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 칼에게서 코왈스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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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을 통해 꼭 열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발표한 픽사는 그동안 모두 걸작 아니면 걸작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며 신기에 가까운 연출력을 뽐냈다. 최첨단의 CG애니메이션 기술력을 앞세워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설파하는 픽사의 전략은 관객의 기대감을 배신한 적이 없다. <업>은 그런 픽사의 특징적인 화법이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업> 이전의 작품들이 미국적인 소재를 앞세워 보편적인 가치를 끌어냈다면 <업>의 경우, 미야자키 하야오 식의 설정을 가져와 미국적인 이야기로 환원하는 방식의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에 어울리게 등장하는 주인공은 78세의 할아버지 칼 프레드릭슨(에드워드 아스너)이다. 지금은 홀로 남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노인네지만 그에게도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모험가를 꿈꾸던 유년 시절, 동네의 버려진 집에서 엘리(엘리 닷터)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까지 골인, 남미 어딘가에 있는 파라다이스 폭포를 함께 여행하자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엘리는 먼저 세상을 떠나고 칼은 집에 처박혀 과거에 사로잡힌 채 절망에 빠져있던 차, 집까지 빼앗길 위기에 몰린다. 그때 칼은 수천 개의 풍선을 공중에 띄워 집을 타고 하늘을 날아 모험을 시작한다. 바로 그때, 노크소리에 놀라 현관문을 열어보니 그곳에 여덟 살 소년 러셀(조던 나가이)이 서있다.

흔히 모험이 소재인 영화는 꿈을 이루는 것으로 해피엔딩을 장식하기 일쑤지만 <업>은 칼이 파라다이스 폭포에 당도한 순간, 그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그러니까 이 애니메이션은 하늘을 나는 집을 무대로 펼쳐지는 꿈과 사랑이 가득한 모험담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기대했을법한 하늘을 나는 집의 활약(?)은 채 5분도 되지 않아 끝을 맺는다. 대신 영화는 파라다이스 폭포 근처에 불시착한 칼과 러셀이 공중에 떠있는 집을 줄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장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사실 이 장면은 굉장히 기이한 에너지를 풍긴다. 파라다이스 폭포가 멀지 않고, 더군다나 삶에 대한 의지보다 죽음에 대한 갈망이 더 큰 칼에게 집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다. 그럼에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에 집착을 갖는 이유는 바로 엘리의 손길과 추억이 서린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칼은 과거의 향수, 즉 보수적인 가치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런 유형의 주인공을 올해 초 만난 적이 있다.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에서다. 

개인적으로 <업>을 보는 내내, 더 정확히는 칼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고집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괴팍한 노인네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코왈스키 역시도 칼처럼 부인을 잃고 홀아비 신세가 되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히 보내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젊은 갱들은 동네의 안전을 위협하고 아시아인들로 채워지는 이웃들은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며 가족들은 애지중지 아끼는 그랜 토리노에 호시탐탐 눈독을 들인다. 이는 마치 개발업자들에게 집을 압류 당할지도 모르고, 아시아계 소년 러셀(그렇다, 검은머리에 쭉 찢어진 눈매의 러셀은 한국계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피터 손을 모델로 했다!)이 봉사활동을 이유로 귀찮게 구는 칼의 처지와 무척이나 닮았다. 한마디로 코왈스키와 칼은 ’변화‘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들이 지키려는 것, 즉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와 칼의 집이 남들에게 하찮아 보이는 이유는 모두 오래되고 낡은 ’과거‘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코왈스키의 그랜 토리노는 포드사(社)에서 1972년에 선보인 모델로 한때 미국을 대변하였지만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자동차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1940년대 훨씬 이전에 지어진 칼의 집은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현재에는 가장 우선적으로 헐어야할 건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칼이 짐처럼 힘들게 집을 이고 다니는 본질적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론해볼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미국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칼의 상징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과거의 미국적 가치라는 것이 이제는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낡은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칼이 파라다이스 폭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어릴 적 우상 찰스 먼츠(크리스토퍼 플러머)는 그런 과거에의 집착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파라다이스 폭포에서 수십 년 동안 칩거하며 4미터가 넘는 무지개 빛깔의 새 케빈을 포획하기 위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찰스는 정복자 백인의 약탈꾼적 세계관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찰스의 본모습을 본 후 “집은 그저 집일뿐이지”라고 말하면서 집과 연결된 줄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는 칼의 행동은 <업>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이제 당신의 새로운 여행을 떠나세요.” 엘리가 눈을 감기 전 칼에게 남겨놓은 편지의 글귀는 <업>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대변할 뿐 아니라 이미 <그랜 토리노>가 선보인 주제이기도 하다. <그랜 토리노>에서 코왈스키는 몽족 이민자 소년 타오(비 뱅)가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백인과는 다른 유색인종이어서가 아니라 도대체가 미국 시민으로 융합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왈스키가 타오를 올바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책임감을 느끼듯이 칼 또한 마찬가지로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러셀과 함께 먼츠에 대항해 위기를 극복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 코왈스키가 그랜 토리노의 운전을 타오에게 맡겨 새로운 미래에 기대를 걸듯 칼은 러셀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금 삶에 대한 의지를 얻는 것.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백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코왈스키와 칼의 보수적 신념은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닌 교화와 융화를 통한 발전적 모색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현재의 꿈은 미래를 추구하는 법이지만 때론 과거형으로 전락할 때가 있다. 꿈은 꿈으로써 존재할 때 행복하지만 집착하게 될 경우, 꿈에 발목 잡혀 삶이 불행해질 수 있다, 고 <업>은 말한다. (<그랜 토리노>는 꿈 대신 미래라는 단어를 썼다!) 칼의 대사를 빌자면, “중요한 건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듯 꿈 역시 중요한 건 꿈을 꾸는 그 자체다.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건 성공했을 때는 모르지만 실패하게 될 경우, 또 다른 경우의 수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꿈을 버려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듯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칼과 코왈스키는 증명한다.

픽사는 늘 모험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지만 결말은 항상 정신적인 성장에 맞닿아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편안히 죽음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을 것 같은 78세의 노인 칼도 <업>에서는 성장을 이룬다. 3D로 보는 <업>의 영상은 그야말로 찬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메시지 역시나 3D만큼이나 깊이가 있고 심금을 울린다. <그랜 토리노>를 우리 시대의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있듯 <업> 또한 애니메이션의 클래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업>은 픽사의 또 하나의 걸작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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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10)

<반두비> 노골적인 감독의 분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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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일 감독의 <반두비>는 오랜만에 만나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영화다. 특히 그동안 치부됐던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폐부를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획의 과감함이 돋보인다. <반두비>를 향한 평단의 찬사는 그런 감독의 진심어린 태도가 드러난 까닭에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동일 감독이 누차 강조한 바, 청소년을 위해 만들었다는 의도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민서(백진희)로 상징되는 청소년들에게 감독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반두비’는 방글라데시어로 ‘친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고액의 학원비로 고민에 빠진 여고생 민서와 직장 체불금으로 곤란을 겪는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은 친구가 되기엔 먼 사이처럼 보인다. 민서가 버스에서 카림의 지갑을 줍지 않았더라면, 그런 민서를 카림이 끝까지 쫓아가 잡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남남이었을 것이다. 경찰서로 넘기려는 카림에게 민서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구를 넘어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카림을 향한 한국인의 불편한 시선은 결국 이 둘을 추억을 간직한 친구사이로 갈라놓고야만다. 

줄거리에서 감지되듯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의 시선은 폐쇄적이다. 110만의 이주민이 존재하는 다인종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주노동자를 축으로 극이 진행되는 영화는 <반두비>가 처음이다. 이처럼 <반두비>는 과거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가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또한 <처음 만난 사람들> <로니를 찾아서> <시선1318>의 ‘달리는 차은’까지, 이주노동자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가 <반두비> 개봉을 전후해 집중됐다는 점에서 징후적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의 배경에 불과했던 이주노동자는 이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했다. 삶의 고민을 나누는 친구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가족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반두비>가 보여주는 민서와 카림의 로맨스는 할리우드 내의 백인과 흑인의 사랑처럼 커뮤니티 안에서 암묵적으로 꺼려지던 인종관계를 한국영화사(史) 최초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에 가깝다.

안 그래도,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 <방문자>(2006)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6)에 이은 ‘관계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성장배경이 상이한 이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띤다. 다만 연출의 방식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방문자>가 여호와의 증인 청년과 386지식인의 우정을 풍자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계급이 서로 다른 친구 사이의 우정의 이면에 잠재한 죄의식을 그리스 비극으로 형식을 가져갔다면 <반두비>는 로맨틱코미디의 틀을 빌려와 민서와 카림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맨틱코미디의 차용은 민서와 카림의 관계가 주는 혁명성의 충격을 얼마간 완화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청소년 영화라는 감독의 말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장르의 재미를 우선하면서 주제를 부각하는 방법은 자칫 설교조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의 안전핀 역할을 한다. 소수자이면서 약자이고 이방인인 민서와 카림을 통해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면을 발가벗김으로써 상식을 설파하는 작품이라고 볼 때 형식은 <반두비>의 전략적인 화술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형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민서와 카림의 목소리보다 감독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까닭이다. 작심이라도 한 듯 MB를 향해 쏟아 붓는 날선 농담들은 그 의도가 눈에 뻔히 보여 민서와 카림을 뒤로 밀어내는 경우가 잦다. 장르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와 여유에 앞서 MB정권을 향한 감독의 분노와 야유가 먼저 느껴진다. 인물의 사연을 보여주기보다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꼭두각시로 민서와 카림을 내세운 형국인 것이다. 그래서 “명박이 믿고 뉴타운에 투자했다가 망했어” “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은 쥐인가요?”와 같은 장면을 대할 때마다 과연 영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는 신동일 감독을 위시해 MB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는, 아니 한국사회의 탈골된 상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영화라면 현실의 모순을 좀 더 세련되게 접근하는 예술적 절제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피할 길이 없다. 더욱이 신동일 감독의 의도처럼 지금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청소년들에게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했다면 말이다. 오히려 그런 강박관념이 민서의 캐릭터를 대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차별받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된 카림과 달리 민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도 벌고, 카림이 겪는 부조리에 대신 저항할 줄도 아는 모습에서 신동일 감독 본인의 분노를 치유하기 위한 희망의 발로로 이상화된 청소년의 모습이 겹지는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현실참여도 일종의 놀이다. 극중 민서와 같은 이들은 놀이로써 현실에 저항한다. 전경이 쏘아대는 물대포에 머리감기로 응수하고 곤봉을 폭력 삼는 진압에 춤과 노래를 방패삼을 줄 아는 세대다. 오히려 감독의 자의식을 살짝 덜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야기 속에 담긴 직접적인 분노를 형식의 유머와 여유로써 우회했다면 청소년에게 더욱 밀착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오해 마시길! 이 얘기가 영등위의 청소년관람불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왜 청소년관람불가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선한 의지만 가지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는 정교한 과정이 동반됐을 때 선한 결과를 담보한다고 믿는다. <반두비>가 반가우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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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6)

<드래그 미 투 헬> 자기 복제를 통해 진화하는 샘 레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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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돌아왔다. 아니, 가장 자신있어 하는 영화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많은 이들이 샘 레이미의 신작 <드래그 미 투 헬>을 두고 <이블 데드> 시리즈로의 귀환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블 데드>(1981)와 <이블 데드2>(1987)는 전략을 달리한 작품이었다. <이블 데드>가 저예산의 한계를 (그 유명한 악마의 시점 숏과 특수 분장을 통해) 저비용 고효율로 극복하며 온전히 공포를 전달하는데 주력한 작품이었다면 <이블 데드2>는 전편보다 예산이 넉넉한 상황에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종류의 공포, 즉 관객에게 비명을 선사하면서 폭소까지 제공하는 놀이동산의 유령의 집 같은 작품이었다.

샘 레이미는 <드래그 미 투 헬>의 연출 의도에 대해 “최근의 공포영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겠다. 가학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질리게 만드는 것은 내 장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재미있는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그런 구식(Old-Fashioned) 공포영화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드래그 미 투 헬>은 <이블 데드2>의 속편이라고 할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야기의 얼개부터 공포와 웃음을 유발하는 디테일한 묘사, 심지어는 포스터의 구도까지, 두 영화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면에서 닮았다.

<드래그 미 투 헬>의 주인공 크리스틴(앨리슨 로먼)은 인생의 사면초가에 빠졌다. 대출상담원으로서 승진할 기회를 잡았지만 동양계 동료직원과의 경쟁이 힘겹기만 하고, 촌스럽고 가난한 크리스틴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학교수 남자친구 클레이(저스틴 롱)의 엄마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차, 집을 차압당할 처지에 놓인 불쌍한 노파 가누쉬(로나 레이버)의 대출상환 연기 상담을 맡게 된다. 허나 승진 누락이 두려웠던 크리스틴은 가누쉬의 청을 거절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본의 아니게 망신까지 주게 되니. 이에 분노한 노파가 악마 라미아의 저주를 퍼붓자 크리스틴은 곧 수난의 연속에 빠진다.

<드래그 미 투 헬>은 한마디로 크리스틴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Drag Me To Hell) 악마와 이를 저지하려는 그녀의 투쟁기다. 그건 봉인에서 해제된 악마와 그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사투를 다룬 <이블 데드2>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친구와 깊은 산 속 외진 별장으로 놀러간 애쉬(브루스 캠벨)가 우연히 죽음의 책에 갇혀있던 악마를 부르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것.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는 그렇게 주인공들이 저주를 당하는 과정이나 이후 대응하는 태도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살리기 위한 샘 레이미 감독의 의도적 설정처럼 보인다. 거친 손의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치는 장면이랄지, 크리스틴이 가누쉬와의 격투 끝에 머리카락이 뜯기고 온갖 오물과 심지어는 튀어나온 눈알까지 삼키는 장면, 그리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손에 잡혀 들어가는 장면까지, <드래그 미 투 헬>은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언정 공포를 유발하는 디테일은 <이블 데드2>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샘 레이미는 특정장르에 천착하는 감독이 아니다. <이블 데드> 시리즈가 워낙 유명세를 탄 탓에 영화광들 사이에서 공포영화의 특정 브랜드처럼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블 데드>를 접하지 못한 팬들 사이에서 <스파이더맨>의 성공 이후 그는 또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샘 레이미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그가 실은 꽤 다양한 장르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다크맨>(1990)을 통해 안티 히어로를 다뤘고, <퀵 앤 데드>(1995)로 서부극을 연출했으며 <심플 플랜>(1998)과 <사랑을 위하여>(1999)로 각각 스릴러와 멜로의 세계에도 발을 디뎠었다.

다만 샘 레이미에게 공포영화의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추정된다).

<이블 데드>와 <이블 데드2>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코미디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 외에도 전편에서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애쉬가 굉장히 과감한 저항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그것은 단순히 악마와 맞서는데 적극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을 은유하는 장치로써의 적극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블 데드>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도움 요청에도 겁에 질려 소극적이었던 애쉬는 <이블 데드2>에 이르러 ‘람보’를 연상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팔에 전기톱을 들고 머리띠를 두른 모습은 영락없는 람보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에 공격당한다는 설정은 곧 당시 레이건 정부하의 미국을 상징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애쉬의 저항은 곧 공산권을 향한 미국민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크리스틴이 느끼는 공포 또한 현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크리스틴이 라미아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그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가 있다면 그저 남자친구에 어울리는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부지점장이 되려는 목표 하나로 상사의 지시에 따라 노파의 청을 거절한 것뿐이다. 물론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노파의 대출상환 연기를 승인했더라면 저주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올발랐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녀에게 도덕적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것.

시골 출신으로, 여자의 몸으로, 더군다나 미국 내 동양인의 지위 상승에 따라 과거의 영광을 잃은 백인으로써 크리스틴이 현실에서 넘어야 할 장벽은 너무나 높다. 그건 가누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너무나 견고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도 얻기 힘든 노인의 몸으로 신용불량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대출기한연장을 거절당한 그녀는 죽고 만다!) 다만 자본주의가 생색조로 흘린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짓밟는 수밖에 없다. <드래그 미 투 헬>이 크리스틴과 가누쉬의 대결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샘 레이미가 정색을 하고 현실 비판에 목매다는 건 아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다. 단지 주인공의 무의식을 잠식한 공포의 실체를 위해서 현실이 필요했을 뿐. 샘 레이미의 공포영화가 주는 묘미의 상당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공포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아서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 간의 차이를 살피는 건 곧 시대를 통해 장르의 내적변화를 살피는 것과 같다.

<이블 데드2>에서 애쉬는 결국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악마의 손에 이끌려 중세시대로 뚝 떨어졌다.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애쉬에겐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중세시대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돌아간 곳은 미래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다. 지옥으로 끌려가자마자 영화는 끝.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그렇게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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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18)

<마더>의 혜자가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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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의 오프닝은 무척이나 강렬하다. 반듯한 엄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김혜자가 추레한 몰골로 광활한 갈대밭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막춤을 춘다. 얼굴을 보면 넋이 나간 표정이 역력하다. 정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김혜자가 미쳤다! ‘국민엄마’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봉준호에게 장르는 익숙한 형식의 전형이 아니라 비틀기의 대상이다. <살인의 추억>은 끝내 범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미스터리 스릴러의 공식을 배반했고, <괴물>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족이 등장해 할리우드와는 차별되는 한국형 괴수물을 창조했다. 봉준호가 <마더>에서 비트는 장르는 ‘김혜자’다. 김혜자라는 장르는 완벽한 어머니 상을 대표한다. 그녀는 한국의 모성신화다. 하지만 봉준호는 모성애의 극단을 보여주겠다며 국민엄마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마더>의 오프닝은 그런 감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목적은 극중 엄마인 혜자가 미친 이유를 밝히는데 있다. 발단은 아들 도준(원빈)의 여고생 살인 누명 죄다. 엄마에게 도준은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애”다. 그녀 입장에서 보건데 아들이 잡혀간 이유는 순전히 좀 모자란 아이이기 때문이다. “항상 만만한 게 우리 도준이지”라고 형사 제문(윤제문)을 원망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권력에 대한, 더 나아가 사회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신이 스스로 도준의 무죄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마더>는 봉준호의 필모그래프에서 가장 추리소설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엄마가 준(準)수사관이 되어 탐문과 추리, 목격담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해가는 방식도 그러하거니와 그 과정에서 봉준호 월드 특유의 엇박자스러운 느낌이 상당 부분 배제돼있다. 심각한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이 영화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더>는 전작과 비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우가 잦다. 특히 공포를 자아내는 시점이 (도준이 사건에 연루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엄마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자식 잃은 혹은 자식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어미의 공포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봉준호의 전작들을 보면 자식(과 아이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엄마 뱃속에 있거나(<플란다스의 개>),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하고(<살인의 추억>), 납치당한 후 주검으로 돌아온다(<괴물>). 급기야 <마더>에서는 살인죄를 뒤집어쓰기까지 한다. 기본적으로 봉준호 영화의 기저에는 부모의 공포가 깔려있었던 셈이다. 그중에서도 <마더>와 <괴물>은 직접적으로 가족을 다루는 까닭에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다.

두 영화는 모두 가족의 사투를 다루지만 <괴물>은 부성을, <마더>는 모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일종의 상대급부로 기능한다. <괴물>이 아버지의 성장을 다룬다면 <마더>는 엄마의 성장을 그린다. 더 정확히는 주인공 혜자가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는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지 않는 저변의 의식에서 출발한다. 엄마를 섹스하지 않는 무성의 존재로 바라보는 한국인 특유의 시선이 담겨있는 것이다.

<마더>에서 노골적으로 제시되는 성적인 코드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너 여자랑 자봤어?” “어” “누구?” “엄마” 진태(진구)와 도준이 나누는 얄궂은 대화에서부터 한 이불에서 서로의 몸을 밀착하는 모자간의 잠자리, 진태 집에 몰래 숨어들어간 혜자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질펀한 섹스까지. 그중 어두운 약재상 안에서 좁고 기다란 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는 혜자의 시선은 명백히 여성의 성기를 시각화하는데, 동일한 장면이 수미쌍관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첫 장면에선 바깥을 보며 작두질하던 혜자가 손을 베어 피를 흘림으로써 생리가 가능한 ‘여자’로 비추는 것에 반해 마지막엔 안전하게 작두질에 성공함으로써 ‘엄마’가 됐음을 알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혜자가 미친 이유를 밝히는 영화의 목적은 곧 엄마는 왜 섹스와 별개의 존재가 되었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이를 작동시키는 변곡점은 아들 도준의 살인사건이다. 사건 전까지 이들 모자관계는 어쩌면 남녀관계일 수도 있을 만큼 모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누명을 쓴 줄 알았던 도준이 실은 진범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 혜자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오프닝에 제시됐던 그녀의 넋 나간 얼굴을 다시 한 번 클로즈업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표정에서 하나의 질문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가슴 찢어지는 자식의 진실을 마주한 순간, 당신이 엄마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마더>는 진범 찾기보다 진범을 찾은 후 이에 대응하는 엄마의 행동을 통해 모성의 극단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자식 때문에 엄마가 미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마더>의 목적이다.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자면, “<남극일기>의 도달불능점처럼 모성의 최극단에 가보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도준이 진범임을 밝히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간다. 거기에는 제 새끼의 죄악마저 눈감아 줄 수 있는 이기적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결국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함인데 다만 혜자의 모성이 더욱 지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다른 이를 희생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혜자가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희생시키는 대상이 자신보다 더 약자라는 데 있다.

봉준호 영화에서 약자는 늘 주인공이었고 약자를 도와주지 않는 사회의 시스템과 사투를 벌였으며 그래서 약자끼리 연대했다. <마더> 역시 약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강자에 대항하기는커녕 약자와 약자끼리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확연히 차별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약한 자를 밟고, 약한 자의 지분을 빼앗아야만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괴물이 되지 않고서는 이 험한 세상 (혹은 부자들만의 나라)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엄마=괴물’이라는 등식은 전작 <괴물>에서 이미 등장했었다. 한강에 방류된 독극물, 즉 한국에 존재하는 온갖 부조리를 씨앗삼아 태어난 괴물은 강두(송강호) 가족에게 부재한 엄마의 상징이었다. 단적인 예로, 강두가 괴물의 입에서 딸 현서를 꺼내는 장면은 출산에 다름 아니었다. 다만 강두는 현서(고아성)를 잃는 대신 세주(이동호)를 얻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괴물>은 ‘가족의 탄생’이었던 셈이다. <마더>는 ‘가족의 유지’다. 아버지까지 부재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혜자, 아니 오로지 ‘엄마’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인(murder)도 마다하지 않는 엄마(mother)는 괴물의 다른 이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라면 망각하는 것일 뿐.

한국영화사에 명장면으로 회자될 관광버스 장면은 망각을 방패삼은 모성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뒷자리에 앉은 혜자는 허벅지에 침을 놓음으로써 도준의 살인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동시에 혜자는 여자라는 자신의 성도 망각하고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제 엄마는 아들에게 가슴을 내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들 또한 엄마와 잔다는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는 것만이 그녀의 임무이자 의무가 됐다. 이는 곧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의 비극이요, 운명이다. 그래서 오프닝에서 혼자 춤추던 혜자는 엔딩에 이르러 관광버스 막춤을 추며 동네 엄마들과 한데 뒤섞인다. 봉준호는 김혜자라는 숭고한 모성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모성신화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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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8)

<박쥐>의 불균질함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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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상영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고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으로 관심이 절정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할 얘기가 남아있는 작품이다. 그처럼 <박쥐>에 대해서는 호오가 갈리는 많은 글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이질적 요소의 양립을 통해 영화적 미학이 기능하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 같다.

욕망을 갈구한다는 점에선 동일하지만 발현의 태도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상현(송강호)과 적극적인 태주(김옥빈), 일본식 적산가옥에서 한복을 판매하는 ‘행복한복집’, 매주 수요일 벌이는 마작 판 위로 흐르는 이난영과 남인수의 뽕짝, 신나게 모여 앉아 게임을 즐기는 한국인들 주변에서 가사를 돕는 필리핀인 이블린(메르세데스 카브럴), 닫힌 문에서 시작해 시원하게 트인 바다에서 끝맺음되는 이야기 구조 등등. ‘박쥐’가 포유류와 새의 중간에 위치한 경계의 존재이듯 영화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상현과 태주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아닌 게 아니라, 상현과 태주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바니타스의 대표적인 회화 <바닷가의 월출>과 무척이나 닮았다!)

불균질의 성향은 박찬욱 영화가 보여주는 특유의 무국적성의 주요한 원인으로 인식돼왔다. 더욱이,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피로 결합한 뱀파이어 모티브가 <박쥐>의 원형임을 감안할 때 무국적성이 더욱 눈에 띔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박쥐>의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경계’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 그리고 이질적 요소의 충돌이 영화의 미학을 결정하는 핵심이라고 할 때 서구로 대표되는 <테레즈 라캥>, 뱀파이어물과 대립하는 한국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단서는 행복한복집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2층으로 이뤄진 집의 구조와 남편을 위해 ‘하녀’처럼 시중을 드는 부인들(현대 한국에서 하녀의 대표적인 존재를 찾는다면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시집온 여자들이 아닐까?), 그리고 외간남자에 의해 눈을 뜨는 여자의 욕망이라는 단편들을 종합해보면 어렵지 않게 하나의 작품이 연상된다.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스타일과 주제 의식이 집약된 대표작이자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하녀>는 비틀린 욕망이 가져온 중산층 가정의 몰락을 다룬 작품이다.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지던 1960년대 당시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다룬 지점은 태주의 욕망이 불러온 기존 질서의 파괴에 따른 상현의 공포를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단적인 예로,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공격하는 대상은 승대(송영창)와 영두(오달수), 남자 의사와 남자 운전수, 그리고 상현까지 공교롭게도 모두가 남자다. 다시 말해, 행복한복집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불륜과 살인의 이중주는 <하녀>의 변주에 다름 아닌 것이다.

특히 <하녀>가 이질적 요소의 대립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박쥐>에서 보이는 무국적성의 핏줄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어느 인터뷰(‘<박쥐>가 난해하다는 건 정말 인정 못하겠다’ <씨네21> 704호)에서 자신의 영화가 갖는 무국적성과 관련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박쥐>가 사실성이나 지역성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아니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사실성과 지역성이 오히려 어떤 다른 한국영화보다 더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순수한 한국적 모습 그런 건 아닐 수 있지만 한국적인 잡스러움이랄까, 여러 가지 이질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처럼, <박쥐>가 보여주는 이질적 형태의 총합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때 ‘한국적’의 의미를 획득하는 건 <박쥐>라는 단일작품 자체가 아니라 <하녀>라는 직계혈통의 역사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하녀>는 1960년에 이미 외부의 것과 내부의 것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으로 당대의 사실성과 지역성을 효과적으로 압축했다. 도시로 유입된 지방 노동력, 실직한 엘리트 가장과 집안 일 돕는 여자, 한복을 입은 여주인과 서양식 복장을 갖춘 하녀 등등. 김기영 감독은 지방에서 상경한 새로운 노동계층의 대두에 따른 도시 중산층의 불안과 잠재적 공포를 이층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구조화했다. <박쥐>에서 태주가 자신의 흡혈을 저지하는 뱀파이어 상현을 향해 “식구들끼리 잘 사는 집에 들어와 가지고. 너는 병균이야. 퉤!”하는 대사가 영화의 구도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듯 <하녀>가 보여주는 이질적 요소들의 대립 역시도 외부에서 온 하녀라는 병균의 침입에 따른 가정(혹은 가부장)의 혼란, 더 나아가 파국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삶이란 허무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녀>를 비롯해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를 장식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을 살펴보면 사실성의 측면에서나 지역성의 측면에서 외부의 침입에 따른 내부의 혼란을 하나의 세계로 삼은 작품이 적잖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태주와 라여사(김해숙)의 관계처럼 한국의 공포영화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갈등을 다룬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와 같은 작품도 있고(이용민 감독은 <흡혈화 악의 꽃>(1961)을 통해 일찍이 ‘한국판 흡혈귀’를 내세운 적이 있다!), 흑백화면 속에 유독 흰 이미지가 강조되는 서양식 병원을 무대로 옛 애인을 향한 여자의 복수를 다룬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도 있다. (행복한복집의 하얗게 페인트칠한 공간의 기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쥐>는 <하녀>로 대변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주요한 특징이랄 수 있는 불균질의 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까 <박쥐>의 미학은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가 만났을 때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의 대척점에서 한국영화사에 존재하는 불균질함과 충돌할 때 생기는 경계의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의 특정 지점을 잘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명맥이 끊긴 한국영화 역사의 봉합을 위한 영화적 움직임, 즉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뱀파이어물에 대한 전형을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새롭게 꽃피우려는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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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28)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 우디 앨런이 깨달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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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이 한동안 영국 런던(<매치 포인트><스쿠프><카산드라 드림>)에서 영화를 찍다가 이번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갔다. 한국에서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막장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제목으로 개봉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가 그것이다. ‘뼛속까지 뉴요커’로 잘 알려진 우디 알렌의 필모그래피에서 고향을 떠나 타지를 전전하고(?) 있는 영화가 특정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디 앨런의 심적인 변화가 느껴지는 것이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우디 앨런 특유의 코믹한 연애극이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단짝 친구지만 애정관만큼은 물과 기름이다. 약혼자 있는 비키가 욕망을 자제하는 편이라면 크리스티나는 솟구치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타입이다. 비키는 논문준비 차, 크리스티나는 휴가 차 바르셀로나를 찾게 되는데 그곳에서 멋진 화가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을 만나 동시에 사랑하게 된다. 비키는 후안과의 불장난같은 사랑이 죄스러울 지경이고 반면 크리스티나는 아예 그의 집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후안의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등장하면서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로를 견제하던 크리스티나와 마리아가 급속히 가까워지면서 후안까지, 이들 셋의 기묘한 동거가 펼쳐지는 것이다.

내용은 얼핏 복잡한 것같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는 꽤 단순명료하다. 애정관이 서로 다른 비키와 크리스티나를 앞세워 좌충우돌하는 연애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칠순 넘은 노예술가의 삶의 통찰력이 깊게 배어 있다. 누구의 애정관이 옮고 그르냐는 대결구도를 넘어 삶은 완벽할 수 없기에, 그래서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진행될 것같았던 이들 주인공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완벽한 사랑의 형태를 지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착했기 때문이다. 집착은 결국 또 다른 집착을 낳기 마련인데 고로 완벽은 허상일 뿐이라고 우디 앨런은 말하는 것같다. 한때 주변의 부러움을 살 만큼 완벽한 커플로 군림하던 후안과 마리아가 서로 죽이지 못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건 완벽한 사랑을 꿈꾸다 이루어지지 않자 틀어진 경우일 터다. 크리스티나도 다르지 않다. 셋의 동거생활에 만족하던 중 갑자기 도진 공허감으로 후안과 마리아에게 결별을 고하니, 완벽이란 것도 실은 완벽한 상태가 아닌가 보다. 즉,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완벽하지 않음’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끌고 가는 동력일 뿐 아니라 우디 알렌이 내세우는 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연애극이지만 달콤한 사랑의 순간보다 싸우고 집착하고 고민하는 장면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극중 마리아의 대사를 빌자면, “충족되지 못하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로맨틱하다.” 우디 앨런이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비단 그것이 이 영화 속 사랑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 이 험한 세상에 대처하는 우디 앨런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살펴보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멜린다와 멜린다>(2004) 이후 꽤 오랜만에 맛보는 우디 앨런표 특유의 ‘생활밀착형’ 코믹 연애극이다. 하지만 <매치 포인트>로 시작된 런던 삼부작에는 생활보다는 사건이, 희극보다는 비극적인 요소가 극을 지배했다. <매치 포인트>가 웃음기 빠진 치정극이었다면 <스쿠프>는 후반부 갑자기 심각해지는 연쇄살인범 얘기였고 국내 (수입됐지만) 미개봉인 <카산드라 드림 Cassandra’s Dream>은 부와 출세를 쫓다 패가망신하는 두 형제의 비극이었다. 뉴욕 시절의 생기발랄했던 영화와 비교하자면 이는 우디 앨런에게 큰 변화였다.

우디 앨런은 왜 갑자기 뉴욕을 떠난 걸까. 알려진 바로는 제작비 유치가 뉴욕보다 수월해 런던과 바르셀로나로 배경을 옮겼다고 하지만(<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바르셀로나 시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이뤄졌다!) 그 외에도 우디 앨런 나름의 사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서 줄곧 든 생각인데 새로운 예술적 이상향을 찾아 유럽에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우디 앨런은 자신의 영화를 두고 페데리코 펠리니, 잉그마르 베리만,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유럽 출신 감독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습관처럼 얘기했다. 그는 늘 유럽을 꿈꿨다. 다만 뉴욕도 예술적인 환경에서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곳인 만큼 영화 찍기에 최적의 장소였을 테다. 문제는 9.11 이후 뉴욕은 과거와 달리 예술 하나만 생각하기에 너무나 정치적인 장소가 됐다는 점이다.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우디 앨런이 <매치 포인트>를 위해 런던행을 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은 큰 사건이었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는 법. 그에게 뉴욕은 더 이상 예술적 이상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런던도 예술만 생각하기에는 뉴욕 못지 않게 지정학적으로 심각한 장소였다. 아닌 게 아니라, 런던 삼부작만 떼놓고 보면 과연 우디 앨런의 영화일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심각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고향을 떠난 자가 낯선 땅에서 느끼는 위협과 불안감이 짙게 서려있다. 도무지 뉴욕 시절에 보이던 낙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면 우디 앨런이 낭만과 자유로 대변되는 예술적 기운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가 영화 곳곳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바르셀로나 곳곳에 포진한 가우디의 건축물을 훑는 카메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음악 사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던 그가 이번엔 ‘바르셀로나’를 부르짖는 노래를 질리도록 들려준다. 그동안 사라졌던 유머가 되살아난 점만 봐도 우디 앨런이 얼마나 바르셀로나의 예술적 기운에 만족해하는 지가 눈에 선하다. 뉴욕에 버금가는 완벽한 예술의 도시를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우디 앨런은 앞으로 바르셀로나를 제2의 예술적 거점으로 삼을 생각인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이에 대한 답변이 될 만하다.

앞서 이 영화를 살펴본 바,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향이 존재할 리 만무하다. 부족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세상사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가 내세우는 바다. 그런데 우디 앨런은 그동안 너무 예술적 이상향에 집착했다. 제2의 뉴욕을 찾기 위해 런던으로, 바르셀로나로 오랜 시간 방황했다. 너무 완벽한 사랑을 꿈꾸다 신경쇠약에 걸린 마리아처럼 비극을 양산했고, 완벽한 사랑의 발견에 들뜬 크리스티나처럼 바르셀로나 찬양에 열을 올리다 갑자기 공허감이 찾아들었다. 고향 뉴욕으로 돌아갈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우디 알렌의 그동안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작품이다. 아무리 찾아봐야 뉴욕만한 이상향은 없다. 비록 뉴욕이 예전처럼 이상적인 예술적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겠지만 우디 앨런 자신이 좀 더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기에 다시 연애하고픈, 다시 사랑하고픈 장소가 됐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바르셀로나가 배경이지만 역설적으로 뉴욕에 대한 노감독의 절절한 애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그래서 우디 앨런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이후 차기작으로, <매치 포인트> 이후 5년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뭐든지 잘될 거야 Whatever Works>를 촬영했다. 기가 막히게도 노신사와 10대 소녀의 러브스토리다! 우디 알렌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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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


 

<도쿄 소나타> 일본영화에서 목격되는 침묵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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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자와 기요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일본 기성세대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도무지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사소한 분쟁이 생겨도 변호사에게 일임할 뿐이다.”

<도쿄 소나타>는 기요시 감독이 그동안 느꼈던 일본 사회의 소통 부재가 낳은 비극의 전초를 ‘구체적으로’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본의 평범한 중산층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가족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도쿄 소나타>는 기본적으로 공포영화다. 값싼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으로 실직한 아버지, 미국을 세계 경찰의 선으로 알고 미군에 입대하는 첫째 아들,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집밖으로 나도는 둘째 아들, 이를 알고도 내색하지 못한 채 속병 앓는 어머니, 이렇게 몰락해가는 가족의 이면에는 소통부재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기요시의 감정은 공포 그 자체다.

이미 전작 <큐어>(1997) <회로>(2001) <절규>(2006) 등을 통해 공포영화의 거장으로 자리 잡은 그이지만 <도쿄 소나타>에서 그가 보여주는 공포는 색다른 면모가 있다. 기요시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작품 활동의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그런 의지는 <도쿄 소나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늘 소통 부재에 따른 일본인의 무의식에 입각한 공포에 다름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큐어>는 최면에 걸린 채 이유 없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의 행각을 통해 기요시의 테마가 뚜렷하게 수면 위에 떠오른 작품이었다. 다만 이들 영화에서 보이는 공포의 실체가 일본사회의 불안정한 시대의 징후처럼 묘사된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소통 부재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더랬다.

<도쿄 소나타>는 그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만한 작품이다. <큐어>를 비롯한 전작들이 기요시가 바라보는 일본 사회에 대한 풀숏의 공포를 보여줬다면 <도쿄 소나타>는 클로즈업의 공포를 보여준다. 바로 이점이야 말로 기요시가 새로운 영화경력을 마련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가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까닭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다시 말해, 기요시는 소통 부재의 출발점을 가족에서 찾는다. 그중에서도 가부장의 위기야 말로 그런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신자유주의의 대두에 따른 가부장의 몰락은 전통적인 개념의 권위를 지키려는 가장의 일방적인 소통을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기요시의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여러 번의 식사 장면은 가족의 갈등과 비극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영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가족이 모인 식탁에서 (이들은 대부분 혼자 밥을 먹거나 아니면 어머니와 단 둘이 자리를 함께할 뿐이다!)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까지 아무도 식사를 하지 못한 채 뻘쭘하니 있는 저녁 풍경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방향적 소통의 폐해, 즉 기성세대에게 목격되는 소통부재의 에피소드는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을 ‘안 돼!’ 한마디로 일축하는 아버지, 버릇없는 행동을 사과하러온 학생에게 서로 참견하지 말자며 소통을 회피하는 선생님, 이혼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다며 변호사에게 모든 걸 일임하는 이혼 당사자 등등. ‘모든 인간은 섬이다.’는 누군가의 말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을 그어 놓고 대화를 허하지 않는 이들의 침묵 속에는 바람 소리가 전하는 비극의 전조만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도쿄 소나타>라는 음악적인 작명이 품고 있는 역설적인 뉘앙스는 그래서 더욱 스산하다.

개인적으로 <도쿄 소나타>를 보면서 그동안 기요시 영화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영화에서 자주 목격했던 침묵의 실체 또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이를 ‘침묵의 반응숏’이라고 부르는데,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목격한 극중 인물들이 얼마간 침묵으로 반응하는 장면을 일본의 적지 않은 수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부조리를, 사부(<포스트맨 블루스> <먼데이>)는 코믹함을, 기요시는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일본영화 특유의 스타일이라기보다 일본인의 소통부재에 대한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다. 

<도쿄 소나타>의 마지막 장면이 여러 모에서 중의적으로 다가온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천재적인 음악성을 인정받은 둘째 아들 켄지(이노와키 가이)는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한다. 다만 켄지의 피아노 소리를 빼면 주변은 여전히 침묵이다. 그의 연주에 감화 받은 인상은 역력한데 누구 하나 박수를 치거나 반응하는 이가 없다. 다만 완벽한 연주와 철저한 침묵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빚은 균열이 느껴진다. 물론 그 균열은 기요시가 품고 있는 한줄기 빛과 같은 최소한의 희망일 터. 그 하나가 켄지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기요시의 기대감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침묵의 시퀀스로 상징되는 영화적 소통부재의 무의식에 파열을 가하려는 기요시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도쿄 소나타>의 결말부가 누군가의 꿈이거나 희망사항처럼 애매모호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사회에 희망을 품어보려는 기요시의 시선? 아니면 꿈이나 환상을 빌리지 않고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는 일본사회의 비극? 무엇이 되었든 간에 구로자와 기요시가 <도쿄 소나타>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를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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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전성시대다. <아이언맨>으로 출발한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인크레더블 헐크> <원티드> <핸콕> 등을 거쳐 현재 <다크 나이트>로 정점을 찍고 있는 추세다. <아이언맨>은 국내 개봉과 함께 2주 연속, <원티드>와 <핸콕>은 일주일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슈퍼히어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다크 나이트>의 흥행 기세는 놀랍다. 미국에서 <타이타닉>에 이어 역대 흥행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더니만 한국에서는 4주 연속 관객동원 1위를 차지하며 여차하면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세웠던 5주 연속 1위도 넘볼 태세다.

슈퍼히어로물의 기세는 이게 끝이 아니다. <헬보이2: 골든 아미> <왓치맨> <스피릿> 등과 같은 기대작들이 개봉 대기 중에 있을 뿐 아니라 작금의 유행을 타고 <플라스틱맨> <그린 애로우> <퍼스트 어벤져: 캡틴 아메리카> <저스티스 리그> <토르>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슈퍼히어로물이 제작을 앞두고 있어 그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쉽게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만큼 슈퍼히어로는 최근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현상이요, 탐내는 소재라 할만하다.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이 얻은 성과는 비단 폭발적인 인기에만 있지 않다. 불과 1년 전의 슈퍼히어로와 비교하더라도 올해 등장한 슈퍼히어로물은 장르가 품고 있는 내적인 논리 면에서나 허구를 다루는 형식적인 면, 그리고 그 속에 침전한 정치적인 무의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점에서 변화한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태어날 때부터 영웅의 능력을 부여받거나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된 과거의 슈퍼히어로와 달리 2008년의 슈퍼히어로는 만들어지는 존재로 거듭났다. 이제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하늘이 점지해 주지 않는다. 개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돈’이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와 같은 가난한 고학생 슈퍼히어로는 올해 들어 대기업의 ‘회장님’들로 환골탈태(?)했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와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이 대표적이다.

토니 스타크는 대형군수업체 CEO. 신무기 홍보차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살상용으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후 세계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니. 천재적인 과학적 지성과 자본을 바탕으로 슈퍼히어로 ‘아이언맨’이 된다. 브루스 웨인 역시 다르지 않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복수를 목적으로 초인적 존재로 거듭난다. 아버지가 물려준 천문학적 재산과 마음속에 도사린 두려움을 분노로 승화시켜 고담시를 지키는 ‘밤의 기사’가 된 것.

두 영화와는 다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와 <핸콕> 역시 이해 가능한 논리가 슈퍼히어로 탄생 과정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슈퍼히어로로 기능한다. 예컨대, <인크레더블 헐크>의 브루스 배너는 헐크로 변신하는 자신의 분노를 치료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 분노를 억제하는데 성공한다. 이안이 만들었던 <헐크>(2003)가 감마선 실험의 실패로 헐크가 된 것과 비교,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제 슈퍼히어로의 탄생이 이성(혹은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텍스트가 됐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핸콕>의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지금까지 슈퍼히어로가 백인 일색이었다는 점에 비춰 흑인 슈퍼히어로 <핸콕>의 등장은 이제 슈퍼히어로가 백인의 영역을 넘어 누구나 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한 사례다.

이렇게 슈퍼히어로가 현실세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만큼 이들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만화를 연상시키는 허구적인 묘사를 벗어나 사실주의에 기반 한 형태로 변모한 것. 그에 따라, 인물의 내적 고민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됐고 세트 차원에서 머물던 공간 묘사는 현장 로케이션으로 그 범위를 넓혔으며 이야기를 다루는 장르의 활용 역시 느와르와 범죄물로까지 나아가며 더욱 더 현실적인 모습을 취하게 됐다. 허구의 세계를 맴돌던 과거 슈퍼히어로물이 캐릭터의 수와 이야기의 규모, 무엇보다 기술적인 면에서만 진화를 꾀한 것과 비교하자면 실로 획기적인 변화다.

그 시작은 <배트맨 비긴즈>(2005)에서 있었다. 허구의 이야기에 사실주의를 접목한 <배트맨 비긴즈>는 전례 없던 형식의 진화를 꾀하며 새로운 슈퍼히어로물의 전범이 됐다. 그때부터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슈퍼히어로물의 영화적 재미를 떠나 변모한 형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그건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슈퍼히어로물을 준비 중이던 관계자들도 <배트맨 비긴즈> 이후 이 영화의 성과를 어떤 식으로 반영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슈퍼히어로물은 늘 진화해왔다. <배트맨 비긴즈>도 의심의 여지없는 진화의 한 사례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주의(realism)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좀 더 기다려 봐야할 것 같다.” 당시 <스파이더맨 3>를 준비 중이던 샘 레이미 감독의 말이었다.

그에 대한 답변은 2008년에 이르러서 밝혀졌다. 그것은 물론 <배트맨 비긴즈>를 감독한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이뤄졌다. 속편 <다크 나이트>는 사실주의 노선을 유지하면서 이야기의 심화를 꾀해 전편의 성취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심화를 이룬 부분에는 명백히 지금 미국이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크 나이트>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배트맨의 명성이 더 강한 적을 부른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9.11 이후 ‘적’을 소탕하겠다며 전쟁을 일상화한 미국이 더 큰 재앙에 직면한 현실세계의 정치학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탄생한 슈퍼히어로물은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사실주의적인 묘사가 겹쳐진 <다크 나이트>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기 안성맞춤인 구조다. 공교롭게도 <다크 나이트>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이언맨>에서도 슈퍼히어로물을 통한 미국의 정치학을 감지할 수 있다. 극 초반 등장하는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이 9.11의 주범으로 지목한 빈 라덴을 제거하겠다며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곳이다. (1963년 선을 보인 원작만화에서는 베트남이었다!) 영화는 이곳을 배경 삼아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을 통해 테러리스트를 응징하고 약자를 지킨다는 논리를 은연중에 구축하며 전쟁에 대한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물은 미국 주도하의 국제 정세에 대한 자국의 입장을 반영한 알레고리로 작용해왔다. 하여 슈퍼히어로의 진화는 흥미롭게도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이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있어왔다. 슈퍼히어로물의 장르 공식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1978년 작품 <슈퍼맨>은 미소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 강한 미국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이에 영향 받은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물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국가를 적으로 상정해 무찌르는 ‘미국 만만세’ 영화로 전락(?)하며 지극히 단순화되어갔다.

이에 변화가 생긴 건 9.11을 전후해 슈퍼 국가 미국의 위상에 의문부호가 달린 2000년대부터다. 브라이언 싱어, 샘 레이미 등과 같은 비주류 성향의 감독들이 <엑스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작품을 만들면서 슈퍼히어로는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1989년 등장한 팀 버튼의 <배트맨>은 이런 흐름의 시초라 할 수 있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을 보건데 너무 앞서간 슈퍼히어로물이었다) 우리의 슈퍼히어로는 더 이상 주류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이 아닌 타자였으며 돌연변이였고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특히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이전에 없던 슈퍼히어로에 대한 내적 고민을 구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징후적이었다. 스파이더맨은 미국의 평화를,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에 앞서 자신조차 추스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슈퍼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집세도 내지 못하는 가난뱅이였고 변변한 일거리도 얻지 못하는 백수신세였다. 그렇게 미국은 외부의 적에만 신경 쓰는 사이 내부적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슈퍼 파워에 대한 강한 의문부호가 따라붙었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언맨>과 <다크 나이트>는 그에 따른 고민의 결과가 각각 어떤 형태로 구체화됐는지 잘 보여준다. <아이언맨>은 내부의 환부를 도려내고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토니 스타크의 결심에 불만을 품은 오베디아 사장과의 마지막 대결!) 슈퍼히어로의 역할을 긍정했다. 그에 반해 <다크 나이트>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적의 정체(극중 조커는 ‘악’일뿐 그 어떤 부연설명도 없다!)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을 ‘어둠의 기사’라고 명명하곤 현실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다. 이제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어진 2008년의 슈퍼히어로물은 허구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리얼리즘을 끌어와 또 한 번의 진화를 꾀했다. 9.11 이후 미국 사람이 체감하는 불안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변화다.

슈퍼히어로물은 어느 날 갑자기 진화를 이룬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의 변화에 맞춰, 그에 따른 장르의 역사가 쌓이면서 그렇게 자가 증식해왔다. 2008년은 슈퍼히어로물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뤄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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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2.0 404호
(2008.9.9)

서부극의 부활, 총잡이가 무덤에서 살아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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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로 사라진 서부극이 돌아오고 있다. 정통 서부극 설정을 가져와 장르의 외연을 넓히기도 하고, 최소한의 요소만 남겨둔 채 새로운 유형의 서부극을 만들기도 한다. 할리우드만이 아니다. 미국의 장르로만 알려졌던 서부극이 유례없이 세계적인 러시를 이루고 있다. 무엇이 철 지난 서부극을 다시금 불러냈을까? 서부극 부활에 담긴 배경과 징후, 그 양상들을 읽는다.

모뉴먼트 밸리를 달리던 호방한 서부 사나이들의 기개가 다시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가장 미국적이며 고전적인 장르 중 하나인 서부극이 새로운 옷을 입고 속속 출현하고 있다. 사실, 고전 장르의 부활은 최근 할리우드의 중요한 경향 중 하나다. 서부극과 누아르를 접목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를 위시해, 서부극을 변형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 갱스터 누아르의 영기를 살려낸 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 등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 후보로 지명된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서부극의 급부상은 단연 눈에 띈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 2편의 서부극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함께 오른 것은 1957년 조지 스티븐슨의 <자이언트>, 윌리엄 와일러의 이후 처음 있는 일. 그 외에도 후보로 지명되지는 못했지만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 앤드류 도미닉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이하 <제시 제임스 암살>), 숀 펜의 <인 투 더 와일드> 등이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서부극의 부활을 현실화하고 있다.

서부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올해 돌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만 볼 수 없다.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1990),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뉴튼 보이즈>(1998), 이안의 <라이드 위드 데블>(1999) 등 서부극의 명맥을 이어온 전례들이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사멸한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이 봇물처럼 쏟아지며 ‘유행’을 형성한 적은 없었다.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 강도>(1903)를 시작으로, 그 기원이 영화의 기원과 거의 일치하는 서부극은 어떤 장르보다 미국의 현실을 적극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박스기사 참조). 특히 신화적인 소우주를 형성함으로써 공동체의 탄생과 유지, 소멸을 장르 안에서 완벽히 구현한 사례로 평가된다. 미국 문화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구체화하며 자연스럽게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장르이기도 하다.

최근 할리우드에 불어 닥친 서부극 열기 역시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인 미국식 장르를 받아들여 재창조하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 서부극의 전통을 모범적으로 따르면서 주제를 넓히는 게 첫 번째요, 서부극의 배경과 형태를 가져와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가하는 변종 서부극이 두 번째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이 전자를 대표한다면,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후자라 할 만하다.

영웅을 위한 서부극은 없다

제임스 맨골드의 <3:10 투 유마>와 앤드류 도미닉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는 우리가 서부극에 기대하는 요소가 대부분 담겨 있다. 광활한 황야에 깔린 레일 위를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카리스마 넘치는 검은 복장의 무법자가 말에 탄 채 총을 쏘아대며, 독립심 강한 영웅이 법과 공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를 압박해 들어온다. 격렬한 총격전과 추격전이 벌어지면 술집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 이 광경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스타일 면에서 두 영화의 차이는 뚜렷하다. <3:10 투 유마>가 빠른 전개와 잔인한 폭력을 앞세운다면, <제시 제임스 암살>은 폭력보다 쫓는 과정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우울하고 사색적인 정서를 전면에 깔고 있다. 이는 <3:10 투 유마>가 ‘제한된 시간’이라는 설정 안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것에 반해, <제시 제임스 암살>은 오랫동안 계속된 전설의 실체를 밝힌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제임스 맨골드의 영화는 죄수가 된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러셀 크로)와 호송대원 댄 에반스(크리스천 베일)가 72시간을 함께하며 마음을 나눈다는 이야기. 반면 앤드류 도미닉의 영화는 자신의 우상인 전설의 무법자 제시 제임스(브래드 피트)를 찾아 나선 소심한 남자 로버트 포드(케이시 애플렉)가 비겁하게 그를 암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 진행 방식은 상이하지만, 두 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공유하는 지점이 같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악당인 무법자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전통적인 영웅에 대해서는 치부가 있는 존재로 그리는 것. 아닌 게 아니라, 댄이 벤의 호송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가족 생계를 위한 200달러 때문이다. 몇 푼의 돈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정의를 도모하게 된 상황인 것. <제시 제임스 암살>의 로버트도 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시를 제거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비겁하게 암살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비열한 인물로 비춰진다. 즉 서부극 신화 속 정의로운 영웅의 모습은 해체돼 온데간데없고 그 지위는 악당이 대신 누리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서부극은 전통적인 선악 구도를 손바닥 뒤집듯 역전시킨다. 이 전복적인 상황 속에서 반(反)영웅은 자신의 지위에 대해 복잡한 심리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다. 대중은 열광하고 문명화된 법은 그를 위협하는 모순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됐다.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정착하지 않고 유랑하는 떠돌이가 되는 것이다.

전복적 설정은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전통적 서부극의 쇠락기에 이 같은 반성이 먼저 있었다. 샘 페킨파는 1960년대 이미 서부가 개척을 위한 모험의 장소가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한 폭력의 세계였음을 폭로했다. 페킨파는 <와일드 번치>(1969) <관계의 종말>(1973) 등 ‘수정주의 서부극’을 통해 신화화된 영웅의 세계가 아닌 무법자들이 지배하는 생경한 서부의 풍경을 보여줬다. 세르지오 레오네는 또한 <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무법자>(1966)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등에서 고전 미국 서부극에 반기를 들며 비열한 떠돌이 무법자가 들끓는 타락하고 황량한 이탈리아식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을 창시하기도 했다.

다만, 시간은 흘렀고 시대상도 달라진 탓에 당시의 영화들과 <3:10 투 유마> <제시 제임스 암살> 사이에도 변화가 생겼다. 서부의 또 다른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몰살당해 쫓겨난 지 오래고, 백인의 차지가 된 광활한 대지는 문명화의 과정을 통해 배분되고 분양돼 엄청난 숫자의 인구 유입이 이뤄졌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의 배경은 여전히 서부지만, 그 안에서 예전에 감지하지 못했던 꽉 차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이제 그곳은 이해관계가 생기고 의견이 난립하면서 여러 상황이 충돌하는 혼란한 공간이 되었다. 선악을 가르는 가치기준이 묘연한 상황에서 영웅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속화된 인간으로 변모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악당도 영웅이 될 수 있는 법. 21세기 서부극은 그 달라진 지형을 보여주고 있다.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에는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대목이 등장한다. 두 영화 모두 극중 어린 소년 윌리엄(로건 레먼)과 로버트가 전설의 무법자 벤 웨이드와 제시 제임스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이를 끝까지 깨닫지 못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영웅을 동경하는 후계자로의 대물림 구도는 고전적 서부극의 전형적인 요소지만, 수정주의 이후의 서부극은 비극적 결말로 완전한 끝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남겨뒀다. 반면 두 영화는 뒤바뀐 영웅 구도가 대물림되는 아이러니를 영속화한다는 점에서 고전기와 수정주의 시기를 통합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여전히 익숙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쌓아간 최근 서부극에서 몇 가지 질문을 수정할 필요가 생겼다. 정의란 무엇인가?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영웅과 악당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누구와 손을 잡아야 이익이 될 것인가? 등등.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서부극의 테마를 넓혀가고 있다.

진화를 거듭하는 서부극

<3:10 투 유마> <제시 제임스 암살>과 달리, <노인>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정통 서부극의 요소가 없다. 2편 모두 서부를 무대로 차용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빠른 총 사위를 보여주는 전설의 무법자도, 말을 타고 뒤쫓는 카리스마 넘치는 영웅도 없다. 시대적 배경도 정통 서부극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노인>은 1980년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대신 두 영화는 트럭을 타고 산소 탱크를 무기 삼아 돈 가방을 쫓거나, 석유로 얻은 이득을 두고 복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는 등 변종 서부극에 가깝다.

두 영화는 한마디로 모든 걸 손에 넣은 순간 모든 걸 잃게 되는 남자들의 사연이 주를 이룬다. <노인>은 우연히 200만 달러가 든 돈 가방을 발견한 르웰린 모스(조쉬 브롤린)가 습관처럼 살인을 즐기는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와 추격전을 벌이는 설정으로, 보안관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이 이들을 뒤쫓으면서 급격히 변한 시대상을 한탄한다는 내용.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금을 채취하다 유전을 발견해 부자가 된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자수성가 스토리다. 온갖 역경과 주변의 방해를 이겨내고 모든 걸 얻지만, 가족과 친구 모두 떠나 홀로 남겨진다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밀도 있게 시각화하기 위해 필름 누아르 스타일(빛과 그림자의 선연한 대비, 실루엣 이미지, 극단의 콘트라스트)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이들 영화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A.O. 스콧은 ‘서부 누아르’(western noir)라는 별칭을 붙였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서부극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시종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세계관’ 때문이다. <노인>이 피와 폭력의 순환을 통해 신화의 무대를 무너져가는 세계로 묘사한 것처럼, <데어 윌 비 블러드> 역시 석유 정치학이 주변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통해 동시대 미국의 문제를 반영한다. 서부극은 신화적 시공간 속에 당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진화를 거듭한 장르였다. 예컨대, <셰인>(1953) <하이 눈>(1952) <서부의 사나이>(1958) 등 1950년대 서부극이 냉전시대의 미국을 반영한다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 <내일을 향해 쏴라>(1969) <리틀 빅 맨>(1970) 등 1960~70년대 작품들은 베트남전 시기 암울한 그림자가 서려 있다. 코엔 형제, 폴 토머스 앤더슨 등 미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비슷한 시기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부극을 들고 나온 건 괜한 우연이 아니다. 풀뿌리 하나 찾기 힘든 사막으로 변한 황량한 서부에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팍팍한 사나이들을 몰아놓은 이 영화들은 동시대에 대해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경계’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계화에 여념이 없는 작금의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코엔 형제의 영화가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둔 텍사스-멕시코 국경 사이를 넘나든다면,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석유 파이프라인 때문에 이웃의 땅을 탐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탐욕을 부각시킨다. 업톤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 Oil!>(1927)을 원작으로 한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석유를 가지고 갖은 수단을 동원, 검은 돈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대립하는 등 석유 획득에 집착하는 섬뜩한 핏빛 미국의 모습이 겹쳐진다.

입지전적 인물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서부극의 관점에서 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조지 스티븐슨의 <자이언트>(1956)가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을 만났을 때’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필연인지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자이언트>의 무대가 됐던 텍사스 마르파(Marfa)에서 촬영했다(폴 토머스 앤더슨은 촬영 도중 그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극중에선 캘리포니아로 등장한다). 그뿐 아니다. <노인> 역시 마르파를 촬영지로 택했다. 서부 개척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행위였음을 수정주의 서부극이 폭로한 이후, 두 영화는 보다 현실적으로 이에 변주를 가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석유를 통한 영토 확장을 은유한다면, <노인>은 국경 사이에 걸친 돈 가방을 매개로 부조리를 자아내며 코엔식 유머를 선사한다.

이제 종교적이고 역사적이고 지정학적인 공간이 신화의 공간을 대신하게 된 상황에서 현실의 서부는 판타지에서 현실로 내려온, 더욱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인물을 필요로 하게 됐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에는 이전에 접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악마가 등장한다. ‘살인광’ 안톤 쉬거와 ‘석유왕’ 대니얼 플레인뷰가 그 주인공. 쉬거는 동기도 부여하지 않고 이유도 묻지 않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대니얼은 동기에 철저히 복속된 목적의식 백 퍼센트의 정신적 폭력으로 비뚤어진 인간 욕망의 극점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 자신이 서부극의 무대를 지휘하는 시스템처럼 행동하지만 결코 시스템이 될 수는 없다. 기억할 만한 인물은 될지언정 현실에서 박제될 수 없기에 시스템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떠돌이 혹은 고독한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다. 서부극은 현실의 이야기고 곧 시간의 연대기기 때문이다. <노인>과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다른 한편으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회고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부극은 새로 정의된 현실 위에서 완전히 다른 인물들을 앞세워 다시 한 번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글로벌화된 서부극

미국의 영화평론가 A.O. 스콧은 지난해 11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웨스턴은 어떻게 살아남았나?’(How the Western was won?)라는 기사를 통해 “서부극은 명사였지만 이제는 형용사가 됐다. 서부극의 이야기와 풍경은 여전하지만 변주하기 쉽고 장르 혼합이 용이해졌다”라고 진단했다. 서부극의 기본 설정은 변하지 않겠지만 시대에 따라 이를 구성하는 요소는 끝없이 변할 수 있다는 것. 스콧은 이에 대한 증거로,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진 서부극에서 “과거의 로맨스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라졌다”며 남자들만이 득시글거리는 서부의 황폐함을 지적했다. 또한 “영웅과 악당은 이제 지방보다 도시의 범죄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하위 장르가 세분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면서, 와이오밍이 배경인 <브로큰백 마운틴>은 ‘서부 멜로드라마’(western weepy)로, 알래스카가 무대로 등장하는 <인 투 더 와일드>는 ‘서부 로드무비’(western road picture)라고 정의 내렸다. 그런 관점에서 <3:10 투 유마>와 <제시 제임스 암살>은 ‘서부극 중의 서부극’(Western westerns)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서부극이 미국을 넘어 글로벌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김지운 감독의 한국판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제작되고 있다. ‘장르 혼합의 연금술사’인 미국의 미이케 다카시가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를, 폴란드의 피오트르 울칸스키가 <썸머 러브>를, 오스트리아의 존 힐콧이 <프로포지션> 등을 발표하는 등 서부극은 전세계적으로 하나의 유행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스콧은 “서부극은 미국만의 장르였지만, 이제는 글로벌 스타일이 돼 장르와 모티브의 상호교류를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서부극이 미국의 본질을 가리키는 장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계를 넘어 쏟아지고 있는 장르의 확장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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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2.0 375호
(2008.2.19)

조폭영화, 어느새 진화하다 – 2006년, 세 편의 조폭영화




<조폭 마누라>는 충무로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조폭 마누라>(01)의 대박 이후 충무로는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를 우후죽순처럼 양산했다. 흥행에도 성공적이어서 <조폭 마누라>를 필두로, <가문의 부활> <두사부일체> 등은 시리즈화 되어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허나 이들 시리즈에 향하는 시선이 그리 고운 것만은 아니다. 조폭을 미화하는 설정에, 말장난과 성희롱으로 일관하는 유머, 무엇보다 관객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영화적 고민 없이 싸구려 통조림처럼 가볍게 기획, 제작하는 방식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우리가 흔히 조폭영화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속칭 ‘저질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로만 비하돼온 것이 사실. 더군다나 매년 십여 편이 넘는 조폭 소재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특수한 그룹을 형성했으면서도 그런 가벼움 탓에 하나의 장르로서 대접을 받지 못한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조폭 마누라>가 조폭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동안 뜸했었던 것뿐이지 <조폭 마누라> 이전에도 조폭은 충무로가 심심치 않게 이용해 온 소재였다.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94),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97), 송능한 감독의 <넘버3>(97)는 이 분야의 고전으로 통한다. 물론 조폭이라는 소재가 폭넓게 소비되도록 불을 지핀 것 역시 <조폭 마누라>다. 특히 ‘여자’ 보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한국영화사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여자 캐릭터의 출현을 통해 조폭영화도 충분히 변형과 변주, 무엇보다 진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2006년, 오랫동안 코미디 장르에서만 제자리 걸음을 하던 조폭영화가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6월에 개봉한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다.  



2006년, 세 편의 조폭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나


<말죽거리 잔혹사>(04)에 이은 ‘폭력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비열한 거리>는 조폭이 현실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어떤 방식에 따라 기능하는지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미화와 유머의 대상에서만 머물던 조폭을 현실로 끌어내려 진지한 관찰의 대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조폭 영화에서 그 의미가 철저히 무시되어온 가족은 이 영화에서만큼은 큰 의미를 갖는다. 병두(조인성)가 그토록 조직 보스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건 오로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탓. 하지만 이를 달성하려면 보스를 배신해야 하고, 이는 자신 또한 부하에게 배신 당할 수 있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이처럼 음모와 배신의 메커니즘을 통해 유하 감독은 조폭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비열한 거리>는 세부 묘사에 있어서도 궤를 달리한다. 조폭 영화의 상징적 이미지랄 수 있는 액션에 있어서, 화려하고 합이 잘 짜인 영웅적인 액션을 거부한다. 대신 먹고살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쓸 수밖에 없는 절실하고 비루한 막싸움이 스크린에 배치된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유머와 신파조로 쥐락펴락 조절하지 않는다. 병두의 친구로 영화감독 민호(남궁민)를 등장시킨 건 이 때문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관찰자의 시점에서 영화를 볼 수 있게 하여, 감정이 개입할 수 없게끔 조치를 취한 셈이다.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가 조폭 신화를 철저히 해체하고 있는 것과 비교한다면 장진 감독의 <거룩한 계보>는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기존 조폭 코미디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남자의 우정을 전면에 배치하고 이를 유머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다. 그런 점에서 <거룩한 계보>는 ‘조폭 코미디’ 그룹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폭영화 특유의 감성은 살리되 이것을 흔히 우리가 ‘장진식 유머’로 편의상 표현하는 코드로 재해석해 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진감독은 조폭영화의 전유물인 비장미를 코미디의 소재로 최대한 놀려 먹는다. 이는 확실히 말장난 수준에 그쳤던 이전의 조폭 코미디 영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이와 더불어, 치성(정재영)과 순탄(류승용)과 주중(정재영) 간의 우정을 멜로적 감성에서 접근한 시각도 짚어볼만하다. 물론 그런 의도가 비장미를 유발하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불러온 것도 사실이지만, 장르의 규칙 안에서 이를 의도적으로 배반하고 그러면서 장르의 범위를 넓혀가는 장진 감독의 작업은 장르 영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의 독특한 시도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이정범 감독의 <열혈남아>는 또 다른 위치에 서 있다.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를 제시하는 방법이 조금은 낯선데, 감독은 조폭 세계에 모성애를 슬쩍 끼워넣는다. 그래서 <열혈남아>는 조폭도 사람이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유독 ‘사람’을 강조하는 상황과 대사가 많이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부당한 이유로 재문(설경구)에게 얻어맞은 치국(조한선)이 대뜸 “형님도 건달이기 이전에 사람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상황은 이 영화를 가장 잘 대변하는 대사 중 하나다. 이들도 사람이기에 감정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을 텐데 그 존재가 바로 어머니다.

이를 반영하듯, <열혈남아>는 조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칼 들고 피 튀기며 싸우는 장면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치하는 상황은 이뤄지지만, 눈앞에 표적을 두고도 재문은 어머니 때문에 심정적으로 흔들린다. 그런 탓에 <열혈남아>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을 일차원적으로 똑 떨어지게 설명할 수 없다. 재문만 하더라도, 살인에 목매다는 정신이상자로 보이다가 어느 순간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이고, 패륜아처럼 행동하다가도 효심이 깊은 아들처럼 행동한다. 바로 그런 다중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열혈남아>의 가장 큰 성과는, 조폭영화 사상 유례없는 다차원적인 인물을 창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제 조폭영화의 진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영화의 역사는 곧 장르 발전의 역사다. 특히 범죄영화는 영화사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장르이며,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시대에 맞춰 변화해왔고 또 지역과 나라에 따라 변형된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그래서 같은 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더라도 미국에서는 갱스터와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필름 느와르가, 프랑스는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멜랑콜리한 프렌치 느와르가, 홍콩에서는 남자의 우정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홍콩 느와르가 그 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며 나름대로의 장르로 토착화되었다.

한국의 느와르, 즉 한국 범죄영화의 고유한 장르라고 한다면, 단연 조폭영화라고 할 수 있다. <비열한 거리>에서 잘 묘사되었듯 조폭은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유용한 거울이다. 그 장르엔 한국인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고, 한국 사회의 속성이 숨겨져 있으며, 또한 이것들이 기능하는 메커니즘이 반영되어 있다.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등장했던 것은, 단순히 흥행적 의도 말고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충무로는 조폭을 희화화하고 미화하는 데만 주력했다. 물론 그런 시도는 조폭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경직성이 많이 순화되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학자들에겐 흥미 있는 연구 대상이겠지만 영화 팬들에겐 안타깝게도 장르의 발전을 가로막는 저해요소였다.

장르의 발전은 장르의 규칙을 위반하면서, 혹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한국 조폭 영화의 2006년은 남다른 한 해로 기억될 듯싶다. 코미디에 안주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조폭의 본질이 무엇인지 관찰한 작품이 등장했고(비열한 거리), 색깔 있는 조폭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으며(거룩한 계보),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열혈남아)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변화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현재, 한국의 조폭영화는 진화하고 있다.


(2006. 11. 8. <스크린>)