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리언: 커버넌트> ‘죽음의 섬’에서 탄생한 에이리언

개인적으로 ‘에이리언’에 대한 애정이 크다. 변태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에클레어처럼 날렵한 머리통의 선 하며, 속의 내장과 뼈가 훤히 비추는 스키니 몸매 하며, 캬악~ 소리와 함께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는 살상 능력 하며,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쓰다 보니 변태 맞네!) 요컨대, 영화 역사상 최고의 크리쳐(creature)라고 생각한다.

에이리언의 창조주(?)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H.R. 기거(Hans Rudolf “Ruedi” Giger)다. 리들리 스콧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4- 새로운 희망>(1977)이 한창 인기를 끌던 당시 이에 대항해 우주 배경의 공포물을 기획했다. 무시무시한 크리쳐를 염두에 두던 중 화집 ‘네크로노미콘’에 나오는 괴물 그림을 보고 매료되어 H. R. 기거에게 에이리언 디자인을 맡겼다.

그렇게 탄생한 에이리언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애정은 남다르다. <에이리언>(1979)을 완성한 후 <프로메테우스>(2012)와 <에이리언: 커버넌트>를 통해 에이리언 영화에 다시 손을 댄 건 그런 이유다. <에이리언 vs. 프로데터>(2004)와 같은 멍청한 작품에서 에이리언이 재능 낭비(?)하는 것에 분노한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이 마땅히 지녀야 할 크리쳐의 품격을 복원하고 싶었다.

그처럼 본격 에이리언 소환물이라 할 만한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을 잇는 징검다리 역할의 영화다. 우주선 커버넌트 호는 인간 배아를 싣고 식민지로 적합한 행성을 향해 나아간다. 목적지로 향하던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호를 감지한 커버넌트 호는 계획을 변경해 그곳으로 향한다. 낭만의 신세계를 꿈꾼 것도 잠시, 커버넌트 호를 기다리는 건 미지의 생명체, 에이리언이다.

<에이리언: 커버넌트> 곳곳에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과 연결되는 복선을 여러 군데서 감지할 수 있다. <에이리언>의 리플리(시고니 위버)가 일하던 ’웨일랜드’의 회장 피터 웨일랜드(가이 피어스)가 A.I.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을 완성한 후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커버넌트 호가 착륙한 미지의 행성에 엔지니어의 우주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등이 그렇다.

사실 그런 디테일한 설정보다 내가 주목한 건 <에이리언: 커버넌트>와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을 관통하는 특유의 분위기이었다. 불안감이 공기처럼 떠도는 어둠의 배경,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지의 행성,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한둘씩 죽어 나가는 인간들. 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죽음의 섬’이 아닐까.

아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이라는 화가가 있다. 스위스 바젤 출신으로 반인반수 소재나 종말론적 색채가 강한 작품들을 주로 그려왔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은 <죽음의 섬>(1880)이다. 죽은 남편의 기일에 맞춰 추모 그림이 필요하다는 의뢰를 받고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추모의 분위기라고 하기에 <죽음의 섬>은 뭔가 기묘한 느낌이다.

바다는 적막할 정도로 잔잔하고 그 위로 바위 섬 두 개가 양쪽으로 불쑥 솟아 있다. 수면 위로 달빛이 어른거리지만, 섬 깊숙이 자리 잡은 삼나무가 음산한 기운을 더한다. 이곳은 어딜까? 힌트가 있다. 섬의 입구를 향해 배 한 척이 다가가고 있다. 뱃머리에 하얀 천으로 감싼 관이 실려 있고 그 뒤에서 역시나 하얀 옷을 입은 사공이 으스스하게 서 있다. 이 섬은 묘지인가? 그렇다면 하얀 옷을 입은 이는 사신(死神)?

이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건 없다. 원래 이 그림의 제목은 <추모를 위한 그림>이었다. 후에 <죽음의 섬>으로 바뀌었는데 후자의 제목이 더욱 어울리는 건 죽음의 기운이라고 할 만한 어둠이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까닭이다. 이 그림으로 아놀트 뵈클린이 명성을 얻으면서 <죽음의 섬>은 후대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한 명이 바로 H.R. 기거다.

H.R. 기거는 <죽음의 섬>을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만의 해석을 덧씌워 뵈클린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 <뵈글린에 대한 경의>(1977)를 발표했다.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 로맨틱(?)하게 보일 정도로 오싹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바다 위의 배와 사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섬에만 집중한 모습이 마치 에이리언의 아가리를 연상시킨다. 심연으로 통할 것만 같은 섬의 입구에서는 또 하나의 에이리언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공포가 배가된다.

리들리 스콧이 아놀트 뵈클린과 H.R. 기거의 관계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죽음의 섬>이 연상되는, 양쪽으로 뿔이 솟은 듯한 형태의 엔지니어, 즉 스페이스 자키의 우주선을 보고 있으면 아주 모르는 것 같지도 않아 보인다. 게다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 에이리언은 알비노처럼 새하얀 모습을 하고 있는데(인간에 가까운 형태의 이 에이리언은 ‘네오 모프’라고 불린다!) 이는 <죽음의 섬>의 사신을 떠올리게 한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첫 장면, 데이빗은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 피터 웨일랜드에게 당신은, 그러니까, 인간은 누가 창조했습니까, 라고 묻는다. 리들리 스콧은 이 영화를 두고 “누가, 왜 에이리언을 설계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창조는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죽음 위에서 창조가 이뤄진다. 그 죽음의 대상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인간의 죽음을 발판으로 에이리언은 탄생한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설정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커버넌트 호의 선원들에게 이곳 미지의 행성은 낭만의 신세계는커녕 ‘죽음의 섬’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 하나. 에이리언의 창조주는 누구인가? H.R. 기거라고? 에이, 농담하지 말고.

에이리언의 창조주는 바이런의 시로 알려졌지만, 실은 친구인 셸리가 쓴 <오지만디아스>의 시 한 구절을 읊는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이로다. 강대하다는 자들아, 나의 위업을 보라. 그리고 절망하라 My name is Ozymandias, king of kings. Look on my works, ye Mighty, and despair” 그리고 커버넌트 호의 최후의 생존자가 될 에이리언의 창조주가 마지막으로 커버넌트 호에 오르면 리하르트 바그너의 <신들의 발할라 입성>이 흐른다. 아놀트 뵈클린부터 바이런과 셸리와 리하르트 바그너까지,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품격을 지닌 크리쳐물이다.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5.11)

<보안관> 잊힌 가치를 옹호하는 우리 시대의 희귀종

김형주 감독은 1980년대 생이다. 이 세대는 영화의 세례를 담뿍 받고 영화계에 들어온 경우가 많다. 특히 남자의 경우, 홍콩 액션물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보안관>은 김형주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영웅본색>(1986)을 부산의 기장을 배경 삼아 ‘아재’들이 출연하는 로컬수사극으로 개비했다. 리메이크는 무슨, 기본적으로 코미디라는 얘기다.

<보안관>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중년의 사내들은 <영웅본색>의 주윤발이나 장국영이나 적룡처럼 멋있지도, 비장하지도, 폼나지도 않는다. 멋있으려 해도 줄어드는 머리숱이 걸리고, 비장 하려 해도 아내와 딸 눈치 보기 바쁘고, 뭐, 동네를 시끄럽게 하는 대장질 정도에 그치니 무게 잡기도 영 민망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과시할 ‘한 건’이 절실하다. 마침 그런 건수가 동네에 터진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업가 종진(조진웅)이 비치타운을 건설하겠다며 기장을 방문한다. 평화로운 동네에 외부인이 별안간 내려오니 토박이 대호(이성민)는 심기가 영 불편하다. 내 이놈을, 하는 순간, 종진이 대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해온다. 둘에게는 사연이 있다. 대호가 대전에서 형사로 재직하던 5년 전, 영문도 모른 채 마약 운반책을 맡던 종진을 체포한 적이 있다. 생활고를 호소하는 종진이 안쓰러워 대호는 형을 적게 받도록 힘을 써줬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종진은 대호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극진히 모신다.

대호는 그런 대접이 싫지 않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종진의 출현과 때를 같이 해 인근 해운대에서 마약이 돌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대호는 종진이 연루됐던 그 사건으로 동료 형사를 잃으면서 낙향한 처지다. 여전히 형사의 직감을 잃지 않고 있던 대호는 종진을 의심하고, 처남 덕만(김성균)을 조수로 삼아 뒤를 캐기 시작한다. 그런데 웬걸, 캐면 캘수록 나오는 대호의 미담. 돈 많고 인심 넘치는 종진을 의심할수록 동네 사람들은 대호를 ‘호로자슥’ 취급한다. 대호 왈, “두고 봐라, 이래 당하고만 있겠나. 게임은 인자 시작이다!”

성민이 궁지에 몰리는 설정은 우선적으로 코미디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로컬(local)극으로 대변되는 우리네 현실이 반영된 이유가 크다. 총격전이 눈에 띄게 주목받는 홍콩 누아르의 지배적인 정서는 다름 아닌 ‘의리’다. 관련해 <영웅본색>의 마지막 장면은 유명하다. 부하 아성(이자웅)에게 배신당한 자호(적룡)와 친형 아성이 여전히 범죄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를 체포하러 온 경찰 출신의 동생 아걸(장국영)이 위기에 직면한다. 바로 그때, 마크(주윤발)는 이들을 향한 우정, 아니 ‘으리’ 하나로 위험천만한 총격전에 가세한다. 이 장면을 보며 <보안관>의 성민이 덕만에게 하는 말. “너도 내가 위험에 빠지면 저렇게 구해줄 수 있냐?”

홍콩 누아르가 수많은 한국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이 장르의 의리가 앞뒤 재지 않는 순수한 성질이었기 때문이다. 의리 따위 돈 앞에서 무용지물인 한국 사회에서 홍콩 누아르의 가치는 먼 나라 이웃 나라의 판타지 혹은 과거 호시절을 말할 때 떠올리는 향수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영웅본색>을 인생의 영화로 삼아 이를 현실에까지 적용하고 싶은 대호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인 셈이다. 오히려 그럭저럭 생활을 이어가는 기장 주민들에게 호감을 사는 건 비치타운 건설로 큰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종진이다. 주민들의 말을 빌리자면, “대호는 폼만 잡았지 영양가가 없는 기라.”

종진을 향한 대호의 적대감은 결과적으로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성냥개비 질끈 입에 물고 희미해가는 남성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면서 몸에 맞지 않는 코트 자락 바닥에 쓸어가며 사수하고 싶은 의리를 향한 애달픈 순애보다. 대호가 보여주는 불굴의 오지랖은 짠내나는 정서가 바탕인 기장이라는 고장과 더없이 어울린다. 이제 어렵게 쥐어짜야 겨우 한 방울 얻을 수 있는 귀한 것. 그래서 ‘으~리~’ 코미디의 소재로 소비되는 순도 100%의 의리는 잊혀가는, 아니 잊힌 가치다.

이 영화가 제목으로 삼은 ‘보안관’은 악당에 맞서 홀로 평화로운 마을을 지키는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한국에 존재한 적도, 존재하지도 않는 보안관 행세를 하는 대호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대호를 향한 처남 덕만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해서 “이기 다 매형이 자초한 깁니다. 지금 우리 둘만 왕따 된 거 모릅니까.” 그렇게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거나 말거나, 종진은 오늘도 한동안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영웅의 본색을 깨우느라 여념이 없다.

나도 한때 <영웅본색> <첩혈쌍웅>(1989) 등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싸나이’의 우정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우정이란 게 돈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실현 불가능한 가치가 되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나마 판타지로 구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홍콩 누아르와 같은 ‘싸나이’ 영화를 부러 외면하며 살아왔다. 이제 희귀종에 가까운 <보안관>의 대호 같은 이를 보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안쓰럽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과거에 열광했던 가치를 여전히 옹호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 묘한 감동에 빠진다. 날로 각박해지는 세상이 대호 같은 이들로 바뀔 리 만무하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얼마간은 아름답게 느끼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가치가 있다. 그 때문에 우스갯거리가 되거나 말거나, “걱정도 팔잡니다. 우리 대호 행님, 어디다 떨궈놔도 잘 묵고 잘 살깁니다”

 

예스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4.27)

[예스24] <파운더> 햄버거로 다시쓴 미국의 역사

‘맥도날드’는 햄버거의 대명사다. 개인적으로 이곳의 햄버거를 맛있게 먹는 편은 아니지만, 1년 365일 변함 없는 맛과 주문과 동시에 바로 받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일과로 바쁠 때면 종종 찾고는 한다. 맥도날드 특유의 인스턴트 시스템을 완성한 건 맥 맥도날드와 딕 맥도날드 형제다. 그렇다면 맥도날드 프랜차이즈의 기원을 쫓는 <파운더>는 맥도날드 형제에 대한 이야기인가? 이 사연이 흥미롭다.

<파운더>의 주인공은 맥도날드 형제가 아니라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이다. 레이는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팔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52세의 평범한 세일즈맨이다. 그 전까지 이쑤시개, 종이컵 등등 안 해본 영업이 없는 레이는 크게 부족함이 없는 삶인데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그러던 중 밀크셰이크 믹서기 8대를 한꺼번에 주문한 곳이 있어 의아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간다.

바로 맥도날드. ‘황금아치’ 간판이 인상적인 맥도날드 매장 앞에서 레이는 마음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종업원이 없어도 주문이 가능하고 주문한 지 30초 만에 햄버거가 나오고 그렇게 빨리 조리했는데도 햄버거 맛이 기가막히다니. 맥도날드에 매료된 레이는 맥도날드 형제를 찾아가 프랜차이즈를 제안한다. 어렵게 동의를 얻어낸 그는 맥도날드 형제의 반대에도 사업을 거미줄처럼 확장한다.

그렇다, 맥도날드 메뉴와 주문 방식과 조리와 매장과 주방 설계 등 일련의 방식을 설립한 건 맥도날드 형제이지만, 맥도날드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완성한 건 레이 크록이다. 이는 비유컨대 각각 지역구와 전국구 수준의 꿈을 꾼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맥도날드 형제는 프랜차이즈를 확장하기 이전 무엇보다 최상의 품질과 가족 개념의 직원 복지가 중요했다. 꿈의 기업을 목표하던 맥도날드 형제에게 미국 전역으로의 진출은 그들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레이는 신속함이야 말로 맥도날드 프랜차이즈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가 맥도날드에 주목했던 1954년의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이후로 전에 없던 경제 호황을 누리며 무엇이든 빨리 변하는 시기였다. 단 30초 안에 주문과 조리가 동시에 이뤄지는 맥도날드의 시스템을 감안하면 온 미국인의 생활 수준이 상향평준화되는 것에 걸맞게 빠른 속도로 미국 전역에 맥도날드 매장을 ‘프랜차이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레이가 맥도날드 매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맥도날드 형제를 잘 설득하든가, 아니면 힘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흔히 우리가 미국적인 가치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개척’이다. 할리우드는 일찍이 미국의 개척정신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서부극’을 만들었다. 황량한 서부의 땅에 문명을 건설한 미국의 역사는 개척과 떼려야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서부극과 함께 미식축구, 맥도날드 등이 거론되고는 하는데 이들을 하나로 묶는 개척의 핵심은 시쳇말로 ‘땅따먹기’다.

공교롭게도 극 중 레이의 서재에는 ‘역마차’를 담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과거 서부 개척시대에 미국인들은 가족 혹은 이웃과 함께 역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1954년의 레이는 동부의 한 레스토랑에서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영업하다가 자동차를 몰아 캘리포니아 ‘서부’에 위치한 맥도날드 샌 버나디노 지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맥도날드를 전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로 키우겠다고 마음 먹은 레이는 맥도날드 형제를 집요하게 설득하고 끝내 이들에게서 맥도날드 브랜드를 뺏어오는 데 성공한다.

계약 상, 레이가 매장을 새로 내거나 시스템에 변화를 꾀할 때에는 반드시 맥도날드 형제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신규 매장의 수익 일부를 로열티로 나눠갖는데 맥도날드 형제에 비해 지분이 적은 레이는 늘 불만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매장 수에 비해 로열티 액수가 적으니 금고에 돈이 쌓이지 않아 레이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레이의 묘수는 로열티 대신 매장이 들어설 땅에 대한 권리를 챙기는 것이다. 그러면 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계약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어 맥도날드를 인수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폭력의 형태는 아니지만, 맥도날드 형제가 획기적으로 실현한 브랜드를 자본의 힘으로 약탈했다는 점에서 레이의 행위는 폭력적이다. 이는 할리우드의 서부극이 미국인의 개척정신을 찬양하면서 원래 미국 서부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을 학살한 폭력의 역사를 은폐한 것과 맥을 함께 한다. 이게 핵심이다. <파운더>는 햄버거로 다시 쓴 서부극, 즉 ‘햄버거 웨스턴’이다.

미국의 개척은 말이 좋아 확장이지 무형의 폭력적인 형태로 지배력을 강화해왔다. 미국 서부에서 미국 전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샌 버나디노에서 출발한 맥도날드는 현재 전 세계 3만 5천여개에 이르는 매장을 통해 맥도날드 왕국을 건설했다. 맥도날드는 오늘도 미국 문화의 최전선에서 미국적 가치를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맥도날드 형제의 햄버거로 전세계를 집어삼킨 레이 크록의 맥도날드 개척사는 곧 미국 폭력의 역사인 셈이다.

 

예스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4.13)

[예스 24] <시간위의 집> 억울한 사연이 쌓아올린 시간의 집

(* 영화의 관람을 방해할 만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집’ 장르가 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공포물의 하위 카테고리 정도 된다. 집이 생명을 가진 듯 사람을 무섭게 하고 공격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는 내용의 영화를 일컫는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디 아더스> <폴터 가이스트> <이블 데드> <샤이닝> <주온> <장화, 홍련>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타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시간위의 집>도 귀신 들린 집이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비가 내리치는 어느 밤, 영화는 으스스한 기운이 테를 두른 적산가옥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런 분위기에 걸맞게 정신 잃은 한 여자가 마루에 쓰러져 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그녀는 가정주부 미희(김윤진)다.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지하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 그녀는 서둘러 내려간다. 칼에 찔려 죽어 있는 남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은 지하실에 위치한 의문의 방문 뒤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다음 날 아침, 미희는 남편과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2017년 11월이 되어서야 석방된 미희는 그 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992년에 살았던 그 집으로 돌아온다. 그 소식을 듣고 그녀와는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최신부(옥택연)가 찾아온다. 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에 미희는 말한다. ‘그들’이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데려갔어. 그렇다면 이 집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귀신 들린 집 영화는 보통 주인공이 살던 그 이전 사람들의 사연이 집과 결합해 주인공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사실 괴롭힌다는 표현이 좀 과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아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주인공 당사자에게는 공포를 다가가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억울한 사연은 시간을 매개하여 집이라는 역사의 공간에 쌓인다. <시간위의 집>이라고 제목을 지은 연유도 여기에 있다.

미희가 석방 후 바로 집을 찾은 이유도 억울한 사연이 있어서다. ‘그들’에게서 아들을 찾아야 한다. <시간위의 집>에서 그들의 사연은 종류가 다양하다. 다양한 시간대 층위의 사람들이 그 집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의 사건이 미희에게 벌어졌던 날은 1992년 11월 11일. 25년 전인 1967년 11월 11일에도, 더 앞서 25년 전인 1942년 11월 11일에도 이 집에서는 사건이 있었다.

(스포일러 주의!) 25년을 주기로 11월 11일이 되면 이 집에서는 시간의 빈틈이 생기고 그때마다 이승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미희가 석방되어 돌아온 2017년 11월 11일은 이 집에 들어찬 억울한 사연들의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인 셈이다. 어디서부터 이 사연들이 출발했는지를 아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귀신 들린 이 집의 억울한 사연이 쌓인 첫 번째 시간은 1942년, 일제 강점기다. <시간위의 집>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이 영화는 극 중 적산가옥을 일종의 한국 역사로 보는 듯하다. 25년이 주기인 이유? 1967년과 1992년은 큰 의미는 없고 2017년 현재와 맞추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예전에 이 지면에서 <가려진 시간>에 대해 설명하며 ‘세월호 영화’를 언급한 적이 있다. <시간위의 집>도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엄마의 고군분투라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 한다.

<시간위의 집>이 취하는 입장(?)은 선명하다. 근 몇 년간 한국사회에서 꽃 같은 청춘이 죽어 나가는 비극의 고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와 같은 과거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는 것. 비극적 역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적폐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은 한국사회 전체에 공포로 다가온다. 그 여파라고 할 수 있는 억울한 사연이 쌓이고 쌓여 ‘시간 위의 집’이 생겼다는 논리가 이 영화를 지배한다.

이는 동의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 구성원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공포이자 현실이다. 다만, <시간위의 집>이 이를 풀어가는 방식은 동의하기 힘들다. 여러 시간의 층위를 다루면서 자체적인 논리를 구축하는 노력을 들이기보다 메시지의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활용하는 연출이 노골적으로 엿보인다. 머리로 설득시키기 이전 감정을 자극하겠다는 의도는 허구의 장르와 현실의 일면으로 구축한 영화적 논리를 무참히 깨뜨려 버린다.

귀신 들린 집과 같은 공포와 SF와 판타지와 스릴러 등의 접근으로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픔과 같은 한국사회의 비극을 다루고자 하는 장르 영화는 다른 접근법이 절실하게 필요해 보인다. 감정의 위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건설적인 토론이 가능한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영화를 통한 감정 해소는 일시적이라 비슷한 패턴의 작품이 반복되면 관객은 피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위의 집>이 주는 교훈은 영화의 메시지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3.30)

[예스 24] <밤의 해변에서 혼자> 결국 취사선택의 문제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언론 시사회 극장이 만석인 것은 물론 기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 홍상수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렇게 언론의 관심을 모았나? 영화 때문이 아니라는 건 대부분 아실 테고. 그렇다고 김민희 배우의 이번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축하하려고 모인 것도 아니고. 연인 사이로 알려진 홍상수와 김민희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상영 후 처음 국내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극 중 여배우와 유부남 감독의 사연을 다룬다고 하여 홍상수와 김민희 커플의 관계를 직접 드러낸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언론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좌석 통로마다 복작거리는 분위기가 영 불편했는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는 동안에는 상영 전 극장 풍경이 다르게 다가와 재밌게 느껴졌다. 극 중 영화와 현실을 분리해 보여주고 더 나아가 꿈과 현실의 관계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연출이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에게 어떤 감흥을 안겨줄지 궁금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총 2부로 진행된다. 1부의 배경은 외국의 어느 도시다. 여배우 영희(김민희)는 한국에서 유부남 감독과의 만남이 주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선배가 있는 이곳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고 공원을 산책하고 선배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등등. 그러면서도 영희를 만나러 오겠다는 그를 기다린다. 그런 양면적인 감정을 털어버릴 겸 해변에 갔다가 어느 남자에게 납치를 당한다.

엇! 홍상수 영화에서 납치라니? 사실일까, 의심이 들자마자 2부가 시작한다. 2부의 첫 장면은 강릉의 어느 극장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영희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1부 내용은 2부의 영희가 보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극장을 나온 영희는 강릉의 지인을 찾아 커피를 마시고 술자리를 갖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숙소 앞 해변으로 나가 바다를 마주한 채 모래사장에서 잠이 든다.

홍상수 감독은 지극히 일상적인 연애사를 가지고 예상치 못한 형식을 부여해 영화적 마법을 연출하는 게 특징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여배우와 유부남 감독의 관계는 아무래도 홍상수와 김민희를 연상시킨다. 다만 이를 영화로 옮기는 건 현실과는 달라서 극 중 내용이 모두 두 사람의 것이냐, 는 또 다른 문제다. 그에 관해 얘기하는 것, 내게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목적으로 보인다.

영화가 끝난 후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 배우가 참석한 간담회 자리에서 어느 기자가 질문했다. 일반 국민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정서적으로 불편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홍상수 감독이 답했다. 일반 국민이란 표현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김민희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까, 홍상수와 김민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사실 이외의 진실은 이를 받아들이는 각자 처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게 그렇다. 같은 사안을 두고도 누군가는 현실로, 또 누군가는, 영화로, 어떤 이는 꿈으로 인식하며 다양한 해석을 드러낸다. 영화감독과 같은 예술가는 거기에서 ‘마법’을 찾아 이를 적당한 매체로 구현하기를 즐긴다. 그것이 바로 삶과 예술의 상관관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1부와 2부의 연관 구조가 그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분위기를 취하고 있지만, 사건의 전개 방향은 그렇게 비슷할 수가 없다.

마음이 복잡해 타지로 온 영희가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해변으로 간다는 이야기 골조는 1부와 2부 공히 같다. 각각 외국과 강릉,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의 대화와 시끌벅적한 술자리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해변에서의 납치 사건과 잠에서 깨어나는 결말의 디테일이 다를 뿐이다. 이는 영화가 현실을 더욱 극적으로 극화(劇化)하는 방식을 옮긴 것에 가깝다.

안 그래도 간담회 자리에서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이냐는 질문이 나왔고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반응했다. 상업적인 필요에 의한 디테일을 쓸 수 있지만, 그럼으로써 일어나는 작용이 있다. 또한, 개인적인 걸 건드릴 때 발생하는 작용이 다르다. 그래서 개인적인 디테일을 쓰고 다르게 배열하는 과정을 거친다. 디테일이 내게 가까울수록 영화의 방향성이 정해지는데 그것이 진실에 대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결국, 이는 취사선택의 문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1부에 등장하는 영희의 대사를 빌려 좀 더 고상하게 말하자면 “나답게 살고 싶어”, 즉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여기에는 자격이 있을 수 없다. 홍상수 감독은 이 논리를 극 중 영희와 유부남 감독의 관계에 대입해 풀어 간다. 강릉이 배경인 2부에서 영희는 대화가 한창일 무렵 술에 잔뜩 취한 태도로 “자격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목소리를 높인다.

동의한다. 사람의 감정과 욕망은 당사자 개인조차도 판단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합법이고, 저 사랑은 불법이다, 라는 공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의 욕망은 초월적이다. 현실이면서 한 편의 영화이고 또한, 일장춘몽이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영희는 이제나저제나 강릉으로 자신을 보러 와주기를 바랐던 유부남 감독 상원(문성근)을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한바탕 떠들고 나니, 이는 현실이었던가, 꿈이었던가. 눈을 떠보니 해변의 모래사장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던 그녀 앞에서 파도는 여전히 무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영희는 그런 바다를 나란히 하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예스 24
(2017.3.16)

[예스 24] <해빙> 불안한 미래는 영혼을 조각낸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결정적 대목을 유추할 수 있는 문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포물은 시대가 처한 불안 요소를 반영하는 장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위기는 무엇일까. 불안한 미래다. 모든 이슈를 뒤덮은 국정 농단 사태는 차치하고 노골적인 신분 사회가 공고히 된 상황에서 위로의 계층 이동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썩은 동아줄 신화(?)가 되었다. 신분상승은 언감생심, 오히려 한 번 실패가 영원한 추락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 난다.

승훈(조진웅)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강남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했던 잘 나가는 내과 의사였다. 하지만 너무 욕심을 냈던 탓인지 빚이 늘어나면서 병원은 도산하고 그 여파로 아내와 이혼까지 했다. 지금은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선배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한 상태다. 병원 근처에 원룸을 얻은 승훈의 주인집은 건물 1층에서 정육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집의 치매 할아버지 정 노인(신구)이 승훈의 병원으로 수면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온다.

정 노인은 검사를 받던 중 가수면 상태에서 “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섬뜩한 내용의 혼잣말을 내뱉는다. 안 그래도 그날은 한강에 머리 없는 여자 시체가 떠오르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터였다. 게다가 승훈이 새로 생활하게 된 이 지역은 한때 미제 연쇄살인 사건으로 유명했다. 혹시나 정 노인이 관련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던 차 승훈을 만나러 왔던 전처가 실종된다.

<해빙>은 이수연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전작 <4인용 식탁>(2003) 이후 무려 14년 만의 신작이다. <4인용 식탁>을 본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꽤 좋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지난해부터 한국 영화계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수연 감독은 훨씬 더 전에 이미 가족 해체에 대한 책임을 여성, 그러니까 모성에 넘기는 이 사회의 모순을 공포물로 은유한 적이 있다.

<4인용 식탁>에서 여성은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는, 아니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볼모 잡힌 존재로 묘사된다. 아동학대, 생활고 등과 같은 가정 문제를 모두 끌어안고 밖으로는 별문제 없는 척 위장해야 하는 모성은 남성 중심 사회의 방어 기제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 강제적으로 얼어 있어야만 하는 존재, 그 얼음이 녹아서 풀어져야 비로소 실체가 드러나는 이 사회의 어두운 면. 이수연 감독의 세계관은 그렇게 ‘해빙’이라는 영화의 제목과 맞닿아 있다.

한강이 녹자 떠오르는 머리 없는 여자 시체의 정체는 사실 <해빙>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불러일으키는 악몽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은 다름 아닌 승훈이다. 전처의 실종, 정 노인의 살인 고백, 정육 식당 냉동 창고에 숨겨져 있는 의심스러운 검은 봉투, 그리고 스토킹하듯 승훈 주변을 배회하는 정체불명의 전직 형사.

녹은 얼음 위로 불어나는 강물처럼 일상에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자 승훈은 공포에 휩싸인다. 근데 ‘일상’이라는 단어, 뉘앙스는 아무 일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지칭하는 것 같지만, 불안한 나날들이 만성이 된 상태라면 어떨까. 아무 일 없는 듯 굴어도 승훈의 일상은 망가진 지 오래다. 서울 강남에서 지방 신도시로의 좌천, 병원 원장에서 직원으로의 강등, 어엿한 가장에서 초라한 혼자가 된 이 남자는 지금 추락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일상을 방어 기제처럼 발동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각자도생으로 얼어붙게 한 신자본주의의 첨예한 경쟁 논리는 불안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쓸데없는 것으로 동면시켰다. 행여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경우, 이를 패배와 추락이라고 생각해 웬만하면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회의 많은 구성원은 나는 누구인가, 잊고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니 분열하기 시작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불면증과 인격장애 등과 같은 정신적 질환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승훈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승훈과 전혀 무관한 것일까. 가해자로 비치는 정 노인도, 피해자로 보이는 전처도, 이를 조사하는 전직 형사 출신의 남자도, 한강 위에 떠오른 머리 없는 여자 시체도 모두 승훈을 구성하는 조각난 형태의 총합이 아닐까. 그렇다고 승훈이 <23 아이덴티티>의 주인공처럼 다중 인격을 가졌다는 얘기가 아니다. 승훈은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영혼을 잠식당하고 있는 대다수 우리이기도 하다. 연쇄살인 사건은 그런 불안정한 감정이 폭발하여 드러난 최악의 케이스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안이 괴물을 양산하고 있다.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景)
(2017.3.2)

[예스 24] <더 큐어> 건강한 당신을 치료해 드립니다

나를 포함해 주변을 둘러보면 육체적으로 건강해 보여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천지다. 전 세계적으로도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넘쳐난다. 전쟁에, 기아에, 종교와 인종 갈등에,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좌절과 상실감에, 더 멋있고 예뻐지고 싶은 지나친 욕망 등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병들어 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를 치료하겠다며 관련 병원이 생기고 사설 의료 기관이 판을 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치료제가 난무한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이 연출한 <더 큐어>는 사회가 점점 더 비이성적이 되어 가면서 병 자체보다 치료법이 더 끔찍해지는 상황을 다룬다.

록하트(데인 드한)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불법(?) 정도 쉽게 감행하는 젊은 야망가다. 그가 속한 대기업의 CEO가 정신이 나간 듯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그를 데려오기 위해 록하트는 스위스의 알프스에 위치한 ‘웰니스 센터’로 향한다. 깊은 산 정상에 위치해 위압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이곳에는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심신을 치유하겠다며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이에서 유독 록하트가 찾는 CEO만 눈에 띄지 않는다.

센터 측에서 CEO와의 면회를 의도적으로 막자 록하트는 뉴욕 본사로 돌아가 이를 알리려 한다. 기차역으로 향하던 중 차 사고를 당하면서 록하트는 정신을 잃는다. 깨어나 보니 3일이 지난 상태다. 게다가 다리까지 골절되어 깁스를 하고 있다. 웰니스 센터의 담당자는 다친 다리도 물론이지만,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며 요양을 권한다. 특히 이곳에서 나오는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해 이를 따르니, 록하트의 시야에 헛것이 보이는 듯하다. 그때 맞닥뜨린 의문의 소녀. 웰니스 센터를 빠져나가려는 록하트에게 무시무시한 말을 전한다. “지금껏 여기를 떠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더 큐어>의 원제는 ‘A Cure for Wellness’다. 한국말로 풀면, ‘건강하게 하는 치료’ 정도의 의미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Wellness’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을 위한 치료? 상식적으로 그런 게 필요할 리 없다. 이 제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모두가 성공을, 돈을,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드는 세상도 그중 하나다.

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적으로 달려드니 웬만한 성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남들보다 가진 게 없다고, 남들이 나보다 훨씬 멋있고 예쁘다고 좌절에 빠지거나 타인을 음해하고 종국에는 사회 자체를 비이성적인 감정의 불구덩이로 몰아넣는다. 더 욕망하지 않았으면 굳이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지나치게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심리의 상처를 입어 불필요한 치료를 열망하는 현대인들. <더 큐어>는 이런 상황을 웰니스 센터로 은유한다.

컵 표면에 맺힌 이슬을 카메라가 초(超)근접 하여 예민하게 포착하는 이 영화의 촬영술은 향정신성 의약품을 복용하듯 보고 있으면 취한 기분에 빠져든다. 그런 치료제를 복용하니 몸이 낫는 게 아니라 약 자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정신의 미로 상태에 갇힌다. CEO를 봤다는 사람은 많아도 어찌 된 일인지 록하트는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CEO. 아니, 그 무엇. 그럴 때마다 록하트는 마주하기 싫은 자신의 내면으로 침전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내면의 목소리는 진실인 경우가 다분하다. 그 진실을 부러 외면할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마음의 병을 얻는다. CEO는 편지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안에는 병이 숨어 있네. 역류한 담즙처럼 목구멍에 쓴맛을 남기는 병이. 탁자에 둘러앉은 자네들도 마찬가지일세. 치료법도 원인을 알아야 찾는 법이라네.” 록하트는 겉으로 멀쩡해도 젊은 나이에 너무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다. 야망으로 포장된 성공과 돈에 취해 점점 멀어져가는 진실을 잡기 위해 내면의 미로를 헤매는 상태다.

이 미로의 정체는 실은 역사다. 록하트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마음의 병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물질을 향한 도 넘은 사랑,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 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등은 옛날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웰니스 센터에는 근무하는 의료진이나 요양하는 환자들이나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죽을 날이 머지않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갖은 욕망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를 더 누려보겠다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이들의 최종 절차는 괴물로의 몰락이다. 지금 록하트와 의문의 소녀는 반복되는 역사의 갈림길에 직면했다.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과감한 판단이 필요하다. 지나친 욕망은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당신은 욕망의 미로 ‘웰니스 센터’에서 탈출할 의지가 있는가.

 

예스 24
‘허남웅의 영화경’
(2017.2.16)

<컨택트> 현대의 ‘바벨탑’ 신화

테드 창은 세계적인 Sci-Fi 작가다. 자랑하자면, 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2009년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게스트로 참여한 그를 인터뷰했었다. 테드 창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에 입각해 구성한 과학소설, 즉 하드SF를 쓰는 작가라 그의 글을 읽는 데는 상당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물어볼 것이 꽤 많았다.

내 입장에서 테드 창은 꽤 까다로운 인터뷰이(interviewee)었다. 질문의 의도가 정확히 이해된 후에야 답변을 내놓는 식이었다. 한국영화가 개봉할 때면 이뤄지는 의례적인 인터뷰, 인터뷰어가 영화에 대한 인상만 밝혀도 인터뷰이의 답이 따라오는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나와 테드 창이 서로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보니 사용하고 이해하는 인터뷰의 언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 내내 진땀이 흘렀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재미난 경험이었다. 테드 창의 단편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개정판 전에는 ‘네 인생의 이야기’로 표기됐다!)가 묘사하는 상황과 유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예고 없이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의 사연을 다룬다. 이 단편이 영화화되었다. 영화의 원제 ‘Arrival’ 대신 한국에서는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는 웨버(포레스트 휘태커) 중위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는다. 웨버 중위는 지구에 나타난 외계인의 언어를 해석해달라며 그녀를 외계 비행물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 루이스는 이동하는 중 만난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과 함께 헵타포드로 불리는 칠족(七足) 외계인을 만나 체경을 통해 그들이 쏟아내는 언어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한다.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컨택트>는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지구 침공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인류의 언어와는 체계 자체가 전혀 다른 외계인의 언어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언어에 반영된 인간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탐구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까지 살핀다. 그런 맥락에서 <컨택트>는 외계인을 매개로 한 현대의 ‘바벨’ 신화라는 인상이 강하다.

바벨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에 나온다. 인간은 하늘에 닿기 위해 거대한 탑을 지었다. 이에 분노한 신은 인간에게 서로 다른 언어를 부여했다. 다시는 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하게끔 대화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컨택트>가 묘사하는 외계 비행물체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모습과 다르게 원반 형태가 세로로 세워져 있어 의도적으로 바벨탑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컨택트>는 외계인의 고등 문명에 맞서는 인간의 오만함에 경고를 보내는 작품인가?

그런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루이스와 이안이 외계 비행물체에 접근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인간은 인과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편을 선호해 언어 역시 그에 맞춰 기호를 음성으로 발화하고 말소리를 기록한다. 인간의 모든 문자언어는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음성표시 Glottographic’ 문자를 사용하는 인간과 다르게 원과 사선으로 구성된 헵타포드의 언어는 발화된 소리와 무관하게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의미표시 Semasiographic’ 문자라고 한다.

좀, 아니 너무 어렵다. 영화는 테드 창의 원작이 기술하는 인간과 헵타포드 언어의 묘사보다는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이해하기 수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중요한 건 인간과 헵타포드 공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체계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데 있다. 인과론적 사고에 익숙한 인간은 외계인의 지구 방문 혹은 침공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헵타포드는 자신들이 왜 지구를 방문했는지 인간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라 설명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언어가 완전히 다르듯 전혀 다른 사고 체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이를 간파하고 헵타포드와 좀 더 소통하려 해도 주변 반응은 그와 다르다. 외계인의 방문 목적을 알지 못해 점점 초조해지고 급기야 외계 비행물체를 향해 선제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런 반응의 ‘원인’은 인류가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며 쌓아 올린 역사의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의 언어는 그에 맞춰 진화하고 지금까지 이어졌다. <컨택트>가 현대의 바벨 신화인 이유다. 그래서 영화는 외계 비행물체를 두고 의견이 둘로 나뉜 인류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는? 이 정도만 말씀드리고 싶다. 인간이 인과론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 <컨택트>에는 언어학자 루이스의 에피소드와 병렬해 자연인 루이스의 사연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다. 루이스에게는 딸이 있었지만, 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다. 딸을 잃은 충격과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루이스는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속으로 이유를 따져 물으며 고통스러워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힘들다.

그녀의 딸이 병으로 숨진 것은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살다 보니 생긴 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예측 불가하다. 예측 가능한 것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는 곳에서 다시 삶이 시작한다는 사실뿐이다. 그렇게 유한한 인간의 삶은 생사의 고리(roop)로 인해 무한대로 이어진다. 이는 인과론적 사고로는 풀기 힘든 우주의 이치다. 고로 우주를 알아가고 외계 문명을 탐구하는 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컨택트>의 헵타포드는 이를 알려주기 위해 지구에 나타난 것이 아닐까. 엇! 여전히 인과를 따지는 나란 인간이란… 이런 나와 인터뷰 하느라 고생했을 테드 창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 음성표시와 의미표시에 대한 설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참조하였습니다.)

 

예스 24
(2017.2.2)

<단지 세상의 끝> 가족, 너무 가까워서 이해하기 힘든 존재

onlyendoftheworld

자비에 돌란은 천재 감독으로 통한다. 198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그는 이제 고작(?)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무려 6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마미>(2014)와 <단지 세상의 끝>(2016)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젊은 거장의 지위를 얻었다. 더 놀라운 건 자비에 돌란이 연출 편수를 더 할수록 더욱 넓어진 시야를 과시한다는 데 있다.

<단지 세상의 끝>은 프랑스 출신의 극작가 장 뤽 라갸르스의 동명 희곡을 영화로 옮겼다. 12년 전에 떠난 루이(가스파르 울리엘)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들을 위해 엄마(나탈리 베이)는 정성껏 요리를 준비한다. 여동생 쉬잔은 별 기억이 없는 오빠가 유명작가가 되었다니 호기심에 들뜬 심정이다. 하지만 형 앙투안(뱅상 카셀)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얼굴이 편치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앙투안의 아내 카트린(마리옹 코띠아르)은 처음 만나는 루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루이가 집을 찾은 건 이유가 있어서다. 그동안 못 본 가족들이 그리워서라기보다 신변에 이상이 생겨서다. 루이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리고 싶은데 말을 꺼내기도 전 엄마와 쉬잔과 앙투안과 카트린은 자기 말만 쏟아내기 바쁘다. 재회의 반가움도 잠시, 이들의 말 중 상당수는 루이를 향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대한 루이의 반응은 뜻밖에도 순응이다. 가족의 독기어린 말들을 예상했다는 투다. 결국, 루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집을 떠난다.

12년 전 루이가 왜 가족을 떠났는지, 그동안 왜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는지, 앙투안은 왜 그렇게 동생에게 화가 났는지 등 영화는 전쟁 같은 이들 가족의 말싸움 중 탄피처럼 무수히 떨어지는 ‘왜’에 대한 설명을 굳이 하지 않는다. 자비에 돌란이 보기에 가족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서로에게 온전히 이해시키지 못하고, 이해받지도 못하는 피붙이의 총합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늘 충돌하기 마련이다. 이는 돌란이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특별한 시선도, <단지 세상의 끝>의 루이 가족이 겪는 특수한 경우도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매일 같이 가족과 함께 좁은 집에 모여 지지고 볶고 산다. 혼자 사는 경우라도 설과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집을 찾기 마련이다. 그때 벌어지는 상황은 <단지 세상의 끝>에서 루이가 맞닥뜨린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반가운 인사말이 오가다가도 그동안의 섭섭한 감정을 쏟아내다 보면 좋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남의 눈 의식하지 않는 고성과 무거운 침묵이 재회의 기분을 망치고 만다.

가족 간 불화에 방아쇠를 당기는 건 기본적으로 피해자 정서다. 특히 가족 구성원이 많을 경우 피해자 정서는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흘러간다. 오로지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족 문제는 해결은커녕 끝이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긋는다. 그것은 꼭 옆의 시야를 가리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자비에 돌란 감독이 <단지 세상의 끝에서> 주목하는 촬영기법은 ‘클로즈업’이다.

클로즈업은 촬영 대상에 근접해 촬영하는 기법을 말한다. 인물을 클로즈업할 경우, 해당 인물의 감정이 극대화되는데 그러다 보니 주변 인물의 심정이나 기분은 의도적으로 배제되기 마련이다. <단지 세상의 끝>은 루이가, 앙투안이, 카트린이, 쉬잔이, 엄마가 묵은 감정을 풀어내기 위해 말문을 열기만 하면 어김없이 클로즈업을 활용한다. 이에 대한 주변인의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지 세상의 끝>은 이들 가족을 함께 잡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렇게 가족은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서로 이해받지 못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피해자 정서가 충돌하는 가족의 삶은 각자에게 수난사다. 그 수난을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그건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루이는 그게 싫어 12년 전에 가족을 떠났고 이번에는 그마저도 감수하기 위해 가족을 찾았다. 그리고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떠나는 길을 택한다. 그건 가족에 대한 체념일까? 아니면 곧 다가올 죽음으로써 행하는 가족을 향한 복수일까? 알 수 없다. 가족은 너무 가까워서 판단이 어려운 존재다. 떠났다 돌아왔다 다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맺는 가족의 관계, 그건 연어의 회귀본능과는 다른 인간의 본성이다.

자비에 돌란은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부터 가족을 다뤄왔다. 더 정확히는 가족 같은, 연인 같은, 적수 같은 엄마와 아들의 사연에 집중해왔다. 자비에 돌란은 실제로 자신이 엄마와 맺었던 관계를 영화로 드러내며 가족 관계를 정의해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감독도 쉽지 않은 주제를 20대의 감독이 정면돌파하니, 사람들은 자비에 돌란을 향해 ‘앙팡 테리블’, 무서운 아이라 평했다.

이제 그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 가족을 이야기한다. (돌란의 영화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대개 부재하다. 이에 대해 돌란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별 추억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전 영화들이 감독 본인의 개인적이고 특별한 사연의 성격이 컸다면 <단지 세상의 끝>은 좀 더 보편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럼으로써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비에 돌란의 진화하는 연출의 끝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예스24
(2017.1.19)

[예스 24] <빌리 엘리어트> 희망을 향해 백조처럼 날아오르다

billyelliot

<빌리 엘리어트>가 재개봉(2017년 1월 19일)한다. 지난해 재개봉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질 때 조만간 <빌리 엘리어트>를 극장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2001년 개봉 당시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주변의 편견을 딛고 발레로 성공한 소년의 성공담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몇 번을 더 볼 기회가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그보다 훨씬 입체적인 영화였다. 그에 대해 써보고 싶었는데 마침 재개봉으로 기회가 생겼다.

빌리(제이미 벨)는 엘리어트 가문의 막내다. 이 집안에는 전통이 하나 있다. 할아버지 대부터 남자는 모두 권투를 배웠다. 당연히 빌리도 마을 체육관에서 권투 강습을 받는다. 근데 주먹을 휘두르는 폼이 영 익숙하지가 않다. 대신 체육관을 반으로 갈라 소녀들이 교육받는 발레에 관심을 보인다.

빌리가 토슈즈를 신고 플리에(Plie) 자세를 취하자 소녀들이 키득키득 웃어댄다. 이 정도 놀림쯤이야 견딜 만 하다. 문제는 남자들이다.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소식이 아빠와 형의 귀에 들어가자 수난이 시작된다. 아빠는 남자가 망신스럽게 무슨 발레냐며 빌리의 외출을 금지한다. 형은 정부의 탄광 폐쇄에 맞서 투쟁이 한창인데 춤이나 추고 자빠졌느냐며 쌍욕을 퍼부어댄다.

발레가 좋으면 남자라도 할 수 있는 거지, 라고 빌리는 생각하지만, 빌리를 둘러싼 환경은 그렇지가 않다. 빌리가 나고 자란 영국 북동부의 더럼(Durham)은 탄광으로 유명하다. 깊은 지하로 내려가 석탄을 캐는 일이 워낙 거칠다 보니 남성적인 규칙과 기운이 지배적인 곳이다.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집안에서는 법에 가깝고 이를 어긴다는 건 곧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남성적인 환경에서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권투를 배우면서 샌드백을 두드린다.

하지만 빌리는 사람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권투보다 아름답게 몸의 곡선을 뽐낼 수 있는 발레에 더 마음이 간다. 위압적인 샌드백을 상대로 물리적인 힘을 과시하기보다 수평의 발레 바에 몸을 맡겨 리듬을 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빌리 엘리어트>는 수직적인 환경에서 수평적인 관계를 꿈꾸는 아이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권투의 샌드백과 발레의 바와 같은 수직과 수평의 이미지가 서로 힘겨루기하는 방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은 1984년이다. 당시 영국은 보수당의 대처 총리가 집권하던 시대였다. 흔히 ‘대처리즘 Thatcherism’으로 불리는 이 시기에 영국은 경제개혁을 추진한답시고 복지를 위한 공공 지출을 삭감했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했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규제했다. 이에 가장 직격탄을 맞은 곳이 바로 더럼과 같은 탄광 지역이었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탄광 폐쇄가 줄을 잇자 일자리를 잃은 광부가 속출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이들은 일자리를 돌려달라며 투쟁에 나섰고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해 시위를 억압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더럼의 주민들은 남들처럼 먹고살게 해달라며 탄광 폐쇄 철회를 요구했지만, 대처의 보수 정부는 이를 못 들은 척 했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곤궁한 삶으로 몰고 잘 사는 사람은 더욱 부자로 만들며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겼다.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을 퇴근 후 펍에서의 맥주 한 잔으로 풀며 삶의 시소를 잔잔한 수평선으로 이끌었던 주민들에게 대처리즘은 평행 추를 절벽으로 기울인 폭력과 다르지 않았다.

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어야 할 크리스마스에 엘리어트 가족은 붕괴 일보 직전이다. 형은 투쟁에 나섰다가 구속된 상태고 생활비를 벌어오지 못하는 아빠는 벽난로에 불을 피우겠다며 살아생전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피아노를 부숴 땔감으로 이용한다. 탄광 일을 하지 못하니 이제 더는 살아갈 방도가, 아니 희망이 없다.

그렇지 않다.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존재하는 법이다. 계집아이나 하는 운동이라며 빌리를 몰아 세웠던 아빠는 막내아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화려한 발레 기술을 뽐내자 마음이 바뀐다. 발레만이 빌리를, 그의 기족을 삶의 절벽에서 구해줄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즉시, 아빠는 투쟁을 멈추고 노동자 동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정부 직속의 탄광에서 최저 생활비를 받아 빌리의 발레 교습비로 충당한다. 마침 이 소식에 마음이 흔들린 더럼의 주민들 또한, 빌리가 런던의 로열발레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끔 푼돈까지 모아 십시일반 한다.

대처리즘에 저항하는 약자들의 저항 혹은 생존법이라고 할까. 그제야 빌리는 아빠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형과 함께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이별을 아쉬워한다. 그동안 엘리어트 가문을 지배했던 상명하복의 문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아빠와 형은 다시금 굳은 얼굴로 지하의 탄광으로 내려가지만, 과거와 다르게 견뎌낼 희망이 생겼다. 런던의 지상 무대에서 공중으로 화려하게 날아오를 빌리의 발레가 그것이다. 폭압적인 시대에도 살아갈 방법은 있다. 가족의 화합과 마을 주민들의 도움과 같은 연대다. 수직적인 지배 환경이 거셀수록 수평의 문화는 더욱 힘을 발하는 법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단순히 빌리의 성공담을 넘어서는 이유다.

 

예스 24
(20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