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서독제] <거미줄>

spiderweb

웃고 떠드는 학생들, 교실 풍경은 일상적이다. 이때 심각한 표정의 담임 선생님이 교단에 서자 일순 분위기는 심각해진다. “여기서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괴롭힌 적이 있는 사람 모두 복도로 나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쁘다. 그 위로 흘러나오는 어느 학생의 내레이션. ‘00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다며 때렸다’, ‘ㅁㅁ가 강제로 내 입안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게 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등등 괴롭힘을 당한 사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복도에는 학생들로 가득 찬다. 선생님이 체벌을 가하려 하자 어느 학생이 묻는다. “근데 선생님은 정말 모르셨어요?”

정시온 감독의 <거미줄>은 한 학생을 괴롭히는 일명 ‘왕따’의 카르텔이 특정 몇 명의 모의가 아니라 선생님을 포함해 교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괴롭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방관한 학생도 가해자로 몰리는 상황은 왕따가 광범위하게 벌어지면서도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경위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절벽까지 몰린 피해 학생이 도움을 호소할 유일한 대상은 선생님일 터. 하지만 ‘소소한 애들 다툼’으로 일관하는 선생님의 반응은 괴롭힘의 카르텔이 ‘거미줄’처럼 촘촘해질 수밖에 배경의 정점으로 작용한다. 엔딩 크레딧의 말미에 나오는 내레이션이 의미심장하다. “XX가 내가 자기를 무시했다며 핸드폰을 뺏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마지막 소통 줄마저 끊긴 피해 학생의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서울독립영화제 2016
메인 카탈로그
(2016.12.1~12.9)

[2016 서독제] <연애>

yeanae

“연애하러 갈까?” 청춘 남녀가 ‘썸’ 타는 중 했을 얘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콩닥콩닥 뛸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인 문제와 결부되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천댁으로 불리는 화자는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연애’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이를 시기한 업계(?) 동료의 고발로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다. 이때 단골 오빠인 중원이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에 대한 답례로 중원의 집에 따라가 연애를 하던 화자는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배에 차는 오줌 주머니를 보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서둘러 중원의 집을 떠나면서도 화자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중원의 건강을 걱정해 전화를 걸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화자는 불안해진다.

김석영 감독의 <연애>는 최근 한국영화가 주목하는 소재 중 하나인 ‘박카스 할머니’를 주인공을 내세워 절박한 생존의 문제와 더불어 죽음을 결부한다. 이를 노인 복지와 가족 붕괴와 같은 거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신 화자와 중원의 사연에 밀착해 이들의 절박한 사연을 노출한다. 누구에게는 사랑일 관계가 검은 거래로 전락할 때, 특히 그 주체가 노인과 같은 약자일 때 이 사회는 쉬쉬하거나 부러 외면해왔다. <연애>는 화자와 중원의 우물 속 심정을 적나라하게 파고들어 은밀한 공간에 카메라를 갖다 대기를 서슴지 않는다. 극 중 내용과는 역설적인 제목이 주는 심정적인 거리감만큼이나 <연애>의 내용은 낯설지만, 그러므로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온다.

 

서울독립영화제 2016
메인 카탈로그
(2016.12.1~12.9)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Yourself and Yours)

yourselfyour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다. 이 문장에서 방점은 ‘홍상수’다. 지금 세간의 관심은 홍상수의 신작보다 홍상수 자신에게 모인다. 그 이전의 스캔들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는 문제의 스캔들과 관련해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극 중 여주인공의 이름에 ‘민’이 들어간다는 정도. 그러니까, 아무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민정이라는 이름의 여인

영수(김주혁)는 화가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근데 영수의 마음은 다른 데 가 있다. 친구 중행(김의성)으로부터 여자친구 민정(이유영)이 술을 마시다가 어떤 남자와 싸움에 연루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영수는 술을 너무 좋아하는 민정에게 술 좀 줄이라며 약속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를 깬 그녀가 괘씸하다. 민정이 집에 들어오자 영수는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단호하다. 절대 술 마시지 않았고 부끄러운 일 한 적 없다며 영수와 대립각을 세운다. 그러다 민정은 선언한다. 우리 당분간 떨어져 지내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재미난 건 이 지점부터다. 영수와 헤어진 후 우리가 민정으로 알고 있는 그녀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남자들이 차례로 접근한다. “민정 씨 여기서 뭐하세요?”, “저 민정이 아닌데요”, “민정 씨 맞는데”, “민정이 아니라니까요” 실랑이를 벌이다 그중 한 남자인 재영(권해효)에게 이렇게 실토한다. “사실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저와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민정으로 보이는 그녀는 카페에서 만난 남자들과 차례로 안면을 튼 후 술을 마시러 간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가 민정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여러 남자를 만나는 문란한(?) 연애 이력의 소유자라고? 안 그래도 영수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비난하며 영수의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다만,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홍상수의 영화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이런 식의 전개가 얼마나 게으른 것인지 ‘당신자신’의 빈약한 상상력을 거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홍상수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지금 한창 뜨고 있는 연남동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 속 동선은 비교적 좁은 편이다. 영수의 집과 민정의 집이 위치한 골목과 민정이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인식되는 그녀가 자주 찾는 카페와 술집, 그리고 ‘연트럴파크’로 불리는 연남동 경의선 숲길 일부가 전부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동네 사람들에게 시시각각 목격되고 종종 영수에게로 전달된다. 영수의 반응은?

지인의 얘기를 듣고 그 즉시 민정이 다른 남자와 만나는 현장을 습격할 법도 한데 영화는 굳이 그런 장면에 상영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떠난 현장에 뒤늦게 찾아와 다시금 민정의 발자취를 찾아서 방황하는 식이다. 그러다가 영화의 말미에 그녀를 찾은 영수는 민정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과의 말을 전한다. 그녀의 반응은? “민정이가 누구예요?”

그 누구의 그녀도 아닌 당신 자신의 그녀

민정과의 문제에 앞서 영수를 괴롭히는 건 주변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평가다. 중행이 대표적이다. 그는 영수에게 민정과 만나는 것이 의외라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과 만나 걱정스럽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그러면서 “아 뭐 나야 모르지. 내가 직접 본 건 아니니까”라고 말하며 다른 남자와 싸웠다는 민정의 소식을 전한다. 중행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니 신빙성은 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영수의 입장은 좀 다르다. 자신의 여자가 관계된 이야기이니 의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는 거다.

이에 대한 민정의 반응은 한결같다. “저 자신한테 수치스러운 짓 한 적 한 번도 없구요!” 그렇다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민정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영수가 아닌 다른 남자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로 그녀는 민정이 아닌 걸까? 도대체 영화 초반 영수와 다투던 민정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어쩌면 민정 혹은 민정으로 오인하는 그녀는 상상의 존재가 아닐까?

민정과 헤어진 후 영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의 집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민정은 영수를 반갑게 맞아주던가 또는, 집으로 들여 그간의 아쉬움을 털고 재회를 약속한다. 이 둘에게는 잘 된 게 아닌가? 아니다. 이는 오로지 영수의 상상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관객이 이와 같은 장면에서 잠시 착각에 빠지는 이유는 영화가 현실과 상상의 톤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까닭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영수가 중행으로부터 민정의 부정적인 평가를 들은 후 이어지는 장면들의 편집이 예사롭지 않다. 민정으로 불렸던 그녀가 재영을 만난 에피소드 이후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영수의 모습이 곧바로 이어진다. 어쩌면 영수는 중행의 말을 듣고는 민정이 자신과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벌이는 최악의 상황을 비몽사몽간 상상했을지 모른다. 민정이 돌아오자 잠에서 깬 영수가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했던 배경이었을 터다. 요컨대, 영화 초반 민정을 놓고 벌인 영수와 중행의 논쟁 이후 민정이 다른 남자들과 갖는 술자리는 사실이 아닌 영수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심경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남자들을 돌고 돌아 영수와 재회한 그녀는 영수의 집으로 향한다. 그때 둘이 함께 침대에 누운 구도는 영화 초반 영수와 민정이 말다툼하는 구도와 똑같다. 이번만큼은 싸우는 대신 서로에 대한 신뢰를 드러낸다. 영수는 말한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 믿을 겁니다.” 이에 그녀는 이렇게 화답한다. “고마워요, 당신이 당신인 게” 주변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둘 만의 관계에 집중하며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가자는 것. 영수와 민정(?)이 장고 끝에 내린 현명한 결론이다.

인간의 감정은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아 초현실을 끌어들이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마냥 현실인 적이 있었던가. 우리의 삶은 늘 현실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마법이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처럼 홍상수의 영화는 현실의 여러 면을 재창조해 마법의 순간을 선사한다. 그래도 홍상수의 영화보다 홍상수의 스캔들에 더 관심이 있다면 한 가지 솔깃한 정보가 있다. 홍상수의 다음 영화에는 ‘그녀’가 출연한다. 이 정도면 조금 만족하시려나.

 

시사저널
(2016.11.5)

<걷기왕>(Queen of Walking)

kingofwalking

청춘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발열해야 하는 청춘의 에너지가 무한경쟁 시대에 빛을 잃다 보니 이들에게 힘을 주겠다며 경쟁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 ‘네가 가는 길이 정답이야’, ‘힘내라! 청춘!’ 등등.

위로 혹은 응원하겠다는 진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말들은 종종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불편하다. ‘나 때는 말이야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었어’, ‘요즘 젊은이들은 열정이 부족해’와 같은 속뜻이 말 줄임 되어 되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내고는 한다.

그들의 말마따나 죽어라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하는 걸까.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영화가 있다.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온다. <걷기왕>이다. 속도가 인생의 성패를 가를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와 역행하는 제목만으로도 위안을 받는 기분이다.

걷기를 잘해서 걷기왕

‘걷기왕’은 걷는 것에 독보적인 인물을 지칭한다. 그게 누구냐, 바로 만복(심은경)이다. 만복이는 걷는 데 탁월한(?) 신체 조건을 타고났다. 각종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하면 멀미를 하는 까닭에 걷지 않으면 도저히 이동할 수가 없다. 집에서 학교까지 두 시간 거리. 그러니까, 만복이는 집과 학교를 왕복하느라 하루에 기본 네 시간은 걷는다.

만복의 걸음에는 따라올 자가 없다. 그녀의 담임 선생(김새벽)이 무모하게 가정방문을 하겠다며 만복이를 따라나섰다가 만신창이 신세가 되었을 정도다. 그때 담임 선생의 머릿속에서 ‘번쩍’하는 게 있다. “만복아 넌 걷는 걸 잘하니까 경보를 해보는 게 어떠니?”

만복이는 재미있을 것만 같아 그 길로 육상부에 들어가 경보 선수가 된다. 전국체전에서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 같지만, 아뿔싸! 전국체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야만 한다. 당연히 버스에 탔다가 멀미 증세를 보인 만복은 예선 통과는커녕 경기시간을 지키지 못해 실격을 당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복이는 선천성 멀미 증후군을 극복, 그 무시무시한 버스를 타고 전국체전이 열리는 경기장에 도착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1등을 한다? 제작비가 수십억 원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라면 본전 생각 때문에 모험이 두려워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전개를 따랐겠지만, <걷기왕>은 저예산의 독립영화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결국 상상력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래서 <걷기왕>은 화려한 볼거리 대신 우리가 쉽게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와 메시지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스포일러를 무릎 쓰고 결론을 밝히자면, 만복은 강화도에서 서울까지 1박 2일 동안 걷고 또 걸어 경기장에 도착해 보무도 당당히 경기에 나선다. 하지만 레이스 도중 경쟁을 포기한다. 경쟁자들이 빠르게 걷거나 말거나 만복은 트랙 위에 벌러덩 드러누워 손으로 카메라 액정 표시를 만들어 보인다. 그리고 그곳으로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여유를 누린다.

이런 게 바로 걸음이 의미하는 느림의 철학이다. 빠르게 달린다는 건 앞으로만 향한다는 의미다. 경주마가 그렇다. 눈의 양 옆을 가리고 시야가 오로지 앞을 향하게만 하여 결승점을 향해 무조건 달리도록 유도한다. 지금 우리네 삶이 경주마와 같다. 1등만이 가치의 전부인 양 성공을 연호하고, 상위권 대학만을 바라보고, 대기업 취직에 목을 매고, 고액 연봉을 받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린다. 1등과 성공만을 향한 경주마를 양산하는 사회에서 걸음의 가치는 쉽게 무시당하고 놀림감으로 전락한다.

걸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

경쟁에 매몰되어 수만 가지의 다양한 가치를 놓치고 사는 삶이란 얼마나 황폐한가. 만복이처럼 앞을 향해 뻗은 트랙을 벗어나 주변을 둘러 보면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하게 다가온다.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를 보면 돈이 나오냐고? 밥이 나오냐고? 그런 한적한 광경을 보며 누군가는 파일럿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멋진 시상을 떠올리고,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영화에 대한 의미 부여의 글을 쓰기도 한다. 만복이처럼 경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다.

삶의 다양성이 바로 이런 것일 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삐리’ 만복이가 벌써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깨닫다니 놀랠 노자로다, 생각하는 기성세대가 있다면 아직 청춘을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청춘은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열변하는 기성세대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삶의 구석구석을 탐험하고픈 욕망이 강하다. 돈과 성공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아는 세대라는 얘기다. <걷기왕>을 연출한 백승화 감독은 그런 청춘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러 자신의 경험과 의견으로 <걷기왕>을 떠올렸다.

백승화 감독은 <걷기왕>을 연출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기성세대들이 원하는 청춘의 성장 조건이란 끝없는 도전과 자기계발, 꿈과 성공을 향해 달리는 것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가 과연 목숨 걸고 열심히 하면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을까?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고 하지만, 실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이 궁금했다. 이런 고민이 뛰지 않는 청춘, 공백의 청춘, 느린 청춘들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그러니까, 백승화 감독은 ‘청춘이니까 더 열심히 뛰어’와 같은 충고보다 ‘힘들면 언제든 걸어도 좋아’라는 응원과 위로의 의미에서 <걷기왕>을 만들었다.

극 중 만복처럼 큰 야심 없이 소박한 이야기와 느릿한 전개로 무장한 <걷기왕>은 패기, 열정, 간절함, 노력과 같은 단어를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기성세대를 향한 청춘의 응답이라고 할 만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걷기왕> 캐릭터들의 후일담이 보너스처럼 전해진다. 경보를 그만둔 만복은 한때 경쟁상대였던 육상부 선배와 함께 발맞춰 도보여행을 즐긴다. 그런 만복의 행보는 굳이 꿈이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자신만 만족한다면 괜찮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달한다. 이를 절대적인 양 강요하지 않는 <걷기왕>의 태도는 지금의 청춘이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말없이 웅변한다.

 

시사저널
(2016.10.22)

<맨 인 더 다크>(Don’t Brea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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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액을 숨긴 노인이 있다. 인적이 드문 집에서 혼자 산다. 무엇보다 앞을 보지 못한다. 딱 한 번 눈감고 이 집을 털면 인생역전을 할 것만 같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10대 빈집털이범 록키(제인 레비)와 알렉스(딜런 미네트)와 머니(다니엘 조바트)는 각자의 이유로 한탕을 준비한다. 머니는 도둑질이 그냥 생활인 친구다. 반면, 록키는 딸과 함께 누추한 디트로이트를 떠나 캘리포니아에서 새 출발을 꿈꾼다. 록키를 사랑하는 알렉스는 그녀의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합류한다. 이제 실행에만 옮기면 끝. 거액을 손에 넣으려던 순간,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고 예상치 못한 반격을 가해온다.

<맨 인 더 다크>는 <이블데드>(2013)의 성공적인 리메이크로 공포물 연출에 일가견이 있음을 멋지게 증명한 페데 알바레즈 감독의 신작이다. 핏빛 난무한 고어 이미지로 <이블데드>를 완성한 페데 알바로즈는 이제 공포물의 전형적인 플롯을 비트는 오리지널 스토리를 선보이고 싶었다.

<이블데드>를 비롯해 단편 시절에도 함께 했던 작가 로도 사야구메즈(Rodo Sayagues)와 페데 알바레즈는 캐릭터 설정의 기준 하나를 잡았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관객이 헛갈려할 만한 설정을 영화 끝까지 밀어붙일 것. 이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가 결국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할리우드 공포물의 공식을 깨려는 의도였다.

그에 걸맞게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눈먼 노인은 신체적인 핸디캡에도 불구, 자신의 집을 털려는 10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공격력을 선보인다. 일방적인 피해의 대상으로 보이던 노인이 가해자로 돌변하는 순간, 관객은 누구의 입장이 올바른지 혼란에 빠진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탈출하겠다고 안간힘 쓰는 아이들이 참 불쌍하구나, 그럼 앞을 못 본다고 범죄에 노출된 노인의 처지는 안쓰럽지 않나. 모두에게는 다 약점이 있는 법이다. 노인이라서, 여자라서 쉽게 봤다가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마련이다. <맨 인 더 다크>의 원제처럼 ‘숨도 못 쉬는 Don’t Breathe’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맨 인 더 다크>는 인상적인 공포를 선사한다.

씨네21
(2016.10.1)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sully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진이 발생했다. 자연재해라 어느 정도 피해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후의 대처가 문제였다. 국민안전처의 홈페이지는 불통이었고 국가재난 주관 재난 방송사는 신속한 정보제공과는 무관한 보도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국민은 우왕좌왕하며 불안에 떨었다.

재난 안전 컨트롤 타워의 부재로 한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풍경은 익숙하다. 외양간을 고칠 때도 되었건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시스템은 이번에도 작동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할리우드 영화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하 ‘<설리>’)을 보고 있으면 한국사회에 부재한 그 ‘무엇’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곳에는 책임감이 있었다

2009년 1월 15일 미국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US항공 1549편 여객기가 이륙 직후 새떼와 충돌한다. 양쪽 엔진에 손상을 입은 여객기는 뉴욕 도심 위를 아슬아슬하게 선회하다 센트럴 파크 인근 허드슨 강에 비상 착륙을 시도한다. 결과는? 강에 불시착한 비행기 탑승객 155명 전원이 생존했다. 전 세계 언론은 이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며 기적을 이끈 여객기의 기장에 주목한다.

그의 이름은 체슬리 ‘설리’ 설렌버거(톰 행크스)다. 설리는 언론에 의해 영웅으로 대서특필되었지만, 미국의 국가 운수안전위원회는 기장의 선택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며 그를 청문회에 제소했다. 비행기 사고 당시를 자체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보니 인근 공항으로 무사 회항이 가능했다는 것. 국가 운수안전위원들은 설리를 상대로 위험천만하게 강에 불시착할 이유를 따져 묻는다.

<설리>를 연출한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세계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이오지마 섬에서 발생한 전투를 각각 미국군과 일본군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상 2006)를 연출한 적이 있다. <설리>에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엔진 사고 이후 설리 기장이 조종석에서 취한 일련의 행동을 두 차례 반복한다. 사고 당시 실시간으로 한 번, 청문회의 시뮬레이션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또 한 번 제시하며 설리의 판단이 옳았는지 관객이 결정토록 한다.

결정이 어렵지는 않다. 설리의 판단은 유효 적절했다. 국가 운수안전위원회가 설리의 판단에 딴죽을 걸었던 것은 엔진 사고의 책임을 그에게 넘겨 국가가 보상해야 할 액수를 줄여보자는 심산에서였다. 국가 운수안전위원회는 설리의 판단에 대해 이렇게 걸고넘어진다. 엔진 사고 즉시 항로를 인근 공항으로 잡았으면 무사 착륙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허드슨 강으로 향했나요?

“우린 모르고 당했습니다. 누구도 우리에게, 역사상 최저고도에서 양쪽 엔진을 잃을 거라고 알려주지 않았죠” 설리의 답변이다. 여기에는 행간이 숨어있다. 국가 운수안전위원회의 지적처럼 엔진 사고와 동시에 인근 공항으로 향했다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런 비상 상황에서, 더군다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즉각적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리가 유일하게 믿었던 건 40년의 비행 경험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위축 되기를 잠시, 몸과 마음을 추스른 설리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감에 의존, 강에 비상 착륙하는 것만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확신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도 모두를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은 설리가 오랜 비행시간 동안 터득한 기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설리는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후 150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 모두가 무사히 탈출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행기 밖으로 몸을 피신했다.

이곳에는 리더가 부재했다

설리가 청문회에 참석하자 그를 지지하는 동료는 그에게 힘을 심어주며 이런 식의 얘기를 한다. “비행기와 관련해서는 가장 기분 좋은 소식이었어요.” 안 그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청문회에 출석하기 전 설리가 빌딩 밖을 내다보며 뉴욕 도심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상상으로 진저리치는 장면을 부러 노출한다.

여전히 대다수의 미국인은 9.11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와 같은 정신적 외상이 더욱 심해지는 상황을 막는 것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 여객기가 허드슨 강으로 하강하는 것을 지켜본 뉴욕 시민들은 9.11의 악몽을 떠올리며 긴장했지만, 테러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안도했다. 무엇보다 9.11 이후 2008년도에 발생한 금융 위기를 비롯해 안 좋은 뉴스로 가득했던 미국인들에게 ‘허드슨 강의 기적’은 희망을 주는 일이었다.

할리우드 작품이지만, <설리>를 보는 한국인의 심정은 남다르다. 영화가 단순히 영화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안전과 관련한 비극이 한국에서는 현재형으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2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인양되지 않은 채 바닷속에 수장된 상태다. 침몰 원인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희생자 가족을 향해 이제 그만하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진은 또 어떤가. 강도 5.8의 지진이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4.5의 여진이 다시 경주를 강타했지만, 안전에 대한 조치는 단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설리>에 주목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지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인물은 정말 뛰어난 위인입니다. 영화에서 설리의 행동을 보는 것 자체로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얘기를 전해 들은 실재 인물 설리는 공을 구조 활동에 이바지한 모든 이들에게 돌렸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신들이 할 일을 대단히 잘해냈어요. 그게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한 거죠. 단결된 모습이 있었기에 그날의 비행을 항상 잊지 않으려고 해요.”

허드슨 강의 기적은 설리를 비롯하여 탑승객 전원의 침착한 대응과 시민들의 협조로 이뤄진 것이었다. 첫 구조선은 4분도 채 되지 않아서 도착했다. 1,200여 명의 뉴욕시 구조대원들과 해안경비대는 잠수부를 동원해 구조작업에 나섰다. 구조용 보트와 130명의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7대의 출근 보트도 구조에 합류하여 승객들을 배로 옮겼다. 이는 불과 24분 동안 이뤄진 일이었다. 더는 뉴욕에 비극이 생기기를 원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설리를 리더로 안전이라는 목표 아래 책임감으로 하나되어 기적을 일구었다.

<설리>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뉴스를 시청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기상청의 지진 대응 매뉴얼 중에는 ‘밤에는 장관을 깨우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는 보도였다. 이런 뉴스도 있었다. 잇따라 발생한 경주 지진 관련 정부의 대응이 부실하다는 반응에 대해 국민안전처 장관은 ‘재난대비 매뉴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는 무책임한 발언으로 국민의 분노를 불렀다. 리더들이 가장 먼저 빠져나간 한국호(號)에서 우리의 안전은 대체 누가 책임지는 것일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설리>가 우리에게 판타지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사저널
(2016.9.24)

<범죄의 여왕>(The Queen of Crime)

crimeofthequeen

극장가는 블록버스터 천지다.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찍었고 <인천상륙작전>과 <덕혜옹주>와 <터널>이 순서를 바꿔가며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나눠갖고 있다. 성수기 시장이란 게 그렇다. 큰 영화 등쌀에 작은 영화가 기를 펴기 힘들다. 이런 작은 영화 보릿고개 시기에 겁 없이 개봉하는 작은 영화가 있다. 이요섭 감독의 <범죄의 여왕>이다.

누구의 엄마도 아닌 모두의 엄마

미경(박지영)은 시골에서 미용실을 운영한다. 아줌마들 머리를 볶아주는 와중에 ‘야매’ 성형시술도 병행한다. 서울 신림동에서 고시를 준비 중인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다. 아들이 검사만 된다면야 못할 게 없는 한국의 엄마라지만, 들어주기 힘든 요구에 직면한다. “엄마 수도 요금 수납하게 120만원 보내줘”

12만원도 비싼데 120만원? 엄마 왈, “아들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게, 너는 며칠 남지 않은 사법고시 공부에만 집중해.” 그냥 돈이나 보내달라는 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림동 고시원으로 상경한 미경. 아들에게 오랜만에 밥 한 끼를 차려준 즉시 아들의 옆 방부터 시작해 고시원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닌다. 그리고 내린 결론, “범인은 이 안에 있어”

억울한 누명을 쓴 아들을 위해 엄마가 나서는 이야기는 봉준호 감독이 <마더>(2009)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익숙한 콘셉트임에도 <범죄의 여왕>이 새롭게 느껴지는 건 극 중 ‘마더’ 미경이 보여주는 모성애가 단순히 자기 자식을 향한 맹목적인 희생이 아닌 고시원 모두에게로 향하는 관심인 까닭이다.

사실 고시원은 지금의 청년 세대를 이야기할 때 외면해서 안 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누군가는 성공해야만 인간 취급을 받는 한국사회에서 고시 합격을 위해, 어떤 이는 최저 임금으로는 마땅히 살 집을 찾지 못해 최소한의 돈으로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2~3평 남짓한 박스 같은 공간에서 적게는 몇 달, 길게는 10년 넘게 청년 시절을 저당 잡히고 있다.

지금의 청춘이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중요한 공간임에도 메이저 영화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공간 특성도 그렇거니와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사연이 어둡다는 편견 때문이다.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혹할 만한 배경과 캐릭터와 이야기가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제작사의 입장이다. 고시원과 같은 장소를 가지고서는 밝은 이야기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지금 한국영화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청춘영화의 부재는 그와 같은 기성의 무관심이 작용한다.

<범죄의 여왕>이 고시원을 다루면서도 엄마 역할을 중요하게 다루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경은 엄마 중에서도 주변에 대한 관심, 그러니까 ‘오지랖’이 넓은 캐릭터다. 사법고시가 며칠 남지 않아 모두가 예민한 가운데서도 아들의 수도 요금 120만원의 실체를 밝히겠다며 엄마는 고시원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안녕하세요. 404호 엄마입니다. 다들 공부하느라 힘드시죠? 모두들 수도 요금을 어떻게 내시나요? 함께 모여 얘기합시다. 다들 제 자식 같아서 밥 한 끼 먹이고 싶네요.’ 이 글에서 방점은 ‘밥 한 끼 먹이고 싶네요’다. 우선은 자기 자식의 수도 요금을 해결하기 위해서이지만, 밥을 대접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아들 이외의 타인을 향한 또 다른 관심의 표명이다. 이들에게서 어떻게든 호감을 얻어 사건 해결의 단서를 얻겠다는 것. 이는 곧 고시원과 엄마와 같은 한국영화가 그동안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든 관객을 유혹하겠다는 이요섭 감독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거죠

방에 콕콕 처박혀 나오지 않는 고시원 사람들을 삼겹살로 유혹하려는 미경처럼 이요섭 감독은 익숙하지 않은 캐릭터와 배경을 관객들이 혹할 만한 장르로 접근한다. 수도 요금 120만 원의 실체는 무엇인가, 를 마치 탐정으로 빙의한 듯 조사하는 미경의 행동은 추리물을 연상시킨다. 검사로, 판사로, 변호사로 성공하겠다는 의지는 강하지만, 몇 년 째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해 까맣게 타버린 마음을 어두컴컴한 고시원으로 형상화한 연출은 누아르를 닮았다. 그리고 ‘개’같이 ‘태’어났다고 개태(조복래)로 불리는 고시원 관리소 직원과 미경이 짝을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는 버디 무비의 변형처럼 느껴진다.

<범죄의 여왕>은 얼마 전 이 지면에서 소개한 적 있는 ‘광화문 시네마’(1392호 ‘이제 ‘광화문 시네마’를 기억해둘 때’)의 세 번째 영화다. <1999, 면회>(2013) <족구왕>(2014)을 제작한 광화문 시네마는 독립영화 집단이다. 이들은 특히 저예산의 한계를 기발한 아이디어와 코믹한 이야기로 돌파해 좋은 평가를 얻는 것으로 유명하다. <범죄의 여왕>은 순제작비가 4억 원(1천만원으로 만든 <1999, 면화>와 비교해 제작비가 무려(?) 40배가 늘었다!)에 불과하지만, 장르 친화적인 접근 탓에 저예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는 큰 영화만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박스오피스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한국영화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작비가 1백 억원을 호가하는 블록버스터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규모이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에 목매기보다는 기존에 성공한 요소를 따라 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그래서는 발전이 없다. <범죄의 여왕>이 반가운 이유다. 다만 저예산의 독립영화는 블록버스터처럼 스크린 수를 많이 잡을 수 없으므로 관객의 적극적인 관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관계라는 것이 그와 같다. 관심이 없어서는 이 세상이 밝아지기 힘들다. 고시원 사람들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것 같아도 실은 이 사회가 이들을 한 데로 몰은 것과 다름없다. 성공이 아니면 관심도 두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고시를 준비하는 이들은 실패를 거듭할수록 관계 맺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관심이다. 처음엔 미경의 호의를 무시한 이들도 시간이 갈수록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미경의 활약에 수도요금 120만 원의 실체를 확인하지만, 이는 미경의 단독이 아닌 고시원 ‘식구’들이 모두 힘을 합해낸 결과다.

그처럼 영화 역시 블록버스터, 작은 영화, 청춘물 등 규모에 상관없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멆티플렉스에서 서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이상적이다. 물론 <범죄의 여왕> 한 편을 가지고 블록버스터가 지배하는 작금의 영화 시장에 균형을 맞췄다고 과장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작은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끌기에 이만한 작품도 드물다. 블록버스터가 제공하지 못하는 색다른 재미와 메시지와 무엇보다 개성이 <범죄의 여왕>에는 있다.

 

시사저널
(2016.8.20)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Independence Day: Resurgence)

resurgence

바야흐로 블록버스터의 시즌이다. 그럼 각각 3월과 4월에 개봉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등과 같은 슈퍼히어로물은 블록버스터가 아닌가, 반문할 독자도 있을 줄 모르겠다. 맞다. 예전과 다르게 블록버스터는 방학 시즌에만 한정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개봉하는 추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거대한 볼거리로 무장한 블록버스터는 가장 많은 사람이 극장을 찾는 방학 시즌을 겨냥해 제작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올해의 포문은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이하 ‘<인디펜던스 데이 2>’)가 열었다. 그 뒤를 이어 <제이슨 본> <고스트버스터즈> <스타트렉 비욘드> 등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개봉 대기 중에 있다.

멍청한 블록버스터?

<인디펜던스 데이 2>에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 세계 연합군 활약을 그린다. 솔직히 말하겠다. 연합군은 그저 거들뿐, 미국이 앞장서 외계인을 무찌르고 연합군은 그저 거들뿐이다. 소위 말하는 ‘미국 만만세’ 영화다. 연출을 맡은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1996)에서 미국 찬양의 테마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바 있는데 속편에서는 그 스케일을 훨씬 키웠다.

20년 전에 지구를 침공했다 포로로 잡힌 외계인들이 이상 반응을 보인다. 아프리카에 비밀리에 숨겨 놓았던 외계인의 비행물체도 갑자기 작동을 시작한다. 다시 시작된 외계인의 공격. 미국 대통령은 이번에도 당당하게 맞설 것을 지시한다. 지구우주방위대의 수장 데이빗 레빈슨(제프 골드브럼)과 직접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에 맞선던 전 대통령 토마스 J. 휘트모어(빌 풀먼) 등 원년 멤버에 더해 젊은 전투기 조종사 제이크 모리슨(리암 헴스워스)이 새롭게 합류해 다시 한 번 외계인을 지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황당하고(외계인이 지구를 공격한다고?) 뻔한(왜 매번 지구를 지키는 건 미국?)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인디펜던스 데이> 시리즈가 블록버스터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유는 압도적인 규모의 폭발 장면에 있다. 재난 블록버스터라면 으레 전 세계의 랜드마크 하나 정도는 부숴주는 게 예의인데 이의 시작이 <인디펜던스 데이>이었다. 외계의 우주선이 쏜 광선 한 방에 백악관이 폭발했던 장면이 그것. 이 정도는 약과라는 듯 <인디펜던스 데이 2>에서는 영국 런던,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 등 도시 전체를 아예 없애 버린다.

그 와중에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는 공격은 당해도 런던이나 두바이와 같은 규모의 피해를 보지는 않는다. 왜 아니겠는가, 외계인마저 벌벌 떨게 하는 우주 최강의 군사력을 지닌 미군이 있는데 말이다. 지금은 “예, 그러세요” 웃고 넘어가지만, 예전에는 이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았다. 눈을 현혹하는 압도적인 이미지로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를 전파하려는 할리우드의 속셈이 괘씸하다는 요지였다. 블록버스터는 멍청하다, 는 세간의 인식이 출발한 배경이다. 하지만 모든 블록버스터가 그런 건 아니다.

블록버스터의 진화?

블록버스터의 시작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죠스>(1975)였다. 식인 상어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단순한 설정으로 공포감을 자아내는 <죠스>는 1천2백만 달러(한화 약 15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었다. <인디펜던스 데이>가 개봉 일주일 만에 1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린 걸 고려하면 구멍가게 사탕값 정도이지만, 당시 할리우드 기준으로는 전례 없는 시도였다. 극 중 등장하는 식인상어를 특수 제작하고 개봉 이후에 파생될 수익까지 계산에 넣어 테마파크를 비롯하여 수십 종의 관련 상품을 출시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죠스>는 할리우드 최초의 1억 달러 흥행 수입 돌파는 물론 발 빠르게 속편 제작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

블록버스터는 폭탄의 이름으로, 한 구역을 (block) 송두리째 날려버릴(bust) 위력을 지녔다고 해서 붙어졌다. 상상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입해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 개봉 1~2주 만에 흥행 수익을 극대화하는 영화라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밌는 이야기는 물론 거대한 볼거리는 필수다. <죠스>의 성공은 곧 <스타워즈>의 제작을 부추겼고 <스타워즈> 속편’들’의 연이은 흥행은 <인디아나 존스> <터미네이터> <다이하드> <에일리언>과 같은 대표적인 시리즈를 불러왔다. 지금은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등 제작 단계부터 시리즈 전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수준에 이르렀고 거대한 볼거리를 가능케 한 기술의 발전은 슈퍼히어로물의 전성시대로 꽃을 피웠다.

이제 <인디펜던스 데이 2>와 같은 멍청한 블록버스터는 흔하지 않은 이벤트가 되었다. 극 중 아메리카니즘의 메시지에 상관없이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재난 이미지를 즐기는 데 초점을 맞추면 <인디펜던스 데이 2>는 나름 즐길 만한 블록버스터다. 이를 모르지 않는 할리우드가 <인디펜던스 데이>와 같은 블록버스터를 꾸준히 만드는 이유다. 오히려 이들이 직면한 고민은 다른 데 있다. 올여름 시즌을 책임져야 할 블록버스터의 목록에는 오리지널이 없다. <인디펜던스 데이 2>는 속편이고 <제이슨 본>은 ‘본’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이며 <고스트버스터즈>는 남자 배역을 여자로 바꾼 리부트다.

예전의 명성에 기대 영화(榮華)를 누리는 할리우드는 현재 신선한 콘텐츠 발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이디어 문제라기보다는 제작 시스템의 한계라고 보는 편이 낫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제작비에, 북미 자국 시장의 수입이 더는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할리우드는 전 세계 시장에서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모험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보다는 기존에 성공했던 영화를 끌어와 속편, 리메이크, 리부트와 같은 방식으로 살짝 손을 보는 식이다. 이것이 안정적인 흥행을 이끄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때 할리우드는 <유주얼 서스펙트>(1995)의 브라이언 싱어, <이블 데드> 시리즈의 샘 레이미 등 독립영화 계열의 감독에게 과감하게 블록버스터 영화의 연출을 맡기면서 <엑스맨>(2000) <스파이더맨>(2002)과 같은 슈퍼히어로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또한, 로버트 저메키스의 <캐스트 어웨이>(2000)처럼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고립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주인공의 삶을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유하게 하는 진화한 블록버스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올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는 목록은 화려해도 산업을 선도할 만한 작품은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2>는 현재 할리우드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사저널
(2016.7.2)

[2016 미쟝센] <구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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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사람들이 기침하며 죽어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감기 증세를 보이지 않는 이들은 자경단을 결성해 이상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해한다. 이유는? 깨끗한 이들이 의기투합해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다시 살리려는 의도다.

이 와중에 한 목사는 폐허가 된 교회에서 구원을 갈구하며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때 어린 소녀가 교회를 찾아오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목사를 쳐다본다. 기침하는 것을 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지만, 목사는 아이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소녀를 쫓는 자경단이 교회로 몰려오면서 목사는 폭력을 쓰지 않고 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구원의 날>은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아포칼립스’, 즉 재난물에 속하지만, 스펙터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재앙의 날의 도래와 함께 공권력이 붕괴하고 폭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과연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용서와 구원의 문제로 풀어간다. 그래서 목사는 ‘짐이 곧 국가’라는 비뚤어진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이들 앞에서 목사와 인간의 정체성을 두고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목사의 관점에서 이 자경단을 회개시키기 위해 비폭력을 고수해야 하지만, 소녀를 볼모 잡는 이들의 야만성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기 힘들다. 폭력을 행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는 곧 소녀를 구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와 직결한다. 그와 같은 딜레마의 상황은 약자를 향한 폭력이 일상화되고 일베와 같은 무리가 판을 치는 작금의 ‘헬조선’의 상황과 겹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선택은? 자경단을 힘으로 제압해 아이를 구한 목사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소녀가 신처럼 목사를 굽어보고 있다. 이를 폭력의 정당화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구원의 날>은 이 장르의 영화가 선악을 구분해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 다르게 인간다움이란 용서를 구하기 위해 갈등하는 모습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15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2016.6.23~6.30)

[2016 미쟝센] <귀신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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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귀신이다? 고래가 죽었다는 의미다. 그 고래를 죽인 건 누구일까? 진구는 밤마다 귀신고래가 찾아오는 악몽에 시달린다. 아니, 진구는 귀신을 본다. 이승을 떠도는 귀신은 자신을 보는 이에게 찾아와 억울한 사연을 알린다. 인간의 말을 할 줄 모르는 고래는 눈물을 흘린다. 이를 본 진구는 고래의 슬픈 사연을 감지한다. 하지만 어린 진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보니 아는 무당을 찾아가 눈물을 흘릴 뿐이다.

한때 고래는 갈구하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고래사냥>(1984)의 주인공들은 시대의 억압을 피해 고래를 잡겠다며 따뜻한 남쪽 나라로 향한다. 고래가 품었던 자유와 낭만의 정서는 30년이 지난 지금 공포로 화하였다. 고래를 잡아 잇속을 챙기는 인간의 야망성에 대한 공포. 최양현 감독의 <귀신고래>는 급격히 변화한 시대가 만들어낸 비(非)인간성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어촌을 배경으로 하던 영화가 도시로 이동하는 까닭일 터. 진구는 돈을 많이 벌어온 아버지를 따라 새집으로 이사 온다. 자기 방까지 따로 얻었지만, 진구는 마음이 편치 않다. 단순히 귀신고래를 보기 때문이 아니다. 일확천금에 눈이 먼 사회는 급속도로 잔인해져 가고 약자들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진구의 시선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이 영화가 고래의 눈, 특히 눈물 흘리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여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고래는 어쩌면 전설 같은 존재다.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고래의 모습을 보기란 요원하다. <귀신고래>에서 CG로 태어난 고래는 물속 대신 진구가 새로 이사한 집 지붕에서, 진구의 방 창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라도 고래를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가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

 

15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2016.6.23~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