 친구에 대한 경의를 표했을 정도다.

고갱과 달리 대중은 고흐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관심을 보였다. 그의 사후 2년 뒤 회고전이 열렸고, 파란만장한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이 1913년에 출간됐으며, 1973년에야 암스테르담에 반 고흐 박물관이 세워졌다. 그러니 고갱에게 길의 주장은 얼마나 공허했을까. 1920년대야말로 황금시대라며 열변을 토하는 길에게 아드리아나는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에요. 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되겠죠.”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아드리아나는 1890년를 ‘벨 에포크 La Belle Epoque’, 즉 ‘좋은 시대’라고 지칭하니 반 고흐가 이를 들었으면 당장이라도 무덤에서 뛰쳐나왔을 일이다. 

지나간 시대를 신화화하는 건 결국 현실의 결핍이다. 극 중에 등장하지도,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미드나잇 인 파리>의 포스터에 주요한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터다. 낮의 센 강변을 거니는 길이 어두워진 거리의 끝에서 맞닥뜨리게 될 현실은 낭만으로 포장된 해당 시대의 결핍일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를 꿈꾸는 길은 결핍을 메우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면서 “고통은 영원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반 고흐의 작품은 영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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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호

<돈의 맛>과 <시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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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은 대한민국 최상류층 가문을 배경삼아 돈의 위력을 꼬집는다. 5만원 현금 다발을 탑처럼 쌓아놓은 금고를 비추는 첫 장면부터 영화의 의도는 노골적이다. 윤 회장(백윤식)이 대동한 비서 주영작(김강우)에게 건네는 한마디. “몇 다발 챙겨둬. 전임들도 다 그랬어. 돈의 맛 좀 보라고.” 어디 돈뿐이겠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규모의 대저택은 인테리어부터 가구까지, 의상부터 먹는 음식까지 최고급 일색이다. 고급스러운 취미인지, 혹은 비자금 은닉용인지, 저택 내부의 벽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는 예술품까지 더해지면 서양 중세시대의 어느 왕가의 내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렇다면 이들 가족의 초상화는?

예로부터 왕이나 귀족으로 대변되는 상류층은 가문의 위세를 전시하기 위해 가족 초상화를 이용하고는 했다. <돈의 맛>에 가족 초상화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포스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프레임 속 윤 회장 내외와 딸 나미(김효진), 영작의 구도가 꽤 균형 잡혔다. 값비싼 의자에 앉은 백금옥(윤여정) 여사를 중심으로 배치가 이뤄진 것을 보니 가문의 권력이 어디로 집중되는지 짐작된다. 그 뒤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조각상은 미학적인 의도와 상관없이 재산 과시용으로 비칠 뿐이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 것은 백 여사의 팔 아래부터 윤 회장을 거쳐 나미에게로 피가 퍼지듯 연결된 붉은 천이다. 오페라 무대의 비극이 연상된다. 영작은 거기서 살짝 비켜서있는 모양새지만 붉은 색 상의와 얼굴의 반을 가린 짙은 그림자가 또 다른 형태의 비극을 암시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최고의 초상화가로 알려진다.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였던 그는 당연히 펠리페 4세의 가족 초상화를 그렸다. 바로 벨라스케스의 걸작으로 꼽히는 <시녀들 Las Meninas>(1656)이다. 얼마나 뛰어난 작품이었던지, 후에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스페인의 후배 작가들이 그들 각자의 관점으로 <시녀들>을 재해석해 그렸을 정도다. 이유가 있다.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이 배경인 <시녀들>에는 모두 11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9명 아니냐고?

맨 왼쪽에는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 본인이 서있다. 그 옆으로 포즈를 취하느라 짜증이 난 다섯 살의 마르가리타 왕녀와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두 명의 시녀가 위치한다. 애견이 자리한 주위로 왕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동원된 두 명의 광대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 뒤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수녀복 차림의 인물 둘과 방 안쪽의 열린 문 사이에서 막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는 시종도 보인다. 그렇게 (애견을 제외하고) 모두 9명. 그럼 나머지 2명은? 열린 문 옆의 거울 속을 한 번 보라. 펠리페 4세 국왕 부부의 모습이 비친다.

여기서 해석의 다양성이 가능해지는 건 단순히 인물의 수가 아니다. 그림 속 상황이다. 어떤 이는 벨라스케스가 마르가리타 왕녀의 초상화를 그리던 중 국왕 부부가 방문한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벨라스케스의 시선으로 보건데 그가 그리는 대상이 바로 국왕 부부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도 있다. 벨라스케스가 화폭에서 부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는 걸 보니 국왕 부부를 그리는 게 아니란다. <시녀들> 그 자체를 제작하는 중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그림 속 그림. 아무렴 어쩌랴. <시녀들>이 펠리페 4세의 가족의 초상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의 제목을 얻게 된 건 19세기 이후이고, 그 전에는 <가족의 초상> 혹은 <펠리페 4세 가족상>으로 불렸다.) 의문은 두 명의 광대도 펠리페 4세 가문의 가족이냐는 거다.   

다시 <돈의 맛>의 가족 초상화(?)로 돌아와 보자. 편안히 앉아 있거나 기대고 있는 이들과 달리 영작만은 부동자세다. 실제로 영작은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 윤 회장 지시에 따라 억대의 비자금을 챙겨 비리검사나 정치인에게 전달해야지, “나이 많은 여자도 하고 싶을 때가 있다”며 달려드는 어머니뻘의 백 여사와 잠자리도 가져야 한다. 그게 바로 돈의 위력이다. 돈이면 불가능한 것이 없다. 이를 깨달은 영작은 윤 회장의 충고처럼 돈다발도 챙기고, 치욕스러운 기억은 잊고 백 여사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돈 앞에 누구나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 <돈의 맛>에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몰려드는 모욕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영작은 금고에서 돈다발을 챙길 때면 늘 자신의 방의 액자 뒤에 숨겨놓는다. 그럴 때마다 액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게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챙겨봤자 영작은 이 집에서 하남(下男)이고 노리개이기 때문이다. 가족? 영작은 (포스터로 재현된) 가족 초상화에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가 있는 게 아니다. 지적이고 핸섬한 영작을 부려먹고 있는 이 가문의 부 혹은 권력을 과시하는 전리품 정도의 목적일 따름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비유하자면 오른쪽 구석의 광대와 같은 존재라 할 만하다. 

<시녀들>의 광대들은 모두 난쟁이다. 개 등에 발을 올린 니콜라시토는 등이 굽었지만 절묘하게 화면이 잘려 있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의 마리아 바르볼라는 누가 보더라도 왜소증을 앓고 있는 성인 여자다. 어리고 환한 용모의 마르가리타 왕녀와 극적으로 대조되면서 기형적인 모습이 강조된다. 그게 바로 광대들의 역할이다. 가족이라 해도 가문의 영광을 빛내는 액세서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르볼라도 그런 자신의 역할을 모르지 않았을 터. 자세히 보면 그녀의 얼굴에서 억제된 분노가 읽힌다. (이들과 함께 ‘가족’의 일원에 소속됐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는 왜소증을 겪는 광대들의 초상화를 여럿 그렸다. 예컨대, <난쟁이 세바스티앙 데 모라의 초상>(1645년경)을 보면 바르볼라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르볼라나 영작은 결국 제한적인 가족인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백 여사의 후원을 등에 업고 더 높은 곳을 꿈꾸던 영작은 결국 주제파악도 못한다며 갖은 모욕을 당한 끝에 쫓겨나고야 만다. 바르볼라의 경우, 신체적인 결함도 무시 못 하지만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스트레스가 워낙 심해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낮은 데로 임하여야만 가족의 ‘기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이들의 비극적 운명. 허울뿐인 가족의 초상 속에서 비극이 어디 힘없는 자들만의 것일까. 마르가리타 왕녀는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세와 정략에 따른 근친혼으로 21세의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역시 정략 결혼했던 윤 회장은 순수를 찾겠다며 백 여사에 이별을 통보했다가 목숨을 잃고 그런 가족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나미는 집을 떠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같은 운명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이 대외적으로 전시하는 ‘가족의 초상’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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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호

<은교>와 <풀밭 위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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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가 첫 선을 보이자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극 중 성기와 음모 노출이 있었다며 언론들이 ‘충격’, ‘파격’과 같은 요란한 단어들을 총 동원해 보도했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앞뒤 문맥은 싹 거세한 채 자극적인 요소만을 한 줄의 헤드라인 삼아 기사화하는 것이 작금의 언론의 행태다. 육체의 기능이 쇠락한 70대 노()시인 이적요(박해일)가 17세 여고생 은교(김고은)를 만나 젊음을 대리 욕망한다는 이야기로 보건데, 영화의 문맥상 성기와 음모 노출은 그리 충격적이고 파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굳이 <은교>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노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건 오래된 역사다. 미술 쪽으로 눈을 돌리면,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1865)가 대표적이다. 완전히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이 파리의 살롱 드 레퓌제에서 공개되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관람객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특히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로 알려지면서 비난의 반응은 분노와 역겨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매춘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질병이나 타락, 심지어 죽음에까지 빗대어지는 존재였던 까닭이다.

빅토린 무랑이라는 이름의 그녀는 <올랭피아>에 앞서 마네의 또 다른 그림 <풀밭 위의 점심>(1863)에서도 모델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여기서도 나체로 등장하는데 정장을 입은 두 명의 신사와 점심을 먹는 장면은 대조되는 옷(?)차림과 중앙의 남자 두 명, 여자 한 명의 구도로 인해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고로 관람객들의 반응이 떠들썩했던 건 당연지사. 이에 대한 당시의 기사를 보면, ‘어떤 이들은 수치심에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그중에는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전한다. 이는 <풀밭 위의 점심>이 얼마나 논쟁적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실제로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이 공개되면 논란이 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예컨대, 전경의 풀밭과 후경의 시냇가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처리한 방식처럼 전통적인 회화의 관습을 무시한 것도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는 보수적인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명망 있어 보이는 신사들이 매춘부와 저렇게 놀아나다니!’라는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마네는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이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법인데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점잖은 남자가 그 대상이 매춘부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나체를 거부한다는 건 위선이자 허위라는 것이다.

정지우 감독은 <은교>를 영화화한 배경에 대해 “원작의 지나친 솔직함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씨네21 852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중에서) 잘 알려졌듯, <은교>는 박범신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박범신은 노인의 사랑, 그것도 상대가 여고생인 것에 대해 “욕망은 중립적인 가치이며 시간차에 따라 구획되는 것도 아니다. 노욕은 따로 없다. 욕망이 있을 뿐이다.’라고 트위터(@parkbumshin)를 통해 밝혔다. 그의 말처럼 욕망은 살아있는 생물 같아서 숨이 멎는 날까지 때와 장소, 그리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사회가 임의로 정해놓은 관습이 있어서 금기라 불리는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낼 경우, 그 대가는 비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창작자들은 금기를 욕망의 자연스러운 형태로 인정하며 밝은 곳으로 끄집어내기를 서슴지 않는다. 경직된 사회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인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정지우의 <은교>는 그런 점에서 닮았다. 정지우는 데뷔작 <해피엔드>(1999)부터 금지된 사랑에 초점을 맞춰왔다. 유부녀와 정부(情夫)의 관계에 이어, 31세 여강사와 17세 남고생(<사랑니>(2005)), 일본인 친구를 둔 식민지 시대의 모던보이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모던 걸(<모던보이>(2008))의 사랑까지, <은교>도 일관된 작가의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이들 영화의 핵심은 ‘세상 밖으로’다.

<은교>의 시인 이적요는 대중소설이 가볍다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자 서지우(김무열)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대리 만족해오던 터다. 하물려 성적기능이 퇴화한 그에게 욕망이란 그렇게 숨겨야하는 대중소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숨어 지내오던 이적요에게 별안간 나타난 소녀 은교는 철저히 잊고 있었던 욕망이 눈을 뜨는 기회로 작용한다. 그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자연의 본능이다. 금기를 관습화하는 이성의 감옥, 그러니까 무수한 책들로 둘러싸인 서재를 박차고 극 중 정원으로 묘사되는 자연으로 나와 은교를 사랑하는 이적요의 모습에는 비로소 해방감이 감지되는 것이다. (아직 앎과 경험이 미천한 서지우는 지식으로 습득한 관습과 금기에 매몰된 나머지 17세 여고생을 탐하는 이적요를 비난하며 결국엔 연적이 되고 만다.)

밖으로 나온 금기의 사랑이 비록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정지우는 보듬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들의 행위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이와 같다. 그림 속 매춘부와 신사가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부끄러움 대신 당당함이 읽힌다. 마네의 화풍에도 거리낌이 없어서, 숲속이지만 중앙에 스며든 빛으로 인해 서광이 비추듯 그늘의 어두운 부분이 환하게 탈색되어 음습한 기운을 완전히 제거한다. 또한 여자의 새하얀 살결과 남자들의 검은 정장을 극단적으로 대비시켜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어 맴으로써 떳떳한 욕망임을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빅토린 무랑 외에 그 옆의 남자들이 (왼쪽부터 차례로) 마네의 처남과 동생인 점도 그림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풀밭 위의 점심>은 마네가 처음 살롱에 접수했다가 거절당한 후 떨어진 작품을 따로 모은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올랭피아>를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세상의 금기에 도전했고 동료 화가 자크 에밀 블랑슈의 표현에 따르면, “갖가지 소문과 농담이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고, 거리에서는 이 잘생긴 청년을 노골적으로 비웃었으며 사람들은 이 말쑥하고 단정한 청년을 ‘그 쓰레기를 그린 놈’이라고 불러댔다.”고 한다. 이를 견디다 못한 마네는 결국 프랑스를 떠났지만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프랑스 화단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남아있다. 그처럼 <은교>의 이적요는 17세 소녀를 사랑한 죄(?)로 끝내 많은 걸 잃지만 그의 사연을 다룬 영화는 전국에서 200만 가까운 관객이 보며 흥행에 성공했다. 창작자들의 사회적 도발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체감하지 못하는 속도로 서서히 조용하게 너그러워진다. 세상은 그렇게 진보하고 변해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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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인용구는 <세계명화 비밀>(모니카 봄 두첸 지음 | 생각의 나무)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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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