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영화처럼

mad-max

컬러가 지배적인 시대에도 사람들은 흑백에 열광한다. 흑백영화에도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 것처럼.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블랙&크롬>(2016)
한마디로 미친 영화다. 물과 기름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인류를 지배하다니, 그야말로 미친 독재자. 그렇게 미친 세상 바꿔보자며 독재자에 달려드는 미친 객기의 사람들. 이걸 CG를 최대한 자제하고 맨몸 액션으로 밀어붙인 미친 연출.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을 극대화하기 위해 블랙&크롬 버전으로 재개봉했다. 연출자 조지 밀러 왈, “흑백 버전은 <매드맥스>를 즐기기에 최고의 조건이다!”

<동주>(2016)
우리에게 윤동주 시인은 흑백 사진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이에 착안해 이준익 감독은 <동주>를 흑백 필름으로 촬영했다. <동주>는 윤동주를 우상화하지 않는 대신 일제의 만행에 시로 맞선 그의 모습을 통해 저항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도록 한다. 컬러와 다르게 흑과 백 단 두 가지 색으로 이뤄진 <동주>는 관객의 눈을 현혹하지 않고 여백의 미를 통해 윤동주와 그의 시를 사유하게 한다.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
두 개의 장(章)으로 구성된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1장 흑백, 2장 컬러로 진행된다. 1장은 극 중 영화감독이 백지상태에서 이야기를 구상하는 내용이, 2장은 이를 기본삼아 만든 영화로 이어지는 식이다.  그러니까, 1장과 2장은 긴밀하게 연결된 형태다. 백지에 검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게 1장이라면 2장은 색을 부여하는 과정인 셈. 컬러는 결국, 흑백이 있어야 의미를 획득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프란시스 하>(2012)
젊은이의 성장은 독립을 의미한다. <프란시스 하>는 가진 것 없는 대학생 프란시스가 자신의 재능과 타고난 성격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독립영화도 그렇다. 주류영화의 규격화된 틀을 탈피, 영화 자체가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게끔 주력한다. 흑백필름이 의미를 갖는 이유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천연색의 볼거리가 판을 치는 거대 영화 산업 안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젊은이의 독립을 이야기한다.

<아티스트>(2011)
할리우드의 무성영화 시절을 주름잡던 최고 스타가 유성영화의 출현에 따라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미셸 아자나비슈스 감독은 흑백의 무성영화 기법으로 필름이 사라진 현대의 영화 현실을 은유한다. <아티스트>는 사운드 대신 자막으로, 마임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표정과 행위 연기로, 그리고 상영시간 내내 계속되는 음악으로 현대의 관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로 다가간다.

<마더>(2009)
<마더>의 흑백 버전은 홍경표 촬영감독이 <설국열차>를 촬영하던 중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인물에 집중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하는 효과가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확실히 컬러와는 또 다른 느낌을 제공한다. 봉준호 감독은 “스산한 흑백의 느낌이 <마더>와 어울린다. 인물의 섬세한 연기도 더욱 부각되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마지막 순간, 흑백에서 컬라로 전환하는 순간이 황홀하다.

<친절한 금자씨>(2005)
<친절한 금자씨>는 아동 연쇄살인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금자씨의 복수를 그린다.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의 중반부터 화면이 조금씩 탈색해 결국 완전한 흑백으로 전환하는 실험적인 기법을 활용하려 했다. 극 중 복수심에 불탄 금자씨가 결국엔 복수의 무용함을 깨닫는 과정을 컬러에서 흑백의 전환으로 드러내려는 목적이었다. 컬러 먼저 개봉 후 흑백 변환본도 극장에 걸렸다.

<씬 시티>(2005)
밤의 세계가 낮을 지배하고 선인이 악한에게 착취당하는 씬 시티는 흑이 백을 압도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스는 원작의 이야기와 특유의 이미지로 구현된 세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원작자 프랭크 밀러에게 공동감독을 제안했다. 필름의 검은 부분을 탈색하는 방식으로 흑백 이미지를 강조하는 한편, 피와 같은 일부 대상에만 색을 부여함으로써 전에 본 적 없던 이미지의 영화를 만들었다.

<플레전트 빌>(1998)
TV 시트콤 ‘플레전트 빌’을 시청하던 남매가 흑백 TV 속으로 들어간다. 극 중 플레전트 빌은 질서정연하지만,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 흑백의 세계다. 남매는 이곳 주민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파하고 그에 따라 화면은 점점 컬러로 변한다. 컬러로 촬영된 이 영화는 특정 장면을 위해 선별적으로 색깔을 빼고 그 위에 흑백을 입히는 방식으로 컬러와 흑백이 공존하는 독특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쉰들러 리스트>(1993)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다. 1,100명의 폴란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나치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주인공이다. 스필버그가 흑백으로 만든 이유는 어린 시절 ‘기억’때문이다. 유대인 스필버그는 유년기에 나치의 만행에 관련된 영상을 많이 보았다. 그 끔찍한 기록들은 모두 흑백이었다. 그 자신에게 유대인 학살에 대한 기억은 흑백 영상이었고 그래서 컬러로 찍기 힘들었다.

 

ARENA
2017년 1월호

젊은 거장들

demian

거장은 나이 많고 필모그래프가 꽉 찬 이에게만 주어지는 지위가 아니다. 앞으로 할리우드의 거장으로 군림할 젊은 감독들 명단이다.

제프 니콜스
한국에서의 지명도는 낮지만,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감독이다. <머드> <러빙>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고 <테이크 쉘터>는 비평가주간 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극작가협회상 3관왕을 차지했다. <미드나잇 스페셜>은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제프 니콜스는 재난물, SF 등 장르를 취하되 익숙한 전개를 따르는 대신 예술영화를 만들 듯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노아 바움백
짐 자무쉬를 잇는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를 꼽자면, 단연 노아 바움백이다. 노아 바움백은 국내에 <프랜시스 하>와 <위아영>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 <오징어와 고래> <마고 앳 더 웨딩> <그린버그> 등으로 이미 주목을 받았다. 꽤 경력이 오래됐음에도 독립영화 진영을 지키며 메이저에서 웬만해서는 다루지 않는 소수자의 사연과 성장의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J.C. 챈더
<마진 콜>은 미국의 금융 위기를 다룬 금융 스릴러다. <올 이즈 로스트>는 망망대해에서 조난당한 남자의 사투를 그린 재난물이다. <모스트 바이어런트>는 폭력이 일상화된 뉴욕에서 살아남기 위해 범죄와 손잡는 남자의 갱스터물이다. J.C. 챈더의 필모그래프에는 그동안 미국이 겪은 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감독은 단연 J.C. 챈더다.

베넷 밀러
연출작은 <폭스캐처> <머니볼> <카포티> 세 편. <폭스캐처> <카포티>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각각 <버드맨>의 알레한드로 이냐리투와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안에게 수상을 뺏겼지만, 미국의 어두운 면을 날카롭게 드러낸 것이 화근이었다. 베넷 밀러의 차기작은 찰스 디킨스 원작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보수적인 아카데미 취향은 아니다. 역시 자본주의 미국의 이면을 폭로한다.

데미안 차젤레
<위플래쉬>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기념비적인 연출 데뷔작이었다. 음악영화의 통념을 깨고 스승과 제자가 음악으로 무협을 겨루는 듯한 연출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데미안 차젤레(사진)의 두 번째 작품 <라라랜드>도 호평 일색이다. 재즈 피아니스트와 배우 지망생이 미완성인 서로의 무대를 완성해가는 이야기는 기존의 로맨스와 뮤지컬의 문법을 훌쩍 뛰어넘는다.

벤 애플렉
배우 경력은 오래됐지만, 감독 필모그래프로는 젊은 거장이다. 벤 애플렉은 고작 세 번째 연출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CG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할리우드에서 그는 고전적인 연출을 앞세워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주목받고 있다. 금주법이 한창이던 1926년 보스턴 배경의 범죄물 <리브 바이 나이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스파이크 존즈
장편과 단편, 영화와 광고와 뮤직비디오 등 매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작품은 독특한 감성이 지배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 <그녀>까지, 주변과 어울리지 못해 홀로 되기를 즐기는(?) 남자의 고독감이다. 몸은 성인이되 유아적인 감성을 잃지 않는 키덜트 문화를 대표한다. 그런 점에서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는 할리우드에서도 독보적이다.

페데 알바레즈
전설의 공포물 <이블데드>를 핏빛 자욱한 고어로 리메이크했을 때만 해도 능력 있는 젊은 감독 정도로만 생각했다. 두 번째 연출작 <맨 인 더 다크>는 그 이상이었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 힘든 이야기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마저 없앤 연출은 페데 알바레즈가 왜 호러의 젊은 거장인지를 증명했다. 차기작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속편이다. 이참에 데이빗 핀처마저 넘을 참이다.

테일러 쉐리던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의 작가다. 테일러 쉐리던은 두 작품을 포함해 서부 몰락 삼부작을 기획하고 지금은 세 번째 작품 <윈드 리버>의 각본과 연출까지 맡았다. 서부를 우회해 현재의 미국을 진단한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는 그해의 영화이었다. 검증된 각본 능력에 연출까지 더해지면 연출 데뷔작 <윈드 리버>로 젊은 거장의 칭호를 받을 공산이 큰다.

제임스 완
제임스 완은 이름 자체가 믿을만한 브랜드다. 액션과 스릴러 등 장르를 가리지 않지만, 백미는 공포다. 그중 <컨저링> 시리즈로 대표되는 오컬트는 그의 연출을 따라올 자가 없다. 새롭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무서움을 줄지 공포물의 연출 문법을 꿰뚫고 있어서다. 그의 차기작은 <아쿠아맨>이다. 도탄에 빠진 DC 코믹스 영화의 구원자로 발탁됐다. 갑자기 기대감이 샘솟는다.

 

ARENA homme
2016년 12월호

[GV] <범죄의 여왕>

queenofcrimegv

(9월 3일 인디스페이스에서 진행했던 <범죄의 여왕> GV를 관객기자단 [인디즈] 홍수지 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사진은 김은혜 님께서 찍어주셨고요. 그날의 기록을 여기에 올립니다.)

수도 요금이 120만원? 물을 120만원을 쓸 수가 있나? 그것도 고시공부를 한다고 틀어박혀 있는 사람 한 명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사법고시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아들은 그냥 돈이나 보내라고 성화다.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친구를 때리는 친구의 남편에게 다짜고짜 보톡스 주사기를 들이미는 당찬 여성 ‘미경’(박지영 분)은 짐을 싸 들고 아들이 있는 고시촌으로 향한다. 그리고 미경이 마주하게 현실은 역시나 수상스럽다. 이 유쾌하고 수상하고 어딘가 독특한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이번 인디토크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감독 이요섭과 배우 조복래와 백수장, 진행으로 허남웅 평론가가 함께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허남웅 평론가(이하 허): 감독님께 먼저 질문을 드릴게요. <범죄의 여왕>은 <족구왕>(2013) 엔딩 크레딧에 나왔던 짧은 영상에서부터 시작되었을 텐데, 어떻게 장편으로 작품을 발전시키셨나요?
이요섭 감독(이하 이): <족구왕> 뒤에 쿠키영상을 붙일 때는 시나리오 초안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 뒤에 시나리오를 무수히 수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죠. ‘덕구’(백수장 분)와 ‘진숙’(이솜 분)을 러브라인으로 잇기도 하고, ‘개태’(조복래 분)를 다른 느낌으로 써보기도 하고, 미경도 진짜 범죄자가 됐다가 불법시술을 하는 아줌마 정도로 바꾸기도 하고. 그렇게 1년 반 정도 쓰고 찍게 된 것 같습니다.

허: 먼저 개태 역을 맡으신 조복래 배우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역할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조복래 배우(이하 조): 아마 일부러 극장을 찾아서 영화를 보러 오신 분들은 대부분 아시겠지만, 모두들 ‘광화문시네마’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같이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도 물론 너무 재밌었고요. 개태는 조금 덜떨어진 것 같고 대사는 거의 쌍욕이라 이걸 어떻게 사랑스럽게 표현하나 무수한 고민이 있었어요. 현장에서도 많이 징징거렸던 것 같아요. 이게 맞냐고, 이렇게 표현해도 되냐고. 아무튼 재밌게 작업을 했습니다.

허: 백수장 배우님께도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덕구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욕망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지만, 계속 얘기를 하고 참여하는 역할입니다. 어떻게 준비를 하셨나요?
백수장 배우(이하 백): 덕구가 스스로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법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아버지의 권유가 있었을 거예요. 덕구를 연기하며 정이 든 부분이, 덕구는 뭐든 잘하지는 못해도 주어진 걸 열심히 한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집중력 훈련도 하고. 아무튼 그래서 덕구라는 역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허: 외양을 따로 준비 하셨나요? 예를 들면 뿔테안경 같은 거요.
백: 아뇨. 그런 건 감독님이 정해주셨어요. 감독님이 확고하게 덕구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어요. 많이 듣고 참고를 했어요. 저와 다른 모습을 가진 캐릭터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재밌었어요.
조: 원래 백수장 배우가 덕구 같은 캐릭터는 아니에요. 말투도 아니고요.(웃음)
허: 감독님이 압박을 주신건가요?
이: 그렇다기보다 시나리오를 읽고 덕구에 대해 약간 후덕하고, 조금 더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분들이 있었어요. 제가 팟캐스트를 평소에 많이 듣는데, ‘불금쇼’의 ‘경춘선’이라는 캐릭터의 말투가 되게 특이하더라고요. 백수장 배우님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오덕’인데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 것 같은?(웃음)

허: 조복래 배우님과 백수장 배우님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나요?
이: 두 배우 다 편견을 깨고 나중에는 사랑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했어요. 조복래 배우 같은 경우는 다른 영화에서 봤을 때 무서운 느낌이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일단 얼굴이 되게 ‘개태’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씩 웃으니까 옆에 있던 스크립터가 왜 이렇게 좋아하냐고 해서 내가 생각했던 거랑 얼굴이 너무 닮았다고 했어요. 웃을 때 되게 예뻐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어머니한테도 다정하다고 해서 개태 역할을 하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복래 배우와 백수장 배우 둘 다 영화 <차이나타운>(2014)에서 무섭게 나오는데, 백수장 배우는 삭발하고 칼침을 놓는 무서운 인물로 나와요. 그런데 오디션 영상을 보니 저보다 어린 줄 알만큼 동안이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엽고 호감 가는 인상인데, 실제로 만나니 더 그렇더라고요. 목소리도 ‘덕구’ 같은 느낌이 되게 강해요.(웃음) 순수하고 좋은 형이에요.

허: 개태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셨나요?
조: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던 캐릭터였어요. 미영과의 관계 구축에 많은 신경을 썼고, 친구인 듯 애인인 듯 모자관계인 듯 보일 수 있도록 했어요.

허: 백수장 배우님은 힘드신 부분은 없었나요?
백: 오디션에서 덕구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연기해야 했어요. 시크하고 독특한 느낌으로 연기했는데, 조연출님과 스크립터님이 감독님께서 특별히 원하는 느낌이 있다고 하시면서 아까 얘기한 팟캐스트를 들려주셨어요. 듣고 나서 짧은 시간 안에 그런 느낌으로 연기를 다시 했더니 캐스팅이 됐어요.

허: 아무래도 미경 역이 중요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박지영 배우님을 염두에 두신 건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영 배우님을 캐스팅하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항상 다른 배우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웃음) 박지영 배우님는 처음 뵀을 때부터 놀랐어요. 강하고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만나니 그렇지 않았어요. 정신없기도 하고 털털하면서 말이 많은데, 말도 예쁘고 외모도 아름다웠어요. 아들에게는 좀 밉지만 주변 사람에게는 호감을 얻는, 제가 생각한 미경의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딱 맞는 캐스팅이었던 것 같습니다.

허: 미경의 모델이 있었나요?
이: 처음에는 엄마의 연령대가 훨씬 높았어요. 진짜 ‘엄마’ 같은 느낌을 가져가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일반적이고 고리타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연령대를 낮췄어요. 그런 느낌을 찾다보니 스페인 여성들이 비슷했어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2006)에 나오는 페넬로페 크루즈가 섹시하지만 모성애가 넘치는, 여러 모습들이 뒤섞여있는데, 그 감정에 솔직한 모습이 제가 봤을 때 건강한 엄마 같더라고요.
조: 개태 엄마는요?
이: 원래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마지막에 미경과 개태가 미용실에 앉아있으면 전화가 한 통 와요. 알고 보니 개태의 엄마가 정선 카지노에 붙잡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정선 카지노로 떠나는 거죠. 저는 개태가 어릴 때 보육원에 맡겨지고 그 삶에 적응하지 못해 뛰쳐나와 흘러 흘러 관리사무소의 아저씨를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개매 엄마는 도박을 즐기는 미인 정도로 생각했어요.

허: 박지영 배우님에 대해서 두 배우님은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극 중 관계를 위해서 따로 준비하신 것이 있는지 여쭤볼게요.
백: 처음에 덕구 캐릭터에 대해 약간 자신이 없었는데, 전체 배우들이 모여서 첫 리딩을 하는 날부터 박지영 선배님이 덕구로 대해주셨어요.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고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조: 처음에는 박지영 선배님이 되게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적당선 이상을 넘지 말아야겠다 했는데, 처음부터 미경의 모습을 보여주시더라고요. 다정함을 넘어 깊게 파고들어오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저도 다가갈 수 있었어요. 촬영현장에서 선후배를 넘어 동료로 어우러질 수 있었어요.

허: 구체적으로 에피소드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조: 화장실에 숨어 있는 장면을 찍을 때 여러 가지 제안을 하며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봤어요. 이 장면 말고도 많은데, ‘403호 강하준’(허정도 분)을 찾으려고 신림동을 뒤지는 장면 같은 경우는 텍스트가 따로 없어서 저희끼리 자유롭게 했어요.

관객: 미경이 모든 캐릭터에게 반말을 하는 설정이 흥미로웠어요. 그렇게 설정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 미경이라는 캐릭터가 장벽을 내려놓는 방법 중 하나가 말을 놓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이에 많은 벽이 있지만, 빨리 정리하고 시작하자’인 거죠. 말을 놓는 게 벽을 허물기에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관객: 반전이 없다는 게 이 영화의 반전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스릴러물 같은 경우 무리하게 반전을 설정하는 경우도 많은데, 반전에 대한 유혹은 없으셨나요?
이: 처음에는 진짜 멋있는 반전을 써야지 생각하면서 1년 반 동안 반전만 생각했어요.(웃음) 근데 반전을 넣으니까 두 가지가 걸렸어요. 하나는 미경이 403호를 제외하고는 다 진심을 주는데, 반전이 생기게 되면 어쨌든 미경이 배신당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이야기가 별로더라고요.

또 하나는 403호 하준 캐릭터였어요. 저는 하준이 사회에서 치여 왔던 과정을 풀어내고 싶었어요. 이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가 사이코패스거나 미쳐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 ‘드라마’라고 해요. 코미디를 잘 쓰지 못했고 스릴러는 껍질만 가져왔어요. 하준이 싸우고 있는 사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관객: 개태의 본명이 있나요?
이: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보육원에 맡길 때도, ‘개똥이’ 식으로 지어 놓고 갔을 거예요. 본명이 전개태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자기를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관객: 미경이 화려한 원색의 옷을 입고 나와요. 신발에 포인트가 맞춰진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이: 하이힐에 대한 페티시가 있는 건 아니고요.(웃음) 고시원에 없는 신발이 뭘까, 없는 색깔이 뭘까 생각했어요. 칙칙한 공간을 바쁘게 다니는 빨간 신발. 그리고 하준 아내의 살구색 신발은 시간이 오래 지나 닳은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문턱을 많이 드나든 느낌.

허: 배우 분들은 연기하면서 힘들 때가 있었나요?
조: 원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액션신이 있었어요. 찍을 때 다리도 다쳤는데, 편집돼서 더 힘들었죠.
이: 제 자식 덜어내듯이 잘라냈습니다.

관객: 스릴러로 포장된 가족영화의 느낌을 받았어요. 기존의 가족 영화랑은 다르게 개태와 미경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같았어요. 감독님은 영화를 통해서 새로운 가족 관계를 보여주고 싶으셨나요?
이: 저는 ‘익수’(김대현 분)의 아빠를 만들어 주는 것을 꺼렸어요. 미경을 독립된 존재로 남겨두고 싶었어요. 그리고 피로 섞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모여 살면 훨씬 나은 지점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 대안 가족의 형태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니에요. 다 쓰고 나니 개태랑 미경이 한 번 더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태를 미경의 미용실에 취직시켰죠.

관객: <족구왕>에서도 그렇고, 왜 하필 ‘벤츠’를 사용하셨나요?
이: 저희에게 후원이 온 것은 절대 아니에요. 그냥 좋은 차면 상관없었는데, <족구왕>에서 한 번 쓰였기 때문에 사용한 이유가 가장 커요. 미경이 봤을 때 좀 부러운 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허: 세 분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조: 내년 1월쯤에 <궁합>이라는 영화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백: 10월 초에 장편영화를 찍을 것 같고, 올 말쯤에 개봉하는 <싱글라이더>에 출연합니다.
이: 글을 다시 써야겠죠. 대반전이 있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요섭 감독이 말했듯이 <범죄의 여왕>은 스릴러의 껍데기를 쓴 드라마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맨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건물)의 누추한 모습은 그 무엇보다 영화 세트(가짜) 같지만, 지금 당장 서울 신림동에서 비슷한 곳을 찾아보라고 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분명히 우리는 그곳과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범죄의 여왕>은 이 공간을 사랑스러운 인물들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한때는 사랑스러웠을 ‘하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범죄의 여왕>은 미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는 스릴러가 아닌 인간들에 대한 드라마다.  

 

<범죄의 여왕> GV
(2016.9.3)

[GV] <포레스트 검프>

gump 160131

올해 1월 31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손아람 작가 <포레스트 검프> GV를 진행했습니다. 마침 <포레스트 검프>의 재개봉이 이뤄져 여기에 공개합니다.  정리는 이오림 자원활동가가 해주셨고요, 사진은 장혜진 포토그래퍼가 찍어주셨습니다.

허남웅(영화평론가)  먼저 이번 친구들영화제에 참여한 소감을 듣고 싶다.
손아람(작가)  놀랐다. 다른 친구분들의 이름을 보니 나를 왜 선택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영광이라 생각한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를 추천해주었다.
손아람  나에게는 인생 영화다. 처음 전화로 제안을 받았을 때 직원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포레스트 검프>요” 라고 말했다. 이 영화를 세 번 이상 보신 분이 계실 것이다. 혹시 열 번 넘게 본 분도 계신지… 그런데 나는 100번 넘게 봤다(웃음). 나는 뭐랄까, 이 영화가 단순히 ‘좋다’는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성경 들춰보듯이 본다. 주말마다 <포레스트 검프>를 보면서 ‘좀 씻어내야겠다’, 뭐 그런 느낌이다(웃음).

허남웅  그 정도로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손아람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내가 중학교 2학년인가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재밌게 봤다. 그런데 나중에 살아가면서 이 영화에서 다루는 가치들을 계속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의 예술이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건 일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삶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배웠다. 이 영화는 분명히 나에게 영향을 미쳤고, 내가 쓰는 글에도 그 영향이 녹아 있다. 내가 쓰는 글의 ‘조상님’ 같은 존재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약 나의 글이 세상에 작게나마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거기에는 <포레스트 검프>의 영향도 녹아 있을 것이다.

허남웅  중학생 때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극장에서 보았나, 아니면 비디오로 보았나.
손아람  하도 많이 보다보니 오히려 첫 기억은 희미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걸 내 인생 영화로 삼은 건 아니다. 나이가 든 뒤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남웅  그 감상의 변화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듣고 싶다.
손아람  어렸을 때 봤을 때는 그냥 바보의 성공기처럼 보였다. 주인공이 ‘바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점차 나이가 들면서 삶의 우연성이란 테마에 관심이 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대사가 “인생은 초콜릿 박스 같은 것이다. 열기 전에는 뭘 먹게 될지 모른다”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깃털로 시작해 깃털로 끝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의 삶에는 너무 많은 우연들이 개입한다.

그리고 영화의 플롯 자체가 우연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만약 어떤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구상하면 개연성이 없다고 바로 욕을 먹을 것이다. 기본도 안 된 이야기라고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삶의 우연성에 대한 어떤 진실이 담겨 있어서 이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무의식과 공명을 일으키는 게 아닐까. 삶 자체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말이다.

허남웅  이 영화에 대해 찾아보니 원작이 1985년도에 나온 소설이다. 그때 피디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했을 때 모든 제작사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공도 바보고 각 에피소드들 사이에 너무 개연성이 없어서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피디가 결국 톰 행크스에게 바로 책을 보냈다. 다행히 톰 행크스는 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했고, 피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바로 최고의 작가가 시나리오를 맡아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바로 에릭 로스다. 따지고 보면 이 제작 과정도 전부 우연인 셈이다.
손아람  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공로자는 에릭 로스이다. 그는 인간을 보는 관점이 뚜렷한, 위대한 작가이다. 이 사람이 쓴 시나리오에 저메키스 감독이 특유의 감성을 덧입혔다. 나는 90년대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하면 저메키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캐스트 어웨이>, SF 영화 <콘택트> 등등.

허남웅  소설을 쓸 때 <포레스트 검프>에 영향을 받은 게 있다고 했다. 작가님의 소설 「디 마이너스」 같은 경우도 9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손아람  나는 어떤 커다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개인적 삶을 같은 시점으로 보는 걸 피하려 한다. 이를테면 좌파와 우파가 나온다고 해도 개인의 삶은 그 사람의 정치성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거시적인 역사적 흐름과 분리된 인간의 관점을 지키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그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포레스트 검프의 이름인 포레스트는 KKK단의 간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히피와 흑표범단이 나오지만 이 영화는 그들을 어떤 정치적 진영의 관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인간들의 관점에서 그려낸다. 그러다보니 완전히 우호적으로 그리지 않는 점도 있다. 그런 관점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았고, 「디 마이너스」에서도 그런 걸 시도하려 했다.

허남웅  이 영화가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개연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다룰 때는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서 썼다고 한다.
손아람  세계관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영화이다. 보통 작가의 작업은 소재를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작가의 진짜 작업은 소재 이전에 어떤 세계관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소위 ‘우파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역사를 그렸다는 것이다. 제니 같은 좌파측 인물이 병에 걸려 죽는 에피소드 등이 특히 그랬다.
손아람  그건 너무 즉물적인 발언이다. 우리만 해도 예전 민주화 세대, 소위 ‘386 세대’가 기성 제도에 편입됐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그 민주화 세대에 속하는 각 개인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는 사실 별개의 문제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잘 보여준다. 만약 이 영화가 역사적 사건만 그리고 그 안의 사람을 그리지 않았다면 굉장히 볼품없는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는 역사적 필연성 안에서 우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각 개인의 삶을 보여준다. 커다란 역사적 흐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개별적 삶을 분리한 것이 이런 걸작이 탄생한 분기점이라고 본다.

허남웅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지.
손아람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포레스트 검프가 단상에서 이런 저런 말을 하려는 데 결국 실패하고 단상 아래에서 제니와 껴안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 장면은 반전 운동의 핵심을 보여준다. 역사 안에서 인간 생의 변곡점이라 부를 만한 지점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리고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장면은 포레스트 검프가 전국을 뛰어다니는 시퀀스이다. 실제로 나에게 그런 시기가 있었다. 뛰지는 않고 걸어 다녔다(웃음). 힘든 일이 있어서 두 달 동안 전국을 걸어서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너무 답답해서 그냥 집 앞 한 바퀴를 돌고 왔다. 그런데 걷다보니 전국을 돌고 있었다. 그 여행을 하면서 포레스트 검프 생각도 많이 했다.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허남웅  그렇게 전국을 걸을 때 따르는 우군들이 있었나?(웃음)
손아람  아무 준비도 없이 걷다보니 나중에는 몰골이 좀 이상했었다. 씻지도 못하고 수염도 길고 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웃음). 그렇게 하루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는데 옆방의 대학생이 밤에 날 찾아왔다. ‘제가 이번에 졸업을 하는데 고민이 많습니다. 선생님께 상담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하더라. 날 도사님으로 본 것 같다. 내가 ‘이방인’으로 보여서 자기 삶에 예외적인 조언을 해줄 것이라 기대한 것 같더라.

허남웅  로버트 저메키스의 영화에는 길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캐스트 어웨이>도 비슷한데, 저메키스의 영화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람을 보여줄 때 카메라가 멈춰있지 않고 항상 움직인다. 저메키스 특유의 미학이다.
손아람  저메키스 영화에는 삶 자체를 가출로 보는 관점이 있는 것 같다. 동의하는 관점이다.

허남웅  <포레스트 검프> 말고 저메키스의 영화 중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손아람  로버트 저메키스 작품이라 좋아한 건 아닌데, <콘택트>도 굉장히 좋아한다. 원작도 대단히 뛰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원작은 굉장히 엄밀한 과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접근한다. 사실 좀 어렵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부분을 효과적으로 생략한 뒤 소설의 핵심 테마인 인간과 종교, 과학의 관계에 대해 파고든다.

관객  <포레스트 검프>에서 깊은 인상을 준 조연이 누구인지 듣고 싶다.
손아람  주인공이 백지와 같은 캐릭터이다보니 조연들이 특히 더 도드라진다. 우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포레스트의 어머니가 있고, 그 반대에는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 댄 중위가 있다. 또는 삶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포레스트 검프가 있고, 반대로 너무 많은 것을 알아서 삶에 좌절감을 느끼는 제니가 있다. <포레스트 검프>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긴장을 만들어낸다. 굉장히 세련된 방식이다.

허남웅  덧붙이자면 원작 소설이 85년도에 나왔는데 작가가 속편을 만들었다고 한다. 속편에는 포레스트 검프가 톰 행크스를 만나는 장면도 있다고 한다(웃음). 후속편도 만들어질 뻔 했는데 톰 행크스가 속편 출연을 거부하면서 불발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속편 시나리오 기획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손아람 : 안 만들어졌으면 한다. 속편이 넘어서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다.

허남웅  100번 넘게 보았다고 했는데 다 극장에서 보지는 못 했을 것이다. 오늘 오랜만에 <포레스트 검프>를 극장에서 본 느낌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손아람  이 영화는 오늘이 아니면 다시 극장에서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에서 보니 집중력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집에서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다. 전래동화나 이솝우화를 읽는 기분이다. 그런데 극장에서는 스크린이라는 것, 어둠이 주는 프레임 효과 등을 경험할 수 있다.

허남웅  소설은 사람들과 같이 읽을 수 없는 장르이다. 하지만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스크린을 여러 명이서 보는, 이상한 연대감이 생긴다.
손아람  그런 경험이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유머가 그렇다. <소수의견>을 모니터링 할 때 미묘한 유머 코드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개봉 이후 사람들이 가득 찬 극장에서 볼 때는 한 명만 웃어도 그 균열이 빠르게 전파된다. 특히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뭔가 전염되는 감정을 받아들일 적극적인 준비를 한 사람들이다.

<포레스트 검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굉장히 수준 높은 유머로 무장한 작품이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볼 때는 절대 소리 내며 웃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몇 번씩 크게 웃었다. 웃음은 어떤 면에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메시지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소리 내서 웃을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극장의 관객들에게 함께 웃자며 소리 내어 웃는 것이다.

허남웅  작가님이 좋아하시는 저메키스의 영화들은 90년대 영화고, 작가님도 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90년대 대중문화에 가지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손아람  가장 예민했고, 또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가장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이건 객관적인 건 아니지만 세계 대중문화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고 생각한다. 영화, 서사, 음악 전부 그렇다. 특히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90년대에 나온 모든 가능성을 재조합하면서 재탕한다는 느낌이 있다. 영화도 90년대에 모든 걸 다 쏟아낸 뒤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허남웅  앞으로의 계획, 다음 작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손아람  미래에 대한 계획을 얘기하면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이 자꾸 전에 말했던 계획에 대해 물어본다. 그게 괴로워서 계획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는 못할 것 같다.

허남웅  마지막으로 관객분들께 인사말씀 부탁드린다.
손아람 : 오늘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내가 만든 영화가 아닌데도, 내가 선택한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지 몰랐다.

<포레스트 검프> 정도의 영화는 영화사를 통틀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야기의 힘과 이것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이 정도 에너지를 가진 영화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영화와 함께할 시간을 내어주어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포레스트 검프> GV
서울아트시네마
(2016.1.31)

존 카펜터, 현대 미국의 공포를 예언(?)하다

escapefromnewyork

지금 1980년대의 존 카펜터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카펜터는 1980년대에 주옥같은 영화들을 만들며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지위를 누린 감독이었다. 이 지면에서는 당시 대표작 중 <안개>(1980)와 <커트 러셀의 뉴욕 탈출>(1981)(이하 ‘<뉴욕 탈출>’)을 살펴볼까 한다. 두 작품은 각각 36년과 37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담고 있는 메시지는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안개> 미국인에게 재현된 피의 역사

시계가 자정을 알리자 작은 항구 마을은 순식간에 안개에 휩싸인다. 오늘따라 안개가 심한 걸,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잠시. 안개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파괴와 살인의 흔적으로 얼룩진다. 그 시각 교회에 홀로 남은 말론 신부에게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벽 일부가 갑자기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할아버지가 숨겨둔 일기장이 발견된다.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는 한 마디.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사연을 밝히기 전, 존 카펜터의 작품 성향을 알고 있는 팬들이라면 <안개>의 설정이 노리는 바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존 카펜터는 당대 미국인의 무의식에 잠입해 있는 공포를 밖으로 끄집어내 구체화하기를 즐겼던(?) 감독이다. <안개>의 안개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건 이 항구 마을의 100년 전 사건이다. 스페인 해적들이 가지고 있던 금을 말론 신부의 할아버지가 주축이 된 항구 사람들이 빼앗아 숨겨두었던 것. 이에 스페인 해적들의 원혼이 안개에 숨어 피의 앙갚음을 시도하는 것이다.

외부 세력에 대해 느끼는 미국의 공포는 유명하다. <안개>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터. 특이한 건 그 대상이 스페인 해적이라는 데 있다. 유령의 형태이지만, 그들이 바다를 통해 해변 마을에 들어와 이곳 주민들을 학살하는 설정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당시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미국 역사의 기원이 가해와 피해의 대상을 바꿔 <안개>에 제시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미국이 초래한 당연한 결과이다.

인디언에게서 뺏은 땅 위에 꽃피운 피의 역사를 미국이 개척정신으로 포장한 건 유명하다. 안 그래도 이 해변 마을에는 하나뿐인 라디오 방송이 있다. 이곳 방송을 주도하는 여자 DJ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팝 음악을 라디오 전파에 실어나른다. 자정을 밝혀주는 팝의 선율 밑에서 자행되는 스페인 해적 유령들의 폭력 행위는 개척 정신으로 숨겨온 미국 학살의 역사적 맥락을 센스 있게 우회한 설정이라 할 만하다.

<안개>가 개봉했던 1980년은 구(舊)소련과의 냉전이 한창인 시기였다. 밖으로는 핵 공격의 위협에, 안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반발에 힘을 앞세워 방어하던 시기였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정국. 그에 대한 미국인의 공포의 기원을 존 카펜터는 <안개>를 통해 드러낸다. 피로 흥한 왕국은 피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피로 망할 수밖에 없는 법. 존 카펜터는 <안개> 이후 차기작으로 발표한 <뉴욕 탈출>에서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표되는 뉴욕을 지옥으로 변모시킨다.

<뉴욕 탈출> 감옥으로 들어간 미국 대통령 

<뉴욕 탈출>을 두고 혹자는 9.11 테러를 예견한 영화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극 중 비행기가 뉴욕의 고층빌딩과 부딪히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과장한 평가라고 생각하지만, <뉴욕 탈출>이 보여주는 것처럼 9.11 이후 뉴욕은 마냥 평화가 넘치고 예술이 넘실대는 도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1988년, 미국 정부는 뉴욕의 범죄율이 400% 이상 증가하자 아예 봉쇄하기로 한다. 뉴욕은 이제 도시 자체가 감옥이 되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1997년. ‘스네이크’로 불리는 플리스켄은 한 때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지금은 연방은행을 털다가 감옥에 갇힌 신세다. 그에 맞춰 에어포스원이 테러범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테러범들은 대통령 전용기를 몰고 뉴욕의 고층빌딩을 향해 자폭 테러를 감행하고 대통령은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불시착한 곳은 뉴욕. 범죄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이는 꽤 상징적인 설정이다. 존 카펜터가 <뉴욕 탈출>에서 묘사하는 미국 대통령은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뉴욕의 수감자들에게 인질로 잡혀 벌벌 떨지를 않나, 그를 구하려는 아군은 나 몰라라 먼저 도망치기도 서슴지 않는다. 소인배 같은 대통령이라니, 백악관보다는 감옥이 더 어울려 보인다. 그런 의도였을 테다. 영화는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미국 정부와 임시로 손잡고 뉴욕에 잠입한 ‘범죄자’ 플리스켄에게 관객이 응원하게끔 이야기를 끌고 간다.

대통령을 대하는 플라스켄의 태도 역시 정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스켄에게 대통령은 그동안의 범죄 행적을 지우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수단에 불과하다. 플라스켄에게는 대통령 구하기가 방점이 아니라 지옥 같은 이 현실을 탈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다. 한때 뛰어난 군인이었던 플라스켄은 어쩌다가 은행 강도로 전락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플라스켄이 악한이 아니라 그렇게 몰고 간 환경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관객이 짐작하게끔 분위기를 유도한다.

뉴욕에 불시착하긴 전 미국 대통령은 여러 나라의 정상들과 핵 문제에 대해 논의하러 가는 중이었다. 핵 문제에 신경을 쓰는 동안 미국 내부는 범죄 문제로 완전히 곪아 터진 상태다. 이의 원흉은 냉전에만 몰두하느라 정작 자국민의 안전은 챙기지 못한 대통령에 있다. 죄를 물어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다. <뉴욕 탈출>의 설정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결국, 미국 대통령이 있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감옥이다!

<안개>는 에드가 앨런 포의 시 <꿈속의 꿈>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보거나 그렇게 보이는 모든 것이 단지 꿈속의 꿈에 불과할까?’ <안개>와 <뉴욕 탈출>에서 존 카펜터가 묘사하는 미국의 공포는 그저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영화라는 꿈이 아니라는 얘기다. 존 카펜터가 묘사한 것처럼 현대의 미국은 여전히 외부의 공격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뉴욕은 여전히 테러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그렇게 <안개>와 <뉴욕 탈출>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현대 미국의 공포를 적확하게 꿰뚫어보는 동시대성을 유지하고 있다. 존 카펜터의 영화가 여전히 소환되는 이유다.

 

cinematheque
2016년 7월호

[GV] <산이 울다>

mountaincry

(GV를 위해 작성해서 글이 투박합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참, 스포일러도 있으니 아직 안 보신 분은 피해주세요.)

래리 양 감독의 <산이 울다>는 루쉰 문학상을 수상한 거쉬핑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죠. 래리 양이 처음 거쉬핑의 <산이 울다>를 읽은 건 베이징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인 2008년이라고 해요. 당시 그는 감독으로서 어떻게 하면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죠. 농담처럼 벙어리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을 만들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마침 친구가 거쉬핑의 소설을 소개해줬답니다.

<산이 울다>는 중국의 산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이곳에 말을 하지 못하는 홍시아(랑예팅)가 이주해 옵니다. 남편이 있는데 개차반이에요.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러요. 그런데 그 폭력 남편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마을 청년 한총(왕쯔이)이 오소리를 잡겠다고 설치한 폭약을 밟고 만 것이죠.

그런 연유로 한총은 홍시아를 돌봐주게 됩니다. 처음엔 경계했던 홍시아도 한총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아요. 홍시아의 죽은 남편 때문에 마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한총은 홍시아를 보호하려고 하고 그 때문에 이 둘에게는 점점 비극이 다가옵니다.

래리 양 감독은 홍시아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투영했다죠.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어 만들지 못하는 자신이 홍시아와 닮았던 거죠. 한편으로 래리 양 감독은 청소년 시절을 미국 뉴욕에서 보내다가 베이징 영화 학교에 입학하겠다며 2002년에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자신이 마치 홍시아처럼 외지인으로 느껴졌다는 거예요. 래리 양 감독이 거쉬핑의 <산이 울다>에 마음이 꽂힐 수밖에 없는 이유였죠.

거쉬핑의 동명 소설은 단편입니다. 래리 양 감독은 많은 걸 덜어내야 하는 장편보다는 많은 걸 더할 수 있는 단편이 영화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산이 울다>도 그래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야기의 얼개는 그대로 따르는 대신 홍시아와 한총이 사랑하는 관계를 좀 더 로맨틱하게 그리기 위해 현대적(modern)인 요소를 추가했습니다. 예컨대, 거쉬핑의 원작은 분위기가 굉장히 어두운데요. 래리 양 감독은 그런 부분들을 많이 덜어내고 대신 밝은 분위기로 가져갔습니다.

극 중 홍시아가 폭력 남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한총을 만나고 모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산을 거닐 때 영화는 종종 ‘햇빛 찬란한 순간’들을 연출해요. 이런 묘사는 원작에는 없다네요. 확실히 영화 <산이 울다>를 보고 있으면 햇빛이 홍시아를 비출 때의 영상이 홍시아의 찌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물론 관객들의 마음까지 뻥 뚫어주는 느낌이에요. 이 영화의 촬영을 맡은 이는 멕시코에서 주로 활동하다 할리우드와 중국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는 패트릭 머지아(Patrick Murguia)가 맡았습니다.

래리 양 감독은 중국보다 미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산이 울다> 자체가 홍시아와 같은 이방인, 그리고 한총과 같은 소수자가 주인공인 작품이다보니 중국에서 활동하는 이보다 이방인이자 소수자의 위치를 점하는 패트릭 머지아와 같은 촬영감독의 존재가 더욱 이 영화에 맞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홍시아처럼 말을 하지 못해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한총처럼 어수룩하고 단순한 이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분위기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는 래리 양 감독의 의도였던 거죠.

실제로 래리 양 감독은 <산이 울다>를 만들기 전 패트릭 머지아와 말레이지아 출신의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프리 콩과 프랑스 출신의 음악감독 니콜라스 에레라와 함께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샨시 지역을 함께 여행했다고 해요.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농촌 영화 nongcun pian’가 만들어졌습니다. 19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농촌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였죠. 농촌을 배경으로 계급적 배경과 정치성으로 드러난 인물의 동기와 행위를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부르주아지 사실주의’에서 집단적, 대중적, 투쟁성 위주의 ‘혁명적 사실주의’로 변모시키는 내용이 지배적이었죠.

이와 같은 농촌 영화의 배경을 가지고 래리 양 감독은 일종의 전복을 꾀합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농촌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거죠. 오히려 집단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논조를 개인에게로 옮겨가 사랑, 즉 개인의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안 그래도 <산이 울다>는 홍시아와 한총의 사랑 이야기이죠.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박해받습니다. 이들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들의 사랑이 자칫 마을에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주민들의 우려 때문입니다.

홍시아의 남편은 도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산속 깊은 곳에 들어온 전력을 가지고 있죠. 그러다가 한총이 오소리를 잡겠다고 설치한 폭탄을 밟고 목숨을 잃고 맙니다. 공안은 홍시아의 남편을 잡기 위해 산골 마을을 뒤지고 있는데요. 산골마을의 주민들은 홍시아의 남편이 살인자라는 사실에 상관없이 그를 죽인 한총을 숨겨주고 시신을 묻은 것이 탄로날까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마을 이미지가 추락하면 안된다는 것이 마을의 입장인데요. 그렇다면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대상은 소수자입니다. 홍시아는 여자인데다가 말도 못해 게다가 외지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홍시아를 이 마을에서 쫓아내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총이 홍시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홍시아를 몰아내려고 하자 한총은 자수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홍시아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 개인의 욕망을 위해 집단의 욕망을 부정하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84년이죠. 1984년은 중국영화계에서 꽤 의미 있는 한 해였습니다. 중국 5세대 감독의 대부 우텐밍 감독의 <인생>이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체제 순응적 환경에서의 개인의 갈등을 다룬, 이 시기에 나온 일련의 영화 중 첫 번째 작품이에요. 농촌 영화 장르에 대한 그동안의 서정적 시각을 뒤집어 엎는 역할을 했다는데요.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진 남자 주인공이 시골과의 인연을 끊고 애인을 찾아 마을을 떠나려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기자 주_ <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참조) 어떤가요, 래리 양 감독이 다룬 <산이 울다>와 비슷하지 않나요?

래리 양 감독은 중국 영화의 토양은 가져오면서 그 위에 비슷하지만 시각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산이 울다>를 구성했습니다. 극 중 시간 배경은 1984년이지만, 현대의 관객들에게는 전혀 옛날 느낌이 들지 않게끔 연출했다는 의미이겠죠. 래리 양 감독은 <산이 울다>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현대의 젊은 관객들과도 연관이 있었으면 바랐어요. 요즘 젊은 세대는 삶이 참으로 버겁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도 잃고 삶도 잃은 것처럼 보여요. <산이 울다>를 보고 홍시아처럼 투쟁하고 사랑과 책임감에 대해 이해하고 무엇보다 편견에 맞서 용기를 얻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래리 양 감독은 홍시아에게서 요즘의 젊은 세대의 특성을 본 것인데요. 홍시아를 연기한 배우는 랑예팅입니다. 어릴 적에 피아노를 배웠고 연극 무대에서 연출을 하기도 했다네요. <산이 울다>에 출연하기 전에는 두기봉 감독의 <화려한 샐러리맨>과 <블라인드 디텍티브>에서 연기했는데요. 그러면서도 클래식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네요. 래리 양은 또한 배우이기도 한데 랑예팅과는 <블라인드 디텍티브>에서 함께 했죠. 래리 양 감독은 그녀에게서 리듬감을 보았고 내면에 있는 우아함을 느꼈대요. <산이 울다>의 홍시아 역에 적역이었다고 판단한 근거입니다. 그녀는 연기의 기술은 없지만, 대신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 그것이 홍시아와 닮았다는 것이죠.

전 <산이 울다>에서의 홍시아가 곧 산 그 자체라고 보았어요. 산은 말 없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존재이죠. 오히려 인간들에게 상처 입어도 이에 딴 마음을 품기 보다는 그 아픔을 그대로 간직합니다. 그래서 산은 비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홍시아가 그렇죠. 폭력 남편에게 납치된 후 그녀는 말을 잃었고 아픔을 마음 속으로 삭입니다. 홍시아에게 있어 산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고향에 와서야 그녀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여는 건 아닙니다. 그녀가 산이기 때문에 산을 잘 아는 이에게만 허락을 하겠죠.

한총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일례로 한총은 오소리가 다니는 길을 잘 알죠. 홍시아는 직감적으로 한총에게 마음을 빼았겼을 거예요. 실제로 오래 지켜보기도 했고요. 그래서 폭력 남편이 죽은 후 홍시아와 한총이 잠시간 행복을 느낄 때 이들을 비추는 카메라는 뻥 뚫린 산의 공간에서 마치 산과 하나가 된 듯한 구도를 가져갑니다. 홍시아와 한총은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자연은 늘 사람들에 의해 파괴가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산이 별 말 안하니 우습게 본 것이죠. 홍시아와 한총의 사랑도 그래요. 말 없는 홍시아와 어수룩하고 단순한 한총의 사랑에 마을은 가혹하게 굽니다. 늘 소수자의 사랑은 시스템에 의해 방해를 받죠. 이럴 때 산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부모이겠죠. 한총은 어머니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지내요. 아버지는 감옥에 갖다 온 전력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밝히지는 않지만, 술을 마시다 폭력을 휘둘러서일 거예요.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게 됐고 다행히도 감옥에서 나온 후 아버지는 한총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과거 전력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 한총에게 죄책감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야 아버지 역할을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처음엔 아버지도 한총이 홍시아를 사랑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좀 더 나은 짝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한총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게 아비의 마음이죠. 한총이 홍시아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는 마을 사람들의 방해에도 한총이 자수하는 길을 마련해 줍니다. 한총을 따라 홍시아도 떠나려고 합니다. 홍시아는 한총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두 자녀를 키워달라고 해요. 아버지는 그 아이들을 그대로 품에 안습니다. 한총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홍시아의 두 자녀에게는 충분하게 제공하겠죠.

아픈 사연입니다. 하지만 산은 아픈 이들의 삶을 그대로 품어주죠. 물론 너무 아플 때 산은 울기도 합니다. 산의 울림은 메아리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메아리이기 때문에 그 여운이 더욱 길게 남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더욱 깊이 박히겠죠. <산이 울다>는 바로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1984년이 배경이지만, 올드한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의 관객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산이 운다는데 그 사연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죠.

 

<산이 울다> GV
(2016.5.16)

[GV] <클랜>

elclan

(GV를 위해 소리나는 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래서 비문이나 맞춤법 틀린 게 많아요. ^^; 감안해서 읽어주세요.)

정말 거짓말 같은 실화를 다룬 작품이죠.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부 독재가 무너지고 라울 알폰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민주화가 이뤄진 1980년대 초반 당시 아르키메데스 푸치오(길예르모 프란셀라)는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을 납치해 가족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범죄를 저질렀죠.

납치를 다룬 사건은 빈번하지만, 푸치오 사건이 더 충격적인 건 가해자로 연루된 이들이 푸치오의 ‘가족 el clan’인 까닭입니다. 푸치오의 아내 에피파냐는 교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남편이 납치해 온 인질의 사육(?)을 담당했죠.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아르헨티나 럭비계의 슈퍼스타인 장남 알렉스(피터 란자니)는 납치 대상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고요. 그외에도 두 딸과 두 아들은 아버지 푸치오의 범죄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하거나 묵인하거나 혹은 옹호했습니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다보니 30년 전의 일인데도 아르헨티나에서는 여전히 언급되고 도서나 드라마, 영화 등으로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클랜>은 지난해 인구가 4천3백만 명인 아르헨티나에서 1,500만 명 그러니까, 인구 1/4이 이 영화를 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는데요. 그만큼 푸치오 가족의 납치 사건은 범죄 역사상 손꼽히는 이례적인 사건으로 여전히 그 충격파가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겠죠.

<클랜>을 만든 이는 파블로 트라페로 감독입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감독이지만, 파블로 트라페로는 <클랜>으로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감독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푸치오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 파블로 트라페로 감독은 초등학생(1971년 생)이었다고 하네요. 어린 나이였지만, 인상적인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하네요. 파블로 트라페로는 직장을 잃은 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크레인 월드>(1999)로 연출 데뷔를 했는데 2007년 <볼 앤 드레드>를 촬영하면서 <클랜>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하죠. 그리고 <레오네라>(2008) 때부터 본격적으로 푸치오 가족 사건과 관련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네요.

영화는 푸치오의 사건을 다루면서도 푸치오의 부자 관계 묘사에 대해 많은 공을 들입니다. 무표정에서 드러나듯 확신을 가지고 납치를 행하는 아버지 푸치오와 다르게 장남 알렉스는 아버지를 도우면서도 죄책감에 힘들어 합니다. 그런 심정이 표정에서 역력하게 드러나요. 럭비팀 동료 릭키를 납치했다가 아버지가 살해하자 이 소식을 접한 알렉스의 표정을 보여줄 때 영화는 거울을 활용해 그의 얼굴을 두 개로 비춰주죠. ‘표정의 스펙타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클랜>은 푸치오와 알렉스의 얼굴 클로즈업을 빈번히 가져갑니다.

무표정의 아버지 푸치오를 연기한 배우는 길예르모 프란셀로인데요. 풍자 코미디 연기를 통해 자신만의 연기 영역을 구축한 배우라고 하는데요. 그런 평판을 고려해 <클랜>에서 악역을 연기한 것을 보면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범죄임과 동시에 자상한 아버지라는 이중성을 띈 강렬한 캐릭터에 길예르모 프란셀로를 파블로 트라페로 감독이 왜 캐스팅했는지 그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표정에 그 어떤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 그는 냉혈한에 다름 아닙니다. 왜 아니겠어요. 레오폴도 갈티에리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아르키메데스 푸치오는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힌 전력을 가지고 있죠.

그에 동조한 알렉스는 가해자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그는 왜 아버지의 납치 사건에 가담했을까요. 영화는 이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단서들은 곳곳에 뿌려 놓습니다. 그는 ‘팀워크’가 중요한 럭비팀의 주요 선수입니다. 푸치오 가족도 일종의 팀 개념으로 범행을 저지르고 있죠. 그런 알렉스가 아버지 푸치오나 가족을 배반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탈출구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여자 친구 모니카와의 결혼이죠.

안 그래도 영화는 아버지 푸치오가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알렉스가 모니카와 차 안에서 섹스를 하는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줍니다. 아버지에게서, 가족에게서 벗어나고픈, 아니 그저 평범한 가족 관계를 이루고싶은 알렉스의 절실한 바람을 드러내는 거죠. 그와 다르게 아버지는 아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푸치오에게는 가족만이 믿을 사람입니다. 군부 독재 하의 정보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의 수렁에 빠뜨렸던가요. 그렇기 때문에 푸치오에게 원한을 산 사람도 많을 거예요. 푸치오는 늘 주변을 의심할 수밖에 없죠. 푸치오에게 가족은 단순히 가족 개념을 넘어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공범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알렉스의 운명은 영화 속 구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알렉스의 활약으로 학교 팀이 우승했을 때 기념 사진에는 알렉스의 등 뒤에 표정이 전혀 없는 아버지 푸치오가 서 있습니다. 또한, <클랜>에는 전경에 알렉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고 중경에 푸치오를, 그리고 후경에 엄마와 여동생들이 소소롭게 생활하는 모습의 구도로 잡은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해요. 알렉스는 평범한 가족 생활을 누리고 싶지만, 이를 아버지가 가운데서 막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겠죠. 그러니 알렉스에게는 결혼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테고 푸치오는 결혼하겠다는 장남이 못마땅하기만 하죠. 납치 사건이 실패했을 때도 푸치오는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알렉스를 심하게 나무랍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독재의 모습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푸치오와 알렉스의 관계에서 독재와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의 관계를 볼 수도 있겠죠. 이는 비극입니다. 독재자의 말로는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증명했죠. 푸치오는 납치범으로 체포가 된 후에 감옥에서 무죄를 주장했고 평생을 자신은 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알렉스는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죠.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쳤다고 생각했고 또한 범행에 가담해 동료를, 죄없는 이웃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죄책감 때문에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어요. 왜 파블로 트라페로가 <클랜>을 다루면서 아버지 푸치오와 아들 알렉스의 관계를 중요하게 가져갔는지 알 수 있죠.

비극을 다루면서도 <클랜>이 이를 설명하는 음악 사용은 의외로 경쾌합니다. 예컨데, 킹크스(The Kinks)의 ‘밝은 오후 Sunny Afternoon’이 그렇죠. 얼마나 신나는 노래예요. 푸치오 가족의 납치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죠. 꽤 많은 의도가 들어 있는 음악 사용입니다. <클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모두 1980년대 당시, 그러니까 사건이 벌어지던 때에 유행하는 음악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를 드러내는 기호로 음악을 사용하고 있죠. 실제로 푸치오는 납치한 인질을 지하에 가둬두고 비명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노래를 크게 틀어놓았다고 합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들로 말이죠.

언급한 ‘Sunny Afternoon’는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제곡 격의 음악인데요. 제목만 하더라도 아이러니한 느낌을 담고 있는데요.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7년 간의 악랄한 군부 독재에서 겨우 민주화를 회복하다보니 다시 독재가 오면 어떡할까 하는 불안감과 함께 간신히 얻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기분도 있었겠죠. 그러다보니 지하에서 벌어지는 납치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기가 힘든 분위기는 아니었을까요. 푸치오 가족은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 안부도 묻고 살갑게 굴었다고 하니 누군들 그들에게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알았을까요. 어쩌면 겨우 찾아온 평화를 잃기 싫어 무의식적으로 비극적인 사태를 인지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르죠. 아직까지 푸치오 사건을 믿지 못하는 아르헨티나 인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엇나간 믿음’은 푸치오를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납치 사건으로 잡혀온 후 푸치오는 검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야말로 이 일의 희생양이죠. 힘 없는 자들의 희생양일 뿐입니다.” 민주화가 되면서 푸치오는 레오폴도 갈티에라 장군을 찾습니다. 하지만 만나주지 않죠. 말하자면 푸치오의 돈줄이자 보호막이 사라진 겁니다. 이제는 그 자신이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제 버릇 남 못준다고 군부 독재 시절 정보부에서 수많은 사람을 잡아와 가둬두고 고문했던 푸치오는 사람들을 납치해 가둬두고 그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그런 일이 푸치오 만은 아니었죠. 역시나 정보부에서 일했던 이들 중에 납치를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인줄도 모르는 이들이었으니, 국가를 위한 일인줄 알았으니 감옥에 갇혀서도 무죄를 주장하고 희생양이라고 자기 정당화를 했던 것이겠죠.

맞아요, 군부 독재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 명 넘는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했다고 하죠. 심지어 비행기에 태워 하늘을 나는 도중 공중에서 이들을 떨어뜨려 살해했을 만큼 그 수법도 악랄했는데요. 푸치오 같은 이들에게는 이것이 범죄라기보다 군부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했기 때문에 국가를 배신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납치에 가담하지 않은 아들 알렉스에게 배신자라고 몰아붙였던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아르헨티나는 비극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암흑은 푸치오와 같은 괴물을 만들었죠. 그와 같은 괴물은 후에 파블로 트라페로와 같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클랜>입니다.

 

시네마톡
(20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