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자객>(Romantic Assassin)


<낭만자객>은 <두사부일체>, <색즉시공>의 연이은 대박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코미디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윤제균 감독의 한자성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허우대만 멀쩡했지 하는 짓은 영 얼빵한 요이(김민종 분)와 예랑(최성국 분)의 낭만자객단이 어찌저찌 우당탕해서 처녀구신 향이(진재영 분)에게 잡혀 그녀의 恨을 풀어주고 결국 저승 가는 길을 열어준다는 스또리의 영화다.

이렇게 당 영화는 감독의 전작을 보나, 옆에 있는 포스터를 보나, 위에 짧게 썰한 이야기를 보나 여러 모로 보았을 때 코미디의 외양을 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 특위가 확인해 본 결과, <낭만자객>은 놀랍게도 웃기기는커녕 볼수록 눈물만 줄줄 흐르는 신파영화였다는 사실이 뽀록나고야 말았다.

물론 당 영화는 코미디 비스무리한 걸 구사하기는 한다. 근데 그 수준이란 게, 우껴주고는 싶은데 말로 우껴줄 실력은 안 되니 영화 속에는 의미 없는 욕설과 음담패설, 그리고 더럽기만 한 화장실 개그만이 난무하고, 결국 하는 수 없이 슬랩스틱 코미디로 승부를 거나 이 역시 공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으니…

이를 접한 관객은 전혀 우끼지도 않은 개그를 2시간 내내 보고 있는 자신의 팔자가 기구해지는 동시에 남산타워 3배 높이로 파도치며 밀려드는 회의감에 눈물이 절로 앞을 가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감독은 한 번 울린 관객의 눈물샘을 제대로 터뜨려 주려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래서 같잖은 개그에 이어 이번엔 거의 15년 전 <우뢰매>에서나 봤음직한 합성화면을 선보임으로써 관객을 다시 한 번 눈물의 도가니탕으로 진탕 빠뜨리니…  

아~ 정말이지 한국의 수려한 금수강산을 배경화면 삼아 불새가 되어서 하늘을 나르는 우리의 낭만구신들의 합성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이 꼬라지 가지고 올 겨울 <반지의 제왕>과 맞짱 뜨겠다는 그 무식한 기백이 놀라워 또 한 번 눈물이 앞을 가릴 따름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스토리가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당 영화는 감독이 원하는 바와는 달리 우낀 대목에 이르면 관객이 울음을 터뜨려 버리고, 슬픈 대목에 이르면 웃음을 터뜨려버리는, 쒯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절체절명의 순간, 관객은 <나비>에서의 은퇴선언을 고무신 뒤집어 신듯 번복, 기염을 토악질하며 당 영화에 출연한 김민종이 이제는 정말로 영화계 은퇴의 길을 가야하는 건 아닌지 기쁨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훌쩍이게 되며, 나름대로 테레비에서 괜찮은 MC로 주가를 올리던 이매리가 왜 당 영화에 출연해 스타일 구김으로써 앞으로 활동하는데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닌지 눈물이 글썽이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제쳐두고 당 영화가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하는 건 감독이 <천녀유혼>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결과물이 바로 이 꼬라지였다는 사실과 코미디도 아닌 주제에 자신을 코미디로 불러야 하고, 영화 같지도 않은 것이 영화 행세를 해야만 하는 그 기구한 운명이다.

해서 이 영화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 하에 본 특위는 솟구치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당 영화 <낭만자객>을 워스트에 뽕하는 바다… 훌쩍.  

<이도공간>(異度空間)


당해 영화의 가장 큰 프리미엄은 한마디로 장국영의 유작이란 점이다.

장국영이 누군가? <영웅본색>, <천녀유혼> 시리즈와 투유 쪼꼬렛 씨에푸로 지금의 2,30대 애간장을 살살 녹이며 학창시절을 그의 브로마이드로 도배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물론 <아비정전>, <패왕별희>, <춘광사설>도 좋았찌..

그런 장국영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지막 출연작이 된 <이도공간>은 그 사실만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영화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엄따.

하지만비유띄벗뚜, 이렇게 말하기 미안시럽지만 아쉽게도 당 영화는 장국영 팬이라면 모를까 그 외의 잉간덜에겐 큰 재미를 줄 만한 작품이 아니다. 홍콩에서 개봉된지 1년이 지나도록 눈길 함 안 주다가 그가 죽자 급작스레 수입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당 영화는 구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신과 의사 짐(장국영 분)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구신을 보는 옌(임가흔 분)의 정신치료를 맡으면서 벌어지는 무서븐 사건을 다루고 있다.

보시다시피 장르는 공포지만 당 영화는 <무언의 목격자>처럼 초반엔 공포 후반엔 미스터리, 이 두 가지 필이 듀오를 이루고 있음이다. 사실 옌이 구신을 보며 공포를 제공하는 당 영화의 초반 이야기는 주제와는 크게 상관없지만,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후반에 관객을 놀래키려는 속셈이었는데 이를 차용한 건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구신과의 사투가 짐에게로 넘어가는 순간 공포에서 미스터리로 안면을 싹 바꾸는데 그 상황이 자연스럽지 몬하고 너무나 급작스럽다보니 관객에게 속았다는 기분을 별루 주지 못하고 결국 그 효과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 영화는 전반과 후반의 이야기가 통일성을 갖지 못해 마치 2개의 긴 단편영화를 본 것 같은 삘을 다분히 풍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겁나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죽은 사람이 눈에 보인다는 설정이나 이것이 과거의 비극적인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원혼’ 이야기는 다른 영화에서 흔하게 본 소재인데 별 차별점을 갖지도 못하니까.

게다가 공포를 자아내는 연출에 있어서도 당 영화는 약간 후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의 영화문법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답습에만 그치니 심심스럽고 밋밋할 뿐이라는 얘기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결정적 구신의 등장도 정말이지 이제는 신물이 난다. 왜? <링>의 사다꼬 출현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동작은 무섭기는커녕 이제는 오래된 친구 만나는 기분이 들 정도라서. 그래설까, 그 귀신 쫌 귀엽더라.

그러다 보니 영화자체로만 놓고 보면 당 영화는 절대 남에게 추천 때리고 싶지 않음이다. 그러나 장국영 팬이라면 당 영화 꼭 봐라. 이들에겐 당 영화의 관람이 재미있고, 엄꼬의 차원이 아니지 않는가. 물론 본인이 굳이 시어머니 잔소리처럼 이렇게 얘기 안해도 알아서들 보시겠지만서리…

<반지의 제왕 3 : 왕의 귀환>(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무조건 보시라!

본 특위가 당 영화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에 대해서는 불알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애가 나오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관람하시라고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음이다.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에 봉하며 이 글을 마친다… 라고 여기서 끝내버리면 이건 쫌 너무한가…

어쨌든, 당 영화는 악(?)의 무리로부터 절대반지를 사수하기 위해 존나게 고생한 우리의 반지원정대들이 그들의 목적대로 그것을 폐기처분하느냐, 몬하느냐의 여부를 가름 짓는 그 숙명의 순간을 다루고 있는 시리즈의 완결편이다.

한마디로 1탄과 2탄은 당 영화를 위한 예고편이라고 할 정도로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에는 당 시리즈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데 이는 영화의 스케일에 걸맞게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드는 전쟁씬에서 그 빛을 발함이다.

본 특위는 전작의 전쟁씬을 보면서 과연 이 규모를 능가할 장면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었으나 그러나 웬걸, 당 영화에서 벌어지는 곤도르 왕국 수도인 미나스 티리스에서의 전투는 그 의심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스펙타끄르 장면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20만의 사우론 대군과 같은 거대장면을 한 화면(업자용어로 풀샷)에 잡아 엄청나게 큰 스케일을 뽐내는 것은 물론이고 추락하는 돌땡이와 같은 장면의 속도감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가 바짝 붙어 찍어 역동성을 살린 전쟁씬은 이거 하나만으로도 본전 생각은 싹 가시게 할 정도로 올 최고의 엑스타시를 선사한다.

게다가 당 영화에는 1,2탄에 나왔던 캐릭터들이 총출동하고 거기에 새로운 캐릭까정, 캐릭터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돈데 무엇보다 뇨성 관객들 이렇게 표현하면 모하지만, 오줌 싸게 생겼다. 레골라스(올랜도 블룸 분) 말이다. 공중 한 바퀴 휘릭 돌아 멋지게 말타기에 성공한 <두개의 탑>에 이어 이번에는 이 장면을 2743배 능가하는 장면이 여러분을 지둘리고 있다.

그렇다고 당 영화가 이렇게 시각적인 황홀경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톨킨의 원작이 작은 반지 하나로 야기된 반목을 다루면서 잃어버린 인간적인 가치에 경종을 울렸듯 감독 피터 잭슨은 원정대간의 우정과 사랑, 의리와 같은 요소들을 놓치지 아니하고 역시 잘 살리고 있음이다.

특히 당 영화에서 프로도(일리이자 우드 분)의 심복으로 나오는 샘(숀 애스틴 분)의 눈물겨운 주인 섬기기가 눈길을 끄는데 영웅을 동경할 줄만 알았지 충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작금의 세태에 샘의 사심 없는 희생정신은 경종을 울리는 것은 물론이요 감동의 파노라마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다만 당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피터 잭슨이 얼마나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지 반지원정대의 여정이 끝난 뒤 시간을 끌며 여러 가지 사족을 붙여 놓은 것인데 이런 부분은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에서 보여주고 있는 만이백오십삼가지의 장점에 비추어 본다면 거의 옥의 티라 할 수 있다.

사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영화 극장에서 안 보면 대체 우쩔건가… 본 특위가 아무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당 영화를 표현한다한들 니덜이 직접 보는 것만큼 하겠는가.

그니까 지체할 거 없다. 개봉하는 즉시 극장으로 달려가 당 영화 보시라. 이거 정말이지 흔치않는 기회다. 절대 놓치지 마시라. 이상!

<동해물과 백두산이>(Lost In The South Mission: Going Home)


당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는, 최근 북한을 뿔 달린 시뻘건 도깨비가 아닌 가끔가다 뻘짓꺼리도 하고 情도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인간의 시선으로 접근한 <휘파람 공주>, <남남북녀> 등의 북한人을 소재로 한 영화와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다.

이는 곧, 북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비스무리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물론이요, 전체적인 만듦새에 있어서도 ‘거기서 거기다’ 할 정도로 동일한 모냥새를 취하고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북한 장교 최백두(정준호 분)와 그의 쫄따구 병장 림동해(공형진 분). 날씨 좋은 어느 날 낚시질 나왔다가… 술도 한 잔 걸치고 날씨도 급작스레 폭풍우 모드로 변하는 바람에 난파되어 눈을 떠보니.. 허걱! 이 곳은 남한..

이들은 과연 어떤 난관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오게 될 것인가, 가 바로 당 영화의 재미를 결정짓는 핵심부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취하는 전략은 당근 코믹인데 그래서 당 영화의 성패여부는 관객을 얼마만큼 웃기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당 영화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조폭마누라 2>, <낭만자객>,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등 요즘의 한국 코미디 영화가 관객에게 똥칠을 가했던 그 뒤안길을 그대로 복습하는 추태를 범하고 있다.

일단 이야기의 대략적인 와꾸만 잡아놓으면 게임은 다 끝났다는양, 세부적인 상황을 더 다듬어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배우의 개인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전문용어 구사 못 해 안달 난 욕쟁이 할무이마냥 시도때도없이 씨벌씨벌을 입에 달고 다니며, 화장실 유모 안 넣으면 한국코미디쒯영화 협의회에서 과태료라도 물리는지 똥 넣는 장면 같은 類에 왜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그게 또 우끼다면 몰라, 당 영화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억지 웃음 유발에만 심하게 몰두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앞썰했듯 당 영화는 배우의 개인기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으면서 그 배우들이 제대로 우껴주는 것도 아님인데 본 특위는 당 영화의 마지막,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1등을 먹어야지만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동해와 백두가 뭔가 크게 하나 제대로 터뜨려 주는 줄만 알았다.

무대에서 <챔피언>을 북한 사투리로 구성지게 부르는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어느 정도 각은 잡아주는 공형진은 둘째치고 당 영화에서 개그적 감각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정준호, 무대를 와리가리하며 뻘쭘한 동작으로 챔피언! 챔피언! 외쳐대는 모습을 보면서 본 특위는, 아이고! 안 우껴주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네, 하는 생각까정 들었더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 영화가 한 개도 안 우끼다는 얘기가 아니다. 공형진의 개그 타이밍을 맞추는 연기는 거의 송강호와 삐까맞다이 먹을 정도로 훌륭했는데 그게 자주 나왔으면 좋으련만 간혹가다 한 번씩 튀어나오니 이를 어째쓸까나…

우리가 야구장에 번트안타 하나 보러 경기장을 찾는 것이 아니듯 단지 우끼는 몇장면 건지려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 아닌 전차로 해서 본 특위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워스트에 뽕한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Happy Ero Christmas)


실로 아까비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만 더 일찍 개봉했드라면 ‘2003 토룡영화제’ 전 부문 후보등록은 물론이요, 다관왕까지 찜쪄먹는 건 따놓은 당상이었을텐데…

그렇다. 니덜도, 본 특위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만 당 영화는 그 생명력이 스미스의 복제능력처럼 사그라들줄 모르는 국산 쒯영화의 올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할 기념비적 작품에 다름이 아니다. 대체 워떤 영화이길래…

당 영화는 1년에 딱 한 번밖에 없는 크리스마스라는 시류에 편승하여 이날만을 목놓아 지둘려왔던 수많은 바퀴벌레 남뇨관객을 겨냥해 만든 기획영화다. 특히 제목 정중앙에 백혀있는 ‘에로’라는 두 글자 땜시롱 더더욱 귀두가 주목되고 있는 형국인데.. 에로는 조또…

당 영화는 여친없는 성병기(차태현 분)가 남친한테 채인 허민경(김선아 분)을, 조폭두목 방석두(박영규 분)의 방해를 뚫고 쟁취(?)한다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심심해터진 단순 러부질에 다름 아니다. 근데 제목이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인 이유는? 극중에서 별 비중 없는 에로감독이 제작하는 비됴의 제목을 빌려온 까닭이다.

다시 말해 에로비됴와 관련된 부분은 당 영화에서 쌀 한 가마니의 쌀 한 톨 분량에 불과한데 제목이 에로틱하다보니 주최측은 이점을 이용, 얍삽하게 관객을 끌어 모으려 뺑끼를 부리고 있는 거다.

모, 제목이 제목이다 보니 당 영화는 그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나름대로 에로틱한 설정을 몇 군데 낑군 거 같긴 하다. 근데 영화 전체가 ‘발기부전’이라고 할 정도로 전혀 꼴림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 아니 안타까울쏘냐…

단순히 김선아 응뎅이 두둥~ 함 보여주고 극중 에로여배우가 매장에서 옷맵시 좀 보겠다며 거울 앞에서 야한 포즈를 취하는 것이 아, 글씨, 이런 세상에, 피스톤 운동을 시연하고 자빠져 있는 것이니 대체 어느 누가 이거 보구 쏠리겠냐. 헉! 아니 이거 혹시 우끼려구 넣은 부분인가? 씨바, 그렇다면 더 황당하고…

그러나 당 영화의 결정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당 영화는 마치 <펄프픽션>처럼 두 개의 이야기가 맞물려 들어가는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맞물려 들어가기는커녕 서로 따로국밥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구성하고 있는 에피소드들도 지들 맘대로 별 개연성없이 나홀로 플레이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개별 에피소드들조차 뭐하자는 플레이인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 힘드니 이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대입해봐도, 뉴튼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이해하려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음이다.

그니까 결국 당 영화는 아이디어는 엄꼬 이야기 쓸 능력은 안되고 그런데 크리스마스 때 돈은 벌어들여야겠고 해서 예전에 유행하던 조폭코미디 공식 끌어다가 대충 뚝딱거리고 제목 좀 그럴싸하게 데코레이숑해서 만들어진 쒯영화의 전형이다 이 소리다. 이거 약아빠진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실미도>(Silmido)


당 영화는 실제로 지난 1971년 서울 한가운데에서 벌어졌던 ‘실미도 사건’을 소재로 가져와, 북파공작원의 탄생에서부터 비극적 최후까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즉, 강우석 감독이 시대를 우회적으로 풍자했던 <투캅스>나 <공공의 적>과 달리 이번엔 역사자체가 사회모순이자 아픔이었던 실미도 사건을 정면에 드러내놓고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얘기다.

일단 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실미도 사건이라는 당시 역사가 운명적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비극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이 속에서 양성된 인찬(설경구 분)을 위시한 북파공작원 개인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더해 그들을 조련한 기간병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접고 서로의 심장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드라마틱한 관계 등 머리부터 발끝까정 말이 되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캐릭터 코미디 영화에 일가견을 보여온 감독답게, 웃음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쌀벌한 훈련과정에서 우리의 액숀협객 다찌마와리 임원희를 앞세워 의외의 우끼고 자빠라짐을 유도, 이를 통해 인물의 캐릭터를 살리고 관객의 감정이입까정 자연스럽게 이끎으로써 재미까정 일타쌍피한 솜씨는 관객을 재미의 도가니탕으로 흠뻑 빠뜨려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비유띄벗뜨…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이야기는 북파공작원들의 김일성 모가지 따러가는 임무가 전격적으로 취소되면서부터 재미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왜냐?

당 영화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북파공작원 vs 기간병’의 구도를 접고 대신 ‘북파공작원, 기간병 vs 국가’라는 새로운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들이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동시에 국가주의에 똥침을 놓을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감독은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하지만 아쉽게도 북파공작원과 기간병간의 관계 묘사라는 것이 마치 감정표현에 서투른 중년남성을 보는 것처럼 굉장히 촌스러워 이야기에 몰입하려는 관객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조중사(허준호 분)의 사탕봉지는 정말이지…

게다가 당 영화는 뒤로 갈수록 북파공작원이 희생양이라는 사실에만 치중하여 오로지 관객의 울음보를 터뜨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데 이를 보여주는데 있어 하나의 사건을 축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짜잘한 에피소드 위주로 끌고가니 이야기가 산만해져 갈등포인트가 힘을 받지 못해 결국 스토리는 늘어지고 전개는 산만해진다.

그 결과, 이런 힘있는 이야기를 그저 ‘실화 재현’ 수준에만 머물게 하고 관객의 감정을 순간순간 자극하여 울리기에만 바빴지 큰 감정의 울림을 주지 몬한 감독의 단순한 연출력은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차이나타운>(Chinatown)




고전영화 많이들 보셨습니까? <반지의 제왕>, <디 아더스> 보느라 시간이 없었다고요, 쯧쯧 딱하기는. 그거 아십니까, 피터 잭순이 <반지의 제왕>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1933년에 발표된 <킹콩 King Kong>과 1963년에 만들어진 판타지 <제이슨 앤 아거노츠 Jason and the Argonauts>가 있었기 때문이고, 피 한 방울 보여주지 않고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 <디 아더스> 역시 고전공포영화의 법칙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

각설하고, 본 우원 벌써 두 번째 기사임다. 독자제위들의 벌떼와 같은 공격적 응원메일이 아니었다면 다시 만나기 힘들었더랬습니다. 이렇게까지 친근감을 표시해주니 본인 그저 가슴이 벅찰 뿐임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안면도 익히고 그랬으니, 말 트는게 어때, 우리 딴지가 맺어준 친구 아이가?  

지난 시간 <말타의 매>라는 훌륭한 골동품 한 점 소개해 줬으니 이번에는 이름난 마을 한 곳 알려주고 싶은데, 뭐 어디냐구, 서두르긴. 자! 이번에 안내해 줄 마을은 <차이나타운> 되겠다.

요 마을 이름에서 풍기는 대로 쪼매 위험한 곳이니 본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잘들 따라온나. 한 눈 팔고 딴 데로 샜다간 바가지쓰니깐.

1.

1941년 존 휴스턴에 의해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가 선을 보인 이후, 필름 느와르의 외피를 둘러싼 하드보일드는 숫총각이 불꺼진 여관방에서 홀인원을 하지 못해 골프채를 헛 휘두르는 상황을 방불케 하는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전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당시의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한 듯한 어두운 흑백 화면으로 인해 하나의 유행이 되기에 충분하였더랬다.

게다가 하드 보일드가 영화사적으로 얼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는 이 장르의 부분적인 특징들이 현재까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여기 꽃 같은 몽타를 보유한 쭉빵한 걸이 한 명 있다. 그 걸은 자신의 외적자산을 백분 활용, 상대남성의 단물만을 쪼∼옥 빼먹고 파멸의 길로 유도한다. 그렇다면 이는 하드보일드가  배출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다. 그뿐인가 흑(黑)과 암(暗)이 불안한 기운을 조성하는 어두운 화면이 등장하는 날에는 하드 보일드를 논하지 않고는 정확한 평가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작금의 사태가 이럴진대 <말타의 매>가 등장했던 당시 하드 보일드를 향한 관객제위들의 맹목적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때 만들어지던 영화의 경향을 지금의 문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하드 보일드인 것과 하드 보일드가 아닌 것’으로 구분 지어 설명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하드 보일드는 1940년대 헐리웃시장을 지배하는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메뚜기도 한 철’이라고 한창 잘 나가던 하드 보일드 영화들은 1950년대 초반을 전성기의 마지막 정점으로 그 세를 조금씩 잃어가게 된다. 유행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등에 업고 끊임없이 양산되던 하드 보일드 영화에 관객들이 식상함을 느낀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하드보일드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긴 생명력을 갖기에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개상황을 예측하기 힘든 미로와 같은 글을 계속해서 창조해 낸다는 것이 딴지라면 모를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결국 정통 하드보일드 영화는 스크린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었고, 그나마 TV를 통해 탐정장르라는 이름의 옷으로 갈아입고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긴 동면의 시간을 갖던 하드보일드는 1960년대 중반에 들어, 모 영화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흥미롭지만 대중적 반향은 없었던 얼마간의 무용담 영화”로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3년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은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표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The Long Goodbye>로 실로 오랜만에 영화귀족들인 평론가와 변덕이 들 끊는 관객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내며 가볍게 잽을 날리기 시작했고, 1974년 드디어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차이나타운 Chinatown>에 의해 하드 보일드는 신 느와르(neo-noir, 국내 비평가들은 수정주의라고 함)라는 재건의 이름을 달고 원투 펀치를 작렬함으로써 올만에 영화계 사각의 링에 승리의 두 팔을 번쩍 올리게 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쓰”

2.

당 영화 <차이나타운>의 두드러진 특징은 감독의 업적보다 시나리오 작가인 로버트 타우니(Robert Towne)의 공적에 더 큰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드보일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라는 평가와 함께 <차이나타운>은 로버트 타우니의 영화라고 주장하는 극성파도 있었으며, 그를 하드보일드 소설의 창시자인 대쉴 해미트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성미 급한 아덜도 생길 정도였다.

본 우원 일정부분에 대해서는 수긍의 고갯짓을 약간 ‘도리도리’ 해 보일 수 있지만 시나리오의 획기적인 완성도만을 앞세워 <차이나타운>을 타우니의 것이라고 한 주장에는 뒷골이 땡겨 심히 불만이 밀려오는도다. 대통령이 나라의 왕이라꼬 대한민국이 김데충이꺼 아니자너.  

시나리오 작가의 크레딧에는 분명 로버트 타우니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바뜨 그러나 실은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와의 투톱 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진 산물이 바로 <차이나타운>의 뛰어난 각본이었던 것이다. LA의 화려함과 대조되는 불쾌한 이미지의 차이나타운을 끌어들여 상반된 분위기를 설정한 것은 로만 폴란스키였으며, 상실감으로 끈적거리는 비극적 결말을 유도한 것 역시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플레이메이커 로만 폴란스키의 쓰루 패스를 받은 타우니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네트를 흔들었다고 해야할까.

당 영화 <차이나타운>은 하드보일드에서 제시된 주요 특징들을 모두 배치해 놓음으로써 고전 하드 보일드 영화들에 존경(오마쥬)을 바치고 있다. 주인공이 사립 탐정인 점, 별 일 아닌 것 같던 의뢰가 핵심에 다가설수록 더 큰 음모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음모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매력적인 뇨(女).

하지만 이전 하드보일드 영화들은 허황한 욕망을 좇는 인간의 추악한 악을 표현하는데 있어 여러 인물이 연루되는 복잡한 상황임에도 불구, 일방적으로 전개하여 독자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와 달리 <차이나타운>은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사건해결의 열쇠가 되는 단서를 여기저기 살포시 흩뿌려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가령,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없는 시체의 없어진 오른쪽 구두와 물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 나온 주인공의 없어진 오른쪽 구두를 통해 눈썰미가 있는 관객이라면, 앞선 그 시체가 살해당한 것임을 단박에 눈치 깔 수 있다. 또한 차이나타운에서 지방검사로 지낸 기티스(잭 니콜슨)의 전력은, 본인처럼 총명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결말을 어렴풋이 추론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는 아주 촘촘히 엮어져 있어 집중하여 보지 않을 경우 많은 단서들을 놓치게 될뿐더러 작가와 벌이는 1:1 두뇌게임에서 낙오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인터렉티브 영화의 원조를 <차이나타운>에 두는 업계의 추측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무엇보다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이유는 LA를 배경도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아는가 모르겠지만, 텍사스처럼 LA 역시 모래 반, 자갈 반에 황량한 바람만이 지랄맞게 극성을 부리는 훵한 황무지였드랬다. 그런데 이 불모지에 불과한 LA가 개척자의 침입에 따른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급속히 거대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범죄와 음모에 노출되었드랬다. 바로 그 타락하는 모습을 물 부족과 연관지음으로써 생기가 말라 가는 도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로버트 타우니는 단순히 물과 얽힌 이야기를 하고 싶어 별 의도 없이 이런 소재를 택하였다는 겸손한 필을 가장한 다소 김 빠지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불구(그렇지만 실은 자신의 식견을 뽐내는…. 그래 너 잘났다 쓰바야), 시나리오 작가로써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특출 난 장점들로 인해 <차이나타운>의 각본은 영화학과의 시나리오 강의 시 교재로 채택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시나리오 소개서와 작법서에도 누락되는 일이 없을 정도다.  시나리오 하나로 영화판권뿐 아니라 출판계에서 로열티까지 받아먹는 일타이피의 득도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차이나타운>의 각본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로버트 타우니는 암울하게 끝맺음되는 결말부에 대해서 노골적인 실망감을 표시했드랬다. 왜냐, 자신은 관객을 계몽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임으로 당연히 해피엔딩의 결말을 취함으로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감독인 로만 폴란스키의 똥꼬집으로 인해 악이 승리(?)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타우니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대부> 이후 선의 가치가 전복된 결말이 하나의 경향이 되어 <차이나타운>이 그 유행을 따랐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또 한편에서는 당 영화가 만들어지기 5년 전,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Charles Manson)에 의해 부인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은 로만 폴란스키의 개인적 이력을 끌어들여 감독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을 내어놓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맨슨에 대한 분풀이를 할 요량이었는지 로만 폴란스키는 악당 역으로 출연 기티스의 코를 베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3.

이 영화의 특징이 단지 시나리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주는 진한 갈색톤의 음울한 영상을 만들어낸 촬영감독 존 A. 알론조의 카메라도, LA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방이 막힌 것 같은 폐쇄감을 창조한 리처드 실버트(production designer), 스튜어트 캠벨(art director), 루비 레빗(set designer)의 공로도 <차이나타운>을 논하는데 있어 빼 먹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

거의 매 장면마다 등장하는 잭 니콜슨은 기티스가 뿜어내는 냉정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우스꽝스러움을 예의 그 속알머리없는 마빡 카리스마와 빛나는 반창고로 감싼 코에 담아 열연함으로서 험프리 보가트가 창조한 느와르 탐정 역의 전형을 최초로 넘어선 배우라는 찬사를 받았다.

에버린 멀웨이 역의 페이 더나웨이(Faye Dunaway)역시 부자집 자재의 품위를 잃지 않으며(이영애의 그것과는 다른) 요부의 도발미까지 풍기는 균형잡힌 연기로 느와르의 팜므 파탈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반전효과와도 맞먹는 부도덕한 관계로 희대의 아버지 상을 보여준 노아 크로스는 <말타의 매>의 감독인 존 휴스턴이 맡았다. 이를 두고 의미부여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평론가 선상들께서는 그가 등장하였다는 점에 착안 <차이나타운>을 소개하기를 ‘고전 필름 느와르의 마감’이라는 마빡기사로 신 느와르의 출현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기가 막힌 작문솜씨를 뽐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각본과 뛰어난 연출력, 인상적인 영상, 배우들의 열연을 고루 갖추고 있는 <차이나타운>은 그 다음해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음에도 고작 로버트 타우니만이 각본상을 수상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꼴려오네 패밀리들이 그들보다 강했던 탓이다.  

그래도 <차이나타운>이 주도한 신 느와르의 흐름은 그 후 변주영화들의 득세를 불러왔다. 그 중에서도 탐정이라는 소재는 짜바리로 대체되어 짭새 장르의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요부 역시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되어 많은 남성캐릭터들의 오줌보를 지리게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정통 하드 보일드의 플롯을 갖춘 영화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어서 그것을 만나기까지 하드 보일드 팬들은 2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영화가 뭔지 궁금하신가, 그럼 몇 주만 기둘려 보시라. 더 이상의 영진공 업무중단은 없을 터이니 곧 그 실체가 밝혀질 것이다. 그 때까지 고전영화 많이들 찾아 좀 보시라.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


당해 영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로맨틱 코미디다. 감독도 <왓 위민 원트>를 만든 낸시 마이어스. 그래서 당 영화는 이 장르가 그렇듯, 개와 고냥같은 쥔공 남녀가 첨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아웅다웅하다가 뭔가를 계기로 알콩달콩 사랑을 이루고 중간에 결별을 빙자한 갈등을 겪은 후 끝내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고 만다는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러나 이렇게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인 <사랑 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이 결정적으로 이 장르와 차별을 긋는 지점이 있다. 바로 해리와 에리카 역으로 등장하는 잭 니콜슨과 다이앤 키튼. 이미 환갑의 나이를 넘긴 머리 벗겨지고 주름살 자글자글한 할배, 할매가 주인공이라는 소리.

그래서 당 영화의 관건은 얼굴 팽팽하고 쭉빵한 젊은 배우가 아닌 이들 노인네를 가지고 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추구하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로맨스를 펼쳐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리고 당 영화는 이런 주위의 우려와 불안에 아랑좃 하지 않고, 늙었지만 돈 많고 젊은 여자가 줄줄이 비엔나로 따르는 해리와 똑같이 늙고, 성공한 처지지만 동년배 남자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에리카 이 두 노인네의 상반된 상황을 충돌시키면서 이들의 로맨스를 재미나게 연출, 관객의 입장료 7,000원(혹은 8,000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대로 충족시켜줌이다.

사실 두 老배우의 얼굴을 뜯어먹는 재미는 없지만 해리와 에리카가 펼치는 로맨스는 재미를 뛰어넘어 귀여운 경지에까지 이른다. 어느 정도냐 하면 잭 니콜슨의 똥꼬가 영화 중간 특별 출연하는데 그것만 봐도 버럭 웃음이 나올 정도라는 것까지만 밝히겠다.

물론 포스터에 박혀있듯이 감독은 영리하게도 한 얼굴, 한 몸매하는 키아누 리브스와 아만다 피트를 등장시켜 쥔공 배우가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안배하는 세심함을 과시한다. 해서, 아무리 늙은 배우가 뭔 짓을 한들 로맨틱 영화에 젊은애들 안나오면 그게 무슨 재미냐며 경로사상을 개무시하는 관객제위께서는 당 영화를 관람해도 무방할 것이라 판단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당 영화의 제목이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인가, 하는 궁금점이 이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겠다. 노년의 남녀가 나누는 사랑이라 빠굴을 할 수 없어서 고게 아깝다고 이케 지은 걸까? 아니다. 당 영화 로맨틱 코미디 영환데 어찌 빠구리가 빠질 수 있으리요.

이는 사랑을 나누는 커플들이 상대방에게 차이는 것을 염려, 깊은 관계를 유지하지 몬하고 빠굴만 즐기다 헤어지는 작금의 인스턴트 사랑을 겨냥한 제목으로, 노년의 로맨스라는 점 빼면 별 거 없는 이야기 자체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설정이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당 영화는 장르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맞춰 가야하니 제목이 말하는 부분은 겉핥기식으로 제시될 뿐 그렇게 깊이 있는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스토리 자체도 로맨틱 코미디라면 능히 지켜줘야 할 해피엔딩의 결론을 따르다보니 뒤로 갈수록 쥔공이 헤어졌다 다시금 결합하는 결말부가 급작시레 진행이 되어 뜬금없이 다가오는 감이 없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당 영화를 관람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아까운 것이다. 특히 지금 연애질에 한창인 커플들일수록 당 영화를 놓치면 아까운 것임은 더욱 그렇다.

그런 전차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덧붙여,
당 영화에 쥔공으로 출연하는 다이앤 키튼. 1946년 생이니 올해 나이가 쉰 여덟. 근데 영화 속에 나오는 그녀의 몸매는 쉰 여덟이 아니다. 오히려 딸로 등장하는 아만다 피트보다 더 호리호리빵빵한 것이… 몸짱 아주매 저리 가라다. 앗싸!

<8명의 여인들>(8 Femmes)


<스위밍 풀>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프랑소와 오종의 작품인 <8명의 여인들>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처럼 폭설로 고립된 집안에서 쥔공인 8명 여인들의 남편이자, 아빠이자, 사위이자, 형부이자, 오빠이자, 주인이자, 불륜 상대가 어느날 아침 살해된 채 발견되자 이의 범인을 찾기 위해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영화다.

이처럼 당 영화는 살해범을 찾는다는 추리구조가 뼈대를 이루고 있음으로 해서 영화 내내 단서가 하나하나 드러나며 사건에 대한 본질에 다가가고 있음이다.

그런데 감독 프랑소와 오종은 전작들을 통해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을 즐겨해 왔던 대로 당 영화에서도 역시 무대와 쥔공들의 모습을 색깔 있게 치장한 뒤 죽은 남자와 관련된 8명의 여인들의 속내에 감추어진 위선을 까밝히고 있다.

그런 관계로 당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쥔공들의 속사정을 밝히기 위한 인물묘사에 공을 들이는데 그 특징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짬뽕하여 하나로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보다 이를 풀어 가는 감독의 재치 있는 연출력이 돋보이는 당 영화는, 일단 기본적으로 추리극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된 장소에서 극이 진행되고 영화의 마지막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모여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연극적인 요소도 지닌다. 무엇보다 압권은 극 중간에 불쑥불쑥 튀나오는 노래로, 쥔공들이 자신의 심정을 담은 노래를 각자 한 곡씩 떙긴다는 점에서 뮤지컬까지 오지랖을 넓히고 있다.

게다가 감독은 원래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조지 큐커 감독의 <여인들>을 리메이크하려다가 판권문제가 여의치 않아 당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꽃으로 인물을 상징하는 도입부나,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설정 등 <여인들>에서 많은 부분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프랑소와 오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물들간의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동성애, 근친상간과 같은 악취미적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고 있으니, 이처럼 당 영화는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이 장르, 저 장르 삼팔선 넘나들 듯 겁대가리없이 크로스 오버하는 자유로움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 결과, 당 영화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유쾌하고 발랄하며 밝은 인상을 풍기고 있음이다. 물론 여기에는 제목 그대로 8명의 여인들이 뿜어대는 매력이 한 몫 하는 것은 당근이다.

특히 노년부터 신예까지 우리로 치자면 선우용녀에서부터 송혜교까정 각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종합선물세트로 출연해 맘껏 기량을 과시하는데 이런 그들을 한데 어우른 솜씨는 바꿔 말해 감독의 현장 장악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소리니, 당 영화 <8명의 여인들>은 여배우들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그 보다는 오종 감독의 체취가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음이다.

하지만 한가지, 당 영화가 이러코롬 범인이 누군가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보니 별 임팩트없이 범인의 정체 및 살해 동기가 밝혀지는 결말은 긴장감이 빤쓰줄 끊어지듯 탁 풀어져 버리는 바람에 관객에게 미치는 힘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그런 전차로 본 특위는 다른 건 다 좋았는데 결말 매조질이 시원치 않았던 관계로 당 영화를 베스트 주녀에 봉한다.

덧붙여,
당 영화에는 <스위밍 풀>에서 쭉빵한 몸매로 뭇 남성관객의 환호성을 받은 뤼디빈 사니에르가 출연하고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찾아보는 것 역시 당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 중 하나다. 아마 쉽게 알아차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스쿨 오브 락>(School of Rock)


젊은아덜의 파릇파릇 푸레쉬한 러부질을 수려한 화면빨과 재치 만빵의 대사로 잔잔시럽게 풀어내 뭇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냈던 <비포 선라이즈>의 감독 리처드 링클래이터. 이번엔 가족영화를 빙자(?)한 포복절도형 코미디 영화 한 편을 소리 소문도 없이 들고 나왔음이다. 제목하야 <스쿨 오브 락>.

어디 내놓으면 별 약빨 못 받을 거 같은 촌시런 외모와 똥배 가득 덩치로 인해 자기가 맹근 롹 밴드에서 쫓겨난 듀이(잭 블랙 분). 어찌저찌 이러쿵저러쿵 어절씨구 해설랑 선생을 사칭해 핵교에 들어간 듀이는 범생적 사고관에 젖어있는 초딩들을 롹 스피릿 충만한 ‘스쿨 오브 락’ 밴드의 연주자로 싸그리 날라리화 시킨다.

그래서 당 영화는 우리의 쥔공 듀이가 통기타, 피아노, 첼로에 익숙한 자신의 반 학생들을 전기기타, 전자음반, 베이스로 집중, 조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끼고 자빠라짐이 압권인데 그 태풍의 눈엔 방금 막 <이나중 탁구부> 출연을 마치고 나온 듯한 인상의 잭 블랙이 있음이다.

이미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내게 너무 가벼운 그녀>를 통해 뭔가 크게 한 방 터뜨려 줄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잭 블랙은 당 영화에서 예의 그 전신을 흐느적거리는 오징어적 움직임을 절도있게 승화한 오도방정으로… 뭔 소린지 감이 안 오겠지만 우쨌든 이럴 정도로 정신없이 관객을 우낌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이런 예술적인 연기 역시 이야기가 받쳐줘야 최대치를 발휘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롹을 영화 전체 베이스로 깔고 있는 당 영화는, 열린 음악회式 고리타분한 정규교육을 롹으로써 유쾌상쾌통쾌하게 똥침 쑤신다는 재미난 얘기 속에 루저 스피릿과 저항 스피릿 등 그 바닥 정서를 자연스럽게 녹아내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이처럼 당 영화가 보수적인 가치에 마구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영화의 탈을 쓰고 있다보니 ‘막판 감동 한 판 과하게 선사하기’라는 가족영화의 룰을 그대로 따르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해서 결말이 약간 민망하긴 했지만서도 ‘일등이 최고의 마빡은 아니다’라던가 ‘생긴 거보다 더 중요한 마빡은 재능’이라는, 나름대로 당 영화가 내세우는 교훈은 이야기의 설정을 비추어 보건데 꽤나 구여운 맛이 있었더랬다.

이보다 문제는 당 영화에 거창하지는 않지만 롹의 역사라 할 만큼 이름만 대면 대부분 알아 먹을만한 롹 이야기와 밴드, 노래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데이빗 게펜’을 ‘데이빗 게핀’으로, 불후의 밴드 핑크 플로이드의 ‘Great Gig in the Sky’를 ‘하늘의 궁전’으로 삑싸리 내는 등 번역이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게다가 당 영화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또 하나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롹과 관련한 소소한 꺼리들인데 롹에 문외한이거나 관심이 없을 경우, 영화를 이해하는데 지장은 없지만 이와 같은 잔재미를 캐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스쿨 오브 락>은 큰 영화가 극장가를 독점하고 있는 와중에서 마치 흙 속의 진주처럼 그 재미를 반딱반딱 빛내고 있는 작품인 바, 본 특위는 당 영화를 베스트 주니어에 봉한다.

덧붙여,
많은 영화들이 안면몰수하고 조기 퇴장하는 관객을 붙들어 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작금의 풍토에서 당 영화는 마구 돋보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크레딧이 끝까정 올라가는 순간까지 보는이들을 붙들어 매고 있음이다. 아무렴 붙잡아 두려면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