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윅-리로드>(John Wick: Chapter 2)

<존 윅-리로드>(이하 ‘<존 윅 2>’)의 티저포스터를 보자. 주인공 존 윅(키아누 리브스)을 가운데 두고 수십 정의 총이 앞뒤 좌우를 빼곡히 포위한 상태다. 하늘로 뿅! 솟아나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한 아무리 유능한 킬러라도 이 상황에서 살아날 방도는 없어 보인다. 만약 살아난다면? 에이 세상에 이런 거짓말이 어딨어, 이거 완전히 영화잖아!

런웨이에 선 킬러처럼

맞다, <존 윅 2>는 영화다. 판타지를 충족하는 매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킬러와 액션의 말도 안 되는 매력을 극대화한다. 존 윅이라는 인물 자체가 그렇다. 그는 단순한 킬러가 아니다. ‘레전드’ 킬러다. 연필 한 자루로 3명을 처리했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가 전설처럼 업계에 떠돈다.

그도 옛날얘기다. 존 윅은 현재 은퇴 상태다. 그렇다고 해도 워낙 출중한 실력을 갖춘 킬러이니 그를 불러내려는 이들이 많다. 그중 한 명이 뉴욕 내 이탈리아 마피아를 이끄는 산티노 디 안토니오(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다. 디 안토니오는 사실 2인자다. 그의 누이가 1인자로 현재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다.

디 안토니오는 존 윅이 위험에 빠졌을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다. 이를 들먹이며 존 윅에게 누이를 제거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럴 경우에만 존 윅의 은퇴를 인정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갚지 않은 대가로 죽음을 맞보게 해주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존 윅은 이를 받아들이고 로마로 향한다.

아니, 무슨 전설로 불리는 킬러가 협박 한 번 받았다고 저렇게 쉽게 넘어가나. 전설의 킬러가 맞긴 맞는 거야? 존 윅이 협박을 받아들인 건 디 안토니오니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들 업계에 존재하는 룰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룰은 내가 업계라고 표현한 ‘국제 암살자 연합’을 지탱하는 규칙이다. 그래서 본부도 있다. ‘콘티넨탈 호텔’이다.

콘티넨탈 호텔은 임무를 맡은 킬러가 방문하면 의료 및 세탁 서비스는 물론 다양한 무기까지 제공한다. 이를 받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 하는데 ‘골드 코인’으로 불리는 비밀 화폐로 통용한다. 뉴욕에 본점을 두고 있는 콘티넨탈 호텔은 세계 각지에 체인점을 마련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킬러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존 윅은 우선 콘티넨탈의 로마 지점을 찾아 양복 두 벌을 맞춤하고 무기 소믈리에(킬러의 성향을 파악해 무기를 추천하는 직업이란다!)를 찾아 원하는 무기를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서 양복을 입고 액세서리 착용하듯 몸에 무기까지 걸치니, 존 윅은 킬러이기 이전 모델처럼 보인다.

그게 이 영화가 킬러를 대하는 시선이다. ‘톰 포드’, ‘폴 스미스’와 같은 명품 양복을 착용하고 화려한 뉴욕과 고대 유적이 즐비한 로마 거리를 배경 삼아 총질을 해대는 존 윅은 패션쇼장의 런웨이를 활보하는 모델 그 자체다. 킬러가 사람이나 죽이면 되지, 스타일이 뭐가 그리 중허다고?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존 윅 2>는 킬러에 대한 판타지를 극대화하는 작품이라고.

존 윅도 키아누 리브스처럼

존 윅이 예사롭지 않은 킬러라는 건 전편 <존 윅>(2014)에서 증명된 바다. 당시에도 존 윅은 은퇴한 킬러였다. 사연이 있다. 아내가 투병 생활 중 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퇴한 존 윅은 아내가 남긴 강아지와 단둘이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괴한이 집안에 닥쳐 존 윅이 아끼는 자동차를 훔쳐가면서 강아지마저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존 윅은 아내에 대한, 그리고 강아지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킬러 본능을 꺼내기에 이르렀다.

고작 강아지 따위에 평정심을 잃고 총을 드는 지질한 킬러라니,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와 같은 설정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자연인’ 키아누 리브스의 사연을 반영하는 까닭이다. 키아누 리브스는 실제로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홈리스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이를 견뎌내는 시간은 여러모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살짝 손만 갖다 대도 폭발할 것 같은 키아누 리브스의 사연을 <존 윅>은 영화에 차용,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에 입체감을 더했다.

이는 키아누 리브스를 잘 아는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다. <존 윅 2>를 연출한 채드 스타헬스키 감독은 데이빗 예이치 감독과 공동으로 메가폰을 잡은 <존 윅>이 연출 데뷔작이었다. 그 전까지는 할리우드의 잘 나가는 스턴트맨으로 <매트릭스> 시리즈와 <콘스탄틴>(2005) 등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스턴트 대역을 맡았던 경력이 있다. 채드 스타헬스키에게 키아누 리브스는 액션 스타다. 큰 키 하며 긴 팔과 긴 다리는 액션의 역동적인 화면을 잡아내기 안성맞춤이다. 견자단 같은 홍콩 액션 스타와 비교해 키아누 리브스의 몸짓은 뻣뻣해 보여도 서양 배우 가운데 이 정도로 몸을 놀리는 배우는 많지 않다.

키아누 리브스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봐도 그가 액션을 펼쳤을 때 영화의 흥행이 좋았던 적이 많았다. 퇴마사로 출연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지옥으로 돌려보냈던 <콘스탄틴>, 시속 50마일 이하로 떨어지면 폭탄이 터지는 버스의 테러리스트를 응징했던 <스피드>(1994), 서핑을 즐기는  은행 강도를 체포했던 <폭풍 속으로>(1991) 등이 그랬다. 그중 대표작으로 꼽으라면 단연 <매트릭스>(1999)다. <매트릭스>에서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활동하던 극 중 키아누 리브스를 가상현실에서 진짜 세계로 각성시킨 건 다름 아닌 ‘모피어스’ 로렌스 피쉬번이었다.

로렌스 피쉬번은 <존 윅 2>에서 극 중 존 윅과 인연이 있는 바워리 킹 역할을 맡았다. 짧게 출연했지만, 컨티넨탈에서는 싸움을 벌이면 안된다는 룰을 깨고 제명당한 존 윅과 킬러들 간의 전쟁이 예고된 3편에서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존 윅 2>의 원제는 ‘John Wick Chapter Two’였지만, 국내에는 <매트릭스 2-리로디드>(2003)를 연상시키는 <존 윅-리로드>로 변경됐다. 그렇다면 존 윅 3의 국내제목은 <매트릭스 3-레볼루션>(2003)처럼 ‘존 윅-레볼루션’이 되려나. 아무튼, <존 윅> 시리즈는 혁명(revolution)과도 같은 액션물이다.

 

KDI 나라경제
2017년 3월호

<더 킹>(The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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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차고 넘친다. <더 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기 위해 영혼을 파는 이들을 다룬다. 이 세계는 정점에 오른 권력의 라인을 타려고 혈안이 된 이들의 욕망이 고도 비만인 상태다. 그래서 타이틀 롤에 오른 배우도 많고 상영시간도 길고 무엇보다 온갖 영화적 기교로 지방(?)이 잔뜩 껴있다.

양아치 고등학생에서 서울대 출신의 검사로 출세하는 태수(조인성)의 성공담이 빠르게 몽타주 컷으로 제시되고 태수가 검찰 실세 한강식(정우성)을 만나 미래가 급변하는 첫 만남에서의 카메라는 위아래로 360도 회전한다. 정의 대신 권력에 몸과 마음을 내주는 태수의 변절은 사생활이 복잡한 연예인과의 상상의 섹스로 의미가 부여된다. 이에 더해, 뉴스화면을 타고 인서트 컷 되는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격동적인 한국의 현대사와 리듬 타는 편집 속에 빠르게 지나가는 수십 벌의 슈트와 수백 곳의 제작 공간까지, 미처 소화되기도 전에 배를 불리듯 영화의 몸무게를 과도하게 찌워간다.

<더 킹>의 연출 ‘엔지니어링’에는 작동원리가 있다. 한강식의 눈 밖에 나 야인으로 전락한 태수가 이에 대한 복수로 정치 입문을 서두르자 이미지 컨설턴트는 충고를 건넨다. “정치는 이미지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허상입니다.” 정치는 욕망의 숙주 노릇을 하는 권력의 토양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음성적인 권력은 떴다방 같아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되는 것이 정치 엔지니어링이다. 관객이 인지하든 말든 상관 없다는 투로 폭주 하듯 달려가는 <더 킹>의 차고 넘치는 이미지는 감독이 노리는 바와 직결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재림 감독의 연출적 야심과 상업적 판단이 충돌한다. 불친절(?)한 연출로 권력의 속성을 표현한 <더 킹>의 이미지는 그걸 다 눈에 담지 않더라도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세한 설명이 없더라도 <더 킹>의 이야기를 따라잡는 데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사실 이 영화가 폭로하는 권력의 추접스러운 민낯은 정치에 관심 없더라도 누구나 익히 알고 또 상상하는 바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형식으로 삼고 있는 극 중 태수의 내레이션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친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한강식을 향한 복수는 당연히 은밀하게 진행됨에도 ‘나의 정치 입문은 아주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사족을 달거나 살아있는 권력의 약점을 손에 쥐고 야당 쪽으로 넘어오자 좋아하는 주변 반응에 대해 “난 그들이 볼 때 꽤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굳이 설명하는 내레이션에서 이미지를 부각한 이 영화를 관객이 어렵게 느끼지 않을까, 하는 흥행 강박감이 감지된다. 비만한 권력욕은 결코 남의 사정을 고려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태수의 내레이션이 <더 킹>의 연출에 어울리는 방식인지는 의문이다. <더 킹>은 너무 ‘친절한’ 야심작이 되었다.

 

매거진 M
(2017.1.20)

<여교사>(Misbehav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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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시사회에서의 에피소드다. <여교사>의 문제적 장면, 극 중 효주(김하늘)가 펄펄 끓는 주전자를 들고 무방비 상태의 혜영(유인영)에게 쏟아부으려는 장면이 나오자 객석의 누군가가 “안돼, 하지 마!”라고 비명을 질렀다. ‘김태용 감독의 의도가 적중했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여교사>는 불편한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그런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여’ 교사라니. 의도적으로 차별적인 제목을 가져간 것은 극 중 효주의 처지가 그렇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화학 교사인 그는 비정규직이다. 정원이 나면 1순위로 정규직에 올라갈 차례이지만, 이사장의 딸이라며 혜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비정규직 신세에 항의는 언감생심, 그나마 위로받고 싶은 남자 친구는 자기밖에 모른다.

안 그래도 효주는 글을 쓰는 남자 친구를 작가로 만들어 신세 고쳐 보겠다고 꽃 같은 10년 세월을 바쳤다. 돌아온 건 이별 선언뿐. 이래저래 해 뜰 구석 없는 인생에 모든 탈출구가 봉쇄되던 차, 효주의 손에 조커 한 장이 들어온다. 체육관에 들렀다가 혜영이 제자 재하(이원근)와 가진 부적절한 관계를 목격한 것. 좀 더 영악했더라면 이 패를 가지고 혜영을 협박(?)해 정규직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효주의 감정적 방어선은 불행히도 순수였다. 떠난 남자 친구에게 그랬던 것처럼 효주는 재하에게 사랑을 바치며 혜영보다 우위에 서려 한다.

김태용 감독은 <여교사>에 대해 생존을 위해 자존감을 포기한 사람이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숨겨진 욕망이라 함은 재하를 향한 효주의 사랑일 텐데 자본주의는 그와 같은 순수를 먹잇감 삼아 욕망의 배를 불리며 ‘흙수저’를 철저히 농락해왔다. ‘금수저’가 인식하는 순수란 자존심이라는 명분 하나로 파멸을 재촉하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효주에게 있어 혜영은 흙수저의 마지막 존엄인 자존심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부싯돌과 같은 역할인 셈이다.

그러니, 효주가 혜영에게 가한 뜨거운 주전자 공격은 말이 좋아 복수이지 순간적인 감정의 해소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여교사>가 내재한 불편함의 존재 이유가 있다. 주전자 장면에 하지 마, 라고 외친 관객의 반응은 뜨거운 물이 인체에 가할 고통의 연상 작용이 우선이다. 하지만 감독이 이의 장면에서 치환하려는 감정의 정체는 그와 같은 행동이 종국에는 효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안타까움의 발로에 더 가깝다. 그걸 알면서도 효주와 같은 흙수저가 행할 수 있는 응징의 종류가 얼마 되지 않으니 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끝을 보고야 마는 연출은 한국영화계에서 이제는 드문, 아니 귀한 경험이 되었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묘사가 언제부터인가 영화의 단점으로 받아들여지는 풍토가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하다. 감정은 화학기호처럼 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어서 늘 예측불허다. 그래서 삶은 흥미로운 한편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즉, 고통은 살아있음에 대한 가장 극적인 증명이다. 이는 예술에 있어 특출한 개성이 되고는 한다. <여교사>는 개성의 영화다. 김태용 감독에게 개성은 연출자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몰개성과 획일화가 판을 치는 한국 영화 산업에서 끝내 지켜야 하는 가치다.

한국영화계는 2017년 새해부터 <여교사>를 통해 효주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얻었고 김하늘의 연기를 재발견했고 김태용 감독의 재능을 (<거인>(2014)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데도 고작 10만 명 조금 넘는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불편을 직시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여교사>는 더 많은 사람이 봐야 할 영화다.

 

매거진 M
(2017.1.20)

[2016 베니스 인 서울] <귀>(orecc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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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orecchie>(2016)는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Alessandro Aronado)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73회 베니스영화제의 신인육성프로그램 ‘비엔날레 컬리지 Biennale College’에서 처음 소개됐다. 비엔날레 컬리지 시네마는 베니스영화제가 매년 독창성이 돋보이는 저예산 프로젝트를 선정, 150,000유로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출품 자격을 부여하는 섹션이다. 3편의 작품이 비엔날레 컬리지에 오르는 것이 보통인데 올해는 예외적으로 1편이 추가되어 총 4편이 되었다. 그 한 편이 바로 <귀>다. 영화제 측에 따르면, 예측이 힘든 이야기 전개와 독창적인 연출 스타일을 외면하기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에 대한 베니스영화제의 관심은 장편 데뷔작에서부터 남달랐다. 경찰차와 추돌 사고를 당한 젊은이를 다룬 <하나의 인생, 혹은 둘 Due vite per caso>(2010)에 ‘최고의 데뷔작 Best Debut Film’을 포함해 총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리며 애정을 드러낸 것. 2016년의 경우, 3편의 비엔날레 컬리지 작품이 신인감독의 데뷔작인 것에 반해 <귀>가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의 두 번째 연출작인 것을 고려하면 관심의 정도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확실히 1:1 화면비의 흑백화면으로 시작하는 <귀>는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주인공은 무명의 젊은 남자다. 여자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귓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려던 차 친구 루이지가 사망했으니 장례식에 참석하라는 여자 친구의 메모를 발견한다. 루이지가 누구지?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루이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곧이어 부조리한 상황이 연달아 발생한다. 신을 믿느냐며 전도하러 온 수녀가 앞집 할머니와 싸움이 붙어 병원에 실려 가는가 하면 귀에 이상이 있어 방문한 병원에서는 임신이라는 둥, 자웅동체라는 둥 황당한 진단을 내린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상황이 종일 펼쳐지자 남자는 도대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복잡한 심경을 정리할 겸 음악 하는 친구에게,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귀는 엄마에게, 담당 교수의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들은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으로 점점 남자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루이지의 장례식장에서 남자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그에 맞춰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 감독은 관객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1:1의 화면비를 서서히 늘려가며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는 1.85:1까지 확장한다.

예사롭지 않은 연출과 이를 선도하는 이야기. 그리고 끝내 밝혀지지 않는 남자의 이름.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는 <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다. “완벽히 무명인 그가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과 타협하는 이야기다.” 그에 맞춰 영화는 익명의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택일해야 하는 남자의 모험에 집중한다. “내 인생과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의견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서”라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흥미롭게도 <귀>는 희비극의 요소를 유난히 강조한다. 희비극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몰린 인물의 면면을 드러내고 각성을 끌어내는 데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일련의 황당무계한 상황에 지칠 대로 지친 남자가 찾아간 교수의 부인은 거리에서 책의 성을 쌓는 노숙인을 가리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저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저 사람 또한, 우리를 이상하게 볼 거에요” 이는 이상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안 그래도 남자가 맞닥뜨린 복잡한 상황은 그 자신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와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여자 친구를 사랑하지만, 아이를 낳아야 할지 확신이 없고, 철학 보조 교수로 근무하지만, 그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고 싶어 잡지사 취직 면접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게다가 루이지가 누구인지 기억을 못 하는 상황에서 장례식에 참석하려니 영 마음이 복잡한 것이 아니다.

세상사라는 게 그렇다. 진실은 단순한데 그를 깨닫기까지 넘어야 할 난관이 만만치 않다. 거짓은 복잡하고 가짜는 난무하며 사이비가 판을 치는 게 이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발휘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춰 삶의 목적을 가져가는 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런 배경에서 실존주의는 출발한다.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남자가 찾아간 뮤지션 친구는 마침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는 중이다. 친구는 남자에게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 이유에 대해 그저 태양이 강렬히 비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문장을 인용해 덧붙이길,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한 번에 타버리는 것이 낫지.

인생은 긴 것 같아도 유한하다는 점에서 짧다. 삶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다. 그 때문에 혹자는 종교에 의지하고 신을 믿는다. 남자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루이지의 존재는 실은 맥거핀에 가깝다. 오히려 루이지로 인해 남자가 장례식, 그러니까, 죽음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삶은 생과 사가 하나로 연결된 직선 주로다. 그와 같은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만들어주는 것. 수많은 ‘익명’이 모여 우리라는 커뮤니티를 이루게 해주는 것, 남자를 통해 이를 찾아가는 여정의 <귀>의 핵심이다.

<귀>에는 꽤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가 언급되고 수많은 예술이 배경으로 흘러간다. 복잡한 인간 삶에서 예술은 인간에, 인간의 삶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게 해줄 나침반이 되어주고는 한다. <귀>가 또한, 그렇다. 이 영화는 신의 존재처럼 규명하기 힘든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술의 형태로서 단서를 제공한다. 예술은 그 안에 담기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사랑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할 뿐 아니라 이 세계가 하나라는 걸 증명하는 중요한 명제다.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다. 이를 깨닫게 될 때 복잡한 삶은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알레산드로 아로나디오 감독이 말한, 세상과의 타협이 아닐까?)  귓속에서 정체 모를 잡음이 들린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던 남자는 그제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다. 수많은 정보가 울긋불긋하게 넘쳐나는 컬러 화면과는 달리 선명하게 보이는 흑백필름처럼, 답답했던 1:1의 화면비가 끝내 1.85:1로 늘어나며 두 귀를 얻은 듯 시원하게.

 

월간 Cinematheque
(2016.12.12)

[2016 서독제]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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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근, 임재춘, 김경봉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이면서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 밴드 ‘콜밴’의 멤버다. 이들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천막’을 치고 3,170일, 그러니까, 무려 8년 동안 투쟁 중이다. 지금은 함께 투쟁하던 동료들이 대부분 떠나고 셋만 남은 상황이다. 게다가 집으로 압류 통보가 들어오고 벌금도 수천만 원 대에 이르다 보니 이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마음을 잡지 못해 연주 연습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서로에게 신경질을 내는 최악의 상황. 급기야 재춘은 투쟁이고 밴드고 다 필요 없다며 천막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경봉은 이를 막기 위해 재춘을 달래지만, 인근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로 진행할 법한 소재이지만, 이란희 감독은 <천막>을 극영화로 끌고 간다. 실제 해고노동자인 이인근, 임재춘, 김경봉이 자기 자신을 연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이 지냈던 실제 천막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란희 감독의 말로는 다큐멘터리보다 극영화가 자신에게 맞기 때문에 이런 형식을 취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소재의 다큐멘터리와 비교해 <천막>은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실재인물이 연기한다는 설정은 기타를 ‘만들다’ 투쟁을 위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주인공들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또한, 콜트콜텍 문제를 극영화로 확장하니,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에너지를 규합해 노래로 투쟁에 나서는 콜밴 멤버들의 현재 상황이 우회적으로 반영된다. 심각할 법한 이야기가 살짝은 어색해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로 재미까지 확보되며 <천막>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

[2016 서독제] <수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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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이 영화의 공간은 ‘수영장 the pool’이다. 아직 물이 채워지지 않은 수영장에서 한 사람이 몸을 풀고 있다. 소녀인 것으로 보이지만, 내부가 어두워 그렇게 추측될 뿐이다. 서서히 수영장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 소녀는 슬슬 물장구를 친다. 스크린 멀찍이서 수영을 하다 물이 차는 정도에 맞춰 중앙으로 나오기도, 아예 가로지르기도 한다. 수면 위로 한 줄기 햇살의 조각이 일렁이는 가운데 아이들의 조잘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영장>을 만든 고유희 감독은 연출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깜깜한 지하에서의 그 시간 동안 빛나거나 덜 빛나거나, 움직이거나 미세하게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가 보려 했다.’ 카메라가 따라간다기보다 미묘하게 출렁이는 수면에 몸을 맡긴 것처럼 움직이는 <수영장>은 수영장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운동성에 주목하는 영화다.

영화가 빈 스크린에 이미지와 사운드를 채워 넣어 꿈 혹은 상상을 구현하는 것처럼 <수영장>은 수영장 안에 물을 채우는 가운데 그 안에서 사람이 휘젓고 첨벙이는 소리가 울리는 등 그에 맞춰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잔잔한 수면 위의 물의 흐름은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오고 그 위를 첨벙첨벙 넘나드는 소녀의 헤엄은 잠을 깨우듯 현실을 자각도록 한다. 가장 컴컴했던 어둠이 바닥을 치고 저 멀리 새벽을 알리는 빛의 파편이 수면 위에 반사되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

[2016 서독제] <우주비행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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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과 영선(박용혁 배우가 1인 2역을 연기했다!)은 형제다. 쌍둥이지만, 그들이 놓인 처지는 정반대다. 형 영진은 이과 출신으로 자연과학을 연구한다. 문창과 출신의 동생 영선은 글을 쓰고 싶다며 취직 대신 시골집에 내려간다. 영진은 원하는 건 아니지만, 생계를 위해 연구실에 처박혀 교수님의 연구를 뒷받침하고 있다. 영선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던 중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이전에 둘은 식당에서 만나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골로 내려간다는 동생의 결정에 형은 말한다. “엄마 보험금도 다 떨어져 간다. 나 돈 없다.” 그러자 동생은 이렇게 받아친다. “반대로 생각해. 부양할 가족이 없잖아”

손경수 감독의 <우주비행사들>은 똑같이 생겼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는 형제를 통해 우주의 신비에 접근한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생(生)과 사(死)가 이어져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처럼 <우주비행사들>은 반을 접었던 종이를 펴듯 영진과 영선 형제가 마주한 혹은 나란히 걷는 이미지부터 동생 영선이 컴퓨터, 즉 온라인에 남긴 영상을 오프라인의 형이 바라보는 사연까지, 온통 대칭의 개념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게 둘은 동일 선상에 놓여 있는 것 같아도 이를 가로지르는 각자의 시간이 삶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주비행사들>은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인터스텔라>의 상대성이론이 나오는 대목을 ‘쌍둥이 패러독스 Twin Paradox’ 버전으로 개비한 듯한 인상을 주는 영화다.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

[2016 서독제] <바위너구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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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강력한 벼락이 공단을 내려치는 압도적인 광경으로 시작한다. 그 위로 6개의 내레이션이 차례로 깔린다. 남자는 슈퍼 태풍 너구리 때문에 공단 내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던 사건을 설명한다. 연신 안아보겠다는 남자와 별자리 얘기를 하며 딴청을 피우는 여자의 대화가 두 번째로 들린다. 곧 이은 박사장과 이과장의 대화는 욕이 오갈 정도로 거칠다. 의사와 환자의 대화도 이어진다. 정신질환을 의심하는 의사에 맞서 환자는 몽유병을 주장한다. 그리고, 세상이 작동하는 추악한 시스템을 폭로하려는 남자의 황당한 주장에 맞서 이를 말리려는 여자, 몰락해가는,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세 사람의 대화까지.

<바위너구리들>의 임유리 감독은 “석유화학 공단으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고향을 어린 시절부터 종종 드라이브 가곤 했다. 거대했던 공단의 이미지는 나이가 들수록 변화해간다. 그 안에서 어떤 파편적인 정서, 경험들을 부유하게끔 하고자 했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 그의 말처럼 영화는 내레이션의 상황별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단의 이미지와 음악으로 그에 맞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과정은 마치 객관적인 기억이 오래되어 주관적인 인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따르는 듯하다. 공단을 에워싸듯 말과 이미지와 사운드가 실험적으로 결합한 이 영화가 왜 바위가 많은 곳에 서식하는 ‘바위너구리들’로 제목을 정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

[2016 서독제]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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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초반, 극 중 화자(이 영화를 연출한 오재형 감독)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확인물체, 즉 UFO의 존재를 믿느냐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UFO의 존재 여부에 대해 접근해 들어간다. 근데 왜 영화의 제목이 ‘덩어리’일까? 사실 <덩어리>는 UFO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감독의 마음속에 묵직하게 눌러앉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덩어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종국에는 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여기서 UFO와 덩어리를 잇는 공통분모는 ‘믿음’이다. <덩어리>의 오재형 감독은 UFO가 진짜라고 주장했던 유명한 이들의 사례가 결국에는 거짓으로 판명된 에피소드를 삽입한 후 이런 얘기를 한다. “나도 내 몸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으로 힘든 적이 있었다.” 그래서 UFO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중반 이후 감독이 경험했던 정체불명의 마음속 고통을 설명하는 데 할애한다. 흥미롭게도 그 과정을 지켜 보고 있으면 이 영화 자체가 감독에게는 일종의 치유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믿음에 대한 감독 자신의 판단으로 결국 마음의 병을 고치기 때문이다.

어떤 실체의 존재 여부와 상관 없이 믿음이라는 건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 쪽으로 향하면 오히려 건설적일 수가 있다. 이를 UFO와 불안 장애로 연결해 다큐멘터리로 꾸민 감독의 발상이 재기 넘친다. 여러분은 UFO의 존재를 믿습니까?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

[2016 서독제] <돼지 잡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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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돼지를 잡는다고 하면 ‘잔칫날’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가족 관계가 유효했던 예전에는 그랬다. 가족 해체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금에는 어떨까. 시골 농장에 친척 식구들이 모인다. 돼지를 잡기로 한 날인데 분위기가 영 심상찮다. 어머니 묫자리를 두고 형제간에 싸움이 붙는다.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남은 땅을 팔자는 동생에 맞서 형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다. 이에 성이 난 동생은 대신 형의 아들을 불러 장도리를 손에 쥐여주고는 돼지 머리를 치라고 주문한다. 보다 못한 매형은 이 상황이 맘에 안 드는 듯 장도리를 뺏어 돼지 머리에 화풀이하고는 해체 작업에 들어간다.

양청직 감독의 <돼지 잡는 날>은 몸뚱이가 해체된 돼지처럼 심정적으로 뿔뿔이 흩어진 극 중 가족의 민낯을 내장까지 발려내듯 드러낸다. 반가워야 할 모임에 신경전을 벌이는 가족 간 사이는 바람 소리처럼 스산하다. 형편들이 어려워 자기 잇속을 챙기려 부딪히는 과정은 죽은 돼지에서 흘러나온 피처럼 비릿하다. 그런 가족 사이를 살벌한 돼지 농장 배경으로 우회한 이 영화의 대사는, 그래서 중의적인 데가 있다. “뭐 한다고 그 징그러운 걸 보고 있어. 옷이나 버리지. 지겨워 아주” 친척 어른의 지친 듯한 목소리에 조카가 내놓는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나도 거들어야지” 그랬다가 돼지 내장을 담은 수레를 엎은 조카의 옷은 금세 피로 물든다. 친척 간의 갈등이 자식 세대로까지 이어질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게 ‘돼지 잡는 날’의 의미는 과거와는 다르게 부정적인 의미로 변모하였다.

 

서울독립영화제 2016
(2016.12.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