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시대> 탕웨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해 부산영화제의 최고 스타를 꼽자면 단연 탕웨이였다. 김태용 감독과의 결혼 이후 첫 공식 석상이기도 했던 부산영화제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불렀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영화 관련, 각종 지면에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샤오홍으로 분하다

그녀가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이유는 신작 <황금시대>가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심플라이프>(2012)의 허안화 감독이 연출한 <황금시대>에서 탕웨이는 서른한 살에 요절한 중국의 1930년대 여류 작가 샤오홍으로 분했다.

사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샤오홍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글쓰기로 이를 이겨낸 작가였다. <황금시대>는 생전에 샤오홍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의 진술로 샤오홍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가 입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사의 강>(국내에도 출간되어 있다!)을 읽은 지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가난과 굶주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이렇게 몸서리쳐지게 쓴 글은 처음 봤어요.”

경우는 다르지만, 탕웨이 또한 <황금시대>의 샤오홍을 연기하기 위해 3년을 기다렸다. 샤오홍이라는 인물이 중화권에서 유명할지 모르지만, 서구 관객에게는 낯선 인물이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대극의 특성상 투자가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탕웨이는 샤오홍을 연기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직감했다. 긴 시간을 기다린 것은 물론, 아예 ‘노 개런티’로 이 영화에 참여했다. 자신과 닮은 점이 많아 샤오홍에 애착이 갔기 때문이다.

샤오홍이 할아버지로부터 문학에 대해 배웠던 것처럼 탕웨이는 화가인 아버지로부터 예술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샤오홍이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탕웨이 역시 배우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연기 생활에 매진했다. 1979년생인 탕웨이가 <색, 계>(2007)로 유명해진 건 그녀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연기자 데뷔(드라마 <경화연자>(2004))도 늦었지만 <색, 계>로 스타 반열에 오른 것도 동갑내기 장쯔이가 2000년 <와호장룡>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에 비하면 느지막이 이뤄졌던 셈이다.

그래서 장쯔이가 겉으로는 강한 척 속으로는 약한 내유외강 형의 철부지 역할을 주로 맡았다면 탕웨이의 대표적인 캐릭터는 외유내강인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색, 계>에서 그녀가 연기한 막 부인은 원래 연기를 전공하는 순진한 대학생이었지만 짝사랑하던 선배가 친일파 암살 계획을 세우자 이에 동참하는 역할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해내고 마는 것. <색, 계>뿐 아니라 김태용 감독과 함께했던 <만추>(2011)의 애나도 아는 오빠를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였지만 결혼 후 불화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후 복역하는 인물이었다.
 
탕웨이가 관객에게 주는 인상 역시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꽤 순진하게 보이는 인상과 더불어 촬영장에서는 스태프에게 먼저 장난을 치는 등 스스럼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색, 계>의 출연으로 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극 중 친일파와 사랑에 빠지는 역할일 뿐 아니라 이를 위해 노출을 마다치 않는 연기로 한동안 중국 당국으로부터 중국에서 제작되는 모든 작품의 출연을 정지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대신 그녀는 <만추>와 같은 한중 합작 영화에 출연하는 방식으로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이를 배우로서 더 단단해지는 계기로 삼으며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다.

그 과정은 <황금시대>의 샤오홍이 겪은 여정과 얼마간 닮아있다. 집에서 쫓겨났지만, 좌절을 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이름을 날린 후에도 성공에 안주하기는커녕 일본의 침략으로 잿더미가 된 중국에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로 중국인의 단합을 호소했다. 부산영화제의 국내 공식 데일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탕웨이는 샤오홍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그녀는 나약한 동시에 거칠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한없이 예민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중략) 이처럼 상충되는 요소들이 그녀 안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이는 샤오홍뿐 아니라 탕웨이에게 해당하는 평가이기도 하다.  

연기생활 10년을 맞이하다

<황금시대>를 연출한 허안화 감독은 그 자신이 여자인 만큼 여성의 삶, 특히 여성에게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는 여인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황금시대>도 그런 맥락에서 허안화 감독은 샤오홍에 대해 “시대를 잘못 만난 현대여성”이라고 표현한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가족을 포기하고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대신 자신의 맘에 들었던 남자를 선택했던 샤오홍의 삶은 지금 이 시대의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허안화 감독의 견해다.

샤오홍이 들어갈 자리에 탕웨이를 대입하면 어떨까. 물론 비약이 따르는 대입이다. 중국 원저우 출신의 그녀가 조국을 버리고 한국의 영화감독에게 시집온 건 아니니까. 하지만 배우와 감독의 결혼에서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배우 쪽이다. 하물며 탕웨이 같은 스타가 타국 출신의 감독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건 팬들에게는 늘 극적인 드라마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가는 현대 여성의 초상이 샤오홍과 겹쳤기 때문에 허안화 감독은 탕웨이를 0순위로 캐스팅했다.

흥미로운 건 촬영현장에서 탕웨이는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 감독의 지시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타입의 배우라는 점이다. 단국대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영화연기 현장학습’ 특강에서 탕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00% 감독에게 의존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간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샤오홍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일구어 갔지만, 남자 친구에게 너무 의존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삶이 어려울 때 꼭 샤오홍의 곁에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샤오홍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것, <황금시대>를 만들면서 허안화 감독이 샤오홍과 친분을 맺었던 실제 인물로 분한 배우들의 서술로 이야기를 끌고 간 건 바로 이런 의도였다. 1911년에 태어나 1942년에 폐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에 샤오홍이 지금도 주목받는 것일 테다. 실제로 영화는 그녀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다루지만 그중 작가 생활 10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고 보니 탕웨이가 연기자로 데뷔한 지도 올해로 딱 10년이다. 샤오홍은 작가 생활 10년 동안 100편의 글을 남겼지만, 탕웨이는 영화 11편을 비롯해 20편이 조금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럼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색, 계>의 막부인, <만추>의 애나, 그리고 <황금시대>의 샤오홍까지 순한 외모만 봐서는 예측할 수 없는 강렬한 캐릭터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낸 까닭이다.

그래서 “그런 작품들과 인물 때문에 내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진다고 느낀다”는 탕웨이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황금시대’라고 말한다. 지난 9월 <황금시대>가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마련된 기자회견 자리에서 탕웨이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 기자들은 그녀의 기분에 대해 가장 먼저 질문을 던졌다. 탕웨이가 답변한 내용이다. “전혀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부모님이 건강하고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돈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어 너무 행복하다.” 탕웨이의 황금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다.  

시사저널
(2014.10.11)

<타짜-신의 손> 유해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여름 한국영화에 대한 화제는 <명량>으로 일원화되는 분위기였지만 배우의 역할로 한정해 말하자면 좀 다른 양상을 띤다. 관객에게 가장 큰 웃음과 재미를 준 배우의 연기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과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에 출연한 유해진이 독보적이었다.

철봉이, 대박 흥행을 이끈 연기

유해진의 차진 연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 있다. <해적>의 철봉이나 <타짜 2>의 고광렬 캐릭터는 그의 연장 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지만 무작정 튀지 않고 무엇보다 여유가 넘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멀티 캐스팅이 대세로 떠오른 한국 영화계에서 유해진이 20년 가까이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이다. (유해진은 정지영 감독의 <블랙잭>(1997)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의 연기를 축구에 대입해 설명하면, 전면에 나서 공격을 이끌기보다 이들 뒤에서 판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미드필더에 가깝다. <해적>에서 해적의 일원이었다가 조직이 와해할 위기에 처하자 저 혼자 살겠다고 산적에게로 투항, 이후 갖은 바다의 지식을 뽐내는 철봉은 공격형 미드필더를 연상시킨다. <타짜2>의 고광렬은 재능은 뛰어나지만, 연륜은 아직 부족한 젊은 타짜 대길(최승현) 뒤에서 자신의 경험을 전파해주는 수미형 미드필더 연기의 전형을 보여줬다.  
 
‘공미’로서의 철봉과 ‘수미’로서의 고광렬이 보여주는 연기의 차이는 각각의 영화가 목적하는 장르성에서 기인한다. <해적>은 사극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군도: 민란의 시대> <명량>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코믹한 느낌이 압도적이다. 특히 유해진이 연기한 철봉이 바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산적 동료들에게 바다 고기와 민물고기의 차이를 설명하며 ‘음파음파… 파음파음’ 생선으로 빙의한 연기는 <해적>을 찾은 관객을 가장 웃기게 만든 에피소드이었다. 그렇게 철봉이 분위기를 잡으면 영화는 이를 주인공 장사정(김남길)이 엉뚱하게 받아 코믹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극을 진행했다.  

그래서 철봉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장사정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한 역할이었다. 산적의 두목이라는,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는 장사정의 캐릭터를 철봉의 보좌로 관객이 더욱 친밀하게 이입할 수 있게끔 하였고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가 터뜨리는 코믹함을 기반으로 <해적>은 추석 시즌까지 장기 흥행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철봉이 골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결정적인 패스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고광렬, 아버지의 이름으로

<해적>의 철봉과 다르게 <타짜2>의 고광렬은 결정적인 때가 아니면 전방에 나서는 법이 없다. 후방에서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정중동의 자세를 취하다가 고니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타짜2>는 전작 <타짜>(2006)의 고니(조승우)와 평경장(백윤식) 관계에서 보듯 스승과 제자의 사이를 넘어 유사 부자(父子) 관계를 극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그처럼 엄마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 대길에게 고광렬은 그동안의 공백을 채워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서울로 상경해 촉망받는 젊은 타짜로 이름을 날리던 중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대길이를 품어주는 건 바로 고광렬이다. 밑 장을 빼다가 걸린 고니를 위해 자신의 패를 바꿔 채 위기에서 구해주고 미나(신세경)를 구하러 간 유령(김준호)의 하우스에서 역시 고니 대신 모자란 몸값을 대신 내어주면서 고광렬은 젊은 주인공이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죽음을 불사해 가면서까지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것이다.  

복수에 눈이 멀어 함께 파트너로 뛰자며 달려드는 고니에게 고광렬은 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 두 가지에 대해 조언한다. 하나는 “한 끗으로 장땡을 이길 수 있는 게 바로 이 바닥이야”, 또 하나는 “패를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상대방의 마음을 보는 거야” 이는 화투판의 타짜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배우들, 특히 유해진의 연기 철학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유해진은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재미’이다. 그리고 상대방과 연기할 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호흡’이다. 그는 재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분량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연기력보다 미모가 주인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연예 산업 안에서 유해진은 개성 있는 연기와 사람 좋은 마음씨로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다. 또한, 연기는 호흡의 예술인만큼 상대 배우가 편안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도 유해진은 배우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제 단순히 재미를 주는 캐릭터를 넘어 누군가를 보좌해줄 수 있는 어른의 지위로 영화 속에서 성장한 배경이다. 하물며 멀티 캐스팅이 대세가 된 지금에 많게는 10여 명이 중심이 되는 영화에서 상대방을 배려해주며 자신의 연기를 펼친다는 건 가장 중요한 배우의 덕목일 것이다. 그와 같은 연기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 두 편의 영화 <해적>과 <타짜2>에서 유해진의 연기가 가장 돋보였던 건 당연한 결과인 셈이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10월호

<씬 시티 2> 프랭크 밀러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할리우드의 황금기로 불리던 1950~60년대에는 영화의 제목 앞에 감독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감독의 유명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알프레드 히치콕의 경우,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금은 그런 식의 표기가 거의 없어졌지만, 창작자가 일종의 브랜드처럼 기능하는 경우, 이례적으로 제목 앞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프랭크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를 연출한 적도 있고 각본도 썼으며 직접 단역으로 출연도 하지만 그 이전 그래픽 노블의 작가로 더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영화로 옮겨졌을 정도로 탁월한 이야기를 뽐낸다. 하지만 밀러가 할리우드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상당 부분 시각적인 면에서 기인한다.

그래픽 노블 계의 거장

프랭크 밀러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지만, 최고 전성기는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였다. 마블 코믹스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데어 데블>에 작화가로 참여 후 스토리까지 맡으면서 오랜 연재 동안 이름을 날렸다. 특히 매력적인 여자 암살 캐릭터 ‘엘렉트라’를 창조하고 이의 스핀 오프를 제작하면서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슈퍼히어로물을 다루되 주인공이 품고 있는 마음속 어둠에 더욱 주목하는 한편으로 반(反)영웅 적이고 비주류적인 면모를 부각하는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그와 같은 프랭크 밀러의 특징이 대폭발한 작품은 DC코믹스로 옮기면서 1986년에 발표한 <다크 나이트 리턴즈>였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활동을 접은 지 10년, 이제는 60대가 되어 의욕만큼 따르지 않는 노쇠한 신체로 예전 같은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더욱이 배트맨의 출현이 그에 상응하는 악당들을 불러내고 자경단을 양산해 오히려 도시에 혼란을 부추긴다는 설정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그래픽 노블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웅의 마음속 어두운 우물을 파고드는 접근 방식은 <로닌>에서 이미 구축된 프랭크 밀러 특유의 세계관이었다. 21세기 뉴욕에서 부활한 13세기 사무라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 <로닌>은 사무라이의 덕목을 극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800년 동안 간직했던 복수심이 일으킨 대혼란을 극적인 배경으로 삼는다. 주군을 잃은 후 실추된 명예를 되찾은 주인공 로닌이 자결로 생을 마감하는 결말은 반영웅 미학의 극치를 선사하며 주인공이 품고 있던 장시간의 복수심은 이 세계가 끝나지 않는 혼란 속에 지탱되고 있음을 은유한다.

결국, 프랭크 밀러의 세계에서 비주류의 반영웅을 만드는 것은 주변 환경이다. 안 그래도, 프랭크 밀러는 작품 속 세계가 왜 이렇게 어둡고 비관적이며 타락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와 같은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 세계가 ‘씬 시티’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상상하고 그림을 그리고는 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 이후 밀러가 작업한 <배트맨 이어 원>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브루스 웨인이 집 앞 동굴에 빠져 어둠의 세계와 맞닥뜨린 후 박쥐로 상징되는 공포를 이겨내고 배트맨이 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브루스 웨인이 목격하고 공포를 느낀 어둠은 곧 프랭크 밀러가 어릴 적부터 겪었던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할리우드가 사랑한 작가

그래픽 노블 계에서 프랭크 밀러의 명성이 높아지자 할리우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밀러의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 그의 작품에 바탕을 이루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를 비롯한 각종 팝 문화였기 때문에 경험을 쌓을 좋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그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남성적이면서 선이 굵은 필름 느와르적 필체는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미키 스필레인 등의 하드보일드 소설을 읽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 체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첫 번째 할리우드에서의 작품은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것이 아니었다. 프랭크 밀러 본인이 직접 참여한 <로보캅2>와 <로보캅3>의 각본이었다. 프랭크 밀러는 그 누구보다도 창작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와 작화를 고수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검열 문제에 인해 <올스타 배트맨 앤드 로빈 더 보이원더>를 끝으로 DC코믹스와 결별을 선언한 터였다. 프랭크 밀러는 <로보캅2>와 <로보캅3>를 기획한 오리온 픽쳐스 측으로부터 오리지널 각본을 영화에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각본에 참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 약속은 깨지고 말았는데 밀러가 작업한 <로보캅> 시리즈의 이야기는 너무나 어둡고 비관적이어서 메이저 영화로 구현되기에는 애초 한계가 있었다. 이에 분노한 프랭크 밀러는 자신의 그래픽 노블이 영화화되는 것에 완고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씬 시티>로 1991년 발표 이후 숱한 영화화 판권 제의가 들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될 경우, 원작이 담고 있는 어둠의 세계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을 거라는 염려가 컸다. 프랭크 밀러의 말에 따르면, “<씬 시티>는 그 어느 작품보다 내게는 소중하다.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영화화를 맡길 수가 없었다. 나만큼 <씬 시티>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밀러에게 <씬 시티>는 필생의 역작과 같은 성격을 갖는 작품이라 더욱 각별했다. 매 작품 목격되는 필름 누아르의 색채를 이번에는 흑과 백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구현했다. 게다가 DC코믹스를 떠나 다크호스 코믹스에서 그 어떤 견제나 검열도 받지 않고 만든 순수하게 독립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 프랭크 밀러는 자료조사와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가졌고 <씬 시티>의 발매와 함께 코믹스 시장에서 슈퍼히어로물에 밀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던 범죄물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의 구애가 물밀듯 몰려왔지만 프랭크 밀러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방식대로 영화화가 됐다가는 정교하게 구축된 <씬 시티>의 세계관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혁명

할리우드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원작으로 삼은 그래픽 노블을 영화에 맞게 각색하는 작업이 할리우드에서는 일반적이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영화가 그래픽 노블의 세계에 맞춰 각색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프랭크 밀러는 그냥 이야기꾼이 아니다. ‘시각적 이야기꾼 visual storyteller’이다. 밀러의 작화는 철저히 이야기의 성격을 반영해 결정된다. 이를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프랭크 밀러의 세계는 삶과 죽음이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보장받지 못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다. 프랭크 밀러는 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처음으로 밤 시간대의 뉴욕시를 지칭할 때 ‘고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스무 살 시절 뉴욕으로 상경했던 프랭크 밀러는 이 도시에 대해, “사람들이 숨도 쉬지 못하게 할 만큼 억압한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씬 시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정식 이름은 ‘베이씬 시티 Basin City’다. 하지만 ‘죄악 sin’이 창궐하는 이 도시를 부를 때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앞의 두 글자를 빼고 ‘씬 시티’라 불렀다. 밤의 세계가 낮을 지배하고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씬 시티는 흑이 백을 압도한다. 그래서 프랭크 밀러는 흑백으로 전체 이미지를 그린 다음 화이트로 아웃 라인을 주는 방식을 고안해 그래픽 노블 <씬 시티>를 완성했다. 악이 창궐하는 씬 시티에서 희망이란 한 줄기 빛처럼 희박하다는 작가의 세계관이 작화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원작의 이야기와 특유의 이미지로 구현된 세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프랭크 밀러에게 공동감독을 제안했다. 필름의 검은 부분을 탈색하는 방식으로 흑백 이미지를 강조하는 한편, 피와 같은 일부 대상에만 색을 부여함으로써 전에 본 적 없던 이미지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는 프랭크 밀러의 고유한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접근하려는 감독들에게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래픽 노블의 이미지 자체가 극 중 세계를 상징하고 이야기를 반영하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 특성상 영상에 대한 고민 없이 이야기만 단순히 스크린에 옮기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씬 시티> 이후 프랭크 밀러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는 것은 곧 새로운 영화의 출현을 의미했다.  

이질적 세계의 결합

<씬 시티>가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면서 또 다른 프랭크 밀러 원작의 영화화는 그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이뤄졌다. 배트맨 만화를 읽어본 적이 없다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새로운 배트맨 삼부작 영화화를 맡으면서 기존에 나온 배트맨 그래픽 노블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준 작품은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배트맨 이어 원>이었다. 이를 원작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만화라기보다 현실에 가까운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은 크리스토퍼 놀란으로 하여금 기존의 슈퍼히어로물의 만화적인 느낌을 완전히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 <배트맨 비긴즈>의 전례 없던 시도에 대해 프랭크 밀러는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라며 찬사를 보냈다.

잭 스나이더의 <300>은 <씬 시티>와는 성격이 또 다른 시각 혁명이었다. 잭 스나이더가 프랭크 밀러의 원작을 대하는 자세는 로버트 로드리게스와 다르지 않았다. “억지로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하겠다고 목표를 세운 건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미적인 부분과 상당 부분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관객들에게 그래픽 노블을 읽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이미지를 원작과 비슷하게 가는 것이 개인적 취향이다.”

<300>에서 프랭크 밀러는 기존의 그래픽 노블이 실리는 책의 세로 형태를 벗어나 가로를 강조한 형태로 획기적인 구성을 취했다. 단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수만의 페르시아 병사를 물리치는 이야기의 스펙터클이 가로 컷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가정에 TV가 보급되면서 인기가 떨어진 영화가 와이드 스크린을 도입해 재미를 봤던 것처럼 단순한 이야기와 적은 수의 병사가 주인공인 작품에서 ‘와이드’ 하게 펼쳐진 가로 컷은 수만의 적군에 동등하게 맞서는 스파르타의 의지를 강조하고 또한 피가 튀고 살점이 날아다니는 살육의 스펙터클을 극대화하는 장점을 있다.

역시나 이야기와 컷의 형태가 오목과 볼록처럼 맞물린 원작을 영화로 살리기 위해서는 또 다른 형태의 촬영 방식이 필요했다. 잭 스나이더는 먼저 실사로 촬영한 후 그 위에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색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300>의 영화를 완성했다. 햇빛 찬란한 날에 절벽에 내몰린 페르시아 병사들이 그림자가 되어 저 아래로 떨어지는 영화 속 이미지는 컷 속의 움직이는 동영상이자 스크린 속에 피어난 그림이라 할 만했다. 그 정도로 영화와 만화라는 존재 방식이 상이한 매체가 완벽하게 결합한 예였다.

그와 같은 이질적 세계의 결합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지탱하는 구조이면서 할리우드의 시각 혁명을 불러온 결정적인 요소였다. <로닌>에서 봉건시대의 사무라이를 21세기의 뉴욕으로 불러왔던 프랭크 밀러는 <엑스맨>의 스핀오프 시리즈인 <울버린>에서 울버린을 일본으로 보내 동서양 문화의 결합을 시도했다. 또한 <데어 데블>처럼 남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슈퍼히어로의 세계에 엘렉트라라는 강력한 여자 캐릭터에 주목했으며 <씬 시티>에서는 1940~50년대를 풍미했던 필름 누아르의 세계를 현대에 되살렸다.

그와 같은 밀러의 현대성은 작금의 할리우드가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온갖 문화를 잡식성으로 소화하는 할리우드에서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시도해 미학적인 경지로 이끄는 프랭크 밀러의 작품은 최적의 콘셉트인 셈이었다. 그의 원작을 취했거나 기반으로 한 작품 중 <씬시티>, <300> <배트맨 비긴즈>가 할리우드의 영상 혁명은 물론 슈퍼히어로의 화법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여전히 유효한 마초의 매력

<씬 시티> 이후 9년 프랭크 밀러는 다시 한 번 로버트 로드리게스와 손잡고 속편 <씬 시티: 다크 히어로의 부활>을 공동 연출했다. 전편에서 빠졌던 ‘목숨을 걸 만한 여자’ 에피소드 등에 더해 프랭크 밀러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했다. 그리고 부제처럼 마브와 같은 마초 캐릭터는 물론 낸시와 같은 치명적인 매력의 여인들을 부활시켰다. 전편의 시각 효과를 답습하는 까닭에 감흥은 덜한 편이지만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세계의 매력은 유효하다. 씬 시티의 남자들은 여전히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권력으로 삼는 와중에도 한 번 마음에 품은 여자에 대해서는 순애보적 마인드를 웬만해서는 거둬들이지 않는다. 여자 캐릭터도 단순한 눈요깃감이 아닌 것이 씬 시티 올드타운의 여성들은 마누트 일당을 일망타진 했을 정도로 자신들의 몸을 지키는 싸움의 기술이 뛰어나다.

그러니까, 밀러의 세계에서 주먹은 법을 압도하고 총은 경찰력의 동의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굳이 씬 시티를 지탱하는 도시의 규칙을 이해하려 들지 않더라도 밤의 네온사인을 에너지 삼아 검은 코트를 입고 컨버터블을 몰며 총질을 해대는 남자들은 이 세계의 롤 모델로 삼을 법하며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을 유독 강조하는 여자들에게서는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바로 프랭크 밀러의 필름 누아르 세계가 곳곳에 처 놓은 치명적인 매력의 덫이 놓여 있다. 프랭크 밀러는 <씬 시티> 이후 단독으로 메가폰을 잡았던 윌 아이즈너 원작의 <스피릿>을 영화화했다가 흥행에서 아주 곤혹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세계가 점점 빛을 잃어간다는 반증일 것이다.

<씬 시티: 다크 히어로의 부활>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전편의 호응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이름은 서서히 어둠에 파묻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악의 창궐에 따른 배트맨의 출현을 이제나저제나 매일 같은 고대하는 고담시의 시민처럼 그의 작품이 가진 영향력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은, 그리고 이를 영화화한 작품은 이미 우리 시대의 고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맥스무비 매거진
2014년 9월호

<명량> 최민식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량>은 1597년 임진왜란 6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이끌고 나가 330척의 왜군 배를 무찌른 명량 해전을 배경으로 한다. 명량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없이 출전해 커다란 승리를 거둔 기념비적인 전투로 유명하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딛고 승리를 했다는 것은 리더인 이순신의 지략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영화는 결과적으로 이순신의 영웅적인 업적을 기리는 셈이다.

이순신을 연기한 배우는 다름 아닌 최민식. 최민식은 한국 영화계에서 감정의 끓는 점이 가장 높은 연기를 구사하는 배우다. <명량>을 연출한 김한민 감독이 최민식을 캐스팅했다는 것은 이순신에게서 뜨거운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김한민 감독은 <명량>을 만들기 위해 수십 종의 ‘난중일기’ 완역본을 비교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극 중 이순신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러면서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썼던 대목을 그대로 대사로 옮기기도 했는데 그 자체로 뜨거움을 설명하는 실례이기도 하다.

남들은 모두 승패가 정해진 전쟁이라며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갈 궁리를 하는 동안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며 의지를 다졌고 패배의식에 젖은 병사들의 용기를 깨우기 위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다짐으로 진정한 리더로서의 위용과 용맹함을 과시했다. 이순신은 조건의 유불리에 상관없이 목표한 바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무모할 정도로 활활 타는 심장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는 배우 최민식이 그의 대표작에서 선보였던 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올드보이>(2003)의 오대수는 영문도 모른 채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갇혔던 경험으로 복수심이 하나의 성격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악마를 보았다>(2010)의 장경철은 홀로 귀가하는 여자들만을 골라 납치 후 신체를 훼손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였으며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의 최익현은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아버지 세대의 과잉 욕망을 대변했다.  

이들 캐릭터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독불장군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오대수는 막강한 부와 조직력을 과시하는 이우진(유지태)에 맞서 홀로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장경철은 자신을 옥죄어 오는 수현(이병헌)의 도발에 도망가는 대신 정면대결을 택했다. 그리고 돈과 가문의 출세에 관해서만 관심 있는 최익현은 궤변과 허세를 앞세워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다. 최민식의 연기에서 보이는 뜨거움과 그에서 뒷받침된 저돌성은 곧 장군으로서의 이순신의 면모로 치환할 수 있다.

최민식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의 연기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는 이순신이라는 적역을 맡은 셈이다. 역시나 그에 임하는 최민식의 태도에서부터 뜨거울 정도로 발산하고 무모하리만치 밀어붙이는 저돌성이 감지된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다는 것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는 게 최민식의 입장이다.

그것은 <명량>은 연출한 김한민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알면 알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조상이 있다는것. 살아 있는 이순신 장군, 생생한 역사의 순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한민 감독은 대학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최종병기 활>(2011)을 시작으로 역사 삼부작으로 만들고 있다. <명량>은 그 두 번째 작품이며 앞으로 독립투사를 주인공으로 한 세 번째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포한 상태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인물의 캐스팅은 대개 감독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과 해석 능력을 대변하는 일종의 지표다.

김한민 감독은 최민식을 경유한 이순신처럼 마음속 횃불을 끄집어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큰불을 지필 수 있는 행동을 격려하며 작금의 시대정신을 깨우고 싶어 한다. 그래서 <명량>은 이순신이라는 횃불이 더 크게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제반 조건을 마련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순신의 적수이자 최민식의 상대 역인 구루지마 역할에 류승룡을 캐스팅한 건 이런 배경이 고려됐을 터다. 영웅은 그에 걸맞은, 아니 그보다 더 강한 적수를 만났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구루지마는 냉혹함과 탁월한 지략을 갖춰 이순신 장군을 잡는 데 최고의 적임자라고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명량 해전에 투입된 용병이다. 뜨거운 이순신과 달리 구루지마는 차가운 면모로 좌중을 압도한다. 말 수도 적고 주변에서 뭐라 해도 자신의 판단이 설 때만 행동에 나서는 고집도 만만찮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명량>의 구루지마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냉혹함은 있지만, 이순신 장군에 맞설 만큼의 지략은 찾아보기 힘들다. 적이라는 기능적인 역할에만 부합할 뿐이지 인간으로서의 구루지마는 온데간데없다. 근데 이건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에게서 동일하게 목격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명량>은 이순신의 장군으로서의 면모와 최민식의 연기만 돋보이는 영화다. 이순신과 최민식이 지닌 뜨거움에 대항할 만한 차가움이 대등하게 존재할 때 영화의 완성도는 극대화될 수 있다. 하지만 균형추가 한쪽으로 급속히 쏠리다 보니 <명량>은 이순신 장군만 두드러지는 개인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명량>보다는 <이순신>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영화인 것이다.    

시사저널
NO. 1299

<엑스맨> 브라이언 싱어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하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공개를 앞두고 추문에 휩싸였다.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이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입장을 밝힌 브라이언 싱어는 이참에 자신이 양성애자라며 성정체성까지 고백했다.

팬들의 입장에서 그리 충격적인 고백은 아니다. 그의 성정체성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중요한 건 브라이언 싱어가 소수자로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소수자 슈퍼히어로 프로젝트인 ‘엑스맨’ 시리즈로 귀환했다는 사실이다.

잘 알려졌듯,  <엑스맨>(2000)을 창조했던 그는 <엑스맨2>(2003)를 끝으로 이 시리즈와 결별을 고하고 <수퍼맨 리턴즈>(2006) 메가폰을 잡으면서부터 경력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퍼맨 리턴즈>는 <엑스맨> 시리즈와 함께 같은 슈퍼히어로 계열의 영화이지만 주인공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수퍼맨은 미국 최초의 슈퍼히어로로서 백인 지배 계층의 힘을 상징하며 주류의 지위를 누린 캐릭터다. 그에 반해 엑스맨들은 능력이 남다르다는 이유로 돌연변이 취급을 받으며 주류에서 배척당한 채 소수자로서 힘든 삶을 유지한다.

수퍼맨을 비롯하여 배트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슈퍼히어로들이 주류 백인 남성 일색인 것에 반해 <엑스맨>의 영웅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철저히 소수자로 구성되어 있다. 나이가 많은 매그니토,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하는 찰스 자비에, 파란 피부의 슈퍼’우먼’ 미스틱, 이름 자체가 괴물인 비스트 등 이들은 슈퍼히어로이기에 앞서 유색인종이었고 성소수자였으며 무엇보다 상대적인 약자였다.

소수자로서 누구보다 소수자를 잘 이해하는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시리즈를 버리고 <수퍼맨 리턴즈>를 선택했다? 이건 누가 보더라도 잘못된 판단이었다. <수퍼맨 리턴즈>는 흥행에서 별 재미를 못 본 것은 물론이고 평단의 반응도 좋지 못해 <맨 오브 스틸>(2013)이 등장하기까지 수퍼맨 프로젝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건 <엑스맨>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 이하 ‘<엑스맨3>’)의 경우, 새로 합류한 브랫 레트너 감독이 각각의 캐릭터에 대한 관심보다 액션에만 치중함으로써 그저 그런 블록버스터 영화로 전락시키는 우(愚)를 범했다. 갈 길 잃은 <엑스맨> 시리즈는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 <더 울버린>(2013)과 같은 스핀오프로 변화를 꾀하는가 하면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를 선보이는 등 궤도에 안착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브라이언 싱어가 귀환했다. <엑스맨2> 이후 11년 만이다. 공교롭게도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잘못된 과거의 사건에 개입해 미래를 바로잡으려는 시간여행이 주요한 테마로 등장한다. <수퍼맨 리턴즈> <작전명 발키리>(2009) <잭 더 자이언트 킬러>(2013)로 연달아 미끄러진 브라이언 싱어가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엑스맨> 시리즈로 경력을 바로 잡으려는 욕망의 반영인 걸까?

미래의 엑스맨들은 센티넬로 불리는 로봇으로 인해 멸망할 위기에 직면했다. 워낙 강력한 힘으로 엑스맨을 제거하는 센티넬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센티넬을 개발한 천재 과학자 트라스크(피터 딘클리지)를 찾아가 이 로봇의 발명을 방해하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트라스크는 이미 사망하고 없는 상태다. 울버린(휴 잭맨)은 타인의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키티(엘렌 페이지)의 능력 덕에 1973년의 과거로 돌아간다.

울버린은 뿔뿔이 흩어져있던 엑스맨들을 불러 모으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젊은 찰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는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에게 입은 척추 부상과 자신을 떠난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상태다. 더군다나 JFK 암살범으로 갇혀 있던 매그니토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찰스 자비에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바람에 트라스크를 찾기 위한 임무는 벽에 부딪힌다.

센티넬의 개발을 저지하려는 엑스맨들의 시도는 난관에 부딪히지만 이들의 성공은 예정된 결과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역사의 가변성이다. 시간은 불변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브라이언 싱어는 인위적인 개입으로 역사의 변화를 꾀한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닐 거다. 이를 통해 브라이언 싱어가 노리는 효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 그 자신의 경력과 더불어 이 시리즈의 부활이다.  

애초 <엑스맨> 시리즈의 출발 자체가 소수자’들’에 있다 보니 연출의 방향은 다양성의 가치에 있다. 아무리 울버린이 간판스타 격으로 나선다고 해도 이 시리즈가 힘을 발휘하는 건 역시 엑스맨들이 뭉쳤을 때다. 울버린 스핀오프 시리즈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던 건 주변 캐릭터의 비중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울버린 한 명만 영웅으로 추켜세운 연출의 편파성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엑스맨> 시리즈는 여느 슈퍼히어로물처럼 선과 악으로 편 가르는 대신 팀원들 간의 내부 갈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들을 박해하는 주류 세력에 어떻게 맞설지 다양한 입장을 대변한다. 그것은 또한 주류와 비주류가 맞서며 쌓아온 미국의 역사이기도 했다.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극으로 문을 연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JFK 암살 사건과 관련한 현실 정치를 계속해서 건드리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브라이언 싱어는 사건보다 캐릭터에, 액션보다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춰 성공한 <엑스맨>과 <엑스맨2>의 유산을 이어 받아 그 연장선상에서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구성한다. 당시에 출연했던 캐릭터의 젊은 시절을 다루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까지 자신의 휘하에 놓으려는 시도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시리즈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비록 <수퍼맨 리턴즈>로 야기한 흑역사는 지울 수 없겠지만 <데이즈 오프 퓨처 패스트>로 자신의 자리를 찾은 브라이언 싱어는 사생활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감독의 명예만큼은 회복에 성공했다.    

시사저널
NO. 1290    

<그녀> 스파이크 존즈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녀>(2013)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자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가지고 연출까지 맡은 첫 번째 영화다. 그는 <그녀>까지 총 네 작품을 연출했는데 그동안 찰리 카우프먼의 각본으로 <존 말코비치 되기>(1999)와 <어댑테이션>(2002)을, 모리스 샌닥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괴물들이 사는 나라>(2009)를 만드는 등 협업을 주로 해왔다. <그녀>는 온전히 스파이크 존즈의 상상력으로 빚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인공 지능과 사랑에 빠진다고?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는 의뢰를 받아 편지를 써주는 ‘아름다운 손 글씨 닷컴’ 소속의 작가다. 첨단의 소통 기기들이 판치는 시대에 낭만적인 직업으로 보이지만 정작 테오도르 본인은 외로움에 사무쳐 죽을 지경이다. 부인과 별거 중인데다가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라는 상대 변호사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혼자 게임이나 하든가 시답잖은 채팅 서비스를 이용하던 중 사용자의 심리를 파악해 일처리를 도와주는 운영체계 OS1을 컴퓨터에 깔게 된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출연)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진다.

OS1은 애플 모바일의 OS를 연상시킨다. 왜 아니겠는가. 스파이크 존즈는 아이폰의 시리(Siri)를 사용하던 중 <그녀>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시리는 즉석에서 채팅을 할 수 있는 대화 프로그램이다. 시리를 사용하던 중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하게 됐다.” <그녀>가 시리를 이용하던 중 떠올린 작품이라니. 그렇다면 스파이크 존즈에게 시리는 찰리 카우프먼과 모리스 샌닥과 같은 협업자의 존재라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지만 영화상으로 볼 때 인간과 인공 지능 간에 형성되는 관계를 인정하는 것 같다. 아니 인정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인공 지능 사이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1982)의 경우,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데커드의 정체성을 두고 오랫동안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녀>의 테오도르는 사용자와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는 컴퓨터 운영 체계인 사만다와 속 깊은 대화는 물론 사랑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하지만 기존의 윤리에 발목 잡혀(?) 인공 지능과 관계를 갖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에 대해 혼란을 느끼거나 의문을 표하지는 않는다.

시리의 등장에서 보듯 우리에게 인공 지능과의 관계는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길거리에서만 해도 사람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스마트 폰에 얼굴을 묻고 걷는 이들이 더 많은 게 작금의 풍경이다. 이를 인정하고 이후에 생길 윤리 문제에 대해 고민하자는 게 <그녀>에서 스파이크 존즈가 내세우는 입장이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인공 지능이 내가 아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실제로 <그녀>의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서 별 다른 의문을 갖지 않다가 그녀(?)가 동시에 640명과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하자 그제야 혼란을 겪게 된다. 사만다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고?

대상이 무슨 상관이야?

사람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대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컴퓨터와 노닥거리는 테오도르를 두고 ‘너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인이 공인된 너드이기도 한 스파이크 존즈는 자신의 성격을 투영한 캐릭터를 애정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스파이크 존즈는 고립된 이의 사연을 즐겨 다뤄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색)와 로테 슈와츠(카메론 디아즈)는 부부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심적 공허감으로 외로운 인물들이었다. <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니콜라스 케이지)은 대중이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증세를 겪는 무명작가였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맥스(맥스 레코즈)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쓸쓸한 아이였다.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다보니 이들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공허한 마음을 소통으로 가득 채워줄 존재를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크레이그는 존 말코비치의 뇌로 연결되는 7 1/2층이라는 기괴한 통로를 만나고 맥스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 만난 괴물들과 자신들만의 놀이를 즐긴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육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공 지능을 가진 사만다와 플라토닉 러브의 단계를 넘어 육체적인 관계로까지 나아간다. 대상이 문제인가, 대화가 가능하고 그것이 실질적인 소통으로까지 나아간다면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진짜라는 것이 스파이크 존즈의 생각이다. 첨단의 통신 기기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인간과 인공 지능 사이에서 야기되는 관계의 풍경에 맞춰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7 1/2층, 괴물, 컴퓨터 등 비인간적인 소재로 인간적인 감정을 품어내는 데 있어 스파이크 존즈의 연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녀>에서도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대화로 감정을 고양시키는 데만 그치지 않고 이를 육체적 관계로 전이시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때 스파이크 존즈는 마치 방송사고인 듯한 ‘무지 화면’을 띄우는데 이들의 신음하는 목소리만으로도 사랑으로 충만한 감정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새로운 관계의 부상에 따른 새로운 윤리 문제를 제기하듯 스파이크 존즈는 이에 맞춰 새로운 영상을 고안해낸다. 사실 새로운 영상을 창조했다기보다 기존의 영화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던 방식을 적극 끌어들인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에 대한 스파이크 존즈의 견해는 이렇다. “편집이란 영화적인 것과 영화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끊임없는 발견과 변화일 것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철학은 곧 인간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녀>의 극 중 상황을 대입해 스파이크 존즈의 말을 살짝 바꿔 본다면, 그에게 소통이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의 발견과 변화일 것이다. 하지만 네 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그의 필모그래프를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소수자들에게는 더 큰 세상으로 나오라는 격려이고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에게 좀 더 손을 뻗어줄 것을 호소하는 목소리다. 사만다와 헤어진 후 테오도르가 찾아가는 이는 직장 동료다. 아무리 관계의 대상이 늘어나고 범위가 넓어진다고 해도 그 기본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파이크 존즈는 알고 있다. 더 정확히는 사람이라는 진짜 감정을 말이다. 2014년 아카데미 영화제는 <그녀>에게 각본상을 수여하고 작품상을 비롯해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리는 등 스파이크 존즈의 진가를 인정했다.  

BEYOND
(2014년 4월호)

<방황하는 칼날> 정재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재영은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배우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네 달 정도 지난 올해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는 <플랜맨> <방황하는 칼날> <역린> 벌써 세 편이다. 지난해 송강호는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에 출연하며 다작(?)을 했는데 정재영은 이를 네 달 만에 이룬 셈이다.
 
그런 정재영을 두고 <방황하는 칼날>의 이정호 감독은 이렇게 평가했다. “보통 배우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어떤 느낌으로 연기할 것 같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정재영은 아무것도 예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재영에게는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확연히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구현하기 때문인데 스타라기보다 배우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정재영은 평범한 외모가 연기 생활에 플러스로 작용한 경우다.
 
<플랜맨>에서 강박증을 지닌 남자의 로맨틱한 사랑을 그려 보였던 정재영은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딸을 잃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아버지 ‘상현’을 연기한다. 상현은 딸이 죽기 전까지 아내 없이 소박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딸이 갑작스럽게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상현은 하나뿐인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그로서는 딸을 폭행한 가해자들을 경찰들이 검거해 법의 심판이 가해지도록 바라는 심정이지만 마음처럼 이뤄지지는 않는다. 수사는 지지부진할 뿐더러 가해자들이 딸 또래의 고등학생이다 보니 미성년자에게 관대한(?) 법에만 의지하기에는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차, 익명의 제보로 가해자 중 한 명의 집 주소가 전달된다. 그곳에서 범인을 발견한 상현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또 다른 공범을 찾아 나선다.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피해자에서 졸지에 가해자로 처지가 전락한 상현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복수는 정당한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처벌을 가하지 않는 법에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을 제기한다. 그와 같은 상황이 극 중 상현의 특수한 경우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슷한 사례가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탓이다.
 
하지만 영화는 해답을 주는 대신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을 좀 더 깊게 바라보는 쪽을 택한다. “뉴스를 통해 비극을 많이 접하지만 우리는 안타까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어디선가 고통을 스스로 견뎌내고 있을 누군가를 대신해 외쳐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정호 감독이 <방황하는 칼날>을 통해 의도하는 바다. 그렇기에 이정호 감독에게 상현의 캐스팅은 관객의 눈높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배우가 절실했다.  
 
정재영은 배우이기 이전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이면서 또한 자식을 둔 부모이기도 하다. 정재영은 이정호 감독이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특별하게 다른 영화의 캐릭터처럼 설정을 갖고 시작하지 말자는 것이 정재영의 의견이었다. “상현은 나일 수도 있고 감독일 수도 있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대변하는 캐릭터였기에 정재영은 극 중 상현이 죽을 딸을 시체 안치소에서 확인하는 순간이 정신적으로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딸의 죽음을 인정하기가 싫어서였다. 정재영 또한 아비된 입장에서 아무리 연기라고 한들 그와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터다. 이것을 진심이라고 해도 좋을까. 상현을 연기한 정재영은 늘 자신이 맡은 캐릭터가 관객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확실히 그의 필모그래프를 보면 사람 냄새 물씬한 캐릭터가 반(半)수를 차지한다. <나의 결혼 원정기>(2005)에서는 결혼 상대를 구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원정을 떠날 수밖에 없는 농촌 총각의 비애를, <김씨 표류기>(2009)에서는 쏟아지는 빚 독촉에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감행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표류하는 보통 사람의 아픔을, <우리 선희>(2013)에서는 나이든 선배 감독으로 후배 여자 졸업생을 만나 진하게 연예를 나누는 우리 주변의 흔한 사랑의 풍경을 대리해 보였다.    
 
이처럼 보통 사람의 연기에 능수능란한 정재영의 최대 강점은 감독이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따라 천변만화한 캐릭터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정재영의 필모그래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장르를 초월하고, 선인과 악인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력에 있다. SF인 <열한시>(2013)와 로맨틱 코미디인 <아는 여자>(2004)가, <내가 살인범이다>(2012)의 형사와 <강철중: 공공의 적 1-1>(2008)의 악덕 회장이, 심지어 <신기전>(2008)과 같은 블록버스터와 <우리 선희>와 같은 예술영화가 공존하는 식이다.
 
이는 그가 다작의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 정재영은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1998)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로 이름을 알리면서 매년 쉬지 않고 두세 편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 왔다. 직업인으로서의 성실성과 배우로서의 보통 사람의 이미지는 정재영이 롱런할 수 있는 토양이면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이끄는 그만의 무기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과 성실성, 이는 또한 아버지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비록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루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상기토록 한다. 만약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극 중 상현의 행동에 지지를 표한다면 정재영의 연기에서 아버지의 초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방황하는 칼날>은 배우로서 정재영이 가진 모든 ‘칼날’을 펼쳐 보이는 영화인 것이다.    

시사저널
NO. 1283

<캡틴 아메리카2> 크리스 에반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이하 ‘<캡틴 아메리카2>’)는 ‘어벤져스’ 멤버의 리더 격인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캡틴 아메리카를 단독으로 내세운 작품은 이번이 두 번째다. <퍼스트 어벤져>(2011)에서 삐쩍 꼴은 젊은이였던 스티브 로저스는 ‘슈퍼 솔져 프로젝트’에 참여, 건장한 체격의 캡틴 아메리카로 거듭나며 나치 잔당을 무찌르는 데 일조했다. 이후 현대로 넘어온 <어벤져스>(2012)에서 아이언맨, 토르, 헐크, 호크 아이 등과 함께 뉴욕에 닥친 대재앙을 막아낸 전력도 가지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2>에서의 그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조용한 삶을 이어가고 있던 중 음모에 휘말린다. 쉴드의 책임자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 이 사건을 조사하던 캡틴 아메리카는 오해를 사며 반역자로 몰리게 된다. 이에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와 함께 음모의 리더를 찾아 나서게 되고 쉴드의 고위 간부인 알렉산더 피어스(로버트 레드포드)가 그 중심에 있음을 눈치 챈다. 블랙 위도우와 새롭게 합류한 팔콘(안소니 마키)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등을 돌린 상황에서 캡틴 아메리카의 리더십은 시험대에 오른다.

<캡틴 아메리카2>는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마블은 캡틴 아메리카를 탄생시킨 코믹스다. 이후 영화에도 진출, <아이언맨>(2008)을 필두로 자사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오고 있다. 이어 <인크레더블 헐크>(2008) <토르>(2011) <퍼스트 어벤져> 등을 선보였고 각개 전투하던 슈퍼히어로를 한자리에 모아 <어벤져스>를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 1기라면, 2기는 <아이언맨3>(2013)로 시작해, <토르 : 다크 월드>(2013)를 거쳐 <캡틴 아메리카2>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캡틴 아메리카2>가 중요한 이유는 <어벤져스>의 2탄에 해당하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이하 ‘<어벤져스2>’)의 바로 앞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마블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각 영화끼리 서로 영향을 미치며 캐릭터가 연계되기로 유명하다. <어벤져스>의 뉴욕 대재앙 이후 이에 충격을 받은 아이언맨의 혼란이 <아이언맨3>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바 있고, <캡틴 아메리카2>에서 첫 선을 보인 팔콘이 <어벤져스2>에서 기존 멤버들과 새롭게 호흡을 맞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캡틴 아메리카2>가 더욱 관심 있는 영화로 다가오는 이유는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어떤’ 관계이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 역을 맡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는 지난해 900만 관객을 동원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의 반란자 커티스 역으로 출연, 국내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크리스 에반스는 <설국열차>에서도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꼬리 칸 승객들을 이끌었다. 캡틴 아메리카 역에 낙점된 것도 그가 가진 리더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캡틴 아메리카는 마블 코믹스를 대표하는 슈퍼히어로다. 아이언맨, 헐크 등 우리에게 친숙한 캐릭터를 제치고 캡틴 아메리카가 마블의 간판으로 꼽히는 이유는 슈퍼히어로의 ‘캡틴’, 즉 원조 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1941년 마블 코믹스의 전신인 ‘타임리 퍼블리케이션 Timely Publication’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다가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돼 지구 평화에 이바지하는 캡틴 아메리카의 성장 배경은 미국 슈퍼히어로물의 전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니 난다 긴다 하는 슈퍼히어로들이 총출동하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그 누구보다 전면에 나서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더욱이 <어벤져스2>에서는 물론이고 계속해서 이어지게 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그의 리더십과 그에 따른 책임감은 더욱 막중해질 전망이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참여하는 슈퍼히어로의 숫자는 늘어날 것이고 그럴수록 개성 강한 이들을 하나로 모으는 지도력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아이언맨처럼 최첨단의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헐크처럼 두 얼굴의 모습을 선보이는 히어로는 아니다. 그저 펀치와 킥을 날리고 방패로 자신의 능력을 배가하는, 어떻게 보면 어벤져스 멤버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에 가깝다. 크리스 에반스는 바로 이 점을 캡틴 아메리카의 매력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식의 액션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더욱 멋있는 장면이 나올 수 있다. 아마 관객들은 캡틴 아메리카를 보며 다른 화려한 슈퍼히어로들과 다른 거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거친 면모는 그대로 크리스 에반스의 매력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캡틴 아메리카>에서 파쿠르와 같은 서양무술은 물론이고 주짓수, 가라테 같은 동양무술까지 넘나드는 캡틴 아메리카처럼 크리스 에반스는 <퍼스트 어벤져> <캡틴 아메리카2>의 희극적인 리더에서 <설국열차>의 비극적인 리더까지, 연기의 폭이 상당히 넓다. 그런 그가 <어벤져스2>의 촬영을 위해 한국에 왔다. 그가 출연한 새로운 마블 영화 <캡틴 아메리카2>도 개봉해 순조로운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한국 영화 팬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할리우드 스타는 캡틴 아메리카, 단연 크리스 에반스다.

시사저널
NO. 1282

<아메리칸 허슬> 데이빗 O. 러셀 감독

사용자 삽입 이미지
데이빗 O. 러셀은 지금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안달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 출연하면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에 최소한 후보에는 오를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배우들 사이에 신앙처럼 자리하고 있다.

<파이터>(2010)에 출연했던 크리스찬 베일, 에이미 아담스, 멜리아 레오는 오스카 연기 부문 후보에 올라 그중 크리스찬 베일과 멜리아 레오는 수상까지 하였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3)의 경우, 남녀 주연과 남녀 조연 모두 연기상 부문에 후보로 오를 정도였다. 이는 아카데미 시상식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제니퍼 로렌스는 최연소 수상자라는 또 하나의 영예까지 획득했다.

그러니, O. 러셀 감독이 신작에 들어간다며 출연 의향을 물을 때 거절할 배우가 누가 있겠는가. <아메리칸 허슬>에는 데이빗 O. 러셀의 전작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쳤던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파이터>에 출연했던 크리스찬 베일과 에이미 아담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브래들리 쿠퍼와 제니퍼 로렌스, 로버트 드 니로에 더해 제레미 레너가 새롭게 합류했다.

<아메리칸 허슬>은 1970년대 실제 미국에서 벌어졌던 희대의 스캔들을 영화화했다. FBI가 거물급 범죄자를 잡겠다며 가짜 아랍(Arab) 족장을 내세워 함정(Scam) 수사를 펼쳤다고 해서 ‘앱스캠 스캔들 Abscam Scandal’로 불리는 사건이다. FBI 요원 리치(브래들리 쿠퍼)는 사기극을 펼치는 어빙(크리스찬 베일)과 시드니(에이미 아담스) 커플을 검거한 후 이들에게 수사에 협조하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사기꾼들의 본성이 어디 갈까. 어빙과 시드니는 함정 수사를 교묘하게 조작해 혐의도 벗고 큰돈까지 챙기며 FBI를 농락한다.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사기’는 멤버들 간의 호흡이 중요하다. 데이빗 O. 러셀 감독은 이에 착안, 전작에서 찰떡 호흡을 과시했던 배우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배우들은 O. 러셀 감독과의 작업이 반가운 한편으로 또 하나의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욕을 불태웠다.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히 가려야 하는 동시에 또 다른 모습을 내세워야 하니, 변신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는 연기력을 과시할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이것이 O. 러셀 감독이 배우에게서 최상의 연기력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법이 없다. 예컨대, <다크나이트>의 배트맨 역할을 통해 건장한 슈퍼히어로 이미지를 갖고 있던 크리스찬 베일은 마약에 찌든 퇴물 복서 역할을 위해 <파이터>에서 15kg 감량했고 <아메리칸 허슬>에서는 체중을 20kg 이상 불리는 것은 물론 대머리 분장까지 감수하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중년으로 또 한 번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그것은 <아메리칸 허슬>의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여서 청순한 이미지와 다르게 과감한 노출연기를 펼치는 에이미 아담스, 그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아줌마 파마를 한 브래들리 쿠퍼, 기존의 우아하고 강인한 모습 대신 천박함을 전면에 내세우는 제니퍼 로렌스까지, 이들은 크리스찬 베일과 더불어 2014년 아카데미 영화제의 남녀주연과 조연 부문에 모두 후보로 선정됐다. 배우들에게 데이빗 O. 러셀이라는 이름은 아카데미 연기상과 동의어로 사용해도 무방할 정도인 것이다.

그 때문에 O. 러셀 감독의 연출력이 다소 묻혀있지만 그는 명실상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의 반열에 올라있는 상태다. <파이터>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이어 <아메리칸 허슬>로 세 번이나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이번만큼은 가장 강력한 수상자로 점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O. 러셀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솔직하면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미국에 대해 말하는 감독이다.

지난해 제니퍼 로렌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전리품으로 안겨줬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계속된 불황과 빈익빈부익부의 여파로 영혼이 바스라지기 일보직전인 미국인들의 정신상태에 대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팻(브래들리 쿠퍼)은 아내와의 이혼 후 정신병원에 수감됐다가 막 퇴원한 상태고,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남편의 죽음 후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직장의 모든 남자들과 잠자리를 갖는 미망인이다. 워낙 상태들이 안 좋아 부러 외면하고 싶은 인물들이지만 데이빗 O. 러셀 감독은 이들의 결합과정을 코믹한 소동극으로 가져가며 지금의 고통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밑거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메리칸 허슬> 역시 미국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남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로 마무리하지만 O. 러셀 감독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다르게 위로와 희망 대신 조롱과 냉소의 태도로 극 중 소동을 바라본다. 결국 FBI 요원 리치가 사기꾼 커플 어빙과 시드니를 고용해 검거하는 거물급 범죄자는 정치인 카마인(제레미 레너)이다. 10년 넘게 시민들의 사랑을 받은 카마인은 도시 재개발 사업 자금을 유치하려다가 리치와 어빙 커플의 꾐에 빠져 헌신적인 시장에서 범죄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O. 러셀 감독이 보건데 이것이 진짜 미국의 정체다. 정작 미국을 위해 헌신하는 카마인 같은 이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을 망치는 것에 반해 어빙과 시드니 같은 사기꾼은 사랑도 쟁취하고 거액도 손에 쥐며 미국 내에서 승승장구한다. 데이빗 O. 러셀은 몰락하는 카마인과 모든 걸 얻은 어빙 커플을 교차하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아메리칸 허슬, 즉 ‘미국의 사기’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O. 러셀 감독은 일관되게 ‘아메리칸 허슬’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쓰리 킹즈>(1999)는 걸프전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보물 지도를 발견하고는 하라는 평화 임무 대신 금괴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였다. <파이터>는 상대방 선수의 승리 전적을 올려주는 백업 권투 선수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트레이너 형제가 스포츠로 꿈을 이루려다 가족 때문에 포기하는 사연을 따라갔다. 죽어라 노력하는 서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 반해 그 보상이 엉뚱한 이들에게로 돌아가는 미국의 불편한 진실.  

그렇게 미국은 시시각각 얼굴을 바꿔가며 유무형의 ‘아메리칸 허슬’을 통해 지금의 미국을 만들어왔다. 데이빗 O. 러셀 감독은 그 과정을 쫓아 미국의 진짜 역사를 폭로하고 있다. 그에 맞춰 배우들은 매 영화 과감한 변신으로써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있는 미국의 얼굴을 그대로 입증했다. 미국의 실체가 궁금하다고? 데이빗 O. 러셀의 영화에 당신이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미국의 흑역사가 담겨 있다.  

BEYOND
2014년 3월호

<우아한 거짓말> 김희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아한 거짓말>은 김려령의 동명소설을 <완득이>(2011)의 이한 감독이 연출한 영화다. 거기에 고아성, 김유정, 김향기 등 지금 가장 잘 나가는 아역 배우들이 총 출동하는 작품이니만큼 팬들의 기대감이 높다. 하지만 더 많은 관심을 모으는 배우는 따로 있다. 바로 김희애다.

김희애의 영화 출연은 무려 21년 만이다. 1993년에 발표된 <101번째 프러포즈>에서 그녀는 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첼리스트를 연기했다. 숫기가 없어 선 자리에서 매번 퇴짜를 맞는 노총각의 순수한 사랑에 감동을 받는 사랑스러운 여인 역할이었다. 영화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그녀의 미모가 가장 뛰어났던 20대 시절에 출연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실제로 김희애는 채시라, 고(故)최진실과 함께 199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라디오 프로그램 <김희애의 인기가요>를 진행하며 높은 청취률을 기록했다. 잠시나마 가수(?)로 활동하며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곡으로 당시 음악 프로그램의 대표 격이었던 <가요톱10>에서 오랫동안 상위권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게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니, 지금 세대들이 보기에 김희애는 전성기를 진즉에 넘긴 왕년의 스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제2의 전성기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마 그 계기는 <꽃보다 누나> 때문이었을 터다. <꽃보다 누나>는 젊은 이승기가 누나뻘을 훌쩍 넘기는 여배우들을 ‘모시고’ 터키와 크로아티아 여행을 떠나는 콘셉트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김희애는 가이드를 해본 적이 없어 쩔쩔 매는 이승기를 뒤에서 다독이며 도움을 주는 자상한 태도로 시청자들의 공감대를 샀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꽃보다 누나>의 연장선상에 있다. 김희애는 남편을 잃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혼자서 키우고 있는 엄마 현숙 역할을 맡았다. 마트에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쉽지 않지만 내색은커녕 두 딸과 친구처럼 지낼 정도로 웃음을 잃지 않는 엄마다. 그런 엄마와 첫째 딸 만지(고아성)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발생한다. 언제나 밝고 명랑하던 둘째 딸 천지(김향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남편에 이은 둘째 딸의 죽음까지, 엄마 현숙은 속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만지와 단 둘이 사는 삶에 익숙해지려고 애쓴다.

<우아한 거짓말>의 언론시사회 당일, 상영이 끝난 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21년 만의 영화 출연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김희애가 답변 도중 그만 울음을 터뜨려 주변 분위기를 숙연케 한 것이다. “많은 주제의 이야기가 있는 다양한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한 번 쯤은 꼭 다뤄져야 하는 소재라고 생각해서 이 작품에 동참하게 됐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나니까 내가 연기를 제일 못 한 것 같다. 어쩜 이렇게 다들 연기를 잘 하나”
 
그녀가 느낀 감정은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우아한 거짓말>은 감독의 연출력보다는 원작소설의 힘과 이를 바탕으로 한 배우들의 열연이 더욱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특히 고아성, 김유정, 김향기 등 아이들의 사연이 중심에 서는 만큼 김희애는 전면에 나서는 대신 이들의 뒤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야 말로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는 엄마들의 의무일 텐데 실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희애는 함께 연기하는 아역 배우들이 빛나도록 절대 앞으로 나서는 법이 없는 것이다.

대신 그녀는 이들을 모두 포용하는 연기로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에 따뜻함을 부여한다. 예컨대, 딸 천지의 죽음에는 그녀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화연(김유정)을 비롯해 몇몇이 개입되어 있는데 엄마 현숙은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용서의 덕목을 몸소 실천하며 이들을 모두 끌어안는다. 바로 그와 같은 설정을 살리기 위해 엄마의 포용력과 누나의 포근함을 모두 겸비한 김희애를 이 영화에 캐스팅할 이유일 테다.

이는 단순히 연기력이 뛰어나다는 그 하나 만으로 나올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녀는 좋은 연기자이면서 아이들을 끔찍이 아끼는 엄마이기도 하다. <꽃보다 누나>에서 이승기에게 보여준 누나의 역할 외에도 그녀는 여행 도중 시간이 날 때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전화나 문자를 통해 안부를 묻는 등 엄마의 정체성도 결코 잃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아한 거짓말>에서 김희애가 보여주는 연기를 일러 ‘생활 연기’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우아한 거짓말>처럼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함이다. 김희애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가진 화려한 미모를 철저히 벗어던진다. 그녀의 얼굴엔 화사한 미모 대신 피붙이를 잃은 엄마의 슬픔과 이를 감내하느라 쌓인 피로감이 깊게 배어있다.

김희애가 간담회 도중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개인적으로는 그녀에게서 현숙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자신의 연기를 질책하는 그녀의 울음은 극 중에서 딸 천지를 지켜주지 못한 엄마의 자책감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기자들이 김희애의 울음이 진짜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이한 감독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완벽히 표현하는 배우이다.” <우아한 거짓말>을 보게 된다면 김희애를 향한 이한 감독의 찬사에 상당 부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시사저널
NO. 1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