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랜드>(Joyl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오늘밤 혼자 걷는 밤길이 두려울 수도,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가 무서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학생들에게는 곧 있을 중간고사가, 사장님에게는 제 날짜에 지급해야 할 직원들의 월급이, 직장인들에게는 월요일의 출근이, 부모님에게는 아이들이 원하는 모든 걸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는 몇 시간 남지 않은 마감이 그야말로 공포다. 또 누군가에게는 으스스한 유령의 집이 공포의 대상이 아닐까.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는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공포의 집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인 사건을 다룬다. 대학생 데빈 존스는 2년간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랠 겸 ‘조이랜드’라는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근무하기 전날, 하숙집 아주머니는 그에게 공포의 집에 얽힌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자 친구와 공포의 집에 들어갔다가 목이 베어 죽은 소녀가 있는데 유령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서운 한편으로 호기심이 들기도 했던 데빈 존스는 내심 그 소녀의 유령을 목격하기를 기대한다.

짧은 요약만으로는 스티븐 킹의 상상력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포소설인 것 같지만 <조이랜드>는 성장물이다. 데빈 존스가 그렇게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는 소녀의 유령은 소설의 마지막 장(章)에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낸다. 사실 <조이랜드>에서 중요한 건 유령의 존재가 아니다. 유령을 만나고 싶어 하는, 그 때문에 어두컴컴한 공포의 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데빈 존스의 심리가 이 소설에서는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는 일반의 심리와 다를 바가 없는데 무섭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꼭 경험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공포의 집이 아닌가.  

경험한 이들은 알겠지만 공포의 집은 그 자체로는 무섭지만 경험하고 나면 실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놀이기구다. 공포의 집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동안 심장박동이 빨라질 뿐이지 놀람 장치를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공포는 찰나의 순간이다. 공포의 집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지레짐작하는 무서운 상상만으로 자신을 극도의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의 집을 나와 느끼는 허무한 감정에는 어둠을 극복했다는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이 짙게 배어있다.

인생이라고 다르지 않다. 한치 앞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대체 어떤 형태가 될지 희극일지, 비극일지 다가올 시간이 두렵기만 하다. 데빈 존스에게는 헤어진 여자 친구의 존재가 꼭 그렇다. 워낙 뜨거웠던 사이였기에 이런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두렵기만 하다. 무엇보다 첫사랑이었던 만큼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다. 하지만 <조이랜드>는 환갑을 눈앞에 둔 데빈 존스가 자신의 스물한 살 시절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현재의 데빈 존스에게 첫사랑이란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 같은 것이다. 첫사랑의 이별이 준 공포를 극복하고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에게 <조이랜드>의 공포의 집은 성장에 대한 메타포다. 독자들에게 유령에 대한 공포를 잔뜩 심어놓은 후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야 유령의 실체를 확인하게 만드는 구성은 공포의 집이 가진 속성을 반영한 것일 테다. 그전까지 데빈 존스는 첫사랑과의 이별은 물론이고, 희귀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웃한 열 살 소년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기도, 조이랜드에서 가장 친한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인생에 있어 가장 혹독한, 그러니까 도대체가 어떤 미래가 닥칠지 알 수 없어 무서운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극복한 데빈 존스에게 남는 것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을 자신만의 추억과 무엇보다 성장이다. 성장은 공포를 이겨냈을 때 획득할 수 있는 달콤한 열매 같은 것이다. 스티븐 킹은 데빈 존스의 입을 빌려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행복한 시간은 항상 오는 법이고 어둠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는 밝고 행복했던 것에 매달리게 된다.” 공포의 집에서 놀람장치가 발동하는 순간, 비명을 질러대는 우리의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지만 곧바로 웃을 수 있는 건 출구가 머지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이 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그래서 공포의 집을 경험한다는 것은 성장을 예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스티븐 킹의 작품이 오랫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장르상 공포물이지만 극 중 주인공들의 성장을 담보하는 까닭에 결과적으로는 성장물로 기능한다. <스탠 바이 미>의 아이들은 시체를 찾아 떠난 여행의 끝에서 정신의 키가 훌쩍 자란 자신들을 발견한다. <리시 이야기>의 리시는 남편을 잃은 후 혹독한 통과의례 끝에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또한 <11/22/63>과 <셀>은 각각 JFK의 암살을 되돌리려는 시간여행물과 일상품이 되어버린 핸드폰이 공포의 발원지가 되는 좀비물이지만 당대의 공포를 반영하되 개인의 성장이 밑바탕 된다.

누구에게나 공포가 찾아오듯 모두가 통과의례처럼 이를 극복하며 성장한다. 우리 모두 데빈 존스처럼 스무 살 시절의 청룡열차에 탑승해 급작스런 상승과 하강의 희비쌍곡선 속에서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내가, 우리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스무 살 청춘들에게는 와 닿지 않겠지만 <조이랜드>에서 스티븐 킹이 쓴 이런 충고는 어떤가. “나는 그날로 돌아가서 인생이 항상 추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때때로 그 보상들은 실재한다. 때때로 그것들은 귀중하다.” 인생이라는 공포의 집에 발을 디딘 이상 이를 피할 방법은 없다. 출구를 향해 하나둘 공포를 맞닥뜨리며 지나갈 수밖에. 지나고 나면 그제야 인생이 소중해 보일 것이다.

새마을금고
2014년 4월호

<하트 모양 상자>(Heart-Shaped Box)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단편집 <20세기 고스트>로 주목받고 있는 조 힐은 그 유명한 스티븐 킹의 둘째 아들이다. 본명은 조셉 힐스트롬 킹(Joseph Hillstrom King). 아버지의 명성에 비교 당하는 것이 싫어 조 힐이라는 필명을 쓰는 그의 내력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장편 데뷔작 <하트 모양 상자>가 미국에서 출간된 2007년 2월을 즈음해서다.

<하트 모양 상자>는 이제는 늙고 한물간 록 뮤지션 주다스 코인과 귀신 간의 추격전을 다룬 ‘초자연 스릴러’(occult thriller)다. 교수형 밧줄, 스너프 필름처럼 해귀 망측한 물건을 모으는데 취미가 있는 주디는 이베이의 아류격인 경매 사이트에서 귀신(?)을 구입한다. 죽은 양아버지가 열한 살 딸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싫어 귀신이 깃든 양복을 판매한다는 글을 읽고 경매에 참여해 낙찰 받은 것. 검은 하트 모양 상자에 넣어 배달된 양복을 받은 그날 밤부터 주디는 귀신을 보게 되고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결국 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디는 양복 판매자를 찾아 나서기에 이른다.

<하트 모양 상자>는 조 힐의 미국 데뷔작이지만 실은 2005년 영국에서 14편의 단편을 모은 <20세기 고스트>를 먼저 출간한 적이 있다. 1972년 미국 출신인 조 힐이 모국이 아닌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건 스티븐 킹의 명성에 기대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출신 배경을 함구한 채 <20세기 고스트>를 발표하며 브람 스토커상, 브리티시 판타지상 등을 수상한 조 힐은 <하트 모양 상자>의 미국 출간이 결정돼서야 편집자에게 그의 본명과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얘기했다. 편집자는 이를 <하트 모양 상자>의 홍보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진심과 다르게 출간 전 ‘버라이어티’ 온라인 판이 조 힐을 다루면서 가족 배경을 밝히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하트 모양 상자>는 발매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수많은 매체가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유의 평을 양산했다. 이에 대해 조 힐은 “내 필명의 용도가 만기되었다. 내 바램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됐다.”고 아쉬워했다. 실제로 조 힐과의 인터뷰(http://www.nytimes.com/2007/03/18/magazine/18hill.t.html)를 통해 가장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한 ’뉴욕타임스‘조차 <하트 모양 상자>에 대해 ’조 힐의 단편보다 스티븐 킹의 작품에 더 가깝다.‘(“Heart-Shaped Box” is more like his father’s work than Hill’s short stories)고 평했을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뉴욕타임스’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 쪽이다. 오히려 <하트 모양 상자>는 단편집 <20세기 고스트>를 통해 보여준 조 힐의 특징적인 면모, 말하자면 그의 개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를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적으로 대중문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재료삼아 작품을 구성하는 솜씨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연상하셨겠지만 <하트 모양 상자>의 영문제목 ‘Heart-Shaped Box’는 너바나의 <In Utero> 앨범에 실린 동명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한 경우다. 물론 이 곡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구상한 것은 아니지만 <하트 모양 상자>는 제목의 경우에서 보듯 록에 대한 지식이 높을수록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예컨대, 주인공 주다스 코인의 경우,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주다스 프리스트의 보컬 롭 햅포드를 모델로 삼은 것 같은 인물이며 특히 이를 위시한 고스(Goth) 계열의 메탈 문화가 극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형국인 것이다.

안 그래도 조 힐은 <하트 모양 상자>에 대해 학창시절부터 즐겨 들었던 메탈 음악의 음산한 분위기를 소설로 구현하고 싶어 구상하게 된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아이팟에 저장된 귀신이라는 설정으로 단편을 쓸 예정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조 힐이라는 이름조차 본명의 앞글자만 따온 것 같지만 음악과 관련이 있을 정도다. 1900년대 초반 활동했던 음악가이자 기계공이었던 스웨덴 출신의 조 힐에게서 영감을 얻어 최종적으로 선택한 필명인 것. 이처럼 조 힐이 작품을 통해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오히려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음악의 관련성보다 <환상특급>과의 유사성을 언급하는 평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틀린 얘기는 아니다. 미국 현지에서도 <환상특급>은 물론 <하트 모양 상자>의 1/3 지점까지를 구성하는 ‘귀신 들린 집’이라는 콘셉트가 아이라 레빈의 <로즈메리의 아기 Rosemary’s Baby> 혹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닮았다는 언급도 많다. (어떤 미국 평자는 <샤이닝>에서의 부자 관계가 당시의 스티븐 킹과 조 힐의 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한다!) 조 힐 역시 이 같은 평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트 모양 상자>의 독자 몰입도가 다른 작품에 비해 높은 이유는 익숙한 대중문화의 요소를 솜씨 좋게 배치한 까닭이기도 하다.

스티븐 킹을 아버지로 둔 까닭에 대중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을 수 있었던 조 힐에게는 기존의 작품조차 자신의 소설을 구성하는 훌륭한 소재요, 이야깃거리다. 단편시절에 이미 카프카의 <변신>과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각각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로 오마주하고 <아브라함의 아들들>로 재해석하며 좋은 평가를 얻었는데 <하트 모양 상자>에서도 이 같은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스티븐 킹 세대가 일군 대중문화의 텃밭에 조 힐과 같은 자식 세대가 새로운 싹을 피웠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조 힐의 작품이 스티븐 킹의 작품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루는 인물의 성격에 있다. 이는 조 힐의 개성적인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두 번째 키워드라 할만하다. 스티븐 킹이 주로 중산층 가족의 공포를 다루는 것에 비해 조 힐은 비주류 인물들의 불행한 삶에 관심을 보인다. <하트 모양 상자>의 한물간 뮤지션 주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편집 <20세기 고스트>의 경우, 남과 다른 외모로 따돌림 당하는 아이(<팝 아트>), 일에 지친 잡지 편집자(<신간 공포 걸작선>), 지휘 능력이 형편없는 야구 감독(<집보다 나은 곳>) 등 낙오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그것은 귀신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조 힐의 세계에서 귀신은 인간에게 해코지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조 힐은 귀신에게도 사연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다. <20세기 고스트>에 실린 단편 <20세기 고스트>는 그런 작가의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이다. 더불어, <하트 모양 상자> 또한 결과적으로 동일한 메시지를 공유한 작품으로,주디가 양복 판매자를 찾아 나선 것은 자신을 쫓는 귀신의 사연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함으로써 결국 주디는 물론 귀신까지 해피엔딩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렇게 조 힐은 비주류 인생의 공포를 형상화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불행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모습에서 해피엔딩을 이끌어내며 해피엔딩과 언해피엔딩 사이에서 결정을 미루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자신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작가적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트 모양 상자’는 조 힐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은유라는 생각도 든다. 주디가 귀신에 쫓기는 것처럼 조 힐도 재능이라는 하트 모양 상자를 받았지만 그 속에 든 아버지의 명성이란 초자연적 존재(?)에 쫓기며 여기까지 왔다. 그의 지금까지의 작가생활 자체가 스티븐 킹이라는 거대한 우산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단편집 <20세기 고스트>에 이어 <하트 모양 상자>를 발표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명성을 얻은 현재 조 힐에게서 아버지의 꼬리표가 떨어질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영국에서 <20세기 고스트>가 발표되자 많은 이들이 “호러 장르를 재 발명했다”고 극찬했다. <하트 모양 상자>가 발표되고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영화 제작자 아키바 골즈먼(<핸콕><나는 전설이다>)은 영화 판권을 확보하며 “스티븐 킹의 아들이 아니라 작품이 매력적이어서 계약했다.”고 조 힐을 추켜세웠다. 조 힐은 스티븐 킹을 아버지로 둔 소설가가 아니다. 그냥 소설가일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10.5)

<폴링 엔젤>(Falling Angel)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포일러 주의!!
책 읽기를 방해할만한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폴링 엔젤>을 접하기 전이라면 먼저 책을 읽은 후 기사를 읽어주세요.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 엔젤>은 국내 팬들에겐 소설보다 이를 원작삼은 미키 루크와 로버트 드니로 주연, 알란 파커 감독의 <엔젤 하트>(1987)로 더 잘 알려졌다. 1978년 미국에서 <폴링 엔젤>이 처음 출간됐을 때도 현지 반응은 또 하나의 레이먼드 챈들러 풍의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 나왔다는 투였다. 하지만 <폴링 엔젤>은 레이먼드 챈들러를 모방한 그렇고 그런 탐정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을 적극 지지하는 스티븐 킹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소설이 딱 그렇습니다.’라고 추천했고 대중지 <The Sun>의 뉴욕판은 <폴링 엔젤> 발매 1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서 ‘윌리엄 요르츠버그는 초판 발매 당시 탐탁찮은 시장 반응에 파우스트적인 반전을 가했다. 독자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워 곧장 지옥의 심장 속으로 직행했다.’고 소설의 특징적 설정을 빌어 극찬했다.

이들의 표현처럼 <폴링 엔젤>의 미국 초판은 극중 뉴욕을 배경으로 악마의 날개를 활짝 편 총을 든 천사의 모습을 표지에 박아 넣었다. (국내 버전은 천사 대신 중절모를 쓴 탐정의 모습이 장식했다.) 그렇고 그런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경력에 일대 반전을 몰고 온 <폴링 엔젤>은 작가가 고등학교 시절 읽었다는 스티븐 빈센트 베넷의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에 영감을 얻어 쓴 단편소설에서 출발했다. ‘옛날 옛적에 악마가 사설탐정을 고용했다’ 피 끓는 젊은 시절에 쓴 단편소설의 첫 문장은 굉장히 직설적인 것에 반해 <알프>(1969) <회백질>(1971) <토로! 토로! 토로!>(1974) 등 4편의 장편소설 및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경험한 후 37세가 되어 완성한 <폴링 엔젤>은 은근히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며 노련한 방식으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챈들러 특유의 건조한 첫 문장에 종교적 암시를 노골적으로 덧씌운 것처럼 <폴링 엔젤>은 불가해한 사건에 휘말린 사립탐정의 10일 간의 행적을 다룬다. 뉴욕 666번가에 위치한 크로스로드 탐정사무소의 해리 엔젤은 1959년 3월 ‘13일의 금요일’ 루이스 사이퍼(악마 루시퍼를 의미한다!)의 의뢰를 받아 10여 년 전 실종된 가수 자니 페이버릿을 찾아 나선다. 어느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사라졌다는 실낱같은 단서를 추적하던 중 엔젤은 자니가 심각한 악마숭배자였음을 알게 된다. 얼마 되지 않아 자니와 관련한 인물들이 하나둘 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엔젤에게도 악마의 손길이 뻗치기에 이른다.

<폴링 엔젤>은 단순히 흥미위주로 하드보일드와 오컬트를 결합한 작품이 아니다. 이 소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드보일드 세계 속 사립탐정을 오컬트한 방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단죄한다. 그래서 <폴링 엔젤>은 대실 해밋으로 시작해 레이먼드 챈들러가 정점을 찍고 로스 맥도널드 등에 의해 유지된 하드보일드의 한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범죄소설 속 사립탐정의 역할변화, 즉 사립탐정의 사회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하드보일드의 사립탐정은 자본주의가 낳은 사생아 같은 존재다. 국가권력의 장악력이 소홀한 틈을 타 생겨난 이들 존재는 공권력의 손이 닿지 않는 시민들의 안전에 복무하는 대신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층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보디가드, 아니 부르주아가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일을 도맡아하는 비열한 거리의 청소부로 전락했다. 하드보일드의 탐정들은 자본주의와 손을 잡는 대신 선과 악 사이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박쥐같은 삶을 얻으면서 타락한 도시의 전설 같은 존재로 남게 된 것. 이는 마치 블루스의 신(angel) 로버트 존슨이 십자로(crossroad)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천재적인 음악성을 얻었다는 전설을 연상시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릭 클랩튼의 <원 모어 카 원 모어 라이더> 커버
로버트 존슨이 십자로 위에 서있는 차를 향해 걸어간다.
자니 페이버릿도 이렇게 영혼을 팔지 않았을까.



실제로 <폴링 엔젤>의 해리 엔젤이 찾으려는 스윙가수 자니 페이버릿은 여러 모에서 로버트 존슨을 모델로 한 혐의가 짙다. 극중 사이퍼가 자니 페이버릿을 일러 “홍보담당들은 그를 벼락스타라고 불렀지요.”라고 말한 것처럼 로버트 존슨은 활동기간 중 2년 동안 명곡을 양산했다. (로버트 존슨은 1936년부터 재능을 뽐내다 1938년 2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또한 악마숭배자인 자니 페이버릿처럼 로버트 존슨 역시 부두 마법을 통해 악마를 만났다는 소문이 파다한 인물이었다. 하여 윌리엄 요르츠버그는 로버트 존슨의 거짓말 같은 전설을 하드보일드 소설에 이식해 영혼을 판 탐정의 대가가 무엇인지 비열한 도시의 전설에 비수를 꼽는다.

<폴링 엔젤>이 하드보일드로 시작해 오컬트로 끝을 맺는 건, 그래서다. 윌리엄 요르츠버그가 오마주를 바쳤다는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의 책이 시리즈였던 것에 반해 <폴링 엔젤>이 단 한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처럼 단 한 번만 가능한 트릭을 구사하는 작품이다. (이와 관련, 재미난 홍보문구가 있어 소개한다. ‘<폴링 엔젤>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듣지 못했다면 소설의 마지막 순간 경악할 것이다. 그것처럼 당신이 수다쟁이 같은 입을 영원히 다물면 살인을 저지르고도 무죄를 선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하드보일드 소설 속 범인은 항상 체포되고, 표면적이었을지언정 정의가 실현된 것에 반해 <폴링 엔젤>은 오히려 탐정이 체포되기에 이르고 그럼으로써 시끄럽던 사회는 조용해진다. (그럼 필자는 무죄를 선고받기 그른 건가?)

이 책이 발표된 1978년은 <악마의 씨>(1968)부터 <엑소시스트>(1973), 그리고 <오멘>(1976)까지, 할리우드에 오컬트 붐이 한차례 지난 후였다. 흥미롭게도 <악마의 씨>와 <엑소시스트>와 <오멘> 모두 상류층 가문의 자제들에게 악마의 기운이 스며들어 그 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불길한 결론을 도출했다. 이제 부르주아(가 비호하는 자본주의)는 악마의 다른 이름이다. 급기야 <폴링 엔젤>에서는 ‘기업의 대표’로 등장한 사이퍼가 자본주의의 청소부였던 탐정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립탐정의 역할은 낡은 가치가 되었기에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폴링 엔젤>에서 보이는 것처럼 해리 엔젤로 대표되는 탐정의 몰락은 곧 새로운 세계, 아니 더욱 강력한 악의 세계의 도래에 대한 징후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당시 하드보일드 소설의 인기가 시들면서 이를 대체한 범죄소설은 다름 아닌 스파이물이었다. 자본주의 파수꾼이 탐정에서 스파이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국가권력이 냉전체제로 말미암아 강력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국가가 선이라고 믿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이는 윌리엄 요르츠버그가 극중 시대적 배경을 1959년으로 정한 까닭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을 빌면, “시대 배경은 1959년일 수밖에 없었다. (중략) 1959년은 60년대로 나아가는 문턱이었지만 과거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중략) 새 천년이 도래한 시점에서 볼 때, 1959년은 과거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해였다.”

<폴링 엔젤>은 픽션이지만 해리 엔젤이 열흘 동안 겪는 이야기의 시공간적 배경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 이는 한편으론 이 장르가 현실의 지면에 얼마나 끈적끈적하게 발을 붙이고 있는지를 역설하는 하나의 예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폴링 엔젤>은 재미도 재미지만 자본주의의 은밀한 내적 변화에 맞춰 범죄소설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하드보일드가 이끈 한 시기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범죄소설에 바통을 넘겨주는 범죄소설사(史)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9.28)

<내가 죽인 소녀>(私が殺した少女)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책 읽기를 방해할만한 정보가 담겨 있으니 유의바랍니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 시리즈’로 유명한 레이먼드 챈들러가 현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폴 오스터부터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대가로 인정받는 작가들이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건 이제 너무 유명한 일이 됐다. 영화와 소설할 것 없이 탐정물의 주인공 캐릭터에게서 필립 말로우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일종의 클리셰(Cliché 관습적 표현)로 취급될 정도다. 하라 료도 그런 작가 중 한 명에 속한다. 다만 하라 료만큼 레이먼드 챈들러의 비열한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구현한 작가는 본 적이 없다.

하라 료의 소설가로써의 인생 자체가 레이먼드 챈들러를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다 필립 말로우 시리즈를 읽고는 소설가로 직업을 바꾼 것. 신주쿠에 사무실을 둔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를 주인공으로 한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1988)의 첫 문장 ‘가을도 저물어 가는 어느 날, 오전 10시쯤이었다. 모르타르를 칠한 3층짜리 잡거빌딩 뒤편 주차장에는 매년 그렇듯 주위에 나무 한 그루 없는데도 낙엽이 잔뜩 깔려 있었다.’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소설 <빅 슬립>의 첫 문장 ‘10월 중순 오전 11시경이었다. 햇빛은 비치지 않았고 선명하게 드러난 산기슭에는 거센 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를 거의 필사(筆寫)했을 정도고,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1995)는 제목부터가 벌써 <빅슬립 The Big Sleep>(1939)과 <안녕 내 사랑>(1940)을 조합해 패러디한 경우다.

하라 료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한 세계와 특유의 문체를 일본을 배경으로 탈바꿈해 사와자키 시리즈를 완성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안작(贋作), 즉 패러디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흥미롭게도 두 번째 편인 <내가 죽인 소녀>(1989)에는 안작소설가가 등장한다. 안작소설가의 의뢰를 받은 사와자키가 의뢰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딸을 ‘돌려 달라’는 의외의 애원을 듣게 된 것. 영문도 모르는 사와자키는 안작소설가의 딸이자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유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된다. 설상가상으로 진짜 유괴범의 요구에 돈 가방을 전달하는 역할까지 맡지만 불의의 습격에 돈 가방을 잃으면서 사와자키는 사면초가에 놓인다. 

실제로 <내가 죽인 소녀>의 구성은 ‘안작’을 키워드로 흘러간다. 전체적인 구성은 <빅슬립>과 유사하게 가족의 음모와 관련이 있고, 특히 돈 가방을 든 사와자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는 유괴범의 요구에 따라 카페를 전전하는 모습은 <더티 해리>(1971)의 특정장면을 연상시킨다. 경찰 해리 칼라한(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소녀를 유괴한 연쇄살인범의 지시에 따라 (역시 돈 가방을 든 채!) 공중전화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장면과 정확히 일치한다. 게다가 사와자키가 소녀의 유괴와 관련해 겪는 일련의 사건이 짜인 각본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에 이르면 <내가 죽인 소녀>가 의도한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된다.

하라 료는 모방과 창조의 경계에 위치한 안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사와자키 탐정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디테일로 활용한다. 사와자키는 이미 탐정사무소를 함께 열었던 동료에게 8년 전 크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어 세상을 믿지 않는다. 그 때문에 경찰에게도 찍혀(?) 동료의 배신을 원죄처럼 안고 살아간다. 사와자키는 고독한 존재다. 웬만해선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경찰에겐 범죄자 취급당하기 일쑤고 일반인에겐 조롱의 대상이다. 그래서 강하다. 강하지 않고서 이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애초 희망 따위 품지 않고 선과 악 사이에서 박쥐처럼 살아갈 뿐.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에 다름 아니다. 돈을 위해, 출세를 위해, 명예를 위해, 가족의 안위를 위해 선과 악의 살얼음판 위에서 질주하는 우리라고 사와자키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사와자키의 강함은 불의에 맞서는 정의라기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방어책이다. 한 발의 총알보다 뼈 있는 농담 한 마디가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힌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체화했다. 이렇게 지진이 발생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시멘트 같은 사와자키에게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존재한다. <내가 죽인 소녀>가 그렇다. 제목에서처럼 소녀의 시체 앞에서 사와자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아이가 죽어나가는 세상은 절망적이다.

아마 이 지점이야말로 하라 료와 레이먼드 챈들러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일 듯하다. 사실 하드보일드는 시간과 공간에 가장 밀접하게 반응하는 장르다. 시간과 공간은 추리물로써 사건을 해결하는 열쇠이고, 당대를 반영하는 문학으로써 시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체를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타락한 사회라는 사실은 불변하지만 이를 가능케 하는 사회의 환부는 미국과 일본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1940년대와 1990년대의 시간 차이만큼이나 천차만별인 것이다. (필립 말로우의 등장 이후 미국의 사립탐정에게 중절모와 트렌치코트가 하나의 도상의 됐듯 사와자키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 탐정물의 주인공은 반드시 블루버드를 모는 것이 관습이 된 것처럼!) 레이먼드 챈들러의 세상에서 적어도 아이는 희생자의 목록에 들지 않았다. 하라 료가 하드보일드를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는 평가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시리즈 중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일본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다. 그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올랐고 대중소설가에게 가장 큰 상으로 알려진 ‘나오키상’까지 수상했을 정도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대중문화로 취급받던 추리소설을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렸듯이 하라 료는 챈들러의 세계와 문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로써 안고 있는 정체성을 그대로 극에 대입해 개별적인 작품으로 승화하는 놀라운 문학적 능력을 과시했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면, 필립 말로우를 최고의 탐정 캐릭터로 꼽는다면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지만 일본 탐정소설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다면, 하드보일드한 세상의 극단을 맛보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9.7)

<스탠드>(The Stand)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삼스레 스티븐 킹의 <스탠드>가 각광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 <스탠드>가 소개됐고 그로 인해 서점가에서는 이 책의 판매량이 늘어났으며 실제로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경우, 판매순위가 무려 10,000등 이상이나 상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게 다 그 놈의 ‘신종플루’ 때문이다. 

미국에서 1978년 처음 발표되고 1989년 완전판이 발매된 이후 2007년에야 한국에 정식으로 소개된 <스탠드>는 (<미래의 묵시록>이란 제목으로 1996년 축약판이 소개된 적이 있다.) 신종 독감 바이러스가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간다는 설정이 최근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와 맞물리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무려 원고지 9,000매에 달한다는 (국내에는 총 6권으로 출간된) <스탠드>는 실은 꽤 간단한(?) 이야기다.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실험하던 독성 강한 감기 바이러스가 유출돼 삽시간에 시민 대다수가 목숨을 잃고, 천만다행으로 면역력을 품고 있던 소수의 인간들이 살아남아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재구성한다는 것. 굳이 <스탠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은 <미스트> <셀> 등 적지 않은 수의 지구 종말 소설을 발표했다. 개중 <스탠드>를 더욱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바로 ‘현실성’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스탠드>의 구상에 대해, “친분 있는 의사로부터 일정한 주기로 변이를 일으키는 독감의 특성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킹의 말마따나, 요 몇 년 사이 조류독감에서 돼지독감으로 변이를 일으킨 사례만 보더라도 <스탠드>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법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아니 벌써 유행으로 번져 하루가 멀다 하고 감염자가 늘어날 뿐 아니라 사망자도 속출한다는 점에서 <미스트> <셀> 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실제로 두 작품은 <스탠드>와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사건 발생의 계기에는 다소 황당한 측면이 존재한다. <미스트>가 차원의 문을 뚫고 나온 안개 속의 괴생물체를 앞세워, <셀>이 ‘폰 사이코’로 지칭되는 일군의 좀비를 앞세워 종말론적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라 할지라도 <스탠드>에 대항(?)하기에는 현실과 괴리된 약점이 너무 커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스탠드>는 독감으로 몰락하는 세계,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그것은 곧 변종독감의 맹위에 따른 과학의 종말이 마법의 부활을 부르고 각각 선과 악으로 편을 가른 이들 진영이 극단적인 전쟁을 통해 대립하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스티븐 킹은 과학과 마법이라는 상징적인 키워드를 통해 잿더미로 화한 문명 속 이성이 눈을 감고 두려움이 눈을 뜨는 지점에서 사람들의 혼란을 극대화한다. 가족, 친구, 친지 할 것 없이 독감으로 모두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기에 측정할 수 없고 예상할 수 없으며, 그래서 보이지 않는 마법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더욱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스티븐 킹의 특기다. 킹의 진가는 상황의 묘사보다 오히려 심리묘사에 있다. <스탠드>는 사건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기보다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 인물들의 극한 심리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겉보기엔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스탠드>는 결국 사람들 마음속의 심리적 종말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이 사라진, 마법과 본능만이 살아남은 시대에서 과학과 마법은 대립하고 이성과 본능은 서로를 파괴하려 날카로운 이빨을 번득인다. <스탠드>가 제시하는 종말의 풍경은 과학과 이성으로 제어되던 인간의 벌거벗은 본성을 드러내는 시험대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시험대를 통과하고 다시 과학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야기를 읽을수록 자꾸 궁금해지는 이유는 현재 신종플루와 직면한 우리의 일련의 혼란스런 행동들과 극중 묘사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탠드>는 종말의 풍경을 묘사한 이야기라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 혹은 일말의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두려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스티븐 킹은 이에 대해 확신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우리가 저 아이한테 이제껏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 준다면, 저 아이는 자기 자식들한테도 이야기해 주겠지. 자손들한테 경고하는 것이지. (중략) 제발 과거의 교훈을 배우렴. 이 텅 비어 버린 세상을 너희 교본으로 삼도록 하려무나.’
“프래니”
스튜가 몸을 돌려 프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인데, 스튜어트?”
“너는…… 너는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에서 조금이라도 배우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
프랜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머뭇거리더니 침묵에 빠졌다. 등유 램프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프랜의 눈빛이 매우 우울해 보였다.
“나는 모르겠어.”
프랜이 마침내 말했다. 자신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듯싶었다. 뭔가 더 말하려고 기를 썼다. 첫 번째 답변을 해명하려고. 그러나 그저 되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르겠어.”

신종플루가 창궐하고 있는 작금에 <스탠드>를 생각하면 얼마나 획기적인 작품이었는지 놀라울 정도다. 킹은 이미 30여 년 전에 독감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세상에 퍼져 혼란을 일으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좋은 소설은 독자를 즐겁게도 하지만 미래를 예측해 간담을 서늘케도 만든다. 그래서 <스탠드>는 내게 가장 무서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겠지만 소설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스탠드>는 바로 그런 걸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8.27)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의 한국 사회는 곳곳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망각한 것만 같다. 지난 며칠간만 하더라도, 우리 남편 살려달라고 한나라당을 방문한 쌍용차노조 부인들이 문전박대에 가까운 무시를 당했고,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에게 수모를 당한 동남아 이주민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부당함을 호소했으며, 전자바이올리니스트 유진박은 1년 넘게 여관에 감금된 채 전 소속사 대표로부터 공연비 수억 원을 갈취당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인권 유린 소식을 접하면서 생각나는 소설가가 한 명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사회파 미스터리는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추리물로 구성한 작품을 말한다. 최근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를 일러 일상과 사회를 연결시킨다는 점에 주목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라고 할 정도로 마쓰모토 세이초가 일본 문단에 남긴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지난해 개인적으로 미야베 미유키를 만나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는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일본에서도 제 소설이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점에서 종종 마쓰모토 세이초와 비교하곤 해요. 하지만 마쓰모토 세이초는 작품의 범위가 굉장히 넓어요. 일본의 추리소설사(史)에 길이 남을 인물이면서 대표적인 논픽션 작가이고 일본 고대사 연구도 하셨죠. 마쓰모토 세이초가 큰 부분을 다루고 있다면 저는 그 중 아주 작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 얘기를 듣곤 잠시 의아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미스터리 작가 아니었나? 그도 그럴 것이, 이전까지 국내에 소개된 세이초의 작품은 <점과 선> <제로의 초점> 단 두 편의 장편에만 한정돼 있어 그의 진면목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드디어 세이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선집이 나왔다.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이하 <세이초 컬렉션>)은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1909년 출생) 백주년을 맞아 국내에 출간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미야베 미유키가 직접 책임 편집을 맡아 작품을 엄선하고 해설까지 덧붙인 까닭에 마쓰모토 세이초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상, 중, 하 세권으로 기획된 이번 컬렉션은 평생 일백편이 넘는 장편을 남겼으면서도 단편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세이초의 작품 범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현재 상과 중이 시중에 출간된 상태다!) 추리는 물론, 시대극에 역사소설, 그리고 고대사 연구까지.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사회파 미스터리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미야베 미유키가 <세이초 컬렉션>의 첫 작품으로 인물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전기소설 ‘어느 <고쿠라 일기>전’을 꼽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까, 마쓰모토 세이초를 사회파 미스터리에만 국한하는 건 일종의 편협한 시각이다. 다만 그의 세계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인간’, 좀 더 덧붙이자면,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세이초의 작품에서 전면에 나서는 주인공은 사회에서 소외받거나 비주류이고 웬만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인물이 대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어느 <고쿠라 일기>전’만 하더라도 주인공인 다노우에 고사쿠는 ‘입을 맥없이 벌린 채 침만 흘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아 질질 끌고 다니’는 지금의 대중문화 관점에서 보자면 매력 빵점의 인물인 것이다. 세이초는 그런 인물을 주인공 삼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에 열중하며 삶의 동력을 얻고, 자기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이의 일생을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다.

‘어느 <고쿠라 일기>전’에서 감지되는 인간 본위의 화법은 단순히 형식 자체가 전기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추리가 중심이 되는 미스터리 작품에서도 마쓰모토 세이초 특유의 화법은 빛을 발한다. 그의 작품에서 사건 해결은 첨단의 과학수사나 주인공의 특출한 능력이 아닌 철저히 인간 행동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가령, ‘지방지를 구독하는 여자’에서는 지방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3류 작가가 처음으로 독자를 얻게 될 때 생기는 감정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 ‘일 년 반만 기다려’ 같은 경우, 우리가 소위 악인이라고 부르는 이의 시점에서 글을 서술함으로써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이들의 행동마저도 이해하려고 든다. 그래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에는 절대 악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복잡한 사회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 모두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TV와 뉴스에서는 쌍용차 사태와 관련, 공권력이 투입된 이후의 아수라장 같은 상황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이 왜 시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절박한 심정을 헤아릴 생각 없이 시위 자체의 불법성만을 문제 삼아 공권력 투입만이 능사인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는 MB정권의 태도를 보면 과연 이들에게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이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최우선하는 철학이 마쓰모토 세이초와 같은 특정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권을 잡고 있는 정치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그 날이 오기를, 그런 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8.5)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이번엔 국내 신종 플루 감염자가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독감바이러스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스티븐 킹의 <스탠드>를 소개하려 했다. 근데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를 지켜보면서 <브이 포 벤데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브이 포 벤데타>는 <왓치맨> <젠틀맨리그> 등의 원작자로 유명한 앨런 무어의 만화(Comics)다. (앨런 무어는 DC코믹스와 같은 대형 출판사들이 마케팅을 목적으로 지어낸 용어라며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한다!) 강력한 통제사회로 변모한 영국을 배경으로 시대의 혁명아 ‘V’가 홀연히 나타나 순한 양처럼 국가질서에 순응하는 시민들의 정신을 각성해 체제를 전복한다는 이야기. 국내에서는 워쇼스키 제작의 영화를 통해 <브이 포 벤데타>를 접한 사람이 많지만 V(휴고 위빙)의 슈퍼히어로적인 면모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만화의 정수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만화 <브이 포 벤데타>는 한마디로 혁명교본이다. 앨런 무어는 권력의 광기가 민중을 압제하는 시대에 혁명이 어떻게 이뤄지고 성공에 다다를 수 있는가를 데이비드 로이드의 느와르풍 그림을 빌어 300페이지 분량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브이 포 벤데타>가 묘사하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 즉 탐욕스러운 정치가가 공포정치 및 언론 통제 등을 통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설정이 지금의 한국과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권좌를 잡은 다수당이라는 이유로 반대 의견을 가진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정권에 반하는 움직임이 생기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응징하는 MB적 진압까지, <브이 포 벤데타>는 배경을 지금의 한국으로 옮겨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흡사한 면모를 지녔다.

앨런 무어는 극중 V의 대사를 통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면서 (지금의 대통령을 선출한 건 정말 국민의 실수라고밖에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신은 그저 ‘안 돼’라고만 말하면 된다.”고 선동한다. 사회가 이 지경인 상황에서 대다수가 침묵해서는 우리의 자유와 인권을 지킬 수 없으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대 의사를 밝히자는 것. 물론 그렇게 행동하는 시민들을 향해 소통을 거부한 지도자는, 그런 지도자에 머리 조아리는 측근들은 무질서를 좌시할 수 없다며 불법적인 시위는 단호하게 처벌하겠다는 경우를 우리는 TV를 통해, 신문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그리고 거리에서 매일, 매시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모인 촛불의 무법은, 용산 철거민 사태에 따른 경찰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민중의 목소리의 무법은, 기득권 세력을 제외하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미디어법에 분노하는 거리 시위의 무법은 말 그대로의 무법(無法), ‘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법과 동등한 의미와 지휘를 갖는 ‘진정한 리더의 부재’라는 뜻에서의 무법인 것이다.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에 따르면, 무법과 함께 새 나라, 새 질서의 시대가 도래하나니, 그들만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잔해 위해 깨끗한 캔버스를 만들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잔다.  

말은 쉽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혁명이란 계급을 갈아엎는 폭력과 같아서 지적이고 교양적인 방식으로는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브이 포 벤데타>가 많은 장(章)을 할애해 공들여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비는 방송국에 근무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인권말살의, 자유억압의 부조리한 상황을 맞이해도 그저 ‘나 하나쯤이야’ 혹은 ‘우린 안 될 거야’라는 생각으로 침묵하는 다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앨런 무어는 그런 보통 사람들의 각성이야말로 이 사회를 바꾸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의 인간 개조에 가까운 과정을 겪으며 혁명전사로 거듭난 이비를 통해 자유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혁명은 필연적으로 폭력이 따를 수밖에 없기에 고통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유 수호를 위해, 민중해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브이 포 벤데타> 속 독재자의 이름은 아담이다. (그럼 우리의 아담은 하느님께 수도를 봉헌한 이가 되는 건가?) 광기의 어둠에 휩싸인 아담은 결국 이비, 바로 이브가 창조한 새 질서의 아침에 항복하고야 만다. 태초에 아담이 (먼저) 있고 이브가 있었지만 이제 이브가 있고 아담이 있다. 국민이 있어야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지 정치가의 이득이 민생을 우선할 수 없다. 극중 V는 이렇게 말했다. “무법과 함께 질서의 시대가 온다. 진실한 질서는 자발적인 질서를 말한다.” 승리의 ‘V’는 ‘안 돼’라고 외치는 순간 비로소 이뤄진다. 

덧붙여, 이 기사는 ‘절대’ 혁명을 선동하는 글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오해’다. 강조하지만 이 기사는 <브이 포 벤데타>를 소개하는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란 단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 분들이라면 원래 이 만화가 그런 것이니 <브이 포 벤데타>의 한국어판을 출간한 출판사를 원망하실 일이다. 친절하게 알려드리자면, 전 재산 29만원 밖에 없는 전직 대통령의 자제분이 운영하는 ‘거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7.30)

<전쟁 전 한 잔>(A Drink Before The War)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옥 같은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의 부자를 위해 99%의 서민이 착취 받는 국가? 나라님을 보좌한답시고 경찰이 국민을 폭력으로 짓밟는 나라? 아이의 건강을 사수하기 위해 촛불을 든 부모는 구속되면서 탈세한 대기업의 사주는 검찰의 비호 속에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 결국 이런 꽃 같은 경우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여과 없이 체득되는 곳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데니스 루헤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현재 할리우드가 가장 선호하는 작가다. <미스틱 리버>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가라, 아이야, 가라>를 벤 애플렉이, <살인자들의 섬>을 마틴 스콜세지가, <기븐 데이>를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했거나 연출 중이거나 연출할 예정일 정도로 할리우드가 그에게 쏟는 관심은 그야말로 절대적이다. 이를 두고 데니스 루헤인의 국내 전속번역가(?)로 잘 알려진 조영학은 “그 흔한 추격 장면 하나 없는 탐정 소설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루헤인은 특히 등장인물들의 개성을 극한까지 드러내는데 많은 정성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캐릭터가 곧 이야기임을 천명하는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데니스 루헤인의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현재까지 총 다섯 편이 발표됐다. 국내에는 4편과 5편인 <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에 이어 1편인 <전쟁 전 한 잔>이 뒤늦게 번역됐다. 특히 <전쟁 전 한 잔>은 하드보일드소설의 전무후무한 남녀 사립탐정 커플인 켄지와 제나로의 보스턴을 무대로 한 활약상이 처음 소개되는 만큼 시리즈가 지향하는 주제와 핵심 정서가 모두 담겨있다는 점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시리즈가 소개하는 첫 번째 의뢰가 상원의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그것이 흑인 청소부가 가져간 사진과 관계있다는 점, 그녀를 찾자마자 지역 갱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에게 습격을 받는다는 점, 암살자의 정체가 새파랗게 어린 아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기성세대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전 한 잔>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시리즈가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된 미국 사회의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 즉 고위층 사이에 뿌리내린 비리와 이를 위장하기 위해 인종 차별과 청소년 범죄,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이 방조되는 사회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니스 루헤인이 보여주고 있는 보스턴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다. 솜털 뽀송뽀송한 아이들마저 타락한 어른들의 사리사욕에 휘말려 일상을 범죄에 내맡긴 채 파리처럼 죽어나가기 일쑤인 보스턴은 지옥의 다른 이름이다. 안 그래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온전한 적이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범죄에 휘말려 싸늘하게 죽어나가거나(<가라, 아이야, 가라>), 유년시절에 겪은 사건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미스틱 리버>) 일쑤다. (두 편의 소설이 데니스 루헤인의 걸작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켄지와 제나로가 맞닥뜨리는 사건의 결말은 늘 이런 식이다.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이런 광경을 마주하고 제정신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아무리 냉소와 비아냥거림, 그리고 권총 한 정으로 세상과 ‘맞짱’뜨는 미국의 사립탐정이라고 해도 위안거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켄지와 제나로에게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뿐이다. 사랑이야 말로 이들의 유일한 희망이요, 안식처다. 그러니까 범죄의 도가 더할수록 이들의 사랑도 더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의 사랑은 보스턴의 범죄가 낳은 불행한 씨앗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켄지와 제나로의 관계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범죄는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하고 서로에게 위안 받으려는 욕망은 더욱 커지고 이는 급기야 있지도 않은 자신들의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까지 이어져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니, 그래서 권(卷)을 더할수록 미묘하게 변해가는 켄지와 제나로 사이의 감정이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닉 혼비는 저서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중 한권인 <비를 바라는 기도>를 두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인공이 왜 매력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며 “<미스틱 리버>야말로 데니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미스틱 리버>가 걸작인 것은 사실이지만 혼비의 말에는 100% 동의하지 못하겠다. 루헤인 최고의 작품은 다름 아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니까.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범죄와 사랑이라는 모순된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하여 켄지와 제나로의 정체성으로 화한다는 것을. 그래서 켄지와 제나로의 삶이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이 비극적인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배경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옥 같은 상황과 다르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작 <비를 바라는 기도>를 읽고 시리즈를 평가하는 편협함이라니. 나는 닉 혼비의 <하이 피델리티>를 사랑하지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에 비하면 63빌딩 높이만큼이나 저 아래 순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7.9)

<경관의 피>(警官の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본 기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경관과 경찰을 혼용해 사용합니다.

최근, 아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찰력이 자주 도마에 오르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임을 자처하는 경찰들이 어찌된 일인지 국민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일이 잦아진 까닭이다.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할 이들이 도리어 국민의 안위에 위협을 가하면서 과연 경찰의 정체가 무엇인지 국민들은 헛갈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의를 선도하는 천사? 불의를 조장하는 악마?

현재 일본에서 가장 각광받는 미스터리소설은 바로 경찰물이다. 공동체 정신이 급격히 무너지고 사회가 극도로 개인주의화되면서 과거 생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 과정에서 경찰의 역할 역시 커지게 됐는데 그에 대한 관심이 경찰물의 인기를 불러온 것이다.

이 같은 사회 변화에 맞춰 현재 일본에서는 경찰물에 무관심하던 작가들의 전향이 이어지는 추세다. 단적인 예가 바로 사사키 조다. 1979년 <철기병, 날았다>로 데뷔한 그는 이후 첩보, 모험, 전쟁, 역사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선 굵은 필치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후 2006년 <웃는 경관>을 필두로 경찰물로 전향했는데 2007년 <제복수사>에 이어 2008년 발표한 <경관의 피>는 그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손자로 이어지는 경관 삼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미스터리한 사건을 축으로 전개되며 세계2차 대전 후 일본 60년 현대사와 함께 장대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제목의 ‘경관의 피’가 지칭하는 것은 단순히 주인공 삼대의 ‘혈연학적’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에 더해, 경관의 정체성까지 탐구하는 ‘직업적인 피’까지.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중의적이다. 전후(戰後) 급박하게 발전해온 일본 사회상에 맞춰 진화해온 범죄에 대항해 경찰의 역할 역시 변화한 것이다. 그 과정은 결국 경찰의 역할, 즉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전통적인 검거 방식으로 첨단화되는 범죄를 막을 수 없었기에 경찰 또한 발 빠른 변신을 꾀한 것. 그래서 <경관의 피>는 일본 60년 현대사에 자행된 다양한 범죄의 스펙트럼을 통해 경찰의 존재를 탐구한다.

그것은 극중 주인공 삼대가 모두 경관으로 근무하지만 맡은 바 역할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대 안조 세이지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경관이 되어 혼란한 전후 지역사회의 안전에 봉사한 인물이고, 2대 안조 다미오는 세상을 변혁하려 했던 일본 젊은이들의 저항이 빈번하던 1960, 70년대 경찰이 되었다. 다만 적군파에 잠입, 이들을 감시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까 번민의 나날을 보냈던 비밀경찰이었다. (작가는 그 유명한 ‘아사미 산장 사건’을 가져와 이야기를 구성했다!) 그리고 3대 안조 가즈야는 범죄가 날로 기업화되어가는 1990년대 초반, 선배의 비리를 감시하는 경찰로 복무한다. 그 역시 후에는 비리 혐의로 의심을 받게 되는데 이는 범죄자와 같은 조건, 즉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범죄를 소탕할 수 없는 현대 경찰의 짓궂은 운명을 보여준다.

세이지에서 다미오, 그리고 가즈야로 이어지는 경관 삼대의 운명은 백(白)에서 흑(黑)으로 점차 이동하는 경찰의 역할을 증명하는 좌표와 같다. 세이지가 활약하던 당시 오로지 선의 가치를 추구하던 경관은 다미오에 이르러 선과 악 사이에서 경찰의 역할에 대해 혼란을 겪은 후 결국 가즈야 대에서 선과 악으로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는 회색의 존재로 선회했다. 모든 죄가 상대적인 것으로 가치, 판단되는 작금에 경찰에 대한 평가도 상대적인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사키 조가 경찰을 규정하니 그들은 ‘경계에 선 인물’이다. 극중 가즈야의 말을 빌자면, “우리 경관은 경계에 있다. 흑과 백, 어느 쪽도 아닌 경계 위에 서있”는 것이다.

범죄는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라고 했지만 사사키 조가 보기엔 경찰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 역시 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굳이 <경관의 피>가 아니더라도 현재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경찰들의 활약(?)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사회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촛불을 켜는 것만으로, 광장으로 진출하는 것만으로 시민을 잠재적인 폭도로 몰아붙이는 경찰의 행동에서 우리는 공안정국을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지지 못하는 현실은 정부의 방패막이 혹은 꼭두각시로 전락한 경찰의 신세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경관의 피>와 같은 경찰물이 의미를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경찰물은 예전에도 존재했다. <경관혐오>로 유명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같은 경우, 경찰물의 걸작으로 꼽히지만 <경관의 피>처럼 역사학자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삼대에 걸친 경관의 존재를 탐구하기 위해 경찰 내부는 물론 전후 일본 60년사까지 뒤진 사사키 조의 방대한 취재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여기에는 소설을 단순히 오락이 아닌 역사로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다. <경관의 피>는 일본의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진정 걸작이라 불러 마땅한 작품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6.9)

<화씨 451>(Fahrenheit 45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책이 사라지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이미 1953년에 이를 예견한 사람이 있다. 바로 레이 브래드버리(Ray Douglas Bradbury)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서 C. 클라크(<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라마와의 랑데부>),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파운데이션>) 등과 함께 SF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작가다. <화씨 451>(Fahrenheit 451)은 그의 대표작으로, 책이 사라진 미래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

제목은 ‘책이 불타는 온도’를 상징한다. 주인공 가이 몬태그는 책을 찾아 태우는 방화수(fireman)다. 책을 태우는 이유는 독서가 불법으로 규정됐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비판정신이 생긴다는 이유로 오래전부터 정부가 금지한 것이다. 그러니까 <화씨 451>은 사상이 통제되는 사회에 경고를 보내는 작품이다. 다만 통제사회라는 결과에 대해 그 책임을 세계 지배의 야욕을 드러내는 정치가 또는 기업가에게 묻지 않는다. 오히려 대다수의 일반인들에게 묻고 있다는 점에서 <화씨 451>의 진가가 드러난다.

번역한 박상준은 이 책을 두고 “시대가 바뀔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메시지를 담아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안 그래도, <화씨 451>을 읽다보면 기시감을 느끼는 순간을 자주 접한다. TV의 가상현실이 실제현실을 압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즉각적인 반응에 익숙해진 세태 속에서 깊이 있는 생각과 진지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 그래서 책을 읽지 않아도 전혀 부끄럽거나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소설 속 현실은 놀라울 정도로 현재와 닮았다. <화씨 451>의 초판이 1953년에 발행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레이 브래드버리가 보여준 통찰력은 가히 노스트라다무스급 예언에 가깝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책이 없어진 사회의 즉각적이고 말초적인 감정의 대척점에서 회복해야 할 가치로 자연을 꼽는다. 자연이야말로 물질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료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작품 철학이다. <화씨 451>뿐 아니라 <민들레 와인>에서도 확인된 바, 정신을 도외시하는 현실에 우려하며 자연을 회복하는 것, 즉 정신적인 삶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는 것이 아닌 자연과 물질의 조화를 호소하는 것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늘 대상의 양면성을 바라보는 너른 자세로 문학성을 높여 왔다. 이는 <화씨 451>의 주요 이미지인 ‘불’을 다루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을 태움으로써 인간성을 말살하는 ‘부정적인’ 불이 있는 한편엔 추위에 떠는 인간의 몸을 따스하게 해줄 ‘긍정적인’ 불이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이 불이듯 인간의 무지를 구원할 빛이 책이라는 사실을 <화씨 451>은 역설한다.

우리가 소위 SF(Science Fiction)라 부르는 환상문학은 미래를 밝혀주는 빛과 같은 존재다. 훌륭한 환상문학을 읽다가 감탄하게 되는 건 작가의 상상력보다 실제성에 있다. 흔히 한국 사람들은 환상문학에 대해 미래를 배경으로 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물론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기에 정확도는 떨어질지언정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토대로 미래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현실친화적인 것이 환상문학이다. 그런 점에서 <화씨 451>은 뛰어난 환상문학이다. <화씨 451>은 책이 사라져가는 시대의 파수꾼으로 손색이 없는 소설이다.


          덧붙여,
          마이클 무어는 이 책의 제목을 빌어 <화씨 9/11>을 제작할 수 있었으며 1966년 프랑소와 트뤼포에
          이어 현재 프랭크 다라본트(<미스트><쇼생크 탈출>)가 <화씨 451>의 영화화에 착수했다. 가이 몬
          태그 역에 톰 행크스가 물망에 올랐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딴지일보
(200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